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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의 「완장」을 통해서 본 ‘권력’의 의미

  • 작성일 2006-02-02
  • 조회수 1,963






한번, 생각해 보시죠. 갑자기 제복을 차려입은 경찰관이 다가와 거칠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신분증을 보자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설사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해도 그것을 거부하기가 쉬울까요? 제복차림의 경찰관은 그만두고 관공소의 말단 직원, 심지어는 개인회사의 관리원들일지라도 뭔가 표시된 캡모자를 쓰거나 완장이라도 하나 둘렀으면, 그 사람이 내뱉는 부당한 말에조차 속절없이 주눅이 드는 것이 보통 우리들이 아니던가요? 혹시 저만 그럴까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만, 그런 것 같지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한 시민단체의 조사에 의하면, 경찰관의 부당한 신분증 제시에도 아무 저항 없이 복종하는 사람이 73%나 된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럴까요? 우선, 왜 제복이나 완장 같은 것을 착용한 사람들은 대체로 아무에게나 위압적인 태도를 내보이며 암암리에 거친 말을 사용하고 걸핏하면 부당한 요구를 할까요? 또 왜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눅이 드는 것일까요? 윤흥길의 장편소설 『완장』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게 하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까닭은,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에 아직도 ‘완장문화’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윤흥길의 『완장』은 풍자성이 강한 전라도 사투리와 우리민족 특유의 해학성을 잘 살린 작가의 대표적 장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작가는 소설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지요.



“만일 독자 가운데 이 작품을 읽고 어느 정도 재미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작가의 계산된 의도를 따르기보다는 우리네 시골 사람들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성에서 비롯되는 재미일 거라고 말하고 싶다. 쓰는 동안 내가 줄곧 의식했던 것은 바로 그 해학성이다.”  


패관문학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던 풍자(諷刺)와 해학(諧謔), 이 둘은 모두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스러운 말이나 행동이지요. 이들은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 문제점들은 - 설사 그것이 아무리 슬프거나 고통스럽고 심각하더라도 - 웃음과 익살이라는 그릇에 담아냈을 때 그 의미가 더욱 살아날 수도 있으며, 나아가 그것을 극복하는 길도 열릴 수 있다는 철학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풍자와 해학이 꼭 같은 것은 아니지요. 풍자가 자아내는 웃음은 대상의 결함이나 악덕을 비꼬고 빈정대는 웃음입니다. 그러나 해학이 주는 웃음은 그러한 결함이나 악덕마저 받아들이고 견뎌내는 지혜가 함께 들어있는 웃음이지요. 그래서 풍자가 날카롭고 차갑다면 해학이 깊고 따뜻하다고 하는 겁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성”이 지닌 멋이자 힘이며, 채만식, 김유정, 이문구, 성석제로 이어지는 일련의 해학성 짙은 문학작품들이 지닌 미덕이기도 하지요. 윤흥길의 『완장』은 바로 이러한 전통과 미덕에 맥을 댄 수작입니다. 


1982년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던 이 작품은 전북 이리시(지금의 익산시)에 공업단지가 들어서던 시절을 배경으로 시작하지요. 시골 농부에 불과했던 최씨는 땅 투기에 손을 대 큰 돈을 벌자, 그 돈으로 트럭을 사서 운수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자연히 호칭도 최 사장이 되고, 으레 그렇듯이 관공소에까지 줄을 댈 수 있게 되지요. 그 힘으로 최 사장은 저수지 사용권을 얻어 양어장을 만들고, 관리를 동네 건달인 임종술에게 맡깁니다.

종술은 “어려서부터 대처로만 떠돌면서 쌈질로 잔뼈가 굵은 놈”이지요. 해방 후, 노점상, 포장마차, 미군부대 물건을 빼내 파는 일 등 여러 가지 일을 해서 먹고 살다가, 고향에 내려와
“농사는 땅이 없어서 못 짓고, 장사는 밑천이 없어서 못 허고, 품팔이는 자존심이 딸꾹질허는 통에 못 허고, 그저 허구헌날 노친네(종술이 모친)가 쌂어 주는 밥이나 똑 따먹고는 그 밥앨맹이 곤두서지 말라고 옥골선풍 한량 행세”나 하고 살던 중이었지만, 처음에는 최 사장의 제안을 면전에서 거절합니다. 하지만 ‘완장’을 차게 해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관리인 자리를 넙적 맡지요.

그러고는 노란 바탕에 파란 색으로 “감시원”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완장을 차고 안하무인이 됩니다. 작가는 이러한 종술의 모습을 소설 첫머리에 이렇게 묘사했지요.

“그해 이른 봄부터 이곡리(利谷里) 일대를 휘젓고 다니며 마냥 으스대는 종술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물론 종술의 성깔을 익히 아는 이곡리 주민들은 그의 행패가 두려워 감히 맞대놓고 그를 어쩌지는 못했다. 주민들은 그저 먼발치에서 그의 뒷모습을 겨냥하여 주먹으로 쑥덕감자를 먹이기도 하고 혓바닥을 날름 내밀어 보이기도 할 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는 구름의자에라도 앉은 것같이 더욱 거드름을 피고 다녔다.”  

완장을 찬 종술은 무단으로 낚시질하던 도시에서 온 남녀들에게 기합을 주기도 하고, 한밤에 몰래 물고기를 잡던 친구와 그 아들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합니다. 완장이 가진 힘과 권력을 실컷 발휘하는 거지요. 이에 맛 들린 종술은 어느덧 저수지를 감시하지 않을 때에도 완장을 차고 다닙니다. 뿐만 아니라 이곡리가 아닌 면소재지가 있는 읍내에 갈 때조차 완장을 두르고 활보하고 다니지요. 그리고 마침내 완장이 가진 권력의 힘에 도취된 나머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게 됩니다. 자신을 고용한 최 사장 일행의 낚시질까지 금지하려 했던 거지요. 결국에는 관리원 자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하지만 해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종술은 여전히 완장을 차고 저수지를 지키는 일에 몰두하지요. 가뭄이 들어 저수지의 물을 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도 그는 자신의 완장을 지키기 위해 수리조합 직원들과 충돌합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될 리가 없지요. 그러자 종술은 일찌감치부터 진정한 권력자는 완장을 차지 않는다면서 ‘완장의 허황됨’을 일깨워주던 술집작부 부월이의 충고를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리고 마을을 떠납니다.    
종술이 완장을 저수지에 버리고 부월이와 함께 떠난 다음날, 소용돌이치며 물이 빠지는 저수지 수면 위에 종술이 두르고 다니던 완장이 떠다닙니다. 그 완장을 종술의 어머니인 운암댁이 조용히 지켜보지요.



                                ‘완장’을 바라보는 세 가지 눈길



윤흥길의 『완장』에서 ‘완장’은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 곧 권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완장을 바라보는 세 가지의 눈길이 담겨 있지요. 첫째는 주인공 종술의 눈길이고, 둘째는 종술의 어머니 운암댁의 눈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부 부월의 눈길이 그것입니다.

우선 주인공 종술에게 완장은 ‘선망의 대상’입니다. 저수지 관리인을 맡아달라는 최 사장의 제안을 면전에서 거절하던 종술이 ‘완장’을 차게 해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관리인 자리를 맡는 것이 그래서이지요. 이때 종술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그 숱한 생각들을 작가는 다음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시장 경비나 방범들의 눈을 피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목판을 들고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끝없이 쫓겨 다니던 시절, 도로 교통법 위반이다 뭐다 해서 걸핏하면 포장마차에 걸려오던 시비와 단속들, 암거래 조직에 끼어들어 미군 부대나 양색시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물건을 상인들한테 중계하던 시절, 그리고 똑같이 전매법과 관세법의 위반을 전문으로 하는 다른 조직과의 피나는 세력 다툼 끝에 상대편의 밀고로 뒤가 구린 컬러텔레비전을 운반하다 체포되어 특정 범죄 가중처벌로 몸을 때우던 시절 …… 어느 시기나 다 마찬가지로 돈을 벌어보려고 몸부림치는 그의 노력 앞에는 언제나 완장들이 도사리고 있었던 셈이다. 완장 앞에서는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이었다. 완장 때문에 녹아나는 건 늘 제 쪽이었다. 제각각 색깔도 다르고 글씨도 다른 그 숱한 완장들에 그간 얼마나 많은 한을 품어 왔던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완장들을 얼마나 또 많이 선망해 왔던가.”        


다음으로, 종술의 어머니 운암댁에게 완장은 ‘원망의 대상’입니다. 완장을 차게 되었다는 아들의 말에 운암댁은 눈앞이 다 캄캄해지지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운암댁이 맨 처음 완장하고 맞닥뜨린 것은 왜정말기 일본 헌병이 찬 완장이었지요. 일 년 먹을 양식을 공출(供出; 일제가 전쟁을 치를 목적으로 민간의 물자나 식량을 강제로 바치게 하던 일)로 거저 빼앗길 수 없다며 남편이 건넌방 구들장 밑에 깊은 굴을 파고 그 속에 나락 가마들을 감추어 두었는데, 그것이 누군가의 고자질로 발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종술의 아버지와 운암댁은 완장을 찬 헌병들에게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다 치렀지요.

해방을 맞아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는데도 완장의 폭력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완장을 찬 사람들은 언제나 새롭게 나타났고 그들에 의해 집안의 운명을 좌우할 불행들이 일어났으니까요. 6.25사변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남편이 왜정시대 때 당했던 분한 일을 복수하겠다며 찬 좌익 완장 때문에 결국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완장을 차게 되었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종술을 보며 운암댁은 “오메 시상에나, 니가 완장을 다 둘러야?”하며 깜짝 놀랐던 겁니다. 종술이 떠난 뒤 물이 빠지는 저수지 수면 위에 떠다니는 완장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작부 부월이에게 완장은 ‘조롱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월이는 종술에게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라고 말하지요. 완장은 권력의 하수인이 지니는 징표일 뿐이라는 겁니다. 진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은 완장을 차지도 않고 겉으로는 드러내지도 않는다는 거지요. 부월이는 비록 술집 작부로 살아가지만 타인에 의해서 주어진 권력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완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것을 종술에게 깨닫게 하지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인간의 진실

                                                        
윤흥길의 『완장』과 연관시켜 살펴볼 때 특히 흥미로운 심리학 실험이 있습니다. 짐 바아도(P.G. Zimbardo) 박사의 ‘모의 형무소’ 실험이지요. 이 실험은 1972년 짐바아도의 논문과 짐바아도, 헤이니, 뱅크스의 공동 논문(P.G. Zimbardo, C. Haney, C. Banks)으로 발표되었고, 형무소 개혁을 위해 미 국회 소위원회에 구두로 보고 된 바 있으며, 「엑스페리멘트(experiment)」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짐 바아도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일당 15달러를 받고 형무소 생활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 참가할 남학생 지원자를 구한다는 신문광고를 냈지요. 실험의 목적은 형무소 생활에 대한 심리 연구였습니다. 지원한 학생들에게는 가정적인 배경, 육체적 및 정신적 건강 경력, 종교 등 광범위한 물음이 담긴 질문지를 기입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개인 면접도 했지요. 그 결과를 바탕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정되고 성숙되어 있어서 반사회적 행동을 할 확률이 가장 적다고 판단되는 24명을 뽑았습니다. 그 다음 그들을 무작위로 골라 일부는 죄수, 나머지는 간수로 나누어 각각의 역할을 맡겼지요.

형무소는 스탠포드대학 심리학과 교실 지하복도 35 피트를 막아 만들었습니다. 그 밖의 모든 상황도 실제 교도소와 유사하게 꾸몄지요. 그 안에서 학생들에게 2주일 동안 각자가 맡은 역할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실험동안 금전적 보수뿐 아니라 충분한 식사, 의복, 의료 및 잠자리를 보장한다는 서약도 했습니다. 지원자들은 ‘모의 형무소’ 실험을 시작하기 전날 종합적인 심리 테스트도 받았습니다. 누구든 본인이 원하면 즉시 그만둘 수 있다는 것도 알렸습니다.

죄수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죄수복을 입어야 하고, 갇혀 감시를 받을 것이며, 구금 중 육체적 학대를 받는 일은 없으나 기본 시민권의 일부가 정지된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죄수 역에 어울리는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지요. 간수 역을 맡은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간수복을 입어야 하며, 형무소 안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간수 역에 어울리나 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지요.  

짐 바아도 박사는 형무소와 똑같은 조건에서 간수와 죄수의 심리 작용, 곧 권력과 무력, 통제와 억압, 만족과 불만, 지배와 저항, 권위와 복종 등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물론 약간의 예외는 있었지만, 두 집단이 보인 반응이 너무나 격렬했고, 나타난 부작용이 예상 외로 컸기 때문에 2주간 진행할 예정이던 실험을 단 엿새 만에 중지해야 했습니다. 그 중 몇 사람은 심각한 정신병적 징후를 나타내 이삼 일 후 곧바로 실험에서 제외되기까지 했지요. 짐 바아도 박사는 그의 동료들과 공동으로 제출한 논문에서 실험이 진행된 6일 동안 죄수와 간수들에게 나타난 현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실험이 참가자들에게 주었던 충격의 가장 극단적인 증거는 다섯 사람의 죄수들에게 나타난 심한 부작용에서 볼 수 있다. 극도의 정신적 억압의 증세, 울부짖음, 격한 노여움, 강한 불안 때문에 그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부작용은 네 사람의 죄수에게 똑같이 나타났으며, 다섯 번째 사람은 몸 곳곳에 생긴 ‘심리적 스트레스에서 오는 발진(發疹)(psychosomatic rash)’ 때문에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실험이 겨우 6일 만에 예정보다 빨리 끝났을 때, 남은 사람들 중 단 두 명만이 ‘가석방’ 때문에 번 돈을 잃고 싶지 않다고 했을 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에 기뻐했다.”


그런데 간수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의 반응은 죄수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과 전혀 달랐답니다. 짐 바아도 박사는 ‘간수들’의 태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죄수들과 대조적으로, 대다수의 간수들은 실험을 중지한다는 결정을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에 열중한 나머지, 자기들이 행사하고 있는 통제와 권력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 정해진 시간에 나오지 않는 간수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남는 시간에 자발적으로 - 불평도 없이, 초과근무수당도 없이 - 근무를 계속하는 일도 몇 번 있었다.”


실험에 참가한 대다수가 종교나 개인적 도덕관, 신념 또는 가치관에 상관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이끌려 무슨 일이라도 하더라는 거지요.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간수 역을 맡은 사람들 중 대부분이 갑자기 잔혹한 사디스트(sadist; 상대에게 고통을 주면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적 성향을 많게든지 적게든지 보이더라는 거지요. 반면에 죄수 역을 맡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겁에 질려 천박하고 복종 잘하는 마조히스트(masochist; 상대에게 고통을 당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적 경향을 보이고요. 그것이 실제 상황이 아니고 스스로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단순한 연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맡은 역할, 제복, 그리고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변모시켜버리더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글의 첫머리에서 스스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얻은 거지요. 즉, “왜 제복이나 완장 같은 것을 착용한 사람들은 대체로 아무에게나 위압적인 태도를 내보이며 암암리에 거친 말을 사용하고 걸핏하면 부당한 요구를 할까?” 또 “왜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눅이 드는 것일까?”에 대한 해답을 이미 얻었다는 말입니다. 대답인즉, 바로 그것이 권력이라는 거울에 비친 인간의 실상이라는 거지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인간의 진실이라는 겁니다.

   
                                 아직도 ‘완장문화’가 남아 있다면



짐 바아도(P.G. Zimbardo) 박사의 ‘모의 형무소’ 실험은 크게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선, 짐 바아도 박사와 그의 동료들이 주장한 해석이지요. 즉, “피실험자들 양쪽에 나타난 극도로 병적인 부작용은 사회적 힘이 작용할 때의 위력을 실제로 증명한다.”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행동은 전적으로 사회적 힘(환경이나 교육 또는 맡은 역할)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거지요. 그래서 실제로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적인 직장, 예컨대 군대, 경찰, 형무소나 철도 같은 권위주의적인 관공소에 가면 이렇게 권력과 권위를 즐기는 사디스트적인 사람들과 그것에 복종하기를 즐기는 마조히스트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윤흥길의 『완장』에서 주인공 종술은 그리 별나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지요. 누구든 ‘완장’을 차면 자기가 행사하고 있는 통제와 권력을 즐기기 때문에,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아 정해진 시간뿐만 아니라 남는 시간에조차 자발적으로, 불평도 없이, 초과근무수당도 없이 근무를 계속하게 된다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해석이 그 경우이지요. 즉, 모의 형무소 실험에서 절반 정도의 죄수들은 마조히스트적 부작용을 보이지 않고 억압적인 분위기를 실제로 잘 견디어 냈으며, 비록 “몇 사람” 또는 “소수”라고 하지만 죄수들을 규칙에 따라 공정하게 대하고 강압적인 통제를 하지 않았던 간수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실험은 오히려 사회적 힘이 그렇게 간단하게 사람을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로 변모시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거지요. 인간에게는 주어진 어떠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자기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완장』의 주인공 종술은 크게 잘못된 사람이지요. 그는 자신이 완장의 피해자이면서도, 또한 그래서 더욱 완장을 선호하는 사디스트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야 다행히 작부 부월의 충고를 받아들여 완장을 벗어 던져버리고 마지막 남은 자신의 길을 갔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 사회에 아직도 ‘완장문화’가 남아 있다면, 그 완장을 찬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또 그 완장에 겁이 질려 천박하고 복종 잘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군인, 경찰, 형무소나 철도 같은 권위주의적 관공소에 근무하는 사람들만 완장을 찼을까요? 혹시, 이미 지나치게 권력화한 일부 언론기관이나 시민운동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파업과 폭력시위를 서슴지 않는 일부 노동운동가들도 이에 속하지 않을까요? 누구든 자기가 행사하고 있는 통제와 권력을 즐기기 때문에 그것에 몰두한다면, 그도 종술이처럼 완장을 찬 게 아닐까요? 또한 누구든 완장에 주눅이 들어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쉬 포기하고 복종한다면, 그가 곧 ‘모의 형무소’에 수감된 죄수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요? 한번, 생각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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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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