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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세랑 - [단편소설] 웨딩드레스 44
[단편소설] 웨딩드레스 44 정세랑 그 드레스는 2013년 7월, 캐나다 데이 세일 기간에 밴쿠버의 작은 창고에서 픽업되어 한국으로 수입되었다. 디자이너 드레스이긴 하지만 신인 디자이너의 드레스라 할인 폭이 컸다. 택에 붙은 가격은 만 오천 달러, 최종 할인가는 삼천 오백 달러였다. 사이즈는 4. 하지만 살짝 크게 나온 데다가 코르셋 조임으로 조절할 수 있어서 55에서 77까지 입었다. 1 드레스는 한참을 선택받지 못했다. 화려하지 않은, 기하학적인 선의 드레스였다. 수제 레이스도 비즈나 세퀸도 없어서 마치 종이접기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샵에서 괜히 들여왔나, 하고 후회를 할 즈음 첫 번째 여자가 그 드레스를 골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드레스를 입고 나올 때 특수효과 넣어 주잖아요. 갑자기 더 예뻐 보이게. 그거 거짓말인 거 알고 있었지만 정말 아무 효과 없네. 그냥 나네요.” 여자는 화장도 머리도 하지 않고 찾아와서는 아주 건조한 표정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까 것 다시 입어 보시겠어요?” “아뇨, 이걸로 정할게요.” “최초로 입으시는 거예요. 아시죠? 드레스 수명은 일곱 번 안팎이 끝인 거.” 샵에서 여러 번 강조했지만 여자는 특별히 인상 깊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2 “너무 조이지 말아 주세요. 쉽게 기절하는 편이라…….” 두 번째 여자는 긴장하면 종종 미주신경성 실신을 하는 체질이었다. 그래서 드레스를 볼 때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코르셋 부분이 얼마나 숨쉬기 좋을지를 따졌다. 여자에게 조이는 옷은 도움 될 리 없었다. 상대적으로 가슴통이 여유 있게 나온 수입 드레스 위주로 고르다가 그 드레스를 골랐다. 그래도 그렇게 편하진 않았다. 몇 번의 위기가 있긴 했지만 기절하지 않고 무사히 식을 치렀다. 마지막으로 드레스를 벗으며 들이켠 숨이 달콤했다. 이제 살겠다, 여자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도우미 분이 웃었다. 후에 드레스와 코르셋을 입은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숨은 쉬고 있는 건지 신경이 쓰여서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배우들은 저걸 얼마나 오래 입고 견뎌야 했을까, 정말 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자꾸 딴생각을 했다. 한 명이 기절하는 장면이 나오자 여자는 그럼 그렇지, 하고 납득해 버렸다. 3 전혀 결혼할 계획이 없었는데, 스카프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결혼하게 되었다. 그냥 스카프가 아니었다. 운명의 스카프였다. 세 번째 여자는 그 스카프를 한 날이면 칭찬을 잔뜩 받았다. 색상과 무늬, 크기와 소재가 여자에게 완벽했다. 바탕색은 하늘색이었다. 어떤 모양으로 매도 톡톡하게 살아 있었다. 원피스에도 블라우스에도 티셔츠에도 다른 매력으로 어울렸다. 그래서 외근처가 여러 군데였던 날,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게 그 스카프를 잃어버리자 매우 상심하고 말았다. 똑같은 스카프를 다시 사려고 했지만, 구매한 지 3년이 지난 후였으
작성일 2016-08-01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단편소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이백 년 전 프로이센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풍성한 수염을 길렀고 오래도록 남을 선언문을 런던에서 발표했다. 추종자들은 이십여 년 후 파리의 일부를 점거하고 혁명을 선포했다. 바리케이드 안쪽 술집에서 한 철도공이 기분에 취해 몇 줄의 가사를 썼다. 혁명 정부는 백일이 되기 전 진압 당했지만 가사는 남았고 한 가구공이 멜로디를 붙였다. 그때 상당수의 조선인들은 먹고살 길을 찾아 연해주로 떠났다. 러일 전쟁과 한일 병합을 거치며 더 많은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넜다. 일부는 1차 대전에 러시아군으로 참전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수립되었다. 일제의 확장 정책이 가시화됐을 때 연방의 지도자는 연해주의 조선인들을 믿지 않았다. 그는 십칠만여 명의 조선인들을 기차에 태워 육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보냈다. 기차에서 각자의 가족을 잃은 뒤 손을 꼭 잡고 내린 두 사람이 있었다. 둘 중 한 사람은 2차 대전에서 전사했다. 남은 한 사람은 붉은 광장의 승전 기념식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작은 집에서 아기와 함께 평화를 반겼다. 수십 년 뒤, 미국을 대표하는 두 팝스타는 아프리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노래를 공동 작곡했다. We Are The World. 노래는 전 세계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고 당시에만 1400만 장가량 팔렸다. 6년 뒤에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었다. 두 명의 스탠퍼드 대학원생이 기숙사에서 ‘구글’이라는 검색 엔진을 만들고 있을 때 서울의 한 부부는 외환위기의 여파 속에서 서로의 무능을 탓하며 악다구니를 썼다. 그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가재도구를 집어 던졌는데 바닥에는 아기가 기고 있었다.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 한낮의 모스크바에서 다른 부부는 흰 빵과 당근을 사갖고 귀가하고 있었다. 변두리의 골목을 돌아선 둘은 빡빡머리 백인우월주의자 여섯 명과 마주쳤다. 남편이 아내를 등 뒤로 숨겼다. 아내가 만삭의 배를 두 팔로 감쌌다. 가장 어려 보이는 빡빡머리가 잭나이프를 겨누고 말했다. “배를 …기 전에 너네 나라로 꺼져 원숭이들아.” 21세기. 평양에서 두 정상은 악수를 나누었다. 컨츄리꼬꼬가 예능계를 정복하는 동안 다이나믹듀오는 핸들이 고장 난 에잇톤 트럭이 되었고 유노윤호는 지상파 무대 위에서 최강창민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리고 서울 동북부의 한 중학교로부터 서로를 기억하는 두 사람이 있다. 교문에 들어서서 걷는 길에는 흰 꽃이 피는 나무들이 있었다. 나무의 이름을 안 적은 없으나 때가 되면 바람에 흩날리는 희고 풍성한 꽃잎들은 기억에 남았다. 그런 따뜻한 봄날의 오후였다. 두 사람은 교무실에 나란히 섰다. 3학년이 되어 처음 같은 반에 배정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담임교사는 두 사람에게 각자의 이름이 적힌 흰 봉투를 하나씩 줬다. 그 교사는 세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행정실에서 준 건데
작성일 2022-08-01 댓글수 8상세보기 -
소설 [단편소설] 씬짜오, 씬짜오
[단편소설] 씬짜오, 씬짜오 최은영 구십오 년 일월, 우리는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구십이 년에서 구십삼 년까지 베를린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 겨우 일 년이 지나서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플라우엔이라고 불리는, 오 년 전까지만 해도 동독 지역이었던 작은 도시였다. 버려진 건물들, 황량한 공원, 술 냄새를 풍기며 전차 정류장에 앉아 있던 남자들…… 그곳은 내가 알던 독일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호 아저씨의 저녁 초대를 받은 날, 엄마는 평소에는 입지 않던 예쁜 투피스를 꺼내 다려 입고 화사하게 화장했다. 말 꼬리마냥 껑충 묶은 내 머리를 풀어 짱짱한 디스코머리로 땋고 결혼식 때 입는 검은색 코르덴 원피스를 입게 했다. 두 살짜리 동생에게도 새 옷을 입혔다. 오랜만에 화장을 한 엄마의 모습이 어린 내 눈에는 꽤나 예뻐 보였다. 엄마는 건물 유리창을 몇 번이나 보며 자기 모습을 점검했다. 플라우엔에 온 지 세 달 만에 다른 사람 집에 초대받은 것이어서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씬짜오.” 엄마는 현관 앞으로 나온 응웬 아줌마에게 외워 둔 베트남어로 인사했다. 나도 따라 “씬짜오” 하고 인사하자 응웬 아줌마는 반갑게 웃었다. 아줌마는 오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우리를 환영해 줬다. 부엌에는 호 아저씨가 있었다. 볼이 붉고 얼굴에 아이 같은 장난기가 어려 있던 아저씨가 나는 한눈에 좋아졌다. 아저씨는 아빠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였고, 내가 아저씨 아들 투이와 같은 반이 된 것을 알고는 우리 가족을 아저씨네로 초대했다. 호 아저씨의 요리는 담백하고 편안했다. 음식을 두고 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아저씨의 요리는 그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토마토를 넣어 뭉근하게 끓인 고깃국, 향긋한 쌀밥, 구운 새우, 볶음 야채와 반으로 자른 라임을 뿌려 먹는 짭조름한 튀김 만두의 맛이 그랬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어른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나는 투이를 따라 책장 쪽으로 갔다. “내가 여섯 살 때부터 모은 거야.” 투이는 만화책을 골라 줬는데 모두 스누피 시리즈였다. “저기서 읽을래?” 투이가 좌식 소파를 가리켰다. 스웨이드 재질의 소파는 부드럽고 푹신했다. 나는 손등으로 소파를 쓰다듬으며 만화를 읽기 시작했다. 우드스탁과 나란히 개집 지붕에 앉아 노닥거리는 스누피는 꼭 투이처럼 보였다. 학교에서 본 투이는 그런 애였으니까. 그 애는 모두와 잘 지내고 항상 명랑했다. 키가 큰 애든, 작은 애든, 활발한 애든, 내성적인 애든 모두 투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넌 얘 닮았어.” 투이가 우드스탁을 가리키며 웃었다. “너 처음 봤을 때 우드스탁인 줄 알았어.” 내가 작고 못생겨서 그렇게 말하나 싶었지만 악의 없는 얼굴로 천진하게 웃는 그 애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나 너 겨울에 봤었어. 주말 벼룩시장에서.&rdq
작성일 2016-04-25 댓글수 2상세보기 -
소설 예소연 - 그 개와 혁명그 개와 혁명 예소연 태수 씨는 죽기 전까지 통 잠을 못 잤다. 수면제를 먹고 진정제를 먹어도 한두 시간 토막잠만 잤다. 늘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서둘러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부리나케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뒤 태수 씨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 여기 있어, 태수 씨. 태수 씨는 잠깐 잠들었다 일어나면 꼭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 봤다. 꿈속에서 황천길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랬다. 그즈음 스마트 워치에 기록된 내 하루 수면 시간은 길어 봤자 세 시간이었다. 태수 씨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다. 가슴이 터질 것같이 답답하다고. 그러면 나는 태수 씨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복도를 빙글빙글 돌았다. 병원은 꼭 두 손바닥을 반듯이 펼쳐 놓은 것처럼 정확한 대칭 구조였다. 양 복도 끝 쪽에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고 그 중심에는 각각 디귿 자 형태의 데스크가 있어 간호사들이 상주했다. 태수 씨와 나는 데칼코마니 같은 그 병원 복도를 밤새도록 돌았다. 종종 가래 뱉는 소리도 들리고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병원에서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울었다.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태수 씨는 꾸벅꾸벅 졸았다. 그동안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고모는 나보고 나서지 말라고 했다. 희준에게 모든 걸 맡기라고. 나는 그런 고모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괜찮아요. 더한 것도 견뎠는걸요. 엄마까지 나를 말렸지만, 나는 이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직접 완장을 차고 장례식장을 지켜야 했다. 그게 태수 씨와 한 약속이었으니까. 태수 씨는 기억도 하지 못할 약속. 사경을 헤매며 해낸 약속. 태수 씨가 건강할 때, 나는 늘 돌아오는 제사 때마다 태수 씨와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 태수 씨는 할아버지가 기함을 한다며 반바지도 못 입게 했다. 제사상을 차리는 것도 늘 엄마 몫이었다. 나는 불필요한 인습이라고, 하다못해 태수 씨에게 당신 아버지 제사면 직접 과일이라도 놓으라고 소리를 쳤지만, 태수 씨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우리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고 당신은 그걸 응당 받아들일 뿐이라는 듯이. 하지만 태수 씨는 분명 조금 다른 사람이 아니었나. 나는 분명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 씨의 모습을 좋아했던 것인데. 나는 장례식이 시작되기 직전부터 소리를 질러가며 싸웠다. 장례식 직원 몇몇이 와서 말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할머니에게 삿대질을 하고, 사촌동생인 희준의 어깨를 밀며 쫓아냈다. 그러는 사이, 해서는 안 될 말들 혹은 아주 오래전에 이미 해야만 했던 말들이 오갔다. 특히 할머니에게. 그렇게 술을 될 때까지 드시고 여기까지 와서는 더 할 말이 있으세요? 있냐고. 네가 그러고도 태수 씨 엄마야? 엄마냐고. 그래, 나 엄마 딸이다. 그럼? 태수 씨 딸은 아니냐? 내가 닮기는 누굴 닮아. 우리 집에 그럼, 유자 말고는 계집밖에 더 있어?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 첫 조문객이 왔다. 엄마가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하며 이름을 불렀다. 성식이 형. 태수 씨와 엄마는 모 대학 사학과 85학번이었는데, 만날
작성일 2024-01-01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단편소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장류진 입국 심사를 마치고 국제선 터미널로 나오자마자 버스 매표소가 보였다. 지유 씨가 설명해 준 대로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지유 씨가 메신저로 보내준 일본어 문장을 창구에 앉아 있는 판매원에게 내밀었고, 유후인으로 가는 버스 티켓을 받을 수 있었다. 티켓을 받아들자 판매원이 손가락으로 출구 방향과 자신의 손목시계를 번갈아 가리키며 뭐라고 말했다.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버스 승강장으로 가라는 말일 터였다. 승강장을 향해 급하게 뛰다가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아 갑자기 헛웃음이 터졌다. 전날 오전까지만 해도 다음날 오후에 내가 이곳 후쿠오카 국제공항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지유 씨와 다시 연락이 닿은 건, 내가 먼저 안부 메시지를 보낸 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다시 연락해 볼까, 하고 늘 생각만 하다가 거의 일 년 만에 보낸 메시지였다. 답장이 없는 일주일 동안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혼자 '너무 하네'라고 중얼거렸다가, '메신저를 안 볼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다가, '누구하고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상황인가 보다' 했다가 결국은 다시 '너무 하네'로 돌아왔다. 그렇게 생각이 서너 바퀴쯤 돌았을 때 지유 씨가 답장을 보내왔다. 지훈 씨 오랜만. 그 평범한 한 문장에 '너무 하네' 같은 건 바로 잊을 수 있었다. 회사 경조사 게시판에 '법무팀 송지유 배우자상'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온 게 작년 봄이었다. 같은 게시판에 지유 씨의 결혼 소식이 올라온 지 세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람들은 회사 식당에서, 로비에서, 흡연구역에서 누구나 그 이야기를 했고 마치 떫은맛에 중독된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그 일을 자주 입에 올렸다. 교통사고였다더라, 한창 신혼에 그렇게 되어 불쌍하다며 혀를 찼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유부녀였어?"라는 말을 했고 "혼인신고를 했을까 안 했을까"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조의를 가야 하나 고민하다 팀 대표로 장례식장에 가는 사람 편에 조의금을 좀 많이, 그러니까 평소 내는 금액의 두 배 정도를 보내기로 했다. 그때는 지유 씨가 경조 휴가를 마치고 나서 그렇게 바로 회사를 그만둘 줄은 몰랐었다. 지유 씨는 퇴사 후 일본에서 지내고 있다는 근황을 전했다. 이미 회사 사람들에게서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나는 지유 씨가 민망할까 봐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반응했다. 전 요즘 후쿠오카에서 지내요. 거기 지진 난 곳 아닌가요? 그건 후쿠시마죠. 후쿠오카는커녕 일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내 말에 지유 씨는 진심으로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서른셋 먹도록 일본도 안 와보고 뭐 했어요, 라더니 생각보다 촌놈이라며 놀렸다. 예전처럼 가까워진 것 같아서 놀림 받는 게 좋았다. 언제 한번 후쿠오카 놀러 와요. 맛집 가이드는 확실하게 해줄게요. 사주는 건가요? 그럼요. 저 이런 말 들으면 안 잊어요. 어색할까 봐 걱정했는데 어제 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하기는, 일 년 전만 해도 거의 매일
작성일 2019-03-01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 당신이 있던 풍경의 신과 잠들지 않는 거인
[단편소설] 당신이 있던 풍경의 신과 잠들지 않는 거인 우다영 노란 나무 벽과 바닥을 가로지는 몇 줄기 빛. 나는 따뜻하고 밝은 곳에서 그늘로, 고요한 어둠 속에서 다시 빛이 있는 쪽으로 걷는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나의 행로에도 빛과 어둠이 만들어낸 곧고 선명한 줄무늬가 뒤섞이거나 훼손되지 않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면서. 부드러운 그물처럼 촘촘하게 몸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언제나 빛과 어둠이라는 놀라운 진실에 서서히 무감해지면서. 어쩌면 이것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이고, 나는 이 순간이 내가 살아갈 삶 전반을 의미하며 작동시키는 신의 중요한 계시가 아닐까 종종 생각했다. 나는 이제 그 장면이 다섯 살 내지 여섯 살의 기억이며 당시 부모님이 자주 방문하던 한 이층 가옥의 넓은 거실 풍경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 거실에서 여자들은 바닥에 나무 도마와 커다란 쟁반을 놓고 여러 사람이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식사를 준비했다. 신문지에 싸인 파와 물기를 털어낸 통통한 양파에서 나던 향긋하고 매운 냄새. 수북이 쌓인 그것들을 도마 위에 올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다듬는 소리. 국에 넣을 고기를 썰면 분리되어 도마에 고이던 선홍색 피와 유선형 식칼의 물결무늬를 따라 묻어 나오던 크림색 지방.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엄마는 "위험해." 하고 주의를 주며 식재료로 쓰기 위해 얇게 썰어 둔 배나 조그맣게 뜯어낸 호박떡을 입에 넣어주었다. 여자들은 손에 칼을 쥔 채 웃었다. 그 집에 온 사람들은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갓 지은 음식을 나누어 먹은 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 나는 그 집이 일종의 교당이며 거기서 지금으로서는 정체를 알 길이 없는 종교집회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 집의 가장 깊숙한 방에서 어른들이 향초와 휘장, 조각상, 장신구로 꾸며진 벽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드리던 모습이나, 자그마한 가죽 책을 손에 들고 읽으며 노래 부르던 모습을, 그 모든 과정에 경건한 태도로 임하던 부모님 곁에서 내가 칭얼거리며 다리에 몸을 기대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나는 늦은 밤 돌아온 아버지가 뜨거운 손을 내 이마에 짚고 중얼중얼 입말로 외던 간절한 기도나, 집에 든 강도에게 값나가는 물건들의 위치를 알려준 뒤 어린 나를 등 뒤에 숨기고 절박하게 반복하던 어머니의 작은 손짓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것이 사람들끼리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신앙의 형태라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오랜 세월 동안 그 일에 별다른 신경을 기울인 적이 없으며 무의식의 발로일지라도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부모님과 나눈 적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한동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맥락으로 유추했을 때, 그 종교는 종교라기보다 신화에서 유래한 원시신앙에 가까웠다.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오랜 세월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전파되며 추가되고 변형된 흔적들을 발견할
작성일 2019-04-08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백승연 - 초록 달을 만나러
[단편소설] 초록 달을 만나러 백승연 "다른 행성에 너랑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좀, 찝찝해." 혜지가 입술을 삐죽이 내밀다가 맥주잔을 들었다. 혜지의 말을 온전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구에서의 나의 하루하루도 고되고 힘든데, 척박한 제2 지구에서 또 다른 나는 어떤 방식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의 복제인간이 제2 지구로 보내지는 걸 허락하면 학자금 대출을 모조리 갚을 수 있었으니까. "쓰리디 업종이겠지? 분명히?" 혜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25년 전 인류는 인간이 살 수 있을 만한 두 번째 행성을 발견했다. 새 행성의 이름을 붙이는 것에도 여러 국가의 신경전이 이어져서, 행성이 발견된 지 20여 년이 넘도록 '제2 지구'로만 부르고 있었다. 당연히 인간의 생활터전으로 삼기에는 아직까지 인프라가 마련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로봇과 몇몇 우주비행사를 보내 몇 가지 실험을 거쳤다가, 재작년에야 안전성을 검증받고 주민을 모집했다. 그리고 그 주민 중에는 나의 복제인간, 두 번째 '필'이 껴들어간 것이고. 필은 테라포밍 1기 주민이었다. 제2 지구를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기반을 구축하는 일을 했다. 제2 지구에서는 밤낮으로 인공 달이 떠 있었는데, 낮에는 불을 꺼두어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밤이 되면 표면이 은은한 초록빛으로 빛났다. 초록 달. 그것은 제2 지구의 상징이자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달이었다. "그치만 나도 초록 달은 한번 보고 싶다." "사진으로 보면 되잖아." "그게 같냐." 혜지가 맥주를 마시며 테라스 밖을 내다보았다. 도시의 밤하늘은 네온사인과 가로등, 자동차가 뿜는 불빛 때문인지 충분히 어두워지지도 못하고 불면증을 앓는 것 같았다. "필은 거기선 계속 시를 쓸까." 혜지가 밤하늘에 뜬 하얀 달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었다. 벨벳 쿠션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둥근 달. 안으로 들어가면 무엇이든 폭 감싸 안아 줄 것 같은 동그라미. 그 밑에서는 자동차가 내는 소음과 매연, 사람들이 함부로 떠드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지구답게 시끄러웠다. "안 쓰겠지. 내 몸만 복제해 가는 게 아니라, 2년 전 내 기억까지 모조리 복제해 가는 거니까. 제정신이면 눈 뜨자마자 정신 차리고 바로 다른 일이나 열심히 할걸?" 내 말이 끝나자 혜지가 둥근 눈을 살짝 감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혜지를 따라 웃다가 뒷맛이 쓴 맥주를 마셨다. 올해 초, 제2 지구로 간 복제인간 중 한국인은 100명이었다. 단 100명 안에 내가 들어간 것이었다. 그중 50명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인류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이었다. 생물학자나 화학자, 천문학자 등등의 과학자가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의학자, 심리학자가 있었다. 기계를 다룰 수 있는 기계공학자, 로봇 공학자도 있었다. 제2 지구 사람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해줄 요리사나 체력을 관리해 줄 트레이너도 뒤를 따랐다. 그렇게 '쓸모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50명을 채우
작성일 2020-03-01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 김멜라 - 이응 이응이응 이응 김멜라 할머니와 나는 그 나무를 잘생긴 나무라고 불렀다. 우리는 나뭇잎 모양이나 열매를 보며 나무의 진짜 이름을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름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을까. 어떤 이름이든 나무 스스로 지은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 나무는 회색 수피가 매끄러웠고 잔가지 없이 하나로 곧게 뻗은 기둥 끝에 우산 살처럼 둥글게 휜 나뭇가지가 느긋하게 자라 있었다. 보리차차는 꼭 그 나무 밑동에 대고 오줌을 쌌다. 보리차차가 나무를 돌며 꼼꼼하게 냄새를 맡았기에 우리는 그 곁에 서서 나무의 잘생긴 풍모를 봤다. 시간이 흐른 뒤 나 혼자 그 공원에 갔을 때 나무는 잎을 다 떨군 채 잿빛 기둥으로 쉬고 있었다. 갈색 깃털의 새가 악보의 음표처럼 나뭇가지를 오르내렸다. 나는 근처의 흙이나 돌멩이에 보리차차의 흔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생긴 나무와 그 나무가 뿌리 내린 땅, 할머니와 내가 보리차차를 앞세우며 걷던 공원의 오솔길, 그 풍경 어딘가에 보리차차의 오줌이 스며든 자국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똥은 없겠지. 똥은 늘 우리가 배변 봉투에 싸서 가져갔으니까. 하지만 고불거리는 털 오라기나 콧방울에서 나오는 숨, 담홍색 젤리 같은 혓바닥에서 떨어진 침방울, 높고 빠르게 짖는 소리······ 그게 무엇이든 보리차차의 일부가 산의 한 부분이 되어 여전히 내 곁에 머무는 것 같았다. 부르면 의심 없이 달려오는 보리차차. 나는 땅에 떨어진 솔방울을 밟아 으스러뜨렸다. 잘생긴 나무가 있는 산의 저지대에서 클럽하우스가 있는 중턱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갔다. 내구성이 좀 더 강한 신발을 신어야 했다고 후회한 건 검은 바위가 솟아 있는 비탈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길이 나지 않은 오르막에 낙엽과 마른 솔잎, 잔가지들이 우부룩하게 쌓여 있었다. 땅 위로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려 나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맺힌 진창에 발을 잘못 디뎌 흰색 스니커즈가 발등 부근까지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바람결에 따라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이번에도 내가 쏜 화살을 찾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잃어버린 화살을 찾으려면 같은 방향으로 한 번 더 활을 쏴야 했다. 할머니는 오래 고민할 것도 없다고 했다. “그 짓이 맞나 틀리나 긴가민가할 땐 똑같은 짓을 한 번 더 해봐.” 그때 할머니는 부엌 바닥에 앉아 오미자를 우려낸 물을 유리병에 담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주둥이가 좁은 유리병에 빨갛고 맑은 오미자물이 채워지는 걸 바라봤다. 할머니는 병 밖으로 흐른 오미자물을 행주로 닦아내다가 손가락에 묻은 액체를 슙 하고 빨았다. “더럽게.” “얼레?” 할머니는 보란 듯이 한 번 더 자기 검지에 키스했다. 슙. 그러자 무슨 일인가 하고 보리차차가 할머니에게 다가와 콧등을 들이밀었다. 나를 보며 타각, 할머니를 보며 타각. 어서 둘 중 한 명이 자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라는 듯 타각
작성일 2023-05-04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구병모 - 쌍두몽(雙頭夢)쌍두몽(雙頭夢) 구병모 굴속에 두고 온 겨울잠이 나를 엄습한다. 한순간 새의 노랫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채는데, 그것이 숲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건지 내 몸속에서 흘러나온 건지 알 길이 없다. 바람과 모래와 나무 사이에서 닳아 가는 의식이 육(肉)의 허물을 벗겨 낸다. 소리만이 텅 빈 몸속에서 진동한다. 한 마리의 새는 광막한 하늘에서 탈각된 가피(痂皮)일 뿐이다. 정처 없던 사고는 짓이겨져 새의 몸을 살찌우고 그 날개 아래 영원히 유폐된다. 나는 내 존재에 그어진 선명한 취소선 두어 줄을 느낄 수 있다. * 시간의 손톱이 할퀴고 지나간 살갗마다 앉은 흉터 아래를 탐침하고자 하는 이들이 기억 집담회에 모인다. 이는 기억의 회의라고도 하고, 기억 세미나 혹은 기억의 제의라고도 불린다. 그들은 기억이 열리는 나무 밑에 둘러앉아 나무 열매를 따서 나눠 먹고—그 씨앗은 다시 땅속에 묻는다, 그것이 무엇으로 열리든지, 그대로 흙의 일부가 되더라도—손을 잡고 앉아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은 몸짓을 유지한 채 서로의 이야기를 듣거나 말하는데, 이는 체온을 전달하기 위한 행위로, 축축한 땀이 차오르는 타인의 손바닥을 신경 쓰는 이는 참석이 불가하다.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한. 혹은 영원히 떠나보내기 위한. 어쩌면 이미 휘발되어 떠나간 지 오래여서 창궐하는 유령처럼 사방을 배회하며 약탈할 몸을 찾는 기억을, 원래의 소유자에게로 다시 데려오기 위한. 그러므로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단순 건망증이 있는 이들, 빈지 워치 시대의 보편적인 디지털 중독자들, 인지증 진단을 받은 이들. 최초의 기억 집담회가 자생적으로 싹텄을 때는 인지증 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위한 나눔과 위로의 성격이 강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약간의 포즈, 실제로 기억 증진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행위들. 누군가는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암송하고 (틀리거나 일부 구절을 건너뛰어도 좋다), 누군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영화 속의 인상적인 한 장면을 묘사하고, 누군가는 40년 전 자기가 입었다던 삭기 일보 직전의 배냇저고리를 공개하면서 여밈 부분에 묻은 얼룩의 기원을 상상하여 들려준다. 상상은 기억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까. 좌우로 기우뚱하는 고개들. 기억은 자신의 해석에 따라 변형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서 상상과 크게 다른 범주라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간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기억을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라면, 상상은 웬만큼 도움이 되리라고, 사람들은 수긍한다. 처음 문턱을 넘을 때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흔히 있는 최면 센터일지도 몰라. 그게 아니라면 마음 다스림을 빌미로 삼은 장삿속. 유쾌한 기억,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 잊고 싶은 기억, 왜곡된 기억 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번드러운 말로 시선을 끌고 기억전시회라는 것을 열어서 그림과 소조(塑造)와 글로 기억 구조물이라는 것을 세워다가 춤, 노래, 연주, 꽃 무엇으
작성일 2025-02-01 댓글수 1상세보기 -
소설 박소민 - 우리가 알던 뜨거운 점우리가 알던 뜨거운 점 박소민 오늘은 제때 오려나. 율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렸다. 태양 흑점을 보고 싶다는데 네 시 넘어서야 시민천문대 중앙관측소 문을 열어젖히고 저 왔어요, 손까지 흔들며 활짝 웃는 조그마한 어린아이. 아마도 나이는 열두 살쯤. 요즘은 초등학생도 수업이 늦게 끝나나. 율은 이 시간에 오면 해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몇 번씩 재차 일러준 적 있었다. 내일은 꼭, 삼십 분만 일찍 오라고. 아이는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나타났고 저기 해가 떴는데 왜 안 돼요? 아직 쨍쨍한데, 또랑또랑하게 물어 왔다. 율은 정말 미안한데 친구야, 그게 떠 있다고 다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저기 봐, 구름에 다 가렸잖아? 난감한 표정으로 하늘을 가리켜야 했다. - 별은 싫어? 조금만 기다리면 별이 뜨는데. - 내일 또 올게요. 아이가 오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율에게는 미련 없이 되돌아 나가는 매일의 뒤통수가 켜켜이 쌓였다. 아이가 눌러 쓴 캡 모자의 색, 어느 날은 빨간색이었다가 다른 날은 노란색, 두 개를 섞은 주황이었다가 또 검정이 되는 동안 율의 마음도 덩달아 거뭇거뭇 타들어갔다. 해를 보고 싶어 하는 건 너인데 내가 네 머리에 매일 달리 뜨는 해를 보는구나······ 싶어서. 언젠가 한번 아이를 불러 세워 물었다. - 밤에 오지 않고 낮에 오는 이유가 있어? 보통은 별이 더 인기가 좋은데. 태양은 매일 뜨니까 고개만 들어도 볼 수 있을 텐데. 아이는 눈썹 아래까지 푹 내려쓴 캡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 매일 떠 있으니까요. 가까이서 보고 싶은 거예요. 가까이서 보고 싶은 건 율도 마찬가지였다. 율은 아이가 올 때마다 잊지 않고 꼭 질문을 한 개씩 했다. 사람 한 명 없이 발길이 뜸한 낮, 율은 아이를 떠올렸고 묻고 싶은 것을 입안에서 돌돌 궁굴렸다. 아이의 이름은 가원이었다. 캡 모자 안에 머리카락을 쑤셔 넣고 다녀서 풀어헤쳤을 때의 길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삼촌과 단둘이 살고 있으며 유독 동그란 뒤통수 때문에 본명보다 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성이 가, 이름이 원이에요. 실은 정가원이라는 걸 알고도 율은 모른 척해 주었다. 매일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율은 원에 대해 한 줌의 이야기를 끌어 모았다. 그리고 삼촌. 다섯 시 넘어 땀으로 얼룩진 체크 남방, 허겁지겁 달려 들어와 무릎 높이에서 손바닥을 좌우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 몸짓과는 어울리지 않는 낮고 가만가만한 목소리로 저 선생님, 죄송하지만 혹시 요만한 아이 정가원이 오늘도 다녀갔나요, 물어 왔는데 원의 진짜 이름도 이렇게 알게 된 거였다. 네, 집에 간다고 하던데요. 율이 안심시키면 그는 숨을 고르며 실례가 많습니다,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는데 율은 그런 그에게서 풍겨 오는 과장되지 않은 깍듯함이 퍽 마음에 들었다. 모르는 사이에 말을 거는 법이 없다시피 한 율도 왜인지 원과 그의 삼촌에게만큼은 입을 열게 되었다. 삼
작성일 2023-12-01 댓글수 0상세보기 -
소설 김화진 - 새 이야기
[단편소설] 새 이야기 김화진 내가 아는 어떤 빈티지 옷가게에서는 정기적으로 옛날 영화 상영회를 열곤 했다. 옷가게 손님들이 각자 음료와 다과를 가져와 조용히 먹으면서 빔프로젝터로 빈 벽에 쏘아 주는 영화를 보는 시간이었다. 가게 벽에는 그 주 상영작을 적은 에이포 용지가 붙어 있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사랑의 블랙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그런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첨밀밀〉을 상영하던 날,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천희가 앉아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갈까 하다가 천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상한 부분에서 우는 나를 천희가 흘깃흘깃 보는 게 느껴졌다. 손수건을 꺼내 주려나? 싶었는데 주지 않았지. 대신 천희는 자신이 가져온 간식을 건넸다. 사또밥이었다. 후에 사또밥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영화를 보는 도중에 너무 아삭거릴 과자를 제외하고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나도 쥐고 있던 젤리 봉지를 내밀었다. 내가 챙겨 온 간식은 마이구미였다. 천희는 옷을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우리가 만난 그 옷가게는 천희의 회사에서 멀지 않았고 또 영화를 상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업사이클 제품을 팔기도 해서 관심을 가지고 자주 들르곤 한다고. 무엇보다 예쁘잖아요. 걸려 있는 빈티지 셔츠들을 손으로 차르르 쓸며 천희가 말했다. 그 순간도 잊을 수가 없다. 천희에 관해서라면. 잊고 싶지 않은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천희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을 때 친구들은 얄궂게 굴었다. 빈티지숍에서 처음 만나서 같이 영화를 봤다고? 우우…… 그리고 단호했다. 뭐 하는 사람이래? 옷 만든다고? 게이 아님 양아치네. 나는 당황해서 그저 천희 욕하지 마…… 했다. 친구들 말이 맞을까 봐 떨려서 그랬다. 친구들은 다시 물었다. 영화 보고 뭐 했는데? 떡…… 나눠 먹었어. 떡? 떡을? 먹기만 했어? 너무 걸쭉하다 너희…… 나 말 안 해 이상해……. 얘기해 봐. 그럼 먹기만 했지. 백설기. 속에 흑설탕 든 거. 달았겠다. 맛있었겠다. 출근한 지 30분 이내에 이루어지는 직장인들의 카톡은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간다. 나도 그랬다. 출근을 무사히 하고 나면 천희 생각을 시작했다. 사또밥과 젤리를 먹으면서 봤는데도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배가 고팠고 저녁을 먹기에는 시간이 애매하게 늦어 옷가게 사장님이 마침 옆 건물에 새로 가게를 연 사장님이 넉넉히 주셨다며 나눠 준 백설기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눴다. 옆방에서 재봉틀 작업을 좀 할 테니 편히 계시다 가시라고, 상냥하게 안내해 준 사장님은 사라지기 전 영화를 보기 위해 꺼뒀던 음악도 다시 켜주셨다. 어둑어둑한 가게 한쪽 살롱 공간에서 재즈가 흘러나오는데 천희하고 나란히 앉아 백설기를 뜯어먹었다. 그날 천희는 데님 점프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멋있었다. 회사 근처에 살고 자주 이 동네를 산책한다고 했다. 나는 천희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작성일 2021-07-01 댓글수 3상세보기 -
소설 문지혁 - 이름 쓰기이름 쓰기 문지혁 1 1994년 봄에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방배중학교는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 언덕 위에 위치한 학교로, 작고 아담한 운동장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아마도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업 중에 갑자기 앞문이 열렸습니다. 평상시에는 대체로 일어나지 않는, 뭔가 급박한 사정이 있을 때 생기는 일이지요. 문지혁, 나와. 저를 호명한 사람은 학생주임 선생님이었습니다. 머리가 꽤 많이 벗겨진 데다 웃을 때마다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치열 때문에 〈개구쟁이 스머프〉에 등장하는 ‘가가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분이었지요. 본업은 음악 교사였습니다. 주무기는 끝을 다듬은 하키채였고요. 당시 선생님들에게는 저마다 그런 것들이 있었으니까요. 과거형과 과거 완료형의 차이를 가르치던 영어 선생님이 말을 멈췄습니다. 졸던 아이들이 눈을 떴습니다. 체크무늬 양복을 입은 학생주임 선생님이 저를 손으로 지목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저에게 쏠렸지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는 앞문으로 곧장 나가야 할지, 아니면 뒷문으로 돌아 나가야 할지를 두고 아주 잠깐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수업 중인 영어 선생님께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뒷문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복도로 나가 뒷문을 닫자 학생주임 선생님도 앞문을 닫고 먼저 걷기 시작했습니다. 설명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계단 쪽으로 걸어갔고 저는 우리가 교무실로 향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직감했습니다. 당시 저에게 교무실은 익숙한 공간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교무실에 가는 것을 지옥문을 여는 것처럼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반장 혹은 부반장이었고 전교 학생회의 임원이었으며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는 모범생이었으니까요. 심부름을 비롯한 다양한 용건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교무실에 드나들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저를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네가 문지혁이구나. 용무를 마치고 나면 몰랐던 선생님도 제 초록색 명찰에 새겨진 하얀 이름을 눈여겨보며 말했습니다. 마치 도감 속에 나오는 동물을 실제로 본 어린아이처럼요. 이번엔 무슨 일일까? 교실이 있던 3층에서 교무실이 있는 1층까지 내려가는 길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부름이라면 매우 중대한 일이거나 아주 급박한 이유일 거라고 짐작했죠. 이를테면 상을 받는다거나, 학교 대표가 되었다거나, 당장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거나··· 그것이 나쁜 일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이 계단을 다 내려가면 제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어떤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만으로 겨우 열넷인 소년에게 세계란 그토록 단순하고 안온하며 순진한 것이기 마련이니까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교무실 문을 여는 순간, 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작성일 2025-03-01 댓글수 4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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