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재미나요
수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수필 류미월 - 「스케치하는 시간」외 1편
스케치하는 시간 류미월 권태는 새로움을 갈구한다. 그렇고 그런 날이 계속될 때 훌쩍 집을 떠나 낯선 여행지를 걷다 보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여유가 생긴다. 지루한 ‘코로나 19’ 마스크 시대와 어제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갈 무렵 문뜩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림 그리기가 생각났다. 유화나 수채화보다는 기초를 다지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연필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각사각 슥슥 연필심이 도화지를 채워나가는 소리가 좋다. 사진보다 섬세할 정도로 잘 그리는 중급반 동호인들을 볼 때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가로, 세로줄 긋기를 통해 감각을 익히고 H, 2H, 3H ... 6H, B, 2B, 3B ... 6B 연필을 사용해서 명암을 조절한다. 원기둥 그리기와 머그컵 그리기까지 끝내고 나니 슬슬 재미가 붙으며 오그라들었던 어깨가 펴진다. 시간이 날 때면 주방과 거실에 있는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본 스케치를 한다. 길을 가다가 야생화를 보면 정성 들여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하나씩 불러내서 스케치북에 그려본다. 나 스스로 ‘자뻑’하며 만족하는 그림이 나왔을 때의 기쁨은 글 쓰는 맛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오늘은 머그컵과 친해지는 날이다. 머그컵을 좌우대칭 정확히 파악한 후 비율에 맞게 스케치하고 짙은 색에서 중간색, 흐린 색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스케치를 채워나간다. 가로세로 명암을 넣으며 마지막 완성에 다다를 때는 숨소리도 죽여가며 몰입하게 된다. 머릿속을 하얗게 도화지처럼 비우고 오로지 스케치하는 사물만 생각하며 그린다. 하늘에 뜬 흰 구름처럼 평화로운 마음 상태에서 집중 몰입할 때의 순간이 좋다.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살림을 하다가 여유가 날 때 차 한잔하며 사각의 백지를 마주하는 순간은 한여름에 순백의 눈 위를 걷는 것처럼 청량하고 순수해지고 차분해지는 나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림을 잘 그려보겠다는 욕심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운 부분은 더욱 진하게 하나의 빈틈이라도 있을까 봐 여백을 꽉꽉 채우게 된다. 기초 작업인 구성이 잘못됐을 때는 미련 없이 싹 지우고 다시 그려야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내가 그린 게 최고인 것 같고 틀림없어 보여서 한번 그린 건 쉽게 지우지 않게 된다. 안쪽부터 채워나가다 보면 기본 구성이 잘못되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필로 밀도 있게 채워나가는 것보다 잘못 그린 부분을 지우개로 제대로 지우는 것이 최고의 소묘라는 걸 스케치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어디 스케치 뿐이랴. 우리의 삶도 자꾸 비워야 새것을 받아들이고 머릿속도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면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버려야 새것을 받아들일 공간이 커지는 법 아니던가. 스케치하는 시간은 힐링과 치유의 시간이 된다. 기분이 불쾌하고 속상하고 슬펐던 감정이 스케치하는 동안 상처가 아물 듯 기분이 좋아진다. 급하고 덜렁거리는 조급함이 산사(山寺)에서 참선을 하듯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스케치하면서 그림을 완성
작성일 2023-11-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20상세보기 -
수필 류미월 - 눈 오는 날의 기호
눈 오는 날의 기호 류미월 간밤에 바른 자세로 잠을 못 자고 뒤척인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뜨자 등 쪽이 불편하다. 이럴 때면 인근에 있는 의료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건강 카페에 가곤 한다. 따뜻한 자리에 누워서 척추 라인을 온열로 집중 관리받고 나면 통증이 줄어들고 온몸이 개운해진다. 체험 비용은 차 한 잔을 주문하면 된다. 체험을 마치고 넓은 창가 탁자에서 차 한잔하는데 정월의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달리는 자동차 위에도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여인의 어깨 위에도 꿈꾸는 푸드트럭 위에도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가 갓 구운 고소한 빵 내음을 흩뿌리고, 한쪽 하늘에선 깃털 같은 함박눈이 춤추듯 내려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비릿한 슬픔을 뿌리고 간다. 어느 정도 함박눈이 퍼붓고 난 하늘이 맑아졌다. 하늘도 먹먹한 제 무게를 감당 못 할 때는 펑펑 소리 내 울듯 함박눈이 되어 내리는가 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는데 묵은지 같은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친구도 눈 오는 날 친구가 그리웠나 보다. 느닷없이 먼 옛날 함박눈이 내리던 날 퇴근 후 명동거리를 빙빙 배회하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20대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친구와 명동 골목 식당에서 낙지 덮밥을 먹으며 사는 게 매운 건지 음식에 고춧가루 때문인지 눈물 반 콧물 반을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고달픈 삶을 서로 토닥이며. LP 판을 틀어주는 음악다방 구석진 자리에서 신청 곡을 메모지에 적어 DJ 박스에 건네곤 그 곡이 나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하며 듣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추억에 빠졌다가 의료기 체험 카페 문을 밀고 나서려는 순간 손을 힐끗 봤다. 거칠고 주름진 손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거리를 걸었다. 눈은 먼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오다 사선으로 흩날리다 소리 없이 내린다. 가로수와 고층 빌딩과 벤치와 로드킬 당한 생쥐 몸 위에 소복소복 말없이 이불을 덮어주듯 내린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웠던 사람의 얼굴도 불현듯 스쳐 간다. 눈은 묘한 마력이 있다. 눈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멍하게 ‘눈 멍’을 때리고 정지된 화면처럼 있으면 머리를 옥죄던 근심 걱정이 지우개로 쓱쓱 지운 듯 잠시 사라진다. 요즘 들어 집안 살림살이에서도 잘 안 쓰는 그릇이나 옷과 책 그리고 자잘한 살림살이를 큰맘 먹고 버리고 있다. 버리고 나니 공간이 넓어지고 마음마저 뻥 뚫린 듯 시원해진다. 주방을 드나들 때면 그릇장에 남겨진 그릇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집은 좁다고 투덜대며 넓혀갈 생각만 할 일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처분하고 나서 집이 몇 평은 넓어진 느낌이다. 중년에 접어든 삶은 무조건 더하기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때로는 빼기를 잘해야 편안한 삶이 된다는 걸 공감하고 있다. 되지 않을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에너지가 방전되고 화가 깊어져서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된다. 요즘 들어 아니다 싶은 것들은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건이
작성일 2023-11-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19상세보기 -
수필 공화순 - 「상처가 주는 울림」외 1편
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작성일 2023-11-1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19상세보기 -
수필 공화순 - 감정수업
감정수업 공화순 “언어는 어떤 언어나 고요한 자리에 놓고 위하기만 하는 미술품이 아니다”라고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글이 생각난다. 그동안 너무 오래 잊고 살아온 이 말은 문득, 내 언어의 표현에 의문을 가져다준다. 늘 속에 가두고 밖으로 끌어내지 못한 숱한 내 감정의 말들이 밖에서 소비되는 대신 안에서 곪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딸애의 병원에 동행하여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통증의 정도를 10단계로 나눠 표정과 함께 구분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통증이 어느 정도인가요? 아주 조금, 이 만큼?” 조절 레버를 움직이며 의사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환자에게 묻는다. 과연 통증의 정도를 정확히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통증의 단계를 몇 단계로 말할 수 있다면 내 감정의 단계도 말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미처 들었다. 그동안 나는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고, 많이 감추며 살아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은 살아가며 마치 사소한 물건을 쓰듯 언어를 사용한다. 상황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면서도 감정에 대해선 필요한 만큼 내어 쓰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어쩌면 내가 필요에서 내었다가 곧 불필요에서 닫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아, 진짜 화가 나려고 하네.”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 말 한마디는 곧장 상대에게서 외려 두 배의 무게를 얹은 한마디로 되돌려 받았다. “야, 너도 화낼 줄 아니?” 그 순간, 속에서 억눌린 감정들이 나를 책망하는 듯했다. 서러웠다. 감정 표현에는 영 서툴지만, 지금까지 글로 대신하지 않았냐고 위무해 봐도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는다. “나는 우울해. 음, 지금은 3단계 정도?” 소리 내어 말하곤 피식 웃어버린다. 글을 쓰다 보면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애를 먹다가 가장 근접한 말로 대체할 때가 더러 있다. 지금 내 감정이 꼭 그렇다. 엉거주춤 감정을 추스르는 일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을까. 또 눈물을 삼키고 참아가며 애써 삭히려 한 적은 또 얼마던가. 그럴 때 누구에게라도 너무 억울하다, 너무 슬프다며 감정을 내어놓았더라면 조금은 후련했을까? 감정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영어로 ‘이모션(emotion)’의 ‘e’는 에너지를 뜻하고 ‘motion’은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니 감정은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드는 셈이다. 감정의 방향을 잘 잡아준다면 굉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 나는 그동안 감정의 동물인 것을 애써 무시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성적인 힘에 많이 의존했다. 그러다 보니 자칫 건조한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작정하고 감정수업을 해본다. 날이 꾸물대니 우울하군. 전화할 사람이 생각나지 않으니 조금 외로운 건가? 외로움 2단계! 이 정도는 참아야지. 어쩌면 감정의 표현이 내게 그리 절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눌러 참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성일 2023-11-1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30상세보기 -
수필 김태형 - 「크로아티아의 진흙 그릇」
크로아티아의 진흙 그릇 김태형 아내의 첫 시집 교정지를 보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30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에 묶어내는 첫 시집이니 나에게도 교정지를 슬쩍 내민다. 파격과 거듭나려는 부정의 정신이 늘 시대를 압도하고 있으니 시에서 딱히 정석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그게 시의 운명이다. 장르 자체마저 넘어서려는 게 시의 태생적인 특성이니 딱히 규범이나 문법을 들이대며 살필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읽는 사람의 감성이나 취향에 넌지시 기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평가를 바란다면 그렇다. 좋고 싫은 것이야 취향의 문제일 뿐 평가에 이르지는 못한다. 시가 꼭 어떤 평가를 받아야만 할까. 그래도 평가의 기준이 있다면 이 시가 지금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대부분 자기의 작품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과연 지금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30년 가까이 미발표작만을 모아놓고 있었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한 지붕 아래 살아도 부부는 결국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다. 함께 살아오며 서로 닮아간다지만, 그래도 전혀 다른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생각도 언어도 전혀 다르다. 오히려 그런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 더욱 궁금하리라. “만지면 만질수록 부서지는 진흙 도자기를/ 크로아티아 어느 좁은 골목에서 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손잡이가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저 ‘진흙 도자기’는 며칠 전에 내가 쓰레기봉투에 버렸다. 교정지를 읽다가 잠깐 얼이 빠진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게 뭐지? 다시 읽어보았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서지는 진흙 도자기’는 식탁 뒤쪽의 커다란 서랍을 가진 인더스트리얼 가구 위에 놓였던 것이다. 이제는 만지지 않아도, 그대로 세워만 두어도 마른 진흙 가루가 떨어졌다. 마치 촛불처럼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서 집 안 청소를 하다가 내가 버렸다. 식탁 주변이 비좁아서 가구 배치를 바꿀 때 싱크대 위턱 좁은 받침대 위로 옮겨놓았다. 그 자리에서는 설거지할 때마다 마른 진흙 가루가 떨어져 쌓이는 게 더 잘 보였다. 가루가 떨어져 부서지는 그릇을 장식용으로 놓아두기에도 맞지 않은 것 같아서 생각난 차에 그대로 냅다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직 나는 그 쓰레기봉투를 버리지 않았다. 딸이 새 쓰레기봉투로 갈고 나서 버리지 않고 옆에 그대로 묶어 두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달려가서(달려가기에는 거리가 짧기는 하다) 묶어놓은 쓰레기봉투를 조금 얼빠진 듯이 풀기 시작했다. “있다!” 그대로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오래된 진흙 그릇. 유약도 바르지 않고 맨 진흙을 빚어서 구웠는지 마른 진흙 가루가 떨어졌다. 큰일 날 뻔했다.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이 순간에 시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두고두고 오래도록 어디 말도 못하고 남몰래 후회했을 것이다. 이제야 시를 읽게 된 것도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간 참
작성일 2023-11-0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75상세보기 -
수필 김태형 - 청앵(聽鶯)
청앵(聽鶯) 김태형 어느 날인가 간송미술관에 간 적이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인근 수목원이나 공원, 미술관 등으로 가끔 외출하곤 했다. 바깥바람 좀 쐬고 와야 좁은 집구석에서 또 한 주를 보낼 수 있으리라. 나도 숨 좀 쉬어야겠기에 미술관은 빠질 수 없는 곳 중 하나였다. 마침 이 열리고 있었다. 몇 년에 한 번 잠시 문을 연다는 말에 솔깃해서 온 가족을 데리고 성북동으로 향했다. 당시 장승업은 영화 으로 뒤늦게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국화’라면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 외에는 잘 모른다. 어릴 적 우표수집에 빠져 있었던지라 이들의 그림 몇 점은 꽤 오래 들여다보곤 했지만, 유명한 그림 외에는 한국화에 대해 문외한인 것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라면서 모던한 경향을 따르던 터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가 고졸한 미학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나이가 들어가기 시작해서일까. 오래된 것들에 눈길이 간다. 언젠가 소설을 가르치시던 선생이 강단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도자기가 진짜인지 가까인지 구분하는 방법 알아요?” 진품과 가품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보통은 뭘 알아서 라기 보다는 느낌으로 판단하기 마련이지 않는가. 식견이 없을 때 그렇다. 뭘 좀 안다고 생각했을 때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아는 대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 보기 마련이다. 소설로 일가를 이루었던 선생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분이었다. 말투는 느릿느릿했지만, 언제나 풀어나갈 길을 슬쩍 열어 보이곤 했다. 나는 그 이유가 오랜 경험 때문이라고 믿었다. 선생의 표정에는 살짝 웃음기가 머금어 있었다. “가짜는 오래 두고 보면 어느 순간 질리기 시작해요.” 나는 선생의 생동하는 말투에 리듬감이 있다고 느꼈다. 한 문장을 마쳤지만,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기 위한 여백이 마치 내재율과 같은 호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진짜는 아무리 오래 보아도 질리지가 않아요.” 선생은 분명 한 세월을 자기의 몸으로 살아왔으리라. 경험이 앞서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나는 어느덧 저 오롯한 몸의 기억을 따르고 있다. 몇백 년이 지나서도 세인들에게 기억되는 작품은 소위 말하는 ‘진품’이어서만은 아니겠지만,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라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어떤 ‘가치’를 담고 있으리라. 그러나 대체로 세인들은 취향을 따르는 편이 아니던가. 취향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라는 유명한 말도 있다. 감식안의 대부분은 취향일 뿐이다. 이에 더해서 세간의 평가도 한 몫을 단단히 한다. 이런 이유로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는 뭘 알아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데리고 갈 나들이의 한 장소쯤으로 간송미술관에 들어섰다. 물론 문외한의 눈으로 작품을 바라볼 때 나는 더 즐겁다. 내가 해석과 상상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온갖 얕은 지식을 짊어지고 가서 작품을 보고
작성일 2023-11-0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1상세보기 -
수필 김현지 - 「좌천동 915번지」외 1편
좌천동 915번지 김현지 휑하니 빈 공터다. 파헤쳐진 땅이 토해낸 흙과 돌멩이들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곳, 이곳은 어릴 적 내가 살던 집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떤 이끌림에서인지 드문드문 이곳을 찾곤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스란히 제 모습을 지키고 있던 집이 있었다. 동네 주위에도 낡은 집들이 몇 채 있긴 했지만 대부분 재건축을 했거나 다듬어져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눈에 익은 집들은 이제 소실되어 연립주택이나 새 집들이 들어서 있었고, 바로 앞에 있던 작은 언덕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렸다. 변화의 바람이 휩쓸어갔건만 이곳의 집은 흉가처럼 남아 있지 않았던가. 얼마 전 다녀갔을 때만 해도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지만 굳건히 형태를 지니고 있던 집이었다. 사람은 살고 있지 않은 채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괜한 호기심에 낡은 벽을 디디고 담을 넘은 기억이 있다. 그랬던 그 집이 사라져버리고 빈 공터로 남아 있는 것이다.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 사이에 우두커니 공터로 남아 있는 이곳으로 내 그리움의 전율이 전해진 탓일까, 애타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곧 떠나야 할 열차가 승객을 태우지 못해 출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태운 옛집은 액자 속에 채집된 기억 속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 집은 크고 작은 장단지들을 끌어안은 거대한 장독대와 마르지 않는 깊고 맑은 우물이 있었으며, 갖가지 꽃들이 피고 지던 화단에는 커다란 무화과나무도 있었다. 번들번들한 대청마루를 끼고 열 개의 방들과 다섯 개의 정지가 우람한 기왓장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소복하게 모여 살던 작은 동네에서 우리 집이 제일 컸다. 분가해 살던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병이 차츰 깊어지면서 이곳 본가로 짐을 옮겨왔다. 우람한 기왓장을 벼슬처럼 이고 살던 이 집 주인은 나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동네에서 호랑이 할머니로 불렸다. 어른들의 말로는 외모도 행동도 범의 틀을 지니고 있다고들 했지만 내게만은 사슴 같았다. 내 손을 잡고 마실 나가기를 즐기셨는데 동네 사람들은 한결같이 머리를 조아리곤 했다. 존경심이었는지 비굴함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넓은 마당이 있는 우리 집에서는 사시사철 먹거리가 넘쳤으며 드나드는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다. 마을의 모든 행사는 우리 집에서 이뤄졌다. 그 시절, 우리 집은 부자의 대명사였다. 내 어린 시절은 할머니를 배경으로 마음껏 풍요로움을 즐기며 살 수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병이 악화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의 무지개빛 꿈도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커다란 가방을 챙겨 집을 떠나 버렸고, 우리 남매는 오롯이 할머니의 보호 아래 남겨졌다. 엄마는 너무 젊었고, 우리는 아직 어렸다. 할머니의 지쳐있는 어깨는 든든한 위로가 필요했다. 외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지친 어깨는 든든한 지원군이 필요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사람은 고종오빠였다. 오빠는 할머니의 곁을 빈틈없이 지키며 할머니의 신뢰를 쌓아갔다. 우리 집에는 오빠의 객식구들이 하나 둘씩 늘어갔다. 먼저
작성일 2023-11-0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99상세보기 -
수필 김현지 - 담배 한 개비
담배 한 개비 김현지 제사상에 담배 한 개비를 피워 올린다. 아버지 제사의 마지막 의례다. 그리도 좋아하시던 담배 한 개비가 제사상 모서리에서 자욱한 연기를 피워 올린다. 차려진 음식들은 본체만체하고 꾸부정하게 앉아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연기 속에 아른거린다. 아마도 아버지는 저승사자가 내미는 천당 티켓을 담배 한 개비에 팔아넘겼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담배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사소한 감기가 원인이 되어 아버지의 기관지와 폐를 덮쳐 버렸다. 가벼운 감기가 폐를 갉아 먹을 정도였다면 필시 좋아하던 담배가 병에 가속도를 올리는 치명적인 원인이었을 것은 자명했다. 할머니에게 아버지는 귀하디귀한 외아들이었다. 좋다는 약재들은 하루가 멀다고 앞마당을 메웠고 식구들은 온종일 약을 말리고 달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병원에서 처방된 약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구해 온 별의별 한약재들로도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 약들은 온 집안을 누렇게 퇴색시켰고, 아버지는 퇴색되어가는 모든 것들을 부질없어하며 손가락에 담배를 끼고 지냈다. 오로지 담배 한 개비가 밥이고 약이었다. 시들시들 말라가는 아들의 병간호를 자처했던 할머니의 한숨은 나날이 깊어져만 갔다. 정성껏 차린 밥상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아들을 어르고 달래던 할머니의 마지막 보루도 치마 주머니에 숨겨둔 담배 한 개비였다. 아버지에게는 어떠한 산해진미도 담배 한 개비만 못했다. 할머니는 시시때때로 우리를 불러 앉히고는 절대로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곤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빈틈없는 감시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어디에 숨겨두었는지 어둠이 밀려올 즈음이면 지팡이에 의지한 채 당신의 은신처로 몸을 옮겼다. 대문을 나서면 골목을 사이에 두고 긴 담장이 골목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담장 너머로 아득하게 보이던 부둣가에서는 커다란 컨테이너를 실은 화물선들이 담배처럼 부연 연기를 피워 올리며 드나들었다. 나지막한 담장은 아버지가 두 팔을 걸치고 서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지팡이 없이도 든든히 아버지를 일으켜 세웠던 담벼락은 먼발치 바다와 분주히 연기를 뿜어내던 화물선이 영화처럼 펼쳐졌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마음 편히 담배 한 개비를 즐기는 시간이기도 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는 작은 용암 같았다. 빨갛게 불꽃을 품고 있는 작은 용암은 모락모락 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곧 터져버릴 듯 터지지 않고 꺼져버리는 용암은 지친 아버지의 욕망 같았다. “담배가 그렇게 맛있나?” 묻는 내게 아버지는 담배 냄새가 물씬 나는 손가락으로 내 볼을 쓰다듬으시며 “구수~하지” 하셨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손가락에서 풍기던 담배 냄새가 정말 구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는 아버지의 담배가 약이 될 때도 있었다. 한여름 밤 모기에 물려 온몸을 긁어대면 아버지는 침 바른 손가락에 담뱃재를 꼭꼭 찍어 발라주었는데, 담뱃재 때문인지 침 때문인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간지
작성일 2023-11-0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14상세보기 -
수필 박금아 - 「곰피」외 1편
곰피 박금아 이른 봄, 포구는 숨비소리로 가득하다. 겨울을 넘어온 파도들은 바위틈에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고, 먼 길을 달려왔을 곰피*는 너울을 타고 몸을 푸는 중이다. 북해도 곤부박물관에서 보았던 홍보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원시의 난바다를 향해 돌진하던 수백 척의 통통배들. 키를 몇 곱절 넘겨 자라난 곰피를 건져 올리느라 있는 힘을 다해 용쓰는 어부의 일그러진 얼굴이 오버랩된다. 곰피가 갑판에 오르는 순간, 필름은 멈추었다. 검은 화면에는 거친 심장 박동만이 큰 울림으로 남았다. 그 속에서 귀에 익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향 집 부엌 모퉁이에는 오지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앞을 지나다 보면 곰피가 몸을 풀고 있었다. 어머니는 봄이면 바다에서 곰피를 캐다가 말려서는 그물 망태기에 담아 걸어 두고 사시사철 반찬으로 상에 올렸다. 물에 불려 멸치 젓국과 함께 쌈으로 내놓거나 고추장과 식초를 넣어 무치면 온 식구가 좋아했다. 아침이면 곰피 항아리에 물 붓는 소리가 이불 밑으로 들려왔다. 발막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뒷등 ‘새미’에서 길어 온 물을 새 물로 가는 소리였다. 섬에는 먹을 물조차 부족했다. 너울이 심해 섬에 하나밖에 없던 그 샘마저 파도에 잠겨 곰피에 부을 물조차 없는 날이면 항아리 바닥에서 숨비소리가 올라왔다. 깊은 산골 처녀였던 어머니는 열아홉에 섬 색시가 되었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작은 섬이었다. 홀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어머니에게 외할머니가 “부잣집에 가서 편히 살라”며 보낸 시집이었다. 어머니는 혼례를 마치자마자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고조부모님을 모시며 아버지를 도와 어장일을 했다. 집안일에 밭일에 끝이 없었다. 깜깜한 새벽이면 섬 외딴곳에 있는 발막으로 염포를 하러 갔다. 아버지가 죽방에서 잡아 온 멸치를 삶아 몽돌밭에 너는 일도 힘들었지만, 염포에 쓰인 도구들을 간수하기란 가늠하기 어려운 노역이었다. 멸치를 담았던 대소쿠리를 바닷물로 씻으면 시린 물이 허리까지 차오를 때도 있었다. 성사(聖事)였을까. 어린 어머니는 매일 새벽, 곰피처럼 바다에 육신을 담그는 의식을 치르고서야 하루를 열 수 있었다. 십여 척이나 되는 뱃사람들의 먹거리를 감당하는 일도 어머니 몫이었다. 반찬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우리 집 마당은 늘 부식공장 같았다. 어머니는 조선소로 어판장으로 음식을 해다 날랐다. 배들은 고기잡이를 떠나면 보름 정도를 바다에서 보냈다. 배 한 척에 십여 명의 선원들이 탔으니 층층시하 식구에 일꾼 아재들까지 얼마나 많은 음식을 장만해야 했을까. 김장을 하던 날이 떠오른다. 물과 소금을 아낄 방편이었을 거다. 집 앞 갱변**에 그물을 쳐 놓고 수백 포기의 배추를 쪼개어 담가 두면 바다는 노란 꽃밭이었다.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지날 때면 뉘누리가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였다. 너울이 밀려올 때마다 파도는 배추 잎 갈피에서, 어머니의 무르팍에서 흰나비 떼가 되어 하르르
작성일 2023-11-0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20상세보기 -
수필 박금아 - 그 손
그 손 박금아 ‘그때 꼭 한번 그 손을 만져보았지’* 이 시구를 읽고서야 아버지 생전에 손을 잡아 드린 적이 몇 번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바깥쪽으로 살짝 휘어진 검지, 유난히 큰 엄지손톱, 글씨를 쓸 때면 종이 위에서 잠시 떨리던 그 손은 어른 남자 손치고는 약간 작고 하얬다. 평소에는 제자리를 지키는 단단한 손이었지만 술을 마시면 하염없이 물러지던, 이제는 암만 만지려 해도 만져 볼 수 없는 그 손이 떠올랐다. 시집을 덮어 둔 채 산길로 나갔다. 사월 초이레 달빛은 막 남해 바다를 건너온 듯 시퍼런 물빛이었다. 개나리 꽃무덤 아래에서 나무둥치 하나가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뭇잎으로 흙을 털어내자 희미하게 나이테가 나타났다. 구불구불한 달 물결 사이로 오래전 새벽 바다에서 돌아온 시리디시린 손이 어룽거렸다. 그 손은 대학 원서 쓰던 날, 기우는 집안도 나 몰라라 서울로 가겠다고 고집 피우는 큰딸의 등짝을 후려치며 떨리던 손이었다. 대학에 합격하여 집을 떠나던 날 고속버스터미널 그레이하운드 차창 너머에서 눈물로 흔들리던 손이었고,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 가던 때 어서 가라며 떠밀던 손이었다. 그때 알았다. 입시 원서 쓸 때 등을 갈기던 손은 그때껏 떨리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이듬해 첫 외손주를 받아 안으며 환한 웃음으로 활짝 펴 보이던 손이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손바닥에 박힌 생옹이들을 처음으로 보았었다. 나뭇등걸을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손을 처음 잡았던 날이 떠올랐다.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스무 살도 되기 전부터 집안의 어장을 도맡아 했지만, 당신 소유로 된 번듯한 배 한 척 갖지 못했던 아버지는 처음으로 배를 건조했다. 진수식이 끝나고 손님들이 돌아간 저녁때였다. 아버지는 나를 불러 축항으로 갔다. 동생들도 나섰지만 나만 데리고 갔다. 여러 척의 배 사이에서 우리 배는 오색 댕기를 나부끼며 바다에서의 첫 밤을 맞고 있었다. 배에 오른 아버지가 칼치**에 서서 부둣가에 선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가 멈칫거리자 어서 잡으라는 시늉으로 손을 흔들어 재촉했다. 그래도 나는 잡지 않았다. 여자를 배에 태우면 사업이 망한다고 하던 어른들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퍼뜩 잡고 올라온나.” 성화에 이끌려 손을 잡고 말았지만, 배에 오르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나 때문에 아버지의 어장이 기울까 무서웠다. 내 맘을 읽으신 듯 아버지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괘안타. 니는 우리 집 장남인 기라.” 뜻 모를 말이었다. 아버지는 이물과 고물을 돌며 해로(海路) 읽는 법을 알려 주면서 키를 잡아 보게 했고, 엔진 소리를 듣게 해 주었다. 선미로 가서는 바닥에 난 네모 구멍으로 스크루 프로펠러를 가리키며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시켰다. 소주병을 따 술잔을 건네며 바다에 붓게 했을 때는 내가 맏아들이 된 듯했다. 나를 장남이라고 한 아버지의 말이 오금을 박았던 걸까. 그날 아버지를 따라 배에 올랐던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한 적이
작성일 2023-11-0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29상세보기 -
수필 박은실 - 「껍데기」외 1편
껍데기 박은실 애플망고 먹는 법을 검색했다. 가장 가운데 깊은 곳에 씨가 있으니 대략 삼분의 일 지점을 칼로 썰으란다. 가르쳐준 대로 썰어놓은 망고를 쟁반 위에 올려놓고 바둑판 모양으로 속살에 칼집을 넣는다. 이때 껍질이 터지지 않도록 세운 칼끝에 적당한 힘을 주어 작업을 해야 한다. 타원 모양으로 재단된 망고를 두 손으로 감싸 쥔다. 망고 양쪽 끝을 엄지와 검지로 붙잡고 받쳐 든 나머지 세 손가락에 힘을 주어 배가 뒤집히도록 껍질 바깥쪽을 쑥 밀어 올린다. 그러면 과육이 볼록하게 올라오면서 깍두기 모양으로 벌어진다. 다됐다. 이제 티스푼으로 똑똑 떠먹기만 하면 된다. 부드럽고 달달한 맛에 껍질 안쪽에 붙어 있던 마지막 살점까지 박박 긁어 먹었다. 망고는 옻나뭇과(科) 과일이라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껍질을 조심하라고 나와 있었다. 알레르기는 없지만 꺼림칙해 냉큼 손을 닦았다. 애플망고 몇 개를 그렇게 해치우고 나서 부른 배를 한참 동안 두드리다가 쟁반 위를 보았다. 탱탱했던 껍질이 그새 사과 색을 잃고 주글주글 말라가고 있었다. 속을 몽땅 내어주고 가죽만 남아 벙벙하게 엎어져 있는 껍질을 보다 돌연 서글퍼졌다. 끼고 안아 배불리 먹여 놓았더니 젖만 똑 떼어먹고 앵돌아져 잠들어 버린, 갓난아기에게 버림받은 어미의 빈 젖가슴 같았다. 여름이 지천이었던 어느 한 날, 모처럼 근교에 있는 식당으로 점심 나들이를 했다. 옹골지고 단단한 아이를 둘씩 길러낸 여자들이 사치 좀 부려보자며 선택한 곳이었다. 식당 밖에는 조금 전 먹은 음식처럼 정갈하게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담장 주변으로는 요염을 떨며 주홍빛 능소화가 피어 있었고, 에움길 가에는 노란 장미가 정원사의 손길을 받으며 까칠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소나무도 위풍당당하게 가지를 뻗치고 여름을 만끽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유독 모과나무가 많았는데 가지마다 내 주먹만 한 모과를 여러 개씩 달고 있었다. 지인이 기이한 물건이라도 발견했다는 듯 ‘어머나!’라는 외마디와 함께 멀리 무언가를 가리켰다. 여자의 손길을 따라간 곳에는 속이 빈 모과나무 한 그루가 외따로 서 있었다. 멀리서 보기엔 모형 같기도 했다. 진짜 나무일까 궁금해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았다. 속이 빈 나무는 살아있는 진짜였다. 키는 작았지만, 수령은 오래됐는지 다른 나무에 비해 껍데기는 더 거칠고 유난히 메말라 보였다. 살짝 힘을 주어 밀면 곧 땅으로 푸석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 끝에도 아기 주먹만 한 모과 몇 알이 양분을 빨아먹으며 착실하게 몸집을 키워가고 있었다. 가지 끝에 매달려있는 초록 열매가 아웅다웅 섞여 엄마 젖 나누어먹고 자랐던 우리 형제들만 같았다. 물기 없는 빈껍데기 어디에 남은 힘이 있어 단물을 저 끝까지 밀어 올려 주는 것일까. 늙은 저 나무는 내년 여름에도 모과를 매달 수 있을까. 죽어가는 순간까지 제 일을 감당해 내는, 아무짝에 쓸모없을 것만 같은 껍데기가 존경스러웠다. 그날 밤, 늦도록 쏘다니다 돌아와 누운 잠자리에서 새삼 깨달았다. 껍질이든 껍데기
작성일 2023-11-0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00상세보기 -
수필 박은실 - 젊음의 노트
젊음의 노트 박은실 계곡 건너에서 희뿌연 무언가가 계속 펄럭이고 있었다. 우이동 계곡 아니면 백운계곡이었을 게다. 친구 두서넛과 더위를 식히려 찾아간 곳이었다. 한여름 피서객을 맞이한 계곡은 여느 계곡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와 친구들은 아이스박스 통에서 꺼내 파는 막대 아이스크림을 사서 입에 물고는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 떼 같은 인파에 섞여 상류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계곡 폭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맞은편에서 피서하는 사람들의 광경을 건네다 볼 수 있었다. 언뜻 보아도 쉰이 좀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아래는 무릎까지 오는 하얀 속바지 차림이었고 윗옷 또한 거의 속옷에 가까운 민소매 차림이었다. 머리는 짧은 파마였는데 땀이 흘러서였는지 손수건을 돌돌 말아 이마 위로 묶었다. 시원한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평상 위에서 아주머니는 그야말로 음악과 혼연일체가 된 상태였다. 둥근 해가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벌건 대낮이었다. 상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들이 식어 쌓여 있었고, 막걸리 병 몇 개가 바닥에 쓰러져 널브러져 있었다. 확성기를 틀어 놓은 듯한 카세트 라디오 스피커에서는 계곡을 들썩거리며 노래가 쩌렁쩌렁 퍼져 올랐다. 노랫소리에 맞춰 발을 구르고 엉덩이를 양쪽으로 격하게 흔들고 양팔을 하늘 높이 찔러대며 아주머니는 온몸을 연신 흔들어댔다. 흔들 때마다 타이어처럼 띠룽띠룽한 옆구리 살이 파도치듯 출렁거렸다. 아주머니는 마치 정지가 안 되게 고장 난 태엽 인형 같았다. 일행인 듯한 또 다른 여자들도 거의 같은 옷차림으로 춤사위에 맞춰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때 카세트에서 나오던 노래는 강변가요제 대상 곡인 「젊음의 노트」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외국물이 잔뜩 묻은 듯한 이국적 외모로 노래를 부르던 여대생 가수는 아주 다부져 보였다. 가수는 ‘내 젊음의 빈 노트에’ 부분에 유독 강한 악센트를 주었다. 아주머니 모습을 보면서 내 엄마가 아니라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여가수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찬 여가수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안개 속을 걸어봐도 채워지지 않는 나의 빈 가슴.’이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이 곡은 젊은 날의 고민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고 조금은 철학적으로도 들렸다. 계곡을 한참 올라가서까지도 다부진 여대생의 목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우리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아, 술이 그 아주머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젊은 시절 이루지 못한 꿈이 그녀를 막무가내로 흔들게 했을까. 그도 아니면 여자가 나이 쉰 살을 넘기면 세상 무서운 것이 없어져 누구라도 그렇게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던 그때 나는 여가수 나이와 엇비슷한 스물세 살이었다. 쏜 화살같이 날아간 시간은 나를 무서운 것 없는 나이 쉰을 훌쩍 넘긴 아줌마로 만들어 놓았다. 귀밑머리 새치가 성가셔진다는 친구와 도봉산을 찾았다. 막바지 장
작성일 2023-11-0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55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