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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손 크루소와 그 후예들 [2]

  • 작성일 2005-06-29
  • 조회수 391


<로빈슨 크루소>는 어떤 이야기일까?





“에혀, 그거 초등학교 때 다 읽은 건데... 외딴 무인도에 표류해서 혼자 사는 이야기 아녜요? 다 아는 이야긴데 새삼스레 뭘...”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조금 더 아는 독자라면, “그 작품, 식민주의와 백인 우월주의가 심각한 작품이던데, 굳이 다시 읽을 가치가 있을까요?”하며 마땅치 않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쪽이든 일정 정도는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다 아는 이야기”라고 대답한 사람에게는 정말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는지 묻고 싶다. 십중팔구 ‘아이들을 위해’ 줄거리 위주로 축약해 놓은 책을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축약본을 지도에 빗대면서, 지도만 보고 그 고장을 샅샅이 구경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데, 생각해볼 질문이라 싶다. 더욱 대답하기 쉽지 않은 경우는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적하며 작품 전체의 의미를 부정하는 태도다. 그러한 태도는 세계관 나아가 문학관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옳다 그르다로 판정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을 이데올로기로만 축소시켜 보는 한계를 지님은 분명하다. <로빈슨 크루소>의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는 이 작품의 역사적 시대적 한계이다. 이런 한계를 지닌다고 해서 문학사적 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님은 물론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생각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문학사적 평가를 주로 살펴보기로 한다.



문학사적인 평가는?


로빈슨 크루소>는 아디시피 1719년에 세상에 나왔으니 300년이라는 세월을 독자들의 곁에 있어온 셈이다. 이렇게 긴 세월을 견뎌온 고전들은 발표 당시의 문학사적 의의와 현재적 의의를 아울러 지닌다.


문학사적 의의를 짚어보려면 당시의 소설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서구 소설은 생생한 성격을 지닌 인물을 창조하게 됨으로써 근대 소설로 접어든다. 성격을 지닌 인물을 다룬다는 것은 아울러 그 인물의 소소하고 개인적인 일상을 다루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이런 일상을 다루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일상적인 언어로 일상적인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일반인들의 운명을 묘사해가는 소설이라는 양식이 위력적으로 발전할 만한 징후를 보여준 것이 바로 <로빈슨 크루소>이다. 한 비평가는 디포가 일상적으로 친숙한 것에 대한 즐거운 인식을 제공했다는 점, 사실적인 것들을 소설의 필수적인 재료 중 하나로 확립시킨 것만으로도 위대한 문인의 자격이 있다고 평한다.(대니얼 버트, <호모 리테라리우스>, 512) 한 마디로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이상화된 인물들이 이국적인 장소에서 펼치는 환상적인 모험을 다루던 로맨스 모험소설이 주류를 이루던 서구소설사에서 일상성과 사실성을 아울러 성취한 선구적인 작품인 것이다.



사실적인, 너무나 사실적인


그렇다면 대체 <로빈슨 크루소>는 어떤 식으로 그러한 사실성을 전달했을까? 우선 형식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시점이다.


“나는 1632년 요크 시에서 태어났다. 우리집은 훌륭한 가문이었다. 원래는 그곳 토박이가 아니고 아버지는 브레멘에서 태어난 외국인이었다.”


<로빈슨 크루소>는 이렇게 시작한다. 화자인 ‘나’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다시 말해 일인칭 주인공 시점을 씀으로써 독자는 정말 주인공이 체험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을 읽는다고 해서 그것을 정말 있었던 일이라고 단박에 믿어버릴 독자는 없을 것이다. 소설이 ‘지어낸 이야기’ 즉 ‘허구’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소설들은 디포가 했듯이 독자들의 믿음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정말 있었던 일이다.”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물론 3인칭 시점으로도 얼마든지 진짜 있었던 일을 전달해줄 수는 있지만, 1인칭 시점만큼 독자를 서술자의 입장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한다.


둘째, 앞의 인용문에서도 보이듯 사소한 숫자까지 일일이 들어가면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느낌을 일구어낸다. 항해 날짜며 배의 항로에 대한 세세한 언급은 항해 기록을 보는 듯 자세하며,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물건들이라든가 오두막집 살림살이는 담배 파이프며 냄비, 항아리까지 조목조목 제시된다. 오두막집을 만드는 과정이나 배를 만드는 과정도 정말 그럴 듯하고 실감나게 묘사된다. 사사건건 정말 일어난 일, 겪은 일 같다.


셋째, 그렇다고 그가 무슨 특출난 인간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로빈슨이 생활에 필요한 물건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심하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일은 전에는 해 본 적도 없거니와 그만큼 엄청난 노력이 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면, 널빤지를 한 장 만들려면 나무를 한 그루 넘어뜨리고 도끼로 양쪽을 베어내어 널빤지처럼 얇게 깎은 다음 도끼로 반반하게 고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법으로는 나무 한 그루에서 판자 한 장밖에 만들지 못하지만 그것으로 참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문학세계사, 81쪽)


이렇게 보통 사람이 무인도에 표류했을 때 겪어냄직한 일상적인 생활과 내면의 감정에 대한 세세하고 빈틈없는 설명과 묘사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데, 이 사실적인 묘사는 지금 읽어도 그럴 듯하다.


정말 있었던 이야기라고?


이렇게 있음직한 사실성 자체에 착상해서 로빈슨 이야기를 다시 쓴 작품이 있다. 바로 <기상천외의 발굴! 로빈슨 크루소의 그림일기>(삼우반, 2004)가 그것이다. 이 책의 설정은 이렇다. 미셸 폴리처라는 이가 슈탈링 출판사의 사장 퀴노를 찾아와 자기가 투탄카멘 피라미드의 발굴 못지않은 중요한 발굴을 했다고 말한다.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별장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살면서 양피지에 쓰고 그린 일기와 그림들의 원본을 발굴했다는 거다. 퀴노는 그것을 출판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의 ‘친필 원고’와 프라이데이가 서툰 영어로 삐뚤삐뚤하게 쓴 글, 프라이데이가 ‘좋은 주인’인 로빈슨을 그린 초상화까지 부록으로 넣어준다. 대단히 기발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내용은 어떤가?


일기는 1659년 10월 3일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배가 난파해 외딴섬에 표류한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따라서 많은 축약본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빈슨이 항해를 나서게 된 동기나 난파하기까지 겪었던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로빈슨 자신의 내면의 격동과 신앙적 갈등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생략된다. 물론 일기 자체에서도 원작에서 보였던 일상과 내면의 면밀하고 치밀한 묘사 역시 마찬가지로 생략된다. 대신 난파선에서 건져낸 물건들, 절벽 밑의 거처, 배 만들기, 광주리와 지게 제작, 도자기 굽기 등 주변 사물과 작업에 대한 정보가 그림들로 주어진다. 그림은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자못 사실적이며 구체적으로 제공하는 장점을 지니지만, 궁극적으로는 오로지 무인도에서의 생존 방식과 ‘공작인’으로서의 로빈슨에 초점을 맞추는 결과가 된다. 이는 최근 유행하는 '살아남기' 류의 책들과 같은 맥락의 발상이다.


이 책이 독일에서 출간된 연도를 보니 1974년이다. 독일의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는 68학생운동으로 표출되었듯이 무엇보다도 변혁과 개혁의 요구가 거센 시기였다. 청소년문학 분야에서 이른바 고전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이 가해진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때의 고전 비판은 주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입장에서 행해지는데, 흥미롭게도 이 책은 '좋은' 주인에게 고마워하는 프라이데이의 편지를 수록하는 예에서 보이듯 그런 비판적 반성은 찾아지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원작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착상의 기발함으로 주로 독자의 흥미에 기댄 책이라는 혐의를 지우기는 어렵다. 이 점은 다음에서 살펴볼 미셸 투르니에의 <로빈슨과 방드르디>외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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