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재미나요
시
문장의 시선-
시 황인숙 - 고달프고 사나운
고달프고 사나운 황인숙 느지막이 장년 훌쩍 지나 만난 나의 반려 내 젊은 날 친구랑 이름 같은 누군가 돌아볼지 몰라요 아니, 재길이 그대 부른 거 아니에요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라알!” 시도 때도 없이 길바닥에서도 짖어 부르는 내 반려욕 사납고 고달픈 맘 달래 줍니다 사실 나는 내 반려욕을 사랑하지 않아요 못나기도 못났으니까요 어디서 그렇게 나 닮은 욕을 만났을까요 만나기는 뭘 만나 내 속으로 낳았지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34상세보기 -
시 황인숙 - 흘러간 사랑 노래
흘러간 사랑 노래 황인숙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흘러간 팝송을 듣다가 “나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뭐? 그걸 고백이라고 해? 사람 우습게 보네 “세상 모든 이가 당신을 사랑하지요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해야지 “그 사람이 당신을 나보다 더 사랑할까요?” 뭐? 그렇다, 어쩔래? 아이고, 나도 참 라디오를 흘겨보며 왜 발끈발끈? 저 노래를 들으며 옛날엔 울컥, 뭉클했었지 징징거리거나 을러대는 사랑 노래 노래하는 저나 뭉클할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황인숙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7상세보기 -
시 김응교 - 글 쓰는 기계
글 쓰는 기계 김응교 사실 기계들은 자기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할 기계적 고독이 필요하여 자기만의 기계실에서 밤새 작동한다 그를 누구도 볼 수는 없겠지만 껍질이 날아간 뼈다귀 로봇 등 뒤 상자 서너 박스에는 유영을 멈춘 지느러미들 생선집 좌판에 파리 날리는 근간 시집들이 옆으로 누워 있다 그의 얼굴은 점점 기계를 닮아 가고 책 모양 사각형으로 바뀌어 옆으로 누운 가자미, 눈알과 손가락만 남아 상상력이 냉동되면 어떤 창작도 휘발되고 너무 많은 과거의 형태와 언어가 얼어붙어 더 이상 신선한 속살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 기계에게도 컨베이어에 실려 뜨거운 화덕에서 태워질 운명이 다가온다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98상세보기 -
시 김응교 - 멍쯔 삼촌
멍쯔 삼촌 김응교 내 피의 4분의 1에는 몽골 피가 흐르고 아마 4분의 1은 옛날 중국인 피가 흐를지 몰라 내 몸에는 지구인들 피가 고루 섞여 있을 거야 그니까 삼촌이라 해도 뭐 이상할 거 없지 중국에 삼촌이 산다 삼촌이 쓴 책에 역성혁명이 나오는데 우리는 비슷한 혁명을 몇 번 경험했지 제자가 많다는데, 나는 삼촌으로 부른다 중국인은 멍쯔라 하고 한국인은 맹자라 하는 멍멍, 차갑게 웃을 중국인 삼촌 우리는 계속 역성혁명을 하고 있어 불은 든 프로메테우스들이 많아 멍쯔 삼촌, 우린 심각해요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54상세보기 -
시 김태우 - 유통기한
유통기한 김태우 동네 슈퍼 한편 마감 할인이 한창이다. 누군가 정해 준 삶의 기한. 각기 다른 삶의 모양이 상자에 갇혀 있다. 우리를 보고도 지나간 수많은 인연들. 이 별수 없는 인연들이 돌아서는 순간. 우리는 오지 않을 내일을 내일까지 상상한다. 우리가 떨어진 상자 밖 미지의 세계.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그 손에 이끌려 도착한 작은 방. 그곳이 어딘지 목격자 하나 없는 밤. 어두운 방과 밤은 서로를 마주 보고도 말이 없다. 오지 않을 내일이 방과 밤 사이에서 우리를 한참 쳐다본다.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06상세보기 -
시 김태우 - 누명
누명 김태우 휴대전화 벨이 울립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는 발신자. 그와의 관계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멈춘 벨 소리.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의 흔적을 찾아 연락처를 확인합니다. 연락처에 저장된 그의 흔적. 하나 기억 어디에도 없는 그의 흔적. 기억에서 지웠다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휴대전화 속 그. 휴대전화 벨이 울립니다. 전화를 받자 낯선 목소리는 흔한 인사말도 없이 울먹입니다. 전화로 전달되는 낯선 감정들과 침묵을 메우는 흐느낌. 기억에 없는 그의 감정이 점점 나를 채웁니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끊긴 전화. 하고 싶은 말이 침과 함께 식도로 사라집니다.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립니다. 잠시 망설이다 겨우 받은 전화. 그의 불편한 흐느낌에서 내가 나옵니다. 익숙한 거리를 걸으며 함께 먹던 음식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그의 얼굴. 차분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와 함께한 시간의 누명을 씁니다.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74상세보기 -
시 박참새 - 배교
배교 박참새 예수는 좋겠다 애비가 없어서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860상세보기 -
시 박참새 - 놀이
놀이 박참새 이것은 카드게임*의 일종이다. 앞면에는 그림이, 뒷면에는 그림이 없는 카드를 짝에 맞춰 준비한다. 준비된 카드를 무작위로 엎어 배열한다. 예를 들면 차례마다 두 장의 카드를 뒤집는다. 그림 일치 시 계속 진행, 불일치 시 원상태로 복귀한다. 뒤집은 횟수가 적거나, 회수한 카드가 더 많은 쪽이 이긴다. 혼자 놀이 시, 카드 전부를 회수하기 위해 필요한 횟수를 최대로 줄여 보는 데에 의의가 있다. 뒷통수만 보아도 너 같다 앞길이 안 보인다 걸음소리로도 알 수 있다 서걱 서걱 앞뒤가 다르다 승패가 걸린 내 몫이 다 걸린 무시무시한 동전 뒤집기 예로부터 동전의 앞면과 뒷면은 일종의 시대적 캔버스였습니다 손안의 역사적인 모멘텀 현금 없는 버스 현금 없는 카페에 없는 것 : 소중한 이웃에게 나누는 작은 행복 10원의 기쁨 사랑의 동전 나눔! 숫자가 앞이라면 뒷면의 상징은 상징으로서의 기개를 잃어버리게 되고 상징이 앞이라면 뒷면의 숫자는 화폐에서 작동되는 가치를 훼손당한다 중요한 게 앞인가 뒤인가? 앞뒤인가? 뒤앞이라는 말이 어색하니까 그럼 앞이 더 중요한 건가? 이게 다 무슨 의미냐고 생각한다면 앞도 뒤도 중요한 것이 아닐 텐데 왜 우리는 뒤앞이라고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을까? 모부라는 말 괜히 쓴 거죠 튀어 보이려고 한 글자 차이다 한 글자 바꾼 것도 아니고 엎은 것뿐인데 온 세상이 난리네 동전 뒤집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나는 손톱을 바짝 깎는단 말이야 ㅇㅣ ㅇ ㅇㅇ ㅇ ㅇ ㅣ ㅌ 날아오른다 앞뒤바뀔 우리의 운명 손등에(손의 앞면?) 동전의 앞뒤 착지하면 재빠르게 ㅊㅏ ㄱ 손바닥(손의 뒷면)으로 내리치듯 가린다 심장 조여온다 마지막 바꾸기 찬스? 앞이 너 뒤면 나 아니다 뒤가 너 앞이 나 아 아니 어 어떡하 어떻게 해 나 살아? 깍지 낀 손가락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살가죽으로 만든 쇠고랑을 여러 개 차고 있는 기분 가슴이 터질 것 같을 때마다 꽉 쥐었던 손들 동행자를 놓쳤다면 놓친 그 자리에서 절대 떠나지 말라고 배웠다 똑같은 카드를 똑같이 뒤집는다 뒤집는 면은 똑같다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데도 내게 회수되는 일이 없다 두 마리의 새가 날아온다 약간 앞서 있던 새가 자연을 반사하여 마치 풍경화 같은 유리에 머리 박고 죽는다 새에겐 유리나 유리 건너나 같은 뒷모습이기 때문이다 앞이었다면 뒤따라오던 새도 똑같이 창에 머리를 박았다 못 봤나? 친구가 대가리 박고 죽는 것 기억을 못 하나? 집중을 안 했나? 여기 단 두 장의 카드가 있다 결국 당신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내가 바라는 둘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886상세보기 -
시 한여진 - 빙의
빙의 한여진 이빨이 빠지는구나 머리카락이 빠지는구나 빠질 것이 다 빠질 때까지 여기 함께 있었다 몸은 훌륭한 집이었다 작은 방엔 국수 쌀 설탕 소금 가득하고 텃밭에는 물고기비 꽃비 쇳가루비 흙비 창밖으로 주인 없는 무덤이 보인다 기억나지 않는 염원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한 복수 모든 것이 희미하다 누런 벽의 달력만이 남아 지나온 시간을 말해 줄 것이다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12상세보기 -
시 한여진 - 다리세기
다리세기 한여진 어허 어허 어하리 넘차 너화넘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설워 마라* 사람은 셋 우리는 마주 앉아서 다리를 곧게 뻗고 내 다리 사이에 네 다리 엇갈려 끼워 넣고 신명나게 다리를 잡고 다리를 쥐고 어허 사람은 셋인데 다리는 일곱 그렇담 여기 누군가 있다는 거지 함께 놀아 보고 싶다는 거지 명년 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만은 우리 인생 한 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아까부터 꽃가마는 지당(池塘)을 돌고 있는데 누굴 데려간다고 한대 기다리고 있대 꽃가마 타고 갈 사람 여기 여기 누구인가 다리를 고르고 다리를 구르고 북망으로 가는 새야 너는 슬피 왜 우는가 짝을 찾아 가려는가 너도 슬피 왜 우느냐 우리는 훌쩍 커버려서 다리 사이로 꿈도 흘려보내고 죽은 자식도 흘려보내고 놋그릇과 개다리소반도 흘려보내고 그래도 사람은 셋, 다리는 일곱 얘, 아직 좀 더 놀고 싶은 거야? 오줌도 콸콸 설움도 콱콱 이제 와 눈치 볼 것 뭐 있나 다리 사이로 전부 흘려보내고 나면 저어기 옛날에 봤던 그 꽃가마 온다 산 넘어 물 넘어 왔다더니 금방이구나 독버섯처럼 알록달록 예쁜 집 가련한 건 인생이요 불쌍한 건 혼이로다 어허 어허 어하리 넘차 너화넘 이젠 누굴 데려가려 하나 오기 전에 우리가 가볼까 갑시다 가자고요 다리 사이에 다리 모래자갈 되어 줄줄 흐르는데 어때, 신명나게 놀아 보니 어데, 신명나기만 했겠어 다리 일곱이 말한다 어허 어허 어하리 넘차 너화넘 명사십리 해당화야 너도 너도 가자꾸나 * 상두가, 저승길 가는 혼령 달래는 소리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04상세보기 -
시 함기석 - 죽음 씨 이야기
죽음 씨 이야기 함기석 죽음은 사는 게 지겨워서 죽음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죽음은 죽기로 작정하고 딱 한 번 죽음은 어떻게 죽으면 잘 죽을까 고민하다 죽음은 위스키 한 병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죽음은 죽음이 사는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는데 죽음이 입주한 아파트는 끝 층이 보이지 않고 죽음이 탄 엘리베이터도 37층에서 고장 나서 죽음은 걸어서 지그재그 계단을 오르는데 죽음은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르고 죽음은 다리가 너무 아프고 죽음은 오줌이 너무 마려워서 죽음은 아무 층에나 내려 오줌을 싸고 죽음은 비상구 계단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죽음은 죽기가 영원히 불가능한 꿈만 같아서 죽음은 죽기가 살기보다 힘들다고 긴 한숨을 쉬며 죽음은 죽지도 못하는 자신을 자학하면서 죽음은 쿠바 담배 Dream Life를 쭉 빨았는데 죽음은 눈알이 뱅뱅 돌고 죽음은 어질어질 기분이 해롱해롱해지더니 죽음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는데 죽음은 이상하고 낯선 파도 꿈에 빠져들었는데 죽음은 꿈속 섬에서 마침내 죽는데 멋지게 성공해서 죽음은 야호! 크게 소리쳤는데 죽음은 자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잠을 깼는데 죽음은 으스스 몸이 떨리고 콧물이 흐르고 죽음은 도무지 죽어지지 않는 자신이 너무 미워서 죽음은 다섯 살 아이처럼 떼를 쓰면서 죽음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57상세보기 -
시 함기석 - 빙판 위의 발레리
빙판 위의 발레리 함기석 네모 빙판에서 팽이가 돈다 태양의 눈 닮은 소금행성이다 윗면에 매혹의 시가 결을 따라 둥글게 적혀 있다 회전하는 빛을 내뿜어서 난 문장을 읽을 수 없다 팽이는 발레리―나(na)의 자세로 팽팽 빠르게 돈다 내가 다가가면 빙판 동쪽 숲으로 달아나 더 빠르게 자전한다 남쪽 벼랑으로 달아나 공전한다 나는 계속 팽이를 쫓지만 팽이가 품은 문장을 읽을 수 없다 팽이는 이제 서쪽 사막으로 달아나 블랙홀처럼 돌고 돈다 지평선 너머에서 까마귀 떼가 날아와 팽이 속으로 빨려든다 구름도 노을도 지평선도 흡수되어 사라지고 까마귀 울음만 백색으로 메아리친다 내가 쫓기를 그만두고 빙판에 얼어붙자 북쪽 밤하늘에서 여신의 눈동자 닮은 팽이가 빙글빙글 내려온다 내 곁에서 발레리―노(no)의 엔딩 포즈로 빠르게 돌다가 갑자기 멈춘다 나는 숨을 멈추고 팽이의 몸에 새겨진 시를 읽는다 나이테 따라 검붉은 핏줄들, 소금 물결만 잔잔히 웃고 있다 물결 속에 두 눈이 사라진 아이 얼굴이 비치다 사라진다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78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