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작고도 찐득한
- 작성일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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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작고도 찐득한
전예진
나는 작년 가을에 태어났다. 세진이 막 취업 준비를 시작한, 피딱지의 말처럼 영 좋지 않은 시기였다. 오른쪽 코 안쪽에 몸을 늘어트린 피딱지는 세진이 한동안 코 파기를 멈춘 시절을 전설처럼 이야기했다. 피딱지의 말에 따르면 세진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코 파는 습관을 고쳤다. 고등학생 때 밤샘 공부를 하다 가끔,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코를 후비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자주는 아니었다. 코 파는 습관은 세진의 대학 졸업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학창 시절보다 3밀리미터 더 기른 무자비한 새끼손톱과 함께.
우리 중 누구도 피딱지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알지 못했다. 피딱지는 세진의 손길에 조금씩 뜯어졌지만, 남은 손으로 피와 이물질을 그러안아 매번 되살아났다. 피딱지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오지랖이 넓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촐싹거리며 점막을 두들겨댔다. 우리는 점막을 타고 울리는 피딱지의 말을 들었다. 피할 길이 없으니 듣는 수밖에 없었다.
무릇 코딱지는 코로 들어오는 공기에 실린 먼지와 세균을 거르며 생겨나는 존재다, 이 말이야. 이 한몸 바쳐 비강을 지키는 역할이라는 거지. 그러려면 세진의 몸과 마음에 들어오는 이물질을 걸러 줘야 해. 공기에 바이러스가 있다? 그럼 잡아야지. 세진이 악몽을 꾼다? 그것 또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일이야.
피딱지는 사람의 목소리도 낼 수 있었다. 비강 안쪽을 향해 소리치면 세진은 잘못 들은 소리나 이명 정도로 생각하고 애꿎은 귀를 후볐다. 기껏해야 늦었으니 일어나라, 자전거 조심해라, 같은 짧은 말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코딱지가 말을 한다니 얼마나 놀랄 일인가. 적어도 막 태어난 나에게는 코 아래 입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엔 혀가 돌아다닌다는 말만큼이나 놀라웠다. 피딱지는 심지어 아주 희미하지만 냄새도 맡는다고 했다. 콧속에 오래 살면 그럴 수 있다고,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듯이 오래 버텨낸 코딱지는 냄새를 맡게 된다고 말했다. 처음에 나는 피딱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또 들었다. 피딱지가 하는 모든 말이 흥미로웠다. 그러다 몇 번의 대학살을 겪었다. 친하게 지내던 코딱지들이 몇 초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즈음 나는 더 이상 아주 작은 코딱지가 아니었고 피딱지의 말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노인의 잔소리로 들렸다.
시간이 지나면 너도 이해하게 될 거야. 피딱지는 말했다. 삶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작고 그럼에도 또 중요한 존재인지.
그날 오후 피딱지는 새끼손톱에 뜯겨 나갔고 그 말은 피딱지의 유언이 되었다.
세상을 떠난 많은 코딱지들처럼 나도 몇 번의 위기를 맞이했다. 다른 이들이 쫓겨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콧구멍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코털에 맺힌 먼지와 이물질을 싸잡아 몸집도 불렸다. 마침내 콧구멍과 비갑개 사이, 그러니까 콧구멍 가장 안쪽 천장에 자리 잡았을 때쯤 내 몸은 우리의 숙적 새끼손톱보다 두 배는 컸다. 어느새 나는 오른쪽 콧구멍에서 가장 크고 오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코끝에 붙은 조그만 햇병아리들이나 코털에 매달려 흐늘거리는 녀석들이 초롱 같은 눈으로 비결을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둠에 매달려 입을 다물었다. 그게 내가 살아남은 방법이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며 세진에 대해서도 아는 것들이 생겼다. 세진은 청소도, 환기도 잘하지 않았다. 원룸 바닥에는 먼지와 머리카락, 과자 부스러기가 뒹굴었고 좁은 부엌에 널브러진 라면 봉지, 빈 참치 캔, 색색의 빵 봉지도 잘 버리지 않았다. 옛날 애니메이션, 특히 빵과 개가 나오는 만화 영화를 좋아했고 한번 잠에서 깨면 다시 잠들지 못했으며 나지막한 혼잣말을 자주 했다.
코끝에 사는 코딱지들은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상반기를 덧없이 보낸 세진이 작년에 이어 두 번째 하반기 취업을 준비할 즈음에는 코 밖을 내다보며 세진의 일상을 중계하는 코딱지도 생겼다. 코끝 구석에 붙은 쌀알만 한 코딱지는 정중하고도 열정적으로 점막을 두드렸다.
지난주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서류 전형 발표가 있겠습니다. 벌써 여섯 번째 기업인데요. 연봉도 높고 복지도 좋은 S기업입니다.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할 텐데요. 말씀드리는 순간, 세진이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S기업 채용 사이트를 눌렀고요, 결과 보기를 누릅니다! 아아,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다들 코털을 꽉 붙잡으셔야겠습니다. 몇 초 뒤 콧물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늘은 K기업 면접날입니다. 세진이 서류를 합격한 두 기업 중 한 곳이죠. 기업 문화는 조금 경직되어 있지만, 연봉 인상 속도와 고용 안정성이 높다고 합니다. 세진이 정장을 입었습니다. 일교차가 커서 코 풀 확률이 높겠는데요. 과연 이번에도 합격할 수 있을지. 행운을 빌어 봅니다.
어제 다들 괜찮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왼쪽 콧구멍에 계신 여러분도 들리시지요? 들리면 모두 점막을 두드려 주세요. 함성에 감사드립니다. 엇, 지금 막 세진이 L기업 채용 사이트에 들어갔습니다. K기업 면접에서 떨어지면서 이제 남은 기업은 L기업 하나인데요. 과연 1차 면접에 합격했을지. 아, 여러분, 합격, 합격입니다! 보름 뒤 2차 면접이 있다고 하네요.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L기업은 연봉이 높지도, 안정적이거나 사내 복지가 좋지도 않았지만, 합격 문구를 본 세진은 크게 환호했다. 손꼽아 가고 싶던 기업은 아니었지만, 이제 갈 수 있는 곳은 L기업뿐이었다. 세진은 뒤늦게 L기업 취업 스터디를 나갔다. 지원할 때 제출한 자기소개서를 정독하고 L기업의 주력 제품인 양산 빵에 대해 공부하며 면접을 준비했다.
콧속은 난리가 났다. 세진의 합격 소식은 대-코파기 시대가 끝나리라는 희망과 다를 바 없었다. 신이 난 코딱지들은 코털에서 뛰어내려 방방 뛰는가 하면 몸을 코 벽에 문지르며 자축하기도 했다. 웅크린 채 구석에 틀어박힌 코딱지는 나뿐이었다. 오랜 경험으로 나는 들뜨기엔 아직 이르다는 걸 알았다.
최종 면접까지 십여 일이 남은 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세진의 코에 바이러스가 들어왔다. 비갑개로 넘어가는 바이러스를 느낀 나는 고개를 들고 들뜬 코딱지들을 쳐다봤다. 잠긴 목을 고르고 코딱지의 본분에 대해 한마디 해주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바이러스야 가끔 콧구멍을 넘어가기도 하고 대부분은 면역 세포에게 잡아먹히기 마련이었다.
이틀 뒤 세진의 몸에 열이 오르고 콧구멍으로 맑은 콧물이 흘러내렸다. 하비갑개가 부풀어 비강 너머로 들어가는 공기가 막혔고 콧물의 양이 점점 늘어났다. 코를 훌쩍이던 세진이 재채기하자 코끝에 고인 콧물이 인중으로 늘어졌다. 세진은 휴지 한 통을 다 쓸 정도로 코를 풀고 또 풀었다. 콧물과 함께 많은 코딱지가 밖으로 밀려 나갔다.
지금······ 세진이 집 근처 이비인후과를 검색하고 있습니다. 용케 살아남은 쌀알만 한 코딱지가 중얼거렸다. 코딱지의 목소리는 한풀 꺾였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약을 받았네요. 인스턴트 죽을 전자레인지에 돌립니다. 아아, 다시 휴지를 집어 드네요. 다들 꽉 잡으셔야겠습니다. 휴지를 뜯어 맙니다. 콧구멍에 꽂으려나 봐요. 보도를 하던 코딱지가 콧방울 안쪽에 몸을 붙여 코로 들어오는 휴지를 피했다. 기둥처럼 말린 휴지가 내 아래까지 들어왔다. 콧속에 들어찬 콧물이 서서히 휴지를 적셨고 바삭거리던 휴지가 흐물흐물해졌다.
콧물 미쳤네. 이 정도면 코에 뭐 있는 거 아니야? 세진이 코맹맹이 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다가 손을 모았다. 뭐든 간에, 제발 콧물만 멈춰 주세요. 콧구멍에 휴지를 꽂은 채로 면접을 보러 갈 순 없잖아.
세진의 콧물은 점점 누렇고 찐득해졌다. 세진은 코를 풀고 휴지를 감싼 새끼손가락으로 콧구멍을 긁었다. 며칠이 지나자 세진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콧물은 다시 투명하게 돌아왔고 양도 적당해졌다.
문제는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더 이상 코가 흐르지 않는데도 세진은 자꾸만 공기를 들이켰다. 빨래를 널다가도, 밥을 푸거나 달걀 프라이를 만들다가도 코를 킁킁거렸다. 두 콧구멍 사이가 오그라들며 공기가 비강 안쪽으로 확 빨려 올라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코로 들어오는 바람은 점점 거세졌다. 점막에 달라붙은 내 몸이 돌풍에 마구 흔들릴 정도였다.
쌀알에서 보리알 정도로 몸집이 커진 코끝 구석의 코딱지는 몸을 파르르 떨며 말을 아꼈다. 축제는 진작 끝났고 살아남은 코딱지들은 눈알을 뒤룩 굴리며 서로 눈치만 봤다.
콧구멍으로 들어오던 빛이 마스크에 가려 사라지고 곧 병원 공기가 코로 들어왔다.
냄새가 안 나요. 세진이 다리를 떨며 말했다.
잠깐 코 좀 볼게요. 의사의 말과 함께 콧속으로 모두를 녹일 듯한 빛과 차가운 기구가 들어왔다.
감기 후유증으로 일시적인 후각 장애가 발생하기도 해요. 의사가 말했다. 보통은 하루에서 사흘 사이에 저절로 돌아오니까 우선 푹 쉬고 만약에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냄새가 안 난다, 그러면 다시 오세요.
사흘이나 걸려요? 저 다음 주에 면접 보는데.
면접? 취업 면접이요? 에이, 냄새 못 맡는다고 면접 망치지 않아요. 의사가 여유롭게 말했다.
아니, 냄새를 못 맡으면 면접을 망칠 수도 있었다. 콧속의 모든 존재와 세진은 그 사실을 알았다. 코끝 구석의 코딱지가 몇 번이고 떠들던 대로, L기업의 2차 면접에는 관능검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검사는 L기업 제품의 맛과 향을 재현한 샘플을 주고 지원자가 그를 구분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지원자의 미각과 후각뿐만 아니라 제품에 대한 관심을 측정하는 테스트였다.
세진은 면접 준비를 멈추고 온종일 후각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콧대와 콧방울을 문지르며 후각에 좋다는 혈을 지압했고 집에 있는 음식과 샴푸, 치약을 동원하여 후각 훈련도 했다. 마침내 인터넷에 뜨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본 세진이 새끼손가락을 들었다. 노트북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로 다리를 떨며 코 벽과 바닥을 긁었고 손가락에 묻은 코딱지를 휴지로 닦았다.
아아, 여러분. 지금 세진이 잡은 휴지에 코딱지가 한가득입니다. 너무나 슬픈 장면입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손가락이 다시 들어오고 있는데요. 모쪼록 모두 몸을 납작 숙이고 저 무자비한 손톱을 피해······.
코끝 구석에 붙은 코딱지는 결국 마지막 말을 다 뱉지 못하고 코를 떠났다.
세진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좀처럼 들어오지 않던 코 깊숙한 곳까지 손톱을 뻗었다. 뾰족한 손톱이 내 몸에 닿더니 몸과 점막 사이로 쑥 들어왔다. 점막에 붙어 있던 내 몸의 반이 떨어졌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점막에 몸을 맞댔다. 손톱이 사라지더니 잠시 뒤 멀끔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안 돼. 나는 생각했다. 이대로 생을 마감할 수 없었다. 점막 위에서 방방 뛰거나 벽에 몸을 문질러 마사지한 적도 없고 콧물 후룸라이드도 타보지 못했는데. 눈을 감기에는 해보지 못한 게 너무 많았다.
잠, 잠깐만요.
세진의 새끼손톱이 뜯어진 내 몸과 점막 사이를 파고들었다.
제발 후비지 마세요! 나는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비강 안쪽과 그 너머의 유스타키오관, 고막을 향해. 절 떼지 않으면 뭐든 도와드릴게요.
세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손톱이 콧속을 빠져나갔다.
뭐야? 세진이 중얼거리며 귀구슬을 눌렀다가 뗐고 귓구멍을 문질렀다. 귀에서 이는 진동에 비강이 조금씩 흔들렸다. 세진의 손가락이 다시 콧구멍으로 들어왔다.
저예요. 세진 님 코에 남은 유일한 코딱지. 제가 말한 거예요. 내가 말했다. 곧 면접을 보셔야 하잖아요. 제가 도울 수 있어요.
세진이 손가락을 빼고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콧구멍에 갖다 댔다. 세진이 콧구멍을 한껏 넓히는 바람에 구멍 밖 거울이 보였다.
아잇, 눈부셔.
내 목소리에 세진이 멍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놨다. 세진이 내 존재를 받아들이려 애쓰는 동안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태어나 지금까지 들은 말, 사소하거나 허무맹랑한 모든 이야기를 긁어모았다.
내가 미쳤나. 세진이 중얼거렸다.
미치다니요. 기억 안 나세요? 전에 제발 콧물만 멈춰 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때 제가 감기도 낫게 해드렸는데.
세진의 감기는 세진이 낫기를 빌어 치료된 게 아니었고 당연히 내 덕도 아니었지만, 살고자 하면 못 할 말이 없었다.
코딱지가······ 감기를? 세진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럼요. 저는 세진 님 콧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여러 능력이 있답니다. 마치 어, 요정처럼요.
세진이 입을 다물고 콧대와 콧방울을 눌렀다. 좁아진 코 벽이 내 몸을 짓눌렀다.
아니, 세진 님,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나는 다급히 벽을 밀어내며 말했다. 콧속에 대대로 전해 오는 이야기 중에 한 코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코딱지는 냄새를 맡게 된다는 말이 있어요. 제가 세진 님을 도와드릴게요.
하다 하다 냄새까지 맡는다고. 세진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나보다 낫네. 코딱지가 나보다 나아.
에이, 이번 면접만 어떻게 넘기면 되는 거죠. 세진 님 후각은 곧 돌아올 거예요. 저를 믿어 보세요.
세진이 무심코 내가 있는 오른쪽 콧구멍을 후비려다 손가락을 왼쪽으로 옮겼다. 속수무책으로 뜯겨 나가 휴지에 떨어지는 왼쪽 코딱지들을 보며 나는 황급히 다음 말을 고민했다. 우선 세진이 코를 파는 걸 막아야 했다.
간단한 의식만 하면 돼요. 가슴에 손을 얹고 코를 후비거나 풀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의식이에요. 코딱지의 신에게 노여움을 살 수도 있거든요. 당연히 저도 떼면 안 되고요.
코딱지의 신?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콧김에 몸을 움츠렸지만, 마음을 다잡고 말을 이었다.
저희 코딱지가 말을 하고 살아 있는 건 다 코딱지의 신 덕분이거든요.
내 평생 코딱지의 신이라고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라 중얼거리다가 탄식을 뱉고는 다시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했다. 나는 하늘로 떠난 피딱지에게 감사하며 그가 후각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덧붙이던 말을 되새겼다.
코딱지가 냄새를 맡으려면 말이야, 최대한 비강을 파고 들어가야 해. 가늘게 몸을 뻗어서 아주 일부분이라도 안쪽 천장에 대고 비비는 거지. 그러고는 잽싸게 빠져나와. 콧구멍으로 돌아오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자칫하다 잘못 디디면 목구멍으로 떨어지는 거야. 식도에 녹아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고.
피딱지는 피가 덕지덕지 낀 생김새만큼이나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나는 잠시 피딱지에 대한 그리움에 잠겼다가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세진이 모르게 비갑개 쪽으로 들어갔다 나올 시간을 벌어야 했다. 내가 비강 안쪽에 들어가리란 사실을 알면 세진은 반사적으로 코나 목구멍에 힘을 줄 테니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나는 쌀알, 아니 보리알만 하던 코끝 코딱지가 전해 주던 정보를 하나둘 떠올려 후각을 부르는 의식을 지어냈다.
세진은 내 말을 듣고 한참 다리를 떨다가 이내 커튼을 치고 불을 껐다. 먼지가 쌓인 상자에서 언젠가 선물 받은 향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분홍색 마카롱 모양 향초로, 세진의 원룸에 있는 유일한 초였다. 세진이 손바람을 부쳐 향초에서 피어오르는 공기를 코로 보냈다.
나 최세진은 2차 면접이 끝나기 전까지 코를 후비거나 풀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코딱지의 신이시여 제 오른쪽 콧구멍에 있는 유일한 코딱지가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냥 제 후각을 돌려주시면 더 좋고요.
세진이 엉터리 의식을 하는 동안 나는 서둘러 비갑개로 움직였다. 몸을 구부리고 비틀며 점막을 기었고 후비갑개와 중비갑개를 스쳐 상비갑개 위로 손을 뻗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손끝에 점액이 닿았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만지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있는 힘껏 몸을 펴고 미친 듯이 점액을 문질렀다. 코딱지에게 신이란 없겠지만, 그래도 그 비슷한 것이 있다면 제발 나에게 힘을 주세요.
세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입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비갑개에 이는 진동과 입에서 올라오는 소리로 보아 보통 재채기가 아니었다. 서둘러 콧구멍으로 기어 나갔다. 내 짧은 생애에 그렇게 빨리 움직인 건 처음이었지만, 코털이나 점막을 움켜쥐기도 전에 거센 콧바람이 불어왔다. 콧속의 모든 존재를 쓸어버릴 듯한 바람이었다. 바람에 휘감긴 몸이 속절없이 나부꼈다. 이렇게 끝이구나. 눈을 감고 온몸에 힘을 뺐다. 피딱지와 쌀알, 아니 보리알만 하던 코딱지처럼 나도 코에서 쫓겨나 말라 갈 터였다.
몸에 굵직한 기둥이 닿았다. 코털이었다. 웅대하고 사랑스러운 코털. 나는 털을 꽉 안고 몸을 단단히 붙였다. 코딱지는 코로 들어오는 공기에 실린 먼지와 세균을 거르며 생겨나는 존재다, 이 말이야. 이 한몸 바쳐 비강을 지키는 역할이라는 거지. 피딱지가 입만 열면 하던 잔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니까 냄새만 맡게 해주면 내가 세진을 도와주겠다고요. 휘몰아치는 바람을 피해 텅 빈 콧구멍에 대고 중얼거렸다.
콧물과 코털 한 가닥이 밖으로 튕겨 나가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콧구멍 앞으로 다가온 세진의 손가락이 빛을 가렸다.
어어, 내가 소리쳤다. 안 파기로 약속했는데.
아, 미안. 세진이 코끝을 문질렀다. 재채기가 나와서.
바로 그때 나는 코딱지 생 처음으로 냄새를 느꼈다. 피딱지가 그렇게 말해도 와 닿지 않던 감각이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알던 세계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냄새는 어렵거나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공기에 실린 입자를 있는 그대로 느끼면 되는 현상이었다. 달고 향긋한 냄새가 내게 밀려들었다. 작고 붉은 과일이 떠오르다가 뭔가 타들어가는 형체가 과일을 덮었다.
단 냄새가 나요. 내가 말했다.
단 냄새? 세진이 물었다.
세진에게 내가 맡은 냄새를 설명하자 세진이 마카롱 모양 향초가 담겨 있던 상자를 찾아 제품 설명을 확인했다.
라즈베리, 크랜베리에 라벤더 향. 뭐야? 너 이거 본 거 아니야?
세진의 의심에도 나는 밀려드는 온갖 냄새를 파악하느라 바빴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는 물론이고 점막과 코털에서도 냄새가 났다.
냄새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후각을 얻는 과정에서 냄새에 얽힌 세진의 기억과 감정, 단어까지 내게 전해진 것 같았다. 되찾은 기억처럼 익숙하고도 낯선 세계가 내 안에 있었다.
세진의 안내를 따라 집 곳곳의 냄새를 익혔다. 단번에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냄새가 있는가 하면 몇 번을 맡아도 모르겠는 것도 있었다. 세진에게 냄새를 묘사하며 무엇이냐고 물으면 세진은 대체로 냄새가 어디에서 나는지 알지 못했다. 이건 침대야, 머리빗이야, 세탁기야, 옷 널어 둔 거야, 빨래에서 냄새나? 싱크대에 물때가 있긴 한데, 그냥 청소기야, 머리카락이랑 먼지가 껴서 그런가.
집에 고인 냄새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에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깥바람에 집중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가을 냄새는 다음과 같았다. 건조한 공기에 코끝이 아프고 마른 낙엽 냄새와 시원한 바람이 높은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세진이 창문을 닫았다.
그럼 이제 면접 준비를 해보자.
감기에 걸리는 불상사를 피하고자 마스크를 쓴 채로 세진은 동네 슈퍼와 마트를 돌며 L기업에서 나온 양산 빵을 샀다. 주로 슈퍼에서 판매되어 일명 슈퍼 빵이라고 불리는 빵들이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콧구멍을 가린 마스크가 벗겨지고 겉면이 울퉁불퉁한 빵이 불쑥 나타났다.
단내에 섞여 은은한 땅콩 향이 났다.
이건 소보로빵이야. 세진이 내게 말하고 소보로빵을 조금 떼어 입에 넣었다.
나는 코로 들어오는 향과 목구멍에서 비강으로 올라오는 빵 냄새를 음미했다. 냄새만 맡아도 맛을 떠올릴 수 있었다. 빵 겉면에 붙은 소보로는 무척 달고 그 아래 씹히는 빵은 심심해 함께 먹으면 맛이 좋았다. 소보로를 씹을 때마다 세진의 입에서 설탕을 씹는 듯한 소리가 났다.
편입하고 한동안 많이 먹었는데. 세진이 입안에 남은 소보로빵을 처리하며 말했다. 지금은 아무 맛도 안 나네.
서양 복식사에 대한 막연한 흥미로 패션디자인학과에 진학했던 세진은 대학교 2학년 때 S대 국제학과로 편입했다. 낯선 전공과목과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진은 대학 생활을 누릴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돈은 물론이고 새로운 학과 수업을 따라가느라 시간도 늘 부족했다. 공강이 생기면 도서관에 갔다. 과제를 하고 쪽잠도 자다가 배가 고프면 도서관 꼭대기 층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에서 파는 빵 중 가장 저렴한 소보로빵을 사서 같은 층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때로는 잠이 든 학생이나 미화 직원 사이에서 빵을 먹어야 했다. 세진은 휴게실 구석 소파에 앉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비닐 포장을 뜯고 빵을 베어 먹었다.
소보로빵은 퍽퍽하고 어두운 맛, 가느다란 숨소리와 소파 가죽이 쓸리는 소리 속에서 조심스럽게 바스락거리고 씹어 삼키는 냄새.
세진이 물로 입을 헹구고 코에 손부채를 부쳤다.
다음에 나타난 빵은 작고 네모난 형태에 노란 테두리가 있었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소보로빵만큼은 아니지만, 단 냄새도 났다. 치즈가 들어간 빵에 시럽을 뿌린 것 같은 향이었다.
체다치즈빵이야. 세진이 코앞에서 빵을 한 바퀴 돌리고는 먹지 않고 내려놓았다. 사실 난 치즈 들어간 빵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건 비슷한 가격에 양이 많아서 곧잘 사 먹었어. 학원 아르바이트할 때 시간이 애매해서 근처 아파트 단지에서 대충 끼니를 때웠거든. 이거면 배가 부르니까 왠지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기분이 들어서 자주 골랐지.
눈앞에 아이 셋이 뛰노는 작은 놀이터가 스쳐 갔다. 옆 벤치에서 들려오는 아이 부모들의 말소리. 세진은 놀이터 한쪽 벤치에 앉아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빵을 씹었다.
체다치즈빵은 짭짤하고 조금 서글픈 맛, 조용한 아파트 단지에 아이들이 깔깔대고, 우레탄 바닥으로 굴러 들어온 흙과 낙엽이 밟혀 버석거리는 소리, 아이가 엄마에게 달려가다 엎지른 보라색 주스의 달큰한 냄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 님은 슈퍼 빵을 참 좋아하시나 봐요.
아무래도? 가성비 생각하면 슈퍼 빵만 한 게 없잖아. 먹기도 편한데 맛도 고만고만하니까 실패할 확률도 낮고.
우리는 몇 가지 빵을 더 뜯어 살펴보았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냄새와 맛이 내 안에 들어왔다.
사실 싸고 만만하니까 먹는 거지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 세진이 불쑥 말했다. 지원서 넣으려고 보니까 슈퍼 빵 얘기는 할 수 있겠더라고. 자주 먹고 잘 아니까.
여러 가지 빵 냄새를 맡으며 내 후각은 빠른 속도로 깊고 섬세해졌다. 나는 양산 빵이 아닌 음식을, 갇혀 있지 않은 공기를 갈구하며 아쉬운 대로 세진의 집에서 나는 온갖 냄새를 빨아들였다.
밤에 불을 끄고 누운 세진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봤을 때요. 세진 님이 냄새를 못 맡는 이유는 몸보다는 마음에 있는 것 같아요. 후각은 기억과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거든요.
아, 예. 그러세요. 세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성적으로 접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좀 더 뭐랄까 감정적인, 세진 님 마음에 닿는 해결책이 있을 거예요.
코딱지 주제에, 쫑알거리지 말고 그만 좀 잘래?
에이, 코딱지가 왜요. 저희는 공기에 실린 이물질을 거르는 과정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존재, 온 힘을 다해 세진 님을 지킨다고요.
세진이 크게 하품하자 콧속이 넓어지고 점액이 조금 불어났다.
네가 내 코에서 얼마나 살았는지는 몰라도 세상에 그렇게 낭만적으로 이루어지는 소원은 없어. 집도 밥도 이력서 내용도 다 돈이야. 일단 돈을 많이 벌어야 해. 그래야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세진은 입속말을 웅얼거리다 이내 잠들었다. 나는 새근거리는 세진의 코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점액에 몸을 비비고 콧구멍을 누비며 방방 뛰기도 했다. 코털을 밧줄처럼 타고 코 안쪽으로 올라갔다가 콧물에 미끄러져 내려왔다. 세진의 코와 침실에 퍼진 입자를 느끼며 밤새 달라지는 냄새를 학습했다. 단어와 감정, 기억과 장면들이 나를 감싸고 온몸으로 가지를 뻗어 나갔다.
세진이 양산 빵을 가장 많이 먹은 시기는 고등학생 때였다. 세진은 공부에 대한 보상처럼 빵을 뜯어 먹었고 그 안에 든 설탕의 맛을 즐겼다.
고등학생 때 내가 먹은 매점 빵만 계산해도 직장인 한 달 월급 나올걸. 세진이 초코롤의 포장지를 뜯으며 말했다.
콧구멍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포장지만 봐도 매점 입구와 동그란 테이블이 떠올랐다. 학생들에게 밴 카레와 김치 냄새, 햄버거를 데우는 전자레인지 소리.
원래 먹던 건 다른 회사 제품이긴 한데 그건 단종됐더라. 세진이 초코롤을 한 입 베어 물었다. L사 초코롤은 크림이 좀 느끼해.
세진이 얇은 케이크시트와 초코칩을 씹는 동안 나는 그녀의 기억 속 초코롤의 맛을 돌이켰다. 생각보다 적은 크림에 아쉽다가도 우유를 머금으면 입안에 달라붙은 시트가 녹아 진한 단맛을 냈다.
고등학교 때 매번 슈크림 빵만 먹는 애 있었는데. 세진이 말했다. 학교 매점에서 파는 슈크림 빵 진짜 맛없었는데 걔는 그걸 먹어야 배가 든든하다고 하더라. 야자 시간만 되면 걔랑 몰래 옥상에 올라가서 빵을 먹었는데 안 들키려고 빵 봉지를 미리 주머니에 넣고 소리 안 나게 잡고 있었어. 올라가서는 조금이라도 야자 더 째려고 새 모이만큼씩 뜯어 먹고. 왜 그랬나 몰라. 그러고 뭐 했더라? 그냥 밤하늘 보면서 우리 나중에는 되게 잘나가고 있겠지, 그랬던 것 같아. 수능 보고 대학 가면, 살도 빠지고 애인도 생기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거야, 그러면서.
초코롤과 슈크림 빵은 조금 헛갈렸다. 동네에 슈크림 빵을 파는 곳이 없어 세진의 말과 기억으로만 그 향을 돌이켜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반팔 체육복, 밤공기, 옥상으로 들어가는 문손잡이의 냄새가 한 장면처럼 뭉뚱그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문제집이 든 사물함, 교실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여름의 운동장, 나무 그늘의 냄새도 그랬다. 초코와 슈크림은 구분이 되어야 하는 향 같은데. 나는 세진에게 내일은 슈크림 빵을 꼭 구해야 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
당연하지. 며칠 계속해야 돼. 세진이 초조하게 말했다. 못 구한 빵이 많아.
허겁지겁 찢은 포장에서 종이로 받친 피자빵이 나왔다. 냉동된 빵에서는 거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세진이 코를 바싹 갖다 대니 그제야 빵에 배어든 소스 향이 났다. 희미한 냄새에도 젖은 골판지 같은 식감이 느껴졌다.
세진이 피자빵을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이 빵은 원래 다른 이름으로 나오던 빵이었는데 최근에 이름을 바꿔서 다시 나왔어. 나 고등학교 때만 해도 보기 힘들었고 우리 동네에서는 구립도서관 매점에만 있었어. 거기 매점 아저씨가 되게, 지금 생각하면 그냥 삶에 찌든 어른인데 그 당시엔 좀 재수 없었지.
덥힌 피자빵의 말라붙은 치즈에서 은은한 단내가 올라왔다. 뭉그러진 빵에는 치즈와 소스 외에 다른 토핑은 없었다. 세진이 피자빵을 한가득 입에 넣었다.
치즈와 빵에서 나오는 기름과 소스의 매운 향이 섞여 혀끝이 아리면서도 달고 고소한 맛이 돌았다. 나는 어느새 세진과 한몸이 되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충분히 좋은 맛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새로운 맛이었다.
하루는 나랑 친구가 도서관 매점에서 피자빵을 데우면서 아, 공부하기 싫다, 그랬거든. 근데 매점 아저씨가 되게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힘들지? 물어 보는 거야. 그래서 네, 그랬지. 그랬더니 아저씨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대학 가면 안 힘들 것 같지? 앞으로 더 힘들어진다.
나는 당시 세진이 맡았던 냄새뿐만 아니라 도서관 지하의 풍경, 분위기, 식당에서 매점까지 흐르고 나뉘는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식판이 긁히고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쓰레기통 속 샌드위치 포장지에서 나는 딸기잼과 으깬 달걀 냄새, 사면이 막힌 채 작은 구멍 하나가 뚫린 매점과 그 앞에 진열된 낱개 과자들.
참, 웃기는 아저씨였어. 만날 테이블에 반쯤 엎드려 가지고. 웃기고 지친 아저씨였지.
세진과 나는 며칠에 걸쳐 빵을 사고 냄새를 맡고 먹었다. 내 후각은 하루가 다르게 예민하고 촘촘해졌다. 양산 빵은 더 이상 내게 새로움을 안겨 주지 못했다. 내 목표는 세진의 면접 합격이 아니었다. 그저 양산 빵말고 다른 빵의 냄새를 맡아 보는 것, 막 구워진 빵 껍질의 고소한 냄새와 촉촉한 속살의 깊은 풍미로 내게 또 다른 세계를 열어 줄 그런 빵을 만나는 일이었다.
L기업에서 나오는 양산 빵 대부분을 학습한 뒤 세진은 인터넷 후기를 참고해 모의 관능검사를 준비했다. 물론 실제와 똑같지는 않았다. 면접 때 쓰는 시료를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었으니까. 세진은 마스크로 코를 가린 채 L기업의 양산 빵 몇 종을 잘라 접시에 놓고 구멍 뚫린 종이컵을 씌웠다. 후각 검사를 위한 시료 외에도 미각 검사를 위해 설탕과 소금의 농도를 다르게 탄 물도 여러 잔 준비했다.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익숙한 냄새에 둘러싸여 또 다른 익숙한 냄새를 맡아야 한다니. 만약 내게 코와 손가락이 있다면 심드렁한 얼굴로 누워 코를 후비고 코딱지를 튕겨냈을 터였다. 코딱지 입장에서는 조금 잔인한 풍경이지만, 나는 더 이상 보통 코딱지가 아니었으니까.
단 냄새가 나요. 달고, 초코인가? 아니다 슈크림? 단내가 나는 빵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버터 향도 조금 나네요.
세진은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내게 질문을 이어 갔다. 나를 다그치며 냄새는 물론 맛도 나지 않는 시료를 헤아려 보다가 이내 풀이 죽었다. 시료를 받고 답을 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뿐더러 이대로라면 콧구멍에 대고 혼잣말하는 이상한 지원자가 될 게 분명했다.
면접날까지 더 연습하면 될 거예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아니면 세진 님의 후각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도 있고요.
세진이 고개를 숙였다.
말씀드렸잖아요. 이성보다는 감정으로. 나는 갓 나온 빵의 온기와 풍미를 상상했다. 비록 내게 넘어온 세진의 기억을 헤집고 쥐어짜야 겨우 흐릿한 감각이 떠오를 뿐이었지만.
감정이고 나발이고, 나는 그냥 면접 잘 봐서 빨리 취업하고 싶어. 세진이 답답해하며 말했다. 돈 벌어서 집에 생활비도 보태고 주변에 밥도 사고, 여유 생기면 괜찮은 카페나 식당도 좀 가고······.
그거네요! 나는 점잖은 말투를 유지하는 것도 잊고 코 바닥을 방방 뛰었다. 세진의 1차 합격 소식에 환호성을 지르던 작은 코딱지들이 생각났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자 짜릿한 쾌감이 몸을 감쌌다.
그동안 세진 님은 면접을 준비하느라고 슈퍼 빵만 먹었잖아요. 그전에는 라면이랑 간계밥이 주식이었고. 퍽퍽한 인생에 퍽퍽한 음식만 먹다 보니까 후각도 메마른 걸지 몰라요. 이참에 유명한 베이커리에 가볼까요? 어차피 빵이니까 면접에서 써먹을 수도 있잖아요.
베이커리?
마가린이나 합성향료 넣은 빵말고 가게에서 직접 만든 빵을 먹는 거죠. 얼마나 좋아요.
세진은 오랜만에 신경 써서 외출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동네 슈퍼나 저가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닌, 넓고 분위기 있는 베이커리 카페에 가는 일은 내가 태어난 뒤로 처음이었다.
카페로 들어가자 세진이 마스크를 벗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 커피와 차, 빵 내음을 정신없이 흡입했다. 사방에서 새로운 냄새가 달려들어 온몸을 두들겨 패는 것 같았다. 전시된 빵 앞에 섰을 때는 제각기 다른 맛을 상상하느라 모서리가 곤두섰고 접시에 담긴 소금빵과 아메리카노가 나온 뒤에는 없는 침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소금빵. 이게 소금빵이구나. 머리가 팽팽 돌았다. 소금 알갱이로 녹인 버터가 빵에 스며든 듯한 냄새가 났다.
세진이 소금빵의 양끝을 잡고 찢자 가느다란 김이 올라왔다.
부드러운 향이 나를 채웠다. 녹은 버터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바위만 한 소금 알갱이를 발견해 막 그러안은 기분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세진이 좋아하는 만화 영화에서처럼 탁 트인 초원과 풀을 뜯는 소가 보이고 모자 쓴 소년이 마차를 끌고 지나갈 것만 같았다.
내게 눈물이 있다면 눈가에 맺힌 그것을 닦았으리라.
아무 맛도 안 나.
세진의 비강 안쪽에서 콧물이 내려왔다.
8,800원이나 썼는데.
어어, 울지 마세요. 나는 비강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코 풀지 않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세진이 코를 가볍게 훌쩍거리며 콧구멍 밖으로 나온 콧물을 닦았다.
남들 다 가는 카페에 오면 기분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모르겠다. 이제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운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세진이 콧물을 조금 더 세게 들이마셨다.
너 말투가 좀 달라진 것 같다.
그럴 리가요. 나는 세진을 달래기 위해 코 벽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카페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고 집으로 가는 골목을 걸었다. 세진은 말이 없었다. 웬일인지 혼잣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왜 하필 슈퍼 빵이에요? 내가 물었다. 가성비 좋고 적당히 맛있는 걸로 치면 다른 것도 많잖아요. 삼각김밥도 있고 컵라면도 있고.
몰라. 그냥 어렸을 때부터 슈퍼 빵을 자주 먹었어.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꼭 먹어 보고 애들한테 후기 알려주고. 애들도 뭐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 봤거든. 사기도 편하고 종류도 많고······.
세진이 마스크를 벗고 코를 긁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빵이 애 혼자 먹기 좋잖아. 학교 갔다 와서 간식으로 먹었던 것 같아. 맞아,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거든. 안방에 작은 티브이가 있었는데 평소에는 못 보게 하니까 혼자 있을 때 몰래 들어가서 봤어. 슈퍼 빵이랑 우유를 챙겨서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다음 티브이를 켰지. 꼭 그 시간대에는 옛날 만화가 나왔다. 강아지랑 빵이 나오는 둥글둥글한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어. 티브이에서 주인공이 빵이랑 수프를 먹을 때 나도 빵이랑 우유를 먹으면 진짜 티브이에 나오는 음식을 먹는 것 같았거든. 주인공이 풀밭이나 담요에 드러누우면 나도 침대에 눕고, 그러다 잠이 들 때도 많았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코털을 움켜쥐었다.
저녁에는 다들 집에 올 테고 그대로 잠이 든다고 크게 혼나지도 않았으니까, 마음 놓고 누워 있었어. 여름이고 겨울이고 그 침대는 늘 시원하고 포근했던 것 같아.
콧물이 줄줄 흘렀다. 세진을 멈춰야 했지만, 밀려드는 감각에 정신을 바로 차릴 수 없었다. 콧물에도 냄새가 있구나. 나는 피딱지를 떠올렸다. 이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면 피딱지조차 놀라워하겠지. 그러고는 말했을 것이다. 무릇 코딱지라 하면······.
세진 님, 때로는 지금의 나를 위해 하루를 보낼 수도 있는 거예요. 가족, 친구, 미래의 내가 아니라 지금 이 골목을 걷는 세진 님을 위해서요.
콧물이 불어났다.
기죽지 말아요. 제가 도와줄게요. 말했잖아요? 저는 그냥 코딱지가 아니라고.
세진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고마워, 코딱지야.
콧속에 세진의 말이 울렸다. 목소리를 따라 비강 안쪽을 돌아봤다. 들려오는 말을 오롯이 담으려 눈을 감았다. 범람하는 콧물과 흔들리는 코털, 그 속에 나, 제 역할을 하고 만 코딱지.
콧물이 세진의 인중으로 흘러내렸다. 세진이 검은 맨투맨 소매로 코를 훔쳤다. 콧물이 묻지 않은 곳이 드러나게끔 소매를 접은 뒤 말릴 새도 없이 왼쪽 콧구멍을 누르고 오른쪽 코를 풀었다.
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처음 겪는 건조한 촉감이 몸을 옭아맸다. 맨투맨 소매는 거칠고 메마른 대지였다. 나는 주변에 묻은 콧물을 움켜쥐고 세진의 얼굴과 하늘을 올려다봤다.
세진이 나를 굽어봤다. 커다란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구멍 끝에 맺힌 콧물이 반들댔다. 킁킁. 세진이 코로 숨을 들이쉬고 이내 다시 킁킁거렸다.
몸에서 물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정신없이 움직이는 세진의 눈동자와 힘을 준 미간을 바라봤다.
냄새를 맡고 있구나.
세균이 크게 번식하지 않은 축축한 옷 냄새는 기억에 남을 만큼 새롭거나 특별하지 않았다. 눈물과 콧물에 젖은 소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나를 내려다보는 세진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다.
처음 느끼는 슬픔과 경이가 나를 휘감았다.
어쩌면 냄새는 이런 순간에 비로소 생겨나는지도 몰라요. 고막과 멀리 떨어져 외치는 말이 세진에게 닿을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말했다.
세진이 코를 훌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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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 관리자
- 2025-07-01
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 관리자
- 2025-07-01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 관리자
-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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