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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여인

  • 작성일 2012-09-30
  • 조회수 420

도마뱀 여인
 


스물여덟 살 청년 이오영은 우발적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여정에 올랐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이 그를 괴롭힌 지 벌써 몇 달째였다. 중학교 미술교사였던 그는 그다지 도덕적으로 살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또 그다지 완전한 사명감이나 목적의식은 없었다. 그는 스스로 불완전한 영혼, 불완전한 육체를 가졌다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인정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그저 쉬고 싶은 마음 뿐 만사에 의욕을 잃어가는 그때였다.
 
더욱이 그 무렵 이오영이 3년 동안 짝사랑해오던 여인이 떠났다.
"뭘 타고 떠나실 건가요?"
"열차요. 열차를 타고 떠날 거예요."
"열차만으로는 멀리 갈 수 없을 텐데요."
"멈추지 않는 열차를 찾아 떠나야죠."
"말씀을 너무 애매모호하게 하시는군요. 뭐, 아무쪼록 즐거운 여행길 되기 바랍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에 이오영은 크나큰 한숨이 나왔다. 이오영은 맥없이 등을 돌렸다. 쓸쓸히 고개를 숙인채로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독하디 독한 술을 목에 들이붓듯 가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이오영은 그녀가 있는 쪽을 향해 돌아섰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가슴이 무너져 내림을 느끼며, 달려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저기, 저기, 저 저 저.......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저 할 일 디게 없거든요?"
 
결국, 유이나와 함께 여정에 오르지 못한 이오영은 며칠 후 홀로 떠난다. 그가 고단한 심신을 다스리기 위해 도착한 곳은 충남 부여군 덕대산 중턱에 위치한 주혹사라는 사찰이었다. 통일신라시대 화랑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 스무 살 때 처음 찾은 이후 그에게는 네 번째 방문이었다.
 
주혹사에서 묶기로 한 이오영은 사찰방에 짐을 풀고 나왔다. 밖에는 산들거리는 바람에 제각기 고개 흔드는 가을들꽃무더기와 오색찬란한 색으로 물든 온갖 나뭇잎사귀들이 먼저 그를 반겼다. 자주색, 주황색, 노란색, 다홍색.......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가을산사 풍경과 제법 어울릴만한 문구를 찾아 읊으며 이오영은 길을 거닐었다. 제대로 외울 줄 아는 불경구절이 있었다면 그것을 읊었겠지만 그는 불경을 알지 못했다. 정성만 들어간다면 꼭 불경구절이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으리라고 여겼다. 이오영은 불교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다시피 하면서 네 번이나 이곳에 방문한 자신이 참 유별난 인간이라는 생각도 했다. 
무겁기만 했던 머릿속이 비워지나 싶더니 어느덧 산사의 정취에 저도 모르게 동화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뭇 진지한 시선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사이, 속세에서의 혼란했던 일상의 파편들은 자연스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주혹사 입구를 등 뒤로 해서 우측 편으로, 우거진 억새풀 사이를 헤치고 15분 즈음 걷다 보면 나오는 바위산 기슭, 바로 그 아래 약수가 솟는 샘이 있었다. 이오영은 맑은 샘물이 마시고픈 마음이 들어 그 샘이 있는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무수히 휘날리는 억새풀 사이로 난 길을 걷고 있자니, 양 옆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들꽃들이 보였다. 발걸음을 안락하게 해주는 꽃들이 좋구나, 좋아. 보기만 해도 가슴을 부들거리게 하는 꽃무더기에 매혹당하길 한참,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동자승이 한 명 보였다. 열 살 정도 된 애송이로, 하얀 물통에 샘물을 받아 오는 길인 듯싶었다.
이오영이 삐쭉 고개 비틀어 동자승에게 말을 건넸다.
"야, 여기, 여기 핀 꽃 이름이 뭔지 넌 아냐?"
"몰라요. 내가 어떻게 알아요."
동자승은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오영의 물음에 모른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더니 그냥 지나쳐버렸다.
'저놈 자식, 저거 스님이라고 안 불러줬다고 삐쳤나? 꼴에 스님이라고.'
순간 이오영은 동자승의 빡빡머리에 굵은 매직펜으로 자신의 싸인을 해주고픈 충동이 일어났다. 실제로 매직펜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찌될지 모를 일이었다.
이오영을 뒤로하고 가던 동자승이 몇 발짝 걷다가 돌아섰다.
"저기, 처사님 지금 어디 가세요?"
"응? 약수 마시러. 왜?"
"샘에 가면 놀라실 텐데."
"거기에 뭐 재미있는 거 있냐?"
"엄청 큰 도마뱀이 거기 있거든요."
"웬, 도마뱀?"
"도마뱀신이 강림했어요."
참으로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이오영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했다.
"야, 내 일생에 도마뱀신은 처음 들어 본다. 용신도 아니고 말이야."
"도마뱀을 다른 말로 석룡자(石龍子)라고도 하지요."
"별걸 다 아는구나."
"거기 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는 저도 뭐라고 말 못해요."
동자승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경고하듯 말을 마치고 홱 돌아섰다. 이오영은 기분이 씁쓸했다.
'우리나라는 하여간 미신타파를 해야 돼.'
동자승의 뒷모습이 희미해지고 억새숲을 휘젓는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속에는 먼지가 가득 섞여있었다. 머리카락이 날리고, 옷깃이 날리고 뿌연 먼지가 이오영의 시야를 가렸다. 이오영은 뒤돌아서지 않고, 단지 먼지가 눈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약간 숙였다. 잠자코 그렇게 있자니 어떤 거친 황무지에 홀로 선 방랑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모래바람 속에서 슬펐다. '.......이유 없이 슬퍼지는 건, 병인데 말이야.'
 
'마하반야,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관자재보살.'
느긋한 마음으로 마지막 주문을 외우고 나자 드디어 샘 근처에 도달해있었다. 샘가에는 먼저 와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하얀색 티와 청바지차림을 한 아가씨의 뒷모습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는 시늉만 내는 중이었다.
산사에서 만난 여인이라. 무척 고적하고 낭만적인 기풍이 느껴졌다. 이오영은 다소 유치하게도 의식적으로 고독한 눈빛을 연출하며 그녀가 있는 샘 앞으로 유유히 다가갔다.
"어흠."
옆에 있는 하얀색 티의 아가씨를 의식하지 않는 척하며 이오영은 헛기침 소리에 근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런 곳에서 사람을 만나면 의례히 먼저 인사를 주고받기 마련이지만, 이오영은 일단 물부터 마시고 말을 하든 말든 하기로 했다.
이오영이 샘물에 둥실 떠있는 바가지를 집으려 허리를 숙이는 순간이었다.
"파직!"
이오영의 머리를 강타한 물체가 있었다. 먼저 샘가에 와있던 그녀가 커다란 표주박으로 이오영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친 것이 아닌가. 이오영은 바가지에 머리를 맞는 순간에는 아프다는 생각도 못했다. 너무 뜻밖이어서 그저 놀란 마음에 아픔이 묻히고 말았다.
깨지고 남은 바가지 손잡이 부분만 쥔 그녀가 호들갑을 떨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머.......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떡해, 어떡해......."
아무 소리 없이 굳어있던 이오영이 숙였던 허리를 서서히 들어올렸다. 그녀가 들고 있는 깨진 바가지를 본 이오영은 그제야 떠나갈듯이 비명을 질렀다.
"아! 아이 진짜, 아아 아야 아아, 캬흐 흐흐 흑. 흐으윽......."
표주박으로 머리통을 얻어맞은 이오영은 욱신욱신 거려오는 아픔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오래돼서 삭은 바가지라면 아프지 않았을 텐데,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바가지였나 보다.
아가씨는 계속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심하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어떡해, 이걸 어떡해......."
이오영이 두 손으로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그녀를 향해 소리 질렀다.
"아이, 증말! 왜 때려요?! 흐......."
그녀가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테레비에서 보니까, 글쎄 어떤 여자가 아무 이유 없이 어떤 남자 머리에 바가지를 쳐서 깨트리더라고요. 머리통에 바가지가 깨지는 게 너무 재밌어 보여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가씨의 변명에 어처구니가 없던 이오영은 억새숲에서 만났던 동자승이 '거기 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는 저도 뭐라고 말 못해요.'라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 자식도 이 여자한테 바가지로 얻어맞았나 보네.'
생각에 잠겼던 이오영은 문득 시선 돌려 샘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바가지에 얻어맞고 너무 엄살을 떤 것 같아서, 표정관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오영의 얼굴 옆으로 흔들흔들 춤추는 커다란 초록색도마뱀이 보였다. 하늘에서는 이내 황금색은행잎 한 장이 살랑살랑 내려와 도마뱀의 눈을 가렸다. 이오영은 그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은행잎은 살며시 흘러 이오영의 눈에 박혔다. 그때 이오영이 고개 돌려 옆에 서 있는 아가씨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가씨가 입고 있는 하얀 티에는 커다란 초록색도마뱀이 혀를 내놓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오영의 상태를 살피느라 잔뜩 숙였던 허리를 그녀가 들었다. 둘이서 시선이 마주쳤다.
맑은 샘물 같은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안 아프신가 봐요?"
그녀의 물음에 이오영은 엉뚱한 말을 했다.
"아가씨는 도마뱀 여인인가 보네요."
 
총총히 서 있는 크고 작은 나무를 흔드는 산바람에 가을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자주색, 주황색, 노란색, 다홍색....... 주변의 정취는 풍요로웠고, 또한 평화로웠다.
계곡물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에서 걸음을 멈춘 그가 불현듯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드래곤 레이디라고 아세요?"
"용 여인요?"
"네, 용 여인이죠. 노래 제목인데, 아가씨를 보니까 그게 생각나네요."
"음, 제가 도마뱀티를 입고 있어서 그런가 보죠?"
"네, 아주 인상적이에요."
"그래서, 저를 도마뱀 여인이라고 하시게요?"
"아뇨, 뭐 그냥 그렇다는 거죠."
그때 도마뱀 여인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사실 전 도마뱀이에요."
그녀의 말에 이오영은 덤덤했다. 황당해하지 않았다. 허황된 이유로 자신의 머리를 바가지로 내리칠 만큼, 특별나고도 난해한 성격의 그녀였기에 그런 말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봤다.
 
도마뱀 여인과 함께 곳곳을 거닐다 보니 어느덧 해는 가라앉고 있었다.
"잠은 어디서 잘 건가요? 난 절방에서 잘 건데."
"도마뱀의 동굴이 있어요."
도마뱀 여인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인적 없는 어둡고 깊은 산 쪽으로 혼자 들어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도마뱀 여인에게 급히 물었다.
"저, 아가씨 이름은?"
"김정미."
대답과 함께 그녀는 사라졌다.
 
이오영은 사찰방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열차를 타고 떠나겠다는 유이나의 말을 떠올리며 이오영은 주절거렸다.
아무도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 
나만이 열차를 기다린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달려오는 저 열차 
아무도 타지 않았다 
쓸쓸히 달려온 열차는 내 앞에 멈추어 섰다 
열차는 나를 바라본다 
누구인가 나를 기다린다고 한다 
나는 그를 만날 수 없다고 답한다
긴 침묵이 흘렀다
안개, 마음속 안개가 걷힐 때
다시 돌아오겠다며
열차는 내 곁을 멀어져갔다

두 손바닥으로 머리 뒤를 받친 채로 이것저것 생각에 잠겼을 어느 무렵, 천정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쥐가 한 마리 사는 것 같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꽤 요란스러운 것이 상당히 큰 쥐가 분명했다. 이오영은 벌떡 일어나 세게 천정을 한 번 때리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잠이 들었을 때 그 쥐가 내려와 물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깊은 산속으로 혼자 들어간 도마뱀 여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쩌나 고민하던 이오영은 굳은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고 몸을 일으켰다. 차근차근 가방을 찾아 둘러매고 손전등까지 꼼꼼히 챙겼다. 준비를 마친 그는 도마뱀 여인이 들어간 산속으로 향했다. 이 깊은 밤에, 험한 산중으로 무슨 정신으로 그녀를 찾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산길은 굴곡이 심했다. 손전등을 비췄지만 발끝에 자꾸 나무나 돌부리 같은 것들이 걸려 몇 번을 넘어질 뻔했다. 손전등빛을 보고 날아든 온갖 잡다한 벌레들이 그를 괴롭혔다. 가끔 얼굴에 달라붙는 거미줄 때문에 답답했다. 자꾸 나무잔가지들이 따갑게 얼굴을 때려왔다. 이토록 어렵게 산기슭을 걸어 오르다 보니 이제는 검은 산속의 기운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음산한 분위기를 부축이듯 산새들이 가끔 괴기스런 소리로 울기까지 했다.
그래도 꼭 도마뱀 여인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어두운 산속을 계속 헤매던 이오영은, 급기야 길을 잃게 됐다. 초조한 마음에 시간을 확인하자 새벽 한 시였다. 이오영은 잠시 쉬어가기로 마음먹고 두 다리를 뻗고 앉았다. 날이 새기 전까지 산에서 내려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이 산속은 공포다. 이오영은 가방에서 CD플레이어를 뺐다. 문득 격렬한 헤비메탈 음악을 들음으로 해서 두려움을 떨쳐볼 생각이었다. 먼저 Iron Maiden의 Aces High가 플레이 됐다. 산에서 음악을 들으니 주변잡음이나 시각적으로 신경 거슬리는 것들이 없어서 특별한 기분을 누릴 수 있었다.
몇 곡의 노래를 들었는지, 두려움은 그럭저럭 떨쳐졌지만 졸음이 쏟아졌다. 정신을 차리려 눈을 비벼보았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앉은 채로 그는 졸기 시작했다.
손전등의 빛을 보고 날아드는 벌레가 많았다. 손전등스위치를 끄고 눈을 감자 이내 잠은 더 깊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이오영은 잠결에 누군가 뒤에서 자신의 오른쪽어깨를 툭툭치는 느낌을 받았다. 이오영은 애써 눈을 떴지만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손에 꽉 쥐고 있던 손전등을 겨우겨우 켰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몸을 비틀어 뒤로 손전등을 비춰보자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호랑이가 보였다.
"학!"
이오영은 기겁했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정확히 손전등을 비춰봤다. 그것은 검은색 바탕에 포효하는 호랑이 얼굴 그림이 담긴 티를 입은 사람이었다. 참으로 실감나는 호랑이 문양이었다.
이오영이 손전등을 조금 위로 들어 그 사람 얼굴에 비췄다. 젊은 여자인 그녀의 얼굴도 호랑이와 비슷해보였다. 그녀의 모습에 이오영은 위축됐다. 이오영이 굳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운을 뗐다.
"저기, 저, 이 야밤중에......."
손전등빛에 눈이 부신지 호랑이 여인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
"야, 이놈아! 내려가!"
그것은 그야말로 호랑이의 포효와도 같았다.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호통에 이오영은 사지를 벌벌 떨었다. 
다시금 그녀의 포효가 산중에 울려 퍼졌다.
"내려가 이놈아!"
이오영은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쇼크를 받은 이오영은 더듬더듬 산중을 기다시피 하다가 겨우 일어나 엉겁결에 달렸다. 무조건 도망쳤다. 달리는 와중에 이리저리 부닥치고 긁히고 넘어졌다 일어나길 수도 없이 반복했다. 어둠 속에서 위험천만한 달리기를 하다가 결국, 그는 산비탈에서 굴러 기절하고 말았다.
이오영은 아침햇살이 산중의 우거진 초목의 틈을 꿰뚫었을 때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이오영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주혹사에 들어섰다. 왼쪽허벅지를 어딘가에 심하게 부닥쳐 거동이 불편한 것을 이 악물고 숨기며, 더욱이 의연한 표정과 자세를 잃지 않으며 이오영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일일이 인사했다.
사찰주지와 얘기를 나누는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여인의 등에 '용용 죽겠지?'라고 크게 적힌 글이 괜히 사람을 약 오르게 하는 것 같았다.
이오영이 뒤편에 자기를 봤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그가 있는 쪽을 향해 그녀가 몸을 돌렸다. 그녀는 다름 아닌, 산속에서 만난 호랑이 티를 입은 여인이었다. 호랑이 여인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오영은 뒷걸음쳤다.
 
산중에서 지나치게 혹사당한 이오영은 피곤했다. 방에 들어선 이오영은 조금만 더 눈을 붙이려 바닥에 깔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편안히 눈감고 긴장을 풀려고 할 때였다. 오른쪽 무릎 옆에 뭔가 거치적거리는 느낌이 일었다. 이오영은 전날 천정에서 바스락거리던 쥐가 이불속에 들어가 있는 거란 생각에 기겁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불을 들어올렸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팔뚝만한 초록색도마뱀이 눈감은 채로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저, 가끔 혀만 날름거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