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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란 무엇인가

  • 작성일 2005-07-13
  • 조회수 875


 

 

  낯익은, 그러나 명쾌하진 않은  

 

검을 휘두르는 강한 힘을 가진 전사와 마법을 쓰는 마법사, 엘프 그리고 오크 등의 상상 속의 종족들이 활약하는 가상의 세계. 누구라도 한 번쯤은 이런 세계를 담은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해봤을 것이다. 또 판타지라는 단어라든가, 환상소설이란 단어도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판타지란 게 뭔지, 정확히 환상소설이란 게 뭔지를 설명해달라고 하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사실 판타지라는 단어 자체는 마법이나 엘프, 오크 등과 거의 무관한 단어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판타지는 ‘상상’, ‘공상’ 등을 뜻하는 말이다. ‘상상’ 속에 마법이나 엘프는 등장할 수 있지만 그것이 판타지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판타지 문학 혹은 판타지 소설이라고 하면 다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는 듯하다. 그러나 검과 마법, 엘프가 등장하는 형태의 판타지 소설이 등장한 것은 판타지 소설의 전체 역사에서 매우 최근에 이뤄진 일이다.

 

 신화와 전설에서 태어난 장르

 
판타지 문학은 장르 문학이라고 불리는 소설들을 통칭하는 말로서 대체적으로 신화나 전설 등의 전승문학들을 모태로 한 장르이다.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들을 이용하여, 현실이란 제약을 끊고 보다 폭넓고 심도 있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기 위해서 시도된 것이 바로 판타지 문학이다.

 

 인간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장르란 측면에서 보면 무협, SF, 공포소설 역시 판타지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가 판타지 문학이고, 어디까지가 판타지 문학이 아니냐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따라서 판타지의 역사에 대해서 말하려면 이 모든 것을 아우른 분야를 언급해야 할 듯하다.
 
 초기 판타지문학의 세계
 
 
 판타지 문학이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문학이란 점에서 생각해보면 판타지는 각종 신화나 서사시, 우화나 전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대의 전승 문학에서 비롯된 전근대소설들도 판타지 문학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흔히 SF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쥘 베르느의 『달세계 여행(1865) 』도 오늘날의 감각에서 보면 SF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울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의『도리안 그레이의 초상(1891)』이라든가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 브람 스토커의 『드라큐라(1897)』같은 이미 잘 알려진 판타지 작품의 저자들뿐만 아니라, 『보물섬』의 저자인 스티븐슨도 『지킬박사와 하이드(1886)』와 같은 환상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들을 썼다. 요정의 나라라고도 불리는 아일랜드의 작가 던세이니는 기괴하고도 어두운 분위기의 이야기들을 많이 창작하였으며, 『검은 고양이』로 잘 알려진 추리와 공포 소설의 아버지 에드가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의 모험(1838)』도 판타지 소설적 성격이 짙게 풍기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판타지 문학은 아직 다른 장르와 분리되는 특성을 명백히 지니고 있지 못했다. 초상화의 주인이 죄를 저지를 때마다 초상화가 추하게 변해간다는『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의 내용만 하더라도 사실은 공포소설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풍기고 있고, 『드라큐라』역시도 동유럽에서 찾아온 미지의 흡혈귀의 위협을 다루고 있으며, 『달세계 여행』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에 SF 장르의 탐사물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마크 트웨인 역시도 요즘 표현으로는 ‘이계진입물(異界進入物)’ 이라고 불릴 만한 『아더 왕 궁정의 콘네티컷 양키(1889)』란 풍자적인 성격이 짙은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현재에 와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판타지 문학이라는 단어 속으로 묶기에는 모호하고 뭔가 석연치 않은 것들이 있다.

 

 

현대 판타지문학의 선구자들  

 

- 톨킨, 판타지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다

 

 이렇게 분명하지 않았던 판타지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정리시켜준 것은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을『반지의 제왕』3부작의 작가 J. R. R. 톨킨이다. 빼어난 언어학자이기도 한 그는 풍부한 중세 전설을 바탕으로 미들어스(필자 주: 중간계Middle Earth. 톨킨이 창조해 낸 세계로, 북유럽과 켈트 신화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현대 판타지 장르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검과 마법이 공존하는 세계’의 기초가 되었다.)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냈다. 그는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클라이브 스태플즈 루이스와 함께 옥스퍼드 대학의 비공개 문학 애호회인 ‘잉크리드’의 일원이며 매우 절친한 사이로, 오랫동안 작품의 원고와 자료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토론을 했다.그러한 교류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판타지 문학의 확립에 큰 기여를 한 두 작품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를 창작해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왼쪽 사진은 영화 반지의 제왕 포스터>
 
-러브크래프트 , 어두운 신화를 창조하다

 

 영국의 톨킨이 북유럽과 켈트의 신화를 모델로 하나의 통합된 신화 체계를 창조하려 했던 것에 반해서, 미국의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는 개인적이고, 보다 내면적인 공포에 입각한 어두운 신화를 창조해냈다. 러브크래프트는 1937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이후로 수많은 문학과 영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신화를 창조해내었다. 그의 『크툴루 신화체계 Cthulhu Mythos』는 포유류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아득히 먼 과거에 지구를 지배했으며, 이후 영겁의 세월을 거쳐 부활을 기다리는 사악한 신들인 오래된 자들(The Old Ones)에 대한 이야기이다.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종종 로드 던세이니와 에드거 앨런 포의 직계에 해당하는 위대한 미국작가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생전에는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로버트 어빈 하워드, 영화 '코난'의 원작자

 

 러브크래프트가 빛을 보게 된 것은 그의 세계에 매료된 ‘제자’ 로버트 어빈 하워드 덕분이다. 하워드는 철이 숭배되던 고대, 야만인 코난이 역경을 딛고 영웅이 되는 과정을 그린 『코난 사가』의 작가로, 10편에 달하는 하워드의 소설들은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근육질의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코난 사가』에서 어둡고 내면 지향적인 러브크래프트의 흔적을 떠올리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하워드가 표현하고 있는 세계 전체에 드리운 어두운 분위기와 야만인 코난에게 협력하는 초자연적인 괴물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면, 하워드가 러브크래프트와의 교류를 통하여 익힌 공포의 감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워드 이후의 판타지 문학은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잠시 쇠퇴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판타지 문학들은 계속해서 발표되었고 페이퍼백(필자 주: 보급판으로 싸고 작게 만든 책의 형태)의 형태로 읽혀졌지만 문학적으로 주목해볼 만한 작가는 거의 없었다.

< 왼쪽 위 사진은 유명영화배우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연했던 영화 '코난'의 포스터>

 

'로저 젤라즈니', 60년대의 기수 

 

 그러나 1960년대 영미권 SF의 기수로 불리는 로저 젤라즈니는 판타지 문학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어냈다. 그가 발표한 『신들의 사회』, 『앰버 연대기』는 특유의 남성적이면서도 치밀한 상징체계를 담은 소설로 톨킨이 창조한 세계와는 계통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르귄, 인류학을 무기로 삼은 작가

 

 현대 판타지 문학의 대표적인 남성 작가로 로저 젤라즈니를 꼽는다면, 여성 작가로는 어슐러 K. 르귄을 들 수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르귄의 『어스시의 마법사』는 얼핏 보기엔 소년 성장소설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싸우는 괴물의 실체와 그가 승리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르귄이 인간내면에 도사린 어둠을 직시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톨킨이 언어와 전설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던 것처럼 르귄은 인류학과 심리학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젤라즈니와 르귄 이후로도 판타지 소설은 계속 쓰여졌다. 얼마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붐을 일으킨 조안 롤링의『해리 포터』시리즈라든가, 조지 R.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도 문학적으로나 이야기를 읽는 재미로나 훌륭한 판타지 소설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읽히고 있는 판타지 소설들의 종류와 양만 해도 일일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사진 왼쪽은 영화 '해리포터' 포스터>

 

불쏘시개 취급받는 국내 판타지

 

 하지만 국내에서 쓰여진 판타지 소설들의 대부분은 ‘불쏘시개’ 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외국에서는 양질의 판타지 소설이 꾸준히 창작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왜 ‘불쏘시개’로까지 폄하되는 판타지 소설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판타지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은 아닐까? 판타지 소설은 반드시 이러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이미 쓰여진 소설들의 세계를 베끼고 재생산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기존의 판타지 베끼기 소설들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위에서 언급된 소설 중 일부에 대해서는 ‘그것도 판타지 소설이냐?’란 의구심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판타지 소설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폭이 좁은 장르가 아니다.

 

판타지엔 정답이 없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의상을 입고, 어떤 무기를 쓰든 그것이 작가의 독특하고도 환상적인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면 그것은 판타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판타지 소설은 꼭 이런 것만을 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 자체가 보다 훌륭한 판타지 소설들을 읽을 기회나 쓸 기회를 제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판타지 문학 작품을 즐기고 싶다면 우선 고정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품을 즐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좋은 판타지 문학 작품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톨킨이 언어학을 자신의 판타지 문학의 무기로 삼았던 것처럼, 혹은 러브크래프트가 자신의 음습한 내면을 글을 쓰기 위한 질료로 삼았던 것처럼, 자신만의 무언가를 연장으로 삼아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글을 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계속>
 
<필자소개>

 

워터가이드는 지금은 휴간 중인 판타지 문화 웹진 『워터가이드』에서 활동하던 필자들의 모임이다. 『워터가이드』 외에도 여타 잡지, 웹진 등을 통해 판타지 칼럼과 판타지 관련문화에 관한 리뷰를 써 왔다.

현재는 4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원이 판타지와 무협 장르에 연관된 직업에 종사하고 . 판타지와 사랑에 빠진 경력은 모두 10년 이상으로, 판타지 붐이 시작되기 전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을 쭉 지켜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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