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 안의 볼드모트
- 작성일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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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 안의 볼드모트
권혜영
내가 아홉 살이고 동생이 여섯 살이던 무렵, 우리 가족은 매일 밤 차를 타고 항아리 바위가 있는 계곡에 갔다. 집에서 차로 20분은 달려야 나오는 곳이었다. 산마루의 고갯길을 여러 번 넘으며 비포장 도로 옆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실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계곡 주변 바위의 형질이 급변하는 지점이 나타났다. 세차게 흐르는 물 사이로 솟은 기암괴석들에는 하나같이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걸 지리학 전문 용어로는 포트홀이라고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항아리의 입구처럼 홈이 패었다고 해서 항아리 바위라고 불렀다. 바위 가운데에 물이 고인 구멍에는 올챙이나 송사리가 서식했고, 물이 마른 구멍에는 이끼 낀 자갈돌들이 쌓여 있었다.
우리 집의 볼드모트는 항아리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볼드모트와 벨라트릭스는 나와 동생이 어렸을 때 해리포터 시리즈를 열심히 챙겨보다가 붙이게 된 아빠와 엄마의 별명이었다. 물론 우리끼리 뒤에서 남몰래 부르는 호칭이긴 했지만.
어쨌든 볼드모트는 민물고기를 잡는 행위로 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볼드모트는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영농후계자였다. 그런데 농사일엔 소홀하고 밤마다 물고기를 잡는 데만 혈안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아도 단순한 취미생활이라기에는 어딘가 병적으로 집착한 구석이 있었다. 한밤중에. 집 앞 냇가도 아닌. 자동차로 20분을 달려야 나오는 산골짜기를 밤마다 출근했던 것이다. 볼드모트는 그렇게 매일 거센 물살을 헤치고 수심이 허리까지 올라오는 곳으로 향했다.
볼드모트가 양동이 한가득 물고기를 잡아오는 동안, 벨라트릭스와 나와 동생은 자동차 문을 잠그고 계곡 입구에서 기다렸다. 벨라트릭스는 앞좌석에 앉아 ‘Now’와 ‘Max’ 같은 빌보드 최신 팝송 믹스 테이프를 듣곤 했다. 어린 동생은 내 옆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나는 가져온 책을 읽고 싶어서 조명을 켜달라고 졸랐지만 벨라트릭스는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깜깜한 도로 위에서 불을 켜면 아이들이 위험에 노출될까 걱정되어 그러는 건 아니었고, 자동차의 배터리가 방전될까 봐 그러는 거였다.
나는 할일 없이 벨라트릭스가 틀어 놓은 2000년대 초반 히트 팝송을 들으면서 시커먼 계곡 아래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 가끔씩 차들이 고갯길 사이에서 어둠을 뚫고 나타날 때마다 묘한 긴장과 흥분을 했다. 테이프가 A면을 훑은 다음 까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B면으로 뒤집힐 즈음이면 볼드모트가 돌아왔다. 볼드모트가 손전등을 들고 물가 멀리서부터 걸어오면 희미했던 불빛이 점점 커지다가 계곡 입구의 갓길을 환히 밝혔다. 그때마다 눈뽕을 당한 나는 팔을 들고 이마에 차양막을 쳤다.
볼드모트는 양동이 속 자신이 잡아온 물고기들을 한 마리씩 비추며 자랑했다. 동자개, 꺽지, 쏘가리, 모래무지, 메기. 기억력이 별로인 내가 지금껏 그때 잡혔던 어종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건 볼드모트가 하도 우쭐거리며 말했기 때문에 세뇌당한 탓이 크다.
포획한 물고기들은 집 뒷마당에 있는 욕조 수족관으로 옮겨졌다. 볼드모트는 깨져서 망가진 고물 욕조를 버리지 않고 물고기를 보관하는 용도로 썼다. 어린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뒷마당을 오가며 욕조 수족관을 구경했다. 세라믹 옆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다슬기 무리와 우묵한 바닥에 가라앉아 이따금씩 콧구멍만 벌름대는 메기와 촐싹거리며 헤엄치는 민물뱀장어. 나는 볼드모트가 아무리 뻐기고 뽐낸다 한들 동자개, 꺽지, 쏘가리, 모래무지 같은 건 이름만 알 뿐이지 그 생김새는 구분하지 못했다. 다슬기와 메기와 뱀장어 정도만 이름과 생김새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
“지 혼자 잡으러 가면 됐잖아.”
동생이 그렇게 말하며 솎아낸 잡초 덤불을 내려놓았다. 키가 작은 풀은 손으로 뜯어냈고 무릎까지 오는 건 낫으로 베어냈다. 우리는 알코올 전문 병원에 입원한 볼드모트를 대신해 김을 매고 논물을 관리하러 오랜만에 집에 왔다. 나는 금요일 밤에, 동생은 토요일 아침에 도착했다.
“그때도 술 때문이었을걸. 술 못 마시게 감시하려고 다 같이 따라다녔던 것 같아.”
나무판으로 덧댄 게 있어. 그걸 찾아서 열어. 발목이 찰랑거릴 정도로만 수위를 조절하면 돼. 나는 벨라트릭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일직선으로 난 좁은 둑을 따라 걸으며 논의 배수구를 찾는 중이었다. 벨라트릭스는 볼드모트와 함께 병원에 며칠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으니 우리더러 주말에 와서 일 좀 대신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부탁이 아닌 지시였다. 그리고 창피하니까 너희는 병문안 같은 건 절대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말 안 해도 어차피 안 갈 생각이었지만.
동생은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엄마만 가지 잘 밤에 도대체 우리까지 왜 데려간 걸까?”
나무 판막이를 열자 도랑과 연결된 수로에서 물줄기가 졸금졸금 흘러내렸다. 방죽 벽에 붙어 있던 우렁이들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졌다. 나는 우렁이 몇 개를 집었다. 손등 위에 두고 자세히 살펴보며 동생에게 물었다.
“이제는 벨라트릭스라고 안 불러?”
“갑자기 그렇게 흑역사 들춰내기야?”
우렁이의 고동색 촉수가 단단한 껍데기를 밀고 나왔다. 내 손등 위에서부터 손목 복사뼈를 타고 천천히 기어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동생에게 말했다.
“잘 밤에 애들만 두고 돌아다니는 것도 많이 이상하긴 하지.”
“차라리 두고 다니지. 상관없는데.”
“우린 완전 수단과 도구였어.”
“음주운전 방패막이었달까.”
어느덧 동생이 내 곁으로 다가와 논바닥을 내려다봤다. 발밑이 찰랑거렸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 그런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귀하디귀한 주말 휴일, 바지와 신발에 진흙을 잔뜩 묻히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지금도 여전히 수단과 도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하는 와중······.
동생이 흙에 파묻힌 우렁이를 하나 꺼내며 다시 말했다.
“그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이게 다 회상이고 추억이지. 따지고 보면 뭔지 알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간식을 챙겨왔던 지퍼백에 우렁이를 담았다.
“우리 이거 몇 개 가져다가 상추 뜯어서 우렁쌈밥 해먹자.”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스쿠터 안장을 열어 낫을 집어넣었다. 수로에 흙 묻은 장화를 헹궜다. 목에 묶었던 손수건을 풀어 도랑에 적셨다. 땀이 맺힌 목덜미에 젖은 수건을 두르자 등골이 서늘하게 식었다. 지퍼백에 우렁이를 양껏 담은 동생은 볼드모트의 스쿠터의 시동을 걸었다.
나는 이 스쿠터 때문에 옛날에 죽을 뻔한 적이 한 번 있었다. 볼드모트는 8살 된 아이를 태우고 마을 골목을 달렸다. 아이는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는 흑마법사의 꼬임에 넘어가 자각 없이 따라갔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니 술을 사 마시려던 핑계였던 것 같다. 볼드모트의 등 뒤로 훅 끼쳐오는 알코올 냄새를 맡던 순간이었다. 코너를 돌자 불현듯 트랙터가 나타났고, 볼드모트는 급히 방향을 틀었다. 나는 도랑으로 몸이 튕겨 나갔다.
사악한 마법사 볼드모트는 자녀의 동승 유무와 상관없이 음주운전을 했던 사람이다. 그럼 우리는 왜 밤마다 방패막이를 자처하며 볼드모트를 따라 계곡을 갔던 걸까? 도대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어쨌든 볼드모트는 빠르게 떠내려가는 물에서 나를 건져냈고, 덕분에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나는 도랑에 처박힌 순간이 기억에 전혀 없었다. 그때부터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걸까? 뇌 손상이 일어났던 걸까? 대신 볼드모트가 나를 안아 올린 이후의 일들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물을 먹은 청재킷 때문에 온몸이 무거웠고, 머리가 따끔거려서 더듬어 봤더니 정수리 아래쪽에 오톨도톨한 게 만져졌다.
“나 언니 두피에 박혀 있던 큐빅만 한 크기의 검정색 조약돌이 아직도 기억나.”
동생도 스쿠터를 보고 새삼 추억이 샘솟았는지 그렇게 말했다.
“부분 삭발하고 두 바늘인가 꿰맸지.”
그 후 7년간 내 뒤통수에는 조그만 땜빵이 남게 되었다. 나는 스쿠터 뒤에 올라타 동생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
볼드모트는 지난 밤 피를 토하고, 전신에 경련성 발작이 일어나서 구급차에 실려 갔다고 했다. 볼드모트의 폭정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인가? 들뜨고 부푼 마음으로 집에 도착해 보니 집구석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바닥에 엎어진 컵 밑으로는 물이 흥건했다. 개다 만 빨래도 산더미였다. 흐트러진 이불도 발견했지만 난 정리하지 않았다. 이불의 가장자리 근처에서 밤색 얼룩을 발견했다. 토사물인지, 핏자국인지, 똥을 지린 건지 모를 일이지만 셋 다 찝찝하기는 매한가지여서 이불을 피해서 걸었다.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진 물건들은 발을 이용해 구석으로 밀어냈고, 끈적하고 정체 모를 액체들은 위생장갑을 끼고 걸레로 대충 닦았다. 볼드모트의 손길이 닿은 물건 같은 건 가급적이면 만지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
“급성 간경화란다.”
벨라트릭스는 전화기 너머로 내게 볼드모트 욕을 실컷 했다. 예전에는 벨라트릭스가 발설하는 욕설의 문장이 정확하게 들리며 욕설의 문장으로 구성된 장면들이 세세한 컷 분할로 선명하게 떠올랐는데, 지금은 오로지 분절된 단어 형태로만 어렴풋이 들릴 뿐이다. 술독······. 미친놈······. 하루에 소주 7병······. 길바닥······. 실신······. 지랄염병······. 행패······. 이것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
볼드모트의 365일 삶의 주기는 만취 기간과 알코올 해독 기간으로 나뉜다. 만취 기간에는 하루 종일 술에 절어 있고, 알코올 해독 기간에는 술을 입 근처에도 대지 않는다.
만취 기간의 볼드모트는 맨정신이라면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일삼았다. 올해 칠순을 맞은 큰형에게 전화를 걸어서 갑자기 사랑한다고 하거나, 혼자 사는 외할머니에게는 이번 주말에는 꼭 찾아가 뵙겠다는 말을 하고(당연히 안 찾아간다), 엄마에게는 앞으로 설거지만큼은 꼭 하겠다고 선언한다(만취 기간에 한정해서 설거지를 하긴 하는데 그때마다 접시를 깨먹거나 부엌 바닥을 물바다로 만들어 놓는다). 나와 동생한테는 자신이 죽으면 이 땅들 다 너희들 것이니 정확히 반으로 나눠 가지라는 말을 한다(경사면이 90도 가까이 되는 야산과 소똥 냄새가 나는 축사 옆 논밭이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메시지가 온다. 메시지는 죄 오타투성이다.
-ㅎ따.ㄹ
-ㅎㅎㅅl.랑ㅎ
-압ㅏ슬펗 그래도 나 사는이ㅠbfl딸들
-이서서
텍스트에서 술 냄새가 났다. 이런 걸 봐도 이젠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덤덤한 기분이었다. 마법사의 만취 기간에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상. 나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하고 다시 업무를 봤다. 제안서를 작성하고 프린트를 했다. 상사에게 컨펌을 받고 수정사항을 체크했다. 다른 기관에 보낼 공문들을 처리했다.
*
“나는 번호를 차단했거든. 그래서 전화나 문자가 안 와. 언니도 빠른 차단해서 인생 손해 보지 말길.”
동생이 개수대에서 상추를 씻으며 말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된장과 두부, 고추와 파, 마늘을 꺼냈다. 재료는 준비됐지만 문을 닫지 않고 한참을 살폈다. 나는 지금 술을 찾는 중이다. 김치냉장고도 열어 봤다. 없다. 싱크대의 선반들도 한 번씩 열어 봤다. 없다. 볼드모트는 늘 이상한 곳에 술을 숨겨 놓았다. 벨라트릭스는 그걸 어떻게든 찾아내서 버렸다. 모든 걸 뚫는 창과 모든 걸 막는 방패. 끝나지 않는 승부차기. 숨 막히는 랠리 열전. 볼드모트와 벨라트릭스가 술을 놓고 벌이는 기싸움을 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몸을 숙여 침대 밑도 봤다. 장롱 문을 열어 깊숙한 곳까지 쑤셔 봤다. 이러니 꼭 내가 알코올중독자 같네.
동생에게 찌개는 내가 끓일 테니 대신 슈퍼 가서 술을 좀 사오라고 시켰다. 동생은 내 말을 듣더니 집에 올 때 가져온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나설 채비를 했다.
“뭘 얼마나 사오려고?”
“어차피 술은 안 썩어.”
“하긴. 남으면 다음에 또 먹지 뭐.”
“남긴 뭐가 남아. 모자라면 괜히 기분만 나빠.”
술이라면 경을 치고 지긋지긋해야 마땅할 텐데. 흑마법사의 어둠의 저주 DNA가 새겨진 탓인지 우리는 둘 다 술을 좋아하고 심지어 잘 마시기까지 했다. 서울에서도 퇴근하고 나면 시간이 맞을 때마다 밖에서 저녁 겸 술을 사 마셨다. 두 병. 아쉬우면 집에 가서도 세 병씩. 대신 서로에게 주정만큼은 부리지 않기로 한다. 그런 몹쓸 짓을 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술을 끊기로 약속했다.
동생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몸 쓰는 일을 해서 그런지 밥이 달았다. 동생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완전 시골 밥상이네, 이거.”
서울에서 일 끝나고 먹는 밥은 이 정도로 달지 않았다. 점심에는 시간에 쫓겨 꾸역꾸역 먹느라 입과 손이 바빴고, 저녁 회식은 직장 동료의 눈치를 봐야 해서 머리가 바빴다. 앞에 앉은 사람이 삼겹살 세 점을 먹으면 나도 세 점을 먹어야 하니까. 앞사람이 세 점 먹는데 나 혼자 네 점을 먹을 순 없는 일이었다.
지난 밤 급사할 뻔했던 사람의 집인데. 밥도 맛있고 술마저 달아서 은은한 배덕감이 들었다. 그 배덕감이 나를 묘하게 흥분시켰다. 그래도 건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인생에 축하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나는 밥을 다 먹고도 뭔가 아쉬움이 남아 다시 밥솥을 열었다. 잡곡밥 두 주걱을 펐다. 오목한 그릇에 꾹꾹 눌러 담았다. 동생이 아삭이고추에 우렁 강된장을 찍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독오독 씹는 소리가 상쾌하고 싱그럽게 들려왔다. 이 집에서 오랜만에 안락함을 만끽했다.
그러한 평화와 안락함도 잠시. 벨라트릭스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우리의 패륜 파티를 감지한 걸까. 동생은 스피커 모드로 통화를 했다. 벨라트릭스에게 하루 일과를 보고했다. 하라는 대로 김을 매고, 논물을 관리했다. 점심은 짜장면을 시켜 먹었고, 저녁은 지금 먹는 중이다······.
저녁을 지금 먹고 있다는 말이 벨라트릭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8시인데. 사실 우리는 6시부터 저녁을 먹었지만 술을 마시는 터라 두 시간째 먹고 있는 중이었다. 또다시 벨라트릭스의 분절된 단어들이 핸드폰의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비만······. 살 빼······. 시집······. 다이어트 약······. 내 팔자······. 남편 복······. 자식 복······.
“야 그만 끊어라.”
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만으로 동생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밥은 내가 차렸으니 설거지는 동생이 했다. 막걸리를 세 통이나 마셨지만 술은 취하지 않았다. 배만 불렀다. 복부의 팽만감 때문에 기분이 급격히 하락했다. 소화를 시킬 겸 사다리를 타고 다락에 올라갔다. 전기 스위치를 눌렀다. 여름이라 8시가 다 되어도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지만 이곳은 종일 어두웠다. 오렌지색 백열등이 사방을 밝히자 먼지 입자들이 공기 중에 떠다녔다. 나는 구석에 쌓인 물건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동생이 접시를 헹구는 동안 나는 식탁에 앉아 다락에서 가져온 앨범을 펼쳤다. 추억을 보정하는 데는 사진만큼 편리한 게 없었다. 사진은 시간 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나의 아기 때 사진. 돌상 앞에서 명주 실타래를 든 사진. 벨라트릭스가 내게 젖병을 물리고 있는 사진. 갓 태어난 동생을 옆에 앉은 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보고 있는 사진. 동생 백일 사진. 유치원 소풍 사진. 초등학교 운동회 사진.
앨범 낱장을 넘기다가 항아리 계곡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동생과 나는 움푹 팬 돌개구멍 사이로 다리를 집어넣고 있었다. 하반신은 사라지고 상반신만 바위 위로 볼록 솟은 모습이 우스웠는지 둘 다 개구진 표정이었다. 물에 흠뻑 젖은 생쥐 꼴이었지만 좋다고 웃고 있었다.
*
사진을 보니 떠올랐다. 볼드모트의 천렵 장소였던 항아리 계곡에서 우리 식구는 여름철마다 물놀이도 했던 것이다. 도랑에 떠내려가 죽을 뻔했지만 신기하게도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없었다. 알코올중독자와 20년 가까이 같이 살았어도 그것과는 별개로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바위 위에서 튜브를 끼고 다이빙을 했다. 급류에 떠밀려 10미터 정도를 빠르게 이동하며 속도와 스릴을 즐겼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다 보면 개울의 폭이 넓어지는 구간에 이르러 저절로 속도가 줄어들었다. 더 이상 몸이 떠밀리지 않을 즈음 손으로 바위를 짚고 지지대 삼아 올라갔다. 그러고는 다시 다이빙 포인트까지 뛰어가서 몸을 내던지길 반복했다. 계곡의 드센 물살에 나를 흘려보내다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내 자신이 수생 동물이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메기나 뱀장어 급은 아니어도 동자개나 꺽지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피라미였을 수도.
물놀이를 하다가 지치면 어른들이 있는 방갈로로 돌아갔다. 한낮임에도 볼드모트는 이미 목과 팔뚝과 얼굴에 온통 붉은 얼룩이 져 있는 마법에 걸려 있었다. 그 때문에 수다스러웠고 목소리의 톤도 평소보다 높았다. 친구와 우격다짐을 할 때는 특히 더 그랬다.
“복숭아는 한자어지.”
친구가 우기면 볼드모트는 반박했다.
“순우리말이라니까.”
“아니지. 복숭아 복이지.”
다시 우겼다. 데시벨 수치가 점점 높아졌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던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아마 심각한 싸움으로 오해하겠지. 볼드모트는 마법의 알코올 약을 먹고 얻은 파워로 충혈 된 눈을 부라렸다. 그게 아니라고 소리쳤다.
“복숭아의 한자어는 복숭아 도야.”
도원결의가 복숭아나무 밭 아래에서 맺어진 결의 아니냐고 적절한 예시까지 들었다. 그래도 친구는 인정하지 않았다. 복숭아 ‘도’도 한자지만, 복숭아의 ‘복’ 역시 한자라고 언성을 높였다. 논쟁의 말미에 친구는 인신공격을 덧붙였다. 어이구 그렇게 똑똑한 양반이 왜 하는 것마다 말아먹고 여길 왔대? 볼드모트의 불콰해진 몸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폭발하려나? 나는 잠깐 긴장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만약 친구가 했던 말을 벨라트릭스가 그대로 주워섬겼다면 아마 항아리 바위가 두 조각, 세 조각으로 쪼개졌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나는 친구가 맞는 말을 한다고만 생각했지 볼드모트가 짠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아는 것 많고 똑똑한 사람이 날마다 술만 마실 리는 없으니까.
대체 복숭아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벨라트릭스와 친구의 아내는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을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애써 외면했다. 그들은 우리 어린이들에게 먹을 만한 것들을 챙겨 주었다. 얕은 물에 담가 둔 수박을 맛보라고 할 때도 있었고, 찬물에 들어갔다 나왔으니 몸을 덥혀야 한다며 컵라면을 끓여 줄 때도 있었다. 방갈로의 술상 위에는 욕조 수족관에서 가져온 민물 회와 잡어 매운탕이 있었지만 그것만큼은 우리에게 권하지 않았다. 윤기가 흐르는 생선살의 파스텔 톤 분홍에 홀려서 나는 먹어 보고 싶다고 보챘지만 벨라트릭스는 단호하게 막았다.
“이름도 모르는 물고기 함부로 먹는 거 아니야.”
기생충이 득시글거려서 더럽다는 것이었다. 민물고기는 볼드모트나 먹었지 사실 벨라트릭스도 먹지 않았다. 친구의 아내도 먹지 않았다. 술상 위의 생선 요리는 오로지 볼드모트와 친구의 전유물이었다. 그렇다면 기생충이 득시글거리는 저 민물고기가 바로 볼드모트가 가진 어둠의 힘의 원천일지도 몰랐다.
볼드모트는 국자로 탕을 푸며 이리 와서 다슬기나 먹어 보라고 권했다. 나는 비밀리에 계획했다. 다슬기를 먹는 척하며 생선회를 몰래 집어서 재빨리 입에 가져가는 것이다. 저걸 먹으면 나도 볼드모트에 견줄 만한 힘이 생겨날지도? 맞서 싸울 수 있을지도?
하지만 우린 술상 곁에 접근할 수 없었다. 벨라트릭스가 주정뱅이들 옆에 가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때 동생과 나는 벨라트릭스의 마인드 컨트롤 마법에 걸려 있었다. 지겨워 죽겠어. 너희까지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너희 잠들면 엄마는 짐 싸서 나갈 거야. 아빠랑 너네끼리 잘 살아 봐라 한번. 이렇게 조금 긴 주문을 외면 정신을 통제당하는 마법이 발동됐다. 우리는 한동안 벨라트릭스가 하지 말라는 건 절대로 하지 않았다
허기를 채운 후에는 수건을 덮고 낮잠을 잤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따끔거렸다. 볼드모트는 도원결의 친구와 언제 싸웠냐는 듯 허리까지 잠기는 계곡에 들어가 족대로 물고기를 잡았다. 족대결의인 걸까?
그들이 포획한 물고기들이 그물망 안에서 팔딱팔딱 몸부림쳤다. 어떤 물고기는 날카로운 등지느러미를 이용해 촘촘한 그물에 구멍을 종종 내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론 빠져나가기 역부족이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등 뒤에서 따끔거림이 전해져 왔다.
*
설거지를 끝낸 동생이 어느덧 내 옆에 와서 사진 앨범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에는 핸드크림을 펴 발랐다. 고소한 시어버터 향이 사진첩 위로 퍼졌다. 동생이 항아리 계곡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말했다.
“이때 언니랑 나도 우렁이 많이 잡았지?”
“그게 무슨 우렁이냐 다슬기지. 계곡 바위 밑에 붙어 있는 건 다슬기야.”
“우렁이나 다슬기나.”
“완전 다르지.”
나는 남아 있는 막걸리를 유리컵에 전부 따랐다. 동생 말이 맞았다. 술은 남지 않았다. 오히려 한 잔 더 하고 싶은 기분만 들었다. 그러나 또 사러 나가긴 귀찮았다. 내가 말했다.
“우리 내일 항아리 계곡 갈래?”
동생의 반응이 미적지근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밀어붙였다.
“다슬기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줄게.”
“인터넷으로 보면 되는데?”
동생이 그렇게 말하고는 앨범을 뒤적거렸다. 자신이 귀엽게 나온 유년 시절의 사진 한 장을 핸드폰으로 찍었다. 몇 분 후 동생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 그것은 친척 결혼식 날 정장을 갖춰 입은 볼드모트와 벨라트릭스 품에 안겨 찍힌 사진이었으나 동생은 본인이 나온 부분만 교묘하게 잘라 프로필에 걸어 두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동생을 꼬셨다.
“여름인데 시골 와서 계속 일만 했잖아.”
동생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물놀이도 하고. 직접 고기도 잡고. 사진도 많이 찍고.”
동생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걸 무척 좋아했다. 동생이 못이기는 척 말했다.
“하긴, 우리라고 물고기를 못 잡을 건 없지.”
*
다음날. 고기잡이 도구를 챙기려고 창고를 뒤지다가 동생과 잠깐 언쟁을 벌였다.
“족대였어.”
“배터리라니까.”
“투망이었나.”
“아니야 배터리가 맞아.”
족대나 배터리나 어쨌든 이제는 다 불법이었다. 투망은 미리 설치하고서 포획해야 했는데 그 방법도 모를뿐더러 시간이 꽤 걸렸다. 배터리는 물고기들에게 전기충격을 줘서 기절시켜야 하는데 너무 잔인한 짓인 것 같았다. 둘 다 관두고 족대로 타협했다. 잡고 난 다음에 방생할 거니까 불법은 아니겠지.
물놀이에 쓸 튜브와 물안경, 고기를 구워 먹을 숯과 석쇠를 사러 동네 회관에 잠깐 들렀다. 회관 앞 평상에는 노인들이 우르르 앉아 있었다. 부채질을 하면서도 눈동자들은 우리를 훑었다. 그만 좀 쳐다봤으면. 우리가 매점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 할머니가 다른 노인들을 향해 중얼거린다.
“영학이 딸들인가 본데.”
다른 노인이 대꾸했다.
“영학이 딸이 언제 저렇게 컸어?”
“어제 막걸리 사가더만.”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타이밍만 놓쳤다. 볼드모트는 이 동네의 새마을지도자였다. 그런데 새마을지도자의 딸들은 인사성이 밝지 않았다. 가게 앞에 걸린 튜브를 서둘러 빼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가게 사장이 그건 전시용이라고 언질을 주면서 공기가 들어가지 않은 흐물흐물 고무 쪼가리를 건넸다. 우리는 직접 입으로 불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 물안경과 숯과 석쇠만 달라고 했다. 사장은 바코드가 아닌 눈대중으로 물건들을 계산하면서 아빠는 괜찮으냐고 말을 걸었다. 30가구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라 소문이 금방 퍼졌다.
“네 뭐.”
나는 어수룩하게 대답을 했고,
“금방 퇴원하실 것 같아요.”
동생이 나보다 나았다. 사장은 혀를 차더니 장부를 펼쳤다. 그동안 소주 외상을 많이 했다며. 나는 현금 가진 게 없어서 혹시 카드도 되냐고 물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여기는 슈퍼라기보다는 생필품과 레저용품들만 조금씩 떼어 와서 파는 마을회관이었기 때문에 그런 게 될 리가 없었다. 현금은 방금 지불한 5만 원이 전부였다. 거스름돈은 됐으니 그만큼이라도 변제해 달라고 했다. 나머지는 다음에 낸다고 약속했다. 어차피 내일부터 안 오면 그만이었다.
뒷좌석에 물건들을 싣고 다시 차에 탔다. 동생은 자동차의 시동을 걸다가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며 인상을 구겼다. 볼드모트는 왜 술값을 20만 원씩이나 달아 놓았는가. 돈도 우리보다 많이 벌고 땅까지 소유한 사람이. 나는 그 이유를 대충 알았다. 볼드모트는 벨라트릭스 몰래 외상으로 술을 산 다음 농막이나 폐가, 오토바이 안장 같은 데에 숨겨 두었다. 일하는 와중에도 술을 감춰 놓은 곳에 들락거리며 안주도 없이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래 놓고는 안 마신 척 시치미를 떼곤 했다. 술 냄새가 폴폴 나는데도 불구하고.
*
동생은 운전하는 내내 긴장해서 거북목 자세가 됐다. 나 역시 손잡이를 꽉 잡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옛날에 비해 길을 많이 닦아 놓았다곤 해도 산을 깎아 만든 도로라 난코스는 난코스였다. 마치 절벽에 매달려 달리는 기분이었다. 창문 바깥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없던 고소공포증마저 생겼다. 주행도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높이의 가드레일임에도 여기에서 마주하니 한없이 부실해 보였다. 길이 굽이칠 때마다 금방이라도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추락할 것만 같았다. 불길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반대편 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깎아지른 절벽이 또 하나의 위험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굴러 떨어져 차를 덮칠지도 몰랐다. 돌아가는 길의 핸들은 내가 잡아야 하는데. 아득해졌다.
동생이 항아리 계곡 갓길에 차를 대며 길게 한숨을 토했다. 도착하고 보니 옛날과 달라진 것이 너무나 많았다. 어획만 금지인 게 아니라 취사도 금지, 야영도 금지, 입수도 금지였다. 각종 금지를 알리는 팻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사망사고 다량 발생 구역이라고 적힌 노란 현수막도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양동이, 족대, 물안경, 여벌의 옷, 아이스박스에 싣고 온 먹거리들. 우리가 가지고 온 많은 것들이 무색해지고 말았다.
변함이 없는 건 선캄브리아기부터 자리를 지켜 온 저 기암괴석들뿐이었다. 바위 표면에는 흰색과 검은색의 띠가 물결처럼 층을 이루어 아름다웠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침식이 일어나야만 만들어지는 무늬. 그걸 보고 있자니 그 어느 때보다도 시간이 명징하게 느껴졌다. 나는 계곡 아래 매끄럽게 깎인 편마암 덩어리들을 홀린 듯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데.”
“수영은 사람 오면 물에서 바로 나오면 되니까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뭔가 해먹는 건 잘 모르겠어. 그건 금방 못 치우잖아.”
우리는 일단 아이스박스에서 생수를 꺼내 한입씩 나눠 마셨다. 숨을 고르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만 추려 봤다. 고기 패스. 숯 패스. 쌀밥 패스. 상추와 쌈장 패스. 자두 오케이. 오이 오케이.
나와 동생이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한적한 도로변을 메웠다. 그 외에는 자연이 내는 소리뿐이었다. 높은 바위에서 낮은 바위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의 지저귐. 미풍이 불어올 때면 뒷산의 나무들이 일제히 가지들을 흔들었다. 계곡에 가까워질수록 비릿한 물 냄새가 짙어졌다. 앞서 걷던 동생이 멈추더니 녹음 우거진 숲길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나는 계곡 입구를 향해 계속 걸었다. 동생은 뒤에서 그런 나를 찍었다. 동생에게 핸드폰을 치우라고 손사래를 쳤다.
“별걸 다 찍네.”
“이거 동영상이야. 나 요즘 일상 브이로그 찍거든.”
앞장선 내가 돌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돌계단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튼튼해 보이는 바위들을 골라 발을 내딛는 것뿐이었다. 나는 동생이 넘어지지 않도록 잘 내려오라고 손을 잡아 줬다. 비탈이 가팔라서 내려가는 데 점점 가속도가 붙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여길 내려가다가 엎어져서 턱이랑 무릎, 팔뚝 같은 부위가 깨진 적이 몇 번 있었다. 조심해야 했다.
커피를 쏟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수록 커피를 쏟게 된다. 내일은 술 마시지 말아야지 다짐할수록 다음날 또 술 먹게 될 확률이 높다. 넘어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힐수록 넘어져 버린다.
나는 한쪽 종아리로 슬라이드를 했다. 1루로 출루하는 야구선수처럼. 한없이 쓸려 내려갔다. 동생도 내 몸에 걸려 함께 넘어졌다. 자잘한 돌멩이들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흙먼지가 났다. 동생은 얼른 일어나서 옷을 털었다. 종아리가 긁혔는지 살갗이 붉어져 있었다. 동생에게 다친 데 없냐고 물어 봤다. 동생이 괜찮다고 하며 되물었다.
“언니는?”
나는 돌개구멍 사이에 다리가 꼈다. 하체에 힘을 줬지만 안 빠졌다. 동생이 내 허리를 감싼 채 몸을 들려고 시도했다. 안 들렸다. 이번엔 끼인 다리 한쪽만 붙들고 잡아당겼다. 그래도 안 빠졌다. 119를 불러야 하나. 이마에서 식은땀이 났다. 살면서 몇 번 낼까 말까 한 힘을 온통 다리에 쏟아 붓자 그제야 겨우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발목이 조금 삔 느낌이지만 견딜 만했다. 나는 팔꿈치와 무릎에 묻은 흙을 털며 말했다.
“그냥 집에 갈까.”
동생은 멋쩍었는지 바위 구멍들을 들여다보는 척 딴청을 부리며 걸었다. 나는 어디라도 좋으니 좀 앉고 싶어졌다. 면적이 넓은 적당한 바위를 찾아서 앉았다. 그리고 묶어 둔 비닐봉지를 풀었다. 동생에게 오이를 먹을 건지 자두를 먹을 건지 물었다. 동생은 고기라고 답했다. 자두 하나를 흐르는 물에 씻어서 건넸다.
나는 깔고 앉은 엉덩이 아래의 단단한 바위를 가만히 만져 보았다. 어떤 부분은 표면이 매끄러웠고 어떤 부분은 까끌거렸다. 얕은 물속에 잠긴 돌덩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바위라 하기엔 작았고 돌멩이라 하기에는 컸다. 이끼로 미끄덩거리는 돌을 뒤집자 다슬기 네 개가 붙어 있었다. 손에 힘을 주고 다슬기를 떼어내자 민물 특유의 비린내가 났다. 옛날에 볼드모트가 잡아온 물고기로 만들던 매운탕에서도 이런 냄새가 났다. 벨라트릭스는 매운탕을 끓일 때마다 민물 비린내가 지긋지긋하다고 얼굴을 자주 찌푸렸다. 나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자두를 먹고 있는 동생에게 다슬기를 자랑했다.
“이게 바로 다슬기란 거다.”
잘 보라고, 우렁이랑 다르다고 거듭 확인시켜 주었다. 동생이 너 잘났다면서 발장구를 쳤다. 얼굴과 옷에 물이 튀었다.
동생이 바위에서 내려와 물가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동생이 두고 간 핸드폰을 챙겼다. 먹고 남은 자두 씨도 치웠다. 동생은 허벅지까지 물이 차올라 반바지가 다 젖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더니 상체까지 몸을 담그고 물살 반대편을 향해 수영했다. 물살을 가르는 청량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위 위에 몸을 뉘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동생은 수심이 깊은 곳까지 수영하다가 돌아왔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짰다. 배까지 옷을 걷어 올려서 꽈배기 모양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물이 아래로 한 바가지 떨어졌다. 하얗던 바위가 물을 먹고 먹색으로 변했다. 동생이 물었다.
“언니 혹시 잠수놀이 기억나?”
어렸을 때 우리는 목숨과 맞바꿀 만한 놀이들을 많이 개발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잠수놀이였다. 물밑으로 들어간 사람의 머리를 누르면 상대방이 얼마나 숨을 참을 수 있나 대결하는 놀이였는데 당시에 유행하던 예능 프로그램을 조악하게 모방한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여기서 하자고?”
동생은 옆구리까지 잠기는 계곡의 중간 지점으로 걸어가 내게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우리가 왔던 길 초입에서 누군가가 어슴푸레 보였지만 지금 여기와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나는 심장마비를 방지하기 위해 팔다리에 먼저 물을 묻혔다. 바위에 쓸려서 생긴 상처가 물에 닿자 욱신거리고 따끔거렸다. 산꼭대기 물이라 그런지 논물보다도 훨씬 차가웠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동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걸을 때마다 물이 찰박거리며 포말을 만들어냈다. 물속의 이끼 낀 돌 때문에 샌들이 미끄러졌다. 발가락이 자꾸만 샌들 밖으로 삐져나왔다. 모래와 자갈은 신발 속으로 들어와 발바닥을 찔렀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다. 내가 졌다. 동생이 핸드폰으로 스톱워치를 켰다. 나는 물안경을 쓰고 엄지와 검지로 코를 쥐어 잡았다. 시작이라는 말과 동시에 물속으로 들어갔다. 동생이 내 머리를 눌렀다.
시간이 경과했다. 귀에 물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진공관에 들어온 것처럼 주변의 소리가 먹먹해졌다. 세상이 온통 일렁거렸다. 작은 나뭇잎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알갱이들이 떠다녔다. 자갈들은 빠른 물살을 따라 하천 바닥의 틈으로 들어갔다. 저것들이 짧게는 수천 년, 길게는 수백만 년이 넘도록 회전운동을 하면서 항아리 바위의 가운데를 마모시키는 것이리라.
빛을 받은 바위는 물의 진동에 따라 기하학적인 문양을 이루었다. 반면 어둠 속에 가라앉은 바위는 그저 시커멓기만 했다.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 물속에서 먼지가 일어났다. 시야가 뿌예졌다. 물거품이 보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파동을 일으키자 고요했던 물의 세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바위 밑에 숨어 있던 물고기들이 다른 곳으로 날래게 달아났다. 쏘가리인지, 꺽지인지, 모래무지인지, 동자개인지 구별할 수 없는 한 무리의 물고기 떼가 이동했다. 꼬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도망치던 등지느러미가 날카롭던 물고기 한 마리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
볼드모트가 계곡으로 출근하고, 벨라트릭스가 차 안에서 팝송을 듣던, 여느 날과 다름없는 그런 밤이었다. 동생은 끄덕끄덕 졸음에 겨워했다. 카세트테이프는 계속해서 돌아갔다. 나는 팝송 도입부에 깔린 둔탁하고 건조한 드럼 소리를 들으며 계곡가의 막막한 어둠을 노려봤다.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리던 베이스의 진동과 엇비슷했다. 드럼 소리 위에 저음질의 기타가 끼어들고 서걱거리는 가수의 목소리가 쌓였다. 규칙적으로 쉭쉭거리는 소리는 밖에서 부는 바람소리인지 음악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귀신의 숨소리인지 모를 일이었다. 유난히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어서 그 소리가 평소보다 도드라졌다.
카세트가 안에서 자동으로 까드득 뒤집혔다. B면의 첫 곡은 뿅뿅거리는 디스코 템포였다. 벨라트릭스는 그런 노래가 나와도 동생을 품에 안고 선잠에 들었다. 나는 잠금장치를 풀고 밖으로 나갔다. 문 닫는 소리를 듣고 아무도 깨어나지 않도록 문을 살짝 열어 두었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팝가수의 꿈결 같은 목소리가 적막한 밤의 도로를 채웠다.
산바람을 맞았다. 차 안에서 뜨겁게 달궈졌던 몸이 선선하게 식었다. 땀에 눌어붙은 머리카락이 어느새 바삭거렸다. 나는 계곡 아래를 굽어내려 봤다. 어느새 음악소리는 희미해졌고 물 흐르는 소리만 고막을 두드렸다. 손전등의 불빛은 없었다. 대신 낯익은 뒤통수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머리의 절반까지. 그러니까 귓불이 있는 곳까지 잠긴 모습이었다. 볼드모트도 잠수 놀이를 하는 걸까?
볼드모트가 단순 잠수 놀이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금방 알아챘다. 도대체 왜 저럴까. 확 담가야지. 저래선 절대 죽지 않는데. 옷만 흠뻑 젖을 뿐이다. 나는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벨라트릭스와 동생이 잠들어 있는 차 쪽에 가까워질수록 비트와 멜로디가 선명해졌다.
그날 밤만큼은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바랐다. 차라도 한 대 지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는 즈음이었다. 고갯길을 지나던 멋진 검정 세단이 내 앞에서 돌연 멈추었다. 승용차 안에서 탤런트 정보석을 닮은 중년 남자가 내렸다. 그 남자는 알코올중독자가 아니었다. 몸에서는 술 냄새 대신 향긋한 스킨 냄새가 났다. 음주 운전을 해서 자녀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물건을 때려 부수지도 않았다. 욕을 하고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자식 앞에서 죽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가 내게 다정히 말을 걸었다.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몰라, 이리 온 너는 우리 자식이란다.”
“기다렸어요, 아빠.”
뒤이어 탤런트 윤유선을 닮은 중년 여자가 정보석을 따라 내렸다. 그 여자는 정신을 지배하려 들지 않았다. 나를 버린다고 협박하지 않았다. 매해 생일을 따듯하게 챙겨 줬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게 해줬다. 살쪘다고 구박하지 않았다. 역시 자식 앞에서 죽는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상냥한 여자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우리 딸. 딸이 좋아하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를 잔뜩 만들어 놨어. 집으로 돌아가자.”
“사랑해요, 엄마.”
윤유선과 정보석은 공중을 떠다닐 수 있었다. 따라서 물에 잠기는 비루한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어둠의 마법이 아닌 빛의 마법을 사용하는 부부인 것이다. 그들의 손을 잡자 나도 덩달아 지면 위에서 발이 떠올랐다. 높게 높게 떠올라서 윤유선과 정보석이 사는 지상낙원의 성으로 가려고 하는 참이었다. 볼드모트가 손전등을 켜고 우리 가족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나는 소리쳤다.
“더 높이 날아야 해요!”
볼드모트가 우리 가족을 향해 양동이를 던졌다. 그러자 물고기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볼드모트가 어둠의 마법을 써서 물고기들이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하늘에서 물고기 비가 쏟아져 내렸다. 나는 쏘가리의 날카로운 지느러미에 등을 찔려 상처를 입었다. 물고기 공격에 데미지를 입은 우리 가족은 또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윤유선과 정보석은 반드시 날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신신당부하며 약속했다.
*
눈을 떴을 때 나는 바위 위에 누워 있었다. 방금까지 윤유선과 정보석과 함께 하늘을 날고 있었건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나를 내려다보는 동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뭐야? 쇼한 거야? 언니가 아빠야?”
“나 왜 여기 있는데?”
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나는 3분이 지나도 물속에서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물 밑바닥에서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고. 동생은 넘실거리는 나의 머리카락을 지켜봤다. 이상하다고 여긴 동생은 내 머리를 누르고 있던 손을 뗐다. 그래도 나는 미동이 없었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물결에 너울대기만 했다. 동생은 움직임이 없는 내 몸을 발로 슬쩍 건드렸다. 그러자 가부좌가 풀어지고 물 위로 몸이 둥실 떠올랐다.
“119 불렀는데 빨리 취소해야겠다.”
동생은 구조대에 취소 전화를 걸었다. 방금까지 기절했는데 지금 막 깨어났어요. 죄송해요. 사과하는 대상이 앞에 있지도 않는데 고개를 조아리며 굽실거렸다. 나는 기절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숨은 참을 만해서 참은 거였는데.
*
볼드모트가 병원에 실려 가기 전날이었다. 회의를 하며 팀장의 지시사항을 노트북으로 속기하는데 메시지가 자꾸만 떴다. 옆에 앉은 동료 직원이 눈알을 굴리면서 메시지를 엿보는 게 느껴졌다. 볼드모트가 보낸 사진인데 풍경 사진 같았다.
나는 서둘러 메시지 창을 닫았다. 둔각이던 노트북의 각도를 예각으로 구부렸다.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메시지와 함께 첨부된 사진을 확인했다. 벼를 심어 놓은 넓고 푸른 논. 볼드모트가 일하는 곳이었다.
-나 주그며 이땅 다우리 딸들 거. 나노 가져
땅을 줄 테니 노년을 부탁한다고 은근히 압박하는 건가. 볼드모트는 어쩌다 이렇게 술만 마시면 남을 괴롭히는 흑마법사가 되었을까.
나는 답장하기 버튼을 누르고 메시지를 작성했다.
-씨발 새끼야 사람 좀 그만 괴롭혀. 말만 하지 말고 빨리 죽든가 그럼.
여기까지 쓰고 컨트롤과 에이 버튼을 눌렀다. 문장들이 전체 선택되면서 푸른색 하이라이트가 덧씌워졌다. 검은색 글자가 꼭 푸른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나는 다시 한 번 읽고 백스페이스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 창을 닫았다. 답신을 하지 않자 이번엔 전화가 왔다.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일에 집중했다.
*
119에 사과를 하고,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뒤 우리는 계곡을 빠져나왔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는데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났다. 코끝의 감각을 따라 추적해 보았다. 정보석과 윤유선을 닮은 중년 커플 둘이 바위 위에 쭈그리고 앉아 생선을 굽고 있었다.
주차해 놓은 갓길로 올라가려면 저 사람들이 있는 쪽을 거쳐 가야만 했다. 나는 옆을 지나면서 석쇠에 끼워진 생선을 힐끔 봤다. 돌개구멍 안에 숯을 넣고 불을 피운 모양이었다. 구멍에 대고 석쇠를 뒤집자 그 아래로 생선 기름이 떨어졌다. 저래도 되나 싶어서 대놓고 쳐다봤다. 윤유선을 닮은 여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좀 드셔 보실래요?”
“여기서 잡은 건가요?”
내가 물었다.
“네, 민물의 왕, 쏘가리구이 드셔 보신 적 있으세요?”
입막음하기 위해 우리까지 공범으로 끌어들이려는 건가? 나는 무시하고 가려고 했는데 동생이 거절하지 않고 중년 커플 앞에 가서 앉았다.
“그럼 민물의 왕 딱 한 점만. 잘 먹겠습니다.”
배를 딴 민물고기들이 석쇠 옆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내장이 깨끗하게 제거되었음에도 아가미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정보석을 닮은 남자도 그 광경이 껄끄러웠는지 상추 잎사귀로 물고기 아가미와 눈을 덮었다.
“많으니까 하나씩 들고 뜯으세요.”
여자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중간 크기의 민물의 왕 한 마리를 동생에게 건넸다. 동생은 쏘가리를 받자마자 뽈살부터 뜯었다. 급하게 삼켜 뜨거웠는지 입안에서 허허거렸다. 나는 상추가 계속 들썩거려서 신경이 쓰였다.
여자가 내게도 쏘가리를 줬다. 나는 받을지 말지 망설였다. 색깔은 다르지만 비늘이 꼭 치타의 얼룩무늬처럼 생겼다. 등 위로는 지느러미가 바늘침처럼 날카롭게 돋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지느러미에 쏘일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또다시 따끔거림이 전해져 왔다.
*
볼드모트 혼자서 항아리 바위에 다녀온 밤도 있었다. 벨라트릭스가 마인드 컨트롤의 목적이 아닌 진짜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벨라트릭스가 먼저 돌아올지, 볼드모트가 먼저 돌아올지 동생과 내기를 했다. 나는 볼드모트가 먼저 돌아온다에 걸었는데 어린 동생은 내기를 할 기분이 아니었는지 울먹거리면서 둘 다 안 돌아올 것만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동생 말대로 되는 게 속 편하겠다고 내심 생각했지만. 현실은 당연하게도 내 말대로 되었다.
볼드모트가 돌아와 집 앞에 차를 댔다. 유난히 엔진 소리가 시끄러웠다. 술 마셨군. 주차하는 소리만 났을 뿐인데도 이미 술 냄새가 느껴졌다. 거칠게 차 문을 닫는 소리. 이어서 쿵쿵거리던 발자국의 울림. 발자국 소리는 중간에 멎었다. 그리고 볼드모트는 한참 동안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동생과 나는 궁금해진 나머지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봤다. 어두워서 보이는 건 그다지 없었지만 딸꾹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고물 욕조 근처에서 실루엣이 포착됐다.
볼드모트가 딸꾹질을 하느라 어깨가 규칙적으로 들썩였다. 곧이어 메기와 쏘가리와 꺽지와 모래무지가 헤엄치는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동생의 눈을 가렸다. 그런 다음 볼드모트가 몸을 담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번엔 머리까지 완전히 푹푹 잠겼다. 그래도 죽지는 않겠지. 옷이랑 몸만 흠씬 젖겠지. 볼드모트의 집안에는 대대로 장수 유전자가 내려오기 때문에 우리 가족 중 그 누구보다도 오래 살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욕조에서 잠수 중이던 볼드모트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집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물을 뚝뚝 흘리며 온 집 안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다 안방까지 들어갈 기운이 없어졌는지 거실 소파에 픽 쓰러졌다. 볼드모트의 바지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쏘가리 새끼 한 마리가 소파 쿠션 위에서 팔딱거렸다. 나는 유리컵에 물을 채우고 그 안에 물고기를 담았다.
술에 절여져 정신을 잃은 볼드모트는 눈을 감고 뒤척거렸다. 그러고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으 부글부글. 부글부글. 앞으로 일주일 뒤에 죽어. 뱃속이 보글보글. 나는 욕조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도랑까지 좀 더 걸어 나갔다.
유리컵에 든 쏘가리를 도랑에 흘려보냈다. 최대한 여기서부터 멀리 멀리 도망쳐 가라. 혼잣말을 했다.
*
“뜨거우니까 조심하시고요.”
내가 쏘가리를 받아들자 윤유선을 닮은 여자가 말했다. 나는 칼집을 낸 뱃살을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소금에 절여진 짭조름한 흰살생선의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껍데기는 숯불 향을 입어서 고소했다. 하나도 비리지 않았다. 집 뒤꼍 고물 욕조에는 수족관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 있는 물고기들은 단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었기에, 오늘에서야 비로소 쏘가리가 무슨 맛인지 알게 되었다.
쏘가리를 오래 씹다가 삼키는 순간이었다. 내 안으로 어떤 강력한 힘이 흘러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볼드모트를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을 그런 막강한 능력이 형성된 걸까? 드디어? 혈관이 확장되고 머리가 맑아졌다. 빛과 어둠을 결합한 사상 최강의 힘이 샘솟는 그런 기분.
나는 이제 더 이상 볼드모트가 무섭지 않다. 벨라트릭스가 두렵지 않다.
그런 생각을 하자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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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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