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낯선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기

  • 작성일 2024-12-01

[에세이]


   낯선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기


이주라


   역사 없는 사극


   언젠가부터 사극과 시대극에서 역사가 사라진 지 오래다. 2000년대 초반 팩션(faction)의 열풍을 시작으로 역사적 자료는 상상의 원천이 되었고, 역사극은 역사적 사실에 현대적 상상력을 덧입힌 트렌디한 드라마로 재탄생하였다. 영화 <왕의 남자>나 드라마 <대장금>은 조선왕조실록의 단 한 줄짜리 기록에서 시작하였다. 역사적 공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일이 판타지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대중문화 속에서 역사극은 더 이상 역사적 고증이라는 부담을 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실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서 역사극을 볼 때 역사적 고증이 잘 되었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기준은 의미 없다. 역사극 자체가 역사적 허구이고, 이미 허구적 상상의 세계로 재구성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허구의 세계 속에서 대중이 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재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재미가 있다고 해서 역사적 왜곡을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대중 수용자는 역사적 허구를 허구로 인지하고 있으며, 허구적 재현 속에서 왜곡된 부분에 대해서는 관련 논쟁을 통해 문제 사실을 인지하고, 스스로 정보 검색을 통해 역사적 왜곡을 수정할 만한 충분한 판단력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극을 볼 때 너무 고지식하게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재현했냐 아니냐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요즘에 역사극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다른 걱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팩션의 시대 이후로 최근 역사극 드라마들이 대부분 ‘한복 입은 로맨스’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역사극을 볼 때 역사적 고증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기는 하지만, 그래도 계속 마음에 찜찜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하게 잡아낼 수 없어서 아예 역사극을 보지 않는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 재밌자고 보는 드라마 아닌가. 알 수 없는 답답함 때문에 휴식의 시간을 날릴 수는 없었다.

   그러다 최근 우연히, 일 년 전쯤 방영한 ‘한복 입은 로맨스’를 보게 되었다. 조선 시대 양반가의 딸이 자신만의 옷을 몰래 만들어 팔다가 타임슬립을 하여 21세기 한국에 오게 되고 거기에서도 한복 디자이너로 활약하면서 조선 시대 자신에게 닥쳤던 곤경을 해결해 나간다는 이야기다. 여주인공은 조선 시대에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갑작스럽게 죽게 되었는데, 현대 한국으로 타임슬립해 보니 조선 시대의 인간관계가 똑같이 반복되었고,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여주인공은 이 살인 사건에 숨겨진 전모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조선 시대로 돌아가 자신을 죽인 범인을 잡는다. 

   예상외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결국 걸리는 부분이 생겼다. 문제는 조선 시대로 돌아간 여주인공이 범인을 잡는 장면이었다. 여주인공이 갑자기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범인을 쫓아가는 것이다. 마침내 여주인공이 범인을 잡는다. 이 범인은 덩치 큰 남자 하인으로, 몽둥이를 들고 쫓아온 여주인공 집 노비들도 이미 물리치고 도망갔다. 그런데 우리의 여주인공이 한복 치마를 펄럭이며 그 범인을 잡은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은 멋있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양반가의 여식이 진짜 서양 시대극의 귀족 여성처럼 승마와 양궁까지를 배웠을까. 이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는 것은, 역사극은 역사적 고증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것보다는 과거라는 시공간 자체가 꼭 저렇게 현재와 유사해야 할까. 이 의문이 더 크게 다가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최근 고증을 가볍게 넘어서는 역사극에서는 과거라는 시공간을 현재 우리가 사는 현실 그 자체 혹은 일상에서 경험한 문화 콘텐츠와 동일한 방식으로만 상상한다. 현대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자신만의 성취를 이루어 내고, 적극성을 가지고 자기 일을 스스로 해결하며, 심지어는 신체적인 능력도 뛰어나서 격투 장면도 소화를 하는 것처럼, 조선 시대 여인들도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돈을 벌며, 담 넘기, 활쏘기, 변장, 달리기 등은 쉽게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허구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과거는 현재와의 대화라고 했으니, 현재의 관점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도 좋다. 다 인정한다. 그래도 과거가 현재와 동일할 수는 없다. <박씨전>처럼 조선 시대 여성에게도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구국의 영웅이 되고자 욕망은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 현실에서는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통해 허구적 상상으로나마 또 다른 존재가 되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현재에 가능한 것이 과거에도 똑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최근 역사극 드라마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과거의 삶이 현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상정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과거는 사라진다. 과거의 역사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중 하나는 현재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배우게 한다는 점이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기 전 개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했는지, 임금이 곧 국가이던 시절에 국민이 국가라는 공화정의 이념은 과연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여성에게 현모양처의 삶을 강요했던 시대 여성의 욕망은 어떤 균열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렇게 낯선 세계를 생각하게 해 주는 것 또한 역사의 기능이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가치와 태도가 적용되지 않는 또 다른 세계도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와 동일한 시공간이 아니다. 현재의 시선에서 보면 오히려 낯선 세계일 수 있다. 역사극은 허구적 상상을 통해 과거에 대한 재해석을 할 수 있지만, 과거를 현재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라고 재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브리저튼(Bridgerton)>의 경우처럼, 현재의 정치적 올바름을 구현하기 위해 역사극에 흑인 여왕과 귀족의 존재 가능성을 전제로 깔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흑인 여왕의 등장으로 인종 차별이 완화된 시대가 과거에도 있었다면, 그 진보적 과거에 왜 귀족 여성들은 아직도 결혼에만 얽매여 있는 존재인 것인가. 인종차별도 사라졌는데 왜 그 시대에는 가부장 중심의 일부일처제는 사라지지 않았는가. 무엇보다도 위험한 일은 그 시대 실존했던 대다수의 흑인 노예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현재도 엄연히 존재하는 인종 차별과 젠더 차별의 현실을 과거라는 판타지 시공간에서부터 역사적으로 정성스럽게 지워나가게 된다는 점이다. 그 결과 현재는 우리가 문화적이고 예술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구현해 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고, 과거는 현재의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적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현재의 시야에 갇혀 버리게 된다. 현재 경험할 수 없는 낯선 과거를 통해 낯선 세계를 사고하면서 얻을 수 있는 새롭고 다양한 시야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동일화라는 지옥


   모든 것을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만 바라보면 사고의 폭은 좁아진다. 낯선 세계가 불편하여, 그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왜곡하여 편안하게만 받아들이면 새로움을 통해 확장될 수 있는 세계는 사라진다. 새로움의 경험은 다양성의 확장이다. 새롭고 낯선 것은 우리가 자신의 제한된 시야에서 벗어나 다양한 삶의 가치를 수용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최근 대중문화에 나타나는 모습은 과거도 판타지의 2차 세계도 모두 현재의 반복일 뿐이다. 그렇게 동일한 현재의 무한 지옥에 갇혀 있다.

   연상호의 <지옥>은 다름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이고, 모두의 같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문제적 상황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지옥>은 사적 복수, 사이비 종교, 처벌하는 신, 공정성 추구에 대한 강박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들면서 생겨나는 현대 한국 사회의 문제 지점을 흥미롭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화살촉’이라 불리며 새진리회의 강령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집단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화살촉 집단은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틀렸다’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틀린 사람들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사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동을 사회의 정의 구현이라고 생각한다. 

   새진리회와 화살촉 집단은 현재의 기준에서 인간의 죄를 찾고자 한다. 아빠가 다른 아이를 둘이나 낳은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이 죄인으로 지목된다. 사람들은 그 여인의 죄를 추측한다. 어쩌면 유부남들과 바람을 피워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아이를 혼자 낳아 기른 것일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죄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죄는 낭만적 연애를 통해 결혼을 해서 일부일처제 가정을 순결하게 유지해야 하는 근대 가족 체제에서 생겨난 죄다. 그것은 현재의 죄일 뿐이다. 그 죄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죄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현재에도 어딘가 존재하는 모계 중심 사회에서는 죄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화살촉 집단은 현재의 가치와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라 판단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맞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모두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다른 사회를 상상하는 능력이 없다. 그렇게 현재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공정성의 기준이 정의의 모든 기준일 것이라 생각하는 사고의 빈약은 폭력의 정당화로 손쉽게 연결된다. <지옥>은 이런 동일화에 대한 요구가 낯선 타자를 배제하며 인간 사회의 다양성을 폭력적으로 파괴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옥>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재 한국 대중문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현상 중 하나는 모두가 자신에게 낯선 세계를 배제하고 익숙하고 편한 세계에 계속 머무르려고 한다는 점이다. 내가 알고 있고 그래서 익숙해서 불편함이 없는 세계 속에서 그것과 같은 세계만을 무한 반복 생산하고 있다. 최근 대중문화의 과거라는 시공간 그리고 판타지의 2차 세계는 현재의 세속적 욕망을 손쉽게 구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로서만 활용될 뿐이다. 그래서 과거는 현재와 같아지고, 판타지의 세계도 현재와 같아진다. 이런 동일화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다양함을 추구할 수 없다. 

   그런데 동일성의 추구가 단지 폭력적인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동일성의 추구는 점잖고 교양 있는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최근 한국 출판계의 베스트셀러로 올라오는 소설 중에 ‘K-힐링 소설’이라는 홍보 문구를 단 작품들이 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나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 아니면 『메리골드 마음세탁소』처럼 현실에서 곤경에 처한 주인공들이 판타지 공간으로 가서 마음의 치유를 하고 돌아와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 내는 이야기들도 있고, 『불편한 편의점』이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처럼 현실 세계의 특정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치유하는 이야기도 있다. 

   비록 홍보 문구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들은 ‘마음의 치유’를 내세운다. 이때 이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마음의 치유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다른 좋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소통을 하면서 나 자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의 어떤 기준이 마련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작품들에서 좋은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래야 한다. 그렇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나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내가, 그와 동일한 좋은 사람을 만나서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은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야지만 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는다는 말이 된다. 결국은 나와 동일한 자아와 마주해야지만 나는 치유 받을 수 있다. 이는 나와 다른 타자, 낯선 타자, 그래서 불편한 타자는 만나지 않겠다는 의미일 수 있다. 이른바 ‘K-힐링 소설’에서 말하는 마음 치유도 이렇게 낯선 타자에 대한 배제, 익숙한 동일성에 대한 추구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현재 한국 대중문화에는 폭력적인 방식이든 교양 있는 방식이든 나와 다른 타자를 불편해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질성에 대한 배제와 동일성에 대한 추구는 우리 사회가 낯선 타자의 존재를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대중문화를 통해 현재의 욕망을 읽어 낼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이렇게 낯선 타자에 대한 수용성이 사라져 가는 것의 위험성을 감지하는 것이다. 낯섦은 새로움이고, 새로움은 불편함이다. 이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낯선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우리 사회의 수용성을 높이고 다양성을 넓히게 할 것이다.

추천 콘텐츠

응원의 방식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응원의 방식 -염승숙, 「지도에 없는」 (《문장웹진》2007년 4월호) 조경란(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좋은 소설에 대한 사적인 기준 단편소설 「지도에 없는」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엔 2007년 4월에 《문장웹진》에 수록되었을 때, 두 번째는 이듬해 염승숙이라는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앞에 두 번을 읽었을 때는 나도 아직 중견작가라고는 불리지 않을 시기였고, ‘소설’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바삐 뛰면서 소설을 쓰던 시기라면 지금은 느리게 걸으며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어느 면으로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나 취향, 좋은 소설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거의 처음 읽는 소설처럼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는 예전에는 이 단편을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여겨 버렸을지 모른다. 이야기나 인물보다는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의 완결성과 미학적인 면에 더 집착하기도 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이 어떤 메스(mess), 즉 그것이 크기와 상관없이 ‘엉망인’ ‘헝클어진’ 상황에 인물이 놓이고 거기서 출발한다고는 여전히 여긴다. 그 메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조용히 파동하는 미니멀리즘 이야기에 가까우며 메스의 크기가 크면 큰 소동, 리얼리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어때야 할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단상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은 요즘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인물을 둘러싼 공간을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하게 구축해야 하고, 인물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결말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의미(meaning)가 작게라도 내포된 소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시대를 담고 있을 것. 그런 개인적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읽게 된 셈이다. 그래서 놀랐다고 할까, 그리하여 놀랐다고 할까. 당시 첫 책도 내지 않았던 젊은 작가 염승숙은 혹시 십팔 년 후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이십 대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도 변하지

  • 관리자
  • 2025-07-01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문장웹진》2007년 5월호) 서경석(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 관리자
  • 2025-06-01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

  • 관리자
  • 2025-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