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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단 한권뿐인 시집 (1)

  • 작성일 2005-05-22
  • 조회수 2,887


"나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내 청춘을 저주했다. 사랑을 하고 있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사람들도 모두 내 편인 것만 같고, 내가 못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사랑을 잃고 나니 세상을 얻기는커녕 나는 이 세상에선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놈으로 여겨졌고, 사람들도 죄다 나를 미워하는 것 같기만 하고, 나는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끝이었다. 내 청춘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앞으로 패배자로 살 일만 남은 것 같았다..."

 

 

 

 

 마감 날짜를 이미 넘긴 원고가 있어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웠다. 겨우 원고 쓰기를 마치고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 전화통이 울렸다.

 

“새벽같이 웬 전화지?”

 

며칠 전부터 원고 독촉을 해대던 잡지사 기자는 아직 출근할 시간이 아니었다. 새벽이나 밤중에 걸려 오는 전화는 대개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경우가 많아 나는 조금은 긴장한 채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여자였다. 그러나 전화선을 타고 넘어 온 목소리만으로는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나이를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누구냐고 물으려다 저 쪽에서 말하는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네, 말씀하세요.”

“거기 글 쓰시는······.”

 

나를 찾는 전화인 것 같기는 했다. 여자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나는 이 여자가 누굴까 하며 열심히 머릿속을 더듬었으나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자는 여전히 자신이 누군가는 밝히지 않은 채 용건을 말했다.

 

“돌려 드릴 것이 있어서요······.”

 

뜬금없는 소리였다. 나는 잠시 멍해져서 다시 침묵했다. 여자가 잠깐 사이를 둔 뒤 더듬더듬 말했다.

 

“스무 해 동안, 갇혀 있던, 말들이에요······.”

 

‘스무 해 동안이나 갇혀 있던 말들이라고?’

 

들을수록 알 수 없는 말뿐이었다.

 

여자는 내 사정은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한 뒤 전화를 끊었다. 끝내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나는 도깨비에게 홀린 것만 같았다. 웬 여자가 느닷없이 새벽같이 전화하더니 나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가겠다고 했다. 누구인지도, 어떤 일인지도 모르면서 거절하지 못하고 나간다고 한 자신이 우습기만 했다.

 

원래 나는 오전 약속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사로운 일은 물론 출판사 일 따위를 보러 나갈 때도 될 수 있으면 오후에 약속을 잡아 나간다. 굳이 복잡한 아침 출근 시간에 바깥에 나갈 까닭이 없는 것이다. 더더구나 오늘은 밤을 꼬박 새우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른 아침의 일방적인 약속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닌밤중에 홍두깨지 이게 뭐야? 나한테 돌려줄 게 뭐지? 어떤 여자지?’

 

나는 전자우편으로 서둘러 잡지사에 원고를 보냈다. 이어 졸음을 이기느라 뻑뻑해진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서 바로 옷을 챙겨 입고 여자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밖엔 눈이 퍼붓고 있었다. 내가 탄 버스는 조심조심 눈길을 달렸다. 눈이 내리는데도 워낙 서둘러 집을 나선 까닭에 약속 시간보다 꽤 이르게 여자가 일러준 찻집에 도착했다.

 

여자는 나보다 더 먼저 나와 있었다. 내가 찻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이어서 찻집에 다른 손님은 없고 찻집 주인은 아직 아침 청소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여자를 보는 순간 나는 온몸이 굳어버리는 줄 알았다. 현아였다. 옷차림과 몸피는 예전과 다르지만 얼굴 모습은 거의 스무 해 전 여고생 때의 청순하던 소녀 모습 그대로인 현아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현아······.”

 

이름말고는 다른 말이 더 이상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현아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손을 내려다보며 마주잡았다. 여전히 희고 맑은 손이었다. 찌릿찌릿하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문득 그 옛날 현아가 손을 내밀어 첫 악수를 청하던 때가 떠올랐다. 내 느낌은 순식간에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우리 둘은 그렇게 손을 잡은 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현아의 두 눈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호수처럼 크고 맑았다. 초롱초롱하던 눈빛이 이젠 축축하게 젖은 느낌이 드는 것 말곤 예전 그대로였다. 한참 지나자 현아의 손에 땀이 밴 걸 느낄 수 있었다. 현아가 슬며시 손을 빼더니 탁자 위의 누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내 곧 현아는 봉투 속에서 공책을 한 권 꺼낸 뒤 다짜고짜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공책을 받아 든 뒤 겉 표지를 열어젖혔다. 속 표지에 검정 만년필 글씨로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을 내 사랑하는 소녀 현아에게 바친다’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에는 날짜와 내 이름이 휘갈겨져 있었다.

“아!”

나는 짧은 신음 소리만 내뱉은 채 공책을 뒤적여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해 겨울의 찬 바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눈을 피해 남몰래 시를 썼다. 어느 때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학년이 높아지며 점차 학교 생활이 지긋지긋해질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오로지 대학이 인생의 전부라는 듯이 모든 수업 시간 내내 ‘대학, 대학’ 하는 학교 분위기가 싫어지면서였다.

 

‘사람이 공부하는 기계도 아니고 이게 뭐야······.’

 

나는 전체 학생이 죄다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 날이 갈수록 바보가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런 때 시를 만난 게 나로서는 굉장한 행운으로 여겨졌다.

 

‘시를 모르고 어떻게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시는 바로 인생이고, 인생은 바로 시야. 난 기어코 인생을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을 쓰다듬어 줄 시를 쓸 거야.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시를 쓸 거야!’

 

나는 기고만장해 있었다. 나는 이미 세상을 다 알아버린 것만 같았고, 대학이나 가기 위해 구는 학생들 모두 좀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시를 쓰네 문학을 합네 하며 이 책 저 책을 남독하다가 그만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탈속한 듯한 주절거림과 선승들의 거침없는 기행담에 푹 빠져들었다. 그랬으니 학교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내가 당연히 좋은 학교 좋은 학과에 들어갈 줄 알았다.

 

“니는 없는 촌 살림에 고등학교를 도시로까지 보냈은께 꼭 좋은 대학 가서 출세혀야 되야. 알았제?”

 

아버지의 그런 바람과 달리 나는 대학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깟 대학 나와서 뭐한다고 저러실까? 나는 밥벌이보다 더 소중한 일을 할 사람인데······.’

 

대학 입시가 코앞에 닥쳐왔지만 나는 이미 대학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뜻도 모를 어휘들을 조합해서 탈속한 도인들의 잠언적인 냄새가 그럴싸하게 묻어나는 시 쓰기에 몰두했다.
 
         아궁이 속에서 시뻘겋게 타고 있는
         너의 육신을 보았는가
         검은 재 몇 줌으로 남은 너의 목숨
         바로 너의 인생이다
         나무여,
         바람 소리 길게 듣지 말라
 
내가 쓴 시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면 볼수록 기가 막힌 시였다. 나무여, 바람 소리 길게 듣지 말라니! 나는 내가 시적 재능을 타고 난 게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히히, 누가 이런 표현을 생각이나 하겠냐!’

 

나는 마치 신들린 듯이 시를 써 갈겼다. 시를 통해 뭇 사람들의 영혼을 쓰다듬어 줄 말씀을 들려주어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시인은 부처보다도 예수보다도 공자 맹자보다도 더 뛰어난 존재로 믿었다. 그러니 시는 마땅히 세속의 탁한 삶에 눈먼 이들에게 뭔가 그럴싸한 경구를 들려주어야 하는 걸로 알았다. 이 세상의 모든 풍경이 다 시시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때 현아를 알았다.

 

현아는 같은 반 친구가 하숙하고 있는 집의 주인 딸이었다. 그 친구와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그래서 둘은 겉으로나마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다.

 

 어느 날 친구 하숙집에 우연히 들렀다가 우리보다 한 학년 아래라는 현아를 보는 순간 속으로 남몰래 도인인 척했던 내 자신의 바탕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검정 교복에 가는 목을 두른 하얀 깃. 오뚝한 코에, 아침 햇살에 이슬을 머금은 듯 반짝거리는 눈. 아, 그리고 무엇보다 봉긋이 솟아오른 가슴. 나는 현아를 제대로 바라보기는커녕 거의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현아가 희고 맑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오빠, 시 쓴다면서? 야 멋지다!”

 

현아가 내 손을 쥐는 순간 온몸이 찌릿찌릿하며 어지러웠다. 이어 현아가 손을 가볍게 흔들기까지 하자 내 온몸이 다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발 딛고 서 있는 바닥까지 흔들리는 것 같고 나아가 지구가 흔들리고 온 세상이 다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친구가 현아에게 내 얘기를 한 적이 있는지 현아는 내가 시를 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애써 티를 내지 않았지만 친구는 내가 하는 짓을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오빠, 교과서에 나오는 시는 뜻도 알쏭달쏭하고 재미도 없잖아. 그런 시 말고, 사람들 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 줄 수 있는 시를 써 봐!”

 

나는 뭔가 단단한 것으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사람들 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 줄 수 있는 시! 그 말을 듣는 순간, 시라면 마땅히 그래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나는 그다지 볼 일도 없으면서 틈이 날 때마다 친구 하숙집, 아니 현아네 집에 들렀다. 스스럼없고 싹싹한 소녀인 현아는 친구가 없어도 나를 거리낌없이 대해주었다. ‘오빠’라는 소리는 첫 만남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했고, 자기가 본 책이나 영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나는 본디 여동생이 없는 터라 현아가 더욱 사랑스러웠다. 특히 맑고 큰 눈을 바라볼라치면 마치 커다란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고, 이내 곧 그 눈 속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나는 바야흐로 막연하기 짝이 없는 삶이니 세상이니 하는 것은 뒤로 제쳐두고 눈앞의 현아 생각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현아를 보러 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속으로 아예 친구가 집에 없기를 바라며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친구도 없고 현아도 없는 날엔 괜히 심통이 나기도 했다. 혹시 둘이서만 영화라도 보러 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현아네 집에 갔다 오기만 하면 열병을 앓았다. 현아를 만난 날이면 현아를 만난 느낌이 좋아서 그랬고, 현아를 만나지 못한 날이면 애가 타서 그랬다. 좋은 느낌은 좋은 느낌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고, 애가 탄 느낌은 어떻게든 현아에게 전달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연습장을 펴놓고 뭔가를 끼적이게 되었다.

 

그 동안 끼적거린 시와는 다른 시를 끼적거리게 된 것이다. 막연히 내 멋대로 세상에 대해 내뱉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을 두고 절실하게 애를 태우는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그때부터 나는 연애 감정보다 더 소중한 감정은 이 지상에 없는 거라고 여기며 열심히 연애시를 써 갈겼다. 어느 순간이 지나자 연습장에 따로 쓸 필요도 없었다. 공책 한 권을 마련하여 일련번호까지 매긴 뒤 바로 시를 썼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공책 한 권이 아주 감동스런 연애시로 그득해졌다. 다시 읽어봐도 구구절절이 명시였다. 특히 현아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을 그린 시는 몇 번을 다시 들여다보아도 그럴싸했다.

 

         소녀의 눈은
         맑은 이슬로만 채워진 호수입니다
         햇살이 내리쬐면 호수가 반짝입니다
         금빛으로 은빛으로
         빛나는 호수면
         그 위에 가만히 눕고 싶습니다

 

시가 공책의 마지막 장까지 채워진 날 나는 하루 내내 방 구석에 처박혀 공책 표지를 나름대로 멋지게 꾸미고 공책의 속지 여백에 간단한 그림도 그려 넣었다. 그야말로 이 세상에 한 권뿐인 수제품 시집을 만든 것이다. 그런 뒤 현아에게 주기 위하여 자취방을 나섰다.

 

아직 어두워지기 전이었다. 마치 시집 완성을 축하해주기라도 하듯이 소담스런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시집을 품속에 넣고 겉옷을 단단히 여며 눈에 맞지 않도록 했다. 현아네 집까지 가는 동안 내 발걸음은 공중에 붕붕 뜨는 것 같았다. 뺨에 와 닿는 눈이 차갑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머리에 쌓이는 눈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아 일부러 털어낼 필요도 없었다.

 

현아네 집 골목 어귀에 들어섰을 때였다. 눈 위에 발자국 넷이 찍혀 있었다. 남자 신발과 여자 신발 한 쌍이었다. 눈은 발자국 위에도 쏟아져 내렸지만 발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발자국은 현아네 집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둘이서 눈맞이 하다 들어간 게 아닐까?’

 

친구랑 현아 둘이서 눈이 내리는 밖에서 놀다가 들어간 것만 같았다. 가슴이 마구 뛰며 방망이질을 해댔다. 순간, 얼른 뛰어가 아직 두 사람이 마당에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런가 하면 둘이서 함께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을 것만 같아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럴까 저럴까 마음의 갈피를 못 잡으면서도 내 발걸음은 어느새 현아네 집 앞에까지 이어졌다. 나는 두 눈 꼭 감고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

 

처마 밑 섬돌 위에서 눈을 털고 있는 이는 친구와 아주머니 한 분이었다.

 

“아!”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현아가 아닌 것에 그때까지의 불안이 가시고 마음이 놓인 것이다.
친구가 아주머니를 소개했다.

 

“우리 어머니이셔, 내일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시골집에서 지금 오셨어. 하필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오시느라······.”

 

나는 아주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내가 어른들한테 인사를 할 때 최대한 갖출 수 있는 자세를 취하면서 말이다.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인사를 하고 나자 친구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좋은 친구인갑네. 인사성 밝은 것 봐. 이참에 대학은 어디로 가는 것이여?”


다 좋았는데 대학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나는 대학 같은 건 안중에 없어서였다. 친구 어머니가 눈을 탈탈 털고 친구 방으로 들어가자 친구가 현아 방 쪽을 향해 가볍게 턱짓을 한 뒤 나를 슬쩍 훑어보았다.

 

“현아는 집에 없는가 봐.”

 

내가 누구를 보러 왔는지 다 안다는 투였다. 나는 내 마음을 친구한테 들킨 것만 같아 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든저러든 일단은 현아가 집에 없다는 게 무척 다행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날 친구랑 현아가 한 집에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현아 없어도 돼. 그 대신 이것 좀 전해주라······.”

 

내가 품에서 수제품 시집을 꺼내 친구 앞에 내밀자 친구가 그걸 받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는 친구가 그 시집을 계속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서둘러 현아 집을 뛰쳐나왔다. 괜히 친구에게 속을 보인 것 같아 너무나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눈길을 되짚어 나오며 보니 현아 집으로 이어진 발자국 위에 눈이 제법 두텁게 덮여 있었다. 발자국을 볼 때마다 웃음이 픽픽 새어나왔다. 한순간이나마 여자 신발 발자국을 현아 것으로 생각한 게 우스워서였다.

 

“오빠!”

 

쏟아지는 눈을 피하느라 고개를 숙인 채 혼자서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골목길을 빠져나오는데 현아가 나타난 것이다.

 

“어? 현아, 어디, 갔다, 와?”

 

나는 뜻밖에 현아를 만나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현아는 온통 눈을 뒤집어 쓴 채 두 손을 모아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반갑게 달려들 때처럼 손을 활짝 펼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눈사람 만들래?”

 

현아는 벙어리장갑을 끼고 있었다. 나는 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찌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현아랑 눈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곧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먼저 현아가 내 시집을 받아서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니, 어쩌면 장갑을 끼지 않은 내 맨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응, 나도, 그러고 싶은데,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가야 돼······.”

 

아까와 마찬가지로 나는 더듬거렸다. 갑자기 내가 바보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현아랑 자연스럽게 어울려 눈사람도 만들고, 친구한테 시집을 맡겼으니 받아 읽어보라는 말도 하면 될 텐데 끝내 하지 못하고 말았다.

 

현아가 뭐라고 하는지 어떤지는 살펴볼 겨를도 없이 나는 마구 눈 속을 뛰었다. 뒤통수가  근질근질했다.

 

눈이 멈추고 며칠이 지났다. 나는 현아가 내 시집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가 궁금해서 안달이 났다. 그러나 다른 때와 달리 현아네 집에 가 보기가 망설여졌다. 학교는 이미 겨울방학이어서 친구를 학교에서 볼 일도 없었다.

 

몇 번씩이나 현아네 집 골목에 들어섰다가 발길을 돌리곤 했다. 오다가다 우연히라도 현아를 만나기를 바랐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아에게서 아무런 반응을 못 들은 나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현아네 집 쪽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이 절망했는지 모른다.

 

방학 동안 아이들은 자기가 갈 대학을 정하고 입학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시를 쓰는 동안 대학 같은 건 염두에도 두지 않았는데 시고 뭐고 쓸 일이 없어져버리자 우습게도 다시 대학을 생각했다.

 

그때부터 난 몹시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다. 대학 입시가 끝나고 고등학교 졸업식까지 끝난 겨우내내 찬바람을 가슴에 안은 채 거리를 쏘다니며 막 입에 대기 시작한 술을 마구 마시고 홀로 자취방에 돌아와 울며 지냈다. 그러면서도 현아를 직접 찾아갈 용기는 내지 못했다. 내 딴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스런 시를 써서 주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현아에 대한 원망이 치솟을 대로 치솟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일을 계기로 다시는 잠언시고 연애시고 내 안에서는 시 비슷한 것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걸 잊기로 했다. 시 나부랭이 같은 건 다시는 쓰지 않으리라! 시도 밉고 여자도 밉고, 나아가 세상이 다 미웠다.

 

나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내 청춘을 저주했다. 사랑을 하고 있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사람들도 모두 내 편인 것만 같고, 내가 못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사랑을 잃고 나니 세상을 얻기는커녕 나는 이 세상에선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놈으로 여겨졌고, 사람들도 죄다 나를 미워하는 것 같기만 하고, 나는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끝이었다. 내 청춘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앞으로 패배자로 살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그래서 시니 문학이니 하는 것하고는 멀어도 한참 먼, 사돈네 팔촌의 발뒤꿈치 정도의 인연도 없을 것 같은 학과를 택해 입학 원서를 썼다.

 

‘내가 시방 문학 같은 것 해서 뭐하겠냐. 밥벌이 잘되는 학과나 가서 밥이나 굶지 않고 살면 그만이지······.’  

 

누가 봐도 문학과는 전혀 인연이 닿지 않은 얼토당토 않은 학과를 택해 대학에 진학한 나는 싸움터에서 부상당하고 돌아온 군인처럼 아무 활기 없이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현아를 찾지 않았다. 친구도 일부러 찾지 않았다. 서로 다른 대학으로 가기도 했지만, 현아에게 전해달라는 내 시집을 들고서 한참을 내려다 볼 때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새삼 쑥스러운 느낌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물론 시도 다시는 쓰지 않았다. 

 

대학 4 년을 보내고 군대까지 다녀온 뒤 들어간 직장에서 내가 맡게 된 일은 돈을 다루는 일이었다. 날마다 돈을 만지작거리는 일이 내 업무였다. 그런 어느 날, 무심코 돈 다발을 정리하다 보니 만 원짜리를 한 손에 집을 때마다 정확하게 백만 원씩 손에 집히는 걸 알았다. 돈 다발을 손에 쥐고 세기 위해 펼치면 금세 백만 원이 헤아려지긴 했지만, 무심코 돈을 집었는데도 백만 원씩 손에 집히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내가 돈 세는 기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몸이 떨리고 어지럼증이 났다.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서도 어지럼증은 사라지지 않고 몸에 열까지 나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만 원짜리 돈을 손에 집히는 대로 움켜쥐면 그대로 백만 원짜리 다발이 되는 꿈에 밤새 시달렸다.

 

그렇게 잠을 못 이루고 몸이 마구 가라앉는 바람에 연거푸 사흘이나 결근하고 말았다. 직장에 들어간 뒤 그때까지 결근은커녕 지각조차 한번도 한 일이 없었는데 말이다. 집에서 쉬면서 가까스로 다시 몸을 추슬러 직장에 나갔지만 예전처럼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돈 다발이 무슨 쓰레기 뭉치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돈에서 악취가 나는 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내 증세는 더 심해져 돈 바구니를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나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이제 돈 바구니조차 보기가 싫으니······.’

 

나는 내 스스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돈 세는 기계가 되고 말았다니, 말도 안돼! 나는 기계가 아니야! 기계가 아니라구!’

 

나는 직장에 휴가를 낸 뒤 곧바로 여행을 떠났다. 어디론가, 돈 냄새가 나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야 할 것만 같아서였다. 직장에 들어 간 뒤 정기 휴가조차 한번도 가지 않은 나였다. 오로지 일만 미친 듯이 했다. 그렇다고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일을 하지 않고 쉬면 불안해서 그랬다.

 

그러다 보니 내 별명이 ‘일 중독자’니 ‘일 벌레’니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몰아쳤는지 모르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잘못될 것만 같아 하루 한 시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지친 몸을 이끌고 찾아든 곳은 고향이었다. 명절 때나 겨우 찾던 고향이었다. 여우만 죽을 때 제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두는 게 아니었다. 사람인 나도 죽을 맛이 들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고향이었다. 고향집에 이르자마자 가장 먼저 내 발길이 가 닿은 곳은 어려서 놀던 뒷동산이었다.

 

뒷동산에 오르면 멀리 바다가 보이는데, 저녁 때 바다 가운데로 집을 짓고 들어가는 석양의 노을빛이 여전히 볼 만했다. 어렸을 때는 노을빛이 하도 장엄하여 해가 다 질 때까지 집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고 산 위에 그대로 앉아 어둠을 맞을 때가 많았다. 지는 해를 보고 있노라면 까닭 모를 슬픔이 하염없이 밀려왔다. 그 슬픔은 자꾸만 나를 어디론가 멀리 떠나도록 부추겼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멀리멀리. 그래서 읍내에 있는 초중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도회로 나간 것이다.

 

뒷동산에 오른 나는 어렸을 때 늘 앉던 자리에 다시 앉아 바다에 원색의 물감을 풀어놓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어린 소년의 가슴을 달아오르게 하기도 하고 서늘하게 만들기도 하던 노을과 바다가 거기 있었다. 그 동안 잊고 살던 것들이었다. 오로지 밥벌이만 최고로 알고 자신을 밥벌이 기계로만 쓰느라 애써 잊고 있던 것들이었다.

 

바다가 해를 다 삼키고 어둠이 사위를 둘러쌀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향집을 떠나고 싶어하던 때로부터 도회에서의 학창시절에 이어 직장 생활 하던 일이 떠올랐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지나가자 가슴 속에 속에 싸한 아픔이 밀려들어왔다. 떠나자, 떠나자고 하더니 결국 이렇게 돌아왔구나.

 

그날 저녁 나는 내 어릴 때 뒹굴던 안방에서 어머니랑 밤늦도록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순간 어머니가 가는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자 나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밤 기운 차다, 밖에 너무 오래 있지 말거라잉.”

 

인기척에 잠을 깬 어머니가 걱정스레 하는 말이었다.

 

어머니의 걱정을 뒤로 하고 마당을 나와 마을 고샅길을 한 바퀴 돌았다. 마침 음력 열사흘 밤이라 달빛이 알맞게 내리비추고 있었다. 내 딴엔 조용히 지나간다고 조심스레 걸었는데도 낯선 사람의 발걸음 소리를 용케도 알아차린 개들이 짖어댔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내다보지는 않았다. 젊은이들은 다 도회로 떠나고 집집마다 노인들만 살고 있는 터라 귀 어둔 노인들은 개 짖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 들었다 하더라도 개가 달 보고 괜히 짖느라 저러나 보다 하는지도 몰랐다.

 

고향집에서 며칠을 보내며 내 살아온 지난 날들을 더듬다보니 자연스레 공책에다 뭔가를 끼적이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대단한 내용을 담은 글은 아니었으나 글을 쓰다 보니 내 마음이 가라앉고 위안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났다. 인생을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을 쓰다듬어 줄 시를 쓰자며,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시를 쓰자며 호기를 부리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이어 현아로부터 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 줄 수 있는 시를 쓰라는 주문을 받던 것도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내 영혼을 쓰다듬는 글과 내 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기 위해 글을 끼적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비록 시는 아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를 위한 글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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