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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통해서본 ‘죄와 벌’의 의미(2)

  • 작성일 2008-02-12
  • 조회수 3,857




『죄와 벌』은 죄보다는 오히려 벌에 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량으로만 보아도 그렇지요. 에필로그(끝맺음 말)를 포함하여 모두 7부로 구성된 이 방대한 작품에서 죄는 100쪽쯤 되는 1부에 다 드러납니다. 나머지 약 700쪽은 모두 그 죄에 대한 지옥체험과 같은 벌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기나긴 소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겪는 심리적 갈등과 고통을 통해 죄에 대한 벌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지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데에 가진 힘을 다 쏟았지요. 그 결과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니체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였다.”라고 경탄했답니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을 쓴 러시아 출신의 소르본 대학 문학교수인 콘스탄틴 모출스키(konstantin Mochulskij)는 이렇게 말했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세계문학사의 위대한 기독교 작가들인 단테, 세르반테스, 밀턴, 파스칼의 옆 자리를 차지한다. 단테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지옥의 모든 단계를 통과한다. 그런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


그럼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지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죄와 벌』에 나타난 그 벌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지를.

 

 

벌은 시작되었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벌은 2부와 함께 곧바로 시작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 라자베타를 살해한 이후 신경발작과 열병으로 앓아눕지요. 다음날 정신이 들자 범행 증거물이 될 만한 것들을 처리하지 못한 것을 알고 참을 수 없이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뭐야! 정말 벌써 시작되었다는 말인가? 형벌이 벌써 이렇게 찾아왔단 말인가? 그래 정말로 그렇구나.”라며 두려움에 떨기도 하지요.

이때 경찰서에서 소환장이 날아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범죄 사실이 발각된 것이 아닌가 걱정하지만 사실인즉 밀린 집세 때문에 집주인이 고소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는 사실을 안 다음 일단 안도했지만 경찰서를 나오다 자기가 저지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신경발작을 일으켜 졸도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예심판사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에게 의심을 사게 되는 계기가 되지요.

집에 돌아온 라스콜리니코프는 훔친 돈이 든 지갑과 전당품들이 방 안 구석의 벽지 뒤에 그대로 있는 것을 생각해내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강가로 나갑니다. 그러다가 겁에 질려 그 물건들을 그냥 어떤 집 마당 한 구석에 박혀있는 바위 밑에 숨기지요. 그러고는 한편으로는 “그래, 시작되었다는 말이지. 이렇게 시작되었단 말이지. 노파니, 새로운 삶이니 하는 것은 다 악마에게나 잡혀가라고 해! 맙소사! 이 모든 일이 얼마나 추한가!”라고 범행을 후회합니다.

그러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만일 정말로 네가 이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바보스럽게 어쩌다가 저지른 게 아니라, 만일 진정으로 어떤 일정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 거라면, 너는 왜 지금까지 지갑을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네가 무엇을 훔쳤는지 알아보지도 않았느냐?”라고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하지요. 그리고는 이내 “내가 병이 나서 이러는 거야.”라며 건강이 회복되고 나면 나아질 것이라고 자위도 합니다.

모출스키가 『도스토예프스키; 그의 생애와 작품』에서 언급했듯이, 라스콜리니코프의 내면에는 이미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격이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두려워 겁먹고 실수를 연발하며 졸도하는 ‘나약한 인격(the weak personality)’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한 일을 정당화하 잔인하고 오만하고 고독한 ‘강한 인격(the strong personality)’이지요. 이 두 인격의 대립 때문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흘 동안 계속 열병과 기억상실 속에서 보냅니다. 그러나 그가 친구인 라주미힌의 도움으로 마침내 의식을 회복하고 병석에서 다시 일어났을 때는 두려움, 연약한 마음, 육체의 병으로 나타나던 나약한 인격은 사라지고 강한 인격만 남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동물적인 교활함”, “전례 없는 대담성”, “악마적 교만”을 느낍니다. 그는 선술집에서 만난 경찰서 서기관 자메토프에게 자기가 범인이면 어쩔 거냐고 따지기도 하고, 범죄 현장에 찾아가 둘러본 다음 자기 이름과 주소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예심 판사 포르피리가 자기를 의심하고 있는지를 떠보기도 하지요. 그리고 외칩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지! 그 늙은 할망구와 함께 나도 죽은 것은 아니야! 천단에서 고이 잠드시길. 그걸로 된 거다. 노파도 이제 평안히 쉬셔야지! 이성과 빛의 왕국이 도래했다! … 의지와 의 왕국이 온 거야. … 어디 두고 보자. 한번 겨뤄보자고.”

그런 가운데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가 마차에 치여 죽게 되지요. 그것을 우연히 목격한 라스콜리니코프가 그의 임종을 지켜주어 소냐와 더욱 가까워집니다. 한편 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 듀냐는 변호사 루과의 결혼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페테르부르그로 올라오지요. 그리고 루과의 결혼을 완강하게 반대하는 오빠와 루을 화해시키기 위해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를 만듭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듀냐는 루의 속물근성과 본색을 파악하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지요. 반면에 듀냐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반한 라주미힌은 듀냐와 함께 단란하게 살아갈 꿈을 꿉니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라스콜리니코프는 절망하여 소냐를 찾아가지요. 그리고 그녀에게 『성경』 가운데 라자로가 부활하는 장면을 읽어달라고 합니다. 그의 내면에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싹트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지요.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 다음에 만났을 때 누가 살인자인지를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옆방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던 여동생 두냐를 욕보였던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지요. 그는 아내가 죽은 후, 듀냐를 다시 유혹하려고 페테르부르그로 온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다른 ‘악의 짝’이라는 것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죽여 그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낫다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개인의 욕망과 쾌락을 최선으로 여기는 자유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짓는 인물이지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자유와 쾌락만을 추구하는 호색한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욕과 쾌락을 위해 자기 부인을 살해하고, 하인을 학대하여 죽게 하고, 14세 어린 소녀를 능욕하여 자살하게도 했지요.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악당은 아닙니다. 그는 듀냐에게 돈을 기부하며 소냐의 집안을 도와주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선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자신의 자유와 쾌락을 위해서입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 두 사람은 같은 원인에 의해 죄를 짓는 악인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요. 그래서 둘 모두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악행들을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는 것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악의 짝’이 되는 것이지요.

스비드리가일로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우리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우린 한 나무에서 열린 두 열매라고 했던 것입니다.”라고 말하지요. 두 사람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면 결과인데 사회적 이상을 추구하려고 범죄를 저지른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내면의 고통과 갈등이 나타나는 반면,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려고 범죄를 저지른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는 권태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 범죄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들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것을 미끼로 듀냐와 다시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요. 하지만 듀냐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완력으로나 돈으로는 그녀의 마음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절망과 권태에 지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결국 권총으로 제 머리를 쏘아 자살하지요.

 

이성이 어떻게 광기를 낳는가

 

여기에서 잠시 돌아봅시다. 우선 죄가 무엇이었는지를. 그래야 벌을 알게 되기 때문이지요. 지난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통해서 본 ‘죄와 벌’의 의미(1)>에서 설명했듯,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는 ‘자만(superbia)’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자만은 존재론적인 것으로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신처럼(sicut Deus)’ 높이려는 마음이지요. 그럼으로써 인간이 지켜야 하는 경계를 뛰어넘는 것을 말하지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작품에서 ‘죄’라는 의미로 사용한 러시아어 ‘prestuplenie’도 본래 ‘어떤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처음으로 가진 사람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아담이었지요. 신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경계했는데, 그는 신처럼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 이후 인간들은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다 해서 기독교에서는 ‘원죄’라고 부르지요. 원죄는 ‘최초의 죄’ 내지 ‘근원적인 죄’라는 뜻인데,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의 모든 악행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요.

4년간에 걸친 시베리아 유형생활 중에 『성서』에 몰두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담의 이야기에서 ‘모든 악행의 근원으로서의 죄’라는 개념을 얻어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자 사회개혁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외치던 무신론적 사회주의자 벨린스키를 추종했던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그가 살고 있던 당시 시대정신이었던 계몽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눈이 뜨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8세기로 접어들며 서구는 계몽(Enlightenment)의 물결에 휩싸였습니다. 계몽이란 ‘이성의 빛으로 밝게 함’을 말하지요. 즉, 합리적인 사고와 그것을 통해 얻어진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그동안 사람들을 지배해오던 사회적 ․ 정치적 ․ 종교적 편견이나 미신, 잘못된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디드로(D. Diderot, 1713~1784), 달랑베르(J.R. d'Alembert, 1717~1783)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우선 ‘18세기 가장 야심적인 출판 사업’이었던 백과사전을 만들었습니다. 『과학, 예술, 직업에 관한 이성적인 백과사전』라는 긴 이름이 붙여진 이 책에서, 그들은 신의 말씀으로 인간과 세계를 설명한 『성경』을 대신해 인간의 이성으로 그것들을 설명하려고 했지요. 그 결과, 한때 ‘학문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신학은 단지 하나의 학과로서 취급되었고, 과학이 대신 그 영광스럽던 자리에 올랐습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지요. 곧이어 신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나라[天國]’ 대신, 인간의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민주주의 사회’를 설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루소(J.J. Rousseau, 1712~1778),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볼테르(Voltaire, 1694~1778) 같은 사상가들이 이 일을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추진했지요.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1787~1799)이 일어나 드디어 그들의 꿈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대혁명 직후부터 민주주의는 곧바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갈라지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계몽주의자들은 각각 자신의 방법으로 민중들을 계몽하며 그들의 ‘지상 천국’을 만들어갔지요.

결국 백과사전의 편찬과 프랑스 대혁명은 18세기 계몽주의를 상징하는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이자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알리는 일종의 혁명이었습니다. 즉, 계몽주의자들에게 백과사전은 ‘새로운 성경’이었고, 민주 사회는 ‘지상의 천국’이었습니다. 계몽이라는 깃발을 치켜들고 인간의 이성이 신의 자리에 올라앉은, 실로 놀라운 혁명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이래로 부단히 꿈꾸어온 인류의 염원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러나 빛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어둠도 함께 하는 법인지라, 바로 이것이 ‘모든 악행의 근원으로서의 죄’인 자만의 또 다른 시작이었지요. 계몽주의적 이성은 한편으로는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쓰며 꿈꾸었던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적 결합과 화해”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을 동반한 ‘전체주의적 획일화와 지배’를 꾸준히 추진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율배반 같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였지요.

계몽이란 어쨌든 먼저 깨인 사람들이 아직 깨이지 않은 사람들을 깨이게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 할수록 폭력적 지배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의 극단적인 형태가 “만일 인민의 행복을 위해 수십만 명의 목을 잘라야 한다면 그는 그 역할을 기꺼이 맡을 각오가 되어 있다.”라는 벨린스키의 섬뜩한 말에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계몽이 어떻게 야만적일 수 있는가? 이성이 어떻게 광기를 낳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근대성의 특성이자 폐해를 묻는 이 ‘특이한’ 질문들은 20세기로 넘어오면 다음과 같이 계속되지요. 과거 어느 세기보다 더 많은 문명의 해택을 누리며 휴머니즘을 외치던 20세기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집단학살들이 있었는가? 혁명기의 러시아나 2차대전 중 나치 점령지에서 행해진 일천만 명이 넘는 인간 학살들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발칸반도에서 1941년부터 계속되어 그때마다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르비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 간의 인종청소가 또 어떻게 가능했던가? 20세기 안에 벌어진 집단학살 가운데 백만 명이 넘는 규모만도 열 건이 넘지 않는가? 한마디로, 도대체 어떻게 사람의 가죽을 벗겨 구두를, 체지방으로 비누를, 머리털로 담요를 만드는 광기가 20세기 문명국가에서 가능했다는 말인가?

아도르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며 <계몽의 변증법>을 쓴 호르크하이머는 그의 <도구적 이성 비판>에서 바로 이런 고통스러운 물음들에 대해 어렵게 답했지요. 이성이 ‘도구화’하면 맹목적이 되어 오류를 막는 비판적 기능을 상실하고 광기에 빠진다고! 그는 이 말을 “이성이 자기 스스로를 도구화한다면, 이성은 일종의 물질성과 맹목성을 갖게 되고, 정신적으로 경험하기보다는 단지 수용할 뿐인 마술적 실재, 즉 물신이 된다.”라고 표현했지요.

무슨 말일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가령 어떤 운전사가 오직 교통법규에 따라 운행하기 위하여 무단으로 도로를 횡단하던 어린이를 치었다고 하지요. 이때 그 운전사를 이끈 것이 마술적 실재, 곧 ‘도구화된 이성’이라는 것입니다. 호크하이머는 그가 법정에 섰을 때, 재판관이 그에게 ‘이성적으로 운전했는지 여부’를 묻는다면, 그것은 그가 단지 교통법규대로 운전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운전자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법률을 지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라고 했지요.

즉, 이성이란 목적은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합당한 수단만을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성은 목적과 수단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계산하며 또한 그 모두를 비판하는 능력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화단에 물을 주라고 했다고 비 오는 날에도 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성은 그 자체로 일종의 물질성과 맹목성을 가진 마술적 실재, 곧 악령이 된다는 경고지요.

크하이머는 현대사회를 횡행하는 광기와 야만성이 도구적 이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화 모두를 유용성을 산출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도구적 이성은 규범의 상실, 이념의 상실, 가치의 상실과 사물화를 가져온다고도 했지요. 따라서 이성이 자기부정과 자기비판을 통해 도구적 이성에 의해 왜곡된 ‘계몽을 계몽하는 것’만이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각종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신은 아담의 자만에 대해 벌을 내리지요.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신은 예초에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 그 벌로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막상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에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지요. 단지 낙원에서 추방했습니다. 그럼 성서는 처음부터 신의 거짓말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입니다. 기독교에서 신은 곧 생명입니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을 말합니다.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기독교에서 신은 빛입니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어둠으로 쫓겨나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 신은 또 진리입니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거짓으로 밀려나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 신은 또 선함입니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악해지는 것이지요. 결국 영혼이 죽은 자는 어둠, 거짓, 악함과 같은 것들을 체험하는 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표현된 바로 그 벌이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이 벌을 받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초인사상’, 곧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자만을 가진 죄 때문에 살인이라는 범죄를, 그 범죄에서 오는 심리적 어둠을, 그 범죄를 숨기려는 온갖 거짓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악행들을 차례로 체험하는 벌을 받았지요. 모출스키가 『신곡』의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는 바로 그 지옥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벌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그 지옥체험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오직 그것만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백 쪽에 걸쳐 묘사한 것이지요.

주목해야 할 것은 이때 라스콜리니코프가 받는 벌이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고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지요. 라스콜리니코프는 극단적 계몽주의자인 벨린스키의 소설 속의 분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구축한 ‘나름의’ 사상과 논리로 무장하고 그것에 의해 범죄를 저질렀지요. 따라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살인, 어둠, 거짓, 악행들 때문에 엄청나게 괴로워하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은 정의롭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을 숭배한다고 믿으며 그것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겠다고 자신을 정당화하려 하지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난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지. 그래서 죽였어.”라고 외치기도 하지요. 그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악행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 양심은 편안하다.”라는 독백도 하지요. 그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는 살인마저도 허락된다는 자기 자신만의 양심을 따로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라스콜리니코프가 괴로워한 것은 오직 악행을 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벌, 곧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표현된 바로 그 고통스러운 지옥체험 때문이었습니다.

이 벌의 무서움과 끔찍한 성격은 예심판사 포르피리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도망가면 어쩌죠?”라고 묻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넨 도망가지 않을 거야. … 자네가 도망간다 해도 아마 스스로 되돌아올걸? 자넨 우리 없이 지낼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포르피리의 예언대로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지옥과 같은 끔찍한 벌에서 벗어나려고 차라리 자수를 하지요.

결국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말하려는 것은 단순합니다. 개인적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든, 사회적 이익과 개혁을 위해서든,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생각하는 자만이 인간에게는 죄라는 것이지요.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죄의 대가는 어둠, 거짓, 악행 등을 체험하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지옥에 갇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라스콜리니코프는 차라리 수용소에 가려고 자수했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권총으로 제 머리를 쏘아 자살하지요. 이들에게 수용소나 죽음은 차라리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무엇을 배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인간 이성의 완전성과 과학에 대한 깊은 신뢰감, 또한 그것에 의해 이루어질 미래사회에 대한 낙관론에 빠져있었지요. 모두들 자유주의에든, 사회주의에든 몰두하여 극단적 계몽으로 치닫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허용된다고 생각했었지요. 오직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소수의 예민한 천재들만이 이성과 계몽의 위험을 미리 알아채 경고했지요. 이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탈근대(post-modern)의 선봉에 서 있는 것입니다.

1864년 발표한 <지하로부터의 수기>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스스로 구축한 사상과 논리로 무장하고 한 점의 죄의식도 없이 범죄를 저지른 다음 그것을 정당화하는 악마적 인간들을 줄기차게 창조해냈습니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백치>의 이폴리트, <악령>의 스타브로긴, 키릴로프, 쉬갈로프, <미성년>의 아르카지, 베르실로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이반 등이 그들이지요.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온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악마적 인간들을 통해 이성과 계몽이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를 미리 경고하는 데 그의 남은 생을 모두 바친 것이지요. 그러나 공산당 혁명, 아우슈비츠 등으로 상징되는 수많은 피의 대가를 치루고 난 다음인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인류는 비로소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러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어떻게 오나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도스토예프스키에게로 돌아가 “하나님같이(sicut Deus)” 되려고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죄와 그것에서 오는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표현된 지옥체험 같은 벌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답은 ‘이성은 해체해야만 한다.’(푸코, 라캉, 데리다)든지 또는 ‘계몽을 계몽해야만 한다’(아도르노, 호크하이머, 하버마스)는 탈근대적 사상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의 해법은 무척 소박하고도 단순하지요.

자만(superbia)이 죄의 원인이면 겸허(humilitas)가 해법이라는 것입니다. 다분히 기독교적인 방법이지요. 기독교에서 겸허는 ‘자기를 비우고 낮춤’을 뜻하는 말로, 신에게로 되돌아가는 지름길이며 동시에 죄 사함을 가능케 하는 묘약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높여 신으로부터 떠나게 한 자만과 대립되는 개념이지요. “아담의 자만으로 죄가 인류에게 들어오고 예수의 겸허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정통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자만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겸허는 우리를 온전케 만든다. 하나님은 자만의 상처로부터 인간들을 치료하시기 위하여 겸허하게 오셨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이를 뜻하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좋아하는 표현을 그대로 빌면, “겸허는 자만의 해독제”입니다

따라서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하면, 인간은 그가 누구든 마땅히, 즉 자유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한 생각 대신 아무리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위해서라도 넘어서서는 안 될 경계가 있다는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날카로운 이성’이 원인이면 ‘바보 같은 신앙’이 해법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 욕망이든 아니면 사회개혁이든 타인을 희생시켜 이루려고 하지 말고, 마치 예수가 그랬듯이 타인에 대한 사랑을 갖고 오히려 자기를 희생시켜 이루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단순 소박한 해법을 전하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5대 장편소설인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그리고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쓴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다섯 작품 안에는 언제나 ‘자만과 겸손’, ‘타인 희생과 자기희생’, ‘죄와 구원’이라는 대립구조가 들어 있지요.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 <백치>에서는 이폴리트, 로고진과 무이쉬킨, <악령>에서는 스타브로긴, 키릴료프, 쉬갈료프와 찌혼 장로, <미성년>에서는 아르카지, 베르실로프와 소피아, 마르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이반, 스메르쟈코프와 조시마 장로, 알로샤 등이 바로 이 대립구조를 대변하는 인물들입니다.

『죄와 벌』에서는 소냐가 라스콜리니코프와 대립하며 그를 구원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녀는 몸을 파는 창녀로 비참하게 살아가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며 자만보다는 겸허, 타인희생보다는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인간이지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감내하며 인간에 대한 연민에 근거한 사랑을 갖고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인물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악마적 분신인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보고 비로소 알아채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나폴레옹이 아니라 한 마리 ‘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들기 위해 “지상에 있는 동안 엄청난 슬픔을 겪는” 영웅이 아니라 한갓 “거미가 기어 다니는 시골 목욕탕”과 같은 범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정신착란과 절망 속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이때 자기를 비우고 낮춰 밑에서 그를 떠받치는 사람이 바로 소냐이지요.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런 소냐를 “유로지비”라고 부릅니다. 러시아 정교에서 ‘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용어이지요. 죽은 나무에 수년 동안 물을 길어다 부어 마침내 어느 날 푸른 잎을 피워낸 어떤 수도사처럼 불가능한 일을 믿고 행하려는 사람을 일컬은 말입니다. 비록 어리석어 보이지만 자만과 이기심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비우고 희생시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구하는 성스러운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지요. 소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성경』에서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기적에 대한 내용을 읽어준 다음, “대지에 입맞추고 자수하라.”, “고난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다시 태어나라.”고 권하지요. 물론 그것만으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죽은 영혼을 당장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지 않고 오히려 ‘지독한 증오심’을 불러내어 자기를 도우려는 소냐에게 오히려 심한 상처를 주지요.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를 자수시키고 8년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 받은 그를 따라 갑니다. 그리고 - 죽은 나무에 수년 동안 물을 길어다 부은 수도승처럼 - 변하지 않는 사랑과 자기희생으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영혼을 다시 살려내지요. 그럼으로써 그가 받고 있는 벌에서 차츰 그를 구해줍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긴 소설을 다음 같이 끝맺습니다.

 

“이 새로운 이야기, 한 사람이 점차로 소생되어가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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