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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문학<4>-호기심, 열망, 상상력이 빚어낸 낯선 세상들

  • 작성일 2006-04-14
  • 조회수 292



  

 

 
1977년에 나온 첫 번째 <스타워즈> (사진 위쪽)영화를 보면, 주인공 루크가 살고 있는 타투인 행성에선 두 개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또 휴머니즘이 진하게 배어 있는 영화 <스타맨>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고향 행성은 칠흑처럼 검은 빛에 가스구름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지요. 그런가 하면 밤하늘에 둘 이상의 달이 떠 있는 광경은 외계를 다룬 SF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묘사되는 광경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SF작가들이 외계의 세상을 상상할 때 가장 먼저 착안하는 점 중의 하나가 바로 지구와는 전혀 다른 천문물리적 환경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들은 푸른색 태양을 등장시키기도 하고,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하여 블랙홀 주변을 불안하게 공전하는 위기의 별세계를 가정하기도 하지요.


이러한 ‘외계 환경’에 대한 상상력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케플러의 법칙’등의 천체역학 이론을 규명해내어 천문학사상 불후의 업적을 남긴 17세기 독일의 과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자신이 직접 SF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는데, 그는 1634년에 달과 그곳에 사는 생물을 묘사한 <솜니움>이란 작품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 작품에 나오는 달의 모습은 역시 동시대의 위대한 천문학자였던 갈릴레오가 달을 자세히 관측한 기록과 거의 일치하기는 하지만, 달에도 물과 대기가 있다고 묘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도 하지요.

또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원래 신랄한 사회 풍자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사실 은 SF문학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높이 평가받는 걸작입니다. 왜냐면 이 소설에는 반중력 개념이 등장하는가 하면, 화성의 달이 두 개라는 사실을 예측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태양도 하나, 달도 하나라는 것이 당연한 진리처럼 여겨지던 시대에는 이 정도의 상상력도 꽤 파격적인 것이었지요.


 

태양은 여섯개, 별은 천년에 한번 출현?

 


20세기에 접어들어 대중오락 소설로서 SF가 크게 각광을 받게 되자, 작가들은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온갖 가능한 형태의 외계 풍경들을 창조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세계 SF문학사에 거대한 발자국을 남긴 아이작 아시모프는 약관의 신인 시절에 이미 SF작가들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놀라운 외계 세상을 창조해낸 바 있습니다. 1941년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SF잡지였던 <어스타운딩(Astounding)>지 9월호에는 <전설의 밤> (사진 아래 왼쪽)이라는 단편이 실렸는데, 스물한 살에 불과한 청년작가 아시모프는 이 한 편으로 순식간에 쟁쟁한 SF작가의 대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아시모프는 그에 앞서 3월에 <어스타운딩>지의 편집장인 존 캠벨과 새로운 작품의 구상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에머슨의 <자연론> 제1절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부분은 ‘만약 별이 1천 년에 하룻밤씩만 모습을 드러낸다면 사람들은 모두 별을 우러러 받들며 몇 세대에 걸쳐서 종교적 계시나 전설처럼 추앙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시모프는 실제로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천문학적인 조건들을 얘기했고, 이에 캠벨은 그것을 소설로 형상화해볼 것을 권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 바로 <전설의 밤>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계는 밤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는 무려 여섯 개의 태양이 있어서 그 중에 최소한 하나 이상은 언제나 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별의 주민들은 고도의 과학문명을 이루었지만 천문학만큼은 예외여서 온 우주가 별들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자기들의 세계와 하늘의 여섯 태양만이 우주의 전부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에는 불가사의한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오고 있었지요. 1천 년에 한 번 온 세상에 어둠에 묻히고 하늘에는 ‘별’이라는 것이 온통 가득차는데, 그 때가 오면 세상은 멸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별의 문명은 주기적인 흥망성쇠를 거듭해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전설에서 말하는 그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한 천문학자는 그 전설이야말로 여섯 개나 되는 태양 때문에 겨우 1천 년에 한 번씩 발생하는 개기일식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천문학자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1천년에 한 번 찾아오는 밤은 단순히 개기일식이라는 천문현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밤’이라는 낯선 어둠에 휩싸인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마구 불을 지릅니다. 환하게 불을 지펴서 어둠을 몰아내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지요. 결국 이 별의 문명이 1천년에 한 번씩 멸망과 재건을 거듭한 이유는, 이처럼 일식에 놀라 스스로 낸 불 때문에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뿐이 아니다’라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착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과학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일뿐더러, 나중에 천문학자들에 의해 우주에 그런 태양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지요. 현재 알려지기로는 우리 태양계처럼 항성이 하나뿐인 경우보다는 오히려 2연성, 3연성 등 둘 이상의 항성들이 모여서 태양계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작년에 폴란드의 한 천문학자가 백조자리에서 태양이 세 개인 행성을 발견하여 ‘타투인’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외계인의 눈에 비친 지구? '아이스 월드'

 

 

1950년대에는 이른바 ‘하드(hard)SF’분야의 실력자로 손꼽히는 할 클레멘트가 등장합니다. 하드SF란 엄밀한 과학적 논리 구사에 중점을 두는 작품 경향을 의미하는데,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등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아서 클라크가 바로 하드SF의 대가로 추앙받는 사람입니다.

할 클레멘트는 1953년에 <아이스월드>라는 장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외계인 수사관이 범인을 쫓아 지구로 온다는 내용이 전개되는데, 이 외계인의 고향 행성에 대한 묘사가 매우 독특합니다. 외계인의 고향별은 기온이 섭씨 400도에 이르는 초고온 세계이며, 그들은 규소, 즉 실리콘을 기본으로 하는 신체 신진대사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인간을 비롯한 지구의 생물들은 탄소를 기본으로 하는 유기물 생체조직을 갖고 있지요.

그가 범인을 추적하여 지구로 와 보니, 고향별에 비해서 엄청나게 추운 무시무시한 ‘혹한의 행성’이었습니다. 심지어 유황이 가스가 아니라 고체 상태로 ‘얼어붙어’ 있을 정도이지요. 그래서 그 외계인은 강력한 방한복으로 완전무장한 채 수사에 임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외계인 입장의 시각을 견지하면서 우리 지구를 또 다른 외계로 묘사한 점이 돋보인 수작이었습니다.


수소로 호흡, 암모니아는 신진대사 기초, 독자문명도 ...


그런데 클레멘트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1953년 봄부터 <어스타운딩>지에 연재하기 시작한 <중력의 임무>(사진 오른쪽)입니다. 이 작품의 무대는 백조자리 61번 별 주위를 도는 가상의 행성  메스클린입니다. 실제로 천문학자들이 이 61번 별의 운동 궤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광학망원경으로 관찰되지는 않지만 목성보다 몇 배의 질량을 지닌 행성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메스클린의 질량은 목성의 16배이지만 자전주기가 17분 45초로 매우 짧기 때문에, 원심력에 의해 납작하게 찌부러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지방과 적도 지방의 중력가속도가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지요. 또한 그 행성의 표면은 고농도에 고압인 수소 대기와 메탄의 바다로 뒤덮여있으며 기온은 섭씨 170도에 달합니다. 이런 환경이라면 지구의 기준으로 볼 때 도저히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작가는 수소를 호흡하고 메탄과 암모니아를 신진대사의 기본물질로 삼는 지성생물을 창조해냈습니다. 이들은 강력한 중력에 적응하기 위하여 납작한 모양으로 진화했기 때문에, ‘높이’라는 개념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켜서 지구 탐험대와 감동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습니다.

이 작품이 채택하고 있는 엄밀한 과학적 가설 중의 일부는 허점이 없지 않다는 지적도 나중에 제기되었으나, 전반적으로 철저한 과학적 추론의 본보기로 삼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래서  클레멘트는 1950년대를 대표하는 하드SF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것입니다.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우주공학 이론은 발달을 거듭하여 우주왕복선을 대체할 수 있는 우주 엘리베이터라든가 대규모 우주정거장 겸 우주도시 등의 구체적인 청사진들이 속속 선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개념들은 거의 예외 없이 SF작가들의 손에 의해 소설 속에서 형상화 되었는데, 비용 및 부수적인 문제점들만 해결되면 오늘날의 기술로도 충분히 실현이 가능한 것들입니다.


 과학적 타당성 갖춘 천문학적 규모 인공세계 



1970년에 래리 니븐이 발표한 장편 <링월드>(사진 왼쪽)는 하나의 독립적이고 완전한, 그러면서도 글자 그대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인공세계를 등장시켜 SF팬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링월드(Ringworld)’라는, 글자 그대로 반지 모양의 거대한 인공물이 등장합니다. 어떤 태양의 둘레를 반지름 1억 5천만 킬로미터로 돌고 있는 폭 60만 킬로미터의 어마어마한 인공 테가 바로 그것인데, 이 테의 두께는 겨우 50피트밖에 안 되지만 특수소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중성미자나 운석 같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에도 끄떡없이 견딥니다. 또한 이 테는 가장자리가 안쪽으로 구부러져 있어서 회전원심력에 의해 대기가 우주공간으로 흩어지지 않고 머물러 있으며, 테의 안쪽에 바다나 산맥 같은 것을 조성해놓아서 완전한 거주공간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즉, 지구와 같은 공 모양의 자연적인 행성이 아니라 거대한 반지 모양의 인공 세계인 것입니다. 나중에 비판적인 독자들에 의해 반론도 제기되었지만, 이러한 구조물은 실제로 과학적인 타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하루는 지구의 2천 7백년



하이테크 시대로 접어든 1980년대에 이르게 되자 SF작가들도 놀라우리만치 섬세한 고난도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등장한 가장 인상적인 외계의 묘사는 아마도 로버트 포워드의 <용의 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물리학자 출신으로 앞서 언급했던 니븐이나 클라크 등 기라성 같은 SF작가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해왔던 사람인데, 나이가 쉰에 가까운 1980년에 늦깎이 SF작가로 등단하면서 내놓은 처녀작이 바로 <용의 알>입니다.


<용의 알> (사진 오른쪽)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외계 세상은 중성자성입니다. 중성자성이란 태양과 같은 항성이 수명이 다하여 폭발한 뒤, 그 때의 압력에 의해 극도로 압축된 중성자 덩어리지요. 이러한 중성자별은 크기가 겨우 수십 킬로미터밖에 안 되지만, 엄청난 밀도 때문에 질량은 태양과 맞먹을 정도이고 표면중력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용의 알>에 등장하는 중성자성은 표면중력이 무려 지구의 670억 배나 되는데, 인간의 탐사선이 이 별에 접근하여 관측해 본 결과 놀랍게도 그곳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지구인들에 의해 ‘체라’라는 이름이 붙은 이 생물체는 중성자별의 특성상 자기장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조금만 이동을 해도 몸의 모양이 급격하게 변화하며, 에너지 신진대사의 방식도 지구상의 생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시간 감각이 놀라우리만치 빠릅니다. 그래서 체라는 인간보다 100만 배나 빠른 시간척도로 인해 처음 지구인과 접촉한 뒤 불과 하루 만에 지구에서의 2천 7백년에 해당하는 정도의 문명 발전을 이룩해낸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제는 원시시대였는데 오늘은 벌써 우주선을 만들어 낼 정도로 발전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시간 척도는 우리 지구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우주여행 못 가지만 SF 통해 원대한 꿈을...


 

이렇듯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머나먼 우주와 외계의 풍경을 상상해보는 것은, 인류가 원초적으로 타고난 호기심의 발로입니다. 바로 이러한 호기심과 열망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오늘날의 눈부신 과학기술 문명사회를 이룩해낸 것이지요. 인간은 오랜 옛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밤마다 펼쳐지는 가없는 별세계의 장관에 접하며 살아왔고, 그 우주를 향하여 꿈을 키워왔습니다. 직접 가 볼 수 없는 그 수많은 별세계들을 상상하며 온갖 전설을 창조하고 별자리 이름들을 붙였지요.

인류가 머나 먼 은하들로 우주여행을 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흘러야겠지만, SF작가들의 힘을 빌려 별세계의 풍경들을 마음껏 그려보면 조금은 아쉬움이 달래지기도 합니다. 인간은 원래 꿈을 먹고 사는 존재인 만큼, 별세계의 풍경들과 외계인들을 상상해보는 것은 결코 실없는 몽상가의 백일몽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각자의 꿈은 소박할지언정 우리들 모두의 공통된 꿈은 저 드넓은 우주로 뻗어나가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원대한 인류의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SF야말로 그러한 꿈을 가장 구체적으로 펼쳐 보이는 장르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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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박상준

 

1967년에 서울에서 나서 한양대 지구해양과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비교문학과를 수료했습니다. 지금은 한국 근대 과학소설사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입니다. 1991년부터 SF 전문 기획번역가이자 과학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KBS 라디오와 YTN-TV, 동아일보, 과학동아, 한겨레21, 씨네21, 전자신문, 페이퍼 등에 고정 칼럼을 연재했습니다. 낸 책으로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공저), <라마와의 랑데부>(옮김), <세계 SF 걸작선>(편역), <토탈호러>(편역) 등 20여 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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