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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문학<3>-사상 최고 인기테마 '외계인'

  • 작성일 2006-03-13
  • 조회수 883




   SF에서 가장 인기 있는 테마는 뭘까요?


   타임머신을 타고 환상적인 시간여행을 할 수도 있고 사람보다 더 똑똑한 로봇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역시 가장 신나는 건 우주선을 타고 낯선 외계로 나가 기기묘묘한 외계인들을 만나보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이제껏 여러 SF영화나 소설들을 통해 수많은 외계인들을 접해왔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거의 대부분은 서양에서 수입된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외계인이나 외계 사회를 묘사해보려는 시도는 서양문화권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지요.


  그래서 근대 이후의 서구문학사를 살펴보면 외계인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심심찮게 눈에 뜨이는데, 이들의 묘사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입니다. 외계인관(觀)의 변천사는 우리 인류가 어떻게 ‘바깥 우주(outer space)’를 인식해왔는지 알아보는 데 적잖은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서구 문학사에서 17,18세기경부터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등장한 외계인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외계인의 옷을 입은 지구인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의 행동이나 말도 역시 우리 인간들과 별 다를 바가 없었죠. 그러다가 지구상의 생물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태적 특징, 지구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의식세계와는 전혀 다른 외계인이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입니다. 외계의 환경과 외계의 생물들을 과학적으로 추측하고 상상해보는 일은 당시 라마르크와 다윈 등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된 진화론에 힘입은 바가 컸지요.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주목할 만한 외계인의 묘사는 먼저 프랑스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까밀 플라마리온의 논픽션 <현실 세계와 상상의 세계(1864)>는 외계인의 개념을 사실상 최초로 대중화시킨 저작으로 꼽히며, J. H. 로스니의 <무한의 항해자들(1925)>에서는 인간과 외계인의 사랑이 등장하기에 이릅니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여섯 개의 눈이 달리고 다리가 셋인 화성인과 연애를 한답니다.


   당시의 프랑스 작가들이 외계인을 묘사하는 태도는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호와 호기심이 섞인 따뜻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라마르크나 베르그송 같은 프랑스의 진화론적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외계인의 개념을 통해 인간 자신을 인식하는 새로운 접근방법들을 개척하려 했던 것이죠.


   한편 다윈의 진화론 중에서도 적자생존설(適者生存說)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영국에서는 외계인들 역시 인간의 적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SF의 고전인 H. G. 웰즈의 <우주전쟁(1898)>은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르는 화성인(사진 위 왼쪽)을 등장시켜 그 뒤 적대적인 외계인상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 작품은 나중에 미국에서 오손 웰즈가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하여 방송하는 과정에서 청취자들이 실제 상황으로 착각, 한바탕 대소동을 일으켰던 기념비적인 에피소드로 더욱 더 유명해졌지요.


                    지구인 영웅을 위한 조연으로 나서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이른바 ‘펄프 매거진(pulp magazine)’으로 불리는 싸구려 대중잡지들이 전성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잡지들을 통해 수없이 많은 SF작품들이 발표되었는데, 외계인은 통속적인 ‘우주 활극(space opera)’의 조연으로 전락하여 지구인 영웅 만들기에 일조하는 역할이 대부분이었지요. 191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의 연작소설 <화성>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지구인 주인공이 화성에 가서 화성인들을 거느리고 다른 화성인 악당들을 무찌르며 화성의 공주와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사진 오른쪽)입니다한편 비슷한 시기에 E. E. 스미스의 <렌즈맨> 시리즈는 천사와 악마의 고전적인 선-악 대비 구도를 대립되는 두 외계 종족으로 형상화시켜 역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역시 지구인들이 주인공 영웅으로 등장하고 외계인들은 모두 조연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이 ‘외계인’이란 개념 자체를 일반 대중에게 친숙하게 각인시킨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20세기 초에 서양에서 대중적으로 정착된 외계인 개념은, 그 뒤로 전 세계의 SF작가들이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더욱 더 깊은 차원으로 탐구해 들어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영상 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외계인의 생생한 묘사는 책에서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감상할 수 있게 되었지요.


                         당대사회에 대한 은유와 풍자 역할도 


   그러나 1930년대 이후 SF에서 묘사된 외계인들은 주로 지구를 침략하는 악역이 대부분이었고, 개중에는 ‘외계인’이 아니라 ‘외계 괴물’이라고 해야 어울릴 만한 모습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또 이러한 경향은 영화에도 반영되어 1950년대부터는 외계의 괴물을 등장시킨 공포영화들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1950년대는 서구 영화계에서 SF라는 장르가 도약기를 맞은 시기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특히 미-소 양국 간의 긴장된 냉전 분위기가 지배했던 당시의 국제 정세를 반영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았지요. 이러한 영화들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은 이전까지의 만만했던(?) 선배들과는 달리 관객들로 하여금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모습을 지니고 나타났는데, 대부분은 SF소설로 먼저 발표된 것을 영화로 각색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작품들 중 흔히 두 편을 대표적으로 꼽
습니다. 1951년에 발표된 <괴물(The Thing)>(사진 왼쪽은 영화 괴물 포스터 그림)과 1956년에 처음 선을 보인 <신체강탈자들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이 그것입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원작 SF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1970년대 및 80년대에 새롭게 다시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괴물>은 미국의 탁월한 SF편집자이자 작가였던 존 캠벨의 단편 <거기 누구냐!(1938)>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외계에서 온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인간의 몸속에 잠입하여 겉모습은 인간 그대로지만 정신은 외계인의 것이라는 설정이 전개됩니다. 또 <신체강탈자들의 침입>은 미국의 잭 피니가 1955년에 발표한 같은 제목의 장편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것으로, <괴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외형을 그대로 지니는 외계의 괴물이 등장합니다. 이 작품의 외계 생물은 인간의 육체를 똑같이 복제해내는 능력을 지녔지요.


   위의 두 작품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예리하게 풍자했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SF의 외계인들이 단순히 지적 유희에 가까운 상상력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었다면, 위 두 작품의 외계인들은 인간 사회를 은유하고 풍자하는 고도의 의미심장함을 지니게 된 것이죠. 그래서 겉모습은 인간과 
전혀 구별이 안 되는 멀쩡한 사람의 모습이지만 그 속에 어떤 생각이나 의도를 숨기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외계인들은, 그 이전의 흉측한 외모를 지닌 외계의 괴물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공포를 제공했습니다. 갖가지 이데올로기며 이념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혼란했던 당시의 시대상은 이처럼 대중문화 분야에도 예외 없이 반영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된 외계 괴물의 전통은 그 뒤 소설이나 영화 분야 모두에서 하나의 확고한 틀로 자리를 잡아 지금까지도 같은 구성의 작품들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습니다. SF 영화사상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고 일컬어지는 <에일리언(1979)>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아마도 SF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외계 괴물일 것입니다.
. 또 1985년에 발표된 <우주의 뱀파이어> 역시 우주를 방랑하는 괴물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의 몸과 혼을 앗아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영국의 저명한 평론가이자 작가인 콜린 윌슨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지요.



  1960년대부터는 SF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의 모습이 지구인이나 지구상의 다른 생물과 비슷한 외형을 갖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외계인이라는 상황 설정을 통해 일반 문학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의 희로애락을 풍자하고 은유해보려는 작가들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SF문학이 나름대로의 문학성을 쌓아나가는 데 적잖이 이바지하게 된 경향입니다.(사진 오른쪽-인간보다 착한 파충류 외계인이 나오는 <양심의 문제> 책표지) . 제임스 블리쉬가 1958년에 발표한 <양심의 문제)에서는 지구에서 파견된 성직자가 외계 행성에서 사악하게 생긴 파충류 모양의 외계인들을 만나는데, 그는 그 외계인들이 지구인보다 훨씬 더 착하고 고운 심성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과연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고민에 빠집니다.


  또 미국의 월터 테비스가 1963년에 발표한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에선 지구인과 거의 똑같은 모습을 지닌 화성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멸해가는 자신의 고향별을 구할 방법을 찾고자 지구에 왔지만 인간 사회에서 부대끼고 시달린 끝에 결국은 폐인이 되고 말지요.

 

 

<사진 위는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괴물외계인의 모습 >

                          외계인은 실제로 있지 않을까?


   한편 우주의 어느 곳인가에 외계인이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노력 역시 끊이지 않고 맥을 이어왔는데, 지금은 하나의 용어로 굳어버린 ‘최초의 접촉(first contact)’, 즉 지성을 가진 외계인과 최초로 접촉한다는 주제는 모든 SF팬들의 변함없는 열망이었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영화 쪽에서 거의 교과서적인 모델이 제시된 바 있지요. 헐리우드의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1977년에 발표한 영화 <미지와의 접촉(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이 바로 그것으로,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적 묘사와 빼어난 영상 등으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인간처럼 두 팔, 두 다리가 달린 휴머노이드 형의 몸체에 머리는 크고 키는 작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1985년에 나온 칼 세이건의 소설 <콘택트> 역시 과학적으로 탁월하게 묘사된 외계 문명과의 접촉 이야기입니다. 1997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작품은, 외계 문명이 수학에 바탕을 둔 우주 공통의 논리 언어로 지구 인류에게 메시지를 보내옵니다. 아쉽게도 외계인의 실체는 단 한 번도 속 시원하게 드러나지 않지만요.


  1980년대 들어 국제 정세가 서서히 긴장 완화의 데탕트 시대로 바뀌면서 무시무시한 괴물 외계인 대신 우호적이고 친근감을 주는 외계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1982년에 발표된 영화 는 우스꽝스런 모습의 땅딸보 외계인이 홀로 지구에 낙오하면서 지구인 어린이와 감동적인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로 너무나도 유명하지요. 영화 <에일리언>에 등장하는 끔찍한 외계인은 괴물로서는 가장 유명할지 모르지만, 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아마도 모든 SF영화, 소설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외계인 캐릭터일 것입니다. 또한 1984년에 발표된 <스타맨>이나 1985년에 발표된 <코쿤> 등의 영화는 모두 따듯한 심성을 지닌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했다가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 영화인 <맨 인 블랙> 같은 경우는 온갖 외계인 캐릭터들이 총출동한 외계인 만물상 같은 코미디였지요.


지금까지의 외계인들은 어떻게 보면 독립된 생물 개체라는 관점에서 지구 인류와 크게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SF적 상상력을 확장해 보면 외계 생명체가 반드시 그런 식으로만 존재하라는 법은 없겠지요.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솔라리스>에서는 한 외계 행성의 바다 전체가 하나의 의식을 지닌 생명체로 나오고, 영화 <스타 트랙> 극장판 1편에는 로봇 생명체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지구상의 생물들처럼 탄소에 기반을 둔 유기물이 아닌 무기물, 즉 쉽게 말해서 반도체가 생명체로 진화해 나간다는 설정이지요. 그런가 하면 영화 <에볼루션>에는 어떤 형태로도 순식간에 진화해나가는 무시무시한 환경적응력을 지닌 외계생명체도 등장합니다.


   과연 미래에는 정말로 외계 문명인과 조우하는 날이 오게 될까요? 그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들로서는 그때까지 하나뿐인 지구를 잘 보존해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일방적으로만 내달리다 보면 인류 자체의 생존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런 문명의 위기를 이미 슬기롭게 극복한 외계인들이 지금 우주 저 멀리서 자신들도 
은하 문명의 일원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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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박상준

 

1967년에 서울에서 나서 한양대 지구해양과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비교문학과를 수료했습니다. 지금은 한국 근대 과학소설사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입니다. 1991년부터 SF 전문 기획번역가이자 과학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KBS 라디오와 YTN-TV, 동아일보, 과학동아, 한겨레21, 씨네21, 전자신문, 페이퍼 등에 고정 칼럼을 연재했습니다. 낸 책으로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공저), <라마와의 랑데부>(옮김), <세계 SF 걸작선>(편역), <토탈호러>(편역) 등 20여 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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