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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예술’, 전통, 세계화

  • 작성일 2024-12-01
  • 조회수 473

   ‘K-예술’, 전통, 세계화

   - 88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공연계 문화교류 담론에 대한 단상


전지니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Visiting Scholar) 


1. 88 서울올림픽과 문화 세계화


   최근 국립극장 전속 단체인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겸 단장 유은선)이 제작한 <리어>가 영국 바비컨센터에서 관객과 관계자의 호평 속에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무리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을 한국적으로 각색한 해당 작품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주영국한국문화원이 주관한 제11회 ‘K-뮤직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공연되었다.1) 주지하다시피 K-POP 및 K-드라마의 전세계적인 흥행은 K-콘텐츠의 세계화라는 화두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또한 맨부커상에 이은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번역의 난관을 가로질러 국내 소설이 다른 언어권의 독자와 어떻게 호흡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창극 <리어>의 성공과 관련하여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이라는 화두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논의될 수 있을까.

   이 글은 K-공연예술의 세계화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대신, 그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된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의 공연계 상황에 대해 논한다.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이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1950년대, 곧 전후 이미 세계 진출의 방향성을 논의하던 영화계와는 달리2), 공연계에서 세계 시장과 평단을 바라보게 된 시점은 1980년대 중후반이었다. 관련하여 1989년 한 언론에는 “한국문화 세계에 심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이 기사는 한국문화의 세계화 전략에 대해 논하며 전통예술의 해외 나들이가 활발해지고 있고, 특히 올림픽을 전후하여 헝가리, 동독 등 공산권 공연이 활발해지고 있음을 언급한다.3)

   그렇다면 당시 ‘우리’ 공연의 세계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시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 산하 단체인 국립극장이 목표하고자 했던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 및 세계화의 방향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이 글은 냉전체제의 종식과 동구권 문호 개방이라는 당대의 화두와 관련해 공연예술의 세계화라는 목표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지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국립극장이 발행하는 정기간행물(당대 제호 《국립극장 소식》) 및 언론 기사를 통해 전통을 내세운 관 주도 문화교류의 명암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2.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지구촌 문화 축제’


   언급한 것처럼 정부 차원에서 국내 공연의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권장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당시 LA올림픽(1984)와 서울아시안게임(1986)을 거쳐 서울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국립극장은 물론 지자체와 민간 극단이 국제 협력과 문화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전통 공연의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1980년대 중후반 공연계의 화두는 ‘문화올림픽’과 ‘세계화’로 요약되는데, 정부는 연이은 국제 행사를 앞두고 “국민의 문화적 저력을 전 세계에 보여 주는 민족문화의 대제전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문화올림픽 종합계획을 수립”하였다.4) 1983년 문공부는 1986년, 88년에 내보일 63개 문화올림픽 행사 계획을 발표했으며, 문예진흥원은 이를 위한 창작 예술작품 공모를 진행했다. 개별 작품의 문제점 및 졸속 행사의 우려도 있었으나5) 정부는 일관되게 사업을 계속하고자 했다. 문화공보부의 경우 1987년도부터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린다는 목적으로 전통예술단의 해외 파견 사업을 이어 갔으며, 국립극장 산하 단체인 국립무용단이 중남미 8개국 순회공연을 떠나기도 했다.6) 

   염두에 둘 점은 동구권 체제의 급속한 붕괴와 함께 구 소련, 구 동독, 헝가리, 폴란드 등 동구권 국가들이 대거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확정되었고, 냉전의 종식과 평화라는 키워드와 관련해 문화올림픽의 목표 역시 한 단계 고양되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서울올림픽(1988.9.17.~10.2.)은 역대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참여한 축제였고, 부대 행사인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1988.8.17.~10.5.)7)에는 세계 80여 개국 3만 명이 참가하여 총 51일 동안 전시 24건, 공연 10건, 경축 행사 7건 등 41개 문화행사를 펼쳤다.8) 그리고 올림픽 종료 후 동구권을 비롯해 문화예술축전 참가작의 해외 공연을 진행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 ‘지구촌 문화축제’에 포함된 공연은 어떤 작품들이었는가. 행사에는 정부를 중심으로 지자체 산하 단체를 비롯해 극단 산울림처럼 민간 단체가 참여하기도 했다.9) 구체적으로 외국 단체 초청 공연인 그리스 국립극단 공연, 일본 가부키 공연, 국제 민속축전 및 88서울예술단 공연 등 외에 당시 국립극장 산하 단체였던 우리 문화예술의 우수성을 보여 준다는 목적으로 국립극단 <팔곡병풍>(오태석 작, 윤호진 연출), 창극단 <춘향전>(허규 각색-연출), 무용단 <하얀 초상>(국수호 대본 및 안무, 박범훈 작곡), 발레단 <왕자 호동>(구희서 대본, 최동선 작곡, 임성남 안무), 오페라단・합창단 <불타는 탑>(윤조병 작, 장일남 작곡) 등이 이 기간 무대에 올랐다. 우리 문화의 정통성을 표방했던 국립극장 레퍼토리 중 <팔곡병풍>은 처용설화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춘향전>은 잘 알려진 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였고, <하얀 초상>은 순교차 이차돈을 다루었으며, <왕자 호동>은 역시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했으며, <불타는 탑>은 지귀와 선덕여왕 설화를 다룬 오페라였다.

   당시 국립극장이 발행했던 《국립극장 소식》은 문화예술축전 참가작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먼저 문화올림픽을 겨냥하여 새로 창작한 국립오페라단・국립합창단의 <불타는 탑>은 “국립오페라단의 역량이 총투입된 대형 오페라”였으며, 국립극단의 <팔곡병풍>은 ‘처용’과 ‘심청’ 이야기를 접합한 작품으로 “역사와 설화를 특유한 시선과 연극적 테크닉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능”한 오태석의 작품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국립발레단의 <왕자 호동>의 경우 “창작 발레를 통해 뿌리내린 한국적 발레의 색다른 감독을 세계인들에게 널리 소개할 작품”이었으며, 국립창극단의 <춘향전>은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분위기에 맞춰 초대형 창극으로 꾸민 레퍼토리”라는 점이 부각되었다. 국립무용단의 <하얀 초상>은 “이차돈의 순교를 소재로 외래 종교의 수용 과정에서 빚어지는 전통 무속과의 대립과 갈등을 현대적 감각으로 무용 극화한 대무용극”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10)

   살펴본 것처럼 이상의 다섯 개 레퍼토리 중 네 편(<팔곡병풍>, <하얀 초상>, <왕자 호동>, <불타는 탑>)은 삼국시대 설화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두 편은 고전소설에 근거하고 있다(<팔곡병풍>, <춘향전>). 곧 공연예술의 세계화 과정에서 국립극장이 부각한 것은 역사와 전통이었으며, 이에 더해 서구 공연에 뒤지지 않은 ‘대형’ 작품이라는 점이 부각되었다. 당시 문공부와 극단 운영진, 그리고 창작진이 서구권을 넘어 동구권까지 호소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만드는 과정, “우리의 것을 세계 무대에 선보이는 막중한 역할”을 다하는 과정에서 중요시된 키워드는 곧 전통, 재해석, 그리고 규모였다. 이는 “세계 유명 예술과 견주어도 절대 손색없는 공연”을 만든다는 것, “문화예술의 1번지로서 ‘우리 것’에 바탕을 둔 다양한 공연 장르를 선보”이겠다는 것이라는 국립극장의 문화예술축전 참가 의지와 결부되는 것이기도 하다.11) 역사와 전통에서 소재를 취하되 물량 규모에서 타국에 뒤지지 않는 콘텐츠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당대 공연예술의 세계화 전략이었다. 



3. ‘전통’과 문화 교류


   그렇다면 1988년 시점에서 문공부, 그리고 국립극장이 상정했던 전통이란 무엇이었는가. 당대 보도 및 공연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들여다보며 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오태석 작 <팔곡병풍>의 경우 환생한 심청이 처용과 역신을 만나며 겪는 일련의 수난사를 다룬 극으로, 설화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택견과 한국 무용을 접합한 공연이었다. 극작을 맡은 오태석은 용왕의 아들 용칠과 그를 시기하는 역신의 갈등을 비롯해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심청의 고뇌를 한민족 특유의 기질과 사상이 반영된 ‘한풀이굿’으로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궁극적으로 제작진은 “오늘의 상황에 맞는 전통의 탈바꿈화 작업을 통해 일본의 ‘노’나 ‘가부키’ 같은 전통 연극의 정립화 및 양식화”를 도모했다. 관련하여 문화예술축전에 참가하는 외국인과 PEN클럽대회 참석자들에게 소개할 특별 초청 공연작으로 선정된 <배비장전>의 경우 ‘우리의 전통예술 소개’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12)

   또한 국립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중 하나로 문화올림픽에서 공연하게 된 <춘향전>은 1987년 일본 초청 순회공연 시 <창극의 세계화>란 명제를 제시한 작품으로, 문화예술 축전에 맞춰 ‘초대형 창극’으로 꾸며졌다. 국립극단이 전통 연극의 양식화를 도모했던 것처럼, 창극단 역시 이 작품을 세계 각국의 오페라, 전통예술과 함께 거론할 수 있는 한국 대표 레퍼토리로 만들고자 했고, 창극의 대규모화를 통해 소극장에서 공연되던 판소리를 넘어 전통예술을 공연 양식으로 재정립하고자 했다. 

   국립발레단의 <왕자 호동>의 경우 역사 속 비극적 사랑을 다루되, ‘고구려의 남성적 기상’을 내세운 안무를 선보이고자 했다. 제작진은 “삼국사기 열전이 전하는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 얘기를 우리의 감각과 서양의 발레 양식이 조화를 이뤄” 낼 것이라 기대했다. 이를 통해 현대 감각에 맞는 ‘한국적’ 발레 양식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국립오페라단의 <불타는 탑> 역시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초대형 창작 오페라’였다. 극작을 맡은 윤조병은 원 대본을 희곡으로 집필했으며 설화에 역사성을 부여하고 불교의 윤회사상을 부각하며 선덕여왕과 하위 골품인 지귀와의 사연과 계급을 뛰어넘는 비극적 사랑을 부각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진보적 사랑과 인간성을 부각하며 동시대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작품의 공연에는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국립합창단이 참여했다.

   국립무용단의 <하얀 초상>은 문화올림픽 참가작들의 특징을 집약해서 보여 준다. 이 작품은 “이차돈의 순교를 소재로 한 민족의 정서와 인간 정신의 승리를 그린 창작 무용극”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서울국제무용제 참가작인 <하얀 초상>은 미국, 캐나다, 영국을 비롯해 헝가리 등이 참여하는 이 대회에서 ‘국립’ 단체로서 차별화된 특성을 보여 줄 것이라 주목을 받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작품의 안무와 주역을 함께 맡은 국수호(당시 중앙대 교수)는 이차돈을 “불교를 통해 우리 정신문화를 한 단계 높인, 불명의 인간상으로 한국적 슈퍼스타”라 간주한다. 이차돈의 이야기를 선택한 것은 한국적 소재와 연결되며, 제작진은 무용이라는 형식과 관련해 가배 놀이 등의 민속과 궁중 의례, 불교 의식무 등을 소환하여 “인간 정신 승리의 대드라마”를 보여 주고자 했다. 제작진은 극적 흥미를 고양하는 과정에서 이차돈을 무관으로 설정하고 그의 연인인 달아기, 이차돈을 사랑하는 평양 공주, 이차돈의 라이벌이자 평양 공주를 흠모하는 거칠마로 등의 인물을 새로 추가해 설화 속 이야기를 인간과 신념, 그리고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영역으로 고양시킨다. 이에 더해 회전무대 위에 오방색과 처용무, 길쌈놀음, 향발춤을 보여 주며, 무대 장치는 고분벽화처럼 꾸몄고, 중앙국악관혁악단을 동원해 불교의 장중한 음악을 만들어 냈다. 

   이상의 공연 세계화와 관련한 88년의 국립극장 문화올림픽 참가작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제작진은 소재와 극적 형식은 전통에서 찾으며 한국적 로컬리티를 강조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에 더해 볼거리가 많은 ‘큰 무대’ 혹은 ‘초대형 무대’에서 구축할 수 있는 스펙터클을 추구하며,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음에도 궁극적으로 극은 인간이나 사랑 등 보편적인 주제를 환기한다. 이는 당대 정부 산하 단체가 준비한 세계화의 방편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관이 주도한 세계화 전략은 어떠한 결실을 이루었는가. 



4. 남는 사안들


   당시 문공부 산하 문예진흥원은 문화예술축전이 마무리된 지 약 한 달 후 자체 심포지엄을 진행한다. 특히 국립극장 참가작들의 상대적인 호응을 강조하고, 예술적 성과와는 별도로 전막 영문 슬라이드 자막 설치, 작품 해설 및 줄거리 슬라이드 제작 등의 노력이 외국인 관객은 물론 젊은 세대에게 어필했음을 강조한다. 심포지엄 참여자들은 “우리의 전통문화가 세계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올림픽 문화행사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예술과 행정을 아우르는 전담 기구의 신설, 인력 양성의 필요성 등의 방향 전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간판스타 격인 작품이 부재한다는 문제에 대해 지적한다.13) 

   심포지엄에서는 해당 축전이 관 주도 등의 문제로 우리 것을 세계에 과시하지 못한 반면, 국민들의 문화 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문화예술인들은 동구권 예술인과의 만남, 국민적 관심 제고 등을 성과로 꼽은 반면 문화 지원에 대한 관료성 탈피, 문화부 설치를 통한 한국문화 발전의 계획 수립의 필요성 등을 언급했다. 이외에도 순수 문화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한 이 축전이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했다는 의견도 등장했다.14) 총 6개국 18개 팀이 참가한 서울국제무용제의 경우 비싼 입장료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민중극단의 영어 뮤지컬 <춘향전>과 창극 <춘향전>을 비롯해 마당놀이 <심청전>에 관객이 몰렸으나 순수 연극 단체의 유료 관객은 47% 수준이었다.15)

   극장 심포지엄의 호의적인 반응과는 별개로, 언론에서는 행사 참가작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평론가 정중헌은 서울올림픽 개회식이 문화적으로 국민에게 미친 영향을 강조하며, 국립극단의 <팔곡병풍>과 관련해 “전체적으로 무대가 썰렁하고 장면, 장면이 부드럽게 연결되지 못해 감정이 단절된다는 지적이 많았다. 한마디로 우리다운 생명력이 없어 희랍극이나 가부키의 장점들을 모아 놓은 것 같다는 말도 나왔다.”16)며 작품이 강조한 전통이라는 문제가 텍스트 안에 구현되는 양상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후에도 정부는 축전 참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세계화의 방향성을 모색하며 1989년을 “올림픽 문화행사에서 나타난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해”로 지정하였다. 문공부의 경우 문화예술 축전에 의미를 부여했고, 국립극장 역시 위 심포지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문화예술축전 참가의 의의를 내세운 만큼 이후에도 전통 공연의 세계화 작업을 이어갔다. 이듬해 국립창극단은 <춘향전>의 유럽 지역 공연을, 국립무용단은 동남아 공연을 모색하기도 했다.17)

   다만 이 같은 시도와는 별개로 국립극장의 반복되는 재공연은 해외 공연 과정에서도 반복되며 비판받았다.18) 세계화를 대상으로 하며 문화 교류를 내세웠고 축전 기간 일부 지역에 한해 순회공연도 이어졌지만 정작 자국 대중들 입장에서는 향유할 기회가 불충분하다는 것도 문제시되었다. 국립극장의 경우 시간이 흘러 해외 공연 뒤 주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귀국 공연을 ‘재탕’하는 방식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서울올림픽 전후의 공연 세계화 전략의 문제가 이후에도 이어진 결과였다.19) 

   1980년대 공연 세계화 전략의 본질적인 문제는 관이 이 모든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는 것 외에도 그 대상이 일반 관객까지 아우르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공연의 세계화 과정에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타깃으로 삼으며 기획의 문제에 대한 논란도 빚어졌다. 이와 함께 아시아를 넘어 서구 예술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한국적 소재와 형식을 구축하려 노력했고 공연 규모를 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동시대 관객의 기호와 맞닿지 못하면서 대중과 유리되었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 문화 세계화와 관련하여 한국적 로컬리티를 내세우는 동시에 전세계적 보편성을 강화하기 위해 텍스트를 양식화화한다는 목표는 지연되었다. 무엇보다 관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당대 국립극장 레퍼토리의 공통 분모는 역사·설화 소재와 수난사로 모아졌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재생산이라는 시비 가능성도 갖고 있었다. 이는 곧 관 주도 세계화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 글은 국내에서도 호평받았던 창극 <리어>가 셰익스피어의 본고장인 영국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도 찬사를 받았다는 기사로 시작했다. 문화의 세계화 과정에서 관의 지원이 필수적일 수 있으나 여기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콘텐츠의 차별성과 대중적 호응 여부일 것이다. 공연 세계화의 시발점이었던 서울아시안게임, 서울올림픽 전후의 일련의 해외 공연과 문화행사는 ‘K-컬처’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준다.



1) 장병호, 「국립창극단 <리어>, 셰익스피어 본고장 영국 무대에 올라」, 《이데일리》, 2024. 10. 4.

2) 아시아를 겨냥한 것일지언정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모색된 작업이었다(전지니, 「전후(戰後) 문예영화의 해외 진출 시도에 대한 소고-<종각>(1958)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74,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2017 참조). 다만 본격적인 의미에서 한국영화가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가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이후 임권택의 <씨받이>(1986)의 강수연이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1980년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송영언, 「“한국문화 세계에 심자” 전통예술 해외 나들이 활발」, 《동아일보》, 1989. 1. 27.

4) 「문공부 발표 88 문화올림픽 37개 단체 행사 확정」, 《경향신문》, 1983. 12. 8.

5) 정중헌, 「주제도 못 정한 문화올림픽 준비」, 《조선일보》, 1984. 12. 27.

6) 「「국립무용단」 중남미 순회공연 떠나」, 《국립극장 소식》 창간 준비호, 1987. 8.

7) 당대 언론은 올림픽 문화예술축전, 88문화예술축전 등으로 일컫고 있다. 공식 명칭은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SEOUL OLYMPIC ARTS FESTIVAL 1988이다.

8) 「88 문화올림픽 개막」, 《경향신문》, 1988.8.16.; 오중석, 「전통문화의 세계화」, 《조선일보》, 1988. 9. 18.

9) 88 문화올림픽 축전 기간 국제연극제에는 총 19개 단체가 참가했으며, 이 중 국내 단체는 13개 단체(극단 안양예술극장 <바꼬지>, 극단 세실 <불가불가>, 극단 자유극장 <피의 결혼>, 극단 여인극장 <산불>, MBC마당놀이 <심청전>, 극단 산울림 <고도를 기다리며>, 극단 작업 <술래잡기>, 국립극단 <팔곡병풍>, 국립창극단 <춘향전>, 극단 성좌 <유도>, 88예술단 <아리랑 아리랑>, 서울 시립가무단 <즐거운 한국인>, 민중극단의 뮤지컬 <춘향전>)이었다.

10) 「미리보는 문화올림픽 참가작품」, 《국립극장 소식》, 1988. 2.

11)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참가작품 윤곽 드러나」, 《국립극장 소식》, 1988. 2.

12) 「공연 하이라이트- 창극 <배비장전>」, 《국립극장 소식》, 1988. 6.

13)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평가 심포지움-대중성 치우쳐 전통미 못 살렸다는 지적 많아」, 《국립극장 소식》, 1988. 12.

14) 이연재, 「전통예술 정수 못 보여 줘 아쉬움」, 《경향신문》, 1988. 11. 14.

15) 「문화 축전 행사 공연장 유료 관객은 절반」, 《동아일보》, 1988. 10. 6.

16) 정중헌, 「문화예술축전 현장 중계 국립극단 <팔곡병풍> 공연」, 《조선일보》, 1988. 9. 15.

17) 송영언, 「“한국문화 세계에 심자” 전통예술 해외 나들이 활발」, 《동아일보》, 1989. 1. 27.

18) 유인화, 「국립극장 무사안일 ‘중병’」, 《경향신문》, 1992.9.8.

19) 노형석, 「국립극장 해외 호평 공연 홍보 위한 국내 공연 당연 급조. 빈약한 기획 등 고질적 문제 외면」, 《한겨레》, 1999.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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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응답

시대와 응답* ― 한강과 90년대 문학의 (비)정치적 감수성에 관하여 최진석 1. 감수 능력과 문학 2024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롬의 콘서트홀에서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그 주인공은 한국의 소설가 한강.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여러 작품 중 『소년이 온다』를 대표적으로 거론하며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 평가했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과 고통의 참화를 세계 시민들의 보편적 공감으로 끌어올린 문학적 성취에 관해서는 앞으로 끊임없이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직전에 벌어진 사건, 즉 광주의 역사로부터 44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계엄이 재연되었다는 점에 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이 사태의 정치·사회적 후폭풍에 대해서는 일단 말을 아끼자. 지금은 한강의 문학적 성취가, 더 정확히 말해 ‘노벨상 수상’보다는 작품 세계를 통해 표현해 낸 ‘문학적 울림’으로서의 성취가 어떤 토대에서 나온 것인지, 작가 개인의 재능을 넘어서 어떤 시대사적 배경으로부터 발아한 것인지 묻는 것이 더욱 유익할 성싶다. 만일 그것이 작가의 개인적 재능에 전적으로 기인했다면 우리는 그에 더 보탤 말이 없다. 하지만 이로부터 한강으로 상징되는 한국문학의 ‘높이’나 ‘폭’을 운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뿌리를 내린 문화적 감수성의 토양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감수성이란 묻기 어려운 주제이다. 그것을 가시화하는 여러 지표를 선택하고 분류하는 어려움은 차치하더라도, 도대체 감수성을 정의하고 실체로서 규정짓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객관성과 실증성이 신뢰의 유일한 담보물이 되는 우리 시대에 주관성과 모호성으로 둘러싸인 이 감각의 구성물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어쩌면 감수성이란 실물을 통한 증명의 문제라기보다 그에 다가서는 자가 감수(感受)하여 공명함으로써 받아들여야 할 경험은 아닐까?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를 기점으로 글쓰기를 실천해 온 한강과 그의 시대는 이 같은 공감적 경험의 지평선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70년대생 작가들은 90년대에 접어들며 본격적으로 문학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컨대, 1970년생 한강의 경우 93년에 시로, 94년에 소설로 등단했다. 그럼, 90년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알다시피, 그 시기는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진 직후이며, 민족‧민중문학으로 대변되던 이전의 흐름과 ‘다른’ 의미에서의 새로운 문학이 모습을 드러내던 시점이었다. 다시 말해, ‘운동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명시적인 사회‧정치적 의제가 문학장에서 빠져나가고 보다 자유롭고 유쾌한 감성으로 충전된 ‘문화의 시대’가 그때의 시대적 분위기를 대변하는 말이었다.1) ‘서태지와 아이들’, ‘무라카

  • 관리자
  • 2025-01-01
비정상 사회, 역사가 쓴 시대의 시놉시스

비정상 사회, 역사가 쓴 시대의 시놉시스 김설원 「팔월극장」 김유림 1. 불가능한 연출 정상과 비정상 사회를 구분하긴 사실상 어렵다. 기준을 찾는다면 역사일 것이다. 역사란 과거이며, 과거는 현재 시점으로 소환될 때 의미가 있다.1) 역사에 내재한 의미는 비정상과 정상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 때문에 검증이 필요하다. 헤겔은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 집적된 현상을 추론하고 검증해 나가는 과정을 거쳐 ‘절대정신’에 이르기를 주문한다.2) 절대정신은 역사 변증법을 거쳐 ‘앎에 이르는 자기 인식’이다. 자기 인식은 ‘자유의지’와 동일한 의미로 억압을 벗어날 때 실현된다.3) 문학을 포함한 예술, 철학 등 인문학이 역사를 검증하려는 노력도 자유의지, 주체적인 인간의 실존을 강화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김현 평론가는 ‘문학이 억압하지 않지만,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4)라고, 적시한 바 있다. 이는 문학이 결코 유희적이거나 감상적 산물이 아닌 억압당하는 인간의 실존을 복기하는 장르임을 알린다. 김설원5) 작가의 단편소설 「팔월극장」6)은 2024년 현진건 문학상 본상 수상작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비정상 시대를 밀도 있게 다루면서도 미학적인 감응이 풍부한 작품이다. 특히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에 4‧19 역사를 덧입혀 주목된다. 「팔월극장」은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는 화자 영진을 중심으로 연기자를 꿈꾸는 윤희,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영진의 엄마와 여동생이 등장한다. 영진은 엄마, 여동생과 함께 지방 도시에서 살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홍보 인쇄물 제작업체에 취업하지만 ‘생존 활동’에 불과한 일에 회의를 느끼고 직장을 그만둔다. 직장을 그만둔 영진의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실존 여부가 물음으로 확증된다고 밝힌다.7) 영진은 육체 보존 목적뿐인 삶에 왜? 라는 물음을 던진 것이다. 푸코는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구현하는 행위를 심지어 ‘예술 행위’로 규정했다.8) 영진은 육체만으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자기 세계를 찾아 고향을 떠난다. 학원에서 연출 전공 강좌를 수강하고 운 좋게 영화제작사에 들어간다. 영화(제작, 연출)에 매진하지만, “성질이 더욱 고약해진 ‘가난’과 마주쳐야 했다.” “자부심이랄지 성취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한숨과 카드 빚만 늘어 가는 생활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25쪽) 영진은 물질이 지배하는 비정상 시대에 억압당했다. 생활고에 엄마의 죽음이 포개지면서 영화감독의 꿈은 와해 될 상황에 직면한다. 엄마가 숨을 거둔 시간에 나는 클럽 디디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여동생이 문자메시지로 임종 소식을 알렸다. 새벽 한 시가 막 넘어선 때였다. 휴대전화에 찍힌 부고를 보는 순간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맥주에서 지린내가 난다고 공연히 신경질을 부렸다. 부주의로 내 어깨를 슬쩍 건드리고

  • 관리자
  • 2025-01-01
시간의 재생, 재생 없는 공간

시간의 재생, 재생 없는 공간 - 『사랑의 꿈』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함께 읽기1) 이성민 1.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 모더니티를 역사 속에서의 위치 상실로,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망각해 버린 시대”2)의 지배적 징후로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 어떤 근본적인 단절이 우리 시대와 그 이전 사이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이전과 같은 역사적 방식으로는 우리가 어떤 시공간 속에 위치하는지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제임슨의 어법을 따르자면 포스트모던 감각은 크게 세 가지 형식으로 표출되는데, 이를테면 깊이의 상실과 역사성의 쇠퇴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시간예술의 통일성 와해가 이에 해당된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시간성의 와해 이후의 예술, 즉 공간성이 점점 더 지배적인 문화 논리가 되는 예술 형식을 포스트모던 건축으로부터 읽어 내고 있다.3) 포스트모던의 하이퍼스페이스는 우리로 하여금 공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느낌을, 완전히 균질해져 버린 탈역사의 공간 내부를 영속적으로 떠도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우리는 이제 방향감각과 목적(telos)을 상실한 채 무한한 패스티시만이 잔존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 같다. 상술한 시대감각을 하나의 전제로서 미리 염두에 둘 때,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문이 우리 앞에 출현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4) 물론 각 개인은 위도와 경도로 이루어진 하나의 좌표 위를 점유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월가 점령 이후의 ‘신냉전’ 시대 어딘가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질문하는 위치는 그러한 3인칭 좌표의 개념이 아니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하나의 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도 좋을 것이다. 실존의 1인칭 관점에서 올바르게 보았을 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스스로의 삶이 속해 있는 1인칭 좌표를 사후적으로 재구성하려 할 때, 그런 시도는 곧바로 난관에 봉착하며 미궁으로 좌초되고 만다. 나를 살게 하는 것들과 내 행위 역량을 감소시키는 것들의 연쇄는 너무나 촘촘하게 얽혀 있는데, 바다 건너편에서 발생한 가뭄이 선물시장의 원두 가격 상승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거미줄처럼 얽힌 시장-신의 불가해한 변화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연기(緣起)는 축자적인 진실이기 때문이다. 내 위치, 내가 나아가는 하나의 화살표, 나를 형성하는 기억과 기대의 교차점은 지구 전체와의 공동 실존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지구를 실존의 토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가 지구 위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감히 사유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이미 말했듯 올바르게 본다는 것의 문제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나 자신의 실존, 나의 시공간이 속하지 않는 담론의 역사, 실존과 담론 바깥에 있는 실재적인 것의 작용을 함께 사유할 때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존-담론-실재의 이음새를 엮는 것은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처럼 느껴지고, 나를 살게 하는 무한한 연쇄의 무게 앞에서 사유는 한없이 무기력해

  • 관리자
  • 20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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