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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를 통해서 본 ‘시간’의 의미

  • 작성일 2005-09-08
  • 조회수 3,307



 

독일의 작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는 ‘시간의 의미’ 곧 “우리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소설입니다.


폐허가 된 옛날 원형극장에서 사는 모모는 뒤엉킨 고수머리에다 작은 키에 마른 체격을 하고 언제나 자기 몸보다 커다란 외투를 걸치고 다니지만 무척이나 예쁜 눈을 가진 소녀이지요. 그녀에게는 별난 능력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달리 할 일이 없는 모모에게는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래서 모모를 찾는 친구들이 언제나 많았지요.

하지만 이 도시에 회색신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모모의 친구들은 회색신사의 방문을 받은 후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기 위해 시간을 아끼기 시작했지요. 그러자 도시는 점점 예전의 따뜻한 인정은 사라지고 차갑고 삭막하기만한 회색도시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모모는 신비한 노인 호라 박사와 30분 후의 미래를 알고 있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의 도움을 받아 시간을 훔치는 회색신사들과 싸우게 됩니다. 결국 모모가 그들을 물리치고, 마을사람들에게 다시 예전처럼 주어진 시간들을 즐기는 행복한 삶에 찾아준다는 게 이 소설의 줄거리지요.

 

 

                  시계로 재는 ‘회색신사들의 시간’ - 크로노스

 

 

우리는 소설『모모』에서 두 가지의 시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회색신사들이 가진 시간입니다. 이것은 시계로 재는 시간이지요. 철학에서는 이런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크로노스는 자기 아버지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왕위에 앉았기 때문에, 자신도 자식들에게 쫓겨날까 두려워 자식들을 낳는 대로 모두 잡아먹는 신이지요.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여섯 번째 아들인 제우스에게 밀려나게 되죠. 결국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쫓김을 당하는 이 신화가 뜻하는 것은, 시간이란 뒤에 오는 것이 앞의 것을 밀어내게 되어 있다는 것, 아무리 머물려고 노력해도 머무를 수 없다는 것, 즉 만물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크로노스는 언제나 미래에서 다가와 현재를 지나 과거로 밀려 흘러가버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이 시간의 본질은 소멸, 파괴, 죽음이지요. 때문에 회색신사들의 말처럼, 시간을 저축하고 절약하여 어떤 목표를 이루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도 ‘당연히’ 드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이런 시간에 맞춰 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19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 산업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였지요. 그 이전 농경시대에 사람들은 훨씬 풍요롭고 성스러운 시간 속에서 살았지요. 해가 떠서 밝아지면 들로 나가고, 저녁이 와 어두워지면 멀리 교회당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그날 하루에 일어난 모든 것들에 대해 신께 감사드리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밀레가 그린 유명한 그림「만종」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하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 공장들이 생겨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산업혁명은 - 소설 『모모』에서 회색신사들이 그런 것처럼 - 대량생산에 의한 물질적 풍요, 절대적 자유, 무한한 행복을 사람들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교회의 첨탑에서 성스러운 시간을 알려주던 종(鐘)을 끌어내리고 그곳에 시계를 달기 시작했지요. 농경시대와는 달리 산업시대에는 커다란 공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일을 시작하고 끝내야 하기 때문에 시계가 필요해진 겁니다.


 

앨빈 토플러가 그의 책『제 3의 물결』에서 잘 표현한 대로, 산업사회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희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처음으로 가난이나 굶주림, 질병이나 전제정치를 추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물질이 풍부한 산업문명 속에 평화와 평등이 올 것이며, 실업문제가 해결되고, 불평등이 사라지고, 수천 년에 이르는 농경문명 동안 변함없이 지속되어 오던 여러 가지 비참한 상황이 막을 내림으로써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물질적 풍요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전보다 더 행복해지지도, 자유로워지지도, 평등해지지도 않았다는 것에 있었지요. 소설『모모』에서 회색신사들이 한 일들이 바로 이것이고요. 즉 회색신사들은 산업사회를 대변하는 인물들인 셈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산업사회가 가져다준 우리들의 황폐한 삶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심각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물질적 욕망의 충족이 결코 행복에 이르는 길도 아니고, 최대 쾌락을 누리게 하는 길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우리는 쾌락적이지만 불행하다는 경험도 널리 퍼졌고요. 부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물질의 노예가 되었다는 생각도 생겨났습니다. 경제적 발전은 부자 나라와 부유한 국민에게만 이루어져, 그 결과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한층 더 넓어진 것도 드러났지요.

 

그러자 물질적 풍요는 분명 하나의 가치이지만 그밖에도 잃어서는 안 될 많은 가치들이 있다는 생각들이 차츰 생겨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삶을 살을 살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게 되었지요.

그래서 소설 『모모』가 태어난 겁니다. 저자 엔데는 자신의 소설에서 산업사회를 사는 오늘날 우리들의 불행한 삶을 고발하고, 모모를 통해 이러한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려 한거죠.   

 

 

                    마음으로 재는 ‘모모의 시간’ - 카이로스

 

 

소설『모모』에 나오는 다른 하나의 시간은 호라 박사와 모모가 가진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은 시계나 달력으로 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마음으로만 잴 수 있는 시간이지요. 호라 박사는 방안을 온통 시계로 장식해 놓은 이유를 묻는 모모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야 모모, 이 시계들은 그저 취미로 모은 것들이야. 이 시계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 속에 갖고 있는 시간을 엉성하게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아. 빛을 보기 위해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너희들은 시간을 느끼기 위해 가슴을 갖고 있단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는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장님에게는 무지개의 고운 빛깔이 보이지 않고, 귀머거리에게는 아름다운 새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지. 허나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멀고 귀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하단다.”

 

철학에서는 이런 시간을 흔히 카이로스(kairos)라고 하지요. 카이로스는 과거, 현재, 미래로 자꾸만 흘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과거와 미래가 언제나 현재 속에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즉 과거는 ‘기억’으로 언제나 현재 안에 있고, 미래도 역시 ‘기대’로 언제나 현재 안에 있지요.

 

정말이냐고요? 그럼요! 한번,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누군가 그의 마음이 지금 몹시 기쁘거나 매우 슬프다면, 그것은 현재 이 순간 때문만이 아닐 겁니다. 그것은 분명 과거의 어떤 일 또는 다가올 미래의 어떤 일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죠? 이렇듯 우리의 마음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사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불리는 성(聖)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는 그의 『고백록』에서 이런 시간에 대해서 다음같이 설명합니다.

 

“내 마음아, 결국 네 안에서 내가 시간을 재는구나! 사실이 그럴진대 너는 결코 이를 부인해서는 안 된다.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네 안에서 시간을 잰다. 지나가는 사물들이 네 안에 이루어 놓은 인상을 - 그것들은 지나가도 남아있다 - 나는 현재처럼 재고 있는 것이다. …… 미래 일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는가? 그러나 마음속에는 여전히 미래의 것들에 대한 기대가 존재한다. 과거의 일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는가? 그러나 여전히 마음속에는 과거의 일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은 회색신사들의 시간인 크로노스를 살아가지만, 마음은 모모의 시간인 카이로스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알 수 있지요. 

행복해지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좋은 기억들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희망차고 바람직한 기대들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카이로스 속에서 살고 있고, 카이로스란 과거가 ‘기억’으로 언제나 현재 안에 있고, 미래도 ‘기대’로 언제나 현재 안에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누구든 추하고 나쁜 기억들만 많이 갖고 바람직한 희망은 전혀 없으면서 행복할 순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추억이 없는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보다 더 불쌍하다.”라는 말도 있지요.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보다 더 비참하다.”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앓을 ‘불쌍하고도 비참한’ 질병에 대해 호라 박사는 다음같이 말합니다.

 

“처음에는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해. 허나 어느 날 갑자기 아무 것도 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지지.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지. 한마디로 지루한 게야. 허나 이런 증상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기 마련이란다. 하루하루, 한 주일 한 주일이 지나면서 점점 더 악화되는 게지. 그러면 그 사람은 차츰 기분이 언짢아지고, 가슴 속이 텅 빈 것 같고, 스스로와 이 세상에 대한 불만을 느끼게 된단다. 그 다음에는 그런 감정마저 사라져 결국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되지. 무관심해지고 잿빛이 되는 거야. 온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아지는 게지. 이제 그 사람은 화도 내지 않고, 뜨겁게 열광하는 법도 없어. 기뻐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아. 웃음과 눈물을 잊는 게야. 그러면 그 사람은 차디차게 변해서,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그 지경까지 이르면 그 병은 고칠 수가 없어. 회복할 길이 없는 게야. 그 사람은 공허한 잿빛 얼굴을 하고 바삐 돌아다니게 되지. 회색신사와 똑같아 진다.”

 

 

                       모모가 그려낸 기적적인 풍경들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증상이 있는 사람이 있나요? 만일 그렇다면, 회색신사들의 시간이자 물질의 시간인 크로노스에서 마음을 해방시키십시오. 그리고 모모의 시간이자 마음의 시간인 카이로스 속에 살게 하십시오. 사랑과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 찬 시간, 가슴 뛰는 희망으로 가득 찬 시간인 카이로스 말입니다.

엔데는 모모의 활약을 통해 다시 카이로스 속에서 살게 된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지요.

 

“이제 대 도시는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광경이 벌어졌다. 아이들이 길 한복판에 나와서 놀고, 아이들이 비키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운전사들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차에서 내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사람도 있었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서서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자세히 물었다. 일하러 가는 사람도 창가에 놓인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거나 새에게 모이를 줄 시간이 있었다. 의사들은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껏 돌 볼 시간이 있었다. 노동자들도 일에 대한 애정을 갖고 편안히 일할 수 있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가능한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
시간이란 마음의 삶이다”    - 플로티노스(Plotin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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