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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의 『광장』을 통해서 본 ‘유토피아’의 의미

  • 작성일 2005-10-14
  • 조회수 4,390



 


사람들은 예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이상사회를 꿈꾸어왔습니다.

 

우선, 영국 민중시 「코케인의 나라」에 나타난 코케인(Cockaygne)을 들 수 있지요. 코케인이란 한마디로 무한한 물질적 풍요와 끝없는 쾌락이 어떠한 수고나 노력의 대가 없이도 주어지는 일종의 환락적 사회이지요.(마약의 이름 코카인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답니다). 다음이 아르카디아(Arcadia)입니다. 흔히 ‘황금시대의 지상낙원’으로 불리던 곳으로서, 자연이 풍요롭고 인간 욕망이 조화롭게 절제된 낙원이지요.(전설적인 라(Ra)시대의 이집트, 삼황오제 시대의 중국, 유가(Krita Yuga)시대의 인도 등이 여기에 속했다고들 합니다.) 그 다음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세워질 천년왕국(Millennium)을 들 수 있지요. 그리고는 유토피아(Utopia)입니다.

 

유토피아는 희랍어 접두사 ‘u’(유)와 장소를 뜻하는 ‘topia’(토피아)의 합성어이죠. 그런데 ‘u’는 ‘없다’(ou)는 뜻과 ‘좋다’(eu)는 뜻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토피아란 ‘세상에 없는 곳’(outopia)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좋은 곳’(eutopia)을 의미하기도 한답니다. 세상에 없기에 좋은 곳인지, 좋기에 세상에는 없는 것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유토피아는 -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말처럼 - “지리적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하여간 “좋은 곳”이죠.

 

그런데 유토피아는 지금까지 말해진 것들과는 전혀 다른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좋은 곳’입니다. 지금까지 언급된 이상사회들은 모두 자연적으로 또는 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유토피아는 인간의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상사회입니다. 즉 유토피아는 인간이 이성에 의해 사회제도를 개선함으로써 이루려는 그 어느 것보다 현실적인 이상사회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실현이 쉬운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최인훈의 『광장』은 분단된 우리민족이 꿈꾸는 유토피아에 대한 고통스럽고도 서글픈 이야기이지요.


                                    ‘광장’은 어디에


최인훈의『광장』은 1960년 《새벽》 10월호에 처음 발표됐는데 한국문학 사상 최초로 분단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문제로 다룬 작가의 대표작이자 현대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이라고도 하지요. 이 소설은 6. 25 전쟁 후 석방포로를 싣고 인도로 향하는 배에 탄 이명준이라는 한 젊은이의 회상으로 시작됩니다.

 


철학과 3학년인 명준은 8. 15 해방 직후 월북한 아버지의 친구의 집에서 살았지요. 그 집 딸인 영미와 아들 태식의 자유 분방한 생활을 보아온 명준은 고고학자인 장선생과 나눈 대화에서 남한의 자유주의 사회를 비판합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정치의 광장은 탐욕과 배신과 살인의 추악한 밤의 광장이며, 경제의 광장은 속임수와 교활이 넘치는 광장이고, 문화의 광장은 부정과 비굴이 넘치는 광장이라고 흥분하지요. 한마디로 자유주의 남한 사회에는 부도덕한 개인의 자유가 허락되는 어두운 ‘밀실’만이 있을 뿐, 사회적 정의가 구현되는 푸른 ‘광장’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훗날 명준은 남한은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 아닌 광장이었다. … 그곳에는 타락할 수 있는 자유와, 게으를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라고 회상하지요.     

 

그 후 북에 있는 아버지가 대남방송을 한 탓에 경찰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나온 명준은 영미의 친구인 윤애를 찾아가 여름동안 그 집에서 지냅니다. 그러던 중 자주 가던 목로주점에서 우연히 이북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밀실을 떠나 광장을 찾아 월북하지요.

 

하지만 명준이 북에서 만난 사회주의 사회 역시 진정한 광장은 아니었습니다. 왜곡된 ‘잿빛 광장’였죠. 혈연이나 남녀간의 애정 등 모든 개인적 요소들을 적대시 하고 집단의 이념만을 중시하는 체제였습니다. 이 잿빛 광장에서 인민들은 이미 혁명의 열기를 잃었고, 당원들마저 ‘소비에트 교시’만을 내세우며 타락했던 겁니다. 명준이 평소 이상적인 혁명가로 생각했던 아버지도 젊은 여자와 재혼하여 부르주아적 생활에 물들어 있었지요.

 

사회주의 사회에도 실망한 명준은 국립극장 발레리나인 은혜를 만나 사랑을 하고 그들만의 광장을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이데올로기 전쟁인 6. 25가 터지고, 명준의 딸을 임신한 은혜가 전쟁으로 인해 죽게됩니다.

포로가 된 명준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다 석방이 될 무렵 남한이나 북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입장에 서게 되지요. 자유주의 남한 사회와 사회주의 북한 사회 모두가 진정한 의미의 광장이 아닌 것을 안 명준은 제3국인 중립국을 택하고 인도로 가는 배 타고르호에 오릅니다.


뱃머리에서 지금까지의 긴 회상에 잠겼던 명준은 자기가 참으로 오랫동안 무엇에 홀려있었음을 비로소 깨닫지요. 작가는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에 홀려있음을 깨닫는다. 그 넉넉한 뱃길에 알아보지 못하고, 숨박꼭질하고, 피하려고 하고, 총까지 쏘려고 한 일을 생각하면, 무엇에 씌웠던 게 틀림없다.”

 

명준이 이러한 성찰을 얻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그가 총으로 쏘려고 겨누었던 크고 작은 두 마리의 갈매기들 때문이었습니다. 명준은 그들이 은혜와 그녀가 임신했던 자기 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어쩌면 그가 갈매기들에게, 그 자유롭고 아름다운 생명들에게 겨누었던 총이 곧 그토록 많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이끈 ‘이념의 잣대’라고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또한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는 유토피아를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러한 행위 자체가 곧 유토피아를 파괴한다고도 생각했을지 모르지요. 이어 명준은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푸른 광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바다로 뛰어들지요.

 

이렇게 보면, 최인훈의 『광장』에서 명준이 찾던 ‘광장’이란 다름 아닌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진정한 삶의 공간’ 곧 유토피아입니다. 명준은 자유주의 사회, 또 사회주의 사회 그 어느 곳에서도 유토피아를 찾지 못하고 결국 절망하여 바다로 뛰어든 것이지요. 그에게는 사랑하는 은혜와 자기 딸이 갈매기가 되어 나는 바다야 말로 진정한 유토피아로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인훈의 『광장』이 말하는 바는 단순히, 유토피아란 아무리 찾아보아도 ‘세상에는 없는 곳’이라는 건가요? 유토피아를 향한 우리의 꿈은 그렇게 쓸쓸한 것인가요? 

 

                          『유토피아』냐, 『신 아틀란티스』냐


오늘날 우리가 구상하는 유토피아의 모델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1516년 출간된 T. 모어(T. More, 1478~1535)의 저서 『유토피아』(Utopia)입니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정치적으로는 대의민주제가, 경제적으로는 재산 공유제가 실시되고, 사회적으로는 재산과 신분에 의한 것이 아닌 지혜와 덕망에 따른 위계질서가 이루어지는 사회이지요. 즉 누구에게나 생산, 분배, 소유의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교육, 학문, 여가와 쾌락의 추구에 있어서까지 평등한 기회가 부여되는 사회입니다. 정의와 평등, 집단의 행복과 이성, 법과 도덕이 추구되고 지배하는 이상적인 나라이지요.

 

그러나 이 같은 이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연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요구되기 마련입니다. 정의와 평등의 실현을 위해 정부의 강력한 통제 곧 개인의 자유 제한이 요구되고, 집단의 행복과 이성을 유지 또는 구현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제도와 법의 구속이 필수적이며, 법과 도덕의 추구에는 고도의 자제력과 인격적 성숙이 동반되어야만 하지요.

 

이렇듯 모어의 유토피아는 인간의 욕구와 수요의 충족보다는 그것들의 효율적인 억제를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는 사회라는 점에서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원형’이라고 평가됩니다.

 

이에 반해, F. 베이컨(F. Bacon, 1561~1626)은 인간의 욕구와 수요를 최대한으로 충족시키는 유토피아를 꿈꾸었습니다. 그는 그의 저서 『신 아틀란티스』(New Atlantis)에서 인간의 불행은 빈곤과 궁핍으로부터 오며, 그 원인은 생산 기술의 낙후에 있다고 보았지요. 때문에 그 해결책은 생산을 증대하기 위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개인의 자유로운 시장 활동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최초의 과학적 유토피아에 대한 저서인 그의 『신 아틀란티스』는 현대 산업기술사회가 추구하는 ‘자유주의 유토피아의 원천’으로 불리지요.  

 

모어의 『유토피아』가 사회정의 실현에 목표를 두었다면, 베이컨의 『신 아틀란티스』는 과학에 의한 사회 진보를 목표로 하였습니다. 전자가 인간 욕구를 제한함으로써 인간을 도덕적으로 성숙시켜 자족할 수 있는 사회(아르카디아)를 구상하였다면, 후자는 생산을 증대함으로써 인간의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키는 사회(코케인)를 꿈꾼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꿈꾸는 이상사회는 모어의 『유토피아』일까요? 아니면 베이컨의 『신 아틀란티스』일까요? (알고 보면,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문제, 곧 “평등이냐, 자유냐?”, “정부냐, 시장이냐?”, “집단이냐 개인이냐?” 하는 소위 좌파와 우파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 우선 각각의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기로 하죠. 우리는 모어의 『유토피아』와 베이컨의 『신 아틀란티스』의 전형적 모델을 구 소련과 미국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구 소련은 억눌린 계급의 해방을 약속한 새로운 문명의 탄생이자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실현된 위대한 나라로서 전 세계 지성인들의 기대를 모았지요. 자본주의적 착취와 인간 소외가 없는 진정한 평등과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사회,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해 더 이상 비참해지지 않는 땅, 곧 모어적 유토피아의 실현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갓 물거품 같이 헛된 기대였지요. 내부적으로 행해진 공산 독재사회의 체제적 폭력과 억압 그리고 수많은 숙청은 모어적 유토피아가 가진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세계 인민의 연합이라는 미명 아래 1956년 헝가리 혁명 진압과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진입으로 제국주의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보였지요.

 

게다가 T. 모어가 그리고 누구보다도 K. 마르크스(K. Marx, 1818~1883))가 기대했던 자본주의적 착취로부터 해방된 인민의 도덕적 성숙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단지 생산력만 떨어져 갔던 겁니다. 그 결과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전락하였고, 70년이 지난 1980년대 말 그 막을 내렸지요.

 

이에 반해, 헤겔(G. W. F. Hegel, 1770~1831)이 “아메리카는 미래의 나라, 세계사의 짐을 떠맡을 미래의 땅”이라고 예언하였듯이, 19세기 미국은 ‘자유와 기회의 나라’였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구가하는 나라인 미국은 ‘자유주의 유토피아’의 상징 곧 베이컨의 ‘신아틀란티스’였던 것이죠. 뉴욕 항에 우뚝 서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바로 그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자유 여신상‘은 점차 ’추한 아메리카인‘의 얼굴을 드러냈지요. 내적으로는 물질적 풍요와 번영을 누리지만, 빈부의 격차와 인종차별, 그리고 물질문명에 의한 인간 소외와 그 부작용(매춘, 마약, 자살 같은 도덕적 타락) 등에 시달리고 있으며, 외적으로는 세계 평화를 빌미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이용한 세계지배 곧 새로운 제국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모습에서 더 이상 유토피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최인훈의 『광장』은 6.25전쟁 전후, 한반도에 살았던 이 명준이라는 인물을 통해 바로 이것 - 곧 자유주의 유토피아도 사회주의 유토피아도 우리가 꿈꾸는 이상사회가 아니라는 것 -을 잘 보여주었지요.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정치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가족과 생명에 대한 사랑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만이 오히려 우리를 유토피아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물론 이러한 결말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비판도 있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와 다른 어떠한 구체적 대안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유토피아로 가는 길

 


최인훈의 『광장』에서 주인공 이 명준이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과 A. 기든스(A. Giddens, 1938~ )라는 영국의 사회학자의 말을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기든스도 우리가 꿈꾼 유토피아 - 곧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자유주의 유토피아 - 모두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실패했다 해서, 유토피아에 대한 이상과 꿈마저 버릴 수는 없다고도 강조합니다. 그리고 ‘제 3의 길’을 제시하지요.

 

제3의 길이란 - 거칠게 말하자면 - 모어의 유토피아와 베이컨의 신 아틀란티스 그 중간으로 난 길입니다.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와 자유주의적 유토피아 그 사이에 놓여 있다는 말이죠.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 길은 ‘자유가 보장된 평등’ ‘평등이 전제된 자유’를 추구하는 길이고, ‘경쟁이 보장된 협동’ ‘협동이 전제된 경쟁’을 추구하는 길이며, 또한 ‘사생활이 보장된 유대’ ‘유대가 전제된 사생활’을 추구하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 언뜻 보아도 - 이 길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생각에 따라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조차 합니다. 경험에 의하면, 자유를 보장하면 평등이 깨어지고, 평등을 전제하면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경쟁을 허락하면 협동이 깨어지고, 협동을 하면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또한 개인의 사생활을 내세우면 공동체의 유대가 깨어지고 공동체의 유대를 내세우면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인훈이 『광장』에서 상징적으로 설정한 ‘밀실’과 ‘광장’의 관계이기도 하죠. 밀실과 광장은 결코 같은 공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명준의 좌절과 절망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요. 기든스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 사회학자인 그도 밀실과 광장이 하나가 되는 어떤 기적적인 ‘제3의 유토피아’를 설계하는 일은 감히 꿈꾸지도 못했지요. 단지 그것을 향해 그저 ‘한없이 다가가야 하는 과정’을 뜻하는 ‘제3의 길’에 대해서만 언급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기든스가 말하는 ‘제 3의 길’은 생명존중, 빈곤과의 전쟁, 폭력과 고통의 감소, 어린 것들에 대한 배려, 행복과 자기실현, 파괴된 환경의 구제, 전제권력에 대한 대립 등을 지향하며 ‘보다 나은 곳’으로 한걸음씩 떠나는 ‘머나먼 여정’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결코 넓지도 않고 평탄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잘 보이지도 않지요, 마치 칼날 위에 선 것처럼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걸어야할 매우 험하고 조그마한 샛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길을 따라가면 언젠가는 진정한 유토피아 곧 이명준이 찾던 ‘푸른 광장’에 이를 것이라는 거지요. 우리는 이 말을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어 이런 생각도 가져봅니다.

 

'어쩌면 최인훈의 『광장』에서 이명준이 마지막에 희미하게나마 보았던 길도 바로 이 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당시로는 유일한 ‘제3의 길’이었던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 게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고 또한 잃어버린 그에게는 이 ‘험하고 조그마한 샛길’을 찾아갈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래서 바다로 뛰어든 게 아닐까? '

 

알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만은 분명합니다. 대강 이렇지요. 

 

너희는 갖고 있는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이상사회를 향한 뜨거운 소망을!

너희는 갖고 있는가? 자유와 평등을 양립시키려는 강건한 의지를!

너희는 갖고 있는가? 경쟁과 협동을 조화시키려는 준엄한 정의를!

또한 너희는 갖고 있는가? 개인과 집단을 화해시키려는 영특한 지혜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들을 실현하기 위한 자기희생적 도덕심을 너희는 진정 갖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진정 그렇지 않다면, 너희도 언젠가는 나와 같이 이렇게도 아픈 가슴으로 쓸쓸하고 황량한 길을 갈 수밖에 없으리라.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광장’으로 향하는 길은 이런 모든 것들이 함께 모여야만 비로소 어렵사리 열리는 ‘좁은 길’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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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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