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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 그 경계에 서서

  • 작성일 2005-09-28
  • 조회수 925



 

 

<영웅이나 전쟁이야기가 많은 판타지문학에는 폭력적인 묘사가 많은데 이를 두고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중문화 전반에 판타지가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전편에서 다각도에 걸쳐 긍정적인 현상을 짚어봤다면, 이젠 그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것도 필요할 때이다.

 

그렇다면 환상과 현실은 어떻게 구분되는 걸까? 판타지란 단순히 하늘을 날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괴물들이 출몰하는 그런 세계이기 때문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전에 판타지란 장르가 어디서부터 출발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판타지의 아버지는 리얼리즘!

 

지나간 역사를 다루는 학문에 ‘If’는 없다. 역사란 이미 실제로 알어난 일이며 결코  되돌이킬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검증을 뒤엎는 ‘만약’이라는 단어야말로 가장 역사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판타지는 다르다. ‘만약, ~였다면?’이 주는 무한한 상상력이야말로 판타지의 근간이며 가장 원초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리얼리티가 판타지의 하단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토 사토루(필자주-일본의 국민적인 동화작가. 코로보쿠루 시리즈는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많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의 『판타지의 세계』를 읽으면 판타지란 전승설화(메르헨)를 어머니로 하고, 리얼리즘을 아버지로 해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말은 판타지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어머니가 되는 옛이야기의 본질을 알아야 하고, 또 아버지가 되는 리얼리즘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판타지 작가를 꿈꾸는 문학도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쓰면서 들였던 12년이란 세월의 무게를 기억하라. 상상만으로 판타지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마라. 판타지는 가벼울지 모르지만, 그 결과물은 가벼워서는 안 된다. 판타지야말로 리얼리즘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태어난 장르이다.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판타지는 공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현재의 우리가 현실과 환상의 어디쯤에 서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뭐든 가능한 세상, 그러나 허무맹랑한

 

 

판타지가 사랑 받게 된 이유는 현대 대중의 사고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대중의 욕구도 변하게 된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현대 사회는 더 이상 기본적인 생존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갈망이 고조되고 이에 따라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길 바라며 다양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기존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과 전통적인 관습에 대항하는 반발심리, 즉 현재에 대한 불만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현재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해소할 방법 중 하나가 판타지인 것이다.

 

만약, 내가 세계를 구할 힘을 가진 영웅이었다면? 만약, 내가 드래곤을 잡은 전설적인 기사였다면? 등과 같은 상상세계로의 여행. 짧게 말하면 '통제할 수 있는 고난'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대리만족, 그것이 바로 판타지가 가진 환상성인 것이다.

 

판타지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진 이런 가벼운 생각은 SF와 판타지를 비교할 때의 설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판타지는 검증되지 않은, 순수하게 새로이 창조된 세계관만으로도 가능하지만 SF는 과학적으로 있을 법한 일들을 소재로 삼아야 한다, 라고 믿는다. 결국 다시 말해서 판타지는 논리정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보다 쉽고, 보다 편한 삶, 그리고 급속히 가속화된 시대의 발전에 발맞추려 하는 대중들에게는 논리적이지 않아도 되는, ‘만약, ~였다면?’의 허무맹랑함이야말로 가장 큰 유혹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에는 함정이 있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는 방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유로운 상상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일거에 무너뜨릴수 있는 위험한 폭탄인 것이다.

 

정당화되는 폭력, 영웅은 늘 살아남고 

 

 

환상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불만, 현실이 주는 부족함을 충족시키려는 욕구 때문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말은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대리 만족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자칫 잘못하면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현실도피적인 성향을 가지게 하거나 부조리와 모순을 개혁해나가려는 의지보다는 현실을 외면하고 패배 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판타지 소설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쟁과 폭력, 살인 등이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전쟁과 같은 대규모 군사 활동에 대의명분을 부여하면서 이념이나 신앙, 혹은 타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합리화가 이루어진다. 살인과 폭력도 마찬가지다. 판타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은 이미 영웅이 되기로 내정된 존재이기 때문에 험난한 길을 걸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인데, 이를 마치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되어야 한다는 우월의식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여질 위험이 있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고도 ‘어쩔 수 없었어. 그들은 악한 자들이었으니까’ 라는 단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상황이 현실에서 가능할 리가 없다.

 

이와 같이 지나치게 판타지 세계에 빠져들게 되면, 현재 자신이 딛고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느 규범에 맞춰 행동해야 하는지 판단이 어려워지며 현실에서의 가치관의 혼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사례로 <인터넷 중독>을 들 수 있는데, 부작용 중 하나로 폭력성의 문제가 심각히 대두되고 있다.

 

 

화려한 가상세계, 초라한 현실

 

인터넷의 보급은 보다 빠르고, 편하고 쉬운 것을 바라는 대중의 욕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일상생활 속에 쉽게 파고들 수 있었다. 한국 인터넷 사용자의 수가 2400만을 넘어선 지 오래라는 통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처럼 인터넷의 보급이 생활의 편리함을 주었다면 다른 면에서 <인터넷 중독>이라는 현대인의 신종 질환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인터넷 중독이란, 부적절한 인터넷 사용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 가지 피해현상을 겪는 증세를 말한다. 금단증상, 접속시간의 증가, 사용 중단 시도의 실패, 이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적 기능장애, 여가활동의 상실 등. 다른 말로 <인터넷 의존증>이라 불리기도 한다.

 

온라인은 가상의 공간이다.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점은 가장 큰 매력이면서도 이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선을 흐트러트려 모방성 범죄나 폭력, 살인 등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현실을 부정하고 가상세계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부작용도 빼놓을 수 없다. 가상의 공간에 오랫동안 머무르다 현실로 돌아올 때의 괴리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통제력을 상실하거나 감정 조절 능력의 감소, 대인기피증, 강박감, 편집증 등의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사람을 죽여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동생을 살해한 뉴스나, 자신의 아바타를 잔인하게 죽였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게임방에서 게임을 즐기던 사람을 죽인 뉴스는 모두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인터넷 중독만큼이나 심각한 사회적 폭력을 일으키는 온라인 게임의 폭력성. 이는 가상공간과 현실의 경계선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결국 파멸하고 만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석학 장 보드리야르(포스트모던의 거장으로 『시뮬라시옹』 『소비의 사회』 등의 저서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철학자-필자주)는 『네트워크의 정신적 분산』이라는 발표에서, 인터넷은 “자유와 발견을 보장하는 정신적인 공간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라며, "인류는 자아상실이나, 타자에 의한 정체성의 위협보다는 오히려 완전한 동질적 정체성에 속해서, 타자적인 요소를 완전히 상실해가고 있는 시점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가상공간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남으로써 현실에서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정체성

의 붕괴가 잃어나기도 한다는 심각한 피해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그렇다고 가상공간이 폐단만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말해두고 싶다. 적절한 인터넷의 사용은 정보의 습득과 광대한 커뮤니티의 형성에 분명한 도움을 주고 있다.

 

 

두 세계 사이 균형감각 필요!

 

 이렇게 가상현실과 현실의 경계선조차 모호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은 과연 어디일까?


 인터넷 중독을 극복하는 방법은 자기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알고 자율적인 규제와 자기관리를 통해 가상공간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 공식을 환상과 현실에 대입해보자. 
판타지를 통해 현실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정신적인 충족을 추구함에 있어 균형을 잃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현실에 접합시키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실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두 세계의 균형을 조율하고 적절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환상으로의 여행. 여행자는 자기 자신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세계를 경험할 것인지,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토대로 현실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배우고 지평으로 삼는 것, 그것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에 선 당신의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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