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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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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4-02-18
  • 조회수 324

일기장을 뒤적이다가 K 얘기를 많이 해놓은 페이지들을 읽었다. K는 나의 가장 힘든 시절을 오랫동안 수호해준 사람이다. K 덕에 내가 누리게 된 사랑이나 갖게 된 마음이 어색하고 신기하다. 그건 여전히 그렇다. 떠올려보면 나의 한 시절을 설명할 수 있는 건 그 때 내 옆에 있던 사람. 그 사람의 행보로 나 역시도 이해되는 사람 뿐이다. 구체적인 사건들보다 마음을 빚졌던 사람이 나에게 시절로, 한 때로, 유년으로 남아 있다. 하루하루 나의 얼굴 뼈가 달라지고 어제와 오늘 종종 다른 사람이 되는 때. 그 언제보다도 교차가 잦은 때. 나조차도 나를 모르겠는 마음이 커져서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이별하고 싶어지는 때. 나는 이런 순간에 K를 사랑해서 아마 K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자주 떠올리게 될 나의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에 K가 있다. 아주 커다란 상흔처럼 있다. 

사랑을 유보해둘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했을 거다. 나의 마음이 모자라다고 느껴질 때면 K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 때가 있었다.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될 때, 지금보다 조금만 더 성숙할 때, 어떤 마음이 잘 주는 마음이고 어떤 마음이 그렇지 않은 마음인지 알게 될 때. 그럴 때로 사랑을 미뤄두고 싶다고.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의 마음은, 그래도 매끄러워진 사랑만 주고 싶었다. K가 가진 윤택함 사이사이로 나의 거칠거칠한 마음이 끼어드는 일을 견딜 수 없었던 것도 같다. 해본 적 없어서 껄끄러운 것이 K 앞에서 드러난다는 게 어딘가 나를 벌려놓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의 나는 내가 K를 좋아한다는 것에 참 겁이 없었던 것 같다고 썼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원래 뭣도 모르고 피할 수 없이 시작되는 것이 대체로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가장 크다는 것도. 꼭 상투적인 말에 진심을 담는 것이 가장 쉬운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마음을 시작하느라 K를 마음대로 짐작하고 좋아했다. K와 이야기를 하고 그 애를 조금 파악한 것처럼 착각하는 지금은, 그 모든 짐작 마저도 오산이었다는 것을 안다. K는 언제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유치했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어른 같았다. 나는 꽤 자주, 어느 어른에게서도 배우지 못했던 것을 아직 아이 같은 K에게서 배운다. 이를 테면 용서하는 법, 나를 믿는 법, 타인의 미움에서 나를 지키는 법 같은 것을. 그 당연하고도 어려운 것을.

차를 타고 길을 달릴 때면 K가 연주하고 녹음한 음악을 크게 틀어두고 목소리를 겹친다. 뻔한 낭만과 고유한 호칭들로 점철된 가사 앞에서 나는 무력해진다. 그리고 속절 없이 충만해진다. 낯선 대중교통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K의 음악을 듣는다. 떨어지는 노을, 저물어 가는 빛깔, 성에로 눈에 보이는 계절. 그 옆에는 항상 K가 있다. 무너질 때도, 숨이 떨릴 때도,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할 때도, 환상이라도 내 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허무한 생각을 할 때도, K가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자랐다면,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안전히 여기까지 온 것이 맞다면 그건 다 K 덕이다. 세상을 불신할 때도 내게 호사스러운 사랑을 선물한 사람, 동경의 마음을 까먹지 않게 만든 사람이 있어서다. 

모두에게 K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의 K와 내 친구의 J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사람, 혹은 함께 발걸음을 내딛는 태도와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된다. 그럼에도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은 채 기고 걷고 뛰는 사람들 사이에는 톡톡한 믿음이 있다. K를 만나고 내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를 맹목적으로 믿어주는 일이 얼마나 거대한 일인지, 어떻게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일인지 알게 되었다. 나도 누군가의 발걸음이 되자고 생각한다. 우습고 뻔한 다짐인가 싶다가도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나는 여러분의 무사한 K가 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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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기억

아무것도 아니던 무언가를 기억하게 되는 일이 있다. 그건 대체로 특별해지기 때문이다. 일상 여기저기에 묻어있어서 채 알지도 못했던 것을 내가 똑바로 바라보고 알아채게 된다면, 그것은 특별해졌기 때문. 나에게는 어떤 숫자들이 그렇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가장 먼저 숫자들을 외운다. 생일, 전화번호, 그 사람에게 의미있는 날짜나, 내가 그 사람을 만난 날짜 같은 것. 시계를 볼 때, 달력을 볼 때, 수학 문제를 풀 때 닮은꼴의 숫자들이 나오면 괜히 반가워진다. 너는 여기에도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그러면 나의 지평이 조금 더 넓어지는 것 같다. 원래라면 스쳐지나갔을 작은 일들에 곤두선 무수한 촉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일이다. 특히 그 숫자로 가리키는 시간에 도착하면, 온 세상을 네 안에서 사는 것만 같아 내가 눈부셔진다. 하루에도 두 번씩, 똑같은 시간은 돌아오기 때문에 나는 잊고 있다가도 너를 떠올린다. 그러면 지금을 살아가느라 바쁘던 것도 어디 깊은 곳에 있던 사랑 닮은 정서 앞에서 전부 고요해진다. 때때로 호들갑처럼, 때때로 딱 일분치의 구원처럼. 나는 그 시간을 대한다. 고대하던 일을 그 시간 즈음에 성공하게 되면 전부 너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인 것만 같고 울다가 시계를 봤는데 낯설지 않은 숫자가 보이면 괜히 시간마저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아 옹송그린 어깨가 조금 판판해진다. 그런 기억이 있다. 초콜릿을 사먹고는 그 두꺼운 종이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접으려는 찰나에 보인 유통기한. 그 날짜가 올해 너의 생일이라서, 나는 여전히 다 먹은 초콜릿 껍질을 가지고 있다. 모난 데 없이 어딘가 정갈하기까지 한 숫자를 보면서 내가 퍽 우습게 느껴졌다. 원래 괜한 일에 과대한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 사랑의 형태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듯이, 나는 사랑을 하는 동안 몸집을 불려서 감탄하고 어디서 빌려온 겉멋든 비유들에 고개를 끄덕인다. 초콜릿 껍질을 가지고 있는 미련하고 어이없는 일에는 중경삼림을 떠올린다. 맥이 들어맞는 곳 하나 없지만, 사랑과 유통기한 너의 생일과 만 년을 견주어 보면서 그렇게 한다. 마음의 갤러리에는 이제는 단번에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된 숫자들이 다양한 조형물과 회화의 형태를 하고 걸려 있다. 그러다가 문득문득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어, 이 숫자 너무 익숙한데 하고. 그러면 옆사람은 그렇게 묻는다. 숫자가 익숙하고 말고 할게 뭐가 있어? 그렇지만 나에게는 생각보다 강한 기억, 생각보다 화려한 추억이 그 밋밋한 획 안에 담겨있다. 누군가와의 시간을 정리하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기면, 나는 숫자를 잊기 위해 애쓴다. 더 이상 시계를 보고 반가워하지 않기 위해 생겨버린 습관들을 나의 윤곽 밖으로 내보내려고 한다. 이른 아침 기상 시간에 익숙해져버린 것이 억울한 퇴사자의 마음처럼 그렇게. 혼자 자조하고 그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준 일을 낯설게 후회하다가 분명히 나의 것이던 이 숫자가, 누구로 인한 것이었는지가 어렴풋해질 때 쯤 나는 다음 돌계단을 밟는다. 계단은 언제나 다음 칸이 있고, 그래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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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지대

내가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 유튜버는 비정기적으로 영상을 업로드한다. 그 주기는 꽤 길어서 나는 그의 영상을 이제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알림이 뜨면 그저 반가운 마음으로, 간만에 마주한 오래 전의 단짝과 손을 마주 잡는 기분으로 영상을 클릭하고 음악을 듣는다. 삼십분에서 한 시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나는 그가 선물한 세상 안에 깊숙이 들어간다. 취향이 섬세하게 엮여 만들어낸 뜨개 이불 같이 나의 고단한 등을 받쳐주는 음악들이다. 그 음악들은 전부 비슷한 템포로 이어진다. 검정치마의 노래 가사처럼 '같은 템포 다른 노래인' 것이다. 변함 없는 음악의 결. 나는 단조와 장조 하는 음악 용어는 알지 못하지만 그 음악들이 어떤 템포를 가지고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는지는 안다. 그것은 늦봄 해변 한구석에 아무도 모르게 올라온 풀포기, 한여름 저녁 석양 너머로 부는 선선한 바람, 초가을 은행들이 익어가는 무던한 풍경, 한겨울 자정녘 교회 십자가 위에 쌓이는 소복한 눈의 템포다. 내게 음악의 템포는 삶의 템포다. 환절기 어느 날, 해가 뉘엿해지는 오후에 친구와 동네 카페에 마주 앉는다. 각자의 학교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속삭이듯이 이야기한다. 그럴 때 나는 탁자를 일정한 속도로 가볍게 두드린다. 그것은 눈앞에 놓인 식은 아메리카노의 템포이기도 그 순간 내 삶의 템포이기도 하다. 내가 듣는 음악들은 이런 삶의 템포와 나란히 걷고 뛰고, 또 종종은 넘어진다. 그리고 나는 이 질주의 속도가 맞닿는 순간 내가 듣고 있던 음악들을 모두 모아 보았다. 한 장르로 묶이기에 충분한 모임이었다. 인디 음악. 내가 사용하는 두 가지의 스트리밍 어플 중 하나는 나에게 '인디 애호가' 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다른 하나는 나에게 릴렉싱 뮤직을 추천해준다. 나는 문득 내 삶과 자주 맞닿아 있는 인디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모두가 애용하는 초록색 검색 엔진은 '인디 음악'을 이렇게 정의한다. ' 타인의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돈으로 직접 앨범을 제작하고, 홍보 역시 자신의 돈으로 하는 등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뮤지션을 인디 뮤지션이라고 하고, 이들의 음악을 인디 음악이라고 한다'. 거대 자본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 대중을 겨냥하지 않고 내가 바라는 것을 용감하게 한다는 것. 그러니까 인디는 작은 것, 주류와 일치하지 않고 조금 빗겨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대체로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달리 큰 애정을 받기 마련이다. 독립영화 에는 모두가 가진 것들을 고유하게 아끼는 미소가 나온다. 가만 보면 미소는 인디의 마음으로 위스키와 담배,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위스키는 그냥 술의 한 종류일 뿐이고, 담배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기호 식품이며, 남자친구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거나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서든 회자되기 쉬운 이름들이라는 의미다. 그렇지만 미소의 위스키는 하루의 고된 일과 끝에 스스로를 위로하는 소박한 사치이고, 미소의 담배는 친구들과의 방탕하고 자유로웠던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간편한 타임머신이며, 미소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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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사랑

요즘은 어떤 사랑이 마음 안에서 찰랑거린다고 느낀다. 꿈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나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으로 친구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오고서는 더 수많은 우회로들을 찾았다. 영화하고 싶다는 말은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당혹으로 물들이는데 너무 충분한 일이었다. 학교 특성상 그랬다. 내가 외고에 진학하게 된 것은 하나의 발악 같은 것이었다. 나의 꿈이 의무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십대의 마지막 해를 시작하고부터는 이대로 사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짙어졌다. 일월의 시작부터 일기를 쓰면서, 나의 꿈을 계속 소환해냈다. 꿈을 인지하게 되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질 것을 알고 억지로 그랬다. 어차피 늘 잔존하고 있던 것, 늘 나를 늦봄의 버드나무처럼 흔들리게 하던 것이 꿈이라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던 포부가 진짜 꿈을 말할 수 없어서 건져낸 다듬어진 직업일 뿐이었다는 것을 나는 쭉 알고 있었다. 내가 나를 인식하던 그 순간 즈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나를 독대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 영화 에서 셀린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연기자를 말하면, 부모님은 뉴스 앵커를 말하는 식으로. 나의 꿈을 돈벌이 가능한 직업으로 바꿔 버린다’고. 나는 셀린을 보면서 내가 사랑하는 일 앞에서 어쩌다가 무정한 사람이 되었는지, 꿈 꾸는 나를 왜 부정하고 싶어했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산다는 것, 내가 나로 존재하기보다도 그들에게 귀속된 존재로서 올바르게 기능한다는 것이 너무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지리멸렬한 글쓰기를 매일 두 시간씩 억지로 반복하면서 나는 처음 나를 마주하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미성숙을 다시 끌어올려 두 눈으로 바라보는 일을 견딜 수 없어 하던 열넷 즈음으로. 언어화되는 치기들이 부끄러워 참을 수 없던 때로. 나 스스로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어리숙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어 하는 나만 있었다. 나의 진심을 자꾸 의심하고, 왜를 묻는 과정은 두 번째라고 해서 무뎌지지 않았다.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에 대한 혼란을 느끼는 일은 마음을 하루종일 가라앉게 하는 일이었다. 최은영은 소설 에서 성숙은 그저 우리 환경에 익숙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여행자의 마음을 떠올리게 됐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 앞에서 나의 미성숙한 부분을 기꺼이 마주하고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닌지 짐작해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지난 두 달은 조그만 방 안에서 아무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는 일이었다. 이름 없는 여행지와 벌이는 다정하고 날카로운 밀회였다. 내가 가진 미성숙과 독대하는 과정에서 나는 비로소 꿈을 꿈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연습할 수 있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이 있었다. 꿈이라는 것은 하는 수 없이 양가적이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질투하면서도 동경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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