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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할거야_2] 중독의추억

  • 작성일 2013-11-15
  • 조회수 669


[후회할 거야_시즌2]



중독의 추억


홍경님(조각가)




태어나서 내가 최초로 중독된 것은 야구였다. 말하자면 나는 원년 프로야구를 소재로 한 박민규의 장편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꼬마 주인공과 거의 일치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소설 속 주인공이 언제나 꼴지를 하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이었다면 나는 언제나 그들을 울게 만들었던 얄미운 리틀 베어스였다는 것.
나의 야구 중독은 고교야구로부터 시작한다. 프로야구 출범 전 고교야구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대통령기, 황금사자기, 봉황기, 청룡기의 4대 전국 고교야구대회가 쉴 새 없이 채워주는 즐거운 에너지 덕에 나는 지루하고 유치한 어린이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아하는 소설과 팝송도 야구만큼의 열광적 에너지를 만들어주진 않았다. 야구는, 정말이지 중독이었다. 나는 조그만 여자아이라는 자신의 신체적 약점에는 아랑곳 않고 선머슴아처럼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캐치볼을 했다. 가죽 냄새가 손에 배는 거친 글러브를 끼고 돌처럼 딱딱한 야구공을 받을 때 울리는 경쾌한 펑!펑! 소리는 최고의 쾌감을 주었다. 손바닥이 터져나갈 듯 세게 꽂히는 공. 그럴 때면 소리 높여 고함을 지르곤 했다. “어---이! 조오---았어!”
내가 좋아했던 고교야구팀은 '경북고'였다. 광주일고, 군산상고, 선린상고, 천안북일고 등 쟁쟁한 야구 명문 고교들이 있었으나 당시 경북고는 황금시절이라 불릴 만큼 굉장했었다. 무엇보다도 천재 유격수였던 강타자 유중일과 큰 게임마다 대담한 투구를 보여주던 언더핸드 투수 문병권 ㅡ 실력에다 잘생긴 용모까지 갖춘 두 선수가 있는 경북고의 카리스마는 지금의 아이돌 그룹 EXO만큼이나 소녀팬들을 열광시켰다. 당시 고교 야구 선수 최고의 인기는 선린상고의 박노준이 누리고 있었으나 나는 언제나 소매에 세 줄이 그려진 유니폼을 입은 경북고 선수들을 응원했다. 어린 시절 내 키가 한 뼘쯤 자라도록 성장판에 펌프질을 해 준 것은 그러니까 80년대 초의 고교야구였던 것이다. ‘깡!’ 하는 알루미늄 배트 소리만큼 힘차고 생생한 고교야구의 새파란 에너지 말이다.


프로야구 출범 즈음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 우리 집은 춘천으로 이사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던 넓은 집을 헐값에 팔고 하루아침에 서울을 떠나 아무 연고도 없는 강원도 춘천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한 뒤 아버지는 딸이 받을 정신적 충격을 염려하셨을까, 유난히 어디건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당시 아직 젊었던 아버지는 망가진 사업을 새로 일으켜보려 연일 바쁘셨지만 그 와중에도 야구광인 나를 위해 주말이면 꼬박꼬박 춘천 구장은 물론이고 서울, 인천 구장까지 함께 프로야구 경기를 보러 다녔다. 야간 경기가 늦게 끝나면 아예 근처 숙박업소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부녀가 나란히 마주 앉아 해장국을 사먹고 돌아오는 것도 그 무렵 아버지와 나의 즐거움이었다.
중학생이 된 뒤엔 자율학습 시간에 작은 라디오를 소매에 숨겨 이어폰으로 야간 경기 중계를 들었는데 라디오 중계를 들으며 실제 경기를 상상해보는 것은 그 자체로 특별한 재미였다. 나는 야구의 룰을 잘 모르는 친구들을 위해 야구 룰에 관한 교육 만화를 그렸고 야구에 관한 한 한 가지도 놓치고 싶지 않아 용돈을 모아 「월간 야구」라는 야구 잡지를 정기 구독했으며 내가 본 거의 모든 경기를 비디오 녹화하듯 머릿속에 외우고 있었다. 놓친 경기들은 신문의 스포츠란을 읽으며 바둑 복기하듯 상상하여 정리해두었다. 아버지의 부도로 인한 환경 변화에 전혀 개의치 않고 내가 하루하루를 열심히 즐겁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야구의 공(功)이 클 것이다.


내가 왜 하루아침에 그 좋아하던 야구를 끊기로 결심했는지 정확한 계기는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중학교 3학년 겨울의 어느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3년 넘게 정기구독 해왔던 「월간야구」 수십 권을 책꽂이에서 빼서 노끈으로 묶어 밖에 내다버렸다는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던 야구를 나는 눈 내리던 그날 아침 그렇게 끊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다시는 야구에 관심두지 않았다.
어떤 것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거냐고 지금 새삼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정말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사건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내 성격에 굉장히 단호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어떻게 그렇게 절절히 사랑하던 것을 그토록 철저히 끊어버렸을까. 그렇게 나는 청소년기에 나를 지탱해주었던 야구와 이별했다.
언젠가 우연히 스포츠 채널에서 「추억의 프로야구」란 프로를 보았다. 프로야구 원년부터 유명 게임을 골라 재방송해주는 것인데 잠시 리모컨을 멈추어 그걸 보고 있자니 미소가 지어졌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대사를 모두 외워 미리 말하는 영화광 아저씨처럼 나는 그 경기를 미리 중얼거리고 있는 거다. 다음에 OB의 김유동이 나와 3루타를 치지 아마, 청룡의 김인식은 도루를 하다 3루수 양세종에게 걸려 태그아웃되었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야구가 최초의 중독이라고 말했지만, 열여섯 살에 야구를 버린 그날 이후로 사실 나는 지금까지 중독을 경계해 왔다. 송두리째 머릿속을 차지해 우선순위를 좌지우지하는 중독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중독은 ‘사람’에 중독되는 것이라는 걸, 우리가 ‘사랑’이라 말하는 그것은 심장의 자율 운동에 영향을 주고 뇌의 사고체계를 지배하며 야구처럼 글러브와 잡지 수십 권 내다버리는 의식을 치른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지금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한다. 인생의 한 시기마다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의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중독이 없다면 우리 삶은 또 얼마나 허름할 것인가.
그리하여, 중독되시라 젊음이여. 눈치 빠른 당신들은 알아차렸겠지만 내가 말하는 중독은 마약, 알콜, 담배 등의 유해물질 중독이나 게임, 도박, 쇼핑 중독 같은 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 ‘열정적으로 매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친 듯 좋아서 거기 푹 빠져 열중하는 것, 그것은 심장을 세차게 뛰게 하고 모든 세포에 불을 켜 우리를 자라게 한다. 좋아하는 일과 함께 젊음은 성장할 수 있다. 집착과 의존, 강박의 중독이 아니라 모든 생활에 힘을 줄 수 있는 동력이 되는 매진과 몰두ㅡ그것이 취미건 운동이건 공부건 사랑이건 살아있음을 증명해주는 어떤 것이 있다면 거기에 중독되시라. 열광이 없는 청춘,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는 무기력한 청춘만큼 슬픈 존재를 본 적이 없다. 중독되고, 미치도록 사랑하고, 때가 되면 스스로 기꺼이 그만두고 빠져나오기를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성장한다. 균형과 평정을 아는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젊은 당신들은 우선, 중독되시라. 무언가를 절절히 사랑하시라. 혹시 남을지 모를 후유증과 상처, 그마저 당신들을 성장시킬 것이니.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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