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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 작성일 2024-10-01
  • 조회수 1,393

   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무것도 안 해.”

   “어떻게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어······ 거의 다 되어 가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자기.”

   그 거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벤과 로지는 순탄한 삶을 살았고, 그들도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벤과 로지는 가끔씩 - 포크를 쥐고 식탁보가 깔린 식탁에 앉아 있거나 정돈이 잘 된 거리를 걸으며 자기들이 살고 있는 동네가 어떤 곳인지 둘러볼 때 - 자기들이 얼마나 운이 좋았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 기적 같은 일인지 - 입에 올려 이야기하고는 했다. 결혼한 이후 30년 동안 한 번도 이사를 가지 않은 것에 대해,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와 올리브를 살짝 뿌린 신선한 샐러드가 놓인 아침 식탁에 대해, 세금과 공과금 납기일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것에 대해, 토요타와 일요일판 뉴욕 타임스와 정년이 보장된 직장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아무리 입에 넣고 있어도 녹아 없어지지 않는 막대사탕처럼.

   “나는 괜찮은데 도로시 핸더슨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네.”

   도로시는 길 건너편에 사는,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자동차 회사의 임원이었고, 어느 날 갑자기 머리에 총을 맞은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풍경화를 그려대기 시작했다. 로지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알겠어. 그건 아마 그 여자도 모를걸. 아무튼 확실한 건 우리 집에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사는 도로시 핸더슨이 풍경화에 미쳐 있다는 거야.

   그리고 며칠 전에 로지가 도로시 핸더슨의 풍경화 전시회 초대장을 들고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길에서 도로시와 마주쳤는데 마침 줄 게 있다더라고. 벤은 초대장에 달린 리본 장식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미안해, 벤. 당신도 같이 가야 할 것 같아. 도로시 핸더슨은 벤과 로지가 다니는 교회의 성가대원이었고, 전시회에 가지 않으면 일요일 아침마다 신도석에 앉아서 과거에 자기들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지, 뭐.

   “그 여자는 우리가 왔다갔는지도 모를 거야.”

   도로시 핸더슨의 풍경화 전시회는 저녁 7시부터 세 시간 동안 시내에 있는 - 주로 돈을 들여서라도 자기가 그린 그림이나 고가의 장비로 찍은 사진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대여하는 - 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벤은 다시 TV 리모컨을 집어 만지작거리다가 탁자 위에, 원래 리모컨이 놓여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거실에 들어찬 어둠이 점점 무겁고 두꺼워지는 것이 느껴졌고, 벤은 그런 거실을 찬찬히 둘러보며 도로시 핸더슨이 그린 그림들이 홀 벽에 죽 걸려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안 가면 바로 알아채겠지만 가서 얼굴을 내밀면 그때부터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을걸.”

   예전에도 벤은 도로시 핸더슨이 그린 풍경화를 한두 번 본 적이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도로시 핸더슨이 벤에게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한두 번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솔직하게 말해 봐요, 벤. 성인이 된 이후로 아는 사람이 그린 그림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벤은 그게 어떤 느낌인지 전혀 몰랐다. 남의 일기를 훔쳐본 적은 -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알고 싶은 적도 없었고 그러는 것은 벤의 방식도 아니었기 때문에 - 없었지만 남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도로시 핸더슨의 그림들은 풍경화를 보고 그린 풍경화 같았다. 잘 그렸지만 이면이 없는 구도와 색채들. 벤은 삼 초쯤 후에 - 절대로 그 이상은 아니고 -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멋진데요! 벤은 자기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벤의 귀에도 그 말은 거짓말처럼 들렸고, 도로시 핸더슨도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하우저 씨. 참 친절하시네요.

   “정말 그럴까?”

   벤이 안방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소리쳤고, 로지가 다시 안방 문 너머에서 소리쳤다.

   “내 말이 맞다니까. 두고 봐, 벤.”

   로지가 거의 다 되어 가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말을 한 번 더 했는데 그날 그녀는 그 비슷한 말을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 하고 있었다. 벤의 기억이 맞다면 그랬다.

   벤은 고개를 돌려 아직 어둠 속으로 완전히 숨지 못한 것들을 - TV와 옷걸이와 유리문이 달린 나무 장식장과 아주 오래 전부터 거실 한쪽에 놓여 있던 흔들의자와 라디오를 들을 때만 어쩌다가 한 번씩 켜는 전축 같은 것들을 - 둘러보며 양팔을 크게 천천히 돌렸다. 남색 정장 재킷이 몸에 너무 꽉 끼는 느낌이었다. 몇 년 전부터 체중이 꾸준히 늘고 있었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벤은 혈압과 혈당치와 최근 들어 문제가 되고 있는 콜레스테롤 수치 같은 것들을 - 몸과 관련된 수치들을 - 떠올리며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벤은 노쇠의 징후들이 감지될 때마다 앞차를 들이받고 난 뒤에 완전히 부서진 후미등과 트렁크와 뒤 범퍼를 보는 것처럼 우울한 기분에 빠지고는 했다. 병원에서 알려준, 몸과 관련된 수치들은 지금까지의 삶이 - 견고하고 흠 없는 생활이 - 더 이상 지금과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벤은 그 수치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감히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있다 해도 그게 벤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벤은 혈압과 혈당치와 콜레스테롤 수치 같은 것들을 - 그 모든 수치와 수치 뒤에 붙는, 어느 날 갑자기 벤의 삶에 불쑥 끼어든 단위들을 - 자기 집 현관 비밀번호보다 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벤은 지금보다 더 효과적인 식단과 강도 높은 운동과 건강한 식습관에 대해 고려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양팔을 크게 천천히 다시 한 번 돌렸다.

   “왜 불을 끄고 앉아 있어.”

   어느새 거실의 전등이 켜지고 로지가 벤 앞에 서서 소파에 앉아 있는 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어때 보여?”

   30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더러는 그러지 않은 것들도 있었는데, 외출 준비를 끝낸 로지가 벤에게 의견을 묻는 것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였다. 로지는 손을 펴서 그 안에 든 금화를 보여주듯이 시간을 들여서 차려입은 옷과 노력한 흔적이 확연히 보이는 화장과 고심 끝에 고른 것이 분명한 핸드백을, 그런 것들로 치장한 자신의 모습을 벤에게 보여주었다. 벤은 로지가 그러는 것이 싫지 않았고 -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고 - 로지도 벤이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로시가 어떤 옷을 입고 자기가 그린 그림들 앞에 서 있는지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그곳에 온 다른 여자들이 어떻게 하고 왔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

   로지는 키가 크고 몸이 가늘어서 어떤 옷을 입든 잘 어울렸지만 그녀의 옷장에 걸려 있는 몇몇 옷들은 그녀를 정말 제대로 돋보이게 했다. 로지는 그런 옷들 중의 하나를 입고 있었다. 정장은 아니지만 정장 분위기가 나는, 옷을 볼 줄 아는 사람들만 그게 얼마나 고급스러운 옷인지 알아보고 작게 경의를 표하는 베이지색 톤의 브이넥 원피스. 로지는 자기가 가진 핸드백 중에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좋은 것을 - 더 정확히 말하면 두 번째로 좋은 여러 개 중의 하나이거나 세 번째로 좋은 여러 개 중의 하나를 - 메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로지는 가장 좋은 것은 들고 나가지 않았고 벤은 로지가 그러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좋은 것을 내보여서 재앙을 부를 만큼 어리석지 않은 것이.

   “와, 정말 예쁜데.”

   로지가 몸단장을 마치고 나오면 30년 동안 벤은 매번 완전히 똑같은 말을 했고, 벤과 로지에게 - 둘 사이에 - 그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벤은 자기 말이 진심인 것처럼 들리게 하려고 애썼는데 그렇게 하는 방법은 정말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 방법뿐이었고 벤은 언제나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 거짓말 정말이야?”

   익숙한 것들에 -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벤보다 로지에게 더 강력하게 속해 있었다. - 둘러싸인 로지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고 - 더 이상 젊지 않지만 젊음이 성취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고 - 벤은 로지가 그렇다는 것과 자기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로지를 안심시켰다. 그는 소파 등받이로 기운 등을 곧게 펴며 말했다. 마치 법정에 서서 성경에 손을 올려놓은 사람처럼.

   “당신은 언제나 최고야. 한 번도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지.”

   벤이 크고 두꺼운 손으로 소파 위를 쓸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로지는 벤의 재킷 솔기에서 실밥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작지만 뚜렷하게. 그런 다음 - 실밥 터지는 소리가 지나간 다음 - 아주 큰 소리가 갑자기 머리 위에서 물을 부은 것처럼 그들을 덮쳤는데 그건 어떤 물건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부서지면서 내는 소리 같았고, 문 밖에서 - 하지만 그리 멀리 않은 곳에서 - 난 소리가 분명했다. 벤과 로지는 그 소리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를 - 자기들 집에서 떠나기를 - 기다리는 것처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사는 동네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거짓말 같았다. 다른 동네라면 몰라도 그 동네에서는 그랬다. 그 소리가 완전히 지나가고 난 후에도 벤과 로지는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고, 어떤 조짐을 읽어내려는 사람들처럼 신중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금을 찾기 위해 물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처럼.

   이제 집 안에는 정적이 가득했다. 정적이 만질 수 있지만 누구도 만지지 않는 물건처럼 그곳에 놓여 있었다. 어디선가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만 빼면 어떤 소리도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전에 그들의 집에 머물던 그 어떤 정적과도 다른 정적이었다. 완전히 달랐다. 훨씬 무겁고 촘촘하며 그들이 지금껏 한 번도 겪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것들이 - 이질적인 것들이 -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은 강렬하지만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을 - 모든 강렬한 것들은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을 - 침대 밑을 돌아다니는 뱀처럼 기다리면 어디론가 사라지리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늦겠어.”

   벤이 탁자 위에 올려 둔, TV 리모컨 옆에 놓인 자동차 열쇠를 집어 들며 말했다.

   “많이 늦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벤이 차고에서 포드를 빼오는 동안 로지는 진입로에 서서 기다렸다. 진입로 한쪽에 빨간 우체통이 서 있었고 최근에 누군가가 쑤셔 넣은 것이 분명한 비닐봉지가 우체통 밖으로 비어져 나와 있었다. 로지는 가로등이 켜지는 것을, 그 거리에 있는 모든 가로등이 눈에 뭐가 들어간 것처럼 여러 번 깜빡이다가 일시에 켜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곧 벤이 모는 포드가 잔물결처럼 조용히 다가와 로지 앞에 멈춰 섰다.

   “벤.”

   로지가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맨 후에 벤의 이름을 불렀다.

   “아까 그 소리 말이야.”

   벤의 발이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있었다. 벤은 가속페달에 발을 올려 두는 것보다 브레이크 페달에 발을 올려 두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항상 그랬다. 앞 유리창 너머로 길게 뻗은 거리가 보였고, 그들은 아무도 없는 거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고양이 한 마리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길을 건너고 있었다. 로지는 고양이가 건너편 길에 다다른 뒤 얼마 전에 남편이 암으로 죽은 사만다 힐의 집 옆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였을까?”

   “지금 내가 가장 알고 싶은 게 바로 그거야.”

   그들은 한동안 그곳에 앉아 자기들이 들은 소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몸 밑에서 -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어떤 곳에서 -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좌석 시트에 닿은 허벅지 살이 플라스크 진탕기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쉴 새 없이 떨렸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 몇 개의 추측과 가능성이 캐치볼처럼 오가는 동안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이 - 그 소리에 담겨 있던 위협과 악의와 암시 같은 것들이 -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을, 작고 가볍고 무해한 것으로 변했다가 연기처럼 공중에 흩어져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벤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로지의 무릎 위에 한 손을 올려놓았고, 그러자 로지의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벤은 로지의 미간에 자리 잡고 있던 주름이 펴지는 것을 지켜본 뒤에 브레이크 페달에 올려 둔 발을 천천히 떼었다. 차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 출발할 때는 언제나 그렇듯이 - 바퀴가 지면 위를 부드럽게 구르는 것이 느껴졌고······ 다시 한 번 큰 소리가 들렸다. 아까와 완전히 똑같은. 갑자기 머리 위에서 물을 부은 것처럼.

   “당신도 들었지, 벤?”

   로지가 벤 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벤은 다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고 로지를 바라본 뒤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곳을 응시했다. 어둠이 점점 두껍게 쌓여 갔고 그럴수록 밤은 더욱 견고해졌다. 산비둘기 한 마리가 박공널 지붕에 앉아 울고 있었다. 피아노로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근방에서 그런 집은 - 늦은 시간에 피아노로 뭘 치는 집은 - 올슨네와 퍼킨스네뿐이었고 솜씨가 형편없는 것으로 보아 올슨네가 맞는 것 같았다. 올슨네와 퍼킨스네는 경쟁하듯이 피아노를 쳤고 - 그 동네 사람들은 그걸 피아노 전쟁이라고 불렀다 - 지금까지 올슨네가 퍼킨스네를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래, 들었어.”

   벤은 해리 웡네 집을 바라보며 - 짧게 깎인 잔디와 손질이 잘 된 화단과 흔들의자가 놓인 포치와 희고 깨끗한 외벽과 커튼이 반쯤 쳐진 창문 같은 것들을 바라보며 -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기가 그런 것을 - 옆구리가 붙은 것처럼 가까이에 사는 이웃집을 입에 올린 것을 - 후회하며 입을 닫았다. 해리 웡네 집과 벤네 집 사이에는 허리 높이까지 오는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그게 다였다.

   벤과 로지는 한동안 차 안에 앉아 자기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웃집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그렇게 소리가 그들 곁을 지나쳐 길모퉁이를 돌 때까지, 소리가 그들을 놓아 줄 때까지 그들은 차 안에 앉아 이웃집을 바라보았다.



   2

   일요일판 뉴욕타임스를 구독하려면 한 달에 32달러나 들지만 벤은 그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그날도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일요일판 뉴욕타임스를 펼치면서 같은 생각을 했다. 킹 올리버의 코넷 연주가 집 안 곳곳에 안개처럼 흐르고 있었다. 부드럽고 친밀한 음색이 있는 듯 없는 듯이 작고 편안하게.

   벤이 생각하는 일요일은 그랬다. 아침을 먹고 - 오렌지 주스와 베이컨과 훈제연어와 계란 프라이와 구운 채소들로 - 교회의 1부 예배에 다녀와 실내악이나 재즈 연주를 틀어 놓고 - 어떤 일에 집중하면 소리들이 물에 잠긴 듯 사라질 정도의 크기로 - 일요일판 뉴욕타임스를 읽은 것, 그게 벤이 생각하는 완벽한 일요일이었고, 그날 그는 그런 일요일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주에 백악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로지는 벤 옆에서 - 벤과 한두 자리 떨어진 거실 소파 위에 앉아서 - 옷을 정리하고 있었고, 지난주에 백악관에서 일어난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벤은 로지가 실크 스카프처럼 흘러내리는 블라우스 천을 반듯하게 포개려고 애쓰는 것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신문을 들여다봤다. 벤의 빨래는 로지의 것들 곁에 따로 놓여 있었다. 벤의 것들은 벤이 개켜서 옷장에 넣어야 했지만, 셔츠 세 벌과 면바지 두 벌, 거기에 속옷 몇 벌이 다였다. 벤은 스포츠 섹션에 실린 기사를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다 읽은 후에 자기가 좋아하는 야구팀에 관한 기사를 한 번 더 읽고 나서 신문을 넘겼다. 로지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리넨 바지를 반듯하게 반으로 포개며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을 때 짓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임스 오언이 또 신간을 냈다는데.”

   벤은 신문에 실린 - 한때는 소설을 썼고, 그것도 꽤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몇 년 전부터 자기 이야기를 쓰며 잘난 체만 해대는 - 늙은 남자의 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늙은 남자는 잔뜩 주름진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난 그 사람 이제 책 좀 그만 냈으면 좋겠어.”

   로지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빨래를 개던 손이 잠깐 멈추기는 했지만 그리 오랫동안 그러지는 않았다. 벤은 신문을 손에 쥐고 예전에 로지가 제임스 오언의 소설들을 좋아했던 것을,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오언의 소설이 얼마나 위대한지 떠들고 다녔던 것을 떠올렸다. - 어떻게 아직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를 모를 수가 있어요? - 그리고 그때의 로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도.

   “안됐네. 그 사람 주변에는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나 보지.”

   벤은 신문을 한 장 더 넘겼고, 패션과 스타일 섹션이 나오자 - 나이 든 남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 신문을 몇 장 더 빠르게 넘겼다. 로지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속옷을 개고 있었고, 그녀 곁에 반듯하게 개어 놓은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벤은 읽던 신문을 처음 모양대로 접어서 - 잘 펼친 다음 접혀 있던 선을 따라 접기만 하면 되었다 - 소파 탁자 밑에 두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가 개어야 할 세 벌의 셔츠 중 한 벌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난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도로시 핸더슨의 그림에 대해 직접 언급할지 몰랐어. 목사님이 전시회에 갔는지도 몰랐고.”

   벤은 구겨진 셔츠를 양손으로 잡은 다음 소리 나게 몇 번 당겼다. 그런다고 셔츠의 주름이 펴질 리 없었고, 벤도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빨래를 갤 때 그는 늘 그렇게 했다.

   “솔직히 그림이 나쁘지 않았잖아.”

   로지의 무릎 위에 다시 블라우스가 올려져 있었다. 레이스가 달린 파란색 반팔 블라우스. 그녀는 블라우스의 소매를 손으로 서너 번 쓸어 반듯하게 펴며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당신 말이 맞아. 설교 시간에 언급할 정도는 아니었지.”

   그때 -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자기 이름이 공공연하게 거론되었을 때 - 도로시의 얼굴에 얼마나 거만하고 우쭐한 표정이 떠올랐던가. 로지는 도로시 핸더슨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대고 방향을 바꿔 가며 여러 번 인사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것을 보고 자기와 벤과 교회에 모인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는지도. 오, 누가 좀 말려 봐요.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옆 사람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추어 작게 말하는 것이 들렸는데, 로지는 집에 돌아온 이후에 줄곧 그때 어떤 여자가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다.

   “그 여자는 자기가 무슨 시상대에 오른 여배우인 줄 알더라.”

   벤은 천천히 고개를 몇 번 끄덕인 후에 네모반듯하게 접힌 셔츠를 한 곳에 따로 놓아 두고 다른 셔츠를 집어와 다시 무릎 위에 올렸다.

   “너무 그러지 마, 로지. 도로시 핸더슨이 그러는 걸 - 자기가 아주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걸 -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로지는 방금 갠 블라우스에 한 손을 올려놓고 가만히 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벤이 알아듣게 타일러야 하는 어린아이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그 여자가 그러는 걸 볼 때마다 늘 새로워.”

   킹 올리버의 코넷 연주가 오래전에 걸어 둔 액자처럼 거실 한쪽 벽에 조용히 걸려 있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보게 되지만 그전에는 그게 그런 곳에 있는지도 모르고 지낸다는 점에서 그 둘은 - 작게 켜놓은 코넷 연주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 걸려 있는 액자는 - 완전히 똑같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집 안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도 그랬고. 꺼진 TV 화면에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벤과 로지의 모습이 까맣게 비치고 있었다. 코넷의 내림나단조음들이 반딧불처럼 반짝거리며 벤 주변을 떠다니고 있을 때 로지가 입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사람들 말이야, 벤.”

   로지가 마치 그래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처럼 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교회에서 못 봤지?”

   벤은 로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는 그날 아침 교회의 제일 앞줄 신도석 두 자리가 비어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곳은 그들의 - 해리 웡과 조이 웡의 - 자리였고, 찬양대 피아노 바로 옆이라 그들이 앉기 전에는 거의 비어 있는 자리였으며, 교회에서는 그곳이 그들의 자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마르고 작은 키의 해리는 늘 양복을 입고 교회에 나왔고, 아무리 더운 날에도 재킷을 벗지 않았다. 조이는 머리를 항상 숯처럼 까맣게 염색하고 다녔는데 어떤 때는 - 일 년에 한두 번 - 흰머리가 드러나도록 그대로 두었다. 한번은 로지가 조이 웡의 뒤통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벤, 저 여자 머리 좀 봐. 완전히 할머니잖아.

   “못 본 것 같은데.”

   벤은 셔츠를 다 갠 후에 면바지 한 벌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고 이번에도 양쪽 끝을 잡아당겨 소리 나게 폈다.

   “그 사람들 자리에 못 보던 사람들이 앉아 있었잖아.”

   젊은 부부였다. 남자는 권총 그림이 프린팅 된 플란넬 셔츠를 입고 있었고, 목덜미에는 오래된 동물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설교 중간쯤에 다리로 계속 의자들을 건드리면서 들어오더니 자리에 앉을 때도 - 설교가 잠시 중단될 만큼 - 소리를 냈다. 벤은 남자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는 것을 똑똑히 들은 것 같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에 누가 감히 욕을 입에 담을 수 있다는 말인가. 벤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했다. 벤이 아는 사람 중에는 욕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여자는 임신한 지 오륙 개월쯤 된 것 같았다. 불러오기 시작한 배를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고, 설교 시간 내내 다리를 떨면서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기억 안 나? 사만다네 아들 네이선이잖아. 사만다가 그러는데 남편이 암으로 죽은 것보다 약쟁이 아들이 약쟁이 여자하고 결혼한 게 더 마음 아프다더라.”

   로지는 브래지어를 반으로 포개면서 - 로지는 독특한 방법으로 브래지어를 개었다. 다른 여자들은 브래지어를 어떻게 개는지 몰랐지만 다른 여자들이 로지처럼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만다는 로지가 가끔 파이를 들고 방문하는 몇 안 되는 이웃들 중 한 명이었다. 사만다의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에 로지는 사만다를 더욱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고, 그때부터 집에서 만든 파이를 들고 가서 사만다의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사만다, 내가 뭘 만들어 왔는지 한번 맞춰 봐요.

   벤은 자기 말이 그냥 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말했다.

   “사만다가 안됐네.”

   “정말 그래. 우리 톰이 그런 애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이제 로지 쪽에는 개야 할 빨래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그녀는 자기가 방금 내뱉은 말을 -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 주워 담으려는 듯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남들보다 운이 좀 더 좋았다는 거야. 네이선이 나쁜 애라는 말이 아니고.”

   로지는 벤이 안다고, 처음부터 그런 줄 알았다고 대답할 때까지 벤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다가 벤이 그렇게 말하자 개어 놓은 옷더미를 들고 옷방으로 갔다. 곧 옷방 문이 열렸고 옷장 문 여는 소리와 행거에 걸린 옷걸이들이 한쪽으로 밀리는 소리와 옷장 서랍이 열렸다가 닫히고는 다시 열리는 소리가 났다. 벤은 로지가 옷방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개어 놓은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벤은 일요일판 뉴욕타임스를 다시 꺼내 읽으려다가 그만두었다.

   한참 뒤에 옷방에서 나온 로지가 아까 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옆집이 너무 조용한 것 같지 않아? 당신은 안 그래?”

   벤은 로지가 자기 말에 밴 어떤 요소를 감추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찾을 물건이 있는 사람처럼 거실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면 그랬다. 로지는 자기가 겁먹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 혹은 그 사실을 무시하기 위해 - 천장 모서리나 커튼 윗단에 쌓인 먼지나 벽에 난 못 자국 같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너무 조용하니까 더 마음에 걸리네. 괜찮겠지?”

   벤은 로지의 작은 머릿속에서 어떤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로지는 웡 부부가 자기 집 부엌이나 응접실 같은 곳에 쓰러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부서진 문고리와 카펫 위에 흩어져 있는 유리 조각들과 옆으로 쓰러진 식탁의자와 열린 냉장고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과 바닥에서 흐르다가 말라붙은 핏자국과 칼에 찔렸거나 머리가 깨진 채 바닥에 누워 있는,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해 사흘째 방치되고 있는 두 구의 시체와······ 로지의 머릿속은 그런 것들로 가득할지도 몰랐고, 그중 몇 가지는 벤도 지난 며칠 동안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것들이었다.

   벤은 로지가 - 자기가 -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걱정 마.”

   벤은 꺼진 TV 화면을 - 마치 TV가 꺼진 것을 몰라서 그러는 것처럼 -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지 꽤 된 것 같았는데 언제부터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채로 그는 마저 얘기했다.

   “괜찮겠지.”

   로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벤이 방금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잠시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남은 옷들을 챙겨서 다시 옷방으로 갔다. 벤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TV 화면 속에 비친 것들을 - 집 안에 있는 것들을 -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를테면 현관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긴 복도와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벽과 얼마 전에 벤이 직접 손본 천장등과 뭘 걸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 옷걸이와 전통적인 방식으로 묶여 있는 커튼과 오래전에 사놓은 책들이 잔뜩 꽂혀 있는 책장과 가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고급 소파와······ 그런 것들은 칼로 잘라 예쁜 쟁반 위에 올려놓은 케이크처럼 까만 화면 속에 담겨 있었고, 전부 진짜 같지 않았다.

   어느새 로지가 돌아와 벤 곁에 앉으며 말했다.

   “어제 톰하고 통화했는데 시험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나 봐. 그래도 자기 생일에는 온다니 다행이지 뭐야.”

   킹 올리버의 코넷 연주가 들리지 않았다. 촘촘한 뜰채를 여러 번 저어서 모두 걷어낸 것처럼. 그런 지 좀 되었는데 갑자기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도 몰랐고 그럴 가능성이 더 컸다. 벤이 한 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린 뒤에 TV 화면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잘 됐네.”

   거실 창 너머로 웡네 집 마당이 내다보였다. 잔디는 아직 단정해 보였지만 예전만큼 그렇게 단정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당 잔디 위에 검은 비닐봉지가 놓여 있었다. 바람에 실려 어디선가 날아온 것이겠지만 해리 웡과 조이 웡은 자기 집 마당에 검은 비닐봉지가 놓여 있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벤이 알기로는 그랬다. 그리고 마당 한켠에 플라스틱 재질의 야외용 의자가 쓰러져 있었다. 사흘째 그랬고, 벤은 지난 사흘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울타리 밑에 쓰러져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지켜보았다. 그때마다 수많은 추측과 짐작들이 벤의 머릿속을 돌아다녔고, 벤이 보기에 로지도 그런 것 같았다.

   벤은 로지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렸고, 로지는 벤의 손등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그렇게 그들은 거실 소파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한동안 말없이 이웃집 마당을 바라보았다.



   3

   그날 저녁, 벤은 잠시 포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 집에 돌아와 오랫동안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그래서 그렇게 했다. 포치에는 낮은 원목탁자와 – 무릎 담요나 병따개나 물티슈 같은 것들을 넣어 두는 - 작은 서랍장과 나무의자 두 개가 - 로지의 것은 흔들의자였고 벤의 것은 그렇지 않았는데 벤은 로지가 없을 때 아무 의자에나 마음 내키는 대로 앉았고 로지도 벤이 없을 때 그러는 것 같았다 - 놓여 있었다. 벤은 포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몇 장 주워 휴지통에 버린 다음 흔들의자로 가서 앉았다.

   갈색 픽업트럭 한 대가 천천히 거리를 통과해 지나가고 있었다. 자전거를 탄 아이 둘이 추월해 지나가려 하자 갈색 픽업트럭은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아이들을 먼저 보낸 뒤에 다시 바퀴를 굴리며 움직였다. 벤은 기분 좋게 흔들리는 흔들의자에 몸을 맡기고 픽업트럭이 거리 저편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퍼킨슨네 집에서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렸다. 벤은 퍼킨슨네 집이라고 확신했다. 바흐를 바흐처럼 치는 것을 보면 그랬다. 올슨네가 치는 바흐는 - 올슨네 식구 중에는 아직 바흐를 바흐답게 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천천히 길을 건너 사만다 힐의 집 옆으로 돌아 사라졌다. 며칠 전에 차 안에 앉아서 본 그 고양이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벤은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몇 개를 더 주워 휴지통에 버린 뒤 다시 흔들의자에 앉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해리 웡네 집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집이 아직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이제는 단정하지 않은 것이 확연해진 잔디가 보였고 - 벤이 사는 동네에는 자기 집 마당을 그렇게 오랫동안 방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 울타리 밑에 쓰러져 있는 의자도 그대로였다. 벤이 보고 있는 동안 고양이 몇 마리가 지나다녔는데, 고양이들은 그곳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고양이들이 사람이 사는 집 마당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몰랐지만, 벤의 눈에는 그래 보였다. 하늘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고, 좁은 좌석에 승객을 가득 실은 여객기가 구름과 구름 사이를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었다.

   처음에 벤은 얼 캠프가 왜 웡씨 부부네 집 울타리 문 앞에 서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 그곳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한 후에도 그게 얼 캠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얼 캠프는 그 동네에 사는 유일한 군인 출신이었고, 퇴역한 이후 양변기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그는 목소리가 크기로 유명했는데, 그 동네에서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사람은 -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골을 넣었거나 멀리 있는 누군가를 불러 세우거나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러고 싶을 때 고함을 지르는 사람은 - 얼 캠프뿐이었고,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벤이 알기로 그는 아내에게 끌려서 교회에 나오는 남자였고, 바자회나 자선 모임에 얼굴을 내미는 것도 아내의 강요 때문인 것 같았으며 그 모든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 같았지만 남의 집 울타리 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얼은 손으로 수염 난 턱을 만지면서 벤이 이미 발견한 것들을 - 방치된 잔디와 쓰러진 의자를 -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웡네 집으로 시선을 옮겼다. 벤의 눈에는 얼의 시선이 마당을 가로질러 포치 계단을 한 칸씩 밟아 오르는 모습이, 현관 앞에 서서 손가락 마디로 문에 노크하는 모습이 실제로 보이는 듯했다.

   얼은 아직 벤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른 후에 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와 털이 수북한 손을 내밀지 않는 것을 보면 그랬다.

   얼은 더 많은 것을 보려는 듯 웡네 집 쪽으로 내민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고, 벤은 의자가 흔들리지 않게 주의하며 얼과 얼의 시선이 가닿은 곳을 지켜보았다.

   한참 후에 벤은 자기가 아는 유일한 퇴역군인이 남의 집 울타리 문을 손으로 밀어 여는 것을 보면서 얼과 얼의 아내 케이트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보안관 앞에 놓인 접이식 철제의자에 앉는 모습을 떠올렸다. 벤은 얼과 케이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벤과 얼은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산타복을 입고 구세군 냄비 옆에 서서 같이 종을 흔드는 사이였고, 그 일이 끝나고 나면 자주 들르는 술집에 앉아서 딱 한 잔만 마셔도 속에서 불이 날 만큼 독한 술로 몸을 녹이는 사이였다. 얼의 주장에 따르면 추위에 떨면서 여섯 시간 동안 같이 종을 흔드는 것은 정말 각별한 사이라는 뜻이었고 벤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우저 씨에게 이 말은 꼭 하고 싶네요. 그냥 벤이라고 부르세요. 좋아요, 벤. 그러니까 내 말은요. 벤은 얼굴이 붉고 몸통이 두꺼우며 가끔씩 커다란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던 얼 캠프를 떠올렸다. 그가 얼마나 선량하고 모범적인 이웃이었는지도.

   집 안에서 - 벤의 등 뒤에서 -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고 슬리퍼를 바닥에 끄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기상캐스터가 정확한 발음으로 날씨 정보를 전했다. 로지가 거실에 나와 TV를 켠 것 같았다. 온도와 습도와 기압처럼 숫자로 된 정보들이 먼지처럼 공중에 떠다녔고, 벤은 얼이 울타리 문 안으로 한 발을 내디디려는 것을 보면서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포치 난간에 손을 짚고 섰다. 벤은 원래 멀리 있는 누군가를 큰 소리로 불러 세우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그렇게 했다.

   “안녕하세요, 얼.”

   벤은 포치 난간 너머로 몸을 내밀며 소리쳤다. 마치 자기 목소리가 어디에 가닿는지 지켜보려는 것처럼.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벤은 얼에 대해 - 이웃 이상으로 -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전혀 모른다고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자기 이름이 불리자 불에 엉덩이를 데인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짓는 얼 캠프를 보면서 벤은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다음 순간 얼이 바지 속으로 셔츠를 밀어 넣듯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감추자 벤은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것이 맞다고 확신했다. 그 동네에 사는 유일한 퇴역군인은 큰 소리로 벤의 이름을 부르거나 다가와 악수를 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한때 벤이 안다고 생각했던 얼 캠프가 아니었다.

   얼은 벤과 눈이 마주치자 한동안 - 울타리 문을 잡고 한쪽 발을 웡네 집 마당에 들여놓은 채 -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채로 여러 가지 생각과 단어들이 - 오해와 변명과 단순한 호기심과 해명할 수 없는 호의 같은 단어들이 - 얼의 머릿속에서 돌아다니는 것 같았는데 벤의 눈에는 그게 놀란 새들이 천장과 벽에 부딪히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처럼 확연히 보였다.

   곧 얼은 열린 울타리 문을 천천히 닫은 뒤에 그곳을 떠났다. 벤은 얼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얼과 함께하는 일이 - 구세군 냄비 옆에 서서 여섯 시간 동안 추위에 떨며 종을 흔드는 일이 -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그건 벤에게 무척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흔들의자가 기분 좋게 흔들렸고 - 방금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 벤은 좀 전에 얼이 서 있던 곳과 쓰러진 의자와 방치된 잔디를 차례차례 바라보았다.

   “벤, 밖에서 뭐 해?”

   집 안에서 로지가 소리쳤다.

   “그냥 앉아 있는데, 왜?”

   포치 바닥에 마른 지푸라기가 모여 있는 것이 보였고 벤은 손을 뻗어 집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아까 톰하고 통화했거든. 톰이 그러는데······.”

   로지의 말에 따르면 톰에게 아주 사소한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그것은 톰이 학교에서 만난 어떤 여자애와 얽힌 문제였는데, 벤이 보기에 그것은 그 나이 때의 남자애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종류의 것이었다. 벤은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로지에게 그 점을 일깨워 주었다.

   “옛날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옛날이 아니잖아. 난 톰이 걱정돼.”

   벤은 아들에 대해 생각했다. 톰은 벤이 신뢰하는 두 사람 중의 한 명이었고, 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은 두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걱정하지 마. 톰은 괜찮을 거야.”

   의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거리에는 어느새 밤이 찾아왔고, 모든 곳에 물이 차오르듯 어둠이 고였다. 벤은 한동안 더 흔들의자에 앉아 웡네 집 쪽을 바라보았다. 불을 켜지 않은 채 - 지난 며칠 동안 한 번도 불을 켠 적이 없었다 - 어둠에 덮여 있는 이웃집을. 그러다 어느 순간 벤은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4

   로지는 결혼 전에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 - 그러니까 부모와 한집에 살 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자기가 식탁보가 깔려 있는 집에서 자랐다는 것이었다. 로지는 그 이야기에 아주 많은 의미가 - 한 사람의 내면에 대한 매우 비중 있는 의미가 - 담겨 있다고 말했다.

   한번은 로지가 식탁보가 깔린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시간을 들여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그 설명을 듣고 벤이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로지가 식탁보를 그냥 예쁜 천 이상의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로지에게 식탁보가 깔린 식탁은 - 화목이나 예절이나 교양이나 우아함처럼 -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것에 속했고, 그녀가 결혼생활을 통해서 얻으려고 했던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식탁에 식탁보를 깔고 가족들을 한자리에 둘러앉히는 것. 그래서 로지는 결혼한 이후에 줄곧 매주 한 번에서 두 번씩 깨끗한 식탁보를 새로 깔았고 - 톰이 떠나고 그들 둘만 남겨졌을 때도 그랬고 - 그걸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벤은 떡갈나무 식탁에 앉으면서 튤립 무늬가 들어간 식탁보를 손바닥으로 한 번 천천히 쓸었다. 그날 새로 깔린 식탁보였고 로지가 아끼는 많은 식탁보 중의 하나였으며······ 로지는 가족들의 생일이면 늘 튤립 무늬가 들어간 그 식탁보를 깔았다.

   “톰은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온다나 봐.”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로지가 조리한 콩 요리를 커다란 스푼으로 떠서 벤의 접시에 - 소스를 바른 훈제연어 옆에 - 덜어 놓으며 말했다.

   “하루 전날 와서 같이 지내면 얼마나 좋아.”

   벤은 롤빵이 담긴 바구니로 손을 뻗었다. 사놓은 지 며칠 되었는지 롤빵 끝이 연한 색을 띠며 말라 있었다. 벤은 손가락을 사용해서 신중하게 롤빵을 떼어내며 말했다.

   “걔한테 그렇게 말해 보지 그랬어.”

   “리포트 때문에 정신없이 바쁜가 봐. 곧 시험도 치른다는데.”

   로지는 자기 접시에 구운 야채를 덜고 그 위에 소금을 조금 뿌렸다.

   “아무튼 걔 말로는 그래.”

   대화가 끊기고 한동안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엄숙하게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 식탁 주변에 포크와 나이프 부딪히는 소리만 떠돌 때마다 - 벤은 자기들이 아직 식탁에 둘만 앉아 식사하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예전에 어린 톰이 식탁에 앉아서 얼마나 많은 말들을 쏟아냈는지, 입안에 음식을 넣고 얼마나 쉴 새 없이 재잘댔는지 떠올렸다. 사춘기를 지나는 동안 말수가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톰은 다른 남자애들보다 말을 많이 했고 - 나중에는 그러려고 애쓰는 것이, 부모와 대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눈에 보였고 - 벤은 그게 얼마나 친절하고 다정한 행동이었는지 생각했다.

   벤은 로지 쪽에 놓여 있는 소금통을 집으며 말했다.

   “참, 그 문제는 어떻게 됐어?”

   로지는 구운 야채를 포크로 하나씩 찍어서 입으로 가져갔고 그런 다음 입안에 있는 것을 여러 번 오래 씹어 삼켰다. 그녀는 그렇게 먹는 것을 좋아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한 번에 하나씩.

   “무슨 문제?”

   “그 문제 때문에 톰이 걱정된다고 했잖아.”

   벤은 잠시 포크를 가만히 쥔 채 고개를 들어 로지를 바라보았다. 로지가 입안에서 씹고 있던 것들을 목 너머로 삼키며 말했다.

   “아, 그거. 몰라. 톰이 오면 물어 봐야지.”

   대화가 다시 삭은 밧줄처럼 힘없이 끊겼고, 식탁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만 남겨졌다. 내용물이 얼마 안 남은 케첩 병이 거꾸로 뒤집힌 채 식탁 한켠에 세워져 있었고, 벤은 그 케첩 병이 언제부터 그곳에 세워져 있었는지 생각하며 입안에 든 것들을 천천히 씹었다. 하루살이처럼 생긴 날벌레 한 마리가 - 처음에는 하루살이인 줄 알았지만 하루살이는 아니었다 - 식탁 위에서 맴돌다가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있잖아, 벤.”

   냉장고에 다녀온 로지가 다시 식탁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고, 벤은 그녀가 냉장고에서 무엇을 꺼내왔는지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쩌면 그냥 냉장고 문을 열어 그 안을 한번 들여다본 것일 수도 있었다. 로지는 가끔 식사를 하다 말고 그렇게 하니까.

   “낮에 옆집에 갔었어.”

   벤은 방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로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집에서 만든 애플파이 좀 나눠줄까 해서 말이야.”

   로지는 식탁보에 흘린 빵 부스러기를 손바닥으로 쓸어 한 곳에 모았고, 벤은 조리한 콩을 떠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잘했네. 사람이 있었어?”

   “아니. 없었어.”

   로지는 한 곳에 모아 놓은 빵 부스러기를 냅킨 위로 옮기며 낮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웡네 집에서 자기가 뭘 봤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집, 그런 지 좀 됐잖아. 그래도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어.”

   옆집에 애플파이를 들고 가기로 결정한 이후 - 로지는 모든 일을 신중하게 결정했고 한번 결정한 일은 쉽게 바꾸지 않는 성격이었다 - 로지가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어떤 옷을 입고 갈까 하는 것이었다.

   “여자들한테 그게 얼마나 까다로운 문제인지 당신은 모를 거야. 남의 집에 입고 갈 옷을 고르는 게.”

   로지는 손잡이가 달린 라탄 바구니에 애플파이를 담으며 예전에 사만다의 집에 갔던 것과 - 사만다의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바로 다음날 - 그때 어떤 옷을 입었는지 떠올렸다. 소박한 스타일의 베이지색 원피스.

   잠시 후에 로지는 라탄 바구니를 손에 들고 웡네 집 울타리 문 앞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 베이지색 원피스 밑단이 춤추듯이 흔들렸고, 로지는 잔디가 웃자란 웡네 집 마당과 그곳에 쓰러져 있는 의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울타리 문을 밀어 열었다.

   “애플파이를 들고 옆집을 방문하는 게 잘못된 행동은 아니잖아.”

   로지가 포크로 식탁 맞은편에 앉은 벤을 가리키며 엄격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동네에 사는 누군가는 애플파이를 들고 가서 웡네 부부가 잘 지내는지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해. 그걸 내가 한 거고.”

   벤은 웃는 얼굴로 로지의 말에 동의했고 - 맞아, 내 생각도 그래 - 로지는 포크를 다시 식탁보 위에 내려놓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데 꼭 버려진 집 같더라. 뭐, 완전히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 하긴 그 집이 아직 그렇게까지 상태가 나쁜 것은 아니니까.”

   포치 계단을 밟아 오르는데 첫 번째인가 두 번째 계단에서 삐걱 소리가 났고, 로지는 그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자기 발이 밟은 곳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난간을 잡고 남은 계단을 마저 올랐다. 그냥 손보지 않은 계단이 삐걱댄 것뿐이었다. 로지에게는 그게 큰 맘 먹고 들고 온 애플파이를 다시 집으로 가져가야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거기 있는 오렌지 주스 좀 집어 줄래. 컵에 따라 주면 더 좋고.”

   벤은 컵에 오렌지 주스를 반쯤 따라서 로지가 팔을 뻗으면 닿는 곳에 놓아 두었다. 로지는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을 보고 고개를 들어 벤을 보았다. 그녀는 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한 뒤에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얀 나무문에 동물 모양 금속 노커가 달려 있었어. 자기도 예전에 - 웡네 집이 지금 같지 않을 때 - 몇 번 본 적 있었을 거야. 물론 그때는 나도 그곳에 그런 게 달려 있는지 몰랐지만.”

   하늘에는 두꺼운 천으로 가구를 덮어 놓은 것처럼 낮게 뜬 구름이 가득했고, 먼 곳에서 간간이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열댓 마리의 까마귀 떼가 전선 위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부리로 깃털을 다듬거나 가끔씩 깜짝 놀랄 만큼 크게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로지는 손을 뻗어 노커 손잡이를 쥐었고 잠시 그대로 있다가 자기가 뭘 하려고 했는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나무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정말 여러 번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더라. 그럴 것 같았지만 정말 그럴 줄 몰랐어. 몰랐던 것 같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집에 아무도 없었다는 거야.”

   로지는 애플파이가 담긴 라탄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문에 - 노커 바로 옆에 - 귀를 대었다. 그곳 어딘가에 오래전에 칠한 페인트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로지는 한동안 문에 뺨을 붙이고 서서 어떤 소리가 들리기를 - 슬리퍼 끄는 소리나 그냥 틀어 놓은 TV 소리나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나 부주의하게 문을 여닫는 소리나 싱크대에 물이 흐르는 소리나 작은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처럼 집 안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기를 - 가만히 기다렸다. 아니면 그런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문에 귀를 대고 가만히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악기의 울림통처럼 공기가 빈 공간을 돌아다니며 내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내가 코로 숨을 쉬며 내는 소리가 그렇게 큰 줄 몰랐어.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모든 소리들이 전부 달아난 것 같았어.”

   로지는 오렌지 주스를 두 차례에 걸쳐서 다 마신 다음 빈 컵을 원래 있던 자리에 - 식탁보에 동그랗게 젖은 자국이 남은 곳에 - 내려놓았다. 벤은 빈 컵에 다시 오렌지 주스를 따랐고, 로지는 노란 오렌지 주스가 반쯤 찬 컵을 바라보며 말했다.

   “문이 열려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대신 시도는 해봐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 그게 다야. 안 될 줄 알지만 시도는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로지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핀 후에 - 애플파이를 주려고 간 것뿐인데 왜 그랬나 몰라 - 문고리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러고 나서 반대로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고, 그런 동작을 서너 번 반복한 다음 문이 단단히 잠겼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은 잠겨 있었어. 뭐, 그런 거지. 다른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이.”

   로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후에도 얼마 동안 더 그곳에 - 웡네 집 문 앞에 - 머물러 있다가 그 자리를 떠났다. 포치와 마당을 잇는 계단 한 곳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고, 로지는 마당을 가로질러 울타리 문으로 가는 동안 마당 한켠에 쓰러져 있는 의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있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냥 계속 소파에 앉아서 그 생각만 했어. 이렇게 계속 소파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

   로지는 그날 자기가 소파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고 그곳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떠올리는 것처럼 소파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다가 내가 이웃집 문 앞에 파이 바구니를 두고 왔다는 게 생각난 거야. 그게 말이 돼? 그렇게 큰 물건을 남의 집 문 앞에 두고 온다는 게.”

   벤은 팔짱을 끼며 식탁 밑에 있는 다리를 꼬았다. 로지는 벤이 다리를 꼬고 앉는 걸 싫어했고 - 특히 식탁에서 그러는 걸 싫어했고 - 품위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로지는 접시 위에 놓인 음식들을 포크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벤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로지가 말했다.

   “맞아. 파이 바구니를 가지러 다시 그 집에 갔어.”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벤도 저녁식사 후에 설거지하는 것을 - 고무장갑을 끼고, 거품을 내고, 접시와 그릇들을 흐르는 물에 헹구고, 마른 행주로 물기를 닦아내는 그 모든 과정을 -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러운 식기들이 밤새 싱크대에 쌓여 있는 것을 두고 볼 만큼 싫어하는 편도 아니었다. 벤은 포크에 묻은 소스나 접시에 남은 기름기를 닦아내면서 싱크대 앞에 난 창문 너머로 거리를 내다보았다. 길 건너편 집 수영장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고 가끔씩 발로 물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벤이 싱크대 앞에 서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로지는 침실에 들어가 잠자리를 정리했다. 침대 시트를 반듯하게 펴고 잠옷을 내놓고 이불이 뭉치지 않았나 살피고 손으로 베개를 만져 부풀리고······ 그들은 삼십 년 동안 그래 왔고, 아직은 그보다 더 나은 방식을 찾지 못했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식탁에 돌아온 벤이 물기가 남아 있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말했다.

   “앞집에서 누가 수영을 하나 본데.”

   로지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둘이 같이 먹는 몇 가지 약을 - 콜레스테롤 수치와 혈당량을 관리하는 몇 가지 약을 - 식탁 위에 올려놓고 그것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닉 앤더슨이겠지. 그 남자 가끔 밤에 그러잖아.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화장실 쪽에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한동안 집 안에는 그 소리만 가득했다. 벤과 로지는 마치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제대로 한번 들어 봐야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로지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알약들을 - 마치 그게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알약 이상의 어떤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까?”

   로지가 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다시 웡네 집에 갔을 때······ 포치로 오르는 계단 한 곳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고, 파이 바구니는 처음 놓아 둔 그 자리에 - 동물 모양 노커가 달려 있는 문 앞에 - 그대로 놓여 있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잎이 큰 나무들을 흔들면서 거리를 통과해 지나갔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에서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로지는 빗방울이 홈통을 때리는 - 점점 잦아지고 커지는 - 소리를 들으며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그녀에게 그러라고 시킨 것처럼.

   처음에 로지는 그것이 그곳에 놓여 있는 다른 많은 물건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통에 담긴 나사못이나 챙이 넓은 밀짚모자나 포치 난간에 걸어 둔 전지가위나 낡고 더러운 작업 장갑이나 선이 긴 멀티탭처럼 포치 구석에 놓여 있는, 마당을 손질하거나 망가진 울타리를 손볼 때 쓰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 망치는 그런 것들 사이에 놓여 있었고, 누구나 그렇듯이 로지도 예전에 그런 것들 사이에 망치가 놓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망치는 다른 망치들과 달랐고, 로지는 포치 구석에 시선을 둔 채 그 망치의 어디가 다른 망치들과 다른지 생각했다.

   잠시 후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 의자와 테이블과 포치에 두고 쓰는 작은 수납장을 지나 - 포치 끝으로 다가갔다. 망치의 자루에 낡은 헝겊이 감겨 있었고, 둔탁해 보이는 헤드 바닥이 검게 얼룩져 있었다.

   “처음에는 기름이 묻은 줄 알았어. 기름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기름은 아닌 것 같았는데 확신은 못 해. 그냥 날씨나 기분 탓일 수도 있어.”

   벤은 로지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알약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벤은 반으로 쪼개진 분홍색 알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가 특별히 그 알약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 기억났지만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벤, 자기는 그게 뭐라고 생각해? 망치 헤드의 얼룩 말야.”

   벤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로지를 바라보고 고개를 숙여 반으로 쪼개진 분홍색 알약을 바라본 후에 다시 로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지지 않았지?”

   로지가 고개를 들어 벤의 얼굴을 빤히 - 지나치게 빤히 - 바라보며 대답했다.

   “만지지 않았지. 내가 그걸 왜 만지겠어?”

   로지의 손이 식탁보 위에, 빨간색 튤립과 노란색 튤립 사이에 올려져 있었다. 탄력을 잃은, 주름진 손등 위로 파란 핏줄이 흐르고 있었고······ 벤이 로지의 손등에 가만히 손을 얹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지지 않았으면 됐어.”

   벤은 로지가 이웃집에 가서 만진 것들을 생각했다. 노커와 문고리와 어쩌면 로지가 인지하지 못한 어떤 것들. 그리고 그는 그런 것들의 표면에 남아 있을 - 도장처럼 찍혀 있을 - 로지의 흔적들을 생각했다. 벤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후에 식탁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톰의 생일 케이크는 내일 아침에 올 거야. 브라운 씨가 딸기 맛을 추천해서 그걸로 시키기는 했는데 톰이 좋아할지 모르겠네.”

   벤은 거실로 걸어가 옷걸이에 걸려 있는 브이넥 카디건을 몸에 걸쳤다.

   “어디 가려고?”

   로지가 카디건 주머니를 뒤지는 벤을 바라보며 말했다. 벤은 구겨진 종이를 펴서 그게 드러그스토어에서 발급한 영수증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카디건 주머니에 넣었다.

   “그게 정말 기름이 아닌지 보고 올게.”

   벤이 옷걸이 옆에 서서 말했다.

   “그게 만약 기름이 아니라면······ 내일 톰이 오는데 문제에 엮여서 좋을 게 없잖아.”

   로지는 벤이 싱크대 서랍에서 거의 다 쓴 물티슈 팩을 꺼내 카디건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 다음 고개를 숙여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알약들을 바라보았다. 벤이 등 뒤로 다가와 로지의 어깨에 손을 얹을 때도 그녀는 알약이 놓여 있는 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당신이 만진 문고리와 노커를 닦아 놓는 게 좋을 것 같아.”

   벤이 로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말했다.

   “그러는 게 싫으면 지금 말해. 당신이 싫다고 말하면 나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로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한 행동은 그게 다였다. 로지는 문득 집 안 조명이 너무 밝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건 그녀가 그 집에 살면서 처음 한 생각이었고 밤이 찾아왔다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인지한 것도 처음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창이 벽에 그린 것처럼 검고 반듯했다. 로지는 어깨에 닿은 벤의 손이 햇볕에 달군 돌처럼 뜨겁다고 생각했고 벤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에 그녀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꺼내 신는 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곧 문이 열렸다가 닫혔고, 식탁에 혼자 앉아 있는 로지의 모습이 검은 유리창 표면에 비치고 있었다.


   5

   생일 케이크는 약속대로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리본이 달린 고급스러운 상자에 담겨서. 케이크는 먹기 아까울 만큼 예쁘게 꾸며져 있었고 상자에서 꺼내지 않았는데도 온 집 안에 딸기 향기가 가득했다. 벤과 로지는 케이크 상자를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로지는 케이크를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식탁보가 깔리지 않은 식탁 위에 접시를 올려놓는 것처럼.

   오후에는 둘 사이에 사소한 의견 충돌이 있었다. 벤은 - 매년 그래 왔듯이 - 풍선을 불어서 벽과 천장에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로지는 톰이 더 이상 그걸 보고 기뻐할 나이는 아니라고, 그럴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고 말했다.

   “자기는 톰이 몇 살이라고 생각해?”

   “열아홉 살이지, 나도 알아. 하지만 생일에 풍선이 없으면 실망할지도 모르잖아.”

   로지는 오븐에 넣을 음식 재료들을 손질하다가 말고 소파 위를 정리하는 벤을 돌아보며 말했다.

   “누가 실망하는데? 톰이야, 자기야?”

   벤은 무릎 담요 두 장을 반듯이 접어서 소파 테이블 밑에 포개어 놓은 다음 바닥에 나와 있는 책들을 집어서 책장에 - 원래 그 책이 꽂혀 있던 자리에 - 꽂았다.

   “누구든 실망할 필요 없잖아.”

   “자기 말이 맞아. 누구든 실망할 필요 없지.”

   벤이 포드를 끌고 나가 마트에 다녀오는 동안 로지는 톰이 좋아하는 미트로프를 만들었다. 냉장고에서 숙성된 간 고기를 꺼내고, 양파와 당근과 할라피뇨와 피망과 마늘 같은 야채를 잘게 썰고, 그렇게 준비한 재료들을 큰 볼에 넣어 빵가루와 함께 잘 섞고······ 로지가 미트로프 위에 바를 토마토소스를 만들고 있을 때 벤이 커다란 비닐 쇼핑백을 들고 들어왔다.

   “이게 다 웬 거야.”

   벤은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았고 그 안에서 풍선과 풍선에 바람을 넣을 미니 펌프와 양면테이프를 꺼냈다. 그런 다음 바로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로지를 잠깐 바라본 뒤에 그는 금박이 붙은 고깔모자와 벽에 붙이는 축하 문구와 사랑의 말을 써 넣을 생일카드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코끼리 나팔 같은 것들을 차례대로 하나씩 꺼내 놓았다. 로지는 벤이 사온 것들을 한번 죽 훑어보고 나서 말했다.

   “풍선이 없으면 누가 실망할지 알겠네.”

   “아무도 실망하지 않으면 좋잖아.”

   벤은 마트에서 사온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잠시 풍선을 바라보며 바람을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풍선 하나를 집어 들었고 큰 주사기처럼 생긴 손 펌프로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로지가 토마토소스에 으깬 바질을 넣고 나무 주걱으로 저으면서 말했다.

   “아까 톰이 전화했어. 좀 늦는대.”

   벤이 펌프질을 할 때마다 압축된 공기가 좁은 관을 통과해 지나가는 거친 소리가 들렸고······ 풍선이 부풀어 올랐다.

   “원래 늦는다고 하지 않았어?”

   벤은 다 분 풍선을 바닥에 내려놓았고, 그런 다음 불어야 할 다른 풍선 하나를 집어 들어 펌프의 공기 주입구에 끼워 넣었다. 로지가 먹기 좋은 크기로 모양을 잡은 미트로프를 오븐에 넣으며 말했다.

   “그것보다 더 늦을 수도 있다나 봐.”

   벤은 잠시 로지를 바라보았고 다시 풍선에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로지는 오븐 앞에 서서 전면 투시창 너머로 열판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날 벤은 저녁이 될 때까지 마트에서 사온 풍선을 모두 불어서 - 오십 개나 되는 풍선을 모두 불어서 - 부엌과 거실 천장을 빈틈없이 장식했고, 생일축하 문구를 제일 눈에 잘 띄는 벽에 붙였다. 벤이 그러는 동안 로지는 톰이 좋아하는 음식을 몇 가지 더 만들었는데 - 피칸 파이와 치즈 라자냐와 클램차우더와 잠발라야 같은 음식들 - 한 가지 음식을 만들 때마다 벤을 불러서 의견을 물었다. 맛이 어때? 그들은 거실에 모여서 생일카드를 썼고 그것을 리본이 달린 생일선물과 함께 소파 테이블 위에 놓아 두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식탁에 앉아 가끔씩 고개를 돌려 현관 쪽을 바라보면서 톰이 오기를 기다렸다.

   밤 아홉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고,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벤과 로지는 톰에게 몇 번 전화했지만 - 여섯 시에 한 번, 일곱 시에 한 번, 여덟 시에 한 번 - 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벤과 로지는 얼굴을 만지거나 손바닥으로 식탁보를 쓸거나 한 번씩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하면서 식탁 위에 올려 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들도 그러는 것이 - 식탁에 마주 앉아서 말없이 전화기를 바라보는 것이 -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고깔모자와 코끼리 나팔은 마치 일부러 치워 둔 것처럼 식탁 한쪽 구석에, 그리고 그것들 곁에 케이크가 아직 상자 안에 담긴 채로 놓여 있었다. 그날 아침부터 로지가 만든 음식 냄새가 집 안에 가득했고, 환기를 위해 반쯤 열어 둔 창문 너머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들었다.

   로지가 불안한 마음이 드러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 없겠지?”

   벤은 천장에 붙어 있는 풍선들을 한 번 보고 고개를 숙여 다시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전화기를 보며 대답했다.

   “걱정 마. 톰은 괜찮을 거야.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노크 소리가 처음 들렸을 때 벤은 그 소리가 너무 간결하고 격식을 차린다고 생각했고, 로지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톰은 문을 그런 식으로 두드리지 않았다. 훨씬 빠르게 여러 번 두드렸다. 손가락 마디로 정확히 세 번 두드린 후에 아무 말 없이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톰일 리 없었다.

   두 번째 노크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지자 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 로지가 벤을 따라 일어났다. 벤은 현관으로 걸어간 뒤에 외시경에 눈을 가져다 대었고, 로지의 손을 잠시 잡았다가 놓은 다음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문밖에는 제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선량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며 서 있었다. 한 명은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여자였는데, 남자는 자기 이름이 닉이라고 했고 뚱뚱한 몸에 얼굴이 붉었다. 경찰차 조수석에 도넛 상자를 싣고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씻지도 않은 손가락으로 도넛을 집어 먹을 것같이 생긴 남자였다. 여자는 삐쩍 마른 몸에 주근깨가 많았고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둘 중 한 명에게서 끔찍한 담배 냄새가 났는데 어쩌면 둘 다에게서 나는 냄새일지도 몰랐고 담배 냄새가 깜짝 놀랄 만큼 끔찍한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더 컸다. 닉이 엄지손가락으로 웡네 집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옆집에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서요.”

   벤과 로지가 경찰과 마주서 있을 때 -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일을 겪고 있을 때 - 식탁 위에 놓아 둔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벤과 로지는 몸을 돌려 등 뒤를 돌아보았고, 다시 밤늦은 시간에 문을 두드린 두 명의 경찰을 보았다. 닉이 손바닥에 묻은 무언가를 경찰복 상의에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몇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벤과 로지가 닉을 상대하는 동안 전화벨이 한 번 두 번 세 번 울렸고, 그런 뒤에 가위로 자른 것처럼 끊겼다. 벤과 로지는 다시 한 번 튤립 식탁보 위에 놓여 있는 전화기를 돌아보며 그들 곁에 없는 -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못한 - 톰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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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1
빛의 한가운데

빛의 한가운데 정이현 만약 아무것도 없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자신이 낳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과는 다르다. 안희는 몇 해 전 이토록 모순적인 마음을 미령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런 말은 미령에게만 할 수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미령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진심, 나도. 어깨에 얹힌 타인의 무게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안희와 미령은 경쟁하듯 토로했다. 그들은 한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안희의 아들과 미령의 딸은 동갑이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 같은 학교에 다닌 적이 있지만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들 때문에 알게 되었으나 그들은 그와 상관없이 가까워졌다. 비슷한 일들이 어디서나 일어난다. 아이들이 진급할 때마다 안희와 미령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이제 몇 년째, 라고 헤아리곤 했다. 10년이 되던 해에 내년엔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겠다고 안희가 말하자 미령이 그럼 발가락으로 세면 된다고 말해서 웃은 적이 있었다. 올해 초, 안희의 집에 놀러 온 미령이 귤을 까려다 말고 갑자기 한쪽 양말을 벗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부터 카운트를 시작하자면서 맨발을 꼼지락댔다. 그녀만큼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안희를 웃겨 준 사람은 없었다. 또 없을 것이다. 언니가 늘 귀엽게 봐 주니까. 미령은 안희를 언니라고 불렀고, 안희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령과의 관계에서 안희는 어떤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다. 나이가 몇 살 어린 친구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은 미령이 상대방에게 지금 친구랑 노는 중이라고 말했던 때부터인 것도 같았다. 그런 말들은 연장자가 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나이가 어린 쪽에서 하면 꽤 근사하게 들린다. 안희가 보기에 미령은 근사한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같이 노는 사이가 친구가 아니면 친구는 누구란 말인가. * 안희는 미령을 처음 본 순간을 기억했다. 혁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학교에서 신입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가 열렸다. 3월 초, 아직 스웨터 아래 히트텍을 벗기 힘든 날씨였다. 안희는 두꺼운 머플러를 동여매고 그 속에 얼굴 절반을 파묻은 채 강당으로 갔다. 교장과 교감, 교무부장으로 이어지는 긴 인사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에 학생부장이 연사로 나와 학교 폭력의 사례에 대해 설명했다. 휘말리지 않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그가 열변을 토했다. 행사가 끝나자 안에 있던 학부모들이 일제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참석자는 전원 여자였다. 그런 곳엔 언제나 엄마들뿐이었다. 교정 여기저기에 삼삼오오 느슨한 원들이 여럿 만들어지고 있었다. 안희는 곤혹스러웠다. 동네에서 유치원에 보내는 동안 알게 된 얼굴들도 꽤 눈에 띄었지만, 그들과 자신이 정말로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막 형성되고 있는 그 원에 쓱 끼어들 만한 숫기도 의지도 없었다. 아무도 눈여겨보

  • 관리자
  • 2025-03-01
이름 쓰기

이름 쓰기 문지혁 1 1994년 봄에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방배중학교는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 언덕 위에 위치한 학교로, 작고 아담한 운동장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아마도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업 중에 갑자기 앞문이 열렸습니다. 평상시에는 대체로 일어나지 않는, 뭔가 급박한 사정이 있을 때 생기는 일이지요. 문지혁, 나와. 저를 호명한 사람은 학생주임 선생님이었습니다. 머리가 꽤 많이 벗겨진 데다 웃을 때마다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치열 때문에 〈개구쟁이 스머프〉에 등장하는 ‘가가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분이었지요. 본업은 음악 교사였습니다. 주무기는 끝을 다듬은 하키채였고요. 당시 선생님들에게는 저마다 그런 것들이 있었으니까요. 과거형과 과거 완료형의 차이를 가르치던 영어 선생님이 말을 멈췄습니다. 졸던 아이들이 눈을 떴습니다. 체크무늬 양복을 입은 학생주임 선생님이 저를 손으로 지목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저에게 쏠렸지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는 앞문으로 곧장 나가야 할지, 아니면 뒷문으로 돌아 나가야 할지를 두고 아주 잠깐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수업 중인 영어 선생님께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뒷문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복도로 나가 뒷문을 닫자 학생주임 선생님도 앞문을 닫고 먼저 걷기 시작했습니다. 설명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계단 쪽으로 걸어갔고 저는 우리가 교무실로 향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직감했습니다. 당시 저에게 교무실은 익숙한 공간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교무실에 가는 것을 지옥문을 여는 것처럼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반장 혹은 부반장이었고 전교 학생회의 임원이었으며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는 모범생이었으니까요. 심부름을 비롯한 다양한 용건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교무실에 드나들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저를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네가 문지혁이구나. 용무를 마치고 나면 몰랐던 선생님도 제 초록색 명찰에 새겨진 하얀 이름을 눈여겨보며 말했습니다. 마치 도감 속에 나오는 동물을 실제로 본 어린아이처럼요. 이번엔 무슨 일일까? 교실이 있던 3층에서 교무실이 있는 1층까지 내려가는 길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부름이라면 매우 중대한 일이거나 아주 급박한 이유일 거라고 짐작했죠. 이를테면 상을 받는다거나, 학교 대표가 되었다거나, 당장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거나··· 그것이 나쁜 일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이 계단을 다 내려가면 제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어떤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만으로 겨우 열넷인 소년에게 세계란 그토록 단순하고 안온하며 순진한 것이기 마련이니까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교무실 문을 여는 순간, 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 관리자
  •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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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판다곰젤리

    태식 작가님 이번 김승옥 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물론 조경란 선생님 글부터 먼저 읽었습니다. ㅜㅜ

    • 2024-11-25 12:32:21
    판다곰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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