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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들과의 마지막 데이트

  • 작성일 2006-05-16
  • 조회수 449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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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의 자각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2월의 봄날이었다. 아침 뉴스에서 애써 태연하게 예보했던, 예상보다 한 달 이른 봄 더위를 미처 못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코트와 재킷을 벗어들고 걷어 올린 팔로 손부채질을 해서 땀을 식히려 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노천카페에서 쉬고 있었다. 햇빛은 노란색, 그늘은 파란색. 차가운 땀을 흘리는 아이스티를 나는 마셨고 그녀는 긴 유리잔 속 콜라의 보글거리는 적갈색 기포들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바람이 가늘게 불었고 시간도 잠시 멈춰 쉬어 가는 듯했다. 콜라 잔을 바라보던 눈길이 무심코 내 시선과 마주칠 때, 그녀는 미소했다. 무심한 미소였지만-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 남자는 항상 파멸을 예감한다고 한다. 그 때 나도 파멸을 예감했던 걸까? 그 때 그녀의 미소를 생전 처음 보듯 본 순간 내 심장을 가득 메운 것은 파멸에 대한 예감이었던 걸까? 알 수 없다. 나에게 더 이상 과거는 남아 있지 않다. 끝없는 여백 속에서 오직 앞으로 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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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이재성. 여러분 중에는 이미 내 이름,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피험자와 지켜야 할 선을 넘은 부도덕한 연구원,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고 도망친 배신자, 시대착오적 헛소리에 바보같이 넘어간 얼간이 병신 머저리...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하나 이상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들 하고, 그리고 이제 나도 내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믿거나 말거나 공감하거나 비난하거나는 모두 여러분의 몫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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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말이었다. 연구소에서의 네 번째 프로젝트였다. 그 전에 있던 곳들까지 하면 열 몇 번째. 물론 연구소에서의 일이 상당히 독특하긴 했다. 나는 처음에는 왜 심리상담사가 필요한 지조차 알 수 없었다. 두 명의 내담자 아니, 피험자와 실패한 다음-몰랐겠지만 여러분이 본 김정일은 네 번째로 재생한 인물이었다. 첫째와 둘째는 아예 재생에 실패했고, 세 번째는 나와 적응 도중 자살했다-에 맡은 박남정이 무사히 살아남아 구닥다리 선글라스를 쓴 채 니은字 춤으로 일천구백팔십 년대 막바지 급성장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을 때, 비로소 나도 내 직무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듯싶었고, 주제넘게도 재생인격의 미래적응에 관한 어쩌고 하는 워크북을 쓸 생각까지 해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모든 자기기만적 안정감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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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룩 부푼 볼이 쉴 새 없이 오물거리며 천천히 들어간다. 야무진 입술이 열리고 너무 큰 케이크 조각이 마치 마술처럼 쏙 들어간다. 또 불룩 부풀은 볼이 오물거리며 들어가고 그러면 다시 야무진 입술이 열리다가... "아, 죄송해요. 저기, 감옥에서는 너무 못 먹고 지내서..." 아, 아녜요, 아녜요, 마음껏 드세요.

확실히 여자들이란 당황스럽다. 김정일 따위완 비교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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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프로젝트에 대해 듣자마자, 나는 검색기에 몇 개 조건을 걸어 월드넷을 뒤지도록 한 다음 도서관에 가서 낡은 책들을 잔뜩 찾았다. 이백 년 전의 독립 운동 따위는 아마 월드넷에도 별 자료가 없을 게 뻔했다. 일제니 광복이니 따위, 기껏 3월이나 8월에, 아니면 일본이랑 축구할 때나 잠깐씩 꺼내 흔드는 낡고 닳은 깃발일 뿐 아무도 기억 따위 하고 있지 않으니까. 다만, 도서관의 서가 구석에 처박혀 썩어가는 책들이면 모를까. (실제로 검색 결과는 '유관순 눈아는 외 81토막이 나써여? 혹은 유관순은 온 몸에 무궁화 문신이 모두 몇 개? 혹은 중동 석유 관세 순순히 내려갈까... 등등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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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책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화고등보통학교 학생 유관순이 학교 담을 넘어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내달린 것은 1919년 3월, 열일곱 살 되던 해였다.
그리고 4월에는 고향에 돌아가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 동네 유지들을 모아 다시 한 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아우내 장터를 뛰어다녔다.
이듬해-열여덟 살의 봄, 서대문 형무소의 감옥에 갇힌 채 동료 죄수들과 만세를 부르다 걷어차이고 얻어맞아 방광이 파열됐다. 그리고도 여섯 달 동안 썩어드는 몸으로 옥 속에 갇혔어도 만세를 부르다 결국 죽었다.

열여덟 살이었다. 온 몸에 요독이 퍼지는데도 만세만 불렀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미쳤어? 머리에 총이라도 맞았나? 약 먹은 거야?

문득 드는 생각 : 열여덟 살에 난 뭘 하고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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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로를 따라 늘어선 新노점아케이드. 옷과 액세서리, 아이들 장난감과 노인들 노리개들이 색색깔로 번쩍이고 반짝이고 움직이고 빙글빙글 돈다. 촌스럽고 천박한 바탕을 저마다 천연덕스럽게 펼쳐 보이는 꼴이 무척이나 역겹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이 신기한 듯 연신 두리번거리며 아케이드를 걷는다.
과거인의 재생은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초대형 프로젝트이자 센세이셔널한 이벤트-따라서 역사 연구나 과거사 규명 같은 명분들이 내세워져도 결국 다양한 사업과 연계되어 실시된다. 내 뒤에서 카메라맨이 하등 신기할 것 없는 풍경들을 마치 신기한 듯이 카메라로 훑으며 따라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은 특히나 중요한 일정인데, 바로 일천구백십구 년 삼 월 삼 일 당일, 프라이 교장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간 관순과 이화학당 소녀들이 만세 시위 군중들과 함께 달렸던 바로 그 길을 되짚어보는 것이었다. 삼일절 기념식에서 상영될 동영상으로 편집될 것이고 물론 동시에 M&K에서 방영될 특집 다큐멘터리에서도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마, 신기해라. 갑자기 그녀가 팔을 잡아끈다. 모자 좌판대였다. 서너 개의 사람 대가리가 각각 모자를 눌러쓴 채 끄덕이고 까닥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 애쓰고 있었다. 저것도 로보트겠지요. 얼마 전 박람회에 갔었던 그녀가 속삭인다. 나는 불안해진다. 참말 사람 같은 로보트네요. 나는 붙잡힌 팔을 서둘러 앞으로 끌었다. 어머, 조금만 더 구경하게 해주세요. 참말 사람 같아요.
한 순간, 망설여진다. 바로 그런 망설임 때문에 심리상담사를 재생인 적응 실무자로 뽑는 것이리라. 지난 일주일 동안 나는 그녀에게 상당히 밀착된 공감을 구축할 수 있었고 그녀의 정서 반응의 상당 부분을 시뮬레이트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도 그녀에겐 아주 낯선 것일 수 있었다. 그런데
- 그거 진짜 사람 맞는데요.
카메라맨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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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녀가 반쯤 웃으며 반문했다. 또 농담하는 거지요, 라는 듯이. 갑자기 뒷골이 당기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우리의 현대는 모두 놀랍고 신기하고 재밌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적응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현재상을 과시하는 것으로 일관한 것이다. 재생인들의 역할은 닳고 닳은 리포터들의 뻔한 과장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놀람과 진솔한 충격을 가감 없이 내비침으로써 시청자들의 대리만족감을 채워주는 것이다. 언제나 타자의 시선에 목이 마른 대한민국인들이니까. 어쨌거나, 아마도 같이 웃어줬으면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흠칫했고, 그녀는 이게 농담도 장난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버린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요!!
말이 되든 안 되든 상관없어요. 어차피 현실이니까. 이미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니까요. 이런 생각만이 태연하게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사이에 나는 대답할 기회를 놓쳤고, 카메라맨은 여전히 냉소적인 태도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 뭐, 끔찍하게도 불쌍하게도 생각할 필요 없어요. 다 지네들이 잘못한 거,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니까.
- 잘못이요? 그럼 벌 받는 건가요?
- 그렇게 볼 수도 있죠. 신용불량자들이에요. 병신같이 분수에 안 맞게 흥청망청 카드 긁고 놀다 결국엔 저렇게 꼬라박힌 거죠. 쪼자리들.
- 신용불량이요?
- 파산이요. 미리 돈을 내다가 갚을 능력이야 어찌 되건 비싼 음식을 처먹으러 다니고 명품 옷이네 가방이네 한정판 칩셋이네 최신형 공중차네 어쩌네 돈을 물 쓰듯 쓰다가는 사채업자한테 갈 수밖에 없고, 인격포기각서에 사인할 수밖에 없죠. 아차 하는 순간에 심장에서 콩팥까지 내장이란 내장은 죄다 내다팔리고 대가리만 남아서 저렇게 포도당 병에 꽂혀 헐값에 처분되는 거예요.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카메라맨에게 그녀는 다급하게 묻는다.
- 나라에서 막지 않나요?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만들 수가 있어요?
- 개인의 파산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일 뿐 국가가 개입할 문제는 아니죠.
여전히 심드렁한 카메라맨. 내가 끼어들려 했을 때에는 이미 유관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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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맨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당신이 대충 얼버무려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겠지 그녀는 당신의 설명을 그럴듯하게 받아들이고 당신은 안도하고 어쩌면 세상의 모든 진실들로부터 눈 돌리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본능을 따르라-당신은 이후로도 편한 길을 택하고 그녀는 현대에 편안하게 적응한다 그 해 삼일절 기념식에서 관순의 연설은 전국에 생중계된다 자신이 소망하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위대하고 찬란한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사람들은 모두 기립박수한다 관순은 텔레비전 토크쇼의 단골 출연진이 된다 어느덧 그녀를 소개하는 자막에는 방송인이라는 직함이 붙는다

그리고 당신은 새 프로젝트를 맡겠지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당신은 어딘가 알 수 없는 공허함에 잠시 텅 빈 창밖을 내다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곧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양심으로부터 눈 돌리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덕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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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유관순은 눈물까지 비친 상기된 얼굴로 좌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안 돼요! 이 사람들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아가씨 뭐야? 깜짝 놀란 노점상이 외쳤다. 이건 또 뭐야? 당신들 뭐야?
뭐긴 뭐야. 엉겁결에 끌려나온 불쌍한 상담사와 카메라맨이지. 빌어먹을. 우리라고 뭐 나오고 싶어서 나온 줄 알아?
그렇지만 당황한 나와 달리 카메라맨은 태연자약하게 계속 촬영하고 있었다. 난 그제야 의도적인 도발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제기랄. 그런 카메라맨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현장에서 우발적인 사태를 만들고 암시장에서 필름 팔아 부수입을 올리는 개새끼들. 어쨌거나,
어찌 되었거나 관순은 기세 좋게 좌판을 뒤엎었지만 나뒹구는 사람들의 대가리. 그 껌뻑이는 입과 눈들은 차마 어쩌지 못했다. 제기랄. 고백하건대 그 때만큼 관순이 역겹고 꼴사납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자기와 세계의 실상을 도외시한 채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의욕만 넘쳐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는 수습하지 못하는 작자들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나는 이상하게 끼어드는 쾌감을 애써 내리누르며 이리저리 흩어진, 둥근 포도당 용액통에 연결된 인두들을 침착하게 주워 모았다. 그리고 뻐기는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 최대한 애쓰며 관순을 쳐다봤다. 그리고 놀랐다. 관순은 이미 행상인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외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을 놔줘요! 이게 뭐하는 짓이오! 불쌍하지도 않소, 이 마귀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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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물으면 절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요. 내가 망설이며 묻는다. 뭔데요? 고향에 돌아가 만세 시위를 준비하면서 두렵지 않았나요? 감옥에 갇힌 다음에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정말로요? 조금도요?

예전 같았으면 안 했을 질문이었다. 내 사생활을 중시하는 만큼 다른 사람의 사생활도-본인이 중시하든 안 하든-존중하는 게 내 신조였고 그건 재생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사람들과의 안전선 확보. 하지만, 이 여자는 정말로 내 모든 것을 흔들어 놓았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히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저 여자에겐 나와 남 사이를 구별해주는 선 따윈 없단 말일까? 내 문제와 다른 사람의 문제를 구분하는 금 같은 게 정말로 없을 수 있냐구.
관순에게 남의 문제란 없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나중에야 알게 된다. 관순에게 세상의 모든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던 것이었다.

노점상과의 실랑이로 경찰을 불렀다가 경찰서에 같이 갔다가 합의금을 물었다가 어찌어찌 간신히 마무리를 짓고 보고서를 올리고 난 후로 며칠 동안이나 한 마디도 안 하려던 그녀와 간신히 화해하고 얼마 후였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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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 것 같아요. 재성씨에게 세상은 턱없이 커서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영원불멸하고 고정불변인 것이겠죠. 저도 그랬어요.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건 열 살도 채 안 된 때였고 그 이전부터도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 앞에 서서 호령하고 손짓하고 손찌검하고 욕하고 발로 차는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던 터라 저도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마치 우리나라는 꼭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요. 하지만, 그래요. 재성씨는 그 때 그 거리에 서보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저도 안 그랬다면 그랬을 거예요. 그 해 삼월, 서울거리 말이에요. 봄 하늘은 파란 비단 같았고 말끔히 닦은 유리창 같았어요. 거리엔 어디에나 흰옷을 입은 조선 사람들이 있었어요. 일본 사람들 앞에서 쩔쩔매던 사람들이 모두들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고 두 팔을 벌려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어요. 칼을 든 일본 순사들도 총을 든 일본 헌병들도 모두들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숨고 도망 다녔어요. 조선의 길거리가 비로소 조선 사람들의 것이었어요. 어디에도 태극기가 있었어요. 태극기를 볼 때마다 우리나라의 얼굴을 비로소 보는 것 같아 눈물이 나왔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울고 웃으며 만세를 불렀어요. 만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리나라의 목소리를 비로소 듣는 것 같아 눈물이 나왔어요. 재성 씨가 절 이상하게 보는 건 그래서일 거예요. 재성 씨는 그 날을 모르니까요.

정말? 아무리 생각해봐도 군중 심리나 집단 광기 혹은 도취, 혹은 몰아의 경지로밖엔 안 들리는데? 하지만 눈앞에는 그 때 정말로 종로를 뛰어다닌 사람이 있었고, 그녀가 죽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녀의 죽음이 결실을 본 것은 이십여 년이나 더 지난 뒤의 일이지만-

그리고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걸까. 역사 속의 인물들을 이렇게 불러내도 괜찮은 걸까?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바로 그 사람들을 불러와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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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삼일절 기념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행사입니다. 미국과 해외 곳곳에서 국빈들까지 오시기로 되어 있으니까요. 왜 오시는지는 말 안 해도 잘 아시겠죠? 유난히 입술을 빨갛게 칠한 이 부장이 파르스름한 안경알을 빛내며 내게 다짐한다. 네. 나도 다짐해보지만 이 부장은 여전히 안심이 안 된다는 듯 다시 덧붙인다. 유관순이 이번 행사의 가장 메인이벤트입니다.
씨발 나도 알아 이 개쌍년아 니가 뭔데 사람을 못 믿고 지랄이야? 나는 고개 숙인 채 속으로 툴툴거린다. 그러나 차마 겉으로 그러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내 상급자인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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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상한 건데요, 그녀가 약간 어눌한 말씨로 주섬주섬 말했다. 혀가 꼬인 걸까? 재성 씨는요, 이상한 건데요, 정말 정말 이상한 건데요, 뭐든지 알고 있는 거 같으면서도 말예요. 나는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마시고 일어서자고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도 말예요, 아무 것도요, 모르는 거 같아요. 맞아요, 전 아는 게 없어요. 조금은 독 오른 말투로 내가 받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좀 취했다. 거어어짓마알하지 마세요오. 재성 씨이느은요오, 진짜로오 만이 만이 알아요. 근데요, 그렇게 만이 만이 만이 아는 게 오히려요. 그만요. 그만 마시고 이제 일어나죠. 내가 먼저 일어섰다. 휘청, 세상이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 비뚤어진 건 세상이지 난 아니다.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어 주접스럽게 구는 건 저 여자지 내가 아니다. 세상엔 그리고 인생엔 여기저기 어디에나 선이 있다. 넘어선 안 될 금이 있다. 이 선을 넘어서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않는다. 그러나 금을 넘는 순간 내가 그들에게 무어라 말하기 전에 그들이 일제히 입을 열어 나를 성토할 것이다. 짓밟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 넘어오지 마세요, 관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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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어째서 당신들은 항상 똑같지? 무슨 혁명의 유전자라도 있는 거야? 타고나길 반골의 별 아래에서 태어나는 건가? 왜 그렇게 무모하게 들고 일어나려는 거지? 왜 그냥 조용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거야? 다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문제 삼지 않는데?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고 간단한 게 아닌데?

난 울면서 물었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눈이 저절로 뜨거워졌다. 짜증이 났다. 도대체 뭐가 잘나서 나서고 난리인 건데? 그렇지만 두 번째 유관순은 나직이 대답했다. 옳지 못한 일을 가만히 놔두는 것도 역시 옳지 못한 일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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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에요. 집착일 뿐이라구요. 선배는 이미 합리적으로 전체 상황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어요. 벌써 세 명의 유관순이 자살하거나 달아나려다 폐기됐어요. 이제 이미 2월이라구요.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요. 도대체 한 번 재생시키는 데 얼마나 드는지 까먹었어요? 이러다간 선배 짤려요. 프로젝트에서가 아니라 아예 연구소에서요! 제발 이번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한테 맡겨요. 내 생각에는 유관순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걸 거예요. 안 그러면 재생시키는 족족 그렇게 죽어 나자빠지겠어요? 제발요. 이번만큼은 다른 사람한테 맡겨서 문제가 선배한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수경은 끝내 울었다. 바보 같은 계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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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기분 좋은 드라이브였다. 아니, 중간까지, 어쩌면 끝나기 직전까지도. 제기랄 이번엔 뭐지? 언어 개방 반대 시위인가? 아니면 유전자 개방 반대 집회? 일군의 인파가 떼거지로 몰려 상행성과 하행선 찻길을 모두 가로막고 각종 깃발과 현수막들을 나부끼며 으쌰으쌰 뭐라뭐라 외쳐댄다. 저게 뭔가요? 당연히 관순이 묻는다. 이런 제기랄. 제발 좀 이상하다 싶은 건 일단 가만히 지켜봐주면 안 되나?

나는 대답한다-무슨 반대 집회인 것 같군요. 멀어서 잘 안 보입니다만.

웃기시네. 너무나 잘 보여 짜증날 지경이다. 너무나 상투적이고 너무나 조악한 구호들 :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인의 손으로... 외제 의회가 웬말이냐... 선거는 곧 주권입니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더 볼 필요도 없다.
- 국회의원들의 시위로군요.
- 시위요?
- 입법 서비스 개방 반대 시위인 모양입니다.
- 그게 왜 웃기는 일이죠?
- 제가 웃었나요?
- 네.
이것 참. 지난 백 년 동안 세계화네 국제 경쟁력 강화네 수출 증대네 빛 좋은 구호 아래 이 나라의 각종 산업들을 모조리 국제 시장에 팔아먹어온 자들이 이제 와서 자신들의 밥그릇이 팔려나가게 되니까 그제야 들고 일어난 꼴이 우스워서라고 나는 설명해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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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개방은 왜 하는 것인지, 왜 조선 사람들의 일자리를 외국 사람들에게 주려는 것인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떤 거래든 이득을 보는 새끼들은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대다수의 닭대가리들은 저들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이고 우리 모두의 이익이라는 그 개자식들의 개소리를 신봉하고 싶어 하니까, 라고 냉소할까, 아니면 그냥 세계화 시대의 시장 개방 필요성에 관한 공익 광고 문구들을 읊을까 망설이다 말고 별안간 나는 정신없이 핸들을 꺾고 사방을 둘러본다. 어디로 빠져야 제일 안전할까? 진압대가 출동한 것이다.

늦었다.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해산을 명령하고, 불응시 진압을 경고하는 의례적인 방송 통보 직후 진압대가 곧장 진격한다. 어디선가 나타난 호버콥터들이 일제히 지상을 향해 덤덤탄을 난사하고 그 아수라 난장판 위로 근골이 개조된 진압대원들이 날듯이 뛰어든다. 닥치는 대로 패고 밟고 던지고 찬다. 도주하는 시위대나 추격하는 진압대나 관심 없어할 법한 골목을 골라 차를 모는데 잔뜩 긴장한 신경에 뭔가 심상찮은 느낌이 끼쳐온다. 놀라 뒤돌아보니 시트 아래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귀를 틀어막고 경련하듯 떠는 그녀- 트라우마다. 직감하고 혀를 찬다. 진압에 휩쓸릴 것만 걱정했지 그녀가 이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처 생각 못 했다. 유관순이 헌병의 총검에 찔리고 머리채가 잡혀 질질 끌려가며 발에 차이는 것을 본 아버지 유중권이 맨손으로 만세만 거듭 부르짖으며 달려드는 것을 헌병들이 재차 총을 쏘고 총검으로 찌르는 것을 유관순은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다던 기록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이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그렇게 당차고 드세기만 하던 여자가 이렇게 파들파들 떠는 모습은 처음이다. 도대체 이 여자는 무엇을 경험한 걸까, 무엇을 겪은 걸까, 그리고 도대체 왜, 그 모든 걸 겪고서도 아직도-겪다 못해 죽었다가 살아난 지금에도 세상의 모든 불의에 대해 여전히 분개하고 달려들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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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봤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못생겼다, 였다.

볼터치보다 광대뼈 리모델링이 더 싸고 쉬운 이 시대에 유관순의 외모는 추했다. 과연 생존 당시에는 예쁜 얼굴이었을까? 미에 대한 가치관이 그렇게 세월에 따라 변하는 것일까? 미녀에 대한 남자들의 환상은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굳이 우리가 추녀 유관순을 얻을 필요가 있을까? 현대의 기준에 맞게 조금 수정할 수는 없었던 걸까?

울상이랄까, 찌푸린 상. 170 가까운 키에 늘씬한 체격이지만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 총기 있어 보이지만 어딘가 속되다.

그러나 유관순의 얼굴은, 비록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제의 간악한 고문에 찌들어 부풀은 얼굴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일반에 너무나 많이 알려졌고, 때문에 사실은 그런 이유에서 실제보다 좀 더 사납고 펑퍼짐한 얼굴로 수정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야말로 시뮬라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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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인의 재생은 분자 흔적 트래킹, 나노 리컨트럭션, 기타 등등 현란한 문구가 동원되어 설명되지만 사실상 정확한 기제는 연구소의 최고급 기밀로 (당연히) 분류되어 일반에 알려져 있지 않다-알려줘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물질적 복원이 어떻게 정신의, 기억의 재현을 가져오는지 궁금해 하는 나에게 재생 쪽 스텝 하나는 기억이 단순히 뇌세포 사이의 전기 화학적 신호 체계가 아니라고 했다. 기억은 몸에-머리가 아니라 몸 전체에-새겨지는 거라고. 분자적 파편 몇 개로부터 한 인물의 특정 시기의 육체 전체를 복원해낼 때 그 이전 시점까지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깃들어온다고. 잠깐만요, 분자적 파편에서 전체를 도출해낼 수 있다면, 특히나 특정 시점에서의 전체를 복원할 수 있다면 혹시 미래의 모습까지 빨리감기를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스텝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글쎄요, 뭐라 설명하긴 힘들지만, 분자 패턴 복원과 결정론과는 별 관련이 없습니다. 복원은 존재했던 것을 다시 존재하게 하는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이태원 옛 공동표지터 인근을 스캔해서 찾아낸 유관순의 분자 흔적에서 1살의 유관순도, 10살의 유관순도, 18살의 유관순도 복원해낼 수 있지만, 19살, 20살의 유관순은 만들어낼 수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나는 문득 생각해본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한 여학생에게 재생은 우리가 줄 수 있는 선물이 아닐까. 감옥 바깥, 대한민국에서의 열아홉 살, 스무 살, 스물한 살의 유관순의 삶.



37

유관순의 연설 원고-제 187회 삼일절 기념식에서
안녕하세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저는 지금으로부터 이백 년 전,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죽었습니다. 당시 우리 조선 사람들은 십여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 되찾고야 말겠다는 생각은 참말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우리가 그토록 꿈꾸고 원했던 그 세상, 우리 민족이 주인이 된 나라를 살고 계십니다. 저의 아버지와 저의 어머니가, 그토록 애닯게 그리워 목숨까지 바쳤던(잠시 울먹임) 바로 그 세상, 바로 그 나라를 살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모두들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지난 이백 년 전의 우리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편리하고 깨끗한 생활, 문명하고 개화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가장 부럽고 가장 반가웠던 사실은 조선 사람의 나라에서 조선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다시 태어난 이후 저는 여러분의 세계를, 그 몇몇 부분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조선인 경찰이 조선 사람들을 때리고 발로 차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조선인 경찰을 향해 울며 돌을 던지고 피 흘리며 쫓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조선보다 외국을 더 잘 알기를 조선 사람들이 소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갓난아이에게 외국 이름을 붙여주고 외국 시민권을 얻어주려 애쓴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조선인들이 뽑은 정부가 조선인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에서 쫓겨난 조선의 민중들이 거리를 헤매고 헐값에 그 몸이 토막토막 팔리는 동안 외면하던 조선의 신문들이 기업의 수출 신화만 대서특필하는 것을 저는 읽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대한의 영원한 자주 독립을 위해 작은 목숨이나마 저의 모든 것을 바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조선 사람들이 주인인 대한민국에 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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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결국 이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알고 있다. 당신이 원해서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억지로 불러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러나 이제 당신은 우리가 이곳에 당신을 불러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우리는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낸 것을 후회한다. 당신은 생중계되는 삼일절 기념식에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부정하는 연설을 했고,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모든 신문과 방송에서 일제히 당신의 연설문을 성토하고 반박하고 비방한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머리가 까졌고 나비넥타이를 맨 늙은 교수들이 현학적인 단어들로 당신의 질문을 시대착오적 선전선동, 피상적이고 무지로 가득 찬 소견으로 치부한다. 동시에 당신이 진짜 유관순이 아니라는 루머가 일제히 유포된다.
그러나 도시와 도시 사이 잊혀진 골짜기들과 낡은 골목들 사이에선 당신의 연설이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흘러나온다. 눈과 입에 주름살이 깊게 패이고 손가락 한두 개씩은 잘라먹은 사람들, 신장이나 허파, 간, 각막 같은 것쯤 하나둘씩은 팔아먹은 사람들이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당신의 말에 조용히 귀기울인다. 귀기울이며 생각한다. 과연,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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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부터 눈 돌리는 것은 간단하다. 선을 긋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라고 선언하면 된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내 문제는 남이 해결해 줄 수 없고, 또한 남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다, 고 나는-우리는 믿고 살아간다. 22세기를 마음 편히 살아가는 고마운 면죄부이자 편리한 알리바이다. 현대의 필수적인 불문율이다. 정부가 아무리 똥을 싸서 깔아뭉개고 얼굴을 처박든, 기업이 아무리 정부와 야합해서 소비자들을 착취하고 등처먹든 내 문제는 아니다. 내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 않는 한 그냥 욕하고 비웃고 무시하면 그만이다. 내가 유관순의 개인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그녀와 나는 업무 때문에 만난 관계일 뿐이고, 내 업무는 이 시대에 그녀가 적응할 수 있도록 한 달 동안 같이 일정을 진행해나가는 것뿐이니까.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녀가 대학에 가든지 방송국에 나가든지 영화에 출연하든지 길거리에서 생체 재활용차에 실려 가든지 내 알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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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과거의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러지 못한다. 유관순과 함께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이제 느낀다. 어렴풋이...
그녀가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 감옥 속에서 빼앗겼던 열아홉, 스물의 봄날을 꽃피는 캠퍼스에서 웃으며 누리길 바란다. 아니면 토크쇼나 스크린도 괜찮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풍족하고 안온한 삶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관순은 아마 그런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자본의 새장 안에서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그건 또 다른 감옥 속에 관순을 가두는 거다. 돈의 감옥 속에.



42


 

나는 내가 왜 여기에 나왔는지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다. 데이트? 마지막 데이트. 그녀도 알고 있다. 이미 연구소에서는 사고 중에서도 초대형 사고를 친 유관순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논의하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심리적 포맷과 인격 재구축까지도 거론되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한다. 고마워요. 나는 아무 말도 대답하지 못한다. 카페테리아 안은 거의 텅 비어 있고, 나는 그녀에게 차마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못한다. 물을 수 없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다.

안녕. 그녀가 속삭인다.

안녕. 내가 답한다. 안녕-安寧히. 언제까지나 安寧하길, 내 사랑. 그녀는 일어나 무심한 표정으로 화장실 쪽으로 간다. 나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겨우 마신다. 손이 떨린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걸어 나온다. 짧은 머리에 붉은 가죽 코트, 옅은 선글라스. 안녕히. 귀에는 큼직한 출력 유닛을 꽂고 고개를 흔들며 춤추듯 걸어 나간다. 달그락. 떨리는 손이 찻잔을 내려놓는다. 저 멀리 카페테리아의 유리문 너머 호텔의 라운지 건너편 현관으로 그녀가 태연히 걸어 나가는 것이 보인다.

이제 변명거리는 완전히 준비되었다. 그런데 나는 왜 남은 걸까?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나는 최소한 나는 안다. 아무리 한 달 동안 그녀와 함께 다녔다 하더라도 그녀와 말하고 그녀의 생각을 들었다 하더라도 나는 나였다. 비겁자였고 악한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달랐다. 나는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세계와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첨단의 끝에 다다른 체제와 대결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하지만 나는 안다. 그곳에 내 자리는 없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보낸다. 이것이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식이다. 그녀를 따라나섰다가는 분명 그녀를 원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큼이나 비겁하고 약해서 악한 놈이라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다면 이제 무얼 할 텐가. 무엇을 해야 하나? 이대로 여기서 기다리다 시치미 떼고 웨이트리스에게 화장실을 살펴봐달라고 부탁할 것인가? 황급히 놀라는 척하면서 당국에 신고할 것인가? 경위서에 그녀의 이름 아래 사회부적응과 과대망상, 피해의식, 편집증 등등을 적어낼 것인가?

무엇을 위해?

나의 경력과, 나의 안락을 위해?

어제까지 세웠던 나와 그녀의 계획이 터무니없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그 계획이 보장하려던 나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 이 순간 터무니없이 하찮게 느껴진다. 그게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녀를 따라갔어야 했다. 그게 진실이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지 모른다. 뛰어나간다면? 그렇지만 거기 이미 그녀는 없다면? 절박한 충동과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에 심장이 죄어온다. 그러나 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가슴을 움켜쥐었던 손을 풀며 나는 쓰게 미소 짓는다. 아니야, 이렇게 끝내는 게 좋아.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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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성환


98년부터 나우누리 SF동호회 "SF2019"와 판타지 웹진
"워터가이드", 환상문학 웹진 "거울" 등에 SF와 판타지
단편들을 게재해왔다. 2004년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에서 단편 부문 수상.





<작품후기>

 

"SF에 대한 우리나라의 가장 보편적이고 오래된 편견은 황당무계하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확실히 우주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과학소설들은 '지금, 여기'의 울타리 안에 갇힌 일반 소설들에 비해 너무 거시적인 면도 없잖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무엇일까, 오히려 관습적 현실주의의 피상성이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소설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봉투가 아니라 메시지를 찾아나서는 여정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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