문장웹진재미나요
소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소설 이혜오 - 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작성일 2023-11-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86상세보기 -
소설 양혜영 - 멜들다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작성일 2023-11-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76상세보기 -
소설 호인 -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작성일 2023-10-2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64상세보기 -
소설 서경희 - 달의 마중
달의 마중 서경희 앙상하고 긴 손가락을 가진 여자가 원 플러스 원 행사 중인 딸기우유 두 개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까뜨린느?” 여자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드니 쇼트커트를 한 여자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사고 싶다고 연락해온 사막여우였다. 지금껏 작가 얼굴을 보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단편 시나리오는 주로 학생들이 과제로 제출하려고 샀기 때문에 구매자들은 얼굴은커녕 실명을 밝히기도 꺼렸다. 사막여우는 달랐다. 작년에 사들인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나리오 팔 거죠?” 사막여우가 계산대에 바싹 달라붙었다. 나는 입을 꾹 닫고 느긋한 척했다. 눈을 내리깔고 사막여우의 손을 훔쳐봤다. 네일아트를 화려하게 한 손톱은 미러볼 조명을 받은 것처럼 반짝거렸고, 가운뎃손가락엔 팥알만 한 진주반지를 끼고 있었다. 나는 흉측하게 변해버린 내 오른손을 슬그머니 계산대 아래로 내렸다. 어렸을 때 화상 사고를 당해 엄지를 제외한 손톱이 전부 녹아버렸다. 운 좋게 절반이 남은 엄지손톱은 하얗게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돈이 적어서 그래요?” “이번 건 제가 찍을 생각으로 쓰는 거라서요.” 시나리오를 팔기 힘들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여지는 남기느라 말끝을 흐렸다. 사막여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콧구멍을 실룩거렸다. 이쯤 되면 칼자루는 나한테 넘어온 셈이다. 미친 듯이 시나리오를 써왔다. 시나리오를 팔아서 모은 돈으로 영화제에 출품할 영화를 찍고 싶어서였다. 영화제에서 수상한다면 큰 경력이 될 것이고 감독으로 데뷔할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단편 시나리오는 못해도 한 달에 한 편은 썼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사막여우한테 팔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없었다. 사막여우는 골이 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궁리하는 듯했다. 사막여우가 까뜨린느, 라고 부르는데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편의점 안이 갑자기 소란해졌다. 나도 덩달아 분주하게 몸을 놀렸다. 바코드를 찍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고 카드 결제를 했다. 담배를 팔고 교통카드를 충전하고 덴마크 요구르트는 원 플러스 원 상품에서 제외된다고 말했다. 손님들이 한바탕 휘몰아친 뒤에 편의점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다음 지하철이 도착할 때까지는 한가할 터였다. 나는 사막여우가 건네준 딸기우유를 쭉쭉 빨았다. “100만 원 드릴게요. 생각해보고 연락주세요.” 사막여우는 마치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던지고는 돌아섰다. 나는 막장 드라마의 악녀처럼 머리를 굴렸다. 5분에서 15분 사이의 단편 시나리오는 딱히 정해진 가격이 없었다. 저번에는 10만 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무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핸드폰 요금을 냈는지 쌀을 사는 데 보탰는지. 교통카드를 충전하느라 없애버렸
작성일 2023-10-2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01상세보기 -
소설 임수정 - 가드니아
가드니아 임수정 죽을 뻔했다. 경자는 들고 있던 이불을 끌어안으며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쿵쿵 울렸다. 아파트 9층에서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경자는 제멋대로 사지가 뒤틀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 갈 자신을 상상했다. 숨이 가빠왔다. 세상은 고요했다. 하루가 멀다고 악다구니를 치는 옆집 여자의 목소리도 기침을 하는 노인도 캥캥거리는 강아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바람이 불어와 이마로 내려앉았다. 그대로 한참 동안 이불을 껴안고 숨을 쉬었다. 이불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가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가드니아. 경자는 향기에 붙은 이름을 되뇌었다. 가드니아. 낯선 음절과 짐작되지 않는 뜻. 경자는 가드니아라고 다시 중얼거렸다. 하얀 홑이불은 털면 털수록 치자꽃 향이 나는 듯했다. 경자는 늘 같은 향의 섬유유연제를 썼다. 가드니아였다. 마트에서 치자꽃이 그려진 섬유유연제 라벨을 보고 반가워했다가 가드니아라는 이름을 읽은 후 어리둥절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하얀 꽃잎에 노란 꽃술은 경자가 아는 치자꽃인데 왜 가드니아일까 하고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보았으나 희석되지 않은 향기는 역하기만 했다. 세탁기에 넣어 빨래를 돌리고 나서야 경자는 고대하던 향기를 맡아 볼 수 있었다. 그 향기는 경자가 기억하던 치자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았다. 처음엔 베란다 밖으로 팔만 내밀어 조심조심 이불을 털던 경자는 아래층 여자를 떠올렸다. 먼지가 고대로 우리 집으로 들어오잖아요! 몇 달 전 새로 이사 온 아래층 여자는 지난번 경자가 이불을 털었을 때 집으로 찾아와 난리를 쳤다. 경자는 위층에서 아무리 이불을 털어 대도 한 번도 그 먼지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후로 경자는 자주 창가에 앉아서 창문으로 무언가 들어오나 살폈다. 한 번은 윗집 어딘가에서 밖으로 떨어 버린 듯한 모래가, 또 한 번은 오리털 같은 하얀 것이 살랑살랑 아래로 떨어지는 걸 보았다. 경자는 몸을 내밀어 그 털이 하늘로 날아가는지 아래로 떨어지는지 살폈으나 곧 사라졌다. 경자는 먼지를 더 멀리 날릴 심산으로 몸을 조금 더 밖으로 기울였다. 여름 아침 하늘에서 달콤한 향기가 불어왔다. 펄럭펄럭 이불이 나부낄 때마다 향기는 더욱더 진해졌다. 터는 팔에 힘이 붙었다. 경자는 무엇에 홀린 듯 더욱 몸을 빼고 팔을 휘둘렀다. 하얗게 나부끼는 이불과 향기가 경자를 취하게 했다. 그러다 휘청, 하며 균형을 잃었다. 가까스로 난간을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경자는 이불을 끌어안고 기다시피 거실로 들어와 누웠다. 채광이 좋지 않은 거실은 어두웠다. 죽은 벌레가 유리 안으로 쌓여 얼룩덜룩한 거실 등이 보였다. 경자는 자주 그 모양이 바뀌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 모양은 남편이 퉁박을 주던 자신의 삐뚤빼뚤한 글씨 같았다. 자신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볼 수 없는 글자. 가슴이 조여들고 자꾸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작성일 2023-10-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18상세보기 -
소설 고수경 - 다른 방
다른 방 고수경 시월의 마지막 날 밤에 소희는 현관 신발장의 맨 위 칸에서 열쇠를 발견했다. 사 개월 전 이사 온 이후 들여다본 적 없는, 간이 의자를 딛고 올라서야만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 황동색 원형 문고리 네 개를 넣어 두다가 손끝에 금속 재질의 작고 납작한 물건이 스쳤다. 소희는 열쇠라는 물건 자체를 아주 오랜만에 보았다. 아마 연호의 것도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는 열쇠로 잠그는 무언가가 없었다. 소희는 부엌으로 가서 연호에게 열쇠를 보여 주었다. “저 방 열쇠인가?” 연호는 설거지를 하면서 복도 너머를 눈짓했다. 소희는 부엌을 나와 복도를 지나 현관 맞은편으로 갔다. 연호가 고무장갑을 낀 채로 따라왔다. “뭐 해?” “맞는지 보려고.” 문고리의 구멍에 밀어 넣은 열쇠는 끝까지 들어가 맞물렸다. 그대로 비틀어 잠긴 문을 여는 대신 소희는 주아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 사이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호의 고무장갑에서 떨어진 물이 복도에 점점이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연호가 설거지를 마치는 동안 소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전화를 받지 않는 주아에게 카톡을 보냈다. 열쇠를 찍은 사진도 첨부해서. 그러다 습관처럼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커다란 성당 앞 광장의 분수대에 선글라스를 쓴 주아가 걸터앉아 있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소희는 검지와 중지로 화면 속 사진을 늘려 보았다. 그곳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라는 건 십 분 뒤에 알게 되었다. 주아는 쾌활한 목소리로 일주일 뒤에 귀국해서 열쇠를 찾으러 가겠다고 말했다. 통화가 끝난 뒤 소희는 현관에 간이 의자를 딛고 올라서서 신발장 맨 위 칸, 네 개의 문고리 옆에 열쇠를 넣어 두었다. * 소희와 연호는 주아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희는 대학 졸업 이후에도 간간이 주아를 볼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로필 사진이 바뀐 친구를 친구 목록의 상단에 올려 두는 카톡의 서비스가 주아의 순간순간들을 보여 주었다. 새로운 사진 옆에 떠 있는 빨간 점이 사진을 눌러 보게 했다. 눌러 보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 빨갛고 작은 점이. 소희는 모텔에서 연호가 씻는 사이 침대에 누워서 주아의 사진을 보곤 했다. 그럴 때면 검지와 중지로 사진을 늘려 보며 중얼거렸다. 여기는 어디일까. 간혹 뒤에 찍힌 유명한 건축물을 알아볼 때도 있었다. 에펠탑이나 루브르박물관 같은. 소희는 파리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공식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A시와 B시에도 가 보지 않았다. 복지와 정책부터 문화 축제의 일정도 줄줄이 읊을 수 있고 유원지의 주차장 요금까지 꿰고 있지만 축제의 길거리 음식은 어떤 맛인지, 그 근처의 도로가 얼마나 막히는지는 몰랐다. 그래도 매번 포스팅을 쓸 때마다 아름다운 도시 A시에 놀러 오세요, 라는 말을 꼭 썼다. 가끔 댓글에 모르는 질문이 달리면 주무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A시 주무관은 활달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작성일 2023-10-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25상세보기 -
소설 이은정 - 유령 가족
유령 가족 이은정 남편이 진짜 죽을 줄은 몰랐다. 진짜 죽을 작정인 사람들은 죽고 싶다는 말을 흘리고 다니지 않는다. 유서를 사표처럼 재킷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사람들은 정작 그것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주의한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을 때나 취기에 담배 개비를 꺼내 들 때와 같이 마침내 혼자일 때만 유서의 무게를 직감한다. 남편의 옷에서 유서를 발견할 때마다, 그 내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안심했다. 두서없이 쓴 일기 같았다. 스스로 무게를 감지하고 가슴팍에 넣어 둔 한때의 다짐에 다시 손을 댈 만한 무게가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걱정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자살할 위인이 못 되었다. 어쨌거나 남편은 죽었다. 팬티만 입은 채로 어느 아파트 베란다에서 추락하였다. 우리 집이 아닌 다른 아파트 주차장에서 속옷만 입고 눈은 희멀겋게 뜬 상태로 발견되었다. 영안실에 놓인 남편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 슬픔보다는 깊은 절망이 먼저 왔다. 죽을 작정이었으면 나와 결혼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내가 어떤 가정을 꿈꿔 왔는지, 완벽하고 이상적인 가정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였는지 남편도 알고 있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무너지고 말았다. 남편이 없는 가정은 완벽하지 않았다. 남은 가족들은 모두 쓸모없는 조각이었다. 도대체 남편은 왜 죽었을까. 침대 맡에서 수면제 한 알을 이제 막 삼킨 자정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가 자정 넘어 전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불길함이 감돌았다. 수화기 너머에는 다급한 남성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남편이 12층에서 추락하여 응급차에 실려 가는 중이라고 했다. 함재훈. 내 남편이 맞는지 물었다. 그런 착오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물었다. 위독하다는 단어가 반복되었고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말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전화기 스피커를 찢었다. 위독하다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산다는 말인지 죽는다는 말인지 헷갈렸다. 다급한 걸 보면 죽음 쪽으로 기울었을까. 멍하니 앉아 이케아 조명 아래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 아래 수면제 봉투가 놓여 있었다. 스틸녹스 10mg. 욕실에 서서 차가운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절기상 겨울은 지났지만, 아직 봄꽃이 피지 않은 3월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을 뒤집어썼다. 어금니가 달달거리는 소리를 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수면제는 곧 내 신체 전반에 제 약효를 과시할 것이었다. 어떡해서든 정신을 차리고 운전을 해야 했다. 위독하다는 말은 어떤 조건에서든 사람을 움직이게 했다. 남편이 옮겨지고 있다는 병원은 인천이었다. 인천에는 왜 갔을까. 죽으러 갔을까. 머리카락의 물기만 대충 닦아 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 가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차에 앉아 몸의 상태를 가늠했다. 졸리지 않았다. 졸려도 가야 했지만, 약효가 달아난 기분이었다. 수면제는 신경계에 작용하는 약이니, 이렇게 큰 충격이 왔다면 효능을 잃을 수도 있지 않을까. 괜찮을 것 같았다. 괜찮아야 했다.
작성일 2023-10-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17상세보기 -
소설 황윤정 - 허들링
허들링 황윤정 비가 쏟아지던 목요일 저녁,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휴대폰에 찍혀 있는 ‘이모’라는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문득 『보바리 부인』을 쓴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떠올렸다. 그는 특정한 무언가를 가리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을 주장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이론을 곰곰이 되짚다가 생각했다. 만약 그가 옳다면, 내가 우리 이모를 부를 때 이모라는 낱말이 아닌 다른 낱말로 불러야 하는 게 아닐는지. 이모보다 훨씬 더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존재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는지. 여태 단 한 번도 이모라는 호칭이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었는데 그날따라 ‘이모’라는 글자를 보고 있자 상당히 마땅찮았다. 나의 이모인 도선주 여사가 이모라는 호칭을 듣기에 부족한 탓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모라는 호칭은 원칙적으로는 엄마의 언니나 여동생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조금 범위를 넓힌다면 엄마의 친구나 아니면 아예 처음 보는 식당 아주머니 등에게도 쓸 수 있는 말이기도 해서, 그 호칭 자체의 깊이가 도선주 여사를 담아내기에 상대적으로 얄팍하다고 여겨진 탓이었다. 그렇다 한들 이모를 대체할 어떤 표현이 쉽게 떠오르지도 않았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말문이 트기 시작할 무렵부터 엄마보다 도선주 여사를 볼 일이 더 많았기에 엄마, 엄마, 하는 것보다 이모, 이모, 하는 게 익숙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삼십 년 가까이를 이모, 이모, 하다가 갑자기 아예 다른 호칭을 생각해 내는 건 아무래도 어려웠다. 게다가 우연히 어떤 괜찮은 호칭이 떠올라 앞으로는 그렇게 부르겠다고 선언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 새로운 호칭이 입에 밸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도선주 여사의 얼굴만 보면 습관적으로 이모라는 말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컸고 그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한동안, 아니 어쩌면 앞으로 쭉, 도선주 여사를 대할 때마다 긴장한 상태를 유지해야 할지도 몰랐다. 은근히 귀찮고 성가실 게 틀림없었다. 그냥 이모라고 부르는 게 그나마 가장 나은 선택일지도. 어차피 도선주 여사는 우리 엄마의 피가 섞인 진짜 친동생이기는 했으므로 사전적 의미를 따지자면 이모가 맞기는 맞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순간에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는 ‘이모’라는 글자를 바꾸고 싶어서 견디기 어려웠다. 버스 창문에 세차게 닿아 부서지는 빗줄기가 만들어 내는 일종의 비명과도 같은 빗소리를 계속 듣고 있어 더 그랬을 수도 있었고, 혹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 여름의 남은 열기나 눅눅한 버스 내부 곳곳에 스며든 사람들의 들큼한 땀 냄새가 거슬려서 더 그랬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당장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조급한 심정에 사로잡힌 나는 일단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이라도 임시방편으로나마 바꿔 놓자, 하며 편집 버튼을 누르고 들어갔다. 과감한 두 번의 터치로 이모라는 두 글자를 서둘러 지워버리고선 이번에는 앞선 터치와 사
작성일 2023-10-2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24상세보기 -
소설 김진성 - 젤푸스
젤푸스 김진성 “이동 시작합니다. 예상 도착시간 15시입니다.” 설렘. 이 짧은 보고를 설명할 하나의 단어. 기다려 마지못해 멀게만 느껴진 오늘과 드디어 만났다. 드디어 계도사(啓導士)라니. 유독 습도가 높은 여름이지만 나는 전혀 덥지 않다. 집을 나서기 전, 현관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칼날처럼 주름 잡힌 바지와 긴소매 셔츠, 나의 섬세한 손을 보호할 장갑과 길을 밝혀 줄 신발까지. 온통 새하얗게 맞췄다. 거기에 계도사의 상징인 갈색 넥타이와 손에 든 서류 가방까지. 너무나 완벽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잠시 후 이 모습을 보게 되실 본부의 계도장(啓導長)님들께서도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 나는 거울 속 나에게 윙크를 날린 뒤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식으로 지어진 숙소 아파트에서 바라본 하늘과 땅은 진한 푸른색과 초록색으로 아름답게 분열돼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절경이 아닐까? “지금 출발?” 초록빛 들판에 잠시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옆집에 사는 동기가 집에 들어오고 있었다. 진한 푸른색의 운동복과 낡은 슬리퍼를 신고 있는 모습을 보니 요 앞에서 생필품을 구매하고 돌아오는 길 같았다. “어.” 나는 들뜬 마음을 조금 억누르며 이 짧은 대답을 했다. 뭐랄까. 미안한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 직후 녀석의 눈을 봤다. 역시나 거기엔 진한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마치 그의 얼굴과 그 주변 풍경의 채도가 조금씩 낮아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해했다. 녀석은 나처럼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그 힘든 교육생 기간을 6개월이나 더 버텨야 했으니. “못 보던 가방이네?” 그의 시선이 나의 갈색 서류 가방을 향했다. “아, 이거 2년 전에 세례받았을 때 산 가방.” “천연?” “아니, 그냥 인조가죽. 너도 알겠지만 요즘은···.” “잘 다녀와.” 녀석은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숙소로 들어갔다. ‘잘’의 의미가 전혀 섞여 있지 않은 인사말과 함께. 사실 녀석은 교육 기간 내내 나보다 성적이 좋았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도움을 청했고 그때마다 녀석은 나를 불쌍히 여겼다. 아마 그런 이유로 녀석은 이 상황을 견디는 것이 힘들 것이다. 그래도 시험 보기 전날엔 꼭 둘 다 시험에 합격해서 같이 젤푸스 영업 전도사가 되기로 결심했었는데. 나도 마음이 좋지만은 않다. 엘리베이터를 탄 뒤, 곧바로 1층에 도착했다. 햇볕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다. 이럴 때 자가용 차라도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지하철역까지 걸어갈지 택시를 부를지 고민했다. 고민의 이유는 내 계좌의 잔고. 공막(共幕)에서 매달 보내주시는 이번 달 생활비는 이미 소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무리해도 되겠다 싶어
작성일 2023-10-2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49상세보기 -
소설 장마리 - 팬티 인문학
팬티 인문학 장마리 프롤로그 ‘20**년 상반기 인턴 직원 이너웨어 디자인 평가회’ 현수막이 거치되었고 마네킹이 세워졌다. 마네킹에 인턴들이 제작한 이너웨어를 입혔다. 검은 천을 씌워 디자인은 아직 공개하지 않았다. 오전 10시가 되자 언더웨어, 파운데이션, 란제리 부서의 팀장이 회의실에 입장했다. 검은 천이 벗겨지고 상품이 공개되었다. 한 시간 후 결과 발표였다. 발표 자리에 부장, 평가를 받는 세 명의 인턴, 인턴의 사수, 그 외 팀원이 참석했다. 발표는 선임 팀장이 했다. “속옷의 기원설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아담과 이브가 수치심에 입었다는 창세기 설과 수치심 때문에 입은 것이 아니라 속옷을 입음으로써 아무것도 안 입은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다는 반대의 설인데, 모두 수치심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잠시 말을 멈췄다. 이미 발표한 두 인턴과 그 소속 팀원들이 분위기를 산만하게 하고 있었다. 분홍의 소속 란제리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 너무들 하시네! 우리 팀 발표 중인데······.” 헤라의 정 직원이 되려면 상․하반기 디자인 평가를 거쳐야 했다. 상반기는 팀장들 점수가 후했다. 평가 과제도 선배들이 치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각자가 지역이나 대상을 선정하고 시장 조사하여 그 표본으로 디자인하라.’였다. 분홍이 선택한 지역은 동대문 도매상가였고 대상은 도소매업을 하는 중장년 여성들이었다. 사수가 동대문 속옷 도매상가로 실사를 나갈 때 데려갔다. 헤라의 재봉을 맡길 하청 업체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연 매출순으로 다섯 곳을 선정했다고 했다. 제일 마지막에 들린 곳이 이오였다. ‘란제리 도소매점 이오’라고 A4 크기의 흰 아크릴 간판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이곳은 속옷의 기능과 디자인, 용도를 구분하지 않고 란제리로 통칭해서 사용했다. 분홍이 봉제라면 남한테 빠지지 않았지만 나설 자리가 아니라서 사수가 건네는 물건을 챙겨 가방에 넣고 그 가방을 어깨에 메고 따라다녔다. 분홍이 보기에 이오가 브라의 핵심 바느질인 쓰리 스티치와 이본침, 편이본과 편삼본의 봉제가 제일 깔끔했고 어깨끈과 옆선, 뜯어짐을 방지하는 마무리 바느질의 빠텍도 훌륭했다. 하지만 사수는 매출이 가장 높은 업체를 시장조사 결과보고서에 넣어 제출했다. 분홍은 동대문 속옷 도소매 상가의 중장년 여성 상인 100명에게 설문지를 돌리고 다음 날 수거하러 갔다. 설문지를 작성해 준 사람은 15명뿐이었다. 이오 사장은 신상품을 마네킹에 입혀 놓고 매무새를 정리하다가, 이웃 매장에서 쫓겨나 한숨을 쉬는 분홍을 발견했다. 한 달 전에 헤라의 직원을 따라왔던 인턴이 틀림없었다. “저기요!” 분홍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순과 눈이 마주치자 쪼르륵 달려갔다
작성일 2023-10-1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3 댓글수 4 조회수 681상세보기 -
소설 이아타 - 스타 무인텔
스타 무인텔 이아타 몸통과 연결된 밧줄의 걸림쇠를 풀면서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르스름하던 하늘이 연회색을 지나 검어지고 있었다. 어두워지는 건 순간이었다. 검은 하늘이 크고 묵직한 바위처럼 느껴졌다. 머리에 쓴 랜턴에서 밝은 불빛이 퍼져서 일몰의 속도를 가늠하지 못했다. 잠시만 더 하자고 생각한 게 한참이 지났다. 광케이블선 인입을 마무리 지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신도시 아파트 한 블록이 그의 몫이고 조만간 일을 끝내야 했다. 다음 주부터 입주가 시작되고 주말에 비 예고가 있어서 늦장을 부릴 수도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각을 확인했다. 여섯 시에서 십오 분이 지났다. 관리실에서 독촉 전화가 이내 걸려 올 것이다. 마무리 설비를 점검하는 인부들과 인테리어 작업 중인 사람들은 저녁 여섯 시 전에 이곳을 나가야 했다. 진성은 높은 전신주에서 안전장치를 하나씩 거두며 천천히 내려왔다. 어두울 때는 신중해야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오늘따라 발밑이 어두웠다. 밑창이 두툼한 작업화를 신은 발바닥이 사다리 계단을 디뎌도 허공을 밟는 기분이었다. 알루미늄 계단을 한 칸 내려올 때마다 어둠이 한 칸씩 깊어지는 듯했다. 지나간 불운이 그렇듯 알지도 모르지도 않는 사이에. 땅에 내려서자 생수병을 꺼내 물을 마시고 안전모의 랜턴 빛을 바닥에 비췄다. 벗겨진 피복과 장비들이 말라비틀어진 벌레와 짐승의 가죽 같았다. 그다지 목이 마르진 않았다. 처음 일을 배울 때 선배 기사를 따라 작업을 시작하고 마칠 때 긴장하면 물을 마시던 게 습관이 돼 버렸다. 해가 저물면서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를 지나갔다. 사람들이 봄이라고 말해도 봄은 아직 멀었다. 언제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노래의 후렴구 같은 게 봄이었다. 앞 소절은 긴가민가하고 중간이 불쑥 생각났다가 후렴구만 선명한 노래, 요즘의 봄이 그랬다. 혼자가 된 후 그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무얼 잘못했나. 한순간이라도 나를 사랑한 적은 있을까. 부지중에 입에 붙은 후렴구처럼 처량함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운전 중에도 밥을 먹다가도 심지어 잠을 자다가도 떠올랐다. 진득한 후렴구를 털어 내려고 그는 주말과 야간에 인터넷 강의를 듣고 학원에 다녔다. 사람들이 유망 직종이라고 말하는 것을 수강해서 수업 일수를 채우고 때가 되면 시험을 치렀다. 어디에 쓰일지 막연해도 틈틈이 여러 개의 자격증을 땄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성향을 발견했다. 자신은 말을 많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 가능한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래서 종일 혼자서 말없이 손을 사용하는 작업에 몰두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성향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내면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처음엔 목공 일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전기 기사 자격증반에서 알게 된 사람에게 광케이블 설치 기사에 대해 듣고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냈다. 내일은 광케이블 인입을 끝내고 통신단자함으로 포설까지 마쳐야 했다. 장갑을
작성일 2023-10-1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57상세보기 -
소설 김명진 - 아파트 열전
아파트 열전 김명진 단언컨대 그녀는 적이었다. 거친 언어와 쏘아보는 눈, 흐트러진 머리와 집시 옷차림. 시도 때도 없이 보내는 막말 문자. 나는 그녀에게 2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을 위해 그러지 않았으니까. 몸을 웅크리거나 숨지 않고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했으니까. 오늘 아침 현 동대표회장을 아파트 정문에서 만났다.  ̄아, 회장님 그때 노민영이를 감옥에 넣었어야죠. 지금도 시청에 민원 넣고 저를 경찰서에 고소했습니다.  ̄하하하, 잘 이겨 내세요. 우리 아파트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좀 참으세요. 8년 전 나와 노민영은 서로 알지 못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이름을 들은 적도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그 당시 공동주택관리법이 바뀌면서 아파트 동대표들은 2년 임기에 연임만 가능하게 되었다. 덕분에 터줏대감으로 군림하던 동대표들이 무더기로 탈락했다. 그건 정책의 좋은 변화였는데, 나에게는 최악이 되었다. 아파트 입주 시부터 같이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나를 동대표로 추천했다. 내가 직장 일로 힘들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는 아파트동대표회장을 여성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이나 TV 뉴스에 아파트 관련 비리가 많이 나오는데 사건을 부드럽고 공정하게 해결할 사람은 여성이라는 것이다. 며칠 후 현 아파트 동대표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502동 동대표를 지원한 사람이 최근 6년간 우리 아파트에 대한 민원 접수를 시청과 청와대 등에 100건이 넘게 한 사람이라며 그녀를 상대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기적인 삶을 산다고 은근히 나를 책망하고 공동체를 위해서 일 좀 하시라고 간곡히 당부하고, 입주한 지 8년 동안 관리사무실 한번 안 가 본 나를 무심하다 나무라고…. 알고 지내던 사람마다 전화해서 나오라고 당부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지원서를 덜컥 내밀었다. [Web 발신] 조사를 위해 2015년 9월 20일 2시 출석 바랍니다. 출석이 안 될 시 수배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동민경찰서 수사과 경제2팀 수사관 이영식 뭐지? 스팸 문자가 이제 경찰서까지 사칭하나? 나는 혹시나 하고 인터넷으로 동민경찰서를 검색했다. 홈페이지에 있는 조직도에 들어가자 수사과에 경제2팀이 있었다.  ̄수사과 경제2팀 이영식 수사관님 부탁드립니다.  ̄네, 이영식 경위입니다.  ̄9월 20일 출석하라는 문자를 받았는데 잘못 보낸 건가요?  ̄고소장이 접수되었습니다.  ̄제가요? 무슨 일로요?  ̄같은 아파트 노민영 씨가 낸 고소장입니다. 나는 관리소장에게 지금 갈 테니까 6시가 넘어도 잠깐 기다려 달라고 전화했다. 어떻게 지하철을 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관리소장은 들어오는 나를 보고 일어섰다.  ̄노민영이가 관리사무실에 왔었어요? 지금 경찰서에서 전화 받고 바로 오는 길이에요. 저 고소당했다고.  ̄회장님을요? 얼마 전에 와서 회의록, 회계전표, 공문을
작성일 2023-10-1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27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