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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지 않겠다

  • 작성일 2005-10-18
  • 조회수 4,119


              나는 죽지 않겠다

 

 

 "지난 며칠간 나와 내 가족에게 때로는 목숨줄이 되어주고 때로는 논다니줄이 되어주었던 돈이 없어진 지금, 나는 이 강가에 홀로 앉아 죽음을 생각한다. 그런데 그 지난 며칠간 내가 지녔던 그 돈은 정말 나와 내 가족에게 때로는 목숨줄이, 때로는 논다니줄이 되어주기는 되어줬던 것일까. 목숨즐은 슬프고 논다니줄은 줄거우니, 나는 논다니줄로 그 돈을 썼을까. 그렇지만 나는 진정 그 돈들을 쓰면서 즐겁기만 했는가... ..."

 

       

 

 

내가 지금 이 강가에 홀로 앉아 있게 된 원인은 단 한가지, 내가 반장의 짝이었다는 것, 그리하여 어찌 할 수 없이 바쁜 반장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도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 뿐이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나는 지금 내가 이 강가에 홀로 앉아 있어야 하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바람은 불지 않는다. 그러나 강가는 춥다. 아니, 춥다기보다 차갑다. 안개는 아침나절이 다 가도록 걷히지 않는다. 멀리서 보면 하얀 덩어리인 안개는 그 속에 있으면 자디잔 물방울들의 부유가 환하게 눈에 보인다. 물방울들은 자유롭게 유영하여 내 머리에, 내 얼굴에, 내 목덜미에, 급기야는 내 옷 속으로 파고든다. 나는 안개에 감추어져 오전 나절동안 세상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 이 강가에 있는 모든 것, 나무도 풀도 물오리도, 새도 이 시간이 편안한가.
나는 지금 돈이 없다. 잠자고 먹고 입을 돈이 아니라, 학교에 가져다 줄 돈이 없다. 잠자고 먹고 입을 돈은 엄마한테서 나온다. 엄마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만원, 이만원이 우리 식구 목숨줄이다. 돈도 여러질이라고 엄마는 말했다.


 

 “돈도 여러질이다. 우리집에 들어오는 돈은 질기디 질긴 목숨줄이고 한량한테 들어가는 돈은 연하디 연한 여흥줄이다.”

 

 나는 여흥줄이 뭐냐고 물었다. 
 엄마는 다시 말했다.

 

 “논다니줄이지 뭐야.”

 

 지난 며칠간 나와 내 가족에게 때로는 목숨줄이 되어주고 때로는 논다니줄이 되어주었던 돈이 없어진 지금, 나는 이 강가에 홀로 앉아 죽음을 생각한다. 그런데 그 지난 며칠간 내가 지녔던 그 돈은 정말 나와 내 가족에게 때로는 목숨줄이, 때로는 논다니줄이 되어주기는 되어줬던 것일까. 목숨즐은 슬프고 논다니줄은 줄거우니, 나는 논다니줄로 그 돈을 썼을까. 그렇지만 나는 진정 그 돈들을 쓰면서 즐겁기만 했는가. 나와 내 가족은 내가 지니고 있던 그 돈으로 산 군고구마 한봉지와 햄버거 한 개와 한 켤레씩의 털장갑과 양말 그리고 생일케잌 한상자로 분명 행복한 한때를 누렸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또 그 돈을 쓰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이천원어치 군고구마를 사들고 골목을 뛰다시피 걸어갈 때, 나는 너무나 행복했고 너무나 죽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너무나 죽을것만 같아서 나는 죽음을 생각하며 이 강가에 앉아 있는 것이다. 죽으면 편안해질 것인가. 그래서 아버지도 사는 것 보다는 죽는 게 편안해서 일찌감치 저 세상으로 가버린 것일까. 내가 지금 안개 속에 갇혀서 편안한 것처럼, 죽으면 세상 사람들 눈으로부터 벗어나서 편안할 수 있어서 아버지는 죽어버린 것일까. 세상 사람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돈이 너무 많았던 아버지는. 안개 저쪽에서 사람들 소리가 난다. 사람들은 안개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 소리는 안개 밖에서 사뭇 다채롭다.
 한번만 그딴 소리 하면  죽을 줄 알어,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내가 꼭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냐, 야아 아침밥도 안먹고 나왔는데 니가 웃기니까 더 죽겠잖아, 내가 누구 좋으라고 죽냐 난 안죽어 임마, 끼익, 컥, 쿵, 애가 죽을려고 환장했나.......
 안개 속에서는 지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물도 흐르기를 멈춘 듯, 소리나지 않게 흐른다. 새도 우는걸 잊어버린 듯, 고요히 나무 끝에 앉아있다. 돈이 없어도 흐르는 강물, 돈 들 필요도 없이 우는 새들은 얼마나 편안할까. 돈을 쓰고 또 써도 또 돈 쓸일만 생겨서 사는 게 꼭 죽을 것만 같은 사람들과 달리.

 엄마는 오늘도 전화통을 붙잡고 있다. 배달 요구르트 입금일이 다가온 것이다. 엄마는 요구르트를 배달하고 나면 수금을 해서 대리점에 입금을 해야 그달치 월급이 나온다. 그러나 배달하면서 조금씩 수금한 돈은 이미 생활비로 써버린 터라 엄마는 누군가한테 돈을 꾸어서 입금한 뒤 월급을 받아 다시 빌린 돈을 갚고 또 조금씩 수금한 돈을 생활비로 쓸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입금일인 매달 말일이 다가오면 엄마는 애간장을 태우며 전화통을 붙잡는다.

 

 “정희엄마, 월급 나오면 갚아줄게. 한 사흘만 쓰면 돼.”

 

 정희엄마는 석달에 한번 꼴로 엄마한테 사흘간 돈을 빌려주고 사흘 뒤 이자까지 합쳐 돌려받는다. 그러나 이번달에 정희엄마는 엄마에게 빌려줄 돈이 없는가 보다. 정희엄마와 통화를 끝낸 엄마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고 다시 다른 전화번호를 누른다. 엄마가 전화를 거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한번씩 엄마에게 돈을 빌려줘 봤던 사람들이다. 나는 엄마가 전화통을 붙잡고 있을 때마다 귀를 막는다. 엄마의 목소리는 때로 비굴하고 때로 애잔하고 때로 터무니 없이 당당하다. 엄마가 당당할 때는 물론 외삼촌한테 할 때다. 삼촌은 예전에 엄마한테 돈을 가져다 쓰고 갚지 않았다 한다. 한번 그런 일이 있은 죄로 삼촌은 달이면 달마다 엄마의 욕을 먹어야 한다.

 

 “야, 이 나쁜놈아, 누나가 이렇게 피 말려 죽게 생겼는데 넌 지금 하품이 나오냐?”

 

엄마한테 욕을 먹는 삼촌도 그러나 돈이 없다. 삼촌은 오락실에서 도박을 하여 돈도 날리고 이혼도 당했다. 전화선 저쪽의 삼촌이 엄마한테 하는 말을 나는 안들어도 안다.

 ‘누나, 누나한테 줄 돈 있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어? 진작에....’ 라고 삼촌은 말했을 것이다. 엄마는 정확하게 반문한다.

  “진작에, 뭐?”

  ‘진작에 한방 터트리러 갔지. 누나, 걱정하지 마. 내가 말야, 이번에 한방만 터트리면 누나 애들 내가 책임질 수 있어. 그 뿐인줄 알어? 누나 노후는 걱정 없다구.’

 

 이렇게 삼촌은 뻥을 쳤을 것이다. 그러니 엄마가 악을 안쓸 수가 없는 것이리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누나 돈이나 입금시켜!”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최대한 막고 책상에 코를 박는다. 그럴 때, 바람이 분다. 위윙, 휘이잉, 내 마음에 바람이 분다. 바람이 나를 이 집이 아닌, 아주 먼 데로,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데려가 주기를 기도 하지만 그러나 바람은 그저 내 가슴 한가운데를 빠르게, 날카롭게 지나갈 뿐이다. 엄마가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사이 화장실에서 여드름 짜느라고 나오지를 않던 오빠가 분화구같은 얼굴을 하고 나온다.

 “야!”

 

 오빠는 언제나 나를 야, 라고 한다. 기분 나쁘다. 그래도 나는 오빠한테 대들지 않는다. 내가 오빠한테 대들면 그렇잖아도 속상한 엄마가 더 속상해 할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아무리 기분 나쁘고 속상해도 오빠한테 대들지 못하는 것은  엄마가 대리점에 입금해줘야 할 돈 때문에 불안하듯이, 오빠가 틀림없이 학교에 내야 할 돈 있는데 그돈을 어디서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

 “뭘 왜냐, 라면 끓이라는거지.”

 나는 라면을 끓인다. 라면이 끓는것처럼 내 마음도 끓는다.

 

 “오빠, 라면 먹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오빠는 절대로 식탁으로 오지 않는다.

 “오빠, 게임 그만하고 와서 라면 먹어. 지난번에도 봤더니 라면 국물이 자판 속에 들어가가지고 니을 자가 말을 안듣드만, 왜 맨날 식탁에 오지 않고 라면을 컴퓨터 앞에서........”

 “야.”

 

 오빠의 음산한 목소리. 나는 찔끔한다.

 

 “왜애?”

 “조용히 해라.”

 “알았어.”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라면을 쟁반에 받쳐서 오빠의 컴퓨터 책상 앞으로 갖다준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마음 속으로는 라면그릇을 오빠 무릎에라도 쏟아부어버리고 싶다. 그러나, 참는다. 왜? 그러면 엄마가 속상해 할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오빠도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 명랑하게 살고 싶다. 바람 한줄기가 내 가슴 한가운데로 지나갈때마다 나는 노래 부른다. 맑고 고요한 바람, 비단같은 풀밭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오, 거기서 나는 살아가리오, 시냇물이 정답게 지즐대는 곳, 새들이 부리를 맞대는 곳, 흰구름이 그늘을 만드는 곳, 나는 그 속에서 살아가리오.....
 그러나 내가 사는 곳은 맑고 고요한 바람도, 정답게 지즐대는 시냇물도, 흰구름의 그늘도 없는, 낯선 곳. 나는 엄마가 살기 위해 내지르는 모든 비명과 애원, 오빠의 슬픈 짜증이 낯설고 또 낯설다. 왜 낯설으냐 하면, 이것은 내가 꿈 꾸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살아가야 한다. 어떻게 하든지 나는 명랑하게 살아가야 한다. 아빠가 돌아가시자 자기돈도 안주고 죽어버렸다고 빚쟁이들이 몰려와서 이미 죽은 아버지에게 욕을 퍼부어대고 엄마 멱살을 뒤흔들어댔다. 고통과 수모 수모와 치욕의 나날을 살면서도 엄마는 말했다. 어떡하든 산사람은 살아가야 한다고. 이 고통과 수모와 치욕 때문에라도 우린 살아야 한다고. 나는 그때,  살아 있으니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히 새겼던 것이다. 그리고 고통과 수모와 치욕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학교에 가져다 주어야 할 돈, 아니, 돌려 주어야 할 돈이 없는 지금, 나는 내 아버지처럼 죽음을 생각한다. 죽으면, 모든 것이 편안해질까. 죽으면, 지금 내 얼굴이며 목덜미에 달라붙는 안개도, 축축히 젖은 나뭇잎도, 소리없이 흐르는 강물도 볼 수 없겠지. 그런 것 안봐도 좋은데, 그러나 엄마랑, 오빠를 볼 수 없겠지.
 엄마는 기나긴 전화통화를 끝내고 이불을 뒤집어 썼다. 나는 안봐도 안다. 엄마가 지금 울고 있다는 것을. 엄마는 돈이 없어서, 요구르트 대리점에 입금해줘야 할 돈 오십만원이 없어서 울고 있는 것이다. 그때, 내 입에서 왜 그 말이 튀어나왔던 것일까. 나는 사실 엄마가 전화통화를 하는 내내 내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면 엄마가 울지 않을 수 있다. 엄마는 돈 오십만원만 있으면 누구보다 행복한 엄마일 수 있다. 엄마는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엄마였다. 어떤 궂은 일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엄마였다. 나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방금전까지 울고 있었으면서 목소리만은 명랑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으응,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엄마만 한번 불러봤을 뿐이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 백만원 중에 오십만원을 엄마 앞에 내놓으면 엄마는 살 수 있지만 나는 죽을것만 같아서 나는 그렇게 엄마만 불러보고 돈은 내놓지 못했던 것이다.
 

 

 원래 그 일은 반장이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장은 내게 그 일을 부탁했다. 반장은 이학년 학생회장이자 미술부원이어서 학교 축제때 전시할 그림 때문에 바빠서 내가 그 일을 맡아주면, 나중에 내게 떡볶기와 순대를 사주겠다고 했다. 그 일이란, 3학년 선배들의 대학입시날 새벽에 선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쓸 돈을 거두는 것이다. 그 돈이 남으면 ‘연말 불우이웃돕기성금’으로 쓸거라고 했다. 우리반 반장이면서 2학년 학생회장인 반장이 다른반에서 거두어진 돈을 내게 가져왔다. 내 수중에 단박에 돈 백만원이 들어왔다. 나는 그 돈을 입시 전날까지 가지고 있다가 반장에게 주면 되었다. 왜냐하면 반장은 축제 때문에 정신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입시날까지는 일주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입시날 새벽까지도 그 돈을 반장에게 돌려주지 못했다.
 나는 엄마가 밤새 울었던 날 새벽에 내가 지니고 있는 돈에서 오십만원을 엄마 몰래 엄마의 가방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여느날처럼 아침 자율학습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하여 언제나처럼 아침밥도 먹지 않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여느날과 똑같이 야간 자율학습까지 마치고 집으로 왔다. 엄마 표정이 어제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엄마가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속닥거렸다.

 

 “얘, 오늘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체 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세상에, 내 가방 속에 내가 필요한 돈 오십만원이 딱 들어있지 뭐니?”

 “와아!”

 

 “성당에 수녀님이 그러시더라. 돈 십만원을 들고 휴가를 나가서 구만원까지 쓰고 딱 만원

남겨놓고 어느 성당에 미사를 갔는데, 이윽고 봉헌시간이 돌아왔더란다. 수녀님은 어떻게 할까, 돈 만원을 내버리면 수녀원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어지고 그렇다고 안내고 싶지는 않고 ,그제서야 어디 가서 돈 만원을 잔돈으로 바꿀 수도 없고 그냥, 에라 모르겠다, 자기가 가진 전재산 만원을 딱 봉헌함에 넣어버리고 나서 눈 질끈 감고 기도를 했더란다.”

 

 “그래서요?”

 “그래서는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하느님한테 물었겠지. 아 그런데 기도를 끝내고 딱 눈을 떠보니 글쎄 수녀님 눈 앞에 웬 흰 봉투가 놓여 있더라지 뭐냐.”

 

 “돈봉투요?”

 “그래.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보니 아, 글쎄 거기에는 만원의 열배인 십만원이 들어있었다지 뭐냐. 여행하는 수녀님이구나, 하구서 어떤 착한 신도가 수녀님 여행경비에 쓰라고 선물로 주고 간거야.”

 

 “결과적으로 하느님이 주신거네요?”

 나는 엄마 듣기 좋으라고 얼른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엄마의 고정 멘트가 이어졌다.

 

“그럼 그럼. 간절히 기도하면 언제고 하느님은 들어주시지. 항상 기도한만큼보다 더, 그 열배로 들어주시지.”

 “엄마도 기도 했어요?”

 

 “기도만 하냐, 애원을 했지.”

 “엄마, 그러면 이제부터 더욱더 열심히 기도해요. 아니, 애원하세요. 그러면 또 더 좋은 일이 생길지 누가 알어?”

 

 “그러게 말이다.”

내 호주머니에는 정확히 오십만원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이제 더욱더 열심히 기도할 것이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지 못한 죄인이지만, 주님께서 제 한가지 소원만 들어주신다면 앞으로는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가난한이들을 사랑하며 살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진 주님이 엄마를 사랑한다 해도 엄마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할 수가 없다. 엄마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기엔 엄마 자신이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엄마는 그날그날 요구르트를 팔고 수금해 온 돈 만원, 이만원을 사랑한다. 그 돈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다. 엄마는 만원을 내놓으면 십만원이 돌아와 주는 수녀님이 아니라, 요구르트 한 개를 팔면 심원, 이십원이 돌아오는 요구르트 아줌마다.

 저녁도시락을 까먹었다. 친구들은 학교식당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는다. 나는 점심만 식당에서 먹고 저녁은 도시락을 먹는다. 도시락을 먹고 나서 도시락 먹는 아이들끼리 매점으로 갔다. 나는 매점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매점에 갔다온 아이들이 언제나 내게도 과자와 빵과 음료수를 준다. 나는 그것들을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안먹으면 그것이 더 어색하여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먹는다. 아니, 먹어준다. 고등학생인 우리들은 더 이상 어린애들이 아니므로, 먹을것이 생기면 아무렇지도 않게 나눠먹고 나눠 먹어준다. 그러나, 나눠주는 사람이야 별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나누어준 것을 먹어주는 사람 입장은 다르다. 나는 매번, 과자나 음료수를 먹어줄때마다 목구멍이 따갑다. 오늘 나는 아이들과 함께 매점에 갔다. 과자와 빵과 음료수를 내 돈으로 샀다. 다른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것들을 아이들 앞에 펼쳐 놓았다. 우리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아무 생각없이 먹었다. 아무렇지 않은것처럼 간식들을 먹는 내가 그러나, 극심한 희열과 그리고 그에 못지 않은 극심한 불안감에 치떨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까.
 돈을 보관한지 3일째, 내게는 사십구만 오천원이 남아 있었다. 엄마가방 속에 넣어준 오십만원은 엄마가 월급 타오는 날, 몰래 넣어줬던것과 똑같이, 몰래 빼내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십만원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천원은, 겨우 오천원이다. 설마, 남은 4일동안 내게 5천원 생길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 뚜렷한 용도를 밝히지 않고 엄마한테 말해도 엄마는 그냥, 묻지 않고 내줄 수 있는 액수다. 정 엄마한테 오천원도 없는 최악의 상황이라면 오빠 호주머니에 오천원 정도 없을리 없다. 오빠 호주머니에 단돈 십원도 없을 수도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냥, 착한 내 짝 반장에게 꿀 수도 있을 것이다. 반장은 내게 돈 거두고 돈 보관해준 답례로 떡볶기와 순대를 사주기로 했으니, 그정도 돈은 지니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어쨌든 나는 내가 지니고 있던 학교공금 백만원 중에 지출된 돈 오십만 오천원에 대한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기도의 효험’에 대한 믿음을 쉽게 깨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입구에 못보던 군고구마장수가 있다. 아닌게 아니라, 낼모레가 곧 대학입시고 대학입시날이 가까워지니 날씨도 그것을 알고 얼른, 빨리빨리 추워진 것이다. 그리고 날씨 추워지기를 기다리던 고구마 장수가 드디어 밤거리에 나온 것이다. 나는 군고구마 천원어치만 사기로 했다. 그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나는 토요일이면 종종 무 한 개를 사들고 귀가하기도 하고 토요일이면 붕어빵 천원어치를 사기도 했다. 그러니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무 한 개, 붕어빵 천원어치는 내가 두 번 탈 버스를 한번만 탄 결과물들이었다. 나는 내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사십구만 오천원 중에서 천원을 빼들고 고구마장수에게 다가갔다. 그 천원은 내일 아침 조금만 더 빨리 일어나 버스를 한번만 타면 굳어질 돈이다.

 

 “아저씨, 고구마 주세요.”

 노릿하게 구워진 고구마가 종이봉투에 담겼다. 나는 군고구마의 따뚯한 온기를 가슴에 안으며 고구마의 온기가 늘 시린 엄마 가슴에도 꿈처럼 번지기를 바랐다.

 

 “이천원입니다.”

 “아저씨, 천원어치만 주세요.”

 

 “이천원이 기본이야.”

 “그래도 천원어치만 주세요.”

 

 “천원어치는 못팔아, 아니 안팔아.”

 “그런게 어딨어요? 이천원어치의 절반만 주시면 되잖아요?”

 

 “이봐, 학생 지금 바쁜 사람 데리고 장난하나. 천원어치 안판다고 했잖아아!”

고구마를 사러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아저씨는 하나도 바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사십구만오천원에서 이천원을 꺼내 고구마장수에게 주었다. 그래도 구수한 고구마 내음이 주는 행복감은 어쩔 수 없다. 더구나, 그걸 두손으로 조용히 감싸안을 엄마라니. 나는 오늘밤,  군고구마같이 따스한 엄마의 미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구마가 식을세라 뛰다시피 걷는 내 발걸음은 그러나, 또 어쩔 수 없는 불안감으로 조금 휘청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내 머릿속으로는 내가 써버린 돈, 다음주 월요일이면 반장에게 돌려주어야 할 돈의 액수가 마치 영화자막처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 자막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사십구만 삼천원 남았습니다. 불안해질수록 나는 더 빨리 뛰어갔다. 그리고 내가 늘 가장 바라던 엄마의 행복한 미소를 바라며 고구마 봉지를 내밀었다. 엄마는 말했다.

 

 “우리딸이 최고다. 오빠도 좋아하겠구나.”

 오빠는 늘 밤 늦어 집에 오면 도대체 이집에는 먹을것이 없다고 투덜대곤 했었다. 열어봤자 신김치 뿐인 냉장고문을 열었다 닫았다 해가며 밤 늦은 시간 오빠가 먹을 것을 찾아 집안을 배회하면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쓰린 가슴을 붙안고 오빠가 불쌍해서 조금 울기도 했었다. 오빠가 와서 먹어도 따뜻할 수 있도록 엄마는 고구마봉지를 수건같을걸로 칭칭 동여매놓겠지. 오빠 사랑해애....... 그리고 나는 잠들었다. 군고구마처럼 따스한 잠이 밀려왔으므로 나는 밤늦어 집에온 오빠가 고구마를 먹었는지, 안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언제나 나보다 늦게 와서 나보다 먼저 집을 나가야 하는 오빠의 볼멘소리가 메마른 낙엽처럼 내 방안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오빠의 투덜거림, 오빠의 볼멘소리, 오빠의 슬픈 짜증, 이 모든것이 나는 푸석푸석한 낙엽들만 같다. 그것들은 꼭 쥐면 금방이라도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릴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지곤 했다.

 

 “엄마, 생각해봐, 점심, 저녁까지 도시락으로 먹으면 얼마나 창피하겠어.”

 “왜 못해. 밥 못먹는 애들도 많다더라. 넌 테레비도 안보니?”

 

 “테레비 볼 시간이 어딨어.”

 “컴퓨터할 시간은 있어도?”

 

 “고3이 스트레스 쌓이는데 그것도 못해? 그딴 얘기 그만하고 내 급식비 어떡할거야아!”

 “도시락 싸갖고 가래잖니.”

 

 “차라리 내가 굶고만다!”

 “도시락을 싸갖고 가든지, 굶든지, 엄마 월급날까지, 딱 일주일만 그렇게 해.”

 

 아, 엄마 월급날. 그날의 풍경을 나나 엄마나 오빠나 다 알고 있다. 월급은 순식간에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가리라는 것을.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오빠가 문득 물었다.

 “야, 너 돈 있냐?”

 

 “쟤가 무슨 돈이 있겠냐.”

 “돈 없으면 고구마는 왜 사와.”

 

 “니가 하도 집에 와서 먹을 것 없다 투덜대니깐, 쟤가 버스비 아껴서 오빠 간식거리 사온거지.”

 으흠! 오빠가 갑자기 의미심장한 콧소리를 낸다. 나는 오빠가 고구마를 먹었는지, 확인해 본다. 뜯겨진 비닐봉지 위에 군고구마 껍질이 말라가는 중이다. 나는 세수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야간자율학습 끝나는대로 집에 와 김치전이라도 부쳐놔야지. 앞으로 다시는 오빠가 수많은 밤들을 고픈 배를 부여잡고 공복의 고통에 치떨며 잠들게 하지는 않으리라. 엄마가 전쟁같은 하루의 노동을 끝마치고 돌아와서 오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감기는 눈과의 사투를 벌이는 일이 없도록, 내가 오빠의 귀가를 반겨줄 것이며, 오빠의 간식을 준비하리라. 화장실에서 세수를 마치고 나왔을 때 오빠는 먼저 나가고 없었다. 새벽 안개가 걷히지도 않은 거리로 오빠가 가고 그리고 또 내가 갈 것이다. 오빠나 나나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 날로 핏기가 없어지고 엄마는 하루종일 햇빛 아래 살아 날로 검어진다. 엄마가 웃을 때면, 마치 토인 같았다. 엄마는 검어지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우리는 날로 희어져 간다. 노란 전등불은 이 희고 검은 가족들이 한자리에 잠깐만이라도 모여앉는 것을 보지 못하고 혼자 깜박거린다. 전등불도 외롭다.

나는 등굣길, 버스 맨 뒷좌석에서 오늘은 그냥 반장에게 돈을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만지작거리듯이 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반장에게서 건네받아 보관하고 있던 돈 중에 무려 오십만 칠천원이나 비어 있다는것을 내가 깜박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결론은 그러니까 이제 나는 돈을 반장에게 돌려주고 싶어도 아직은 돌려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갑자기 분한 마음이 엄습해왔다. 무엇이 분한가. 그건 명확하지 않았다. 아무리 바쁘기로서니, 내게 돈을 맡긴 반장의 처사가 분한가. 하지만 나는 반장의 짝이다. 우린 짝으로서 지난 일년간 꾸준히 서로를 도우며 생활해 왔다. 지난 일년이 다 뭔가 반장은 일학년 때도 내 짝이었다. 반장은 저와 나 사이를 ‘짝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이’라고까지 말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사고가 났을 때, 내가 아팠을 때,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반장은 늘, 내 옆에 있었다. 반장에게 분한 것은 눈꼽만큼도 없다. 그런데 무엇이 분한가. 하여간 무엇인가가 분해서 나는 아랫입술을 나도 모르게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는 그만 버스에서 내려 축축한 겨울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학교에 갔다. 교실에 들어가자, 반장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반장의 굳은 표정은 다시 내게 등굣길의 축축한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내 모습을 상기시켰다.

 

 “안되겠어. 애들한테 돈을 돌려줘야 할 것 같아.”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지만 침착하게 물었다.

 

 “왜?”

 “선생님들한테 혼났어. 돈 거둬서 선배 응원한 것 드러나면 학교가 아작난대.”

 

 “돈 집에 두고 왔는데.”

 “알았어. 그럼 낼은 꼭 가져와야 돼. 하루가 급하단 말야.”

 

 “그래.”

 나는 가방 맨 뒷지퍼를 열었다. 사십구만이천원이 거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갑이 없었다. 오빠가 한 짓임에 틀림없었다. 오빠는 종종 그래왔으니까. 엄마한테 돈이 없으면 오빠는 내 버스비까지 몽땅 털어 달아나곤 했으니까. 아침 등굣길에 축축한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부터 어떤 예감이 들었으나, 나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갑의 부재를 확인 한 지금, 나는 오빠를 절대로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오기가 생겼다. 나는 점심시간에 오빠에게 전화했다. 엄마도 없는 휴대폰이 오빠는 있다.

 

 “오빠?”

 “응. 내가 이따 맛있는 것 사줄까?”

 

  오빠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어디서?”

 

 “햄버거 사주까?”

 햄버거가게는 우리 동네에는 있지 않으니, 시내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좋아.”

 밤 열시가 넘은시간, 성탄절이 다가오는 시내거리는 불야성이다. 시내 롯데리아 앞에서 오빠를 기다렸다. 오빠는 나를 만나자마자 불쑥 말했다.

 

 “니 친구들 좀 데리고 오지 그랬냐.”

 “내 친구들은 햄버거 안좋아해.”

 

 “그럼 술 좋아하냐?”

 “미쳤어?”

 

 나는 맛없는 햄버거를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밤 늦은 시간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술 취한 날이면 아버지는 이따금 우리 식구들을 시내로 불러서 밤 늦은 외식을 시켜주곤 했었지. 그때 먹었던 것은 주로 순대국밥이거나, 콩나물해장국이었다. 이제 다시는 그런 날밤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리고 순대국밥이나 콩나물해장국이 아니라 자주 먹지 않아서 맛도 모르겠는 햄버거이긴 하지만, 오늘 오빠 덕에 시내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오빠가 뱉듯이 툭 말했다.

 “미안하다.”

 

 “아니. 괜찮아.”

 “뭐가 괜찮냐.”

 

 “아직 다 안썼지?”

 “다는 안썼어.”

 

 나는 되도록 흥분하지 않고 사실대로 자분자분 말했다.

 “왜 있지. 텔레비전 같은데서 보면 선배들 시험 보는데 새벽에 나가 커피도 사주고 엿도 사주고 하는. 거기 쓰려고 거둔 돈이야. 애들이 참 착해. 쓰고 남은 돈은 연말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낸대. 반장이 무척 바빠. 그래서 내가 보관하고 있던거야. 난 반장과 짝이고 그리고 친해. 근데 문제가 생겼어. 학교 허락도 안맡고 돈 거뒀다고 반장이 야단맞았나봐. 빨리 돌려줘야 해. 하지만 내일은 내가 깜박 잊었다고 할께. 그리고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좀 있으면 엄마 월급날이야. 그때까지만 버텨봐.”

 “그래, 엄마 월급날이니까 걱정없어.”

 

 나는 짐짓 명랑하게 퍽퍽한 햄버거를 먹었다. 오빠는 콜라에 빨대를 꽂아 내게 다정하게 내밀었다. 오빠가 아까부터 만지작거리고 있던 비닐봉투에서 색이 고운 털장갑 한 켤레를 꺼냈다.

 “내가 진작에 사주고 싶었는데, 이제야 샀다. 물론 내돈으로 산건 아니지만.”

 말 끝에 오빠가 낄낄거렸다. 오빠가 낄낄거리는 것이 꼭 나는, 끽끽거리는 것처럼 들렸다.나는 오빠의 희한한 웃음소리의 이유를 이해했으므로, 선선히 말했다.

 

 “고마워.”

 꺼내지 않은 또다른 것은 엄마의 것이리라. 햄버거를 넘기는 목구멍이 좀 따가와 오는 것 같았다.

 

 “콜라도 마셔가면서 먹어라. 나중에 오빠가 돈 벌면 이꺼짓 햄버거가 대수겠냐.”

 “알았어.”

 

 오빠와 나는 햄버거집을 나와 밤거리를 조금 걸었다. 뭔가가 공중에서 희뜩거리는게 자세히 보니 눈이었다.  첫눈이다.

“오빠, 눈온다.”

 

“에잇 재수없어.”

“눈 오면 좋잖아.”

 

“이 바보야, 눈 오면 엄마가 힘들잖아.”

“맞다.”

 

오빠와 나는 재수없는 눈을 맞으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이 와서 좋기는 한데, 눈은 하루종일 걸어다녀야 하는 엄마를 힘들게 하는 재수없는 눈이다. 그래서 나는 끝내 눈이 와서 좋은건지 나쁜건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나는 오랜만에 오빠와 함께한 시내나들이가 좋았다. 그러나, 그 또한 정말 좋은건지, 나쁜건지 알 수가 없었다. 별 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오빠와 시내거리를 걷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좋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 가슴 한쪽을 짓누르는 불안감을 나는 떨쳐낼 수가 없었다. 버스에 올라서 나는 오빠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오빠, 난 죽을 것만 같아.”

 

 그러나 오빠는 내 말을 못들었는지, 무심히, 잔뜩 찌푸린 얼굴로 어두운 창밖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문득 말했다.

 “오늘이 엄마 생일이야.”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었으므로 약간 놀라며, 물었다.

 “엄마 생신 선물이야?”

 

 “그렇다고 봐야지.”

 

 “그럼 내 장갑은 사지 말고 엄마걸로 더 사지.”

 

 “사람이 양심이 있지 임마.”

 나는 오빠가 정말로 양심이 있어서 양심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지, 어쩌는지 오빠 속마음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 내 마음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오빠 마음을 알겠는가.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들여다 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가 오빠에게 지극히 순한 동생이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또 그곳이 어딘지도 모를 내 마음 속 아득한 곳에서 피어나는 오빠를 향한 적의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집으로 오는 동안 나는 오빠를 향해 피어오르는 적의의 기운을 없애 버리기 위해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해야 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렸을 때, 눈은 비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그다지 반갑지도 않으면서 기뿐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눈 안와, 비야. 크흠.”

 

 “비든 눈이든, 엄마가 힘든건 마찬가지야. 야, 근데 너 계속 기침하는 것 보니까 감기 걸렸나 보다.”

 

 그게 다 오빠 때문이라는 말을 겨우 삼키며 나는 말했다.

 

 “괜찮아. 이제부턴 오빠가 사준 장갑 꼭꼭 끼고 다녀야지.”

 

 동네 입구 제과점에서 귤과 키위와 방울토마토가 얹어진 케이크를 하나 사들고 오빠와 나는 나란히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케이크를 보고 기쁜건지, 괴로운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모든 것이 그렇게 그런건지, 아닌건지 알 수 없는 것으로 하루가 마감되었다. 확실한 것 하나는 내가 죽을 것만 같다는 것 뿐.

 반장은 내게 물었다.

 

 “돈은?”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반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잃어버렸어.”

 “꺄악!”

 

 반장이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반장과 내게로 쏟아졌다.

 

“야아, 이제 난 어떡해.”

  “내가 물어줄게.”

 “언제까지?”

 

 “우리 엄마 월급 타면.”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월급에서 내가 덜어낼 수 있는 돈은 한푼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덜어낼만한 여유가 있다 해도 나는 덜어내지 않을 것이다. 우린 짝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까지 말했던 반장이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더러워.”

 

 반장이 뇌까렸다.

  “내가 왜?”

  “거짓말 하니까 더럽지. 우리 부모님이 그러셨어. 정직한게 깨끗하다고. 넌 정직하지 못하니까 더러운거야.”

 

 짝을 오래 해서 그런지 반장은 내 눈빛만 보고도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참말을 하는지 알 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반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이윽고 내게 닥칠 운명을 나는 안다. 나는 정직하지 못하니까, 더러운 사람이 될것이고 더러운 나를 친구들은, 선생님은, 학교는 결코 받아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내가 더러운 쓰레기를 바라보듯이, 세상은 나를 또 그렇게 보게 될 것이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내가 그 돈을 써버렸든, 잃어버렸든, 중요한 것은 애초에 내돈이 아니었던 그 돈을 나는 다시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돈을 잃어버린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담임이 말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니?”

 

 나는 말했다.

 

 “증명 못합니다.”

 

 담임이 말했다.

 

 “잃어버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때까지 너에게 벌을 줄 수도 있다. 어쩌면 학교는 널 퇴학시킬 수도 있다.”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죽음을 향한 생각은 죽음 이외의 것들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이해하게 했다.

 

 “다시한번 말하겠다. 그돈을 돌려주든 안돌려주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너는 정직해야 한다.”

 

 “네.”
 

 

 

 아침에 나는 학교로 가지 않고 곧장 이 강가로 왔다. 밤새, 오빠를 향한 적의에 시달리다가, 새벽이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꼭이 오빠를 향한 적의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을 향한 모멸감이라는 것을. 나는 내가 왜 나 자신에게 모멸감을 느껴야 하는지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했다.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한만큼 또한 나는 착하고 친절하고 명랑할 수가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하면 화를 내도 모자랄텐데도. 안개는 쉽게 걷히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안개 밖 세상에서 나는 소리들은 다양해졌다. 나는 그 소리들을 뒤로 하고  안개 속으로 사라질것인가를 생각했다. 안개 속으로 사라져서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것인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버렸을 때, 아버지가 남긴 문제들은 해결이 되었던가. 왜 엄마는 정말이지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할텐데도 늘 웃고 씩씩한 것일까.
 나는 안개 속에서 생각했다. 아버지와 오빠를. 그리고 엄마와 나를. 반장과 담임과 세상사람들을. 그러느라고 나는 안개가 걷힌 줄 깜박 잊고 있었다. 나는 안개가 말끔히 걷힌 강가에 오도마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내가 안개 속에 잇을 때 세상 밖 소리라고 여기던 소리들의 주인공들 또한 나와 같이 강가에 있던 사람들임을. 그들은 아직도 다투고 있었다. 그것은 다정한 다툼이었다.

 

 “난 죽지 않는다니까. 다시 말하지만 내가 누구 좋으라고 죽냐 죽기를.”

 

 남자가 말했다.

 “진짜지? 진짜 죽지 않을거지?”

  여자가 다정하게 남자의 팔짱을 끼었다.
 그들은 부부인가, 연인인가. 나는 얼른 책가방을 등에 메었다. 그리고 강둑을 뛰었다. 안개가 걷히니 모든것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나는 뛸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그러나, 부끄러움의 정체를 나는 굳이 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뛰는 것 뿐. 아침햇살이 마악 퍼지기 시작하는 세상 속으로 나는 달려나갔다. 그러면서 가만히 읊조렸다. 강가에 앉은 남자의 말을. 나 는 죽 지 않 겠 다.      
  

<필자소개>

  

공선옥

 

1963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1년 계간 《창작과 비평》겨울호에 단편 「씨앗불」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5년 제13회 ‘신동엽창작기금’을, 2004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작품집으로 『시절들』,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세상』, 『붉은 포대기』, 『유랑가족』 등이 있다.

 

 

 -작가후기 -

 

언젠가 당시 고등학생이던 우리아이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었다. 한 아이가 학교공금을 써버리고 나서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한게 탄로가 나자 자살을 기도했다는. 다행히 아이는 죽지지 않았지만, 이후 학교가 아이를 ‘처리’하는 방식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우리 아이는  말했다.
 “엄마, 선생님이 그애를 학교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너희는 쓸데없는 데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막 우리를 야단치셨어요.”
  그 아이는 결국 ‘전학’으로 ‘처리’ 되었고 나는 씁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씁쓸했는지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한마디만 한다면, 교육이란 아무리 잘못을 저지른 아이라 하더라도 ‘처리’해 버리면 되는 것이 아닌 것이 아닌가. 교육이란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나.
 아이가 들려준 이야기가 내내 가슴에 남아 이렇게 소설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 소설 속 주인공은 그래도, ‘모든 고통과 수모와 치욕’이 때로는 사람을 살수 있게 해주는 자양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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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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