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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 작성일 2023-07-01

기획의 말

2023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박소란, 「러브덕」을 읽고(《문장 웹진》 2023년 6월호)

오요우

잠 못 이루는 밤에

오요우 작가

이야기를 만듭니다. 여름을 좋아해요.

문장웹진 7월호 살펴보기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①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① 윤재민 1. 이청준의 「퇴원」은 전후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됐던 시기, 문학적 내면의 향방에 대한 알레고리를 시사한다. 소설의 화자 ‘나’는 유년 시절 아버지의 서열 정리로 ‘선생님’으로 모셔야 했던 동년배 ‘준’의 병원에서 세상의 변화와 상관없이 무위도식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가 입원한 준의 병원은 모든 시계가 고장 나 있는 채로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치료를 끝없이 받으면서 원인 모를 병으로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환자들과 생활한다. 그러나 ‘나’는 딱히 장기 입원할 이유가 없는 건강한 사람이다. 그 또한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다. ‘나’는 항상 병원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 하며 언제든지 퇴원할 만반의 준비가 된 듯하다. 참다못한 ‘나’는 무의미한 치료와 단절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위궤양이라는 헛된 의학적 진단을 거부하며 항의한다. 그러자 간호사는 “위궤양이 싫으시담 더 멋진 병명을 붙여드릴 수도 있”1)다고 말하며 그의 퇴원 의지를 가볍게 기각한다. 간호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전역 직후부터 약 일 년여 간 이어진 ‘나’의 장기 입원이 실재하는 질병 때문이 아니라는 걸 폭로하기 때문이다. 현대 임상의학은 질병이 진단에 선행하는 전도를 용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질병 때문이 아니라 환자여야 하기에 질병이 부과되어 왔던 것이다. 수전 손택은 문학에서 질병은 사회와 지식에 부정적으로 예속된 신체의 은유라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나’와 질병의 문학적 관계는 손택식의 ‘은유로서의 질병’의 문제와는 차이가 있다. 신체를 규정·규율하는 임상의학이라는 특정한 지식과 관련된, 권력의 은유로서 임상의학의 문제에 가까워 보인다. ‘나’가 처한 ‘은유로서의 권력’의 문제는 단순히 신체를 속박하는 과잉 진료와 장기 입원에 국한되는 사항이 아니다. 애초 동년배인 ‘준’과 ‘나’의 서열을 정하여 ‘나’의 신체를 병원에 구속하는 원인을 제공한 부권(父權)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다. ‘나’가 회고하는 부자(父子) 관계는 기묘하다. 아버지는 ‘친구 발바닥이나 핥으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붓는 폭력적인 서열 관계를 ‘나’에게 강제했다. 아버지의 냉혹한 훈육은 어렸을 때부터 일관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자신의 내면에 중대한 상흔을 남기는 한 사건을 회고한다. 소학교 3학년 때 가을, 나는 그즈음 남몰래 즐기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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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1)

‘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 오에 겐자부로의 「세븐틴」 과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 겹쳐 읽기 한영인 1. ‘우익 성장소설’은 가능한가? 2023년 3월 3일,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가 타계했다. 그의 부음을 접한 순간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그의 작품은 다름 아닌 「세븐틴」(1960)이었다. 이 작품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사육」(1958)이나 『만엔 원년의 풋볼』(1967)처럼 흔히 오에 문학의 ‘정수’로 거론되는 작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음을 전하는 기사에도 이 작품은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자신의 독서 편력을 작품 창작 과정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대목이 단연 흥미를 끄는 『읽는 인간』에도 이 작품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왜 그의 죽음 앞에서, 그의 수많은 대표작을 두고 오직 이 작품만 강렬하게 떠올린 걸까. 가장 단순한 대답은 그것이 내가 읽은 오에의 첫 작품이었다는 것쯤이 될 것이다. 내 동년배라면 젝스키스가 주연을 맡은 하이틴 영화를, 요즘 세대라면 2015년에 데뷔한 13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의 이름부터 떠올릴 ‘세븐틴’이라는 단어에는 확실히 청춘의 퍼포먼스를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기대했던 것도 그와 같은 밝고 싱그러운 젊음의 이미지를 흡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얼마 넘기지 않아 나의 부푼 기대는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말에 이르러 이 작품은 나를 처음의 기대와 완전히 다른 곳에 데려다 놓았다. 물론 이런 어긋남은 바탕 없이 이루어지는 독서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 어긋남만으로 「세븐틴」이 내 뇌리에 그토록 깊이 각인된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야 했다. 왜 「세븐틴」이었을까. 이 작품은 구성이 복잡하거나 형식이 난해해서 이해하기 곤란한 작품은 아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삼은 만큼 어딘가 범속하고 선정적인 느낌을 풍기기도 한다. 여기서 실제 일어난 사건이란 1960년, 당시 17세 소년이었던 야마구치 오토야가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연설회에 참석한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를 단도로 찔러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전후의 가장 유명한 우익 활동가”1)로 손꼽히는 아카오 빈의 연설을 듣고 감명 받아 16세의 나이로 대일본애국당에 입당한 야마구치는 범행을 저지른 해 옥중에서 ‘칠생보국, 천황폐하 만세’라는 유서를 남긴 후 목매달아 자살하고 만다. 「세븐틴」은 야마구치를 모델로 삼아 비대한 사춘기의 자의식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혐오로 빠져든 한 소년이 우익 테러리스트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은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2) 방금 등장한 ‘성장소설’이라는 단어에 내가 느꼈던 당혹감의 핵심이 응집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말하자면 「세븐틴」은 이제까지 내가 접해 본 적 없는 방향으로 내달려간 젊음의 파국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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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책방곡곡] 전주 살림책방(제3회)

《문장 웹진》 책방곡곡 전주 살림책방(제3회) 사회, 원고정리 : 살림 참여자 : 재재, 아리엘, 모아, 인애 책 : 정은, 『기내식 먹는 기분』(사계절, 2022) 창밖 독서모임 3회, 2023년 6월 9일, 지향집 살림 : 창밖 독서모임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여행’이라는 창으로 바라본 우리의 세계인데요. 정은 작가님의 여행 산문집, 다들 어땠어요? 재재 : 여행지에 대한 단순한 소개가 아닌 삶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부분, 예를 들어 “길을 걷는 순간만 삶을 살고 다녀와서는 그것이 이어지지 않는다.” 이런 문장들이 참 좋았어요. 인애 : 저는 39, 40쪽 K한테 느꼈던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요. K는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래서 작가는 고통을 참아내고 보상을 얻어낼 거라 생각하며 인내하면서 걷는데, K는 하루하루를 귀족처럼 대하면서 보내는 것? 모아 : 나도 거기에 밑줄 쳤는데. 재재 : “좋은 하루를 쌓아 나가는 게 삶이라는 것, 거창한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를 갈아 넣고 희생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완성하는 것” 그 부분도 참 좋아요. 인애 : 이어지는 문장에서 작가님이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잘하려면 일단 자신을 대접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 K다.” 사랑을 주고받으려면 자신을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는데, 어떠세요? 저는 읽으면서 이 부분을 질문으로 던져 보고 싶었어요. 다들 자신을 잘 대접하고 있나요? 재재 : 저는 그렇게 사는 것 같아요. 전주로 이사 온 이후로 내 삶을 어떻게 하면 소중하게 대할 수 있는지 연습하고, 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더 적극적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아리엘 : 저는 식사할 때 잘 차려 먹는데, 그게 나를 대접하는 방법이에요. 아이를 키우다 보니 서서 아무렇게나 먹고 치웠는데, 언젠가 내가 외적인 것, 시각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를 위해서 예쁘게 차려 먹어요. 모아 : 아리엘은 자신에게 초점이 잘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여서. 인애는 어때요? 인애 : 나는 나를 고통스러운 곳에 더 이상 집어넣지 않는 것 자체가 나를 대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리엘 : 34쪽에서 작가님이 “나는 사람이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성장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 속에 일부러 나를 던져 놓곤 했다.”라고 했잖아요. 여행지만 보더라도 순례자의 길, 인도, 현재 살고 있는 곳까지. 그러다가 35쪽에서는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을 때까지 가진 것을 버리다 보면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다.”고 해요. 고통이라기보다 자유로워 보여서 부러워요. 인애 :

  • 관리자
  • 2023-07-01
테레사의 오리무중

테레사의 오리무중 박지영 성 테레사가 첫 번째 무염시태를 경험한 것은 마스크 실내 착용 의무가 해지된 1월 30일이었다. 설이 지나고 센터에 가보니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고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 테레사는 마스크를 벗을 생각이 없었다. 마스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성 테레사만 알면 되는 일이었다. 의무가 해지된다고 해서 벗을 의무가 있는 건 아니어서 성 테레사는 안심했고 전과 다름없이 마스크를 쓴 채 근무했다. 봄이 되면서 시의원들이 민생 현장을 살핀다며 지역신문 기자들을 대동하고 바른 먹거리 센터를 방문했다. 방문 한 달 전부터 분주하게 환기시설을 점검하거나 벽의 페인트칠을 다시 하고 칙칙한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꿔 줄 화분을 가져다 놓으며 분주하더니 단기직 여사님들에게도 몇 가지 예상 질문과 답변을 알려주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창고에 내려와 현장을 둘러보던 시의원 한 명이 한쪽에서 포장 업무를 하던 성 테레사에게 물었다. 일하면서 뭐 불편한 거 없어요? 성 테레사는 고개를 들었다. 웃고 있는 시의원 뒤로 얼굴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인 센터장과 팀장, 상급 관리자들과 중간 관리자 주경의 얼굴이 보였다. 성 테레사가 적절한 답변을 고민하며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기자가 마스크 벗고 파이팅(이나) 한번 외쳐 달라고 소리쳤다. 마스크를 벗고 시의원과 함께 웃으며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을 기자가 카메라에 담았다. 긴장해서인지 입 꼬리를 당겨 지은 미소가 자꾸만 일그러졌다. 시의원들이 떠나고 다시 마스크를 쓸 생각이었는데, 급하게 하던 일을 마무리 짓다 보니 깜박하고 말았다. 잠시 후 포장 공정을 확인하러 온 주경이 다가와 말했다. 여사님은, 마스크를 쓰시는 게 좋겠어요. 마스크를 벗고 있다는 걸 잊고 있던 터라 성 테레사는 깜짝 놀라며 마스크를 찾아 썼다. 그리고 둘러보니 여사님들 중에 반 이상은 마스크를 벗은 채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만.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지된 지가 언제인데. 이것은 관리자의 갑질이 아닌가? 그것도 상급 관리자도 아니고, 기존의 중간 관리자가 공석이 된 틈에 같은 작업반에 있다가 어부지리로 중간 관리자 자리를 임시로 꿰차게 된 주경이 그런 요구를 한다고? 애초에 벗을 생각도 없었는데 주경이 강제하자 마스크를 쓰고 일하는 게 더없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그냥 참을까 하다가 다른 여사님들도 안 쓰셔서 괜찮은 줄 알고, 하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주경이 조용히 속삭였다. 자아가. 네? 자아가 자꾸 튀어나오려고 하던데요. 마스크로 가리는 편이 낫겠어요. 자아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성 테레사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화장실에 가서 마스크를 벗고 거울을 보았다. 그랬더니 잘 가둬 둔 줄 알았던 자아가, 마스크에 가려진 사이 너무 비대해져 마스크를 벗은 상태에서도 자꾸만 입술을 달싹이며 꿀렁꿀렁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안에서 힘주어 입술을 여닫기를 반복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끊임없이 입술을 움직이며 들리지 않게 혼자 기도라도 하거나 주문이라도 외우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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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요시히로의 자리

요시히로의 자리 최민우 102호에 드디어 사람이 들어올 모양이었다. 인테리어 업체 직원이 공사 소음이 생길 수 있다며 정화에게 양해를 구하고 동의서에 사인을 받아갔다는 것이었다. “굳이 현관까지 들어와서 사인을 받고 가더라고.” “공사는 언제부터인데?” “모레부터래.” 샤워를 하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자 정화가 배달앱으로 주문한 족발 세트가 도착했다. 내가 음식을 테이블에 차리는 동안 정화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왔다. 우리는 텔레비전 뉴스를 틀어 놓고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나는 특별히 할 말이 없었지만 정화는 있었다. 주차권 때문에 쇼핑몰 의류매장 직원과 트러블이 생겼다고 했다. 쇼핑몰에서 일정 액수 이상의 옷을 사면 주차권을 발급받았고, 옷은 구매 후 일주일 안에 가져가면 무조건 환불이 가능했다. 다들 그 정책을 이용해서 무료로 주차했고 정화도 그랬는데, 환불처리를 하는 직원의 태도가 아무리 봐도 자기를 비웃는 듯했다. 결국 매장 담당자가 불려 나왔고, 처음에는 입으로만 사과하던 담당자는 정화가 플로어 매니저와 얘기하겠다고 하자 상품권을 건넸다. 상품권은 본인이 쓸지 엄마에게 줄지 생각 중이라고 했다. “진짜 오래됐지?” 내가 말했다. “응. 족발 진짜 오랜만이다.” “앞집, 앞집. 102호.” “아, 그러네.” 지난번에 살던 사람은 우리 또래로 보이는 부부였다. 남편은 덩치 큰 근육질 체격에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남자로, 정화는 그가 조폭인 줄 알고 멀리서 뭔가 반짝이기만 해도 걸음을 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동현관 입구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던 중 문득 뒤통수가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화가 모르는 척하려 애쓰는데 이웃집 남자가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더니 아내가 텔레비전 볼륨을 높여서 죄송하다며, 임신 중이라 조금 예민한 상태인데 얘기를 잘 해뒀으니 이해해 달라고 정중히 말했다. “나는 진짜로 텔레비전 볼륨 갖고 어디다 뭐라고 한 적이 없거든. 무서워서 말이나 했겠냐고.” 정화가 새삼 억울해했다. “그 여자 웃는 건 좀 웃겼지만.” 웃음소리는 내가 먼저 들었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데 등 뒤에서 하하하학,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102호 문 앞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왁자지껄한 텔레비전 소리에 뒤이어 다시 하하하학, 이 들렸다. 며칠 뒤 마트에 가던 중 정화가 이웃집 여자의 웃음소리를 따라 하며 물범이 숨넘어갈 때 내는 소리 같다고 즐거워했다. 하필 흉내를 낼 때 102호를 지나던 중이었고 그 집 창문이 열려 있어서 신경이 약간 쓰였지만 별일은 없었다. 아무튼 그 뒤로는 그 웃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부부가 이사를 간 후로 102호는 지금껏 쭉 거주자 없이 방치되었고, 그 상태로 일 년 반이 흐르면서 세 동짜리 낡은 아파트 단지의 작은 미스터리가 되었다. 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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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우리는 숲

우리는 숲 공현진 시간이 아주 흘러 우리가 만두 가게를 열게 되는 것이 지금 하려는 이야기의 마지막이다. 만두 가게를 여는 날,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축하하고 웃으며 그들이 착하고 따듯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려 하는 날, 그러니까 찜기가 내뿜는 하얀 수증기 속에 많은 말들이 오가며 갇히고, 그러나 결국에 너희가 잘못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내용의 말들이 한꺼번에 가게 밖으로 빠져나간 후에, 부엌 벽에 집기들을 걸면서 나는 오래전 동생과 집 안의 사물들을 처치하기 시작했던 때를 떠올렸다. 원래 나와 동생은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모조리 없애려 했다. 나무 주걱과 튀김 냄비, 천사 엉덩이가 벗겨진 접시, 티스푼, 도마, 전선, 플라스틱 수초가 깔린 어항, 조립식 서랍장, 블랙앤데커 사의 전동 드라이버 세트, 성경 구절이 적힌 달력과 야곱이 무릎을 꿇고 있는 쿠션. 부피가 커서 위험하다 싶은 물건들 위주로 먼저 없앴고, 눈에 띄거나 거슬리는 것들, 발에 차이고 밟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내다버렸다. 그건 손에 짚이는 족족 게걸스레 음식을 집어 삼키는 일만큼이나 쓸쓸한 일이었다. * 여름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눈을 떴는데 엄마 아빠가 없었다. 재개발이란 단어가 동네 사람들을, 사실 재개발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들썩이게 하던 사월이었다. 동네 어딜 가든 모래 더미가 쌓여 있었고, 바람이 불면 짙은 연못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낮과 밤의 온도는 아주 달랐지만 우리는 낮과 밤에 같은 냄새를 맡았고 같은 꿈속을 헤맸다. 집 근처에선 생선 냄새가 났다. 주말이면 이모는 서울로 올라왔다. 우리가 잘 있는지 보기 위해서. 이모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실에 빨래건조대를 펼쳤다. 말린 생선을 하나씩 노끈에 꿰어 빨래건조대 위에 걸었다. 세탁기를 간신히 놓은 좁은 베란다에도 생선을 매단 옷걸이가 화분걸이와 함께 공중에 걸려 있었다. 동생 미영은 독감을 심하게 앓았다. 독감을 앓은 후에 미영에게 사물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모는 미영의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것이 다 혼이 빠져서 그렇다. 헛것이 보이는 거야.” 이모는 해남 바다에서 말린 귀한 것을 가져왔다며 몇 달 동안 우리에게 말린 생선을 쪄서 먹였다. 미영은 생선 살점을 입에 넣기도 전에 헛구역질을 했다. 그래도 이모는 억지로 먹게 했다. 미영의 허벅지와 팔이 앙상한 것을 두고도 이모는 못마땅해 했다. 이모는 하루는 보약을 지어 왔고, 하루는 실력이 좋다고 소문난 집에 가서 부적을 받아왔다. 미용실에 갔다가 누군가의 말을 듣고 회충약도 사왔다. 이모가 돌아간 후에 미영은 변기에 얼굴을 처박았다. 억지로 삼킨 알약을 뱉고 싶어 했다. 미영은 벌레들이 입으로 쏟아져 나올까 봐 겁내면서도 알약을 빼내기 위해 토악질을 했다. 바보야, 어차피 벌레들은 똥구멍으로 쏟아지는 거야. 내가 겁을 주면 미영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이모는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자신이 알거나 또 알지 못하는 방법들을 끊임없이 가져와

  • 관리자
  • 2023-07-01
추도사

추도사 김승일 버튼의 마지막 스탠딩 코미디 공연은 누추하고, 좁은 코미디 클럽에서 열렸습니다. 관객이 셋이었고 그중 한 명은 저였습니다. 한 명은 바텐더였고, 한 명은 저도 모르는 사람이었죠. 사람은 죽기 직전에 뭘 바랄까요? 조금만 더 살기를 바라겠죠. 아니면 빨리 고통이 멈추기를 바랄 수도 있고. 둘 다 바랄 수도 있겠고. 저는 버튼의 가장 친한 친구로 살아오면서, 아 물론 가장 친했다는 건 그냥 가장 자주, 많이 만났다는 뜻이고, 어쨌든 그가 대체 뭘 원하는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버튼이 누구라도 학을 뗄 만큼 심각한 관심병 종자였다는 것입니다. 버튼이라면 이쯤에서 갑자기 시트콤 웃음소리를 틀었겠죠. 환호, 휘파람, 갈채소리도 섞여 있는 그거요. 틈만 나면 버튼을 눌러서 웃음소리를 재생했죠. 어쨌든······ 그렇게나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어 했던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 코미디를 카네기 홀이 아니라, 그렇게나 허름한, 알코올중독자 관객들이나 죽치고 졸고 있는, 아무도 자기 얘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 후미진 클럽에서 했습니다. 제가 어제 여기 오기 전에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게 더 예술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버튼은 자기를 예술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날 자기 공연에 저를 데려간 것이겠죠. 자기가 죽은 다음에 제가 전기 영화라도 만들 줄 알았나 봅니다. 여기 지금 백 명 정도는 모였으니까. 여기서 그날 버튼이 뭘 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소문을 많이 내주세요. 기사로도 써주고······ 이러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지금도 바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버튼은 자기한테 몽유병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몽유병인 게 웃긴가요? 아무도 안 웃으니까 누구 하나가 웃을 때까지 웃음 버튼을 계속 누르더군요. 질려서 제가 웃어 줬습니다. 자기가 자면서 뭔가를 하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자다가 깨면 아내가 비디오로 자기를 찍고 있는데, 자기한텐 안 보여준다고······ 아내가 찍으면서 매일 낄낄거리고 있다고 그랬는데······ 아시다시피 버튼은 코미디에서 자주 아내 얘기를 했죠. 아내가 죽고 나서도 마치 살아 있다는 듯이, 아내가요, 아내가, 제 아내가요. 영상을 찍기는 거의 매일 찍는데, 아내도 찍은 걸 다시 보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찍어 주지도 않습니다. 칠 년 됐어요. 이젠 내 병이 안 웃긴가? 혹시 내가 안 웃기는 게 아니라 아내가 미친 게 아닐까? 집에 CCTV를 설치할 생각도 했습니다. 내가 자면서 하는 짓이 웃기는지 안 웃기는지 보려고요. 제가 알기로 버튼에게는 생전에 강렬히 원했던 것이 둘 있었습니다. 하나는 잠에 든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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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사후의 일

사후의 일 김승일 어쩌면 하나가 될 수도 있대. 껴안고 누워, 인터넷에서 본 얘기를 고양이에게 들려주었다. 지금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하나가 되면 알게 되겠지. 내가 네게 하나가 되는 얘기를 하면서. 호흡이 느려지고, 혈액순환이 약해지고, 심장에 통증을 느꼈다는 것을. 이렇게 하나가 되는 건데. 왜 그렇게 슬펐느냐고 그때 가서 네가 묻는다면. 아니지, 물을 필요도 없겠지. 답할 필요도 없겠지. 다행이다. 답을 모르거든. 그래도 무서워.

  • 관리자
  • 2023-07-01
묘원

묘원 강혜빈 이름들 사이를 걸었다 공원이면서 무덤인 사잇길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입술을 부딪히지 않아도 발음되는 이름 깊은 잠을 자는 건 그만큼 슬퍼서야 잠이 길어진 내게 너는 그렇게 말했는데 묘목은 무덤가에 있는 나무 사전상으로는 세 번째 의미 나무 열매를 줍는다 반쯤 열린 보라색 껍질 사이로 비온 뒤 풀 냄새가 난다 꽃을 꺾는 사람과는 도무지 친구가 될 수 없어 관리인이 나타나 말한다 다섯 시에는 문을 닫는다고 그는 검은 선글라스를 썼다 손에 든 호스 끝에서 물이 떨어진다 다섯 시에는 저도 약속이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묘원은 오전 열 시부터 무료 개방 일요일에는 관리인도 쉰다 루비 켄드릭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J. W. 헤론 메리 스크랜턴 소다 가이치 로제타 홀 어니스트 베델······ 이름들 사이를 걸었다 묘비의 재료는 돌 높이 76cm 앞면 30cm 옆면 13cm 손끝으로 쓸어 보면 움푹 팬 총알 자국 벤치에는 노부부가 정물처럼 앉아 있고 길을 잘못 들어선 연인들이 돌아가고 조금씩 허기를 느끼는 장면 묘원 주변 음식점: (0.13km) 골든치즈타르트 (0.16km) 병천아우내순대족발 (0.17km) 파사주 (0.26km) 낫도그앤프라이나잇 (0.27km) 비포그레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요 없어요 한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떠올렸다 19번 묘지에는 큐알코드가 있지만 알고 싶지 않고 오늘은 이상하게 일요일 같고

  • 관리자
  • 2023-07-01
선크림 사용이 권장되는 오후

선크림 사용이 권장되는 오후 강혜빈 공사삼구! 공사삼구! 창밖에서 누군가 외친다 한낮의 강의실에는 비스듬한 자세와 수박색 텀블러 쑥색 가루약 칠판과 부러진 분필 천장에 나타난 장수하늘소 초록의 종류에 대해 생각하다 잠시 고쳐 앉는다 비행기 낮게 나는 소리 미세먼지 보통 찢어지는 굉음······ 보통이란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수준 마스크를 벗었다가 다시 쓴다 공사삼구! 공사삼구! 등차수열 관계대명사 삼차방정식 Should have p.p 확률분포 두음 법칙 동그라미와 별표 선생님 코피 먹어 봤어요? 목소리 돌아왔어요? 사랑해 봤어요? 찢어지는 찢어지는 낮의 비행기는 여름의 고도를 직감하게 한다 네 살 때 처음으로 보았던 장면 물웅덩이에 비친 나의 얼굴 네 발 자전거와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검은 창살을 오르는 덩굴과 바람 빠진 공 시골 아파트의 평화 별일 없이 사는 사람들 눈뜨면 대도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학생들과 그저 그런 선생이 그저 그런 문제를 푼다 콜록 콜록 영혼이 콧물처럼 흐른다 아무래도 몸 안에 누가 있는 것 같아 커튼 없는 강의실 한 학생이 장우산을 가져온다 선생님 바퀴벌레 죽여 주세요 햇빛이 오른팔을 깨문다 공사삼구! 공사삼구······ 차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점점 목소리는 작아지고 책상에 오답노트가 쌓여 간다 틀렸어 공삼삼구 그건 장수하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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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곁이면서 겉

곁이면서 겉 - 홍래형에게 황종권 우는 사람 곁에서 삼겹살을 구워 본 적이 있나요. 겉은 타들어 가는데, 핏물이 배어 나오는 저녁의 눈동자를 마주한 적이 있나요. 왜 우냐는 질문이 검어지도록 삼겹살만 태우는데, 괜히 신김치도 굽고 버섯도 구워 보는데, 같이 울어 줄 수 없는 곁이 된 적이 있나요. 형, 어떤 질문은 답이 흉기를 들고 있고 어떤 울음은 짐승을 죽이는 불씨부터 키우고 있어요. 그걸 어쩔 수 없는 곁이라고 말하면, 곁은 무너지는 깊이가 되지요. 형은 앓고 있는 걸 꼭 안다고 해요. 시간이 주는 이해란 그런 게 아닐지 몰라요. 기도하려고 맞잡은 두 손이 곁이 가진 무게를 덜어 주기도 하잖아요. 시계가 불판 같다고요. 시간만큼 완벽한 소각장은 없다고요. 초침과 분침과 시침은 다 다른 곳을 가리키지만 둥글게 깎인 시간을 선물한다고요. 왜 형이 질문하는데, 내 질문이 참담한 행성을 돌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별자리를 보며 검은 밤을 건너는 사람들은 왠지 옆구리 아픈 사람들 같고, 곁이면서 겉이 되고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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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마흔

마흔 황종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이 내리고 있다 겨울의 내부는 흰빛으로 막막하다 스스로 견딜 수 없다는 건 그림자 가득한 저녁을 들어앉히는 일인데 어두울 것이 하나 없다 나는 이제 젖은 폭죽으로 눈이 먼 풍경을 밝히지 않는다 어쩌면 순한 양들을 죽이기 좋은 밀실 하나가 생겼을지도 구름 곁에 쓴 문장들은 대부분 눈비로 죽거나 움푹 팬 거리에 눈동자로 고여 있다 추억은 아니므로 그대로 축축한 것들 마흔의 이름으로 적시는 술잔이 많아질수록 폭죽은 밝혀낼 어둠이 없다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제 막 숫자를 배우는 딸과 뒷모습으로 숫자를 조금씩 흘리는 아버지 답을 구할 사이가 아니라는 건 멀어질 거리밖에 없는 거였나 밀실의 온기가 높아졌을지라도 온기의 절정이란 높이일까 깊이일까 끓는 물을 공중에 뿌리자마자 얼음 조각으로 흩어지고 있다 날개 없는 천사를 이해하는 일은 이토록 명확한데 밀실은 불가능한 노랫말들로 깊어지는 웅덩이가 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밀실의 내부는 차도록 흰빛이고 막막하도록 뜨거운 피가 새어 나온다 나를 사랑했던 혐의가 나를 살해할 증거가 되지 않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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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눈·코·입이 없는 저녁에

눈·코·입이 없는 저녁에 이지아 그때 시간은, 홀로그램 색으로 빛나며 죽은 순록 얼굴을 아무렇게나 모자처럼 눌러 쓴 채, 살며시 나를 지나쳐 가고 있었다 낭만 없이 우리는 진심이었고 투명한 손을 잡고 있었지 을지로에서, 차들이 있더라, 루체른에서도, 가게들이 있더라, 결국 오지 않았던 거기에서도, 산맥들이 연결되어 있더라 그때 시간이, 또 멈춰서 바람에 흔들리던 네 머리카락이 네가 가진 소멸처럼 느껴졌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빛나는 글자를 아무렇게나 삼키며 오후가 끝나길 바라고 있었다 선택할 게 많은 곳에서, 또는 선택이 필요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눈코입이 없어지고 있었지 눈코입이 없어도 뭔가를 보고 만지고 노래를 하면서 이런 것을, 그때라고 부를 이곳에서 나는 온몸이 다 사라져 있더라 헝가리에서, 홍제동에서도, 볼 것들이 남아 있더라, 거기 초라한 약속들이 계속 있더라 감각은 망하고 뭔가 중요한 게 닳아져 이때 느린 가면이 구름과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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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음악 없는 마음

음악 없는 마음 이지아 땀이 비 오듯 살고 싶다. 창문에 가득한 감시, 땀이 비 오듯 헉헉거리며 내 열정을 식혀 줄 음악 없이도, 내 키가 더 작아지고 피부도 좀 더 줄어들고 발음도 더 힘들어져 내 뒤에 아무것도 없이 흥얼흥얼 악마들이 나를 위로해 줄 합리적인 변명도 없이 거리를 뒹굴던 바람을 주워 마시고 땀이 비 오듯 나를 보고 싶다. 땀이 비 오듯 상냥하게 안부를 묻고 내 안에 묻힌 한 사람을 불러오듯이 50년 후에 내가 될 어느 할머니의 손에 작은 도서관을 안겨 주고 독특하고 과격한 의미에도 아랑곳없이 까르르 웃어대는 아이들 곁에서 늙기 위해 나를 위로해 줄, 지금을 견뎌 줄 좁고 긴 통로를 지나서 땀이 비 오듯 비 맞은 자동차처럼 그렇게 달려서 땀이 비 오듯, 땀이 비 오듯, 움직이는 손짓과 이 현재들과 릴레이를 하듯이 땀이 비 오듯, 몇 번이고 허접한 나를 닦아내면서 그렇게 내 곁엔 아무도 없을 테지만 땀이 비 오듯 죽어가고 싶다, 열심히 그래도 열심히, 작품의 인물을 구별 못 하게, 인물보다 다른 게 있다는 게, 감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내 몸 전체가 철로가 되어, 완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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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보풀

보풀 윤여진 올라서겠어요 부드러움 위로 누군가 나를 쓸어 볼 때까지 부푼 얼굴을 내밀겠어요 그럼 내가 만져지겠죠 사람들이 가득 찬 지하철에서 나는 간신히 매달리며 사랑에 골똘해집니다 몇 없어 붙잡을 수 있는 풍경이 있고 터널과 흰 강 윤슬 빛나는 것만 보면 당신의 이름을 나란히 놓아 보고 새벽에 주고받은 글자를 떠올려요 이건 모두 나를 위한 일이에요 하루 동안 쌓은 두터운 표정을 숨길 수도 있죠 어깨를 움츠리고 문득 솟아난 동그란 그리움을 만져 봅니다 자다 깨어 이불을 정리했어요 잔에 뜨거운 물을 이제 막 새로 부었습니다 겨울의 입구래요 내일은 더 깊고 아득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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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그림자 극장

그림자 극장 윤여진 저물녘 물소리 위에 여자가 앉아 있다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 조금 더 고갤 들어도 좋아, 어두워질 때쯤 비로소 보이는 나의 그림자 흉내는 언제나 어설퍼서 허공이 되어 가는 대신 짓무른 풀잎 사이 벌레가 꼬이고 그사이 누군가 맞은편에 와 앉을 것 같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수챗구멍 사이의 머리카락을 치우는 게 전부인 일과에서 내세울 울음도 없이 의심 없이 뒤로 걷는 일 신기해, 이대로 계속 갈 수 있을 것 같아 창문을 전부 닫아도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빗방울처럼 더는 글썽이지 않는 법을 모색하려 해도 쥐어지지 않는 주먹을 들고 발밑의 책이 무너지고 책상은 더 주저앉기 시작하는데 등에 마저 숨겨 놓은 얼굴이 기어코 떠오르지만 고개는 들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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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여름이 가지 않는다 오래도록

여름이 가지 않는다 오래도록 민소연 약속대로 나는 이 공원에 왔다 어제 못다 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어제와 같은 자리로 향한다 벤치 뒤편에만 나무 그림자가 생기는 오후 나무 그림자에 조금도 가려지지 않은 몸이 거기 있고 네가 오랜만이라고 인사한다 그건 나한테 하는 인사인 것 같다 하루만의 재회가 어떻게 오랜만일 수 있는지 생각한다 너는 눈썹 앞머리를 들썩이며 나를 보고 있다 왜 이제 왔어?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니 애틋해진다 오랜만의 재회라 서로가 서로에게 서투르다 ―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 집 가서 화분에 물 주고 씻고 잤어 일어나서는 다시 씻고 시든 화초를 버렸어 ― 어떻게 나를 세 번이나 버려? 내가 믿는 어제는 아주 오래전의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의 기억에만 어제와 오늘 사이에 커다란 공백이 생겨버린 것··· 그렇다면 얼마만 한 크기인지? 너에게 오랜만이라면 언제인지? 공백 사이에 우리의 만남이 세 번이나 있었는지? 나의 어제는 일 년 전쯤이었을지? 혹은 일주일 전인지? 사실은 정말로 하루 전인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동안 너는 다신 가지 마··· 되뇌고 있고 나는 어떤 죄책감에 휩싸인다 사람을 세 번이나 버린 게 정말로 나라면 정말로 미안할 일이다 미안하지··· 미안해··· 사과하다가 왜인지 버려진 느낌이 든다 사람을 네 번씩이나 버려 놓고 그런 생각을 한다 어제 못다 한 이야기도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했어? 네가 떠난 자리에서 발을 몇 번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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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머리맡에 펼쳐둔

머리맡에 펼쳐둔 민소연 밤이 진부해졌을 때 우리는 우리가 겪지 않은 일들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겪어본 것처럼 ― 키우던 고슴도치가 툭하면 앓는 거야. 생긴 건 안 그러면서, 튼튼할 것처럼 생겨놓고 그러는 거야. 밥도 안 먹고 몸도 벌벌 떠는 거야. 털도 빠지고. 그래서 아프지 좀 말라고 소리를 질렀어. 막 울면서 야단쳤어. 그랬더니 몇 번 휘청이다가 죽었어. ― 꿈을 꿨거든. 이 리터 생수 여섯 병씩을 양손에 들고 모르는 길을 걷는 꿈. 어딜 가는지도 모르겠는데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건 분명했어. 팔이 저리고 욱신거려서 물병을 내려놓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그곳에 가야 했으니까. 도착해야만 이걸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 그러다 중심을 잃어서 깨어났거든. 내가 벌서는 중이었더라. 양팔을 든 채로 잠이 든 거였더라. 신기하지 않아? 온몸에 힘을 주고도 잠을 잘 수 있다는 게. 꿈을 꾸는 동안 팔을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다는 게. ― 성실했던 거지. ― 그렇지. ― 동생이랑 흔적기관에 대해 얘기하다가 싸운 적이 있어. 귀를 움직일 수 없게 된 게 진화인지 퇴화인지에 대해. 분명히 퇴화인데 동생은 자꾸 진화래. 결과적으로는 그렇대. 쓸모가 없어져서 기능을 상실한 건 효율적인 거래. 결과적으로 이날 우리는 서로에게 발길질했어. 이날 우리의 관계는 퇴보했을까? 결과적으로는 진보했을지도 모르지. 아니 아직 결과가 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우리가 죽어서야 결과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죽은 뒤에 결과를 논할 수는 없지. 결과적이라는 말은 대체 언제 써야 하는 거야? ―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다가 떨어져 본 적 있어. 결과적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지. 결과적으로는 떨어졌어. 더 이후의 결과를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다치지는 않았어. ― 그렇구나. 결과적으로 떨어졌다고 해야 할지 결과적으로 괜찮았다고 해야 할지 도통 구분할 수가 없구나. 결과라는 건 정말 모호한 거구나. 베개 위로 물을 엎질렀다 누운 채로 물을 마시려던 중이었다 함께 흥건해진 네 얼굴을 바라보다가 돌아누웠다 이상했다, 우리가 함께 물을 맞을 거리에 있었다는 게 더 깨어나야 할 꿈이 있는지도 모를 일 물컵을 쥔 양손이나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처럼 헐겁지만 오래 잡아두고 있는 것 아직 많은 것이 그대로였다 떨어뜨리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다

  • 관리자
  • 2023-07-01
4월 말

4월 말 류성훈 제초된 밤에게서 온통 박 냄새가 났다 비온 후의 천변이 죽은 풀과 죽은 새들 사이에서 나물을 삶아 건지는 4월 말이 저온 다습한 구름을 후 후 불어내고 있었다 죽은 꽃들과 태어나기 전의 꽃들 사이의 공백을 산책이라 부르며, 옛날엔 사혼이나 요기를 호리병에 가두었다는 말을 생각하며 박속을 긁어 넣으면 무보다 국물이 더 시원해진다던 비구스님의 입과 술병의 입구가 번갈아 떠올랐다 오늘 아무것도 못 했다는 말도, 너무 피곤해서 그랬다는 말도, 종일 굶었다는 말도, 배부르니 그만 됐다는 말도 아무도 믿지 않던 날, 조향을 버린 승용차가 그대로 인도를 들이받고 아침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들개와 밤에게는 뒤통수를 보여주는 게 아닌 것처럼 우리의 어제에는 오늘의 얼굴을 보여주는 게 아니었다 아무런 자신도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늘 여기를 떠나야 할 때라고 말하며 박 속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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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1
장수풍뎅이

장수풍뎅이 류성훈 걸음을 선물하고 싶은데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가벼웠는데 이제 더는 갈 수 없을 것 같아, 두 다리로는 진입할 수 없는 지형으로 사람을 더욱 초대하는 산길을 나는 열 살 때부터 보았다 엄마, 포충망이 없어, 길이 없어 갈 수 없는 경우와 의지가 없어 갈 수 없는 경우가 모두 같은 외골격으로 추억을 나누는 건 우리가 자라 온 척 해왔기 때문일까 당장 갖다버리라는, 그동안 어디서 뭘 했냐는 얘기 속에서 유년은 마디가 많아 더욱 징그럽고 반짝이는 시절, 나는 한 가지 빼고는 모든 게 싫었던 여름의 얼굴을 더 닮는다 꿈은 하나여야 하고 두세 개는 안 돼, 우리나라엔 꿈이 많이 달린 벌레 같은 건 안 살거든 도감에 있으면 숲에 없고 숲에 있는 건 도감에 없는,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저 헬리콥터의 이륙 좀 봐 바로 저게 내 유년인데 저건 내 건데 무소가 물소가 아니라 코뿔소라는 뜻임을 부끄러울 정도로 늦게 알았던 나는 가장 좋아하는 동물에 대해 혼자 떨떠름해 했다 앞뒤 안 가리고 호구를 두르고 정중선을 치고 나갈 듯 가시덤불을 요리조리 피해 가면서, 날이 쉽게 저물고 무서울수록 설레어, 내가 꿈처럼 은밀하게 걸었던 산길은 원하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을 주었는데 여름밤 아래서 뿔이 두 개 난 내 꿈을 행복하게 주워들고 굼벵이 양식장이 납품한 아름답고 힘센 옛 꿈 앞에서 나는 이제 아무런 뿔도 없는 나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나의 여름 산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내가 가진 손칼이 당신들에게 흉볼 거리가 되듯 새벽 아파트 입구에서야 잡았던 하늘소의 금빛 더듬이가 설마, 의 느낌으로 고이 버려진다 새로 산 유년을 승계할 시간, 내가 나무에 꿀을 발라 먹였던 단단한 뿔들은 지금 어느 가로등을 들이받고 있을까

  • 관리자
  • 202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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