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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서 본 ‘회상’의 의미

  • 작성일 2006-06-09
  • 조회수 2,096




“프루스트는 최후의 위대한 모험가다. 이 소설 이후에 무엇을 더 쓸 수 있겠는가? 그는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을 구체적으로, 그것도 이렇게 놀라운 불후의 형식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이 책을 손에서 내려놓는 순간, 한숨을 몰아 쉴 수밖에 없다.” 20세기 초반 유럽 아방가르드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작가 버지니아 울프(B. Wolf, 1882~1941)의 말입니다. 같은 작가로서의 시샘과 절망이 함께 섞인 이 말 가운데 언급된 “이 책”이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7부작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지요.

“오래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1인칭 소설은 우선 섬세하고 세련된 문장들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긴 것은 무려 522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어, 이 문장을 종이테이프에 쓸 경우 길이가 4미터에 이른다고 하지요. 프루스트는 타고난 감수성으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세밀한 언어를 사용하여 보통 사람들로서는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할 우아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자신의 소설 안에 펼쳐놓았습니다. 바닷가의 산책, 소나타의 울림, 꽃의 향기, 마들렌 케이크와 따뜻한 보리수꽃차, 아몬드와 함께 구운 송어,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나비 한 마리, 아무리 사소한 것까지도 생생하게 그려내는 그의 솜씨는 세상의 모든 독자들을 가차없이 두 부류로 나누어 놓지요. 처음 300 쪽 이전에 책장을 덮는 사람과 3000 쪽을 마치 중독에 걸린 것처럼 읽어내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단지 섬세하고 세련된 문장들이 이 작품을 불멸의 고전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아닙니다.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우리의 기억에 관한 놀라운 성찰, 곧 과거에 대한 ‘회상(回想)’을 통해 드러나는 새로운 시간, 새로운 공간, 그리고 이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통찰이 소중하게 담겨져 있지요. 바로 이것이 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든 겁니다. 어디 그런지, 한번 볼까요? 요.

프루스트는 훈장을 받을 만큼 저명한 의학자인 아드리엥 프루스트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육체적으로 병약하고 정신적으로 예민하여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과잉보호 아래 문학사상 유래가 없는 “응석받이”로 자라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파리의 퇴폐적 상류 사교계나 드나들던 삼류 비평가에 불과했지요. 그래서 그가 언젠가 새로운 소설기법과 심오한 철학사상을 문학에 끌어들여 세계 문학사에 빛날 대작을 남길 줄은 1913년에 첫 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가 자비로 출간되었을 때조차 아무도 몰랐다지요. 1919년에서야 N.R.F사에서  『스완네 집 쪽으로』가 재출간된 데 뒤이어, 제 2편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가 새로 발간되고 그 해 공쿠르상을 받음으로써 프루스트는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죽음을 불과 3년 앞둔 때였지요.
1905년에 그가 세상에서 가장 의지했던 “엄마”가 세상을 떠나자, 프루스트는 사교계와 발을 끊었답니다. 그리고 일체의 외출을 삼간 채 방안에만 틀어박혀 - 친구들의 추억에 의해 전해지는 - “전설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지요.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을 차단하기 위해 코르크로 침실을 도배하고, 대로변 마로니에에서 풍겨 나오는 향내를 천식 때문에 막기 위해 모든 창문을 닫고, 질식할 것 같은 냄새를 풍기는 훈증요법을 하며, 침대에 엎드린 채, 1910년부터 1922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약 13년에 걸쳐 이 대작을 20여권의 공책에 쓰고, 가필하고, 교정하고 또 교정했다고 합니다. 스스로 “나는 교정을 통해서 새로운 소설을 썼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말입니다. 총 7부작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가운데 두꺼운 것 4권을 상하로 나누어 출간하여 총 11권이나 되지요.

프루스트는 자신의 작품이 역사에 남을 걸작이라는 것과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오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집필을 끝낼 수 있을까를 항상 염려했는데, 폐렴에 걸리기 며칠 전에야 원고의 마지막에 "fin"(끝)이라고 쓸 수 있었다지요. 그리고는 며칠 후 - 마치 이 작품만을 위해 태어나 산 사람처럼 - 세상을 떠났답니다. “어떠한 작가도 이보다 더 뚜렷한 소명의식을 가진 예가 없으며, 어떠한 생애도 이처럼 온전히 한 작품 속에 바쳐졌던 예가 일찍이 없었다.”라는 앙드레 모로아(Andr Maurois)의 말은 그래서 나온 거지요.




기억과 회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의 첫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깨어나면,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처음 순간에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나는 어떤 동물의 체내에서나 가능한 떨림과도 같은, 그런 단순한 원시적 생존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나의 사고는 혈거인(穴居人)의 그것보다 더 빈약하다. 그러나 이러한 때, 기억 - 지금 내가 있는 곳에 대한 기억이 아니고 지난날 내가 산 적이 있는 곳, 또는 가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두세 곳의 기억 -이 천상의 구원처럼 내게 내려와,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나를 건져준다.”  



이 글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1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막 시작하는 시점에서 씌어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그가 전 작품을 통해 천착한 문제, 곧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하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이 놀랍고도 기나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지요.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일까요? 프루스트는 한 밤중에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을 때를 예로 들었지만, 가령 사고나 마취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사람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시죠. 그 사람은 깨어났지만, 처음에는 시간에 대해, 장소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무지의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우선 주위 사람들에게 시간과 장소를 묻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사고 이전의 기억을 더듬거리며 찾겠지요. 만일 그가 다행히도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그는 곧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든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은 곧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은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이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게 된다는 거지요. 이렇듯 흔히 “정체성(Identit)"이라고 말하는 인간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하게 해주는 것이 곧 기억인 겁니다.

SF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보면, 초반에 인간들 가운데 숨은 인조인간을 색출해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인조인간은 외모나 행동으로는 전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심문관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묻지요. 그러자 기억이 이식된 인조인간은 대답을 포기하고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깁니다. 이로써 영화는 인간에 있어서 기억이 무엇인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지요. 기억이란 다름 아닌 자기 정체성의 바탕인 거지요. “그 가능성에서 볼 것 같으면 인간은 기억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본질에서 볼 것 같으면 인간은 기억이다.”라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큄멜(Friedrich Kmmel)의 말이 그래서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억은 컴퓨터의 메모리와는 다르지요. 단순히 자료만을 저장하는 장소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기억에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로 연결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하는 능력이 함께 있는 겁니다. 일찍이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는 인간영혼의 이러한 능력을 “상기(想起)의 힘(vis memoriae)”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 능력을 통해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우리의 정신을 분산(distendo animae)시키고 그 결과 삶도 분산시켜 단지 흘러가버리고 마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시간의 끔찍한 파괴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시간론에 깔린 심오한 사유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상기의 힘이 하는 이러한 일에 대해 “새로운 여러 가지 상을 지나간 것과 연관시키고, 이렇게 해서 미래의 행위나 사건이나 희망을 구성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나는 이들 모두가 흡사 현존(現存)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을 “정신의 집중(extendo animae)”이라 했지요. 정신의 집중을 통해서 시간은 분산되어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집결된 하나의 통일체가 되는 거지요. 그 통일성 안에서만이 인간의 삶은 - 그것이 단지 흘러가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고 불변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 비로소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불변하는 의미와 가치가 구원으로 연결되는 거지요.

“기억이 천상의 구원처럼 내게 내려와,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나를 건져준다.”라는 프루스트의 말이 상기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바로 이러한 과정, 즉 우리가 회상이라고 부르는 작업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해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에 대한 심오한 사유가 1500년도 더 지난 다음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이런 이유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흥미로운 연구들을 남긴 비평가 조르쥬 플레(Georges Poulet)은 프루스트에 관한 그의 논문 「프루스트의 인간적 시간」에 다음 같이 썼습니다.

 
“따라서 프루스트의 사상에서의 ‘기억’은 기독교 사상에서 ‘은총’과 같이 초자연적 역할을 한다. …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프루스트 작품 가운데서는, 회상은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초인적 형상을 띠고 끊임없이 나타난다.”



프루스트는 그러나 이러한 사유를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직접 물려받은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그는 집안으로 사촌매형뻘이 되며 『물질과 기억』을 쓴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 Bergson, 1859~1941)의 소르본느 대학 강의를 통해 이와 유사한 종류의 사유를 접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베르그송도 그의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이 자기동일성을 확보해준다는 것을 강조했지요. 그는 인간의 의식이 갖는 고유한 시간을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시간으로 이해했고, 그것을 “순수지속(pour dure)"이라고 불렀지요. 순수지속에서 과거는 간단히 사라지지 않으며 - 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에서와 마찬가지로 - 부단히 현재로 흘러들어 그것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이런 연유에서 사람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베르그송적 소설”이라고 부르지요.


하지만 프루스트가 회상을 단지 자기 정체성의 회복에 그치지 않고 - 나중에 보겠지만 - 구원에까지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은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적 소설’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물론 그 구원이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는 신앙으로, 프루스트에 있어서는 예술로 이루어진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시간의 병치 - 회상에 의한 새로운 시간 



시간의 병치(倂置), 곧 과거나 미래를 현재와 나란히 또는 겹쳐서 놓는다는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의 핵심입니다. 「엔테의 『모모』를 통해서 본 ‘시간’의 의미」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적으로 파악한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시계로 재는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뉘어져 끊임없이 흘러가버리는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것이지요. 이 시간은 자기 자식을 낳는 대로 잡아먹는 크로노스(cronos)처럼 우리의 삶이 가진 모든 것들, 즉 육체, 정신 그리고 삶의 의미와 가치까지 송두리째 파괴해버리지요. 그래서 크로노스라고도 부릅니다. 크로노스 안에서 우리의 삶은 단지 흘러가버리고 마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또한 그래서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지요.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이것이 바로 프루스트가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인 겁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 시간은 상기의 힘에 의해서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의 마음[靈魂] 안에서 나란히 겹쳐 놓여짐으로써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심리적이고 초자연적인 시간이지요. 이 시간은 흘러가버린 모든 것, 사라져버린 모든 것, 잃어버린 모든 것, 그리고 심지어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모든 것들까지 불러 모아 하나의 통일체를 만듦으로써 우리의 삶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주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카이로스(kairos)라고도 합니다. 역시 곧 알게 되겠지만 이것이 바로 프루스트가 말하는 “되찾은 시간”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와 같은 세 가지의 때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 셋은 영혼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 미래 일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는가? 그러나 마음속에는 여전히 미래의 것들에 대한 기대가 존재한다. 과거의 일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는가? 그러나 여전히 마음속에는 과거의 일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현재의 일들이 한순간 사라지므로 길이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연속성을 갖고 있고, 이것을 통하여 현재 있는 것은 없는 것이 될 수 없다.”



이처럼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부단히 흘러가는 자연적 시간을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로, 모두 현재 안에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크로노스의 무참한 파괴성을 극복하고 우리의 삶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되찾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상기의 힘이지요.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일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회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즉, 회상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시간”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이 긴 소설은 단지 그 일이 일어나는 과정을 서술한 것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특이한 것은,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회상은 언제나 현재의 감각과 과거의 어떤 기억이 “우연한” 사건의 일치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의지적 기억(mmoire involontaire)”이라고도 하지요. 『스완네 집 쪽으로』에 나오는 유명한 ‘마들렌 에피소드’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어느 겨울날 마르셀의 어머니는 추위에 떨고 있는 마르셀에게 따뜻한 보리수꽃차와 ‘마들렌’이라는 조그만 케이크 한 개를 권합니다. 그는 마들렌 한 조각을 차에 담근 뒤 차를 마시는데, 마들렌 부스러기가 뒤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일찍이 느껴 보지 못한 “강렬한 쾌감”에 빠집니다. 이 쾌감을 매개로 그는 오랫동안 잊었던 콩브레(Combray; 이 소설의 배경)에서의 일요일 아침을 회상하게 되지요. 차에 섞인 마들렌 부스러기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느꼈던 감각이, 오래 전 레오니 숙모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 갔을 때 그녀가 따뜻한 차에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을 담아 주었던 일을 기억하게 하고, 이어서 그 당시 콩브레에서 일어났던 모든 기억들을 연이어 상기시켜 준 겁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가 그의 저서 『시간과 이야기』에서 날카롭게 간파한 바에 의하면, 만일 주인공이 느낀 이 강렬한 쾌감이 단지 옛날의 기억들을 상기시켜주는 일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작하자마자 100 페이지도 안 지나서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프루스트는 이 대목에서 괄호를 열고 오직 주의 깊고 예민한 독자들에게만 전하는 메시지를 슬며시 써놓았다는 거지요. 바로 “(이 추억이 왜 나를 이처럼 행복하게 했는지를 아직은 모르고, 훨씬 뒤에야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되겠지만)”이라고 말입니다.

프루스트가 “훨씬 뒤에야”라고 뒤로 미루어 놓은 “그 이유”를 여기에서 미리 밝히자면, 그것은 강렬한 쾌감이 단지 옛날의 기억들을 상기시켜주는 일을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시간”으로 만드는 위대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잃었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자기도 모르게 되찾게 한다는 거지요. 이러한 사실은 이 소설의 맨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에서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때, 최소한 두 번 읽거나 아니면 『되찾은 시간』을 맨 먼저 읽고 다시 1권부터 읽기 시작하기를 권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프루스트에 있어서 회상은 -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의 힘과 마찬가지로 -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서 분산된 여러 가지 상들을 모아 그때까지는 감추어졌던 또는 잃어버렸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을 하지요. 앙드레 모로아(Andr Maurois)는 회상의 이러한 역할에 대해 입체경(立體鏡)이라는 환상적이고도 참신한 예를 들어 다음 같이 설명했습니다. 


“… 이때 시간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소위 입체경이라고 불리는 기구가 공간의 영역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이 장치에는 두 장의 영상이 나타나는데 이 두 영상은 같은 대상에 대한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동일한 영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두 개의 영상들은 각각 한 눈에 맞춰져 있고, 서로 동일하지 않다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두 개의 영상은 우리에게 뚜렷한 입체감을 주게 되는 것이다. 사실적 입체감을 갖는 하나의 대상은 우리의 양 눈에 각각 다른 영상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 입체경을 만들어내는 공간적 입체상의 환각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프루스트는 입체경이 공간 속에서 만들어 낸 것과 동일한 현상이 시간 속에서 ‘현재의 감각과 과거에의 상기(Sensation Prsente-Souvenir Absent)’의 일치로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일치가 시간적 입체상의 환각을 창조하고, 이로 인해 시간을 재발견하고, 또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입체경(立體鏡)이 같은 대상의 상이한 두 영상을 겹치게 하여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 “공간적 입체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회상은 상이한 두 시간, 곧 과거와 현재를 겹치게 하여 새로운 시간을 만들고, 이 시간 안에서 “시간적 입체상”을 “재발견하고 또 느끼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프루스트가 “되찾은 시간”이라고 이름 지은 이 “시간적 입체상”을 통해 삶의 진실에 대한 이해가 생긴다는 거지요. 바로 이런 의미에서 회상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작업이자 감추어졌던 진실을 발견하는 일이고, 그에 의한 구원을 이루는 힘이라는 겁니다.



공간의 병치 - 회상에 의한 새로운 공간



“공간의 병치”라는 말은 우리의 의식에 의해서 전혀 다른 두개 또는 그 이상의 공간이 나란히 겹쳐 놓이는 것을 뜻하는 베르그송의 용어입니다. 베르그송은 그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공간을 (…) 의식의 상태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방식, 즉 하나가 다른 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옆에 다른 것이 있는 방식으로 병치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시간을 공간에 투사하고, 지속을 연장으로 표현한다.”라고 주장했지요. “그러나 몇몇 철학적 문제들이 일으키는 극복할 수 없는 난관들은 전혀 공간을 차지 않는 현상들을 공간 위에 병치시키려고 고집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라며 의식의 순수한 지속을 위해서 이러한 공간의 병치를 파괴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전혀 반대의 입장을 취하지요. 이 점에서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특히 프랑스 평론가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베르그송적 소설”이 아닌 겁니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4권 『소돔과 고모라』를 베르그송에게 보내며 쓴 헌사 가운데에 “라이프니츠 이후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께 …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또 운율도 맞지 않게 ‘베르그송적 소설’이라 부르는 작품을 쓴 한 경탄자가.”라는 구절이 들어있는 것도 그것을 암시하지요.

프루스트에게 있어서는 회상에 의한 현재의 감각과 과거의 기억들의 일치, 곧 시간의 병치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간의 입체상이 은폐된 삶의 진실을 “재발견하고, 또 느끼게” 해주듯이, 회상에 의한 공간의 병치도 꼭 같은 일을 하지요. 예를 들어,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의 끝부분에서 주인공은 게르망트 대공의 집에서 빳빳하게 풀 먹인 냅킨으로 입을 닦다가, 그 풀 먹인 냅킨을 통해 곧바로 발베크 해안의 한 식당을 회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공간이 나란히 병치되면서 “견고한 게르망트 저택을 흔들어 놓으려 했다.”라고 주인공은 말하지요. 이 같은 방식으로 프루스트에 있어 회상은 단순히 서로 다른 두 시간을 겹쳐놓는 것뿐만 아니라,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장소도 나란히 놓는 역할을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의 ‘초자연적 공간’을 만들지요.

그러나 프루스트에게서 볼 수 있는 공간의 병치가 미술관에 걸린 다양한 그림들과 같이 이질적인 공간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의 모자이크처럼 각각 서로 다른 조각이 통일된 이미지나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지요. 우리는 한 탁월한 예를 『스완의 집 쪽으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해인가, 부활절 휴가를 우리 가족끼리 피렌체와 베네치아에 가서 보내기로 아버지가 결정했을 때, 피렌체라는 이름에는, 평소 도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삽입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도시의 진수라면 ‘지오또(Giotto)의 천재’일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을 부득이 봄의 향기로 수정시켜서, 하나의 초자연적인 도시를 낳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마치 지오또의 어떤 그림들 자체가 동일한 인물을 행동이 상이한 두 시점에서 묘사하여, 한 쪽에서는 침대에 누워있는가 하면, 다른 한 쪽에는 말을 타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듯이, 피렌체라는 이름은 나에게 고작 두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 중의 하나에서 나는 건물의 원형 천장 밑에서, 프레스코화를 감상하는가 하면 (…) 다른 하나에서는, 황수선, 수선화, 아네모네 등이 만발한 베끼오 다리를 (…) 재빨리 건너가기도 했다.”  


프루스트는 이 글에서 피렌체라는 이름 아래, 한 편에는 프레스코화를 감상하는 자신의 모습과 다른 한 편에는 봄꽃들이 만발한 베끼오 다리를 건너가는 자신의 모습을 병치시키지요. 다시 말해 주인공은 상기의 힘에 의해 피렌체라는 공간을 가장 자기다운, 곧 자신의 정체성에 적합한 하나의 초자연적 공간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풀레는 “프루스트의 창조적 사고는 그것이 창조하거나 상기하는 것에 형체를 부여하기 위해서, 극히 본능적으로, 두 개 내지 여러 개의 화면을 하나로 조립하는 형식을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했지요.

공간의 병치를 프루스트와 똑같은 의미로 사용한 영화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천재적 영화작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1932~1986)의 작품 『노스텔지아』이지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그토록 사랑한 두 공간이 병치되어 떠오릅니다. 즉, 이탈리아 토스카나 성당을 배경으로 러시아 시골농가 풍경이 펼쳐지고 그 안에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있는 장면이지요. 이곳은 러시아의 고향도 아니며,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도 아닌 전혀 새로운 초자연적 공간이지요. 그러나 그곳은 전혀 낯설지 않은 곳으로 그의 영혼 안에 언제나 있었고 그가 항상 그리던 곳이며 언제나 사랑하던 사람들이 있는 공간, 바로 그의 영혼의 고향[本鄕]인 겁니다. 영화는 주인공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하고 앉으면서 끝납니다. 평안 그리고 안식! 이어 하늘로부터 내리는 것은 순백의 눈, 곧 구원이지요.  

이렇듯 회상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은 자연적 공간이 아니며, 그렇다고 여기저기 분산된 공간을 무의미하게 모아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의 정체성에 합당한 각각의 서로 다른 공간들이 모여 마치 모자이크 그림처럼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완성하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불변하는 정체성을 되찾게 되는 거지요. 이 같은 의미에서 프루스트는 “장소는 사람이다.”라는 말도 했답니다.

그렇다면 프루스트가 말하는 회상! 이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방법이자, ‘잃어버린 공간’을 찾는 방법이고, 궁극적으로는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방법인 거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찾은 것이 바로 ‘진실한 시간’, ‘진실한 공간’, ‘진실한 자기’라는 겁니다. 이 점에서 프루스트의 회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의 힘과 다름이 전혀 없지요.  
 

되찾은 시간, 되찾은 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에는 맨 처음 1권에 나온 ‘마들렌 에피소드’에 비교할 만큼 중대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 다시 한번 나옵니다. 샤를뤼스 대공의 초청으로 대공의 저택 안마당에 들어가던 중 주인공은 어쩌다 울퉁불퉁한 포석(鋪石; 길에 까는 돌)에 발부리가 부딪히지요. 그때까지 자신의 문학적 재능이 고갈되었다는 생각으로 실망에 빠져 있었던 그는 발부리에서 느끼는 반듯하지 못한 포석의 감각이 베네치아의 선 마르코 성당 영세소의 포석의 감각으로 이어지며 갑자기 강렬한 쾌감을 맛보게 됩니다. 마들렌에 의한 콩브레 체험과 모든 점에서 비슷한 일련의 체험들이 그 동안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은 이번에야말로 그 이유모를 강렬한 쾌감의 원인을 찾고야 말겠다고 결심을 하지요.     

그리고 “주방에 인접한 작은 서재”에서 사색에 잠기는데, 그 사색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 “되찾은 시간”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잃었다가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즉 단순히 기억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되찾은 시간이 아니라, 우연히 체험하게 된 감각에 의해서 과거와 현재가 겹치면서 만들어진 “시간적 입체상”을 통해 삶의 진실을 되찾는 의미에서 “되찾은 시간”이지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되찾은 삶의 진실은 소설을 쓰는 겁니다. 

앙드레 모로아가 이름붙인 이 “시간적 입체상”을 프루스트는 “초시간적 존재”라고 불렀고, 리쾨르(Paul Ricoeur)는 “시간마저도 유예시키는 영원성”이라고 이라 표현했습니다. 모두 적절한 표현들이지요. “초시간적 존재”나 “시간마저도 유예시키는 영원성”이라는 말에는 ‘모든 것을 과거, 현재, 미래로 분산시켜 흘러가버리게 하는 물리적 시간[cronos]의 파괴적 질서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이 분명히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되찾은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 그때 자아의 내면에서 그러한 인상을 음미하고 있던 인간은 옛날의 어느 하루와 현재 속에서 그 인상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영역에서, 즉 그 인상이 갖는 초자연적 시간의 영역에서 그 인상을 음미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런 인간은 오로지 현재와 과거의 일종의 동일성에 의해서, (…) 다시 말하자면 시간의 밖에 존재할 수 있을 때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 시간의 질서에서 해방된 어느 한 순간이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시간의 질서에서 해방된 인간을 우리들의 내면에 재창조한 것이다.”


이때 프루스트가 말하는 “시간의 질서에서 해방된 인간”이란 회상의 의해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공간’, 그리고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되찾은 인간이지요. 한마디로, 구원받은 인간인 겁니다. 이 사람은 이제 더 이상 1권 『스완의 집 쪽으로』에서 묘사된 “자신을 열등한 존재, 우발적이고, 죽기 마련인 존재라고 느끼는”존재가 아니지요. 회상에 의해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인간의 자아는 풀레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내용이 없는 시간과 죽음에 떠맡겨진 현재의 자아”가 아니고 “본질적 자아, 시간과 우발성에서 해방된 자아, 근원적이면서도 항구적인 존재, 자기 자신의 창조자”인 겁니다.

프루스트는 그가 “무의식적 추억”이라고도 부르는 회상, 곧 상기의 힘이 가진 이러한 메커니즘을 켈트족의 신앙에서 배웠답니다. 켈트족들은 죽은 이들의 혼들이 나무나 돌 또는 짐승들 안에 들어가 사로잡혀 있다가, 어떤 사람이 우연히 그것에 손을 대거나 하면 깨어나서 그 사람을 부르는데 그 사람이 그 목소리를 알아들으면 해방되어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살아난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지요. 프루스트는 상기의 힘에 의해서 다시 깨어나는 ‘진실한 시간’, ‘진실한 공간’, ‘진실한 자기’가 바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 편지에 아래와 같이 쓰고 있지요.


“… 우리는 인생이 아름답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상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연히 옛날의 어떤 냄새를 맡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도취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이미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 하지만 그것은 그들을 상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득 고인의 낡은 장갑 한 짝을 보기라도 하면, 우리는 눈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일종의 은총, 무의식적 추억(rminiscence)이라고 하는 한 묶음의 꽃다발에 의해서 말입니다.”



회상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 은총임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부단히 흘러가며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풀레도 프루스트의 “무의식적 추억”은 기독교의 은총 같은 것으로 프루스트의 표현대로 삶의 “기반”이고, “깊은 광맥”이며, “아직도 의지하고 있는 견고한 지반”이며 “구원”이라고 강조하지요. 하지만 바로 이러한 사실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우리의 과거란 언젠가 회상에 의해서 시간의 입체상으로 다시 만들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미완성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프루스트는 3권 『게르망트 쪽』에 이렇게 쓰고 있지요.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거의 유익하게 이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름날의 황혼이나, 겨울의 때 이른 밤에는, 평화나 기쁨이 언제까지 깃들여 있을 것같이 생각되는 시간이 ‘미완성’인 채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시간을 결코 잃어버리고 만 것은 아니다. 미구에 다시 새로운 쾌락의 순간이 노래할 때면, 그 순간 또한 마찬가지로 가느다란 선이 되어 사라지겠지만, 미완성의 시간은 거기에 풍요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근거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회상에 의해서 언젠가 그 진실한 모습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미완성의 어떤 것이라는 겁니다. 과거는 현재의 어느 시점에서 드러날 진실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이고, 현재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완성될 진실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유익하게 이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라도 회상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발견해내야지 않을까요? 잃어버린 시간, 공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삶을 결국은 허무하게 만드는 시간이 파괴한 모든 것들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강렬한 쾌락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고 존재에의 용기를 다시 얻어야 하지 않을까요?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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