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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눈-
비평 권영빈 -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86상세보기 -
비평 박인성 -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박인성 시간의 순환과 소설의 원점 흔히 소설을 가리켜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만,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던 유용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다양성이 늘어나고 시간에 대한 인지적 표현 수단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언어적 형식은 주제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의 삶과 그 의미화를 매개로 시간을 다루는 구성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과 다양한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삶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그리는 소설의 시간적 이해는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세련된 접근은 아니다. 자연히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이 시간에 대한 해석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근대문학으로서나 이후 오늘날의 다양한 소설 형식으로서나 저마다의 응답은 다양하게 도출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원점에 대한 질문이다. “소설이라는 게 대체 뭐였더라?”라는 질문. 형식과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서술과 그에 따른 시간의 뒤섞임은 소설의 본질적인 원료다. 따라서 근대문학에서부터 기존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비틀어 보여주려는 수많은 형식적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존재해 왔지만, 결국 소설이란 세상에 대한 시간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서사적 과거’(Episches Präteritum)1)라는 인지적 조작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2) 결국 소설은 ‘서술하는 시간’(narrating time)과 ‘서술되는 시간’(narrated time) 사이의 격차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의 언어이며,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적 맥락을 통해서 그 몸피를 부풀려 가는 해석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공간화의 측면에서, 김연수는 언제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가진 시간적 해석의 힘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 작가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시간을 다루어온 시도는 소설이 가진 이해의 힘을 비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부정할 수 없게 재구성하는 시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3)는 고전적인 시간의 상상력에 대한 김연수식 문학의 재구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서술적 전략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시간성에 기반한 서술 전략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포함하는 시간의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로 도출하고 싶었던 것은 전망-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평범성의 추구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08상세보기 -
비평 염선옥 -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작성일 2024-05-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81상세보기 -
비평 노대원 - 인공지능의 복음서와 묵시록
인공지능의 복음서와 묵시록 ― 듀나의 SF를 ChatGPT와 함께 읽다 노대원 한국 SF 계보에서 듀나라는 나비 효과 2024년은 듀나(DJUNA)가 창작을 시작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근본적으로 듀나의 SF 소설들은 1990년대의 PC통신에 기반을 둔 디지털 문학으로 출발했다. ‘기술적으로 포화된 사회의 문학’(로저 록허스트)1)이라는, SF에 관한 한 정의는 듀나의 SF에도 적절하다. PC통신 기술을 가능하게 한 한국 SF 팬덤의 본격화는 활발한 SF 아마추어 창작의 출현과 궤를 같이한다. 듀나는 자신의 초기작을 “90년대 통신망 문화에서 자연 발생한 잡동사니”2)라고도 표현한다. 여기서 PC통신은 독자가 곧 작가가 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이었다. 듀나가 그간 필명으로 디지털 공간에서 활동해 왔던 것도 디지털 문화의 한 특성으로 볼 수 있다. 박상준은 “사이버 시대의 상징적인 아이덴티티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3)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과학소설 동호회의 팬덤 문화는 듀나라는 걸출한 SF 작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기술적 · 사회적 맥락이지만, 물론 그것만으로 듀나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시절 등장한 많은 아마추어 SF 작가들이 모두 작가로서 명맥을 이어 나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SF 작가 이경희는 듀나의 초기 작품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초기 듀나 작품의 특징을 아주 단순화해 정의하자면 영미 장르문학의 장르 관습과 한국 문학의 세련된 문장이 결합된 형태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레퍼런스 삼을 국내의 SF가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듀나는 이 둘을 재료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4) 이 점은 듀나 스스로 작품의 레퍼런스를 자주 드러내는 것으로도 알 수 있고, 초기 창작의 상황을 회고하는 글에서도 동의할 수 있다. 작가의 개성과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작가가 스스로 영향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여지가 많다. 그러나 듀나는 장르 작가로서 자신이 위치한 계보와 상호 텍스트적 맥락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창작의 전략으로 활용했다. 장르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정체성을 지닌 작가로서 듀나의 SF 소설들은 ‘한국 SF 장르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5)이다. 듀나 SF에서 탈식민성은 서사의 소재와 내용과도 관련되지만, 특히 듀나의 초기작들에 집중한다면, 주로 영미 서구 문화에 기원을 둔 SF 장르를 수용하고 한국적으로 다시 쓰는 현지화 과정 자체에 더욱 주목할 수 있다. 듀나 이후로 김보영, 배명훈과 같은 SF 작가들은 한국 SF의 현지화(localization)와 진화를 이어 나갔다. 그동안 PC통신 기술은 인터넷과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으로 이어졌다. AI는 SF가 현실의 서사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SF 장르는 한국의 문학적 우세종이 되었다. 이 글은 일상화된 AI 시대에 30년 전 듀나의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863상세보기 -
비평 박인성 - 문학이라는 시대착오와 시차(時差)의 일상화
문학이라는 시대착오와 시차(時差)의 일상화 박인성 ‘시성비’의 시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표현은 다소 정정될 필요가 있다. 인생은 지나치게 빠르고 예술은 지나치게 느리다. 우리 시대의 키워드는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다. 그리고 시성비를 확보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은 바로 숏텀-피드백(short-term feedback)이다. 요구에 대하여 빠르게 응답하는 것, 입력(input) 대비 빠른 출력(output)을 도출하는 것. 이러한 경향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면 결과에 이르는 과정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과정의 올바름보다는 과정의 빠름, 더 나아가 과정 자체가 생략되고 결과만 도출되는 것이야말로 수용자들에게 가장 큰 만족을 준다. 최근 숏텀-피드백에 대한 선호는 단순히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를 뛰어넘어서 디지털 시대에 대한 보편적인 감수성으로 확장되는 중이며, 피드백의 지연을 직접적인 피해나 손해, 경제적이거나 정신적인 차원의 이득과 손실로 환원하는 소비자 감수성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따라서 숏텀-피드백에 대한 효능감은 빨라지는 것에 대한 체감보다 느려지는 것에 대한 역체감으로 두드러진다.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 응답이 느리게 오는 것은 소비자로서의 권리에 대한 침해이며 손해의 발생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소비자 권리로 환원하여 자신이 정당한 권리에 비하여 그 결과를 누리지 못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피해자 정체성이 횡행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대로 우리가 기존의 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해 왔던 고전적 가치들은 주로 롱텀-피드백에 속한다. 노력, 숙련, 취향, 성장 같은 것들 말이다. 대체할 수 없는 경험적 가치는 점점 더 쇠락하고,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경험을 압축하여 정리한 정보다. 유튜브의 요약정리 영상이 아니면 더 이상 책이나 영화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사를 구성하는 플롯(plot)의 논리는 지나치게 느리고 효율적이지 않다. 롱텀-피드백은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만 그 결과값에 대해서는 보장해 주지 않는다. 따라서 롱텀-피드백의 실패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그동안 결과를 위해 쏟아부은 각종 정신적-물질적 투자의 무화(無化)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과정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경로의 다양성이나 결과 이외의 성취에 대한 부정이 전제되어 있다. 롱텀-피드백은 오늘날 너무나 치명적인 실패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실패를 하려면 빠르게 하는 것이 낫다. 조금 투자해서 빨리 실패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치명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숏텀-피드백에 천착하는 시성비 추구 경향은 글로벌한 보편 현상이다. 게다가 ‘빨리 빨리’ 문화를 통해서 원래도 더 빠른 것에 가치를 부여해 온 한국은 그중에서도 최첨단의 시성비 사회라, 더 나아가 ‘속도 전체주의’ 국가라 할 만하다. 한국은 6·25 이후 폐허에서부터 압축적인 경제적 성
작성일 2024-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919상세보기 -
비평 송현지 -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3)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3)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4.1) 전망과 실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파솔리니의 시영화cinéma de poésie 를 분석하며 시적인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아 온 파솔리니는 이 영화에서도 무색무취의 광산 가스처럼 “아무런 [위기의] 기미 없이” 다가오는 파국을 우리가 감지하게 하기 위해 몽타주를 사용한다. 세계가 정상성을 위장하고 있음을 가리켜 보이고, 보이지 않는 사태를 가시화하는 예술의 역량이란 우리에게 익히 익숙한 것이지만, 그 방법론에 대한 디디-위베르만의 다음과 같은 상세한 설명은 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 역량을 발휘하는가를 증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무엇인가를 겪는/시도하는 어떤 방식.” [······] provare는 (파솔리니가 분명 염두에 두고 있었을) 여러 가지 의미를 함께 모았을 때에야 가장 정확해질 수 있는 동사이다. provare는 (예를 들어 소박한 장미와 같은) 무언가 앞에서 요동치는 감정이라는 의미에서 분명 “겪다éprouver” 또는 “느끼다ressentir”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장미가 분노에 이어지는 것처럼) “보기 위해” 여기에서 연결된 세계의 요소들에 관한 발견적 작업이라는 의미에서 “시험하다essayer”이고, “실험하다experimenter”이다. 그리고 다시, 역사적 연역과 세계의 모종의 상태(1840년대 마멜리의 애국가와 1960년대 정치 시인 파솔리니의 글 사이 어딘가)로부터 축조된 판단이라는 의미에서 이 낱말은 “증명하다prouver”를 뜻한다. 『이단적 경험』의 저자에게 시는 세계를 prova(시험) - 이는 또한 시간의 prova다 - 하는 양상 또는 양태화로서 증명을 뜻할 것이다. 한편으로 논증된 사유, 증거, 판단을 낳고, 다른 한편으로 구어적이거나 시각적 형식 속에서 양태화되는 감정을 낳는 에세이essai 또는 실험이다.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영화 의 기획을 특징짓고 있다.2) 인용 글은 어느 시선집 서문에 파솔리니가 적은 문장을 디디-위베르만이 섬세하게 분석한 부분이다. 파솔리니는 자신의 시와 영화 사이의 등가성을 분석하는 시도를 비판하면서도 여기에 “무엇인가를 겪는/시도하는 어떤 방식Un certo modo di provare qualcosa이 [······]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적는데, 디디-위베르만은 이 문장에서 사용된 ‘겪는/시도하는provare’이라는 동사의 다양한 의미에 주목하여 파솔리니
작성일 2024-03-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63상세보기 -
비평 황사랑 - 유령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
유령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 - 김선오 · 안미린의 시를 중심으로 - 황사랑 1. 유령 문학의 역사 인간의 역사에서 유령은 언제나 함께였다.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 서사시에서 길가메시에게 저승의 풍경을 묘사하는 엔키두의 유령부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하는 선왕의 유령, 수많은 공포 영화와 게임까지 인간이 있는 곳에 유령이 등장하지 못하는 자리는 없다. 인간에게 유령은 죽음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만든 타자였으며, 죽은 자를 추모하는 관습을 만들어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다.1) 그렇다면 지금 한국 문학장에 등장하는 유령들은 어떤 이유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며 이전 시기의 유령들과는 무슨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90년대까지 문학에서 유령은 대부분 한을 품고 이승을 떠나지 못했던 존재였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문학에 등장하는 유령들에게서 미묘한 변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봉준은 자신의 평론집 『유령들』에서 유령을 “이미 죽었으나 충분히 죽지 못해 살아 돌아온 유령”과 “살아 있으나 시체로 간주되는 유령적 존재”로 구분하며 존재를 부정당한 후자의 유령들을 김이듬, 최금진, 안현미, 신해욱, 강성은 등의 시에서 발견해 냈다.2) 즉, 애도되지 못했기에 출현하는 유령들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지만 존재 자체가 문제시되어 계속해서 발화할 수밖에 없는 유령들이 출현한 것이다. 소설의 경우에도 주체와 유령 타자의 관계가 변하고 있음을 김영찬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백민석, 신경숙, 윤대녕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관심이 환상이 아닌 현실의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포착했다.3) 90년대의 문학이 사회적 관심에서 밀려난, 토대가 없는 환멸의 공간에서 만들어진 것을 기억할 때4) 2000년대의 유령 문학이 보여주는 현실로의 이행은 허무주의와 그에 따른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신수정이 윤성희와 황정은의 소설에서 애도의 작업에서 벗어나고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윤리적 가능성’을 발견한 것처럼5) 이제 유령은 환상이 아닌 현실적 타자가 된다. 너무나 인간적인 2020년대의 유령들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많은 논자들이 주목했듯 최근 소설에서 나타나는 유령들은 인간과 함께 생활하고 인간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등장한다.6) 인간과 다르지 않은 친근한 유령들이 등장하는 경향은 시에서도 뚜렷하게 발견된다. 강아지를 따라 움직이고 인간에게 말을 붙이며 인간과 같이 걷는 김선우의 “따스한 유령들”(「내 따스한 유령들」)이나 김리윤이 보여주는 “모든 거리를 초월해 가까이 있는”(「사실은 느낌이다」) 유령, 그리고 강지이 시의 화자가 “유령과 나란히 서서/손을”(「캠핑 일기」) 흔드는 모습을 통해 유령이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작성일 2024-03-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42상세보기 -
비평 조윤정 - 지하 도시와 늪에서 발견한 생성의 감각
지하 도시와 늪에서 발견한 생성의 감각 : 천선란의 『이끼숲』과 김초엽의 『파견자들』에 관하여 조윤정 1. 지하 도시의 건설과 세계의 배치 지하 건축은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왔던 방식이다. 고대 도시에서 지하는 포도주 저장소와 같은 곳간, 카타콤(Catacomb)과 같은 무덤이나 도피처로 활용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하를 훨씬 다양한 형태로 점유하고 있다. 각종 상업시설과 문화시설이 지하 가로망이나 교통 시스템과 바로 연결됨에 따라 지하와 지상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미래의 지하 공간은 현재의 우리 삶을 확장한, 지상과 다르지 않은 지하의 수준을 넘어설 것이다. 지하는 고립의 프레임을 넘어 확장성과 입체성을 창출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지하 공간은 하늘 위로 높이 솟은 빌딩들이 줄 수 없는 연결의 감각을 제공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공간과 공간의 연결로 바라보게 해준다. 또한, 지상의 영향을 덜 받는 지하 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환경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환경을 임의대로 조정할 수 있는 밀폐형 미래도시는 기후 위기에 따른 재해를 타개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적극적인 대안이다. 천선란과 김초엽의 최근 소설1)에 등장하는 지하 도시는 다시금 지하 공간을 도피처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만, 두 작가의 소설에서 지하 도시는 고대와는 달리 인류 전체가 지하로 옮겨간 형국이며, 지상은 인간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훼손된 곳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국가별 경계를 염두에 둔 지정학적 차원의 문제는 논의되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은 지구라는 행성 단위로 사유된다. 그 속에서 인간은 철저히 통제당하고 감시당한다. 『이끼숲』에서 하루에 한 알 복용해야 하는 “VA2X”(27)와 이마에 삽입된 “칩”(113)은 생명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또한, 『파견자들』에서 인간에게 광증을 일으키는 “범람체”에 노출된 인간은 보호소로 위장한 연구소에 격리되거나 “실험체”(273)로 관리된다. 오늘날 기후나 면역의 위기는 전 지구적인 것에 대한 상이한 이해들에 다가가는 일을 앞당기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천선란과 김초엽의 소설은 세계라는 관념을 흔들고 인류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성으로 관심을 돌린다. 행성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지정학적일 수밖에 없는 지리적 지도들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이 지도들의 경계선은 정복자의 노획물과 다름없으며 국경은 대개 전쟁이나 식민화를 통해 만들어졌다.2) 소설 속 지하 도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세계의 좌표들을 유예하거나 버림으로써 세계의 구조와 한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전도되고 재설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구 밖의 다른 행성이 아니라 오로지 지구 내에서 모두가 살아 나가야 할 때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배치’의 문제이다. 배치는 무생물로 존재하는
작성일 2024-02-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06상세보기 -
비평 송현지 -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2)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2)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3. 새로운 돌봄 공백 교사의 위기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대두된 이래 그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들이 제출되었다. 멀리는 1995년의 5·31 교육개혁에서부터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문제, 교육의 서비스화로 인해 서비스 수혜자와 공급자로 바뀐 학부모1)와 교사의 관계, 저출산 등이 심층적으로 논해졌다.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은 교사의 위기가 사실상 여러 사안들과 연계되어 있는 복잡한 문제임을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다양한 방향으로 활성화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예컨대, 현 사태의 책임이 인기 예능 2)에 상담자로 출연한 오은영 박사의 교육관에 일정 부분 있다고 보고 한동안 그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던 일과 앞서 언급한 여러 분석들이 사실은 교육 소비자이자 민원 제기자이자 ‘금쪽이’의 양육자, 그리고 그들이 길러낸 금쪽이들을 공통적으로 문제 대상으로 가리킨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물론 여기에는 학부모의 악성 민원이 교사의 죽음에 주된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되는 정황들과 이를 교권침해의 주된 요소로 꼽는 교사의 목소리3)가 자리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논의들 틈에서 ‘맘충이 진상 학부모가 된다’는 말과 학교 및 가정 내 체벌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의견들이 큰 공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기존의 분석들이나 ‘괴물 부모’ 등과 같은 새로운 명명이 의도와는 관계없이 또 다른 혐오의 정동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느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관련한 사유를 한여진의 다음 시를 통해 조금 더 확장해 보자. 공동주택 건축불량 아파트 하자보수 판결문*에 따르면 누수의 원인은 수십 가지나 되고 또 누수라는 것은 꼭 한 가지 원인으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이쪽에서 새던 것을 잡으니 다음날에는 저쪽에서 새기도 하는 것이라서 결국 한번 발생한 누수는 지속적으로 모두를 의혹 속에 빠뜨리고 아래층에 사는 사람도 위층에 사는 사람도 다 같이 한마디씩 보태지만 물은 계속 흐르고 그런데 물의 성질이란 무엇인가 누수를 경험한 사람들과 누수를 경험하게 될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렇게 흐르는 것 자기소개가 흘러가고 그때 뒤늦게 누수를 잡으려는 사람이 합류하고 어딘가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우리가 그동안 안이했던 거죠 모두가 누수를 잡기 위해 공동주택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그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이곳은 참 조용하군요 원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몰려든 사람들 중 누군가 울고 있었다 * 법률나무, 『공동주택 건축불량 아파트 하자보수 판결문』, 서울문학, 2021. ― 한여진, 「조사」(『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 전
작성일 2024-02-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06상세보기 -
비평 김다솔 - 유령의 자리, 유령의 미래
유령의 자리, 유령의 미래 김다솔 1. 이 유령은 그 유령이 아니다. 이 글은 한국 소설과 관련하여 “2020년대적인 유령적 상상력의 힘을 톺아보려는 시선”1)을 모색해 보고 싶다는 다소 거창하고 민망한 바람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여기에는 최근의 소설들에서 대거 출몰하는 유령들을 향한 흥미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향한 비평적 관심에 이끌린 사정 역시도 함께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최근의 유령들을 유독 ‘인간적’2)으로 보거나, 그들이 현실에서 정치적 변화를 추동하기에는 지나치게 미약한 힘을 가졌다는 평가다. 논의에 앞서 결론을 먼저 밝혀 두자면, 그것만으로 최근의 유령들을 간단히 정리해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어떤 관점이든지 사태의 총체를 담지 못하는 필연적인 결여를 안고 있다는 통상적 의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020년대의 유령이 지닌 중요한 특수성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먼저 무언가의 이면, 즉 그림자로 나타나는 유령이 반드시 인간과만 관련된 것일 필요는 없다. 유령은 그 자체로 인간 아닌 무언가를 지칭할 때 통용되는 단어가 아니던가. 특히 인류세 속에서 팬데믹과 기후변화를 겪으며 비인간 전회라는 전환이 이미 당도했음을 절감하는 지금, 행위자로서의 비인간 존재들을 어렴풋하게나마 더듬어 가려는 우리에게 유령은 오히려 인간-됨을 허무는 무언가로 접촉해 오는 듯도 하다.3) 또한 후자의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데, “세계가 어떠한 인과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계기들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는 믿음 속에서,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자유롭게 유령과 접속”4) 중이며, 따라서 “그들의 삶을 특정하게 속박하고 규정하고 있는 듯한 사회에 대해 어떤 방식의 구체적인 적대를 드러내는 것은 어려워 보”이기에 “자기위안과 무기력의 상태를 탈피”할 방법을 소설이 더 찾아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5)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비교 대상으로서 이전 시대의 한국 문학 속 유령과 환상의 경향을 논의하던 잣대를 그대로 적용하여 현재의 유령들을 바라보기에 다소 문제적이다. 자신을 산 죽음의 영역으로 내몬 세계와 불화하고 적대하면서 상징계에 구멍을 내던 실재로서의 유령6)과 견주어 보았을 때, 작금의 유령들은 지나치게 연약하다는 것이다. 문제를 조심스럽게 확대해 보자면, 이러한 경향은 비평의 위기를 논하는 평단의 상황과 함께 놓고 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진다. 인아영은 최근의 글에서 동시대 한국 문학 비평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진단, 즉 ‘무(無)비판’성과, 반대로 비판적 사고를 지식-권력의 기능으로 사용해 온 비평의 ‘과(過)비판’이라는 의견들을 검토하며 비평이 취해야 할 어떤 방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인아영에게 이러한 평가들은 사실상 “비판을 행위자들의 구체적인 실천이 아니라 주어진(주
작성일 2024-0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154상세보기 -
비평 송현지 -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1)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1)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0. 복수극의 이면 고백하자면, 나 역시 〈더 글로리〉1)의 애청자였다.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문동은(송혜교 분)이 계획대로 가해자 박연진(임지연 분)의 딸 하예솔(오지율 분)의 담임교사가 되자 복수가 언제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를 기다리느라 초조했고, 가해자들의 삶이 하나씩 망가져 갈 때에는 온 마음으로 기뻤다. 살인, 폭력, 리벤지 포르노 등이 얽힌 그녀의 보복 과정에는 분명 잔혹한 데가 있었지만 이를 즐기는 데 내가 일말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문동은의 복수에 쉽게 동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폭력이 어떻게 행해졌으며 또한 어떻게 방관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각각의 에피소드와 그녀의 몸에 여전히 선명한 상흔 역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앙갚음을 정당하게 여기게 하는 주요한 요소였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지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복수의 와중에도 그녀가 ‘올바른’ 선생님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만큼은 진심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세명초 1학년 2반 담임으로 학생들 앞에 처음 선 그녀가 앞으로 이 교실에서는 부모의 직업과 재력과 인맥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더 좋은 옷과 차와 집이 있다는 이유로 다른 친구를 괴롭히지 말 것을 엄포할 때, 하예솔에게 어떠한 해도 직접적으로는 가하지 않으면서도 죄 없는 그녀가 결국 받게 될 상처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때, 나는 이 복수를 더욱 응원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동은의 모습은 드라마가 그와 대비되는 교사들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다룸으로써 더욱 돋보였다. 문동은의 고등학교 시절 담임으로 학교폭력을 방관하고 오히려 가해자 편에서 합의를 종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폭행까지 서슴지 않았던 김종문(박윤희 분)과 자신이 교사로 부임한 초등학교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치마 속을 촬영하는 추정호(허동원 분)는 정확히 문동은과 대극되는 자리에 있다. 작가는 이 ‘올바르지 않은’ 교사들을 극 중에서 모두 처단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행위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김종문은 자신을 둘러싼 추문으로 장학사가 되지 못할 위기에 처한, 역시나 교사인 아들(강길우 분)에게 간접적으로 죽임을 당하고, 추정호는 하예솔의 친부인 전재준(박성훈 분)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드려 맞는다. 2000년대 이전에 학창 시절을 보내며 교사의 물리적 · 언어적 폭력은 물론 젠더 폭력을 일상적으로 경험했던 이라면 이러한 결론에서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이들에 대한 단죄가 이처럼 복수의 주요 에피소드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이 복수극의 이면에는 교사와 학생 간의 오래된 위계 관계가 자리한다고 말해도 좋겠다. 그런데 복수를 실행하기 위한 문동은의 주요 전략을 다시 세심히 살펴보면 이는 충분한 설명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애초에 문동은이 박연진 딸의 담임이 되려고 노력한 것 자체가 교사와 학생만이 아닌, 교사와 학부모의 위계 구도를
작성일 2024-0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89상세보기 -
비평 송종원 -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3)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는가 (3) 송종원 1. 문제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다. 1회 차로 다시 시선을 돌려보자. 그때 말해두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이근화시의 기묘한 나르시시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나인 듯 어느 맑게 개인 날에 시금치를 삶고 북어를 찢는다 골목마다 장미가 피어나고 오후에는 차를 마신다 어느 맑은 날에는, 낮잠을 자고 어김없이 목욕을 하고 나는 또 나인 듯이 외출을 한다 나는 나에게 다 이른 것처럼 클랙슨을 울리고 정말 나인 것처럼 상스럽게 중얼거린다 국부적으로 내리는 비, 어느 날엔가 나는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빗방울은 말없이 떨어진다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손등을 어깨를 훔쳐본다 -「지붕 위의 식사」 전문1)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른하게 쓰인 인상이다. 낮잠을 자고 목욕을 하고 외출을 하고, 그러다 간혹 욕설도 하고, 어딘가 스스로에게도 조금은 낯선 나의 모습에 집중 내지 도취되어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설명하기에 꽤 그럴듯한 ‘나’처럼 보인다. 만끽까지는 아니지만 나에 심취된 정황이 꽤나 선명하다. 그런데 이를 나르시시즘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성별이 누구의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정 성별에 대한 세계의 압박을 몰라 볼 때 자아의 빈곤 상태를 자아의 도취로 읽는 일이 벌어진다. 약간 우회하자면, ‘내’가 아니라 이 시에 쓰인 ‘날’에 대해 우선 주목해보자. 이 날은 어떤 날일까. 시에는 그에 대한 구체적 정황이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반복되는 ‘어느 맑은 날’이라는 표현은 어딘가 특별한 날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 날은 내가 나에게 이를 수 있는 일이 특별히 허용된 날인 듯하며, 나의 생의 국부적인 날이고, 남의 몸이 되어가는 듯한 나의 몸을 감각하면서 나를 돌볼 수 있는 날이다. 거꾸로 다시 풀자. 평소 대부분의 나날은 내가 나에게 이를 수 없으며, 나를 돌보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자아를 버리기를 요구받는 환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시의 화자를 한국사회의 20-30대 여성 정도로 간주해보면 우리는 의외의 진실을 마주한다. 한국에서 여성의 노동 생애를 비추어볼 때 젊은 여성들에게 일터는 점점 커지는 자기 소멸의 느낌을 맛보는 장소이다. 일터라는 공적 영역은 오랜 기간 남성이 정의 내리고, 남성이 지배하고, 남성의 권익을 유지해온 장소였다. 근대 자본주의가 확장해낸 수많은 일터에서 여성은 불청객 취급을 받았고 자신의 ‘여성성’을 쩔쩔매며 관리해야 할 무엇으로 인식하게 된다.2) 같은 글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류 남성성을 상상할
작성일 2023-12-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77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