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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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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세랑 - [단편소설] 웨딩드레스 44
[단편소설] 웨딩드레스 44 정세랑 그 드레스는 2013년 7월, 캐나다 데이 세일 기간에 밴쿠버의 작은 창고에서 픽업되어 한국으로 수입되었다. 디자이너 드레스이긴 하지만 신인 디자이너의 드레스라 할인 폭이 컸다. 택에 붙은 가격은 만 오천 달러, 최종 할인가는 삼천 오백 달러였다. 사이즈는 4. 하지만 살짝 크게 나온 데다가 코르셋 조임으로 조절할 수 있어서 55에서 77까지 입었다. 1 드레스는 한참을 선택받지 못했다. 화려하지 않은, 기하학적인 선의 드레스였다. 수제 레이스도 비즈나 세퀸도 없어서 마치 종이접기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샵에서 괜히 들여왔나, 하고 후회를 할 즈음 첫 번째 여자가 그 드레스를 골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드레스를 입고 나올 때 특수효과 넣어 주잖아요. 갑자기 더 예뻐 보이게. 그거 거짓말인 거 알고 있었지만 정말 아무 효과 없네. 그냥 나네요.” 여자는 화장도 머리도 하지 않고 찾아와서는 아주 건조한 표정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까 것 다시 입어 보시겠어요?” “아뇨, 이걸로 정할게요.” “최초로 입으시는 거예요. 아시죠? 드레스 수명은 일곱 번 안팎이 끝인 거.” 샵에서 여러 번 강조했지만 여자는 특별히 인상 깊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2 “너무 조이지 말아 주세요. 쉽게 기절하는 편이라…….” 두 번째 여자는 긴장하면 종종 미주신경성 실신을 하는 체질이었다. 그래서 드레스를 볼 때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코르셋 부분이 얼마나 숨쉬기 좋을지를 따졌다. 여자에게 조이는 옷은 도움 될 리 없었다. 상대적으로 가슴통이 여유 있게 나온 수입 드레스 위주로 고르다가 그 드레스를 골랐다. 그래도 그렇게 편하진 않았다. 몇 번의 위기가 있긴 했지만 기절하지 않고 무사히 식을 치렀다. 마지막으로 드레스를 벗으며 들이켠 숨이 달콤했다. 이제 살겠다, 여자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도우미 분이 웃었다. 후에 드레스와 코르셋을 입은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숨은 쉬고 있는 건지 신경이 쓰여서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배우들은 저걸 얼마나 오래 입고 견뎌야 했을까, 정말 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자꾸 딴생각을 했다. 한 명이 기절하는 장면이 나오자 여자는 그럼 그렇지, 하고 납득해 버렸다. 3 전혀 결혼할 계획이 없었는데, 스카프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결혼하게 되었다. 그냥 스카프가 아니었다. 운명의 스카프였다. 세 번째 여자는 그 스카프를 한 날이면 칭찬을 잔뜩 받았다. 색상과 무늬, 크기와 소재가 여자에게 완벽했다. 바탕색은 하늘색이었다. 어떤 모양으로 매도 톡톡하게 살아 있었다. 원피스에도 블라우스에도 티셔츠에도 다른 매력으로 어울렸다. 그래서 외근처가 여러 군데였던 날,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게 그 스카프를 잃어버리자 매우 상심하고 말았다. 똑같은 스카프를 다시 사려고 했지만, 구매한 지 3년이 지난 후였으
작성일 2016-08-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9896상세보기 -
소설 [단편소설] 씬짜오, 씬짜오
[단편소설] 씬짜오, 씬짜오 최은영 구십오 년 일월, 우리는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구십이 년에서 구십삼 년까지 베를린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 겨우 일 년이 지나서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플라우엔이라고 불리는, 오 년 전까지만 해도 동독 지역이었던 작은 도시였다. 버려진 건물들, 황량한 공원, 술 냄새를 풍기며 전차 정류장에 앉아 있던 남자들…… 그곳은 내가 알던 독일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호 아저씨의 저녁 초대를 받은 날, 엄마는 평소에는 입지 않던 예쁜 투피스를 꺼내 다려 입고 화사하게 화장했다. 말 꼬리마냥 껑충 묶은 내 머리를 풀어 짱짱한 디스코머리로 땋고 결혼식 때 입는 검은색 코르덴 원피스를 입게 했다. 두 살짜리 동생에게도 새 옷을 입혔다. 오랜만에 화장을 한 엄마의 모습이 어린 내 눈에는 꽤나 예뻐 보였다. 엄마는 건물 유리창을 몇 번이나 보며 자기 모습을 점검했다. 플라우엔에 온 지 세 달 만에 다른 사람 집에 초대받은 것이어서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씬짜오.” 엄마는 현관 앞으로 나온 응웬 아줌마에게 외워 둔 베트남어로 인사했다. 나도 따라 “씬짜오” 하고 인사하자 응웬 아줌마는 반갑게 웃었다. 아줌마는 오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우리를 환영해 줬다. 부엌에는 호 아저씨가 있었다. 볼이 붉고 얼굴에 아이 같은 장난기가 어려 있던 아저씨가 나는 한눈에 좋아졌다. 아저씨는 아빠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였고, 내가 아저씨 아들 투이와 같은 반이 된 것을 알고는 우리 가족을 아저씨네로 초대했다. 호 아저씨의 요리는 담백하고 편안했다. 음식을 두고 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아저씨의 요리는 그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토마토를 넣어 뭉근하게 끓인 고깃국, 향긋한 쌀밥, 구운 새우, 볶음 야채와 반으로 자른 라임을 뿌려 먹는 짭조름한 튀김 만두의 맛이 그랬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어른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나는 투이를 따라 책장 쪽으로 갔다. “내가 여섯 살 때부터 모은 거야.” 투이는 만화책을 골라 줬는데 모두 스누피 시리즈였다. “저기서 읽을래?” 투이가 좌식 소파를 가리켰다. 스웨이드 재질의 소파는 부드럽고 푹신했다. 나는 손등으로 소파를 쓰다듬으며 만화를 읽기 시작했다. 우드스탁과 나란히 개집 지붕에 앉아 노닥거리는 스누피는 꼭 투이처럼 보였다. 학교에서 본 투이는 그런 애였으니까. 그 애는 모두와 잘 지내고 항상 명랑했다. 키가 큰 애든, 작은 애든, 활발한 애든, 내성적인 애든 모두 투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넌 얘 닮았어.” 투이가 우드스탁을 가리키며 웃었다. “너 처음 봤을 때 우드스탁인 줄 알았어.” 내가 작고 못생겨서 그렇게 말하나 싶었지만 악의 없는 얼굴로 천진하게 웃는 그 애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나 너 겨울에 봤었어. 주말 벼룩시장에서.&rdq
작성일 2016-04-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2 조회수 28631상세보기 -
소설 김기태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단편소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이백 년 전 프로이센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풍성한 수염을 길렀고 오래도록 남을 선언문을 런던에서 발표했다. 추종자들은 이십여 년 후 파리의 일부를 점거하고 혁명을 선포했다. 바리케이드 안쪽 술집에서 한 철도공이 기분에 취해 몇 줄의 가사를 썼다. 혁명 정부는 백일이 되기 전 진압 당했지만 가사는 남았고 한 가구공이 멜로디를 붙였다. 그때 상당수의 조선인들은 먹고살 길을 찾아 연해주로 떠났다. 러일 전쟁과 한일 병합을 거치며 더 많은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넜다. 일부는 1차 대전에 러시아군으로 참전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수립되었다. 일제의 확장 정책이 가시화됐을 때 연방의 지도자는 연해주의 조선인들을 믿지 않았다. 그는 십칠만여 명의 조선인들을 기차에 태워 육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보냈다. 기차에서 각자의 가족을 잃은 뒤 손을 꼭 잡고 내린 두 사람이 있었다. 둘 중 한 사람은 2차 대전에서 전사했다. 남은 한 사람은 붉은 광장의 승전 기념식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작은 집에서 아기와 함께 평화를 반겼다. 수십 년 뒤, 미국을 대표하는 두 팝스타는 아프리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노래를 공동 작곡했다. We Are The World. 노래는 전 세계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고 당시에만 1400만 장가량 팔렸다. 6년 뒤에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었다. 두 명의 스탠퍼드 대학원생이 기숙사에서 ‘구글’이라는 검색 엔진을 만들고 있을 때 서울의 한 부부는 외환위기의 여파 속에서 서로의 무능을 탓하며 악다구니를 썼다. 그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가재도구를 집어 던졌는데 바닥에는 아기가 기고 있었다.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 한낮의 모스크바에서 다른 부부는 흰 빵과 당근을 사갖고 귀가하고 있었다. 변두리의 골목을 돌아선 둘은 빡빡머리 백인우월주의자 여섯 명과 마주쳤다. 남편이 아내를 등 뒤로 숨겼다. 아내가 만삭의 배를 두 팔로 감쌌다. 가장 어려 보이는 빡빡머리가 잭나이프를 겨누고 말했다. “배를 …기 전에 너네 나라로 꺼져 원숭이들아.” 21세기. 평양에서 두 정상은 악수를 나누었다. 컨츄리꼬꼬가 예능계를 정복하는 동안 다이나믹듀오는 핸들이 고장 난 에잇톤 트럭이 되었고 유노윤호는 지상파 무대 위에서 최강창민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리고 서울 동북부의 한 중학교로부터 서로를 기억하는 두 사람이 있다. 교문에 들어서서 걷는 길에는 흰 꽃이 피는 나무들이 있었다. 나무의 이름을 안 적은 없으나 때가 되면 바람에 흩날리는 희고 풍성한 꽃잎들은 기억에 남았다. 그런 따뜻한 봄날의 오후였다. 두 사람은 교무실에 나란히 섰다. 3학년이 되어 처음 같은 반에 배정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담임교사는 두 사람에게 각자의 이름이 적힌 흰 봉투를 하나씩 줬다. 그 교사는 세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행정실에서 준 건데
작성일 2022-08-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7 댓글수 7 조회수 26002상세보기 -
소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단편소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장류진 입국 심사를 마치고 국제선 터미널로 나오자마자 버스 매표소가 보였다. 지유 씨가 설명해 준 대로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지유 씨가 메신저로 보내준 일본어 문장을 창구에 앉아 있는 판매원에게 내밀었고, 유후인으로 가는 버스 티켓을 받을 수 있었다. 티켓을 받아들자 판매원이 손가락으로 출구 방향과 자신의 손목시계를 번갈아 가리키며 뭐라고 말했다.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버스 승강장으로 가라는 말일 터였다. 승강장을 향해 급하게 뛰다가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아 갑자기 헛웃음이 터졌다. 전날 오전까지만 해도 다음날 오후에 내가 이곳 후쿠오카 국제공항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지유 씨와 다시 연락이 닿은 건, 내가 먼저 안부 메시지를 보낸 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다시 연락해 볼까, 하고 늘 생각만 하다가 거의 일 년 만에 보낸 메시지였다. 답장이 없는 일주일 동안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혼자 '너무 하네'라고 중얼거렸다가, '메신저를 안 볼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다가, '누구하고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상황인가 보다' 했다가 결국은 다시 '너무 하네'로 돌아왔다. 그렇게 생각이 서너 바퀴쯤 돌았을 때 지유 씨가 답장을 보내왔다. 지훈 씨 오랜만. 그 평범한 한 문장에 '너무 하네' 같은 건 바로 잊을 수 있었다. 회사 경조사 게시판에 '법무팀 송지유 배우자상'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온 게 작년 봄이었다. 같은 게시판에 지유 씨의 결혼 소식이 올라온 지 세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람들은 회사 식당에서, 로비에서, 흡연구역에서 누구나 그 이야기를 했고 마치 떫은맛에 중독된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그 일을 자주 입에 올렸다. 교통사고였다더라, 한창 신혼에 그렇게 되어 불쌍하다며 혀를 찼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유부녀였어?"라는 말을 했고 "혼인신고를 했을까 안 했을까"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조의를 가야 하나 고민하다 팀 대표로 장례식장에 가는 사람 편에 조의금을 좀 많이, 그러니까 평소 내는 금액의 두 배 정도를 보내기로 했다. 그때는 지유 씨가 경조 휴가를 마치고 나서 그렇게 바로 회사를 그만둘 줄은 몰랐었다. 지유 씨는 퇴사 후 일본에서 지내고 있다는 근황을 전했다. 이미 회사 사람들에게서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나는 지유 씨가 민망할까 봐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반응했다. 전 요즘 후쿠오카에서 지내요. 거기 지진 난 곳 아닌가요? 그건 후쿠시마죠. 후쿠오카는커녕 일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내 말에 지유 씨는 진심으로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서른셋 먹도록 일본도 안 와보고 뭐 했어요, 라더니 생각보다 촌놈이라며 놀렸다. 예전처럼 가까워진 것 같아서 놀림 받는 게 좋았다. 언제 한번 후쿠오카 놀러 와요. 맛집 가이드는 확실하게 해줄게요. 사주는 건가요? 그럼요. 저 이런 말 들으면 안 잊어요. 어색할까 봐 걱정했는데 어제 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하기는, 일 년 전만 해도 거의 매일
작성일 2019-03-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9095상세보기 -
소설 백승연 - 초록 달을 만나러
[단편소설] 초록 달을 만나러 백승연 "다른 행성에 너랑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좀, 찝찝해." 혜지가 입술을 삐죽이 내밀다가 맥주잔을 들었다. 혜지의 말을 온전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구에서의 나의 하루하루도 고되고 힘든데, 척박한 제2 지구에서 또 다른 나는 어떤 방식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의 복제인간이 제2 지구로 보내지는 걸 허락하면 학자금 대출을 모조리 갚을 수 있었으니까. "쓰리디 업종이겠지? 분명히?" 혜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25년 전 인류는 인간이 살 수 있을 만한 두 번째 행성을 발견했다. 새 행성의 이름을 붙이는 것에도 여러 국가의 신경전이 이어져서, 행성이 발견된 지 20여 년이 넘도록 '제2 지구'로만 부르고 있었다. 당연히 인간의 생활터전으로 삼기에는 아직까지 인프라가 마련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로봇과 몇몇 우주비행사를 보내 몇 가지 실험을 거쳤다가, 재작년에야 안전성을 검증받고 주민을 모집했다. 그리고 그 주민 중에는 나의 복제인간, 두 번째 '필'이 껴들어간 것이고. 필은 테라포밍 1기 주민이었다. 제2 지구를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기반을 구축하는 일을 했다. 제2 지구에서는 밤낮으로 인공 달이 떠 있었는데, 낮에는 불을 꺼두어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밤이 되면 표면이 은은한 초록빛으로 빛났다. 초록 달. 그것은 제2 지구의 상징이자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달이었다. "그치만 나도 초록 달은 한번 보고 싶다." "사진으로 보면 되잖아." "그게 같냐." 혜지가 맥주를 마시며 테라스 밖을 내다보았다. 도시의 밤하늘은 네온사인과 가로등, 자동차가 뿜는 불빛 때문인지 충분히 어두워지지도 못하고 불면증을 앓는 것 같았다. "필은 거기선 계속 시를 쓸까." 혜지가 밤하늘에 뜬 하얀 달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었다. 벨벳 쿠션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둥근 달. 안으로 들어가면 무엇이든 폭 감싸 안아 줄 것 같은 동그라미. 그 밑에서는 자동차가 내는 소음과 매연, 사람들이 함부로 떠드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지구답게 시끄러웠다. "안 쓰겠지. 내 몸만 복제해 가는 게 아니라, 2년 전 내 기억까지 모조리 복제해 가는 거니까. 제정신이면 눈 뜨자마자 정신 차리고 바로 다른 일이나 열심히 할걸?" 내 말이 끝나자 혜지가 둥근 눈을 살짝 감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혜지를 따라 웃다가 뒷맛이 쓴 맥주를 마셨다. 올해 초, 제2 지구로 간 복제인간 중 한국인은 100명이었다. 단 100명 안에 내가 들어간 것이었다. 그중 50명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인류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이었다. 생물학자나 화학자, 천문학자 등등의 과학자가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의학자, 심리학자가 있었다. 기계를 다룰 수 있는 기계공학자, 로봇 공학자도 있었다. 제2 지구 사람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해줄 요리사나 체력을 관리해 줄 트레이너도 뒤를 따랐다. 그렇게 '쓸모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50명을 채우
작성일 2020-03-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4963상세보기 -
소설 이미상 - 여자가 지하철 할 때
[단편소설] 여자가 지하철 할 때 이미상 1 수진은 매일 얼굴에 세로선을 긋는다. 정수리에서 시작해 눈썹을 지나 콧방울을 거쳐 입술을 쓸며 죽 내리긋는다. 그럼 일순 정적이 흐르는데 약간 상투적인 정적이다. 어차피 곧 난리가 날 거면서. 아니나 다를까 수진의 머리가 곧 반으로 쪼개진다. 처음은 아프다. 쪼개지는 순간은. 사과 머리를 칼로 탁, 칠 때 사과가 느낄 법한 통증이다. 다음은 리본이 풀리는 것과 같다. 머리가 밖으로 동그랗게 말리고 갈라진 얼굴이 흘러내린다. 난초 잎처럼 힘없이 벌어져 덜렁대는 얼굴 두 쪽. 얼굴I, II의 탄생. ‘갈까?’ 수진이 팔뚝을 긁으며 말한다. “누자미. 누자미.” 갓 태어난 얼굴I은 말이 서툴다. 얼굴Ⅱ가 눈을 깜빡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수진이 웃으며 말한다. 셋 다 같은 생각이다. 동同, 동同, 동同. 삼동이 맞다. 삼두가 맞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 어쨌든 흔치 않은 일이다. 오늘은 시작이 좋다. 라-디-다 라라. 노래가 절로 나온다. 라-디-다 라라 라-디-라 라라 라라라…… 2 “마스크 쓰셨나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에게 역무원이 묻는다. 그런 역무원을 수진과 얼굴들이 보고 있다. “여- 여-” 들어오는 열차를 향해 얼굴I이 외친다. 어느 세월에. 이번 얼굴들은 유독 말이 느리다. 이런 속도라면 언제 여- 여-가 아니라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할까? 마스크 안 쓴 사람에게 마스크 쓰셨나요? 묻는 역무원의 심중을 어느 세월에 이해할까? 과연, 자알났다, 에 기분 나빠할 날이 올까? 그러나 수진은 좋은 선생이다. 더 머리 나쁜 얼굴에게도 말을 가르쳤다. 16' 얼굴 XIV도 나중에는 잘났다와 자알났다를 구분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둘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것까지 깨달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수진은 얼굴들에게 말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수진이 교재를 편다. 1. 역무원은 시각장애인이 아니다. (모를 일! 그러나 편견 파트는 나중에.) 2. 역무원은 시민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3. 그런데 왜, 마스크 쓰셨나요? 하고 물었을까? 수진과 얼굴들의 얼굴이 돌아간다. 차창 밖 시민이 역무원에게 침을 뱉은 것 같다. 수진이 어깨를 으쓱한다. ‘연습문제를 풀어 보자.’ 괄호 안에 알맞은 말을 넣으시오. ( ) 마스크 쓰셨나요? 평일 오후의 지하철은 한산하다. 수진이 선 곳 앞좌석에 세 사람(남1, 여2), 노약자석에 한 사람(남1)이 있을 뿐이지만 수진은 서서 간다. 얼굴Ⅰ은 행맨, 얼굴Ⅱ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 중이다. 지하철이 지상을 달린다. 강이 흐르고 철교가 지나간다. 다시 지하를 달린다. 정차. 얼굴Ⅰ, Ⅱ가 각각 손잡이, 선반에서 내려와 출입문에 달라붙는다. 출입문 창에 동그란 입김 두 개가 생긴다. 출입문이 열린다. 출입문이 닫힌다. ‘울지 마.’
작성일 2020-09-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846상세보기 -
소설 편혜영 - 밤의 공사
편혜영 무너진 담은 풀숲과 면한 쪽이었다. 풀숲은 돼지풀 군락 같은 덩굴식물과 말라죽은 나무로 담을 쌓은 둥근 습지를 품고 있었다. 그것들은 습지를 비밀의 숲으로 위장할 만큼 키가 컸고 울창했으며 드센 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집 바깥에서 보면 담장 한쪽이 귀퉁이를 접은 종이처럼 무너진 것이 보이지 않았다. 고분과 면한 쪽이 아니어서 통행인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좁은 회랑과 같은 골목길 끝에 위치한 집은 뒤쪽으로는 고분과, 오른쪽으로는 풀숲과 닿아 있었다. 고분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D시에는 고분이 너무 많았다. 대개 연대가 불분명한 것들이었다. D시가 시(市)로 정착되기 이전부터, 지금의 국호(國號)가 사용되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고분은 문화재 관리국에서도 일일이 조사하지 못할 만큼 많았다. 그래서 대개는 어떤 송장과 부장품을 품고 있는지에 대해서 함구한 채 낮은 철책에 둘러싸여 방치되었다. 어느 게 고대 왕의 것인지, 왕의 처형을 모의한 반역자의 것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습지 표면에는 순채나 검정말 따위가 가득 덮여 있었다. 그 때문에 습지는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높은 곳에서 보면 잔디가 깔린 잘 가꾼 정원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조금 더 내려오면 이제 막 아스팔트 공사를 해놓은 도로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순채나 검정말의 태반은 이미 까맣게 죽어 뿌리도 없이 부유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표면이 일렁이지 않았다. 습지에 가득 찬 것은 점액질의 뭉클거리는 덩어리였다. 누구도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것이었다. 가끔 습지 표면이 일렁일 때도 있었다. 아내가 집 안에서 잡은 들쥐의 꼬리를 휘휘 감아 던질 때나 습지에 닿아 있는 마을 하수관으로 오폐수가 쏟아져 나올 때였다. 습지는 그 모두를 잘 받아 넣었다는 신호로 잠깐 쿨렁거렸다. 그러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웅덩이가 시커먼 속을 드러냈다. 습지가 벌린 물구멍은 아내의 거웃을 연상시켰다. 더럽고 시커먼 터럭들이 엉켜 있으며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데다가 냄새까지 풍기는 구멍. 그는 가급적 습지 근처로 가지 않았다. 아내를 통해 집 옆에 습지가 있다고 들었을 때, 그는 물기를 머금은 순채 위에 청개구리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순채는 실로 습지 가득 널려 있었다. 지저분하게 뻗은 뿌리만큼이나 물에 떠 있는 잎사귀도 더러웠다. 잎을 둘러싸고 있는 점액질은 누군가 뱉어놓은 가래처럼 탁했다. 청색의 개구리가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 대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거대한 황소개구리와 그 개구리를 먹이로 삼는 들쥐, 들쥐를 잡아먹는 들고양이들, 작은 들고양이를 노리는 덩치 큰 들고양이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더럽고 시끄러운 것들은 죄다 습지로 모여드는 것 같았다. 마을에는 습지에 관한 소문이 끊임없이 떠돌았다. 그 중에는 젊은 여자가 빠져 죽었다는 것도 있었다. 하도 오래된 소문이라서 진의는 알 수 없었다. 시체를 찾으려 해도 이미 백골조차 가루가 되어 버렸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고 했다.
작성일 2005-07-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9773상세보기 -
소설 임성순 -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단편소설]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임성순 운명은 뜻밖의 형태로 찾아온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황금기가 갑자기 끝나버린 것은 어느 재벌의 비자금 수사 때문이었다. 특검이 출범하고, 일가의 상속문제가 세간의 관심을 끌더니, 끝내 안주인의 미술 창고가 하나 열렸다. 기자들이 몰려갔고,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으며,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박스를 들고 나왔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그림을 소유했다는 그녀의 걸작 컬렉션이 일부나마 빛을 보았다. 그리고 팝아트 거장의 걸작 소유권을 놓고 서로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거창하게 출발해 유야무야 된 이 소동의 마지막은 미술계를 긴급 진단하는 기획기사로 장식되었는데 ‘이대로 좋은가.’로 시작되는 기획기사는 온갖 미학과 정치학, 팝아트의 역사 등등의 썰을 풀며 시작되었지만, 결국 핵심은 웃으며 눈물 흘리는 여자의 그림 가격이었고, 지금은 얼마나 뛰었을지 가격조차 알 수 없는 그 그림의 진짜 소유주가 누구인가에 대한 추측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무리 읽어 봐도 이대로 좋다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미술계 말석에서나마 이름을 팔아먹고 살았던 내 돈줄도 그렇게 갑자기 막혔다. 예년 같았으면 갤러리가 문 닫을 시간에 비서와 함께 나타나 트럭째 그림을 싣고 가던 큰손들이 일제히 내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는 말은 비슷했다. “알잖아. 요즘 분위기.” “이 사람아, 비 오는데 괜히 비 맞을 일 있나.” “내가 바빠서. 요즘 그림 볼 시간이 없어.” “창고가 꽉 차서…… 알잖아. 김 교수.”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제 후배라서가 아니라 진짜 물건이라니까요. 아시잖아요. 제가 이사님한테 아무나 소개 안 하는 거.” “보장한다니까요. 딱 5년, 5년만 가지고 계시면 저한테 고맙다고 절하실걸요.” “이럴 때가 기회라니까요. 다들 이렇게 엎드려 있을 때, 과감하게 들어오셔야 나중에 재미 보시지.”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전에는 개관 전날 밤 미리 와서 볼 수 없느냐, 도록만 보내주면 살 그림들 번호를 찍어 주겠다고 하던 이들이었다. 그들 모두 거짓말처럼 연락을 끊었고 4개월을 준비했던 후배의 첫 개인전은 그림 석 점도 채 팔지 못한 채 끝났다. 내가 나서서 기획하면 늘 완판을 해왔고 그것이 내 은밀한 자부심이었다. 그 모든 것이 고작 그림 창고가 한 번 열린 일로 처참하게 박살나 버렸다. 그렇다고 그 일가의 여주인에게 불만이나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사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 상당수는 어떤 형태로든 그녀가 만들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고미술품에 대한 강렬한 수집욕을 자랑했던 그 일가의 창업주를 따라 미술계에 뛰어든 그녀는 현대미술에 대한 높은 안목과 그보다 더 대단한 지갑을 가
작성일 2017-09-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9196상세보기 -
소설 정대건 - 아이 틴더 유
[단편소설] 아이 틴더 유 정대건 ? KBS 라디오 문학관에서 오디오북을 만나볼 수 있어요 ‘184 76 32’. 키, 몸무게, 나이만 적혀 있는 프로필. 집에서 2km 떨어져 있던 호와 틴더에서 매치된 건 지난밤이었다. 몸이 좋은 타입은 아니었는데 쌍꺼풀 없는 눈에 고른 치열이 마음에 들어서 ‘라이크(LIKE)’를 눌렀다. 메시지를 주고받아 보니 영화를 한다고 했다. 틴더에는 어쩜 그렇게 예술가 지망생들이 많은지, 절반이 예술가 지망생 아니면 금융맨이다. 내가 여의도 IFC몰 14층 사무실에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금융권에서 일하느냐고 따분한 질문을 해서 조금 실망했다. 금융권에서 근무 시간에 틴더 돌리고 있는 나 같은 애를 써줄 리가 있나. 내가 일하는 곳은 여유 있는 업무와 낮은 연봉을 ‘워라밸’이라는 단어로 포장한 외국 피자 프랜차이즈의 본사다. 화제는 취미와 취향으로 넘어갔고, 호가 노아 바움백의 영화를 전부 봤다고 했을 때,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금요일 밤 홍대 술집에서 만난 호는 어깨는 넓은데 팔뚝에는 근육이 머문 흔적조차 없었다. 서로 본명은 묻지도 않았다. 호의 이름이 진짜로 호든 승호든 호식이든 어차피 내가 연애할 사람 찾는 것도 아니고 오늘 술자리가 재밌으면 상관없었다. “솔 씨는 틴더로 사람 많이 만나 봤어요?” 진부한 시작에 나는 “그럼요, 새로운 사람 만나서 술 마시는 거 좋아해서.” 하고 샐쭉 웃었다. 세 시간 전만 해도 엑셀 회계장부를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처음 보는 호의 얘기를 들으며 도시의 풍경이 낯설어지는 게 즐거웠다. 호는 데이팅 앱으로 만나서 일 년 정도 연애한 적이 있다고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퍽보이는 아니라고 어필하는 거였다. 말은 무슨 말을 못 할까. 진지한 만남을 지향한다더니 잠수타버린 남자를 두 번이나 겪은 뒤로 나는 틴더남들을 잘 믿지 않았다. 플러팅 하는 거 보는 재미로 나오는 건데, 호는 오늘 나를 꼬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람과의 대화에 굶주렸다는 듯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듣자하니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하다가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속한 곳도 없고, 이제는 정말 친구도 없어서 팟캐스트만 듣는다고 했다. 얘기를 듣는 동안, 호의 바짝 깎은 손톱과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내가 이야기할 차례였다. 일 년간 연애한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여자와 약혼한 사이였다는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 그 사실을 말하면 내 일 년이 정말 그렇게 요약되어 버리는 게 끔찍해서 입을 닫았다. 그냥 연애하지 않은 지 삼 년은 됐다고 말했다. 술을 마신 지 몇 시간 안 돼서 우리가 일하는 환경은 아주 다르지만 (그다지 닮고 싶지 않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둘 다 엿 같은 이혼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 연애에서 늘 속거나 버려진 쪽이라는 것, 관계가 시작되기도 전에 관계의
작성일 2020-07-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3 댓글수 0 조회수 8947상세보기 -
소설 김멜라 - 물질계
[단편소설] 물질계 김멜라 1. 은하수 죽음은 어떤 공간이어서, 계속 걸으면 나오는 길이다. 그러니 찾아오고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론 물리학 논문을 썼다. 이때의 공간이란 현상을 기술하기 위한 언어적 요소일 뿐 동네 카페나 누구네 집 화장실처럼 실제로 들락거리는 장소를 말하는 건 아니었다. 내 이론의 핵심은 특정 물질의 '있음과 없음'은 단지 확률의 차이이며 모든 것이 '있는 동시에 없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물질계의 모든 존재는 얼마 정도 죽어 있는 상태이며 동시에 완전한 죽음은 불가능하다(관찰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러한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갈 만한 배짱과 능력이 없어 나 자신조차 이해하고 있는지 불분명한 어느 독일 과학자의 수식을 인용하는 것으로 논문의 결론을 대신했다. 나의 두 번째 지도교수인 블랙베어는 이렇게 말했다. "20세기 아인슈타인 흉내는 그만 냅시다." 학교 연구실에 러닝머신을 가져다 놓고 내가 갈 때마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던 그는 욕구 불만과 학문적 호기심의 차이, 망상증 환자와 사고실험의 차이를 강조하며 물리학은 정신분석학이 아니고 통계 그래프도 아니며 찢어진 블랙홀로 오가는 시간 여행도 아니라 했다. "달리기예요. 달리세요. 살이 처지면 생각도 처집니다." 블랙베어는 예의를 갖춰 말했다. 그는 남보다 이른 나이에 미국 남부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 지역 물리학회에서 수여하는 '뉴 피지컬 리뷰' 상을 수상한 사람이었다. 곰처럼 덩치가 크고 곰처럼 굵은 흑발에다 곰보다 더 달콤한 것에 환장하는 그를 학생들은 블랙베어라 불렀다. 핑크색 아령을 들고 러닝머신 위를 달리던 블랙베어가 내게 말했다. "파워, 섹시, 유혹은 현실에서 하세요." 블랙베어는 내 논문의 소제목들을 나열하며 이것들이 파워, 섹시, 유혹이란 말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블랙베어는 러닝머신의 경사도를 두 단계 높였고 나는 블랙베어가 입은 비둘기색 팬츠에서 고개를 돌려 책장에 놓인 뉴 피지컬 리뷰 상의 은색 트로피를 바라보았다. 내가 처음으로 '관찰된 작위와 관찰되지 않은 무작위'를 구상한 것은 내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죽음을 뜻하는 한국어 표현의 '돌아가다'와 영어의 'Pass Away'를 언어학적 예시로 든 것은 스물다섯(나의 아버지가 죽은 나이)이었으며 내가 이 논문 때문에 첫 번째 지도교수에게 목이버섯 따귀를 맞은 건 스물아홉(어머니가 두 번째 결혼을 한 나이)이었다. 버섯은 찹쌀탕수육 안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지도교수는 두 병째 마신 중국술로 인해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빙의된 상태였고, 내가 논문의 첫 문장을 고치지 않겠다고 하자 정치국 상무위원은 목이버섯을 들어 올리던 젓가락을 내던졌다. "기본이 안 돼 있어!" 그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인용하며 지도교수를 바꾸든가 내 머리통을 바꾸든가
작성일 2018-12-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8570상세보기 -
소설 젖 · 몸 · 살
젖 · 몸 · 살 신 혜 진 호텔방은 깨끗했다. 침대시트는 손질이 잘 돼 있어 부드러우면서도 상크름하게 찬 기운이 감돌았다. 새로 지은 호텔이 아님에도 워낙 청소 상태가 좋아 방안에는 먼지 한 톨 없을 것처럼, 모든 집기들이 선명하다. 작지 않은 싱글 침대 두 개와 다탁과 의자, TV, 작은 옷장, 소박한 액자 하나가 전부지만 만족스럽다. 창밖으로 눈길을 주면서 나는 손가락 끝의 거스러미를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창문만 열면 뛰어들 듯 가깝게 보이는 바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짭짤하고 눅눅한 바람. 후텁지근하기보다는 오히려 청신하다. 이곳에 올 때는 기왕이면 일본식 료칸(旅館)에 묵기를 바랐지만 봄꽃이 한창일 무렵인 데다 연휴까지 겹쳐 예약을 할 수가 없었다. 이즈(伊豆)는 바다를 볼 수 있는 노천탕으로 유명해 평소에도 온천장에는 정양을 하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이즈의 바다가 눈부시다. 프런트에 내려갔던 동생이 돌아와 당초무늬가 들어간 보라색 챙 모자를 벗어 침대에 던지며 말했다. 아휴, 언니, 더럽게 뭐하는 거야, 오래 살면 부부도 닮는다더니 형부가 하는 버릇을 그대로 하고 있네.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남편이 하던 버릇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남편의 손가락에서 일상적으로 풍기던 침 냄새가 내 손에서 났다. “원하는 입욕 시간을 적어 넣는 건데,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했나봐. 자정 무렵은 돼야 차례가 올 것 같아.” 호텔에 딸린 두 개의 노천탕은 객실마다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각각 다른 모양이었다. 한숨 돌릴 새도 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땀이 차는지, 동생은 손부채를 부치면서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찍어냈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기름한 얼굴이 수척해 보인다. 해산을 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에는 짙은 화장으로도 미처 감추지 못한 기미가 넓게 끼어 있다. 다시 한 번 찬찬히 동생을 톺아보았다. 창을 통해 들어온 저녁 빛에 기미가 평상시보다 더 도드라지고 볼은 한층 우묵하다. 임신 말기에 조산기가 있어 통 외출을 못 해봤다며, 동경을 떠나면서부터 동생은 내내 들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새까맣게 낀 잡티 때문인지 언뜻언뜻 비치는 낯빛이 우울해 보였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동생의 블라우스가 실그러진 채, 앞섶이 둥글게 얼룩져 있는 게 눈에 띠었다. “너, 젖이 새는가보다. 패드 안 하고 왔니?” 고개를 수그려 윗옷을 살펴본 동생이 침대 발치에 던져둔 가방을 뒤적였다. 어떡하지? 유축기를 빼놓고 왔어. 당황한 표정으로 가방 앞지퍼를 열어 새 패드를 꺼낸 후, 쪼그려 앉아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수유용 브래지어의 앞으로 열 수 있는 후크를 따자, 펑 젖은 패드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유방에서 급하게 젖이 뚝뚝 흘러내렸다. 비릿하면서도 들척지근한 젖 냄새가 침대 주위를 떠돈다. 동생의 젖가슴은 풍만했으나 관능적인 느낌보다
작성일 2009-02-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8434상세보기 -
소설 장진영 - 새끼돼지
[단편소설] 새끼돼지 장진영 나는 살면서 호아를 단 한 번 보았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호아는 눈부시게 비참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을회관에서 조촐히 치러진 결혼식이었다. 호아는 더운 나라에서 왔고 나와 같은 나이였다. 배 속에는 하엘이 있었다. 어른들이 나를 새 신부 앞으로 떠밀었을 때 호아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예브다, 예브다, 하고 내 몸을 만지며 탄성을 터뜨렸다. 나는 교복 치마를 움켜쥔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나를 수치스럽게 한 게 호아의 피부색이었는지 어린 나이와 천진난만함이었는지 배 속의 아기였는지 타인에 스스럼없는 태도였는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순철 오빠는 형광에 가까울 정도로 피부가 하얬다. 비만한 체형이 피부색을 더욱 부각시켰다. 사진기사가 노출을 맞추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검은 턱시도를 입은 흰 남자와 흰 드레스를 입은 검은 여자. 둘은 잘 어울렸다. 순철 오빠의 발음이 아내인 호아만큼이나 어눌하다는 것도 하나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나는 순철 오빠가 고모의 아들이라는 걸 그 결혼식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순철 오빠가 고모와 함께 있는 모습을 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내 기억 속 순철 오빠는 누구의 아들이 아니라 그냥 '순철 오빠'였다. 순철 오빠는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많아 보이기도 했다. 고모와 비슷한 연배로 보일 정도였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 자리에서 마주칠 때면 나는 존댓말을 쓰지 않기 위해 항상 말끝을 흐리곤 했었다. 턱과 목 사이에 자리 잡은, 인두에 덴 듯한 흉터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나는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하엘의 성장을 매번 놀라며 확인했다. 나는 첫 조카인 하엘에게 어떤 애틋함도 느끼지 못했다. 나와 무관한 생명체라고 느껴졌다. 피부색은 아빠, 이목구비는 엄마를 닮은 생김새가 이질적이어서였을까.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쑥스러웠는지도 모른다. 부부는 언제나 각자의 이유로 부재중이었다. 호아는 여기저기 마실 다니느라 바빴고 순철 오빠는 전국의 축제와 행사장을 돌아다니며 싸구려 플라스틱 장난감이나 색소가 든 달아빠진 불량식품을 팔았다. 호아는 늘 누군가의 수화기 너머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화사한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순철 오빠는 유순하고 주눅 든 대형견 같은 모습으로 가끔씩 모습을 드러냈다. 호아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는 그 결혼식으로부터 십 년이 더 넘게 지난 시점이었다. 그때 우리 식구들은 이미 고모네 일가와 인연을 끊은 뒤였다. 호아는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베트남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부자의 체류 문제를 알아보러 자기가 먼저 친정에 들를 예정이라고 했다. 호아는 내게 그간 겪은 고초를 토로했다. 우리가 고모네와 절연한 이유와 대부분 일치했다. 고모의 딸이자 순철 오빠의 여동생인 정아 언니는 목회자와 결혼했다. 사촌형부는 가슴이 단단하고 자신만만하고 능글거리고 목청 좋은 사기꾼 스타일의 남자였다. 사촌형부는 시 변두리 논두렁에 좀 뚱딴지같은 교회를 지었다. 정아 언니와 사촌형부는 내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사실상 인질
작성일 2020-0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8250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