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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를 통해서 본 ‘구원’의 의미(1)

  • 작성일 2006-04-09
  • 조회수 4,409






괴테(J. W. Goethe, 1749~1832)의 『파우스트』는 서구 문학이 낳은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며, 독일어로 쓰인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 번역되어 책으로 출판되고, 연극으로 공연되며, 음악으로 작곡되고, 교과서로 읽히며, 다양한 해석서가 나오고, 수없이 인용되며, 심심찮게 패러디되기도 하지요.
음악을 예로 들면, 구노, 도니제티, 베릴리오즈, 보이토, 부조니 등이 오페라로 만들었고,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멘델스존, 볼프, 무소르그스키가 가곡으로 창작했으며, 리스트는 피아노곡으로 작곡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리스트의 교향곡, 바그너의 서곡, 슈니트케의 칸타타 등에 소재로 쓰이고, 브람스의 ‘알토 랩소디’, 말러의 ‘천인 교향곡’도 『파우스트』의 한 대목에서 가사를 따왔다지요.        

그런데 이 위대한 작품에는 한 가지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의문이 시종 따라다닙니다. 이제 곧 보겠지만, 자신의 욕망을 쫓아 쾌락을 탐닉하다 살인까지 한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거지요. 『파우스트』를 보고 이런 물음을 갖게 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우리가 아직 악마의 달콤한 유혹에서, 쾌락을 향한 불같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원도 역시 간절히 기다리기 때문이겠지요.



역사에서 신화로 걷다        



16세기 초 독일에 널리 알려진 떠돌이 마법사 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의 이름이 ‘게오르크 파우스트’였는데, 흔히 라틴어 이름인 ‘파우스투스’나 그냥 ‘파우스트 박사’로 불리었지요. 1480년경 뷔르템베르크 주(州)의 소도시 크니틀링겐에서 태어나 1540년경 같은 주의 다른 소도시 슈타우펜에서 죽은 이 사내는 약 40년 동안 주술사, 점성술사, 마술사, 예언가로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며 살았답니다.

파우스트는 점성술사로 성공을 거두었고, 예언자로서도 재미를 보았지요.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현자 파우스트 박사”는 밤베르크 주교에게 1520년 2월 12일 “별점 또는 운세”를 보아주고 당시로는 상당한 수수료인 10길더를 받았고, 1535년 6월 25일 밤에 재침례교파 점령자들로부터 “뮌스터시를 되찾을 것”을 예언하여 맞추었답니다. 그런데 그가 당시 신학자, 예컨대 뷔르츠부르크의 수도원장인 요하네스 트리트하임(J. Tritheim) 같은 사람들의 공공연한 공격을 받은 이유는 자신이 죽은 자들의 혼과 소통하여 미래를 예언하는 흑마술(黑魔術)을 쓸 줄 안다고 했기 때문이었지요. 악마를 불러내는 마술을 실제 시연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마술로 그가 신화적 인물이 된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당시 마술사들이 자주 하던 일종의 사기극이었다니 말입니다.
 

파우스트를 신화적인 인물로 만든 사람은 종교개혁을 한 마틴 루터(M. Luther, 1483~1546)였다고 합니다. 루터는 악마의 존재를 믿었고, 종종 자신의 불운을 악마의 행위를 통해 설명했지요. 그는 누군가 위층에서 호두를 달그락거리는 바람에 잠을 설쳐도 그것이 악마의 소행이라고 믿었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하면서도 교황 그레고리 9세 때부터 내려오는 종교재판에서 행해지던 ‘마녀사냥’을 금하지 않았고 “마녀들에 대해 절대로 동정심을 품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들을 모두 불태워버릴 것이다.”라며 오히려 권장했지요.
그런 루터가 파우스트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를 악마와 연관시켰답니다. 그러자 루터파 신교도들을 중심으로 입담 좋은 사람들이 ‘파우스트와 악마의 계약’ 그리고 ‘그의 끔찍한 최후’를 지어냈던 겁니다. 그럼으로써 실존 인물 파우스트는 - 본의 아니게 - 신화 속으로 걸어들어 가게 된 거지요. 어쨌든 이때부터 ‘파우스트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들이 민담이나 필사본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답니다.


때맞추어 활판 인쇄술이 발달하여 1587년에는 후대의 수많은 판본들을 배출한 주요 원전인 요한 슈피스(J. Spies)의 『파우스트서』(Faustbuch)가 출간되었지요. 이 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2년 동안 16가지나 되는 독일어 판본들이 나왔는데,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1616년에는 크리스토퍼 말로(C. Marlow)의 희곡 『파우스트 박사의 생과 사의 비극적 역사』라는 제목으로 씌어져 연극으로도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답니다.

그런데 말로는 자신의 작품에 슈피스의 『파우스트서』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해석들을 첨가했습니다. 우선, 파우스트를 지식인으로 부각시킨 것이지요. 즉, 슈피스의 『파우스트서』에서 강조된 파우스트와 악마의 계약을 ‘마법사와 악마의 계약’이 아니라, ‘지식인과 악마와의 계약’으로 바꾼 겁니다. 여기에는 “아는 것이 힘이다.”를 외치며 실용적 과학지식을 강조한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 1561~1626)과 같은 당시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었지요. 에필로그의 한 대목인 “그 은밀한 지식이 이처럼 무모한 재사(才士)들을 꾀어/ 천상의 권능이 허락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하게 하나니”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또한 말러는 파우스트의 끔찍한 최후를 ‘육체의’ 끔찍한 파멸에서 ‘영혼의’ 끔찍한 파멸로 바꾸어 놓습니다. 슈피스의『파우스트서』에는 그의 최후가 다음 같이 묘사되어 있다지요. “악마가 파우스트를 밤새도록 이 벽 저 벽으로 후려쳐서 피가 흩뿌려지고 골수가 벽에 들러붙어 있는 것밖에 보지 못했다. 그의 눈알과 이도 몇 개나 흩어져 있었다. (……) 마침내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말똥 더미 위에서 발견했으나, 머리와 사지가 찢겨져버려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말러의 희곡에는 파우스트의 최후가 지옥에의 공포와 영혼의 영원한 파멸로 나타나있습니다. 파우스트는 “아, 저주받은 영혼에 끝이란 없어. / 왜 너는 영혼 없는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냐? / 왜 너의 영혼은 불멸이란 말이냐? / …… / 모든 짐승들은 차라리 행복하도다. / 죽으면 그 영혼은 곧 스러지나니. / 허나 내 영혼은 여전히 살아 지옥에서 고통받아야 하니 / 나를 낳은 부모여 저주받으라.”라고 절규하지요.  


괴테는 그의 나이 25살 때인 1774년, 최초 형태의 『파우스트』(Ur-Faust)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발표는 하지 않고 주변 친구들에게 가끔 낭독하다가, 1778년 「마녀의 부엌」, 「숲과 동굴」 등을 가필하고 「라이프치히의 아우엘바흐 지하 술집」을 수정하여 1790년에야 『단편 파우스트』(Faust : A Fragment)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지요. 그 후에도 개작과 수정을 계속했는데, 1825년부터는 2부를 쓰기 시작하여 그의 나이 82세인 1831년 7월에 마쳤답니다. 결국 괴테는 5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파우스트』를 쓴 셈이지요.

당대를 풍미하던 시인이자 석학답게 괴테는 이 작품 안에 백과사전적인 지식들을 담았을 뿐 아니라, 그 시대의 뛰어난 문학적 표현기법들을 총동원함으로써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걸작을 만들었습니다. 『파우스트』에는 강렬한 힘과 서정이 넘치는 시들, 그리고 신학적, 역사적, 심리학적, 그리고 과학적 지식들이 쟁반에 놓인 과일들처럼 소복이 담겨있지요. 이런 지적, 문학적 요소들은 이 작품을 파우스트를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과 확실히 구분하게 합니다.

하지만 괴테의 『파우스트』가 이전의 작품들과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하는 분기점은 전혀 다른 데에 있지요. 그것은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괴테가 희곡이라는 형식을 빌려왔을 뿐 아니라 파우스트를 지식인으로 해석한 것까지도 따온 말로의 작품에서조차 파우스트는 마지막에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데 말입니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악마와 결탁한 저주받은 영혼에서 신에게 구원받은 영혼으로,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악당에서 인간의 한계에 맞서는 영웅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거지요. 그리고 바로 이 극적인 변신이 이 작품을 불멸의 고전에 올려놓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심판받았다” - “구원받았느니라”


                 

1부는 「천상의 서곡」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파우스트를 아느냐 묻고, 이어 둘은 파우스트가 신의 뜻에 충실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내기를 하지요. 하나님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그의 영혼을 타고난 근원에서 벗어나게 해보라 / 그리고 그것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데려가라. /  너와 함께 지옥으로.” 라고 장담합니다. 이 장면은 『구약 성서』욥기에 나오는 장면을 그대로 본떴지요.

그 다음 첫 장면 「밤」이 이어지는데, 파우스트가 평생을 학문에 바친 후회와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아, 나는 이제 철학도 / 법학도 의학도 / 그만두었더라면 좋으련만, 신학까지도 / 열심히 애써 마쳤다. / 그 결과로 이렇게 가엾은 바보가 되었구나. / …… / 그 대신 나는 모든 기쁨을 빼앗겼다 / ……  / 재산도 돈도 없고 / 세상의 명예나 영화도 갖지 못했다.”라고 탄식하지요.

그리고 「성문 앞에서」는, 부활절 축제를 맞아 산책을 나갔던 파우스트는 일상적 삶을 기뻐하며 즐기는 평범한 사람들을 보고 마냥 부러워하지요. 그리고 자기 가슴 속에 영원을 갈구하는 이성적 삶에 대한 욕망과 순간의 쾌락을 갈망하는 감성적 삶에 대한 욕망, 이 ‘두 가지 충동’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아, 내 가슴엔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 그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떨어져 나오려고 한다. / 하나는 격렬한 애욕을 / 도구로 하여 현세에 매달려 있다. / 또 하나는 억지로 속세를 피하여 / 높은 영들의 세계에 오르려 한다.”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악마를 부릅니다. “저 대기 속에 떠도는 / 영들이 있다면 / 금빛 안개 속에서 내려와 / 나를 새롭고 화려한 삶으로 인도해 다오!” 그러자 검정 삽살개로 변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곧바로 다가오지요.

이어 파우스트의 「서재」에서, 파우스트와 “방랑하는 학생”으로 변신한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을 맺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이 세상에서는 당신을 섬기기로 / 당신의 분부를 따르고 쉬거나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 우리가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날 때는 / 당신이 나에게 같은 방법으로 되갚아야 합니다.”라고 요구하지요. 파우스트는 “악수로써 약속하자. / 내가 만약 지금 흘러가는 순간을 향해 / ‘잠시 멈춰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라고 말한다면 / 그러면 네가 나에게 족쇄를 채워도 좋다. / 내 기꺼이 당장 그 자리에서 죽으리라.”라는 유명한 대사로 응답합니다.

그 다음 장면에서 하늘을 나는 망토가 두 사람을 데리고 간 곳은 「라이프치히의 아우엘바흐 지하 술집」이지요. 이곳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마냥 즐겁게 놀지만, 파우스트는 그렇지 못합니다. 전에 그가 고백한 것처럼 “나는 그저 즐기기에는 너무 늙었고 / 욕망이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 젊다.”는 것이 원인이었지요. 그래서 다음에 간 곳이 「마녀의 부엌」입니다. 여기에서 파우스트는 30년 젊어지고, “그 약이 몸속에 들어간 이상 / 이제 눈에 띄는 여자마다 헬레네로 보일걸.”이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예언이 이루어지지요.

그래서 「길거리」에서, 마르가르테 그레트헨이라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저녁 무렵」에는, 그레트헨도 “오늘 그분이 누구신지 / 알 수만 있다면 뭐든지 드리겠지만! / 정말 믿음직한 분이었어. / 좋은 집안 출신인가봐.”라며 호감을 갖게 되고, 이를 놓칠세라 파우스트가 “공주님이라도 유혹할 만한” 묵직한 보석상자로 공세를 폅니다. 이렇게 시작한 그레트헨과의 사랑과 비극은 슈피스나 말러의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지요.

그레트헨의 비극은 대강 이렇게 전개됩니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을 유혹하여 사랑을 나누기 위해 그녀로 하여금 어머니에게 다량의 수면제를 먹이게 하는데, 어머니는 영영 깨어나지 못하지요. 이 사실을 안 그레트헨의 오빠 발렌틴이 파우스트와 결투를 벌이는데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파우스트가 그를 찔러 죽입니다. 이후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마녀들의 축제인 「발푸르기스의 밤」에 데려갔을 때,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말지요. 그녀는 실성하게 되고 영아살해범으로 잡혀 결국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1부 마지막 장인 「감옥」에서, 파우스트가 그레트헨을 구하러 가지요. 그러나 실성한 그레트헨은 파우스트를 참수꾼으로 알고 하소연합니다. “난 아직도 이렇게 젊은데, 이렇게도 젊은데 / 벌써 죽어야 하나요! / 난 예뻤어요. 그것이 몸을 망친 원인이었지요. / 다정한 분이 가까이 있었지만 이제 멀리 떠나갔어요. / 꽃다발은 뜯기고 꽃은 산산이 흩어졌어요. / …… / 제발 아기에게 젖이나 좀 먹이게 해주세요. / 밤새도록 끌어안고 있었어요. / 날 괴롭히려고 아기를 빼앗아 가더니 / 이제는 내가 그 애를 죽였다는 거예요! / 이젠 두 번 다시 즐거운 날은 없을 거예요.”

그 후 이내 파우스트를 알아보지만 함께 달아나자는 그의 요청은 거절합니다. “양심의 가책까지 받아야 하는 걸요!”라면서 “나는 여기서 영원한 잠자리로 가겠어요!”라고 대답하지요. 파우스트는 “아, 나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탄식합니다. 그러자 그레트헨은 “하나님의 심판을! 저는 하나님께 몸을 맡겼나이다. /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 천사여, 신성한 무리여 / 나를 에워싸고 지켜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지요.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저 여자는 심판받았다!”라고 당당하게 승리를 외칩니다. 그때 하늘에서 “구원받았느니라!”라는 목소리가 들리면서 1부가 끝납니다.

  


“창가의 화분을 / 저는 눈물로 적셨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그레트헨의 구원에 대해 살펴볼까요? 1부 마지막에 구현된 그레트헨의 구원은 실로 감격적이지만, 거의 돌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 2부에서는 파우스트의 구원이 그렇듯 - 구원받는 자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정당한 근거가 없어 보이거나 매우 희박해 보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이 위대한 작품이 가진 두드러진 특징이자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중요한 사건들 - 예를 들면 파우스트와 악마 사이의 계약체결, 그레트헨과의 육체적 결합, 어머니와 아기의 죽음 등 - 의 드라마적인 구성을 생략하고 대부분을 대사 가운데 나타나 보이도록 처리했습니다. 그 결과 드라마의 전개구조로 보면 필연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중대한 사건들이 우연히 발생하게 되고, 강조되는 것은 오히려 전혀 다른 문제들이지요. 이러한 경향은 2부에서도 계속됩니다. 사건을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크게 벗어난 이 독특한 표현방식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괴테가 쓴 『파우스트』의 본질은 드라마가 아니고 서정시라고 규정하기도 하지요. 

어쨌든, 괴테의 이러한 창작 스타일 탓에 극의 구조가 탄탄하지 못하게 되었고, 우리에게는 그레트헨이 받은 구원의 근거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는 겁니다. 물론 가련한 그녀에게 베풀어진 극적인 구원이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상당수의 관객들에게는 이러한 단점들이 은폐되지만 말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여인의 가련함’이 곧 구원받은 이유라고도 생각하지요. 전해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독일의 북부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파우스트』가 상연되었답니다. 1부가 끝나갈 때,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을 감옥에서 구해내려고 하지만 그레트헨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서 떠나가지요. 그러자 관객들이 소란을 피우며 “결혼해! 결혼해!”를 연달아 외치기 시작했답니다. 이 소동으로 그 장면은 즉석에서 수정되어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이 손을 잡고 포옹하는 것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요.     

이 사건은 관객들이 그레트헨에 대해 얼마나 많은 동정심을 갖게 되는지, 또 이 작품을 얼마나 정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시켜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다분히 ‘낭만적’이기는 해도, 구원에 관한 한 설득력이 전혀 없지요. 악한 남자의 유혹에 빠져 어머니, 오빠, 아기,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죽음으로 밀어 넣은 여인의 가련한 처지는 낭만주의자들의 동정심을 사는 데는 충분하지만, 신의 구원을 얻는 데는 턱없이 부족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그레트헨에게 베풀어진 신의 구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돌이켜 보지요. 그레트헨은 처음에는 한껏 순결한 처녀였습니다. 그녀의 순결성을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저 애요? 신부에게서 돌아오는 길이죠. / 신부한테서 아무 죄도 없다는 말을 듣고 말입니다. / 나는 고해석 바로 곁을 살짝 지나가면서 보았는데 / 정말 아무 죄도 없는 처녀랍니다. / 아무 죄도 없는데 참회를 하러 가거든요. / 저런 애한테는 나도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악마마저도 손대기를 꺼려 할 정도로 순결했던 그녀가 파우스트의 유혹, 정확히는 악마의 술수에 넘어갑니다. 그래서 죄를 저지르게 되지요. 이러한 그레트헨을 악령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레트헨, 과거의 너는 얼마나 다른 모습이었던가, / 네가 아주 순결하게 이 제단 앞에 걸어 나왔을 무렵에는. / 다 낡은 기도서를 들고 / 반은 어린애 장난으로 / 반은 하나님을 믿고 / 서투른 기도를 올리던 그 무렵은!”

하지만 그레트헨은 곧바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지요. “아, 괴로움 많으신 마리아님 / 그 인자하신 얼굴을 제 괴로움 쪽으로 / 기울여 주십시오! / …… / 저의 이 가엾은 가슴이 불안을 느끼고 / 떨며, 무엇을 원하는지 / 그것을 아시는 이는 오직 당신, 당신뿐입니다. / 저는 아, 혼자가 되면 곧 / 울고 또 울어서 / 가슴이 미어집니다. / 창가의 화분을 / 저는 눈물로 적셨습니다. / 아, 이른 아침 당신에게 바치려고 / 이 꽃을 꺾을 때. / …… / 도와주십시오, 치욕과 죽음에서 건져 주십시오!” 이것은 그레트헨의 내면에 죄의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레트헨은 마지막에 파우스트가 감옥으로 그녀를 구하려고 왔을 때, “당신은 이제 떠나나요? 아, 하인리히 씨, 나도 같이 갈 수 있다면!”이라며 진정으로 그를 따라가고 싶어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갈 수 없어요.”라고 거절하지요. 그리고 단두대에서의 죽음을 기다립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조차 용납할 수 없는 거지요. 이것은 그녀가 이미 뉘우침을 통한 “무한한 자기 체념”을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보면, 그레트헨의 구원은 다분히 종교적인 겁니다. 정통 기독교의 교리에 의하면, 신의 구원은 선악의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로마서 3 : 28)라는 바울의 말이 그것을 대변하지요. 비록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레트헨은 결과적으로 많은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신과 그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굳게 믿고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거지요.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적 해석이 가진 매우 난처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욕망을 쫓아 살며 마냥 악한 행위들을 하고서도 신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만약에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세상에 어느 누가 타는 불같은 욕망과 눈앞에 놓인 이익을 포기하며 선하게 살려고 애쓰겠습니까? 일주일에 한번 정도 교회에 나가 신을 믿는다고만 하면, 살아서는 마음껏 쾌락을 즐기고 죽어서는 천국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말입니다.

신학자들조차 대답을 피하는 이 곤란한 문제에 대해, 괴테가 아직 살았던 시절에 태어난 덴마크 출신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 A. Kierkegaard, 1813~1855)가 가차 없는 답변을 주었습니다. 그는 신을 믿는다는 것, 구원받는다는 것이 인간에게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를 단호히 보여주었지요.  

                  

무한한 자기 체념이 구원의 전 단계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철학적 단편 후서』, 『인생길의 여러 단계』 등에서 오늘날 우리가 소위 「실존의 3단계설」이라고 부르는 사유를 전개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성숙단계를 심미적 단계, 도덕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 나누고 대강 다음 같이 설명했지요.

“심미적 단계”란 인간이 감각적 쾌락과 욕망에 종속되는 원초적 단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단계에서 생을 시작하기 때문에, 자연적 인간은 모두 심미적 인간인 것이며 동시에 - 키에르케고르가 『불안의 개념』에서 말하는 -  “원상태”, “순결의 상태”, 곧 “무지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의 인간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또한 향락에서 향락으로,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든, 행복이라는 관념 아래서라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찾아 몰두하기 마련이랍니다. 『파우스트』에서는 자기를 유혹하는 남자와 즐기기 위해 어머니에게 약을 먹이는 그레트헨이 바로 이렇게 순결하고 그토록 무지하지요.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세상에는 돈후안(Don Juan)이나 네로(Nero)처럼 이러한 원초적 단계에서 삶을 온통 소모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답니다. 하지만 극히 드물고, 사람들은 언젠가는 무절제한 욕망으로 허덕이는 “지하실 속의 삶”에 절망을 느끼게 된다지요. 그럼으로써 “도덕적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소리”를 듣게 되며,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지요. 『파우스트』에서 그레트헨도 이런 단계에 도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파우스트에게 종교에 대해서, 세례에 대해서, 그리고 신에 대해서 물으며, 메피스토펠레스를 멀리하고 싶다고 하지요. 

도덕이란 그 본질상 악을 버리고 선을 따라야만 한다는 엄숙한 요구입니다. 따라서 이 엄숙한 소리에 따르지 못하는 인간들은 다시 “뉘우침”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의 절망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조차 따르지 못하는 “실존적 나약함”에서 나오는 절망이기 때문에 이전의 절망보다 더욱 깊으며, 결국에는 ‘그 탓이 나에게 있다.’라는 “죄의식”으로 이어지지요. 괴테는 그레트헨의 죄의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괴롭다! 괴롭다! / 나를 책망하려고 / 오락가락하는 생각에서 /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 마치 저 오르간 소리가 내 숨통을 / 틀어막는 것 같다. / 저 노랫소리가 내 심장을 / 속속들이 녹여버리는 것 같다. / 가슴이 죄는 것 같다. / 벽의 기둥이 나를 사로잡는다. / 둥근 천정이 나를 찍어 누른다! - 아, 이 공기를!” 

이처럼 도덕이라는 빛은 인간을 구원하기보다 오히려 어둠, 곧 뉘우침과 절망에 빠지게 한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죄의식이 나타나자마자 도덕은 뉘우침에서 좌절한다. 왜냐하면 뉘우침은 최고의 도덕적 표현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자기 부정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지요. 그리고 이 “최고의 자기부정”을 “무한한 자기 체념”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이것이 인간을 ‘종교적 단계’로 이끈다는 겁니다. 그는 이 말을 “무한한 자기 체념은 신앙 앞에 전제되는 최후의 단계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레트헨의 “최고의 자기부정”, “무한한 자기 체념”은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 단두대에 죄된 몸을 내맡기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그래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그녀가 종교적 단계에 도달한 증거이자 구원받는 근거가 된 거지요! 그렇다면 세상에서는 마음껏 쾌락을 즐기며 악한 일을 하고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교회에 나가 신을 믿는다고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가당치도 않은 겁니다. 구원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 믿음 앞에는 “뉘우침”에서 나온 “최고의 자기 부정”, “무한한 자기 체념”이 필히 전제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정리하자면, 인간은 뉘우침과 죄의식이라는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 “무한한 자기 체념”을 할 수 있게 되며, 그제야 비로소 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신을 믿는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지요.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믿음, 오직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자기”를 용납받는 구원에 이른다는 거지요. 그레트헨은 그렇게 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파우스트도 그럴까요? 다음에 보시죠!

 


“무한한 자기 체념은 신앙 앞에 전제되는 최후의 단계이다.”
                           - 키에르케고르 -

 




 

* 김용규 선생님의 '문학을 위한 철학통조림', 이번 원고부터 한겨레신문에서 매주 월요일 발행하는 '함께하는 교육' (단 신문에서는 지면관계로 요약문 형태입니다. 원고 업데이트 주기는 3주에 1회)에도 함께 소개됩니다. 네티즌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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