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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예술’, 전통, 세계화

  • 작성일 2024-12-01

   ‘K-예술’, 전통, 세계화

   - 88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공연계 문화교류 담론에 대한 단상


전지니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Visiting Scholar) 


1. 88 서울올림픽과 문화 세계화


   최근 국립극장 전속 단체인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겸 단장 유은선)이 제작한 <리어>가 영국 바비컨센터에서 관객과 관계자의 호평 속에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무리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을 한국적으로 각색한 해당 작품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주영국한국문화원이 주관한 제11회 ‘K-뮤직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공연되었다.1) 주지하다시피 K-POP 및 K-드라마의 전세계적인 흥행은 K-콘텐츠의 세계화라는 화두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또한 맨부커상에 이은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번역의 난관을 가로질러 국내 소설이 다른 언어권의 독자와 어떻게 호흡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창극 <리어>의 성공과 관련하여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이라는 화두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논의될 수 있을까.

   이 글은 K-공연예술의 세계화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대신, 그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된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의 공연계 상황에 대해 논한다.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이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1950년대, 곧 전후 이미 세계 진출의 방향성을 논의하던 영화계와는 달리2), 공연계에서 세계 시장과 평단을 바라보게 된 시점은 1980년대 중후반이었다. 관련하여 1989년 한 언론에는 “한국문화 세계에 심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이 기사는 한국문화의 세계화 전략에 대해 논하며 전통예술의 해외 나들이가 활발해지고 있고, 특히 올림픽을 전후하여 헝가리, 동독 등 공산권 공연이 활발해지고 있음을 언급한다.3)

   그렇다면 당시 ‘우리’ 공연의 세계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시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 산하 단체인 국립극장이 목표하고자 했던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 및 세계화의 방향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이 글은 냉전체제의 종식과 동구권 문호 개방이라는 당대의 화두와 관련해 공연예술의 세계화라는 목표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지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국립극장이 발행하는 정기간행물(당대 제호 《국립극장 소식》) 및 언론 기사를 통해 전통을 내세운 관 주도 문화교류의 명암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2.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지구촌 문화 축제’


   언급한 것처럼 정부 차원에서 국내 공연의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권장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당시 LA올림픽(1984)와 서울아시안게임(1986)을 거쳐 서울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국립극장은 물론 지자체와 민간 극단이 국제 협력과 문화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전통 공연의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1980년대 중후반 공연계의 화두는 ‘문화올림픽’과 ‘세계화’로 요약되는데, 정부는 연이은 국제 행사를 앞두고 “국민의 문화적 저력을 전 세계에 보여 주는 민족문화의 대제전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문화올림픽 종합계획을 수립”하였다.4) 1983년 문공부는 1986년, 88년에 내보일 63개 문화올림픽 행사 계획을 발표했으며, 문예진흥원은 이를 위한 창작 예술작품 공모를 진행했다. 개별 작품의 문제점 및 졸속 행사의 우려도 있었으나5) 정부는 일관되게 사업을 계속하고자 했다. 문화공보부의 경우 1987년도부터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린다는 목적으로 전통예술단의 해외 파견 사업을 이어 갔으며, 국립극장 산하 단체인 국립무용단이 중남미 8개국 순회공연을 떠나기도 했다.6) 

   염두에 둘 점은 동구권 체제의 급속한 붕괴와 함께 구 소련, 구 동독, 헝가리, 폴란드 등 동구권 국가들이 대거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확정되었고, 냉전의 종식과 평화라는 키워드와 관련해 문화올림픽의 목표 역시 한 단계 고양되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서울올림픽(1988.9.17.~10.2.)은 역대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참여한 축제였고, 부대 행사인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1988.8.17.~10.5.)7)에는 세계 80여 개국 3만 명이 참가하여 총 51일 동안 전시 24건, 공연 10건, 경축 행사 7건 등 41개 문화행사를 펼쳤다.8) 그리고 올림픽 종료 후 동구권을 비롯해 문화예술축전 참가작의 해외 공연을 진행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 ‘지구촌 문화축제’에 포함된 공연은 어떤 작품들이었는가. 행사에는 정부를 중심으로 지자체 산하 단체를 비롯해 극단 산울림처럼 민간 단체가 참여하기도 했다.9) 구체적으로 외국 단체 초청 공연인 그리스 국립극단 공연, 일본 가부키 공연, 국제 민속축전 및 88서울예술단 공연 등 외에 당시 국립극장 산하 단체였던 우리 문화예술의 우수성을 보여 준다는 목적으로 국립극단 <팔곡병풍>(오태석 작, 윤호진 연출), 창극단 <춘향전>(허규 각색-연출), 무용단 <하얀 초상>(국수호 대본 및 안무, 박범훈 작곡), 발레단 <왕자 호동>(구희서 대본, 최동선 작곡, 임성남 안무), 오페라단・합창단 <불타는 탑>(윤조병 작, 장일남 작곡) 등이 이 기간 무대에 올랐다. 우리 문화의 정통성을 표방했던 국립극장 레퍼토리 중 <팔곡병풍>은 처용설화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춘향전>은 잘 알려진 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였고, <하얀 초상>은 순교차 이차돈을 다루었으며, <왕자 호동>은 역시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했으며, <불타는 탑>은 지귀와 선덕여왕 설화를 다룬 오페라였다.

   당시 국립극장이 발행했던 《국립극장 소식》은 문화예술축전 참가작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먼저 문화올림픽을 겨냥하여 새로 창작한 국립오페라단・국립합창단의 <불타는 탑>은 “국립오페라단의 역량이 총투입된 대형 오페라”였으며, 국립극단의 <팔곡병풍>은 ‘처용’과 ‘심청’ 이야기를 접합한 작품으로 “역사와 설화를 특유한 시선과 연극적 테크닉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능”한 오태석의 작품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국립발레단의 <왕자 호동>의 경우 “창작 발레를 통해 뿌리내린 한국적 발레의 색다른 감독을 세계인들에게 널리 소개할 작품”이었으며, 국립창극단의 <춘향전>은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분위기에 맞춰 초대형 창극으로 꾸민 레퍼토리”라는 점이 부각되었다. 국립무용단의 <하얀 초상>은 “이차돈의 순교를 소재로 외래 종교의 수용 과정에서 빚어지는 전통 무속과의 대립과 갈등을 현대적 감각으로 무용 극화한 대무용극”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10)

   살펴본 것처럼 이상의 다섯 개 레퍼토리 중 네 편(<팔곡병풍>, <하얀 초상>, <왕자 호동>, <불타는 탑>)은 삼국시대 설화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두 편은 고전소설에 근거하고 있다(<팔곡병풍>, <춘향전>). 곧 공연예술의 세계화 과정에서 국립극장이 부각한 것은 역사와 전통이었으며, 이에 더해 서구 공연에 뒤지지 않은 ‘대형’ 작품이라는 점이 부각되었다. 당시 문공부와 극단 운영진, 그리고 창작진이 서구권을 넘어 동구권까지 호소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만드는 과정, “우리의 것을 세계 무대에 선보이는 막중한 역할”을 다하는 과정에서 중요시된 키워드는 곧 전통, 재해석, 그리고 규모였다. 이는 “세계 유명 예술과 견주어도 절대 손색없는 공연”을 만든다는 것, “문화예술의 1번지로서 ‘우리 것’에 바탕을 둔 다양한 공연 장르를 선보”이겠다는 것이라는 국립극장의 문화예술축전 참가 의지와 결부되는 것이기도 하다.11) 역사와 전통에서 소재를 취하되 물량 규모에서 타국에 뒤지지 않는 콘텐츠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당대 공연예술의 세계화 전략이었다. 



3. ‘전통’과 문화 교류


   그렇다면 1988년 시점에서 문공부, 그리고 국립극장이 상정했던 전통이란 무엇이었는가. 당대 보도 및 공연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들여다보며 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오태석 작 <팔곡병풍>의 경우 환생한 심청이 처용과 역신을 만나며 겪는 일련의 수난사를 다룬 극으로, 설화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택견과 한국 무용을 접합한 공연이었다. 극작을 맡은 오태석은 용왕의 아들 용칠과 그를 시기하는 역신의 갈등을 비롯해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심청의 고뇌를 한민족 특유의 기질과 사상이 반영된 ‘한풀이굿’으로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궁극적으로 제작진은 “오늘의 상황에 맞는 전통의 탈바꿈화 작업을 통해 일본의 ‘노’나 ‘가부키’ 같은 전통 연극의 정립화 및 양식화”를 도모했다. 관련하여 문화예술축전에 참가하는 외국인과 PEN클럽대회 참석자들에게 소개할 특별 초청 공연작으로 선정된 <배비장전>의 경우 ‘우리의 전통예술 소개’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12)

   또한 국립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중 하나로 문화올림픽에서 공연하게 된 <춘향전>은 1987년 일본 초청 순회공연 시 <창극의 세계화>란 명제를 제시한 작품으로, 문화예술 축전에 맞춰 ‘초대형 창극’으로 꾸며졌다. 국립극단이 전통 연극의 양식화를 도모했던 것처럼, 창극단 역시 이 작품을 세계 각국의 오페라, 전통예술과 함께 거론할 수 있는 한국 대표 레퍼토리로 만들고자 했고, 창극의 대규모화를 통해 소극장에서 공연되던 판소리를 넘어 전통예술을 공연 양식으로 재정립하고자 했다. 

   국립발레단의 <왕자 호동>의 경우 역사 속 비극적 사랑을 다루되, ‘고구려의 남성적 기상’을 내세운 안무를 선보이고자 했다. 제작진은 “삼국사기 열전이 전하는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 얘기를 우리의 감각과 서양의 발레 양식이 조화를 이뤄” 낼 것이라 기대했다. 이를 통해 현대 감각에 맞는 ‘한국적’ 발레 양식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국립오페라단의 <불타는 탑> 역시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초대형 창작 오페라’였다. 극작을 맡은 윤조병은 원 대본을 희곡으로 집필했으며 설화에 역사성을 부여하고 불교의 윤회사상을 부각하며 선덕여왕과 하위 골품인 지귀와의 사연과 계급을 뛰어넘는 비극적 사랑을 부각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진보적 사랑과 인간성을 부각하며 동시대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작품의 공연에는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국립합창단이 참여했다.

   국립무용단의 <하얀 초상>은 문화올림픽 참가작들의 특징을 집약해서 보여 준다. 이 작품은 “이차돈의 순교를 소재로 한 민족의 정서와 인간 정신의 승리를 그린 창작 무용극”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서울국제무용제 참가작인 <하얀 초상>은 미국, 캐나다, 영국을 비롯해 헝가리 등이 참여하는 이 대회에서 ‘국립’ 단체로서 차별화된 특성을 보여 줄 것이라 주목을 받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작품의 안무와 주역을 함께 맡은 국수호(당시 중앙대 교수)는 이차돈을 “불교를 통해 우리 정신문화를 한 단계 높인, 불명의 인간상으로 한국적 슈퍼스타”라 간주한다. 이차돈의 이야기를 선택한 것은 한국적 소재와 연결되며, 제작진은 무용이라는 형식과 관련해 가배 놀이 등의 민속과 궁중 의례, 불교 의식무 등을 소환하여 “인간 정신 승리의 대드라마”를 보여 주고자 했다. 제작진은 극적 흥미를 고양하는 과정에서 이차돈을 무관으로 설정하고 그의 연인인 달아기, 이차돈을 사랑하는 평양 공주, 이차돈의 라이벌이자 평양 공주를 흠모하는 거칠마로 등의 인물을 새로 추가해 설화 속 이야기를 인간과 신념, 그리고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영역으로 고양시킨다. 이에 더해 회전무대 위에 오방색과 처용무, 길쌈놀음, 향발춤을 보여 주며, 무대 장치는 고분벽화처럼 꾸몄고, 중앙국악관혁악단을 동원해 불교의 장중한 음악을 만들어 냈다. 

   이상의 공연 세계화와 관련한 88년의 국립극장 문화올림픽 참가작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제작진은 소재와 극적 형식은 전통에서 찾으며 한국적 로컬리티를 강조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에 더해 볼거리가 많은 ‘큰 무대’ 혹은 ‘초대형 무대’에서 구축할 수 있는 스펙터클을 추구하며,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음에도 궁극적으로 극은 인간이나 사랑 등 보편적인 주제를 환기한다. 이는 당대 정부 산하 단체가 준비한 세계화의 방편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관이 주도한 세계화 전략은 어떠한 결실을 이루었는가. 



4. 남는 사안들


   당시 문공부 산하 문예진흥원은 문화예술축전이 마무리된 지 약 한 달 후 자체 심포지엄을 진행한다. 특히 국립극장 참가작들의 상대적인 호응을 강조하고, 예술적 성과와는 별도로 전막 영문 슬라이드 자막 설치, 작품 해설 및 줄거리 슬라이드 제작 등의 노력이 외국인 관객은 물론 젊은 세대에게 어필했음을 강조한다. 심포지엄 참여자들은 “우리의 전통문화가 세계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올림픽 문화행사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예술과 행정을 아우르는 전담 기구의 신설, 인력 양성의 필요성 등의 방향 전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간판스타 격인 작품이 부재한다는 문제에 대해 지적한다.13) 

   심포지엄에서는 해당 축전이 관 주도 등의 문제로 우리 것을 세계에 과시하지 못한 반면, 국민들의 문화 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문화예술인들은 동구권 예술인과의 만남, 국민적 관심 제고 등을 성과로 꼽은 반면 문화 지원에 대한 관료성 탈피, 문화부 설치를 통한 한국문화 발전의 계획 수립의 필요성 등을 언급했다. 이외에도 순수 문화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한 이 축전이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했다는 의견도 등장했다.14) 총 6개국 18개 팀이 참가한 서울국제무용제의 경우 비싼 입장료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민중극단의 영어 뮤지컬 <춘향전>과 창극 <춘향전>을 비롯해 마당놀이 <심청전>에 관객이 몰렸으나 순수 연극 단체의 유료 관객은 47% 수준이었다.15)

   극장 심포지엄의 호의적인 반응과는 별개로, 언론에서는 행사 참가작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평론가 정중헌은 서울올림픽 개회식이 문화적으로 국민에게 미친 영향을 강조하며, 국립극단의 <팔곡병풍>과 관련해 “전체적으로 무대가 썰렁하고 장면, 장면이 부드럽게 연결되지 못해 감정이 단절된다는 지적이 많았다. 한마디로 우리다운 생명력이 없어 희랍극이나 가부키의 장점들을 모아 놓은 것 같다는 말도 나왔다.”16)며 작품이 강조한 전통이라는 문제가 텍스트 안에 구현되는 양상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후에도 정부는 축전 참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세계화의 방향성을 모색하며 1989년을 “올림픽 문화행사에서 나타난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해”로 지정하였다. 문공부의 경우 문화예술 축전에 의미를 부여했고, 국립극장 역시 위 심포지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문화예술축전 참가의 의의를 내세운 만큼 이후에도 전통 공연의 세계화 작업을 이어갔다. 이듬해 국립창극단은 <춘향전>의 유럽 지역 공연을, 국립무용단은 동남아 공연을 모색하기도 했다.17)

   다만 이 같은 시도와는 별개로 국립극장의 반복되는 재공연은 해외 공연 과정에서도 반복되며 비판받았다.18) 세계화를 대상으로 하며 문화 교류를 내세웠고 축전 기간 일부 지역에 한해 순회공연도 이어졌지만 정작 자국 대중들 입장에서는 향유할 기회가 불충분하다는 것도 문제시되었다. 국립극장의 경우 시간이 흘러 해외 공연 뒤 주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귀국 공연을 ‘재탕’하는 방식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서울올림픽 전후의 공연 세계화 전략의 문제가 이후에도 이어진 결과였다.19) 

   1980년대 공연 세계화 전략의 본질적인 문제는 관이 이 모든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는 것 외에도 그 대상이 일반 관객까지 아우르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공연의 세계화 과정에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타깃으로 삼으며 기획의 문제에 대한 논란도 빚어졌다. 이와 함께 아시아를 넘어 서구 예술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한국적 소재와 형식을 구축하려 노력했고 공연 규모를 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동시대 관객의 기호와 맞닿지 못하면서 대중과 유리되었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 문화 세계화와 관련하여 한국적 로컬리티를 내세우는 동시에 전세계적 보편성을 강화하기 위해 텍스트를 양식화화한다는 목표는 지연되었다. 무엇보다 관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당대 국립극장 레퍼토리의 공통 분모는 역사·설화 소재와 수난사로 모아졌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재생산이라는 시비 가능성도 갖고 있었다. 이는 곧 관 주도 세계화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 글은 국내에서도 호평받았던 창극 <리어>가 셰익스피어의 본고장인 영국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도 찬사를 받았다는 기사로 시작했다. 문화의 세계화 과정에서 관의 지원이 필수적일 수 있으나 여기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콘텐츠의 차별성과 대중적 호응 여부일 것이다. 공연 세계화의 시발점이었던 서울아시안게임, 서울올림픽 전후의 일련의 해외 공연과 문화행사는 ‘K-컬처’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준다.



1) 장병호, 「국립창극단 <리어>, 셰익스피어 본고장 영국 무대에 올라」, 《이데일리》, 2024. 10. 4.

2) 아시아를 겨냥한 것일지언정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모색된 작업이었다(전지니, 「전후(戰後) 문예영화의 해외 진출 시도에 대한 소고-<종각>(1958)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74,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2017 참조). 다만 본격적인 의미에서 한국영화가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가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이후 임권택의 <씨받이>(1986)의 강수연이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1980년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송영언, 「“한국문화 세계에 심자” 전통예술 해외 나들이 활발」, 《동아일보》, 1989. 1. 27.

4) 「문공부 발표 88 문화올림픽 37개 단체 행사 확정」, 《경향신문》, 1983. 12. 8.

5) 정중헌, 「주제도 못 정한 문화올림픽 준비」, 《조선일보》, 1984. 12. 27.

6) 「「국립무용단」 중남미 순회공연 떠나」, 《국립극장 소식》 창간 준비호, 1987. 8.

7) 당대 언론은 올림픽 문화예술축전, 88문화예술축전 등으로 일컫고 있다. 공식 명칭은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SEOUL OLYMPIC ARTS FESTIVAL 1988이다.

8) 「88 문화올림픽 개막」, 《경향신문》, 1988.8.16.; 오중석, 「전통문화의 세계화」, 《조선일보》, 1988. 9. 18.

9) 88 문화올림픽 축전 기간 국제연극제에는 총 19개 단체가 참가했으며, 이 중 국내 단체는 13개 단체(극단 안양예술극장 <바꼬지>, 극단 세실 <불가불가>, 극단 자유극장 <피의 결혼>, 극단 여인극장 <산불>, MBC마당놀이 <심청전>, 극단 산울림 <고도를 기다리며>, 극단 작업 <술래잡기>, 국립극단 <팔곡병풍>, 국립창극단 <춘향전>, 극단 성좌 <유도>, 88예술단 <아리랑 아리랑>, 서울 시립가무단 <즐거운 한국인>, 민중극단의 뮤지컬 <춘향전>)이었다.

10) 「미리보는 문화올림픽 참가작품」, 《국립극장 소식》, 1988. 2.

11)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참가작품 윤곽 드러나」, 《국립극장 소식》, 1988. 2.

12) 「공연 하이라이트- 창극 <배비장전>」, 《국립극장 소식》, 1988. 6.

13)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평가 심포지움-대중성 치우쳐 전통미 못 살렸다는 지적 많아」, 《국립극장 소식》, 1988. 12.

14) 이연재, 「전통예술 정수 못 보여 줘 아쉬움」, 《경향신문》, 1988. 11. 14.

15) 「문화 축전 행사 공연장 유료 관객은 절반」, 《동아일보》, 1988. 10. 6.

16) 정중헌, 「문화예술축전 현장 중계 국립극단 <팔곡병풍> 공연」, 《조선일보》, 1988. 9. 15.

17) 송영언, 「“한국문화 세계에 심자” 전통예술 해외 나들이 활발」, 《동아일보》, 1989. 1. 27.

18) 유인화, 「국립극장 무사안일 ‘중병’」, 《경향신문》, 1992.9.8.

19) 노형석, 「국립극장 해외 호평 공연 홍보 위한 국내 공연 당연 급조. 빈약한 기획 등 고질적 문제 외면」, 《한겨레》, 1999.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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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반대하며 ―고통과 쟁론 입론 박동억 1. 고통으로 향하기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은 1998년 초의 일이었다. 이 무렵 시인 허수경(許秀卿; 1964~2018)은 독일에 머물고 있었다. 뮌스터 대학에서 근동 고고학을 전공하며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차였다. 그해 말 NATO가 전쟁에 개입했고 공군을 동원하여 세르비아에 폭격을 개시했다. 허수경은 매스컴 보도를 보며 전쟁의 참혹함에 경악했고 두 나라의 고통받는 민간인을 위해 무엇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끔찍하게 여겼다. 그의 석사논문 주제는 기원전 6,800년에 세워진 중동의 작은 도시 초가 미쉬(Choghā Mīsh)였다. 그는 반만년 전의 멸망한 유적지를 오가며 “도대체, 이런 아카데미의 고상한 놀이가 지금의 전쟁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잠겼다.1) 다행인 것은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2001년 발표한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할 수 있었다. 군인들은 팔다리를 잃었고, 아이와 여자들은 고향을 잃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언어로 열거할 때 단조로운 사실이 되어 버렸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실감할 수 있도록 허수경은 시적인 상상력을 활용했다. 그의 시집에는 전쟁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스스로 목을 자르는 극적인 사건이나 난민이 된 여자들이 짐승 우리로 피난했다가 짐승과 교접하는 일화가 나타난다. 이 그로테스크한 상상은 언어화할 수 없는 전쟁의 잔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게 코소보 전쟁은 그저 먼 나라의 사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아니었다. 허수경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 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라고 썼다. 이러한 애도가 무색하게 2003년에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이에 시인은 2005년 네 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의 서문에서 아예 자신의 시를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반(反)전쟁에 대한 노래’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시인에게 시 쓰기는 그의 영혼이 저 먼 타인의 고통에 접경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어떻게 그는 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영혼 곁으로 이끌어 올 수 있었을까. 어떤 의미로 그것은 그가 자임한 윤리의식이 역사적 복잡성이나 정치적 알력을 멀리한 채 성립된 간명한 문제의식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누가 가해자인가. 허수경은 전쟁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전쟁을 일으킨 자, 폭력을 수행하는 자를 고발했다. 누가 피해자인가. 그는 여성과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전쟁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평화주의나 남성중심주의에 기초한 문명을 비판하는 에코페미니즘으로 일컬어졌다. 나, 태어났어 추워, 라고 말하면 정말 추워서 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 먼지들을

  • 관리자
  • 2025-07-01
경계가 지워지는 사이

경계가 지워지는 사이 -비/인간과 타자 김웅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1) 1 비인간이 가진 속도가 빨라질수록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감응하기 위해 우리가 경유하는 코뮨적 신체는 그러나 공통된 목소리를 요청하진 않는다. 인간 존재에 내재되어 있는 ‘선(善)’이라는 보편성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의 총체적 시간 속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선(線)’을 만들고 있음을 주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관점에서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의 의미를 재삼 곱씹게 된다. 2000년대 시적 주체는 한국 사회―넓게는 인간 사회가 구축해 놓은 알고리즘을 본격적으로 거부하는 타자의 자리에 자신을 노정 시킴으로써 “자기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거나 보장받을 수 없음을 인지하고 실감하는 존재”2)로 변모하였다. 이를 통해 사회체의 최소 단위인 ‘가족’이라는 중심점에서부터 시작된 시적 사유는 단순히 생리적으로 결속된 하나의 사회체에 불과할 뿐 윤리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관계를 방증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아이-화자는 시적 주체를 “‘부모-자식’이라는 수직적 차원에서 불화하는 관계”로써 “윤리적 모험”3)을 나서는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이 아이-화자는 2010년대를 거치면서 ‘시민적 트라우마’를 흡습한 시적 주체로 전성되었다. 어떤 방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애도의 총량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실존의 차원에서 마주치게 되는 ‘무능력’”의 테제가 되고 그 무능력이 곧 “‘내면적 성찰’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를”4) 희망하는 고무적인 발화자로 시인을 이끄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복무해야 하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또 하나의 책무이자 윤리로 자리 잡는다. 이 같은 관점은 시민적 트라우마를 통감하는 주체로서 몸이 갖는 일종의 생활론적 윤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5) 그런데 2020년대의 시적 주체에게 윤리적 책무감은 역설적으로 더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고독감’을 불러왔다. 시민적 영웅이 되지 못한 인간, 소박한 일상조차 꿈꾸지 못하는 인간, 죽지 못해 살아 내는 몸의 형상은 시민적 트라우마 앞에서 내색할 수 없는 존재로 내세워졌다. 이것은 “개인주의의 안온한 고립을 거부”하거나 “낮이라는 다스려진 영역을 다루는 임무 가운데 의연한 관계를 유지하는”6) 숭고한 고독과는 거리가 먼 고독감이다. 그것은 자칫하면 개인주의

  • 관리자
  • 2025-07-01
새로움의 경제 2(3)

새로움의 경제 2(3) - 문학적 사용에 관한 비체계적 단상1) 강동호 1. 예술과 상품의 새로움을 구별할 수 있는 원리를 탐색하는 데 있어 ‘유용성’이라는 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한 출발점으로 보일 수 있다. 유용성의 관점에서 예술과 상품이 식별될 수 있다면, 양자의 새로움이 발휘하는 효과 또한 서로 다른 원리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품 경제에서 새로움은 도구성과 결부된 차별적 정보 가치로 통용된다. 새로운 상품은 대개 기능적 유용성(사용가치)의 측면에서 과거의 상품과 구별되며, 뚜렷한 비교 우위의 원리에 따라 그 가치가 측정되기 마련이다. 이때 새로운 상품에 부여되는 더 높은 가격이라는 차이적 가치(교환가치)는, 한층 개선된 사용가치의 우월성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 반면 예술 작품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예술의 새로움 역시 과거와의 차이를 전제로 한 비교적 가치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가치를 정당화하는 비교 우위의 척도(사용가치의 명시적 우월성)가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새로운 예술 작품은 과거의 것보다 한층 매력적으로 인식될 수 있고, 동시대의 감각에 보다 적합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과거 작품에 대한 일방적 우위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른바 유용성처럼 명확히 우열을 판별하는 기준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예술에서의 새로움을 더욱 복잡한 가치로 만드는 주요 원인일 것이다. 2 예술의 자율적 가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전통적 이론들은 대체로 유용성의 결여 또는 그로부터의 자유를 예술의 핵심 본질 중 하나로 파악해 왔다. 유용하지 않다는 점, 즉 그 어떤 실용적 목적이나 기능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술이 예술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때 유용성의 부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공통 척도의 결여를 통해 부각되는 교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이다. 주지하듯, 이러한 사유의 계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전환점을 제공한 인물은 칸트이다. 『판단력 비판』에서 그가 제시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purposeless purpose)이나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과 같은 개념은, 예술을 시장적 가치 평가와 경제적 교환의 논리로부터 구분하는 철학적 근거에 해당한다. 칸트에 따르면, 예술가는 그 어떤 외적인 목적에 의해 지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생산해야 하며, 감상자는 이해득실과 무관한 순수한 향유를 통해 작품의 아름다움을 경험해야만 한다. 이처럼 예술의 자율성은 어떤 보상이나 대가에도 편향되지 않는 행위의 독립성과 무관심성에 깊이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수공업적 기예는 임금이라는 대가를 전제하는 강제적 노동이지만, 예술은 그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기에 전적으로 자유로운 행위로 간주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이익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적 주체(호모 이코노미쿠스)와 동일시할 수 없으며, 무용성은 이와 같은 비환원성,

  • 관리자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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