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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연극적 일상

  • 작성일 2022-09-01
  • 조회수 2,379

[리뷰 - 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팬데믹 시대의 연극적 일상

-  이수진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



임형진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행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1)

한병철


이수진 작가의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는 전통적인 드라마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포스트드라마적 요소가 동시에 발견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텍스트에 장착된 일상의 재현성은 사건의 개연성, 그리고 플롯과 장면의 개별적 완결성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시대에 반영된 언어와 사회적 행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게 하였다. 이들의 사회적 관계를 발생시키는 ‘학교’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일상의 문제들을 정치하게 드러내는 연극적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일상에서 비롯된 갈등의 요인들은 이 작품의 사건 구성과 그것의 개연성을 통하여 합리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의 전통적인 연극적 정서가 구축되고 또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은 사건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작가가 제시한 사건은 끝까지 명료하게 해결되지 않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어떠한 힘이나 능력, 논리적인 방식은 개입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사건의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자아가 분열되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자아분열은 이성과 합리성의 실패와 그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현실의 한계와 모순을 지각하도록 지시하는 포스트드라마적 정서와 감각의 작동방식을 공유한다. 사실적인 일상의 묘사와 사실적일 수 없는 인물의 분열방식은 상호대칭적 관계에 따른 갈등의 무게와 이질적 질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1) 한병철, 김태환 옮김, 『피로 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66쪽.


사회적 공간


작품의 배경은 한국의 한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이다. 이 공간은 팬데믹 이전의 전통적인 학교 환경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텅 빈 교실에는 두 개의 스크린이 있으며, 그 뒤에는 칠판이, 스크린 앞에는 교사용 책상과 그 앞에는 학생이 사용하는 빈 책상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학생이 없는 빈 책상은 대면 방식이 아닌,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진행된 학교의 최근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담임인 이선생의 컴퓨터와 핸드폰 역시 동일한 연극적 공간성을 부여받는다. 이선생과 학생들은 이 장치를 통해 온라인 대화방에서 서로 문자를 주고받는다. 이것은 무대 위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 시각적인 전달이 가능하다.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온라인 대화방은 목소리가 부재하고 문자가 그것을 대신하는 동시대 소통방식과 그것의 정서가 작동하는 사회적 공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장치들은 온라인 시각화 과정과 관련하여 실시간과 녹화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거나, 두 가지 모두가 함께 이용될 수 있다. 스크린 및 온라인 대화를 무대 위에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연출가의 결정은 이 작품의 연극적 또는 수행적 차이를 구분 짓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작품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극장의 기술적 상황과 지원 가능성, 그리고 해당 기술의 안정적 측면 모두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작품은 기술적인 무대화 과정의 선택과 그것의 가능성 여부만으로도 연극적 성격이 매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과 행동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는 학교 공간을 구성하는 인물들의 특정한 행동을 시간의 흐름에 맞춰 전개하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1장 ‘조회’, 2장 ‘2교시 한국사 수업시간’, 3장 ‘이선생의 자아분열’, 4장 ‘공지’, 5장 ‘일장연설’, 6장 ‘반성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사건은 2장의 한국사 수업시간에 일어난다.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는 이선생은 온라인 대화방의 참여자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이 남자 성기를 떠올리게 하는 ‘왕자지황’으로 입력된 것을 보게 된다. 해당 문제를 대하는 이선생과 학생들 사이에는 생각과 행동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후 이선생은 자기 자신이 분리되는데, 이것은 다분히 사유적이며 본질적으로 보인다. 이선생의 자아분열은 사건이 종료되기 전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이것은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가 단순히 성적 비하 용어를 사용한 ‘범인’을 찾으려는 목표보다는, 인간의 삶과 정신의 관계, 노동과 사회구조 사이의 경제성, 직업과 윤리에 대한 본질적 문제에 천착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포스트민주주의와 교육


이선생의 자아분열은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결함에 따른 문제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 학교는 근대적 산물로서 이해되는 전통적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교 교육을 받는 것은 자신의 교육 과정을 선택하고 계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받은 사람은 그 또는 그녀 자신의 노동 상황의 생산자가 되며, 이런 식으로 그 또는 그녀의 사회적 생애의 생산자가 된다. 학교 교육을 오래 받을수록 지식과 언어의 보편적 형태뿐만 아니라 학습 및 교습의 보편적 형태에 의해 전통적 성향, 사고방식, 생활양식이 개조되고 대체된다.2)


학교 교육은 학습자의 생활양식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만든다. 이러한 학교 교육은 팬데믹 시대에 이르러 디지털 온라인 기술이 결합된 미디어 정서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오래 전부터 발달한 인터넷 기술이 일상 속에 깊숙이 자리를 잡아 왔다. 학교 교육과 새로운 디지털 온라인 기술의 결합은 비대면 수업을 가능하게 하였다. 동시에 디지털 온라인 수업 방식은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을 촉발시켰다. 학생들에게 익숙한 온라인 프로그램에서 기존의 선생님은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열심히 찾으려고 하는 가게 주인을 닮은 존재로 환원”3)되고 말았다. 이러한 학교 교육의 새로운 의사소통 도구의 선택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기존의 전통적 민주적 소통방식을 일부 낯설게 만들었다. 인터넷 기반 디지털 공간의 의사소통 방식은 익명성의 유지가 원활하고, 소비적인 측면이 강화된 개인화의 경향을 보이도록 만든다. 다음은 1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2) 울리히 벡, 홍성태 옮김, 『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를 향하여』, 새물결, 2006, 162쪽.
3) 콜린 크라우치, 이한 옮김, 『포스트민주주의』, 미지북스, 2008, 33쪽.


이선생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다.
(음향) 통화 연결음 소리가 끝없이 계속된다.
채팅창에 아이들의 두서없는 질문이 뜬다.

학생 4 출첵했으면 나가도 돼요?
이선생 잠깐만, 전달사항이 있어요.
학생 6 샘! 톡방에 띄워 주면 안 돼요? 화
장실 급한데.


이선생 어, 미안해. 샘이 전화하느라. 얘들아, 다음주에 학교에서 진로 특강 있대. 신청할 사람은 톡방에 링크 걸어 둘 테니 구글 폼으로 신청해라.


이 와중에도 전화 연결음은 계속되고 있다.

학생 4 진로 특강 생기부에 들어가요?


이선생 생기부? 그건 잘 모르겠는데. 톡방에 공지 쓸 때 알려줄게.


이선생의 행동은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 업무 담당자의 모습과 닮아 있다. 학생들 다수가 사용하는 채팅창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공적 공간이지만, 이선생을 제외한 학생들은 자신의 개인적 상황에 집중하고 있다. 울리히 벡은 교육이 근대성의 조건과 전망에 관한 성찰적 지식을 구체화함으로써 성찰적 수행자가 된다고 하면서도,4)동시에 전통적인 연대에서 독립하는 일종의 개성적 ‘개별성’을 지닌다고 보았다.5) 이러한 근대성의 조건과 학교 교육의 작동방식은 자본주의 작동 체계 아래에서 그 관계가 더욱 공고해졌으며, 그 결과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본주의 경계 안으로”6)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학교 교육은 학생들에게 일종의 개인적인 ‘상품’으로서의 선택적 대상이 된 것이다. 채팅방의 학생들은 개인적인 것 외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목적이 해결되는 순간 사회적 관계에서 독립적인 태도로 전환한다. 학생들에게는 진로 특강 역시 대학입시에 필요한 생활기록부의 내용 입력 여부가 중요한 것이다. 위의 장면은 교육을 지식의 생산보다는 입시를 위한 소비의 대상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작가는 등장인물 가운데 ‘학생’을 통하여 익명의 다수가 구성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한다. 이들은 단순히 학생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구성하지만 바깥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각각의 개인을 떠올리게 한다. 채팅방의 이선생과 학생들 사이의 대화는 민주적인 개인의 권리가 자본시장의 상품의 소비 권리로 전환되어 버린 오늘날 우리 교육환경과 그것의 포스트민주주의적 징후를 감지할 수 있게 한다.


4) 울리히 벡, 홍성태 옮김, 앞의 책, 162쪽.
5) 위의 책, 163쪽.
6) 콜린 크라우치, 이한 옮김, 앞의 책, 134쪽.



규율사회의 부정성


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선생은 피곤하다.」는 학교의 근대적 정서와 그것을 벗어난 동시대 일상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이 구조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이것은 외적으로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채 갈등을 조용히 불러일으킨다. 전통적으로 학교는 일종의 근대적 합리성을 체화시키는 교육기관으로서 존재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금지와 같은 ‘부정성’을 통한 교육에 있다. 원칙과 합리성, 그리고 이성적 사고를 습득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규율이나 규칙이 작동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켜져야 하며, 그러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 원칙을 근거로 그것이 유발하는 문제 가능성을 인지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당연했다. 5장 ‘일장연설’을 보면 이선생은 이러한 원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선생 얘들아. 조용! 쉿! 갑자기 학교에 오라고 했는데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응. 한 명은 안 왔지. 내가 생각을 참 많이 했는데 일단 객관적으로 사건을 정리해 볼게.
(말투가 건조하게 바뀌어) 오늘 10시 10분경, 한국사 시간, 줌 수업방에 입에도 담기 민망하지만 어떤 친구가 ‘왕자지황’이라는 이름으로 입장한다. 여기서 첫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공적 공간에서. 그게 인터넷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여기는 엄연히 교실과 동일한 공간인데, 여기에 이런 이름표를 달고 등장하는 것. 이것은 공용 공간에서 이상한 문구를 들고 다니는 것과 같기 때문에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이걸 캡처해서 너희들만 있는 단톡방에 올리고 그걸 가지고 막 웃었지. 근데, 솔직히 웃을 만하긴 해. 웃기지. 근데 문제는 여러 명이 한 사람을 같이 놀렸다는 점이야. 여기는 사이버 상황이라서 글자로만 보면, 말의 뉘앙스나 숨은 뜻을 찾기 힘들지. 예를 들어 우리가 장난으로 야, 미친놈아라고 하는 거랑, 대놓고 상대방을 욕하려고 미친놈아라고 하는 거랑 다른데, 사이버상에서는 그걸 구분할 수 없어.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걸 자신을 모욕한다고 받아들이면 그건 말한 사람 잘못이 되어버려. 문자로 의사를 전달할 때는 더더욱 표현을 조심해서 해야 하는 거라고. 게다가, 너네는 모두 같은 반 같은 학교 학생이기 때문에 이건 학교폭력으로 취급될 수 있고, 그러면 모두 심각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어. 얼마나? 그건 규정을 찾아서 따져 봐야지. 학교폭력위원회도 열리고. 경찰하고 변호사도 오고 그럴걸?


아이들 소리가 웅성거리다가 다시 잦아든다. 교실은 무척 적막해진다.


이선생 세 번째로, 지황이는 경찰에 이걸 신고하겠다고 하고 있다. 본인은 ‘왕자지황’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경찰에 신고하면? 사건은 쉽게 해결될까? 이건 사실 밝혀지기도 어려울뿐더러 밝혀진다고 해서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과연 우리 반이 앞으로 서로 잘 지낼 수 있을까. 누구를 위한 범인 잡기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어. 범인이 밝혀진다고 과연 지황이가 놀림 받은 사실은 사라지나? 또는 범인으로 밝혀진 제3의 인물이 있다면, 그 친구는 다른 친구에게 어떠한 평가를 받는 것이 정당한가.


규율을 강조하는 기관으로서의 학교는 “복종적인 주체”7) 를 발생시킨다. 철학자 한병철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8)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선생이 학생들에게 들려준 ‘일장연설’은 이러한 부정성에 근거한 규율사회의 작동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추론방식,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했을 때의 결과를 학생들에게 인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규율사회의 부정성에 따른 행동의 결과는 이선생 자신에게도 예외 없이 그대로 적용된다. 이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근본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7) 한병철, 김태환 옮김, 앞의 책, 23쪽.
8) 위의 책, 24쪽.



책임과 무의식적 공포


이선생은 학생들에게 긴 잔소리와 함께 해당 사건에 대한 행동의 문제점을 반성문으로 작성하도록 지시한다. 그는 학생들이 작성한 반성문을 읽는 도중, 발달장애가 있는 현준이로 예상되는 익명의 학생11과 학생12의 자기비하적 표현을 보고 적잖이 당황한다. 이때 보이는 이선생의 행동에는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심리는 2장의 마지막, 3장과 6장의 앞에서도 나타난다.


학생10과 통화가 끝나고, 잠시 후 카톡방의 대화 내용 전체가 날아온다.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선생. 천천히 넘겨보며 분석하기 시작한다.
이선생이 긴 한숨을 쉰다. 그리고 토하듯 뱉는 혼잣말.


이선생 아씨 망했다.


[…]


동영상 이선생역시 명진이. 꼼꼼하게 캡처해서 보냈다. 자, 10시 18분경. 수업 시작되고 나서 내가 출석체크를 한참 하다가 그걸 발견한 시점. 왕자지황이라는 프로필을 캡처해서 원이가 올렸고. 그리고 거기에 호응해서 웃는 애들 4명.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애 두 명…… 거기에 갑자기 뜬금없이 말 끊는 애가 한 명. 얘는 뭐야. 시헌이는 여기다가 허경영 사진을 왜 올리는 거야. 그리고 좀 있다가 지황이가 신고한다고 올렸다.


이선생 경찰에 신고한대잖아.


몽둥이 이선생이거 학교폭력으로 신고될 수도 있어. 신고하면 피해자 진술, 피해자 학부모 진술, 가해자 진술, 가해자 학부모 진술.


이선생 아 망했다. 안 그래도 할일 너무 많은데.


동영상 이선생파이팅!


이선생 뭐래.


[…]


학생11 (머리를 쥐어뜯으며 폭풍오열) 나는 지황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나도 초등학교 때 학교폭력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때 너무 힘들고 죽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학교폭력을 방관한 것도 가해자나 다름이 없다는 말에 그런 거 같았다. 나는 정말 나쁜 놈이다. 학교폭력 가해자는 죽여야 한다. 나도 죽어야 한다. 나는 살 가치가 없다.


이선생 (혼잣말로) 아 망했다. 현준이는 아스퍼거라 이런 상황을 잘 모르는데. 빼고 부를걸.


이선생은 혼잣말로 ‘망했다’는 표현을 반복한다. ‘망했다’는 대사는 앞에서 언급한 규율사회의 부정성의 원리를 떠올리게 한다. 즉, 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했다는 것인데, 이 말은 선생으로서 기대하는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선생에게 부여된 책임의 한도는 인간이 구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와 결정 가능성 여부와 관계되어 있다. 이것은 구조화된 자본주의 환경이 인간에게 무의식적인 질서를 자리 잡게 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선생의 반복적인 혼잣말은 현재까지 이어진 자신의 규율적 안정감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데서 발생하는 불안감과 그에 따른 심리적 공포와 연결되어 있다. 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그에게 ‘망한’ 것은 직업으로서 교사의 조건과 평가, 그리고 계약과 고용안정과 서로 묶여 있는, 자유롭지 못한 어떠한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분열하는 인간


학생들의 경우, 때에 따라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작가가 직접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밝혔듯이, 이선생에게 학생들은 각자 이름은 있으나 그저 ‘학생’으로서 위치한다. 학생1~12는 사건이 발생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부 자신의 이름과 함께 행동하지만, 이들 역시 다시 학생이라는 사회적 관계로 되돌아간다. 작가는 ‘학생’의 공동의 위치를 세분화시켰듯이 이선생에게도 동일한 방법을 적용시킨다. 하지만 여기서 이선생이 학생과 정확히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역할의 다양성이 아닌 자아분열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선생은 3장에서 셋으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이선생 하루 종일 자는 애들 깨우느라 통화 연결음 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 다른 할일도 차고 넘치는데 조용히 넘어갈까? 못 본 척? 애들도 그러다가 말겠지.


몽둥이 이선생무슨 소리야? 애들을 불러서 따끔하게 혼을 내야지. 그래야 다시는 안 그러지.


동영상 이선생개별 상담은 어때? 한 명 한 명 대화로 풀어 가면 애들이라 다 이해할 거야.


몽둥이 이선생지금 상황이 딱 학폭이라니까. 이렇게 중재하려고 하다가는 결국 교사만 독박 쓰게 되어 있어. 당장 다 불러.


동영상 이선생그래, 불러. 불러서 한 명 한 명, 눈 맞추고 이야기하자.


이선생 아…… 집에 가고 싶다. 야, 내가 콜센터 직원도 아니고 보모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심부름센터도 아니고. 하루 종일 전화하고, 전화 받고 애들 뭐 안 된다고 하면 대신 연락해 주고. 이 마당에 이 일까지.


몽둥이 이선생일단 애들을 불러야겠어.


이선생 왜?


몽둥이 이선생그냥 넘어가는 게 제일 찜찜해. 이 일이 그냥 넘어갈 것 같아? 오히려 교사가 학교폭력을 알고도 방관했다고 할 거야. 진짜로 애들끼리 문제 심각해지면 그때는 어쩔래?


동영상 이선생설마 애들이 그렇게까지 하려고?


이선생 잘 모르겠어.


동영상 이선생잘 타일러 보자.


이선생 몰라. 모르겠어…… 근데, 일단 애들 얼굴을 봐야겠어.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텍스트의 재현적 정서가 감지되는 1, 2장의 인물 구성은 3장에 이르러 비재현적 요소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선생이 현재의 자신이라면,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나온 동영상 이선생과 몽둥이 이선생은 내면에서 작동하는 각각의 목소리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선생으로서의 사회적 행동과 이에 요구되는 윤리적 감각이 내면화된 무의식적 상태인 것이다. 작가가 제시한 자아분열은 근대적인 규율사회의 구조적 질서와 탈근대적 시대에 살고 있는 개인 간의 충돌로서 설명될 수 있다. 이 분열은 궁극적으로 학교의 교육 구조와 현실의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피로의 원인


작품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는 팬데믹 상황으로 지쳐 있는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 선생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작가가 제목에 사용한 ‘피곤’은 일반적으로 몸이나 마음이 지쳐서 고달픈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선생이 지친 이유는 코로나 감염증의 확산으로 교사에게 부과된 추가적인 업무들과 관련되어 있다. 감염 예방을 위한 조치들, 이에 대한 개별적 대응과 안내, 전통적인 규율과 통제의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 온라인 시스템 교육 방식 모두는 이선생에게 ‘과로’를 선사해 주었다. 과로로 인한 몸과 마음의 지친 상태는 피곤보다는 ‘피로’가 의미적으로 더욱 적절해 보인다. 이선생이 피곤한 것은 피로한 상태를 뜻한다. 피로의 시작은 예측 불가능한 팬데믹 시대에 접어든 교육의 현실과 맞물려 있다. 이 과로의 형태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온라인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환경이 발생시키는 무한한 가능성의 크기와 연관되어 있다. 한병철은 그 이유를 긍정성의 과잉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는 피로가 전통적 근대성에 의한 규율사회의 부정성이 아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포스트모던적 사고, 즉 성과사회의 긍정성에 의해 발생한다고 판단하였다. 동시에 그 긍정성은 자기 자신을 착취하고 억압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긍정성의 폭력”9)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처럼 이선생은 근대적 규율사회의 부정성이 작동하는 학교 안에서, 기술집약적 성과사회의 긍정성이 작동하는 포스트모던적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선생은 현재의 긍정성을 전제로 학교 제도 내부의 부정성을 이겨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역전된 일상과 연극


이수진 작가의 희곡-텍스트 「이선생은 피곤하다.」는 국내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이 처음 발생한 2020년 1월 20일 이후 나타난 교육현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재난 위기 상황 속에서 교사들의 업무는 더욱 증가했고, 인터넷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비대면 수업 방식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위치시켰다. 우리는 이제 직접 만나지 않고서도 각종 업무에 참여할 수 있고, 온라인 화면에서 얼굴과 이름을 숨길 수도 있으며, 마스크 사용이 익숙해진 새로운 기준의 일상을 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연극적인 상황이 일상이 된 현실은 연극이 우리 사회를 기록하고 담아내는 공적인 기능을 담당하게 하였다. 시대의 순간을 기억하고, 모순과 갈등을 인식하면서,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 이 모두가 연극을 살아 있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이수진 작가의 「이선생은 피곤하다.」도 살아 있다. 일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 연극과 공유하는 지점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까지 연극은 일상적이지 않거나, 또는 일상을 넘어서는 그 어떤 차이를 확인시키는 특별한 무언가를 주로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일상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할수록 연극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 이 ‘연극’이 끝난 그다음은 무엇일까. 다른 연극이 시작될지, 아니면 그대로 막을 내릴지, 궁금하다.


9) 한병철, 김태환 옮김, 앞의 책, 21쪽.











임형진
작가소개 / 임형진

2008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제5회 젊은비평가상 수상으로 연극평론을 시작하였으며, 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대표 및 상임연출, 상명대학교 예술대학 연극 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문장웹진 202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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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 관리자
  • 2022-10-01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 관리자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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