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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너머로 건너가다

  • 작성일 2005-08-09
  • 조회수 347


"선장의 말에 따르면 내가 당연히 지구라고 생각했던 곳은 지구가 아니었고 우리 역시 지구인이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았던 곳은 지구인들이 바바야가 IV라고 이름을 붙인 외계 행성이었다. 지구인들은 15년 전부터 바바야가에 식민지 건설단을 보냈지만 그들은 모두 이유를 알 수 없는 병과 사고로 몰살당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건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기지의 시스템과 로봇들뿐이었다... ..."

 

 

1.

 

  난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내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38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따분한 편견과 얼굴 없는 집단의 무덤덤한 악의에 의해 끊임없는 고통을 받은 여자의 이야기를. 그러나 여러분은 아마 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엔 부당한 고통을 받은 선한 사람과, 드라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죽어버린 초라한 악당과, 둔한 신경과 편견을 가진 것 이외엔 대단한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으면서도 결국 하나로 뭉쳐 늘 거대한 악을 행사한 평범한 사람들과, 성폭력의 결과물로 태어나 언제나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늘 엄마에게는 진홍색 낙인과 같은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사생아가 등장한다. 제대로 된 이야기꾼을 만난다면 이 이야기는 감동적일 것이다. 정직한 이야기꾼을 만난다면 이 이야기는 교화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라고 해도 일관성 있는 결말은 필요하다. 나는 누군가가 그 결말을 제공해주길 바란다. 덤으로 부탁한다면, 난 그 이야기가 해피엔딩이길 바란다. 난 여자 주인공이 스스로의 힘으로 어리석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정신적 안정과 경제적 독립을 획득하고 마지막으로 고통 없이 딸을 사랑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주제와 걸맞는 무게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삶의 진실성에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도취적인 환상에 불과했다는 걸 안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엄마의 이야기보다 하찮으며 우스꽝스러우며 덜 고통스럽다. 나는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감동이나 교훈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건 내가 거짓 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다.   

 

 

  2.

 

  내 이야기는 엄마의 병실에서 시작된다. 아마 내가 시치미를 뚝 떼고 엄마의 이야기를 책 한 권 분량으로 꾸며갈 만한 배짱이 있었다면 그 부분은 클라이맥스나 1부의 끝이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셋집을 떠날 밖에 없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엄마와 함께 병실에서 이틀째 숙식을 하고 있었다.
  새벽 1시였다. 병원 매점의 음식은 부실했고 나는 배가 고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참 배를 잡고 뒤척이던 나는 결국 소파에서 일어나 엄마 지갑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병실에서 나왔다,  
  복도는 어둡고 습하고 더웠다. 천장에 매달려 불안하게 껌뻑이는 백열등은 곧 픽하고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먼지투성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은 충분히 밝았다. 나는 구름다리를 지나나는 자동차들이 내는 소음을 들으며 자판기가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자판기에서 밀크 초콜릿을 하나 꺼내 막 포장지를 벗기려고 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겁에 질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 끝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간호사는 아니었다. 환자도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보통 키의 여자처럼 보이는 그림자에 불과했지만 그걸 바라보던 나는 혼이 다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그림자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올 때에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림자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이전의 무시무시함을 잃어갔다. 결국 그 사람은 평범한 외모의 중년 여자에 불과했다. 평범하지 않은 건 그 여자의 복장이었다. 여자는 반짝거리는 느낌이 전혀 없는 회색 점프 수트를 입고 왼손엔 양쪽에 크기가 다른 금속 구들이 달린 구부러진 막대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상한 건 그 여자의 복장이 아니라 표정이었다. 여자는 마치 내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영화배우라도 되는 것처럼 내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얼굴은 안에서 부글거리는 감정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에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여자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무방비 상태인 나를 끌어안았다. 콧물과 눈물과 가래가 뒤섞인 목소리는 알아듣기 어려웠다. 내가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건 반복되는 마지막 말들뿐이었다. “가엾은 아이! 가엾은 아이!”
  간신히 진정된 여자는 내 손을 잡아끌며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겁에 질리고 어리둥절해진 나는 생각 없는 인형처럼 여자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조금 더 노련한 이야기꾼이었다면,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병원의 분위기를 먼저 묘사했을 것이다. 시장 구석의 구름다리 옆에 세워진 길쭉하고 낡은 7층짜리 회색건물. 아무리 창문을 꽉 닫아도 근처 정육점에서 올라오는 고기 냄새와 자동차 소음을 막을 수 없고 군데군데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런 곳 말이다.
  현관에 가까워지는 동안, 나는 그 익숙한 세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고기 냄새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자동차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현관 밖의 가로등은 더 밝아졌고 이상하게도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는 현관문을 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더 이상 시장과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이상한 모양의 회갈색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차 있는 정글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나뭇가지 끝에는 하얀 빛을 내는 열매 비슷한 것들이 달려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구름다리라고 생각했던 건 아치 모양으로 구부러진 거대한 나무였다. 병원 건물 역시 바뀌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미없는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었던 것이 서서히 늙은 나무의 옹이진 껍질을 드러내고 있었다. 병원 사방엔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회벽의 찌꺼기들이 남아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비하면 병원 앞에 기우뚱하게 서 있는 달걀모양의 우주선과 그 주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회색 점프 수트를 입은 사람들은 오히려 정상적으로 보였다.
  나를 끌고 온 여자는 뭐라고 계속 떠들어대며 나를 우주선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잠시 뒤, 두 남자들이 아직 파자마 차림에 잠이 덜 깬 엄마를 데려왔다. 어리둥절한 우리가 서로를 껴안고 있는 동안 우주선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3.


   여기서부터 길고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날 밤, 억지로 진정제를 맞고 잠에 빠진 나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야 어떻게 된 사정인지 들을 수 있었다. 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나를 병원에서 끌고 나온 바로 그 여자로, 이 우주선의 선장이었다. 선장과 일행은 엄마와 나를 구출하기 위해 지구에서 178광년이 넘는 긴 거리를 날아온 것이었다.
  선장의 말에 따르면 내가 당연히 지구라고 생각했던 곳은 지구가 아니었고 우리 역시 지구인이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았던 곳은 지구인들이 바바야가 IV라고 이름을 붙인 외계 행성이었다. 지구인들은 15년 전부터 바바야가에 식민지 건설단을 보냈지만 그들은 모두 이유를 알 수 없는 병과 사고로 몰살당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건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기지의 시스템과 로봇들뿐이었다.
  그 때 지구인들은 아주 이상한 사실을 알아냈다. 지금까지 평범한 식물이라고 생각했던 바바야가 IV의 나무들이 정글 형태로 뭉쳐 서로와 연결되면 거대한 뇌와 같은 시스템이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그 시스템은 의식적인 자기개발과 수정이 가능했으며 거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맘만 먹으면 공중 위에 즉석으로 버킹엄 궁전을 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정글은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방치되게 두는 적이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글에겐 대단한 욕망이 없었다.
  증거는 없지만, 선장은 지구인 식민지 건설단을 몰살시킨 게 정글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식민지 개발자들은 정글에게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건 정당방위였을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정글을 욕할 일이 아니다.
  지구인들에게 재미있는 일들은 그 뒤에 생겼다. 지구인들이 모두 죽자, 정글은 건설단이 남긴 집과 기계, 도서관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정글은 단지 심심했을 뿐이다. 시간은 남아돌았고 할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건설단 사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용히 죽이는 것도 재미있었겠지만 오래 끌지는 못했다.
  정글은 기계의 원리나 자연 과학 따위엔 별 관심이 없었다. 정글의 관심은 순전히 실용적이었다. 그런 종류의 지식은 건설단의 기계를 작동시켜 도서관을 열 수 있는 정도면 충분했다. 정글이 관심을 보였던 건 알려면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지식이 아니라 지구인의 삶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도 자극적이고 노골적이고 단순할수록 좋았다.
  정글의 취향은 조금 아줌마 같았다. 정글은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소프 오페라, 홍콩과 대만의 20세기 멜로드라마,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와 같은 것들에 푹 빠졌다. 그 중 가장 좋아했던 건 부당한 사회의 억압 속에서 고통 받는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들이었다.
  도서관의 모든 연애소설들과 연속극과 영화들을 독파하자, 정글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정글은 자기 품 안에 도시를 만들었고, 홍콩 배우 이려화와 임대를 반쯤 섞은 외모를 한 여자 주인공을 만들었다. 여자 주인공은 원치 않은 아이를 낳고 밤무대에서 가수로 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당시 홍콩 영화 멜로드라마의 공식이었기 때문이다. 정글이 만든 무대에서 의식을 가진 존재는 그 여자 주인공과 딸밖에 없었다. 나머지의 의식은 정글의 관심 밖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보면서 엑스트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는 관객들이 있을까?
  건설단의 모든 기계들이 앤시블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구에서는 정글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모두 꿰뚫어볼 수 있었다. 정글의 멜로드라마는 모두 녹화되어 앤시블 방송을 통해 전우주에 중계되었다. 20년 동안 정글의 멜로드라마는 47개나 되는 행성의 시청자들에 의해 감상되었고 재편집되어 수많은 독립적인 영화들을 낳았으며 심지어 복고 유행을 이끌었다.
  20년 동안 신나게 놀자, 정글은 이 멜로드라마에 질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려화식 수줍은 멜로드라마보다 보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이고 야한 미국식 소프 오페라를 즐기고 싶었다. 서서히 1960년대 홍콩을 모방한 세트들은 사라져갔고 대신 2150년대 LA를 무대로 한 새로운 세트가 지어졌다.
  지구의 팬들은 그들이 20년 동안 사랑했던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그 와중에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았다.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구조대가 날아온 건 그 때문이었다.

 

 

  4.


  지구에서 우린 스타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일급 호텔의 영구 투숙권과 특급 소비권(지구엔 더 이상 돈이 사용되지 않았다)을 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의무적으로 방송 출연도 해야 했다.
  나는 좋았다. 지금의 지구는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가짜 지구보다 훨씬 근사했다. 공해는 없었고 환경은 깨끗했으며 가지고 놀 첨단 장난감들도 많았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도 좋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받은 구박보다는 이런 환영이 더 좋았다.
  하지만 엄마에겐 지구는 또 다른 종류의 지옥이었다. 엄마는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화배우가 아니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적인 주인공이었다. 이려화는 쇼 브라더스의 세트 안에선 비극적인 여자주인공을 연기했지만, 집에서는 편안하게 보통 여자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에겐 그런 사생활의 영역이 없었다. 있을 수가 없었다. 24세기의 지구에서 엄마는 갑자기 마법으로 고양이가 된 물고기 같았다.  
  어떻게 나는 엄마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내가 조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드라마에 몸을 바쳤던 나는 상대적으로 빈 시간이 많았고 엑스트라들과는 의식이 있었다. 그 결과 나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가지고 실험했다. 우리의 몸은 스캔되었고 분석되었다. 엄마는 연구소에 있을 때만 조금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았다.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이 친절한 행성에서 엄마에게 학대 비슷한 것을 베푸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엄마와 나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엄마는 왜 내가 이전의 연극적 발성을 접고 보통 사람처럼 이야기하기 시작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왜 내가 이전처럼 우리에게 닥쳤던 불운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왜 지금까지 계속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 죄의식에서 갑자기 해방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바보가 아니었지만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따라갈 수 없었다. 아무리 논리를 충실하게 따라가도 막판엔 주르륵 미끄러져 다시 이전의 고정된 생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엄마보다 더 많은 자유의지가 부여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평생을 좌우했던 엄마에 대한 나의 사랑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나에게 엄마를 사랑하는 것 이외의 다른 존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려웠다. 단지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뿐이다.

 

 

 5.


  엄마는 지금 내 곁에 없다. 지구에 도착한지 5개월 뒤, 엄마는 훔친 수면제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 몸의 내부구조가 인간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고 믿었던 의사들은 바보들이었다. 우린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력의 산물이었고 상상 속에서 살았다. 엄마가 독이라고 믿고 마시면 맹물도 독이었다.
  엄마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수많은 팬들이 화장터를 찾아왔고 흐느꼈다. 엄마의 몸이 타버리고 압축되어 작은 다이아몬드 조각이 되자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내가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거는 장면은 지구에서 뉴스 이미지 인기 순위 2위였다.
  팬들은 은근히 엄마의 죽음을 즐기는 것 같았다. 하긴 엄마는 지구에서 별 쓸모가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더 이상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구식 여자주인공이었다. 엄마의 자살은 그런 드라마의 완벽한 종결이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나는 심각한 공황상태에 빠졌다. 지금까지 엄마는 나에게 삶의 전부였다. 지구에 도착한 뒤로 잠시 엄마에게 집중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지만 엄마에 대한 사랑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건 떼어낼 수 없는 내 존재의 일부였다.
  처음에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바바야가 IV엔 더 이상 내가 살았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살던 도시를 밀어내고 그 위에 새로 지어진 세트 위에서 시작된 미국식 연속극은 새로운 팬을 얻어가고 있었다. 나는 바바야가로 돌아가 그들에게 정글의 정체를 밝히고 자유를 찾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들이 엄마보다 특별히 나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내 소비권에는 우주선 사용권한이 포함되지 않았다. 지구인들은 내가 지구를 떠나는 걸 바라지 않았다. 결국 난 관찰하고 연구해야 할 외계인이었다.
  수많은 바바야가 멜로드라마의 전문가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구체적인 사건들을 예로 들며 당시 나와 엄마가 무엇을 느꼈고 무엇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는지 꼼꼼하게 질문했다. 가끔 나는 토크쇼에 출연했고 팬클럽 사람들을 만났다. 지겨웠지만 한동안 나는 그들의 질문과 요청에 충실히 응했다. 그건 내 고향에 가까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원히 쓰레기 속에 묻혀버려라!”라고 외치며 침을 뱉고 저주했던 곳에 향수를 느끼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다.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나는 24세기의 삶에 나 자신을 통합시키려 시도했다. 나는 직업교육을 받았고 역사와 문화에 대해 배웠다. 그러나 아무리 자유의지를 잔뜩 뻗어 이 세계의 삶을 배우려고 노력해도, 나는 완벽하게 적응할 수 없었다. 24세기의 지구에서 나는 20세기 지구인을 모방하는 외계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20세기 지구인에서 24세기 지구인으로 모방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건 어려웠다. 나에게 20세기 지구인은 모방의 대상이 아니었다. 모방을 인식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정글이었다. 24세기 지구인을 연기할 때는 모든 예술적 책임을 내가 다 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식적인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고 서서히 그런 나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6.

 

여기서부터 이야기의 또 다른 반전이 일어난다. 이 국면전환이 여러분의 맘에 들지 난 모른다. 이것으로 이야기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여기서 멈추시길.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여러분이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영원히 무지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냥 읽으시길. 지금까지 내가 쓴 신세한탄과는 달리, 이 부분은 여러분에게 어느 정도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다.
  내가 지구에 온지 꼭 3년째 되는 날 밤이었다. 나는 팬클럽이 마련해준 파티에서 혼자 돌아오고 있었다. 호텔까지 걷는 동안 나는 팬클럽 회장이 한 말을 되씹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어쩜, 3년 전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요.”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여전히 15살이었다. 나에게 성장과 노화는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언제나 역행시킬 수도 있는 하나의 단계였다. 그리고 지구에 온 이후로 나는 성장의 의무감을 느끼지 못했다.
  3년 동안 과학자들은 나의 육체에 대해 많은 걸 밝혀냈다. 그들에 따르면 나는 기본적으로 동물의 흉내를 내는 식물이었다. 광합성 기능은 없었다. 하루 세끼를 먹고 배설도 해야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외부에서 추가된 디자인이었을 뿐, 원래부터 이렇게 태어난 건 아니었다. 나는 호텔 앞의 공원을 가로지르며 내가 다시 나무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는 건지 생각했다. 생각할 수 없는 나무로 돌아간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의미 없는 공상에 불과했다. 바바야가의 나무들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났고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바바야가 정글의 힘을 물려받은 것이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영감에 놀라,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당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바바야가의 정글과 연결되어 있었고 언제나 시스템의 일부였다. 물론 난 178 광년 떨어진 행성에 있었다. 그러나 앤시블과 마찬가지로 바바야가 정글 시스템은 거리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적어도 지구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도 바바야가의 정글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나는 사절인가? 탐험가인가, 아니면 정복자인가?
  그 순간 나는 온 몸에 힘이 충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말 그대로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엄마를 생각했다. 잠시 뒤 눈을 떴을 때, 엄마의 상반신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반투명한 풍선 비슷한 것이 내 눈 앞에 떠 있었다. 그것은 허공중에서 서서히 굳더니 결국 자기 무게에 못 이겨 잔디밭에 떨어져 깨졌다.  
  나는 허겁지겁 호텔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올라간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이번엔 단순히 엄마의 외모만을 상상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존재와 존재감 그리고 지난 15년 동안 내 머리 속에 새겨진 엄마에 관련된 모든 기억들을 떠올렸다.
  이불 속에서 서서히 따뜻한 육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육체는 서서히 내가 지난 3년 동안 끔찍하게 그리워했던 엄마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단지 새로 만들어진 엄마는 더 이상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고 더 젊고 아름다워 보였으며 눈에는 사랑을 듬뿍 담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끌어안았다.  
  

 

  7.


  나는 아까 여러분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지금부터 그 약속을 지키기로 하겠다.
  지난 3년 동안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나는 그 동안 먹고 배설했고 숨을 쉬었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았고 집에서는 손톱과 발톱을 깎아 버렸다. 지구의 과학자들이 검역에 조심했어도 그들은 아직 바바야가의 방식에 대응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이 걱정한 건 기껏해야 미지의 미생물들뿐이었다. 내 육체에서 쏟아지는 찌꺼기들에 대해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그리고 그들이 방심하는 동안 내 육체의 자잘한 조각들은 미립자의 형태로 전세계에, 아니 전 우주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대부분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내가 새로 만들어낸 엄마의 육체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이미 호텔은 내 몸에서 떨어져 나와 번식하며 시스템을 구축한 바바야가 정글의 미립자로 가득 차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게 뭔지 알려줄까? 음식과 공기를 통해 흡수된 미립자들은 수천억 지구인들의 몸에 기생하며 그들의 뇌와 신경을 통제할 수 있다. 지금까지 28개의 행성이 내 시스템 안에 들어왔다. 손가락을 까딱해 그들을 나에게 복종시키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지 말아 달라고? 어쩌면 좋은가. 이미 늦었다.
  여러분은 아마 어제 태평양 한가운데 갑자기 떠오른 이상한 섬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내가 한 일이다. 나는 그곳에 고향 도시를 재건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와 엄마를 괴롭혔던 사람들도 만들 것이다. 일부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는 그들에게 맞는 처벌을 하기 위해. 그래서 어느 정도 만족한다면 이제 지구와 우주 식민지들을 개조하기 시작할 것이다.
  난 당신들의 공물 따위는 필요 없다. 나를 우주의 여왕으로 떠받들라는 요구 따위도 하지 않겠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약간의 변화이다. 3년 동안 나는 24세기의 세계에 적응하려고 노력해왔지만 먹히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세상을 바꾸어볼 수밖에. 저항해도 소용없다. 당신들에겐 이미 자유의지는 없다.
  최종 계획은? 그런 건 아직 없다. 나는 일단 내 불만부터 해소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하려 한다. 그 다음에 최종 계획을 만들고 진행시켜도 늦지 않다. 바바야가의 정글도 아직은 그런 계획에 어울리는 욕망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상관없다. 우린 곧 그 욕망을 만들어낼 것이다.

 

<필자후기>

 

"이 글을 읽기 위해 쇼 브라더즈사의 멜로드라마 영화들을 마스터 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시각화를 위해 60년대 홍콩의 인기 배우였던 이려화와 임대의 모습이 어땠는지 알고 싶으시다면 다음 링크들을 클릭하시길."

http://blog.daum.net/lumia/2863603
http://www.brns.com/pages4/lindai1.html

 

 

<필자소개>

 

듀나

 

1994년부터 온라인을 통해 창작 활동을 시작해온 작가로 주로 사이버SF 물을 썼다. 1996년 잡지 <이매진>에 단편을 발표한 이후 공동 단편집 <사이버펑크>, 단편집 <나비전쟁>,<면세구역>, 영화 칼럼집 <스크린 앞에서 투덜대기> 등을 펴냈다. 
현재 듀나의 영화 낙서판(http://www.djuna.org/movies)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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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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