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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단 한권뿐인 시집 (2)

  • 작성일 2005-05-23
  • 조회수 2,036


 

나는 더욱 글에 매달렸다. 때로는 내가 고등학교 때의 선생님이 되어보기도 하고, 직장의 상사가 되어보기도 했다. 글이란 게 묘해서 화자가 누가 되었든 결국 쓰는 사람 얘기였다. 나는 그렇게 다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 기계가 되기를 거부하다보니 시를 쓰게 되었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엔 돈 세는 기계가 되기를 거부하다보니 글을 쓰게 되었다.

 

휴가가 끝난 뒤에도 나는 직장에 다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글에만 매달렸다. 처음에는 넋두리도 있고 푸념도 있었지만 차츰 내 글의 방향과 형식이 잡혀갔다. 인생이니 우주니 하는 거창한 것도 아니었고 뜻도 모를 추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이 살아온 얘기이자 내 이웃들의 얘기였다. 결국 글을 쓰다 보니 세상을 건지느니 인생을 풍요롭게 하느니 하는 것보다는 뭐니 뭐니 해도 내 스스로를 위해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얘기를 쓰는 것 같은데도 끝내 그 글을 통해 위로를 받는 이는 나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게 날마다 썼다. 한때는 시에 목숨을 건 적도 있지만 새로 쓰는 글은 시는 아니었다. 소설 쪽에 더 가까운 글이었다. 예전과 달리 내 글은 빳빳하지도 않고 젊음이니 사랑이니 하는, 풋풋하고 끈적끈적한 감정이 묻어나지도 않았다. 이미 젊음의 감정이 다 물러가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러한 감정은 고등학교 이후 애써 묻어두고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나는 현아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친구 녀석과의 끈을 굳이 잇지 않은데다 내가 애써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 들어가서도 찾지 않았지만 직장 생활 하면서도 찾지 않았다. 어쩌면 묘한 배신감이 무의식 속에 단단히 박혀 있어서 그랬는지 몰랐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현아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나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난 모든 잘못을 현아 탓으로 돌린 것이다. 그러기에 내 의식 속의 현아는 여고생의 소녀적 모습에서 성장을 멈추어 있게 되었다.

 

소설 쓰는 걸 업으로 삼은 뒤에도 옛날 생각은 더욱 하지 않았다. 다시 글을 쓰게 되면서 나는 지난 세월 속의 나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저 새로 태어나야 하는 나에게만 관심을 두었다. 그러한 때에 뜬금없이 현아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수제품 시집을 들고서······.

 

기억의 저편을 한참 헤매고 있는데 현아가 나를 잡아끌었다.

 

“앉아서 차 한 잔 해요.”

 

그때에야 비로소 청소를 마친 찻집 주인이 건성으로 신문을 뒤적이면서 계속 우리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걸 느꼈다. 자리에 앉아서도 우리 둘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내 앞에는 다시 여고생 소녀 현아가 앉아 있었다. 눈앞의 현아가 사십 줄에 가까운 여인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 공책을 뒤적거렸다. 편마다 여고생 소녀 현아가 그려져 있는데 쑥스러울 정도로 나의 감정이 날 것 그대로 한껏 드러나 있었다. 한참 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현아가 얼굴을 들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젖은 채로 현아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동안 나 미워했지요?”

 

나는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현아를 미워했을까?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애써 잊으려고 한 게 꼭 미움 탓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현아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많이 미웠을 거예요······.”

 

역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계속 공책을 뒤적거렸다. 시는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고 시집을 가지고 현아네 집에 갔다 돌아올 때 만났던, 눈을 뒤집어쓰고 귀가하던 현아 모습만이 공책의 장마다 어른거렸다.

 

현아가 더듬거렸다.

 

“음, 남편이, 죽었어요.”

 

“어!”

 

나는 외마디 소리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현아 남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현아가 다시 더듬거렸다.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나는 아직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남편이 죽고 나서야 이 시집이 나한테 전해진 거예요.”

 

“뭐라구?”

 

남편이 죽고 나서라니? 그렇다면 그 친구 녀석이 현아 남편? 아, 그 녀석도 현아를 좋아했구나. 순간적으로 그 때 상황이 재빠르게 재구성되었다. 내 수제품 시집이 현아에게 전달 안 된 것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시집을 왜 내게 다시 돌려주지도 않고 없애버리지도 않았을까?

 

“미안해요.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을 이제야 돌려드리게 되어서. 그때 받았으면 바로 돌려드렸을 텐데······. 시집 속에 말들이 스무 해 동안이나 갇혀 있느라 무척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돌려드리려고······. 오빠가 글 쓰는 작가가 된 건 알고 있었어요. 우연히 신문에서 오빠 이야기를 읽었거든요. 그래서 늦게라도 시집을 꼭 돌려드리려고······.”

 

현아 입에서 ‘오빠’라는 소리가 자연스레 두 번씩이나 나왔다. 그 말을 듣자 마른침이 목을 넘어갔다.

 

아, 그런데, 나는 무엇이, 아니 누가 20년 동안 갇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공책을 다시 현아 쪽으로 슬며시 내밀었다. 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 둔 뒤엔 처음으로 이는 어지럼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이건 현아 아니면 누구에게도 소용없는 시야. 여기 들어 있는 시는 현아한테만 어울리게 씌어진 것이거든. 현아 남편이 된 그 친구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나한테 다시 되돌려주지도 못하고 없애버리지도 못한 거야. 그러니 시를 쓴 나도 주인이 아니야. 그럼 이만······.”

 

밖에는 여전히 눈이 퍼붓고 있었다. 눈길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발걸음을 뗄 때마다 ‘오빠’라는 소리가 밟히는 것만 같았다.


<끝>

 


작가후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려선 꿈으로 살고 자라선 추억으로 산다. 그래서 인생의 부자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추억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물론 추억도 추억 나름일 것이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도 많을 테니까. 어느 경우 꿈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아 꿈으로만 끝나버리기도 한다. 그러하다고 해서 꿈꾸는 일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꿈꾸었다는 그 사실만이 추억으로 남더라도 삶은 꿈꾼 그만큼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니까. 여기 내 젊은 날의 추억을 살짝 내비친다. 나는 지금 부자인가?

 


-저자소개-

 

박상률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를 다님
1990년 한길문학을 통하여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진도아리랑」·「배고픈 웃음」·「하늘산 땅골 이야기」, 희곡집 「풍경소리」, 장편 소설 「봄바람」·「나는 아름답다」·「밥이 끓는 시간」, 동화책 「바람으로 남은 엄마」·「까치학교」·「미리 쓰는 방학 일기」·「구멍 속 나라」·「개밥상과 시인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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