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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 작성일 2022-10-04
  • 조회수 1,058

[제37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 시 부문 우수 ?]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 40주년을 기념하여 5개년(2018~2022년)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 장원·우수상 수상작품이 게재됩니다.

 

 

가방

 

 

김소나

 

 

 

 

    나는 나를 꺼내지 못해요
    나는 낯선 곳에 빠져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아요
    내 비명소리가 흘러넘쳐
    벽에 떨어뜨린 물감처럼 흘러내리고
    나는 내 입에서 튀어나온 딱딱한 글자들들 등에 대고 눕죠
    부드럽지 않지만 괜찮아요
    종일 여기서 나를 기다릴 거예요
    이보다 좋을까요

 

    나는 쓰잘데 없는 것들을 가방 안에 넣어 두곤 하죠
    검은색이 되어보지 못한 백색의 문장들
    뱉고 뱉은 색으로 까맣게 변한 스케치북
    잘 열리지 않아 빽빽한 서랍들
    친근하지 않은 왼쪽 손목
    안개 한 줌, 연기 다섯 줌, 싸락눈 여섯 줌, 폭우 한 줄기
    빨다 버린 사족들
    기차처럼 바닥이 덜컹거려요

 

    울랄라
    나는 매일 가방 안으로 출근해요

 

    붉은 속지 속 무가당 사탕,
    은근한 바닐라 초콜릿 향,
    검은 구름으로 가방을 만들어요

 

    가방 바닥에는
    발자국으로 어지러운 구름
    아끼고 아껴
    뚝 떼어 보관해둔 여덟 번째 요일
    내가 버린 손가락들이 있죠

 

    천둥과 번개와 폭우도 넣어두고
    가끔, 길을 걷다, 꺼내보는 가방

 

    이보다 더 좋을까요
    내 가방엔 아무 것도 담지 않아요
    그래서 더 무겁죠

 

    나는 가방 안으로 외출해요
    오늘도 피사의 사탑이 더 기울어져요

 

 

 

 

 

 

 

 

 

 

   《마로니에여성백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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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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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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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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