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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통해서 본 ‘관계’의 의미

  • 작성일 2005-07-30
  • 조회수 6,942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방학은 여러분들이 그동안 매일 만나던 친구나 선생님들과 헤어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기간이지요. 때문에 그동안 가졌던 친구들과의 ‘관계’ 또 새로 만나 맺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어떤 관계는 그만 두고 싶기도 하고, 어떤 관계는 더 친밀하게 갖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러분 누구나 다 잘 아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통해서 “관계란 인간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나?”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네 장미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네가 장미를 위해 쏟은 시간이야.”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 하여 비행기를 고치던 중 어린 왕자를 만난 어느 조종사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어느 작은 별에 어린 왕자가 홀로 살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어디에선가 씨앗하나가 날아와 씩을 띄우고 자나나더니 마침내 꽃을 피웠습니다. 평소 무척 외로움을 느끼던 어린 왕자는 곧바로 이 꽃을 사랑하게 되어 정성을 다해 돌보아주었지요. 하지만 꽃은 무척 거만하고 까다로웠습니다. 바람막이를 해 달라, 유리덮개를 씌워 달라, 요구하는 것도 많고 불평 또한 많았어요. 이에 실망한 어린 왕자는 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멀리 다른 별로 여행을 떠납니다. 하지만 떠나기 전, 꽃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자기 별을 떠난 어린 왕자는 주변의 별들을 차례로 방문하며,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첫 번째 별에서는 권위적인 임금님을, 두 번째 별에서는 허영심 많은 남자를, 세 번째 별에서는 술꾼을, 네 번째 별에서는 부자가 되려고 일만하는 사업가를, 다섯 번째 별에서는 가로등을 켜는 사람을 그리고 여섯 번째 별에서는 고지식한 지리학자를 만나지요. 하지만 어린 왕자는 매번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라고 말하며 그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하지요. 

 
그리고 마침내 지구를 방문합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사막에 떨어진 어린 왕자는 우연히 뱀을 만나, 그에게 이곳은 쓸쓸하다고 말하지요. 그러자 뱀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도 외롭긴 마찬가지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지요. 외로움의 원인이 ‘상대의 없음’이 아니라, ‘사랑의 없음’ 곧 ‘관계의 없음’ 때문인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그것을 증명하는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어린 왕자는 오천송이도 넘는 장미가 피어있는 정원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신의 별에다 놓아두고 온 꽃이 수많은 장미꽃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에 슬퍼져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지요. 이때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나 ‘길들이는 법’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여우가 말하는 ‘길들이는 법’이란 다름 아닌 ‘관계를 맺는 법’ 또는 ‘사랑하는 법’입니다.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수많은 여우 가운데 오직 한 여우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요. 곧 어떤 대상과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또한 그것은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며 사랑하지 않았을 때엔 결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지식을 알게 해준다고도 말합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지요.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4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이제 내 비밀을 가르쳐 줄게. 매우 간단한 비밀이야. 뭐든지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밖에 없다는 이야기란다. 중요한 것은 절대 눈에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 네 장미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네가 장미를 위해 쏟은 시간이야.”

 

그러자 어린 왕자도 정원에 핀 수많은 장미꽃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꽃이 되어준 그 장미꽃은 한 송이지만, 수백 송이의 너희들보다 나에겐 더 중요해. 왜냐하면 그 꽃은 내가 직접 물을 주고, 유리덮개를 씌우고, 바람막이를 세워주고, 그 꽃이 다치지 않게 벌레까지 죽였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투덜댄다거나 뽐낼 때, 심지어 토라져 아무 말도 안할 때에도 나는 귀를 기울여 주었어. 그건 바로 내 장미꽃이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생텍쥐페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의 소중함 곧 그것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는 오직 그것과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만물은 관계 속에서만 소중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인간 역시 단지 그가 맺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린 왕자처럼 어떤 별에 혼자 떨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가 오기 전에 이 별은 흙과 돌멩이들만 있는 ‘사물들의 세계’ 곧 ‘그것(It)'들만이 존재하는 ‘3인칭의 세계’였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도착하고 난 다음부터 그곳은 ‘나(I)’와 ‘그것(It)’들이 존재하는 1인칭과 3인칭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그곳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때문에 아직 아무런 의미와 가치도 없는 세계이지요.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그 별에 있는 어떤 돌멩이 하나라도 좋아하여 그 돌멩이에게 ‘너 또는 그대(You)’라고 부르는 관계를 맺는다면, 그곳은 비로소 2인칭의 세계 곧 의미와 가치의 세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그대(You)라고 부르는 2인칭이란 매우 특별한 인칭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원래는‘나’라는 1인칭과 ‘그’, ‘그녀’ 또는 ‘그것’이라는 3인칭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이러한 세계 곧 나에게 그와 그녀는 3인칭 타자이고, 그와 그녀에게 나 역시 3인칭 타자인 세계에서는 나는 그와 그녀에게 또한 그와 그녀는 나에게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모든 3인칭 대상들은 나에게 파악될 뿐 응답하지도 않고 나를 배려하지도 않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그’는 그리고 ‘그’에게 ‘나’는 사실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이런 세계는 ‘사물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1인칭인 내가 3인칭인 그나 그녀와 어떤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그대’라는 2인칭이 탄생하지요.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서로 ‘그대’라고 부르는 관계가 탄생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서로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응답하며 배려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또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사물들의 세계’에서 ‘의미와 가치의 세계’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인칭은 ‘관계의 인칭’이자, 사물의 세계를 의미와 가치의 세계로 바꾸는 ‘기적의 인칭’인 것이지요.

 

이 말은 2인칭 대화의 상대인 ‘나와 그대’, 곧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 안에서, 달리 표현하면 사랑의 관계 안에서만 모든 것은 그것의 의미와 가치가 비로소 탄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사물의 세계에서는 내가 있어 우리가 있는 것이지만 의미와 가치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 됩니다. 즉, 내가 있어 우리의 존재에 의미와 가치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있어 나의 존재에 의미와 가치가 생긴다는 말이지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유태인 랍비이자 철학자였던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그의 저명한 저서 '나와 너'에서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나와 그것의 관계’와 ‘나와 너의 관계’를 구분한 다음, ‘나와 너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지요.

“너와 나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만날 수 있다. 온 존재에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한 송이의 꽃 때문에 별이 아름다워 보이는 거야.”

 

 

어린 왕자가 말하는 ‘길들이는 것’, 부버가 말하는 ‘나와 너의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세상을 세상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인간과 세계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드러나게 한다는 말이지요.    
이 말을 어린 왕자는 이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 별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사람마다 별이 주는 의미는 다르죠. 아저씨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별을 갖게 될 거예요. …… 내가 별들 중 하나에 살고 있을 테니까요. 내가 그 별들 중 하나에서 웃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 아저씨가 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볼 때마다 별들이 웃는 것처럼 보이겠죠 ……. 단지 아저씨만이 웃을 수 있는 별들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요.” 

 

같은 의미에서 김춘수 시인은 다음 같이 읊었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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