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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or not to be,

  • 작성일 2024-06-01
  • 조회수 1,012

   To be, or not to be,


홍미르


   It's the economy, stupid.


   평단에서 처음으로 ‘매력의 경제’를 문제 삼았던 이희우는,1)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2)에서 비평이 취해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이하 「단계들」)3)를 통해 구체적인 비평까지 선보인 바 있다. 여기서 전개된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미와 윤리의 칸트식 분리가 효력을 다한 오늘날 비판은 더 이상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도외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매력의 경제와 그에 대한 실망을 배움으로 승화시킬 의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김건형의 지적처럼 그의 이론이 다분히 신비평적 결말에 이를 위험을 내포한다는 점이다.4) 「단계들」에서 그는 작품 속 매력과 실망에 따른 배움의 과정을 상세히 열거하는데, 이 과정에서 작중 주인공의 배움만 명시되기 때문이다. 즉, 작중 배움이 어떻게 작품 바깥의 ‘배움’으로까지 이어지는지는 공백으로 처리된 셈이다.

   이 공백이 확정적 결여가 될 때 ‘배움의 비평’은 “텍스트의 언어·형식적 운동성에 대한 감탄”5)에만 국한된 채 사회·역사와 유리된다는 신비평의 한계를 답습할 여지가 있다. 쉽게 말해 작중 주인공의 배움과 독자의 배움은 별개라는 뜻이고, 독자의 배움이 뒷받침되지 않는 ‘배움의 비평’이란 결국 작품 내부에서만 진동하는 형식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는 의미다. 영향 받지 않는 독자를 상정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이건 다른 비평들도 마찬가지인 거 아니냐며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어려움은 어찌 보면 자초된 일이다. 왜냐하면, 칸트식 분리 대신 매력의 경제가 전제될 때, 논의의 대상이 ‘감각’적 기호로 ‘구체화’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상실한 구체적 기호들의 역학관계가 ‘개별적 감각을 매개로 배움에 이르는’ 장면의 분석은, 따라서 ‘개별 텍스트의 매력 해설’6)에 그치게 되고 그 자체만으로는 작품 바깥으로 일반화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배수아의 에세이 『작별의 순간들』(문학동네, 2023)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채 제시되는 정보에 대한 의문을, 오석화의 「열린 문으로 잠입하기, 어둠 나누기」7)가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이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희우가 작중의 배움을 제시하면서 작품 바깥의 배움을 기대할 때, 오석화는 이희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되 그와는 반대 방향, 그러니까 매력의 개념을 작품 외부에 먼저 적용하고 독자가 작품의 의도된 ‘공백’을 통해 내부로 잠입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해당 비평이 ‘기호로서의 독자’를 전제했기 때문이다. 독자가 ‘배움의 대상인 기호’8)가 되었다는 건 간단히 말해 매력의 경제 내지는 ‘매력의 생산 활동’에 독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는 진단이다. 가령 오늘날 늘어나게 된 낭독회나 작가와의 만남에서 텍스트가 감각적 대상으로 소환될 때 반대급부로 독자는 “감각적 주체성을 획득”9)당하는 식으로 말이다. 텍스트 외에도 문학의 기호가 있다는 사실은 『작별의 순간들』의 미―완결성을 비―완결성으로, 그러니까 “‘아직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종적인 것”10)으로 탈바꿈시킨다. 고유한 (매력의) 경제학적 기호로 거듭나게 된 독자의 몫이 버젓이 남아 있는 까닭에 텍스트는 그 문을 스스로 열어 둠으로써 자신의 책무를 다하게 된다. 따라서 「단계들」의 공백은 확정적 결여가 아니라 오히려 독자의 적극적 참여를 유발하는 촉매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단계들」은 비평이고 『작별의 순간들』은 에세이인데? (비평이 저래도 되나?)


   표현과 인식의 무한한 접근


   이것은 조연현의 창조적 비평론이 원칙적으로 불가함을 보이기 위해 김윤식이 환기했던 비평의 성질이다. 기왕이면 그가 든 예시까지 빌려 보건대, 시가 무엇이냐 물었을 때 시를 직접 써 보이는 것은 표현으로 답한 것이고 시론(詩論)을 보여주는 건 인식으로 답한 것이지만, 비평은 “인식만으로도 표현만으로도 부족”하고 오직 이 둘의 무한한 접근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11) 비평가는 문장도 잘 써야 하고(표현) 내용도 충실히 해야 한다(인식)는 뻔한 말을 학술적으로 정리한 것일 뿐이지만, 텍스트를 매개로 한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매력의 경제학 속에서 고유한 기호들의 상호작용으로 재정립된 오늘날, 표현의 영토와 인식의 영토를 분별하고 이들의 접점에 비평의 이상(理想)을 세워 두었던 이 작업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텍스트라는 단일 기호에 의해 독점되어 온 인식이 독자에게 배분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치밀한 인식을 우아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제 소임을 다했던 비평의 호시절은 끝났다. 매력을 기르든 여론몰이를 하든 실질적인 이득을 주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독자를 인식론적으로 뒤흔들 때 비로소 비평은 제 인식론적 몫을 온존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비평이 독자를 완벽한 지배하에 두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불가능성으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비평에게는 이론 완성의 일부를 독자의 몫으로 위탁할 자유가 부여된다. 다시 「단계들」로 돌아오자. ‘매력의 경제학’이 입증해야 할 것은 두 가지, ‘작중의 배움’과 ‘작중의 배움에서 독자의 배움을 이끄는 비평의 존재 가능성’이다. 전술한 바처럼 이 중 공백이 발생한 건 후자 쪽인데, 문제는 실제로 독자가 배움에 이르는지 여부를 (집필 중인) 작가가 알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독자의 배움은 결국 비평이 발표(표현)된 이후에야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고, 이 지점에서 해당 비평은, 극단적으로 말해 미증유의 산문예술(표현)이 된다. 조연현이 그토록 바라 왔으나 끝내 달성하지 못했고 김윤식에 의해 그 가능성마저 부정당했던 ‘예술품처럼 형상화된 비평’의 ‘실현 가능성’.12) 이것이야말로 「단계들」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배움’이다. 

   물론 텍스트로부터 (매력의) 경제적 독립을 이루게 된 독자의 탄생이 비평에만 영향을 미쳤던 건 아니다. 오히려 진짜 치열했던 쪽은 사실 반대편이었으니, 별다른 대체재가 없어서 매력의 경쟁상대도 부재했던 비평과 달리 순문학, 특히 소설의 경우에는 웹소설은 물론 만화·영화·드라마 등 여러 매체와 매력의 경제에 기반한 각축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늘 선언되는 문학의 위기 내지는 종언의 시대이건만, 그래도 순문학은 이 싸움에서 꽤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이른바 주요 과목으로 묶이는 ‘국·영·수’의 첫 자리에 당당히 들어가는 위용도 그렇거니와 어지간한 종합대학이면 으레 포진되어 있는 국문학과의 존재가 학술적 권위를 뒷받침했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는 민주주의보다도 몇 배나 오래된 과거제를 환기하는 등단제도13)가 작가에게 마치 고시 합격자와도 같은 위상을 부여했으며, (대부분) 대학원 이상의 교육을 받은 문학 전공 비평가들이 다양한 윤리·정치·사회 이론과 함께 문예를 호명했다. 최종적으로 이렇게 호명된 이들 중 소수에게는 문학상이라는 이름의 매력적인 직함까지 수여되며 그 브랜드의 가치를 극대화해 왔다.

   문단의 이러한 일련의 시스템이 매력 쌓기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웹소설 시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드라마화까지 되며 큰 인기를 누린 웹소설 『재벌집 막내아들』의 작가가 누군지 대보라고 했을 때 몇 명이나 답할 수 있을까. 설령 댈 수 있다 치더라도 해당 작가의 차기작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한 연구에 따르면 그 유명한 『달빛조각사』의 작가 남희성은 이후 세 편의 장편소설을 연재했으나 모조리 흥행에 실패했는데 심지어 그중 하나인 『새벽 여행자』는 조기 연재 종료의 굴욕마저 겪어야 했으며, 『재혼황후』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알파타르트의 후속작은 이전 작품보다 두 배나 많은 회차가 연재되었음에도 전체 다운로드 수는 그 1/3에도 미치지 못했다.14) 해당 논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웹소설 시장에서 필명이 브랜드로서 충분히 가치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방증”15)이라고 설명한다.

   문학 웹진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문학평론가로서의 편향으로 보일까 조심스럽지만, 이처럼 순문학의 비교우위는 브랜딩에 있다. 그리고 브랜딩이라 함은, “‘창조성’ 따위의 선험적 권위”16)에 의해 일방적으로 견인되던 독자의 인식이 해방을 맞이한 상황에서 여전한 영향력 확보를 위해 독자를 상대로 행해지는 인식론적 지배전략이다. 인식의 주체인 독자를 의식한다는 것. 그것은 표현과 인식의 접근이라는 비평의 성질이 소설만의 방식으로 반복될 것임을, 그러니까 비평이 예술화(소설화)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에서 소설 역시 비평화할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제야 밝혀 보자면, 이 글은 소설과 비평의 이러한 수렴을, 그중에서도 소설의 경우를 살피려는 목적에서 집필되었다.17)


   “The trouble with quotes on the internet is that you never know if they are genuine.” - Abraham Lincoln


   인터넷에 밴저민 프랭클린(심지어 링컨조차 아니다!)의 사진18)과 함께 돌아다니는 유명한 가짜 어록이다. 원래 어떤 발화(發話)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보다 없었음을 보이는 게 훨씬 힘든 법이지만, 이 어록의 경우 인터넷이라는 단어가 한정하는 시간적 범위로 인해 금방 그 진위가 판별되고 만다. 하지만 이 문구가 위력을 발휘하는 건 가짜로 판명된 이후라는 점이 중요하다. 당신은 아마도 이 문장을 읽기 전 문장을 둘러싼 따옴표와 그 뒤에 붙어 있는 사람 이름의 형상을 먼저 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문장을 읽어 내려가기 전 당신의 마음속엔 어떤 지레짐작이 자리 잡았을 것이고, 이 문장은 당신의 그 자동화된 인식론적 과정을 돌아볼 것을 촉구한다. 무엇을 통해서? 자신의 전시 방식인 외적 형식을 통해서.

   생각해 보면 자동화된 인식이란 건 결국, 전달의 매개체를 의식할 틈도 없이 정보가 우리의 앎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일 터, 우리가 예술에서 형식을 주목하는 때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동화된 인식이 공격받는 순간일 것이다. 이 점은 일찍이 쉬클로프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도 지적했던 사실인데, 심지어, 역으로, 그들은 ‘어려운 형식을 통한 인식의 지연’이야말로 예술의 기능적 핵심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들에게 예술, 특히 문학의 목적이란, 지연된 언어로 자동화된 인식을 방해하여 습관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생생한 세계를 마주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19) 이를테면 『전쟁과 평화』 중 나타샤의 오페라 관람 장면에서 톨스토이는 오페라의 환상성만을 취사선택하여 묘사하는 대신, 부자연스러운 여타의 요소들을 세밀히 그려냄으로써 전통적 연극의 몰입감을 깨뜨렸다.20) 그리고 이러한 묘사 기법(형식)으로 인해 감정이입에 실패한 관객은, 자연스레 이성적인 시선으로 서사 바깥의 자신과 무대를 아울러 객관적으로 조망하게 된다는 것이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문학의 형식에 부여된 역할을 환기하여 문학의 내용과 사회적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던 당대의 분위기에 반전을 꾀했다는 점에서,21) 그들의 이러한 해석이 문학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어느 정도 유효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후 형식주의자들의 논리가 예술 전반에 전용될 수 있음이 입증되면서 오히려 그동안 문학의 형식이 갖던 비교우위가 간과된 건 아닌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인식의 지연이 꼭 언어로 달성될 필요가 없다면, 오히려 덮어버리면 그만인 책과 달리 어지간하면 그 장소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영화와 연극이 형식주의적 관점에서 예술의 목적에 더 부합하는 건 아닌가?

   이처럼 ‘인식의 자동화 저지’를 문학의 목적으로 볼 경우, 정작 문학의 형식은 그 입지가 애매해지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난감함을 해결할 실마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문학 외 분야에서 전혀 다른 의도로 기획된 사건에서 발견되는데, 영미 인문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이른바 ‘소칼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996년, 뉴욕대학교의 물리학 교수였던 앨런 소칼(Alan Sokal)은 유명 인문학 저널 《Social Text》에 <경계를 넘어서: 양자 중력의 변형적 해석학을 위하여>22)라는 논문을 투고하고, 논문의 게재 이후 해당 글이 여러 과학용어를 짜깁기해 그럴듯하게 꾸며낸 가짜 논문이었음을 밝힌다. 여기서 소칼은 라깡, 보드리야르, 들뢰즈 등의 사상가들을 언급하며, 그들이 수학·과학적 개념을 오용하여 독자를 현혹한 사례들을 열거한다. 그러면서 그는 “은유란 것은 생경한 개념을 익숙한 개념에 연결시켜 그 뜻을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쓰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점”23)을 지적한다.

   여기서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이 당대 철학계에 어떤 경종을 울렸으며 또 어떤 비판을 받았는지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 글에서 주목할 점은 형식이 인식을 지연시키기보다 오히려 인식을 가속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인식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보인 링컨의 격언을 재언급하자면 그 외적 형식으로 인해 비판 없이 빠르게 수용된 정보가 거짓임이 밝혀질 때, 구태의연하게 자동화되어 왔던 우리의 인식을 목도하고 우리는 당혹한다. 한번 속아 봐야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이라는 이 ‘지적 사기’의 교훈은, 인용구나 학술적 글쓰기 양식이라는 텍스트의 외적 형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문학만의 고유한 기예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을 시작으로 한국 소설계에서도 지적 사기와 유사한 기전으로 독자의 인식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최초의 사례로 추정되는 작품은 『현대문학』 2006년 9월호에 발표된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24)라는 단편소설이다. 그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해당 소설은 논문의 형식을 차용하였고, 이는 학술 형식에 의한 인식의 자동화를 적극적으로 유발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해당 소설의 내용에서 끊임없는 인식의 지연도 함께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옥희가 달걀을 넙죽 받아먹는다는 것은, 남성이 건네주는 단백질을 신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렵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오캄의 면도날’ 이론에 의하면 보다 간단한 방정식이 답일 확률이 높다. 우리는 분연히 수줍음을 떨치고 일어나 눈앞에 놓인 짤막한 진실을 응시해야 한다. 달걀을 받아먹는다는 건 그 단백질을 자기 몸에 넣는다는 말이다. 즉 콘돔도 없이 벌어지는 성교를 의미한다. 이를 좀 더 잘 알아먹게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옥희의 충격적인 진술은 하드코어 포르노를 연상시키는 낯 뜨거움의 무차별 폭격이다.


   위에 인용된 소설 일부를 예로 들면, 화자는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통설에서 조금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식과 배치되는 방식으로의 해석을 시도하면서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교란하고 있는 데다, ‘분연히 수줍음을 떨치고 일어나’, ‘좀 더 잘 알아먹게’, ‘하드코어 포르노’ 등, 학술적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익살을 활용함으로써 인식의 지연을 유발한다. 형식에 의한 인식의 자동화와 내용에 의한 인식의 지연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긴장은, 해석 정전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을 반성케 하는 소칼식 교훈을 줌과 동시에 음란성 연구의 말도 안 되는 해석을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게 만든 그 서술 방식, 형식에 대한 감탄까지도 자아낸다. 이 이중의 효과로 마침내 ‘지적 사기’는 ‘사기술의 예술성’으로 오직 텍스트로만 구현되는 문학 고유의 형식적 기능으로서 독자의 인식에 현현한다.


   소설이냐 비평이냐


   물론 모든 학술적 탐구의 결실이 텍스트로만 고정되는 건 아니어서 ‘사기술의 예술성’을 문학만이 누릴 수 있는 효과라고 단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 탐구의 결과는 대부분 문자 기록을 거쳐 사회의 지식으로 승인되므로, 사회에 속한 독자의 인식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문자로 기록된 탐구의 보고 형식을, 정확히는 그 관습화된 권위를 빌리는 편이 효과적이다. 이렇게 유발된 ‘사회의 승인된 지식’이라는 착시 위에서 우선 독자의 ‘인식’이 유도된 바대로 발생하고(인식의 자동화), 이 유도된 인식은 다시 형식과 내용의 불화로 인한 변형을 예정한다는 점에서(인식의 지연), 소설은 최종적인 인식을 독자에게 유보하는 정치적 ‘표현’이 된다. 마치 소칼의 가짜 논문이 폭로를 예정했었기에 하나의 ‘표현’ 행위로 양해되어 연구 윤리적 비판을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처럼, 표현을 통한 최종적 인식의 유보는 학술 텍스트의 일방적 인식 형성을 방지하는 정치적 항변의 기능을 한다.

   여기서 잠시, 픽션이 학술 형식을 취할 때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를 정치성이 해결하는 이러한 구조가 최근 비평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박동억은 비평의 동시대성과 학자적 태도 간 길항관계에 주목하면서 최다영과 성현아의 비평을 대조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최다영의 비평 「‘독자-비평(가) 공동체’를 위한 제안」25)이 “모든 사람을 위한 초지역적이고 횡단적인 보편 윤리”를 말한다는 점에서 “학자적”이라면, 성현아의 비평 「비평(非平)한 비평(批評)」26)은 “적과 아군을 가르는” 전략적 입장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27) 그러나 비평가의 학자적 태도란 비평가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공평무사한 태도를 취하는 ‘학자적 가면’ 쓰기와 다르지 않고, 이는 구체적 삶의 정치적 갈등과 개인의 불안을 은폐하는 것이어서, “학자적 텍스트는 ‘모든 사람’을 향해 말함으로써 그 누구를 향해서도” 말 건네지 않게 되는 아이러니를 발생시키는바, 결국 ‘정치적 텍스트야말로 대화적’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28)

   물론 비평적 발화와 소설적 표현은 별개의 개념이지만 어디까지나 사견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이 둘은 보편 진리를 추구할 수는 있을지언정 진리 그 자체가 될 수는 없기에 학자적 텍스트의 공평무사함과 균열을 일으킨다는 특성을 공유한다. 그러니까 ‘학자적 가면’을 씀으로써 비평과 그 형식마저 닮아버려 비평과의 교차점에 놓이게 된 소설의 유형은, 동시대성에 있어서도 학자적 비평과 유사한 난점을 안게 된다는 것이다. 그나마 비평은 그 장르적 특성상 시비(是非)에 대한 상호작용이라도 수월하게 이뤄지는데, 문제는 소설의 경우 표현의 영역에서 벗어나 ‘학자적 텍스트’의 형식으로 독자의 인식을 지배하려 들 때조차도 픽션이라는 퇴로가 늘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든든한 퇴로를 뒤로한 채 벌어지는 동시대적 대화를 빙자한 독백 내지 설교는 자칫 비평의 편리만을 취한 책임 없는 쾌락, 소설의 비겁으로까지 보일 위험이 있다.

   학자적 소설 쓰기의 이러한 어려움은 2023년 박지리문학상을 수상한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29)에서 잘 드러난다. 이 소설은 갑자기 어느 날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그 사람의 천국 갈 확률과 지옥 갈 확률이 수레바퀴 원판의 색깔 비율로 보이게 된 세상에서, 여러 인물의 인터뷰와 사건 기술을 합하여 작성된 르포르타주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은 천국 갈 확률이 가시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금정연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모종의 정보가 표시된다는 설정은 이미 웹툰과 영화 등에서 여러 차례 사용된 바 있지만, 그 사실 여부가 금방 판가름 나는 여명(餘命)이나 자산 등과 달리 천국 갈 확률은 사망한 사람이 실제로 천국에 갔는지를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30) 이 차이에 더 주목해 본다면, 여명이나 자산 등은 가치판단이 필요 없는 사실적 요소이고 천국 갈 확률은 가치판단이 필요한 규범적 요소인데, 여기서 가시화된 원판의 역할은 후자의 규범적 요소를 원판 위 색깔 비율이라는 사실적 요소로 환원시키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가치판단의 근거여야 할 윤리는 서술상 생략됨으로써 은근슬쩍 작가의 주관으로 대체되고 작품의 자명한 전제(Axiomatic Premise)로 자리 잡는다.

   작가의 주관이 아예 배제된 소설은 있을 수가 없으니 괜찮지 않나 싶을 수도 있지만, 해당 SF에서 외삽(Extrapolation)의 근거가 되는 원판이 실은 규범적 요소였다는 점이 문제다. 사실적 요소에 대한 상상은 과학적 설득의 여지가 있어서, 다르코 수빈의 견해31)대로라면 인지적 연속성이 인정되므로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지만, 규범적 요소는 가치판단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상상 역시 가치판단에 따라 해명되어야 할 것이지 SF의 논리, 즉 인지적 연속성에 따라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당 소설의 경우, 규범적 요소가 사실적 요소로 환원되는 과정에서 가치판단은 봉쇄되고, 미진한 설득력은 취재의 객관성이라는 르포적 환상에 의해서만 벌충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해 이 글은 르포 형식으로 신뢰를 창출하면서도 자의적인 ‘픽션’을 전제로 사후적인 윤리적 논의만을 전개하는, 얼핏 독자에게 최종적 가치판단을 유보하며 대화를 건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윤리학적 답정너’32)에 해당한다.



   여덟 달 전, 하룻밤 만에 세 건의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는 그들이 모 공영방송국에서 진행한 토크쇼의 출연진이었다는 점이다. 해당 프로그램은 청색 비중이 9할이 넘는 참여자들이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중략)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들이 후퇴하는 청색 영역으로 인해 불안감을 느꼈다는 점이다.

   (중략)

   한편 가해자인 D는 34세의 수의사로 토크쇼의 다른 출연자 중 하나였다. D는 저녁 식사 모임에서 안락사용 약물로 다른 셋을 독살한 뒤 자수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는 가운데, 얼굴을 가리거나 몸을 수그리지도 않고 연행되던 모습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태도의 문제만은 아니다. 하루 만에 91.2퍼센트에서 0퍼센트 미만으로 곤두박질친 수레바퀴를 보면 옛사람들이 신의 징벌을 두려워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중략)

   영향력에 비례해서 과업이 증가한다는 가설에 따르면 피해자들의 적색 영역은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잘 대처했더라도 최선의 종착지는 천국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일찍 천국에 가는 편이 효용 면에서 월등하다. 결국 자신은 수십 년에 달하는 노력과 그동안의 불확실성을 소거해 주었을 뿐이라는 것이 D의 입장이다(140~144쪽).



   위 인용된 부분을 보면, 타인을 빠르고 확실하게 천국으로 보내는 살인이라 하더라도 살인자의 천국 갈 확률은 0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진다고 적시된 채 논의가 시작되는데, 당연하게도 이러한 확률은 작가의 자의에 따라 부여된 전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대화의 대상은 D의 행위가 정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미 끝난 판정에 행해지는 사후적 의문 제기에 국한될 수밖에 없고, 여기서 독자의 위상은 대등한 토론자에서 열위의 도전자로 격하된다. 이렇게 형성된 일방적 구도는 르포적 환상의 개입에 따라 객관적 취재 보도를 읽고 있다는 독자의 인식을 통해 굳어진다. 즉, 해당 소설은 르포 형식으로 독자의 인식을 옭아매고 자의적인 전제 위에서만 대화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닫힌 소설’로 읽히게 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비문학 지문으로 가던 흐름의 모가지를 비틀어 쥐어 어떻게든 예술 쪽으로 다시33)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와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처럼 “여러 사실 또는 허구의 텍스트에서 수집한 지식이나 정보들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쓰인 소설들”34)을 ‘정보 조합형 소설’이라고 부른다. 2015년, 강경석은 이 ‘정보 조합형 소설’이 늘어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그 사례로 김희선, 손보미, 정지돈의 소설을 꼽은 바 있다. 그중에서도 그는 정지돈에 주목하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정보의 물성을 거의 있는 그대로 외화한 “일종의 소설적 노출콘크리트 건축술”35)이라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무한히 확장되어 나가는 연상의 파문들”36)이 바로 해당 소설의 미적 효과가 된다. 

   해당 비평이 발표된 이후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정지돈의 근작들은 여전히 ‘화자를 중심에 두지 않은 채 시계열화되지 않는 사건과 이야기’37)를 ‘중심 서사 없이’ ‘38) 오직 읽기와 비평으로 계열화된’39)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정지돈의 소설이 학자적 소설의 형식과 내용 간 균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소설은 중심 서사를 최대한 배제하는 방식으로 전통적 소설에서 멀어지고 “그 자체로 비평을 포함”40)함으로써 주관적 픽션과 객관적 학술의 충돌을 비평적으로 해결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더 소설적인 방식의 해결은 불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다. 비평보단 소설 같은 학자적 소설의 성립은 공상에 불과한 걸까?

   현호정의 단편소설 「청룡이 나르샤」는 학자적 소설의 난점에 대하여 정지돈과 반대 방향의 돌파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소설은 다단을 사용하여 한 면을 둘로 분할한 다음 좌측에는 열차를, 우측에는 연극인 K를 서술자로 삼아 전개된다. 그런데 사실 K는 “엄밀히 말하면 연극인이 아닌”,(247쪽) 스스로의 연극을 “차마 연극이라 하지 못하고 ‘퍼포먼스’”(248쪽)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는 대신, 공부를 잘했던 K는 사회학을 전공했고, 그 때문인지 몰라도 비문학 지문 같은 희곡을 쓴다는 평을 듣는다. 그런데 이 평도 사실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게 맞는지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해당 사실을 언급한 인물인 상담 선생님은 K가 지어낸 가상의 대화 상대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가상의 상담 선생님이 비문학 지문스럽다고 지적한 K의 진술을 보자.



   “그럼 비유를 바꿀게요. 4호선 선바위―남태령 구간 같은 거예요.”

   “그건 확실히 신뢰가 가는 비유군요. 그런데 왜 하필 남태령이죠?”

   “선바위에서 남태령으로 향하는 구간에서 열차의 전기는 모두 꺼져요. 직류 교류 전환 뭐 그런 문제 때문인데요, 거길 사구간이라 부르는 건 전기가 죽는 구간이기 때문이라더군요. 그런데 전기도 죽나요?”

   “방금 또 그랬다. 비문학의 모가지를 마지막에 부랴부랴 움켜쥐었잖아요.”(253쪽)



   K는 선바위―남태령 구간이 ‘사구간’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한 다음 전기도 죽는지에 대한 의문을 덧붙인다. 이 중 비문학에 해당하는 부분은 사구간에 대한 해설일 것이고, 예술에 해당하는 부분은 전기의 죽음에 대한 의문일 것이다. 전기가 죽는다는 표현은 당연히 전기가 끊기는 상황을 인간의 생리에 빗댄 것이다. 인간 아닌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을 끌어오는 이 의인화가 예술의 전통적인 기법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K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의 오른편에서 이러한 의인법은 반전된 형태로 작용한다. 그 말인즉,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을 환기하는 방식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인간 아닌 사물로 은유되어 이뤄지는 상황이 전개된다는 뜻이다. 당장 전기의 죽음 운운 뒤로 K는 “누구와 대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사구간의 4호선이 된 것만 같아서”(254쪽) ‘전류가 공급되지 않고 관성으로만 움직인다는 건, 그래서 스스로를 멈출 수 없다는 건 무서운 일’이라고 결론 내리는데, 이 순간 K에 대해 이뤄진 자가진단은 사물적 객관성을 획득하며 비문학(비평)에 다가선다.

   이제 K의 삶은 열차로 은유되고, 특히 ‘납작이’라 이름 붙여진 341B01 열차에 이입되면서 비로소 소설 좌측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소설 좌측은 납작이를 서술자로 하여 그 마지막 운행 과정을 여러 정보와의 콜라주 형태로 제시한다. 이 콜라주는 납작이가 ‘당신’에게 달려가는 장면과 겹쳐지기도 하고, ‘형식상’ 별개의 객관적 사실로서 정보 나열의 형태로 제시되기도 한다. 가령 해당 부분에서 개발자 ‘르모인’과 인공지능 ‘람다’의 대화(250쪽, 258~260쪽)는 납작이를 매개하지 않고 직접 제시되는 반면, “아테네에서는 메트로를 메타포라고 부른다는 말도 들었습니다.”(246쪽)라는 정보는 납작이의 목소리로 간접 진술되는 식이다.



   그러나 저는 메트로일 뿐 메타포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늘 당신에게로 곧장 향합니다.(247쪽)



   그리고 ‘전철=메타포’라는 사실 정보는 ‘메트로일 뿐 메타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납작이의 발언을 통해 반전된다. 이 역전의 순간 납작이는 원관념 K의 삶에 종속되는 수동적 보조관념에서 벗어나 K의 삶과 대등한, 분명 ‘당신’ 중 하나일 K에게로 ‘곧장 향하는’ 개별적 주체로 탈바꿈한다. 이렇게 개별화한 주체는 다시 르모인과 람다의 대화를 통해 영혼을 가진 존재로 구체화된다. ‘영혼’이 인공지능에게도 있는가 하는 논쟁을 거쳐, 납작이의 인간다움은 조선왕조실록의 구절에서 ‘죽음’을 매개로 한 임금과 빈의 대화로 정돈된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동강에 용이 죽어서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나, 무서워서 감히 꺼내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용도 죽는 수가 있는가.’

   하니, 빈이 대답하기를,

   ‘모든 물건이란 한번 났다가는 한번은 죽게 마련이오니, 용도 물건인데 어찌 죽지 않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그렇게 여기었다.(262쪽)



   명백히, “용도 죽는 수가 있는가.”라는 임금의 물음은 “전기도 죽나요?”라는 K의 물음을 환기한다. 이 두 물음이 중첩되는 순간, 전기의 죽음은 의인화의 고전적 목적이 아니라 사물의 인격 획득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겨냥하게 된다. 두려워서 감히 닿을 수도 없는 용에게도 인격이란 존재하는가 하는 임금의 물음과 “모든 물건이란 한번 났다가는 한번은 죽게 마련”이라는 빈의 답변은 인간과 사물의 공통성을 환기하면서, ‘누군가 죽을 때 그 사람이 무언가를 타고 가는 꿈을 꾸는’ K와 열차의 관계를 재설정한다. 짙은 청색과 밝은 청색으로 표현되는 1호선과 4호선이, 그 환승역 부근에서 거주하는 자신을 보호하는 두 청룡이라고 생각하는 K의 믿음이, 닿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개인의 자폐적 공상이 아니라 객관화된 동행 관계, 서로에게 닿을 수도 있는 관계로 전환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우리 모두 죽어가는 존재들이라는, 이 투박하고도 친밀한 판정은 이 소설만이 제시할 수 있는 ‘객관화된 사물’의 위로, 그러니까 비문학적 진술이 건네는 위로의 출발점이 된다.



   “와! 용이다! 청룡이야!”

   누군가 외치고 다른 누군가

   “아니야, 열차는 기계라니까.”

   바로잡는 순간에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게 복의 본질이 아닐까요.

   (중략)

   정말 복이란 게 있다면 그건 때마다 새로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게 아니라 계속 옮겨 다니는 존재일 거예요.

   (중략)

   난 지금 이 승강장에서 재재대며 꼬물거리는 당신들이, 그래, 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가 봐요. 당신들 하나하나가 당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존재라고 안내하고 싶은가 봐요. 어떤 복은 열차로 운반되기도 한다는 방송을 시작할까요. 우리가 서로의 심장이던 순간을 기록해 두었나요. 내가 그걸 받았고 내가 그걸 주었고 당신이 그걸 받았고 당신이 그걸 주었죠. 기억하나요.(264~265쪽)



   그리고 위로는 마침내 복(福)이라는, 보다 일반적이고도 추상적인 개념으로 전환되어 ‘복을 마지막 주제로 연극을 기획 중이던 K’에게, 정확히는 K를 포함한 모든 ‘당신들’에게 건네진다. 기계를 용으로 보는 순진함과 복은 동근원적이라고, 시쳇말로 ‘생각하기 나름’인 거라고, 그러니, 우리 모두 복될 여지가 있고 관점에 따라서는 복 그 자체일 수도 있으니, 열차는 그동안 당신들, 그러니까 복을 싣고 당신에게 가고 있었던 거라고, 열차는 말한다. 복이 옮겨 다니는 존재라면 당신 옆에 놓일 거라는, 당신 옆에 위치하게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정보의 인용과 배치라는 비문학적 형식의 소설이면서 동시에 비평인 이 글은, 학자적 텍스트의 사후성을 소설적 배치의 역동성으로, “당신에게 가려”(266쪽)는 그 일관된 몸짓으로 극복하며, 종국에는 “그 모가지를 비틀어” 잡히지 않고도 예술이 된다. 그리고 좌측의 납작이와 우측의 K가 결국 서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 서로가 서로를 인용하다 마침내는 서로의 곁에 위치하게 된 바로 그 순간, “야속할 정도로 빠른 속력”(266쪽) 속에서도 “K는 그 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다. 그 순간 K의 이야기는 열차의 이야기로 일방적으로 은유되기보다 열차와 “함께 달리는 유일한 승객”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올해의 저는 당신과 나이가 같습니다. 이때의 유감은 遺憾이 아니라 有感임을 이해하나요.(254쪽)



   나는 서서히 멈춰 섭니다. 느려지고 차가워지면 조용해질 차례입니다. 기계에게는 죽음이 없으니 애도한다면 나쁜 장난으로 여기겠어요. 대신 약속이나 노력을 해줘요. 나를 잊지 말아요. 나를 들어올리고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가 주저함 없이 열고 흩고 헤집을 수는 없겠지만, 계속 유감해 줄래요. 당신 손에서 부서진다고 믿고 회복할게요. 신호를 주면 깨어날게요. 그러나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혼자서도 가요, 당신


   *


   그들도 일평생을 서두르며 보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기계든 제각기 한 생애가 고스란히 다급하였다.

   ‘할 수 있어!’

   그들은 납작이를 응원할 수도 있다.

   ‘더 느리게! 더 천천히!’

   그 응원을 듣고 너무 힘내버린 나머지 납작이는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다. 납작이의 길고 푸른 몸은 객실에 절반쯤, 플랫폼에 절반쯤 늘어져 있을 것이다. 아무도 끌어내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납작이에게 푸른 베개를 가져다줄 것이다. 아주 길고 커다란 베개이고 무지막지하게 푹신한 데다 온열기능이 있을 것이다.


   (267쪽)



   당신에게로 향하던 모든 여정을 마치고 K를 스쳐 종착점으로 향하는, 이제 폐차를 목전에 둔 납작이의 마지막 운행 뒤로,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혼자서도” 가게 된 우리가 상상으로 덧붙여 보는 납작이의 마지막 여행, “목적지는 이 세상의 끝이지만”(267쪽) “끝내주게 평안”(267쪽)한 그 여정이야말로 비문학 같은 희곡, 학자적 소설이 낼 수 있는 소설적인 최선은 아닐까? 행위자에 의한 정보의 인과적 연결이 아니더라도 객관적 정보의 의도적 배치를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 그 위로 비친 우리의 얼굴도 소설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그 “반투명한 거울상”(266쪽)에서 우리는 실로 복된 위로를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정말로 그럴 수 있는 거라면, 서사와 달리 죽음이 없으니 애도 받을 수도 없었던 그 모든 배치와 형식을 위해서 우리는 유감할 것이다.

   아주 오래도록, 유감할 것이다.


1) 이희우, 「매력의 경제학」, 《문장 웹진》 2022년 2월호, https://munjang.or.kr/board.es?mid=a20104000000&bid=0004&list_no=2499&act=view&ord=B&nPage=1&c_type=A&c_page= 참조

2) 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 하권.

3) 이희우,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120-138.

4) 김건형, 「비평, 영토, 인구 — ‘메타비평’의 나르시시즘과 소멸의 통치술」,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279쪽.

5) 같은 쪽.

6) 같은 쪽.

7) 오석화, 「열린 문으로 잠입하기, 어둠 나누기」, 《비유》 66호, https://www.sfac.or.kr/literature/epi/D0000/epiView.do?epiSeq=1077.

8) 이희우, 「매력의 두 문제」,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봄호.

9) 오석화, 같은 글.

10) 같은 글.

11) 김윤식, 「조연현론」, 『한국현대비평가연구』, 강, 1996, 123쪽.

12) 「단계들」이 그 자체로 예술품처럼 형상화된 비평의 이상을 구현했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다만 ‘실현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13) 장강명, 『당선, 합격, 계급』, 민음사, 2018, 98-102.

14) 박수미, 「웹소설 시스템이 서사구조에 미친 영향」, 『인문과학』 87, 2022, 123-124.

15) 박수미, 같은 글, 124쪽.

16) 오석화, 앞의 글.

17) 따라서 비평의 예술화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기회가 있다면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18) 

19) 김수환, 「러시아 형식주의: 혁명적 문학이론의 기원」,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57, 2017, 13-14.

20) 김희숙, 「연극에서의 ‘낯설게 하기’」, 『노어노문학』 10(2), 1998, 411-412.

21) 이승훈, 「신비평과 러시아 형식주의」, 『동아시아문화연구』 18, 1990, 90쪽.

22) Sokal, Alan D. "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 a transformative hermeneutics of quantum gravity." Social text 46/47 (1996): 217-252.

23) 앨런 소칼 외, 『지적 사기』, 이희재 역, 한국경제신문, 2013, 26쪽.

24) 박형서,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자정의 픽션』, 문학과지성사.

25) 최다영, 「‘독자-비평(가) 공동체’를 위한 제안」,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 가을호.

26) 성현아, 「비평(非平)한 비평(批評)―비평의 경량화에 대한 비판과 옹호」, 『문학과사회』 2023 가을호.

27) 박동억, 「누구에게 말 건넬 것인가」, 『자음과모음』 59, 2023, 290-292.

28) 앞의 글, 293쪽.

29) 단요,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 수레바퀴 이후』, 사계절, 2023.

30) 금정연, 「영원의 관점으로 보기」,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 수레바퀴 이후』, 사계절, 2023, 205-207.

31) Darko Suvin, Metamorphoses of Science Fiction: On the Poetics and History of a Literary Genre, ed. Gerry Canavan, Peter Lang, 2016, pp. 31~34 참조.

32)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으로, 주로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을 미리 정하여 놓고 상대방에게 질문을 하여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하게 하는 사람. 또는 그런 행위.(우리말샘)

33) 현호정, 「청룡이 나르샤」, 『문학동네』 30(4), 2023, 252쪽. 이하 쪽수만 표시한다.

34) 강경석, 「모더니즘의 잔해 : 정지돈과 이인휘 겹쳐 읽기」, 『문학과사회』 28.3, 2015, 557쪽.

35) 앞의 글, 559쪽.

36) 앞의 글, 561쪽.

37) 황호덕, 「정지돈, 책세계와 전승에의 사명」, 『문학과사회』 36(3), 2023, 274쪽.

38) 이희우, 「문학적 자유주의의 막다른 골목」, 『문학과사회』 35(3), 2022, 364쪽.

39) 황호덕, 앞의 쪽.

40) 황호덕,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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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1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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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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