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내 친구 명훈이

  • 작성일 2006-06-30
  • 조회수 598




 

 


마을의 거의 모든 집들이 초가집이었던 어린 시절, 명훈이는 나의 단짝이었다. 우리 집 바로 옆집 아이였는데, 엄마들끼리 친해서 우리는 갓난아기 때부터 가까이 지냈다. 그래서 형제처럼 붙어 다녔으며, 그런 우리를 이웃 사람들도 쌍둥이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내가 기억하는 명훈이는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달고 있고, ‘요정’ 얘기를 자주 하는 아이였다. 나는 미소가 없는 녀석의 얼굴을 상상할 수가 없다. 어쩌면 정말로 늘 웃은 게 아니라 단지 웃는 것처럼 보이는 인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가 늘 웃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기분이 상해 있을 때 그를 만나면 오히려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건 잠시 동안만 그런 것이었다. 녀석과 함께 있으면 결국엔 그의 미소 띤 얼굴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명훈이의 요정 이야기를 반신반의했다. 녀석은 혼자서 방글방글 웃으며 중얼거릴 때가 있었는데, 가만히 지켜보다가 무얼 하느냐고 물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요정과 얘기하고 있다고 했다. 녀석은 갑자기 도랑으로 뛰어 들어 옷을 다 버리거나, 나무 위로 기어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해 매달려 있기도 했는데, 그럴 때도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요정을 따라가느라고 그랬다고 대답했다.

어른들은 그런 녀석을 이따금 혼을 내곤 했다. 사고를 친 것도 문제지만,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 요정 핑계를 대는 게 더 나쁜 거라고 했다. 나는 그런 명훈이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보지 못하는 요정을 볼 수 있는 그가 부러워서 갑작스런 그의 행동을 따라하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명훈이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바로 따라하곤 했다.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였다. 개학을 하고 며칠 뒤였는데 아직도 청소니 뭐니 해서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때였다. 몇 시간 수업을 하고 청소를 한 뒤 우리는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명훈이와 나는 교실 뒤편 마룻바닥에서 유리구슬을 굴리며 놀고 있었다.

그 구슬은 여름방학 막바지에 도시에 사는 사촌 형이 놀러왔다가 주고 간 것으로 황소 눈알처럼 큰 것이었다. 명훈이는 내가 그 구슬을 가지게 된 걸 무척 부러워했다. 아마도 내가 녀석의 요정에 대해서 부러워했던 것만큼이나 부러워했던 것 같다.

나도 나 혼자만 그런 멋진 구슬을 가지게 되어서 미안했다. 하지만 마음만 안타까울 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구슬을 하나 더 구할 수도 없었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하지만 나의 구슬을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둘이서 자주 그 구슬을 가지고 노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 날도 그렇게 놀고 있었다.

나는 방글방글 웃고 있는 명훈이를 향해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을 굴렸다. 그러면 명훈이는 쪼르륵 소리를 내면서 굴러오는 그것을 잡아 보물처럼 손에 꼭 쥐었다가 다시 내게로 굴렸다. 그 단순한 놀이가 왜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우리는 지치지도 않고 구슬을 굴리고 또 굴렸다. 아이들이 부러운 눈으로 우리가 노는 걸 구경하고 있었으니 재미있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굴린 구슬이 다른 곳으로 굴러가더니 그만 탁구공만한 옹이 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어리벙벙했다. 명훈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옹이 구멍 쪽으로 갔고, 구경하던 아이들은 고소해하며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나는 절망적인 사태가 발생했음을 깨달았다. 나는 명훈이처럼 무릎으로 후다닥 기어서 구슬을 삼켜 버린 구멍 쪽으로 갔다. 그리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여전히 얼굴에 밝은 미소를 달고 있는 명훈이를 옆으로 밀쳐낸 뒤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먼지 냄새와 찬바람만 솔솔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자 어두컴컴한 흙바닥이 보였고, 거기에 떨어져 있는 온갖 것들, 즉 지우개, 몽당연필, 공처럼 말린 먼지 덩어리, 머리카락, 휴지 조각 등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구슬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엉엉 울었다. 울면서 이제 구슬과는 안녕이로구나 생각했다.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설사 보인다고 해도 그걸 꺼낼 방법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서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참 더 구멍을 들여다 본 뒤 눈을 뗐다. 명훈이가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훈이가 물었다.

「찾았어?」

나는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명훈이가 구멍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는 왼쪽 눈 오른쪽 눈 번갈아 가면서 들여다보았다. 명훈이는 구경하던 아이들이 반쯤 떨어져 나가고 남아 있던 아이들마저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빈정거릴 때까지 계속 들여다보았다. 그러던 중에 평소 우리 반의 모든 싸움을 ‘독점’하고 있던 싸움꾼 박한구가 다가왔다.

그가 말했다.

「야, 이운상.」

「왜?」

「야, 너, 구슬 어쩔 거야?」

녀석은 내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약을 올리려고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어쩌긴, 그냥 버린 셈 치지 뭐.」

나는 녀석을 즐겁게 해주기 싫어서 그까짓 구슬 따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자 녀석의 얼굴에서 실망의 기색이 무지개처럼 떠오른다 싶더니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던 명훈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내달렸다.

나는 명훈이가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또, 왜 그러는지 알고 싶은 마음도, 그걸 알려고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명훈이가 또 요정을 쫓아가나보다고 생각하여 나도 뒤따라 내달렸겠지만 구슬을 잃어버린 마당이라 그런 걸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내 가방을 끌어안고 벽에 기대앉았다. 그리고 다른 반 아이들은 다 갔는데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담임 선생님을 욕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만 빨리 왔으면 구슬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얼마 뒤였다. 화단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교실에 있던 아이들이 창턱에 배를 대고 바깥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귀찮아서 가만히 있자 박한구가 명훈이가 구슬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요정이다! 하고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리고 얼른 밖으로 나가 보았다. 아이들이 우리 교실 창 아래 시멘트벽에 나 있는 까만 사각형 구멍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환풍구였는데, 평소 거기에 붙어 있던 방충망처럼 생긴 철망 틀이 구멍 옆에 놓여 있었다.

「뭐야?」

나는 모여 있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명훈이가 저기로 들어갔어.」

누군가가 말했다.

명훈이와 나는 늘 붙어 다니다 보니 쌍둥이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생김새는 딴판이었다. 나는 보통보다 조금 컸던 반면 명훈이는 작고 바싹 마른 아이였다. 하지만 아무리 홀쭉해도 그 구멍으로 들어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저렇게 작은 구멍으로 어떻게 들어가?」

누군가가 대꾸했다.

「벌써 들어갔다니까.」

순간, 나도 그 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구슬도 구슬이지만 요정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즉시 화단을 건너 그 네모난 구멍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뻗어 안으로 넣으며 상체를 쭉 들이밀었다. 하지만 어깨가 걸려서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그 상태로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먼지 냄새만 지독하게 날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밖에서 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뒷걸음질을 쳐서 꽉 낀 어깨를 빼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눈부신 햇살이 내 얼굴로 쏟아졌다.

나는 화단에 서서 기다렸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조금 뒤 마침내 네모난 구멍에서 명훈이의 머리가 보였다.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명훈이는 온몸에 먼지와 거미줄을 뒤집어쓴 채 무사히 구멍을 빠져나왔다. 녀석은 손에 구슬을 꼭 쥐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어떻게 찾았어?」

명훈이가 자랑스레 말했다.

「요정이 가르쳐 줬어.」

「요정이 어디 있는데?」

「저 쪽으로 날아갔어.」

명훈이는 파란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명훈이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런 명훈이에게 화가 났고, 그 놈의 요정에게도 화가 났다. 명훈이는 구슬이 옹이 구멍으로 들어가자 고소해 하며 웃었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교실로 갔다. 나는 완전히 뒷전이었다.

뒤늦게 교실로 들어가니 아이들이 여전히 명훈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명훈이는 내가 나타나자 나에게 구슬 굴리기를 하자고 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하지만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자꾸만 이 구슬은 원래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명훈이가 자기 것인 양하는 게 싫었다.

몇 번 구슬을 굴리던 나는 내 손에 들어온 구슬을 더 이상 명훈이에게 굴려 보내지 않고 꼭 쥐었다.

내가 말했다.

「그만 하자.」

「왜?」

「이거 내가 가져 갈 거야.」

명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버렸다고 했잖아?」

「그래도 원래 내 거야.」

명훈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내 놔.」

「싫어.」

「내가 꺼내왔으니까 이제 내 거야.」

「아니야. 내 거야.」

말다툼이 계속되었다. 나는 명훈이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내 입으로 구슬을 버렸다고 했으니 명훈이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찾아낸 걸 내가 다시 가지는 게 양심에 걸렸지만, 원래 내 것이었던 걸 명훈이가 가지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 때 박한구가 옷소매로 흘러내린 콧물을 닦으며 다가왔다.

그가 말했다.

「야, 그따위 구슬 가지고 친구끼리 싸우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나 같으면 차라리 돌멩이로 콱 찍어서 깨 버리겠다.」

아이들이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었다. 명훈이에게 주기도 싫지만 내가 가지는 것도 찜찜하니 차라리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교실에는 돌멩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옹이 구멍으로 구슬을 다시 집어넣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내가 못된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내가 악당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슬프고 무서웠지만 이제 악당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명훈이가 더욱 미워졌다.

나는 명훈이에게 말했다.

「야, 네가 가지고 싶으면 다시 꺼내 와.」

「싫어.」

「꺼내 와서 니 거 해.」

「싫어.」

「네 구슬이라고 했잖아.」

「싫어.」

다시 박한구가 나섰다.

「야, 그러지 말고 한 판 붙어라.」

녀석은 그러면서 앉아 있는 나의 등을 떠밀어 마루바닥에 미끄럼을 태워 명훈이와 박치기를 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명훈이가 나를 밀어냈고, 나도 명훈이를 밀쳤다. 아이들이 즐거운 듯 까르르 웃어댔다.

악당 박한구가 외쳤다.

「야, 계집애들처럼 밀기만 하지 말고 주먹으로 팍 쳐봐.」

그 놈은 신이 나서 나와 명훈이 둘레를 돌며 우리의 등을 떠밀어 더 세게 부딪치게 했다. 나는 울고 싶었다. 나는 그 놈이 진짜 악당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악당 놈이 아니라 명훈이랑 계속 밀치며 씩씩거렸다. 나는 흥분해서 항상 딸딸딸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선생님의 슬리퍼 소리도 듣지 못했다.

선생님이 호통을 쳤다.

「아니, 너희들 뭐 하는 거냐?」

아이들은 이미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이 녀석들, 쌍둥이처럼 지내더니 싸우고 있네.」

선생님은 농사도 짓는 50대 남자 분이었는데, 한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나와 명훈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하기야 원래 형제간이 제일 많이 싸운다마는…….」

선생님은 우리 두 사람의 귀를 잡고 복도로 끌고 가더니 구석에 꿇어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악당이 혀를 내밀며 놀렸다. 나는 그 놈이 미워 죽을 것 같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벌을 서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해도 그 놈을 이길 자신도 없었다. 아이들이 다 떠난 뒤 선생님은 우리에게 와서 꿀밤을 먹였다.

선생님이 말했다.

「내가 올 때까지 손들고 기다려라. 알았지?」

「네.」

우리는 함께 대답했다. 선생님은 딸딸딸 슬리퍼 소리를 내면서 멀어져갔다. 복도가 정적에 잠겼다. 우리 반이 가장 늦게 끝나서 그 복도로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다. 명훈이는 말없이 팔을 높이 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이 복도 저 끝에서 사라진 순간 팔을 내려 버렸다.

명훈이는 계속 팔을 들고 있었다. 녀석이 정말 바보 같은 애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선생님을 속이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명훈이 때문에 내가 못된 놈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녀석에게 너무너무 미안했다. 그냥 구슬을 줄걸 그랬다고 후회되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입 속으로 열 번쯤 연습을 한 뒤에 막 그 말을 하려고 하는데, 명훈이가 허공을 보면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왜 웃어?」

「요정이야.」

「뭐?」

「내 팔을 붙잡고 있어.」

「정말이야?」

「응.」

「어떻게 생겼는데?」

「못생긴 쬐끄만 남자애야.」

나는 명훈이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귀 아래로 처져 있던 팔이 다시 위로 쭉 뻗어 있었다. 나는 요정의 도움을 받고 있는 명훈이가 부러우면서 다시 화가 치밀었다. 나는 명훈이가 쳐들고 있는 손을 보았다. 그러나 요정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 뒤에 명훈이는 졸기 시작했다. 나도 배가 고프면서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맛있는 밥을 먹는 상상을 하면서 꾸벅꾸벅 졸았다. 명훈이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새근새근 소리를 냈다. 그래도 팔은 위로 쭉 쳐들고 있었고,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졸린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요정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곧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다.

명훈이와 나는 한 상 근사하게 차려 놓고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왕구슬도 한 바구니나 있었다. 한참 신나게 먹고 있는데 딸딸딸 슬리퍼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숟가락질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명훈이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계속 먹고 있었다. 나는 명훈이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야, 선생님이야. 손들고 있어야지, 라고 나는 말했다. 명훈이는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아이고 요놈들, 아직도 손들고 있네.」

나는 정신을 차렸다. 선생님이었다. 나는 얼른 팔을 들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위로 팔을 쭉 뻗고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며, 팔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주고 있지는 않았다. 나보다 늦게 정신을 차린 명훈이가 웃는 얼굴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말했다.

「아이고, 이런 미련한 놈들을 봤나. 팔 그만 내리거라.」

명훈이와 나는 팔을 내렸다.

「애들아, 미안하다. 선생님이 그만 깜빡했다. 어디 아픈 데 없냐?」

명훈이가 말했다.

「괜찮아요.」

나는 팔꿈치로 몰래 명훈이의 옆구리를 쳤다.
내가 말했다.

「어깨가 빠질 것 같아요, 선생님.」

선생님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그렇겠지. 이거 내가 미안해서 어쩌나? 자자, 어서 일어나거라.」

선생님은 손수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리고 교무실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데려 갔다. 아늑하게 꾸며진 방이었는데, 철제 캐비닛과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의자에 앉히고 캐비닛에서 빵과 사이다를 꺼냈다. 우리는 그것을 먹었다. 우리는 팥이 들어 있는 빵과 크림이 들어 있는 빵을 각각 두 개씩 먹었다.

선생님이 조심스레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우리는 빵을 먹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선생님이 다시 말했다.

「얘기하면 아마 걱정하실 거야. 그렇지 않냐?」

내가 말했다.

「예, 그래요. 그런데 선생님 이 빵 대개 맛있는데요?」

나는 크림빵 껍데기를 가리켰다.

「응? 아, 그래? 어디 보자.」

선생님은 캐비닛에서 크림빵 두 개를 더 꺼내 명훈이와 나에게 하나씩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걸 먹는 동안 또 어머니 아버지에게 벌 선 얘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명훈이도 방글방글 웃으며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우리가 인사를 하자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는 맑은 가을 햇살이 떨어지고 있는 운동장을 걸어갔다.

내가 말했다.

「부탁 하나 해도 돼?」

「뭔데?」

「다음에 또 요정 만나면 박한구 한 방 갈겨 달라고 해.」

명훈이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가 말했다.

「알았어. 대갈통을 팍 갈겨 달라고 할게.」

 

 

 


우리는 손을 잡고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 날 이후 우리는 다시는 싸우지 않았던 것 같다. 사소한 다툼이야 쉼 없이 있었지만, 서로의 우정이 심각한 위기에 처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후 함께 보낸 세월이 그다지 길지는 않았지만.

가을이 깊어가면서 이웃집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공단 조성으로 마을이 철거에 들어간 것이었다. 명훈이와 나는 매일 짐을 잔뜩 실은 소달구지와 리어카를 따라 동네 어귀까지 가곤 했다. 그리고 겨울 내내 틈만 나면 빈집들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나는 단 한 번만이라도 녀석처럼 요정을 보고 싶었지만 내 눈에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봄이 되었을 때 우리는 헤어져야만 했다. 명훈이네는 포근한 산들바람이 불던 어느 날 마을을 떠났다. 서로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던 게 기억난다. 우리 어머니와 명훈이의 어머니도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명훈이네는 트럭을 이용했기 때문에 마을 어귀까지 따라갈 수도 없었다.

명훈이는 식구들과 함께 짐 위에 올라타고 있었는데,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손을 흔들었다. 명훈네 식구들 모두가 손을 흔들었고, 배웅하려고 모여 있던 사람들도 손을 흔들었다. 트럭은 곧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속도를 내어 마을을 벗어나 버렸다. 나는 명훈이네가 어디로 이사를 가는지도 몰랐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자주 명훈이를 생각했다. 존재의 의문에 사로잡혀 밤마다 별을 보며 우주의 끝에 대해 고민하던 사춘기 시절에도, 20대에도, 30대에도, 대체로 외롭고 쓸쓸할 때는 늘 그를 생각했다. 사람들이 ‘진정한 친구’ 운운할 때도 나는 그를 떠올리며 그가 내 곁에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나는 나이를 먹은 명훈이를 상상할 수 없었다. 내가 그를 생각하면 언제나 잠들어 있을 때도 웃고 있는 듯이 보였던 그 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어른이 된 그가 요정처럼 짠, 하고 내 앞에 나타나는 광경을 장난스레 몽상할 때도 있었지만, 내 마음에 살아 있는 어린 그의 영상만으로도 그는 내게 이미 요정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내 앞에 나타났다. 외환위기로 파산하여 고통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는데, 내가 사람에 대한 상처와 회의로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어른이 된 명훈이가 정말 요정처럼 「세에타악~!」 하고 외치며 나를 찾아왔다.
아직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이른 봄날이었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목련이 활짝 피어 있는 어느 조촐한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그 날 나는 늦게 눈을 떴다. 아이는 학교에 가고 없었고, 아내도 일하러 나가고 없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울적한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때 세탁물을 수거하는 남자의 그 외침이 들려왔다. 슬픔이 묻어 있는 듯한 묘한 곡조의 외침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마치 슬픈 음악이나 누군가의 사연을 듣듯이 그 소리를 들었다. 그는 복도 입구로 들어와서 먼저 왼쪽 끝까지 갔다가 우리 집이 있는 반대쪽으로 왔다. 그리고 내가 누워 있는 방의 창가를 지나 복도 끝까지 들어갔다가 돌아나갔다. 나는 그의 외침소리가 점점 멀어지다가 마침내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귀를 기울였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나는 이불 속에서 그 목소리를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며칠 뒤 그가 복도 안까지 들어갔다가 돌아나간 뒤에 살짝 문을 열었다. 한쪽 팔에 세탁물을 걸친 자그마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 또래인 듯했는데, 작고 축 처진 어깨가 연민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세에타악~!」 하고 외치는 소리가 슬프게 들렸구나 싶었다.

나는 문을 닫고 잠시 멍청하게 서 있다가 맡길 만한 세탁물을 몽땅 꺼내서 입구에 쌓아 두었다. 그리고 다음날 같은 시각, 그가 막 우리 집을 지나칠 때 품에 세탁물을 가득 안고 어깨로 밀어서 현관문을 열었다. 그가 돌아섰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그는 나를 한 번 흘끗 본 뒤 바로 내가 잔뜩 껴안은 세탁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양쪽 팔에 꽤 많은 세탁물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능숙하게 내 품에 있던 세탁물을 하나씩 가져갔다. 그리고 요금을 얘기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처음처럼 다시 나를 흘끗 본 뒤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세에타악~!」 하고 외치며 돌아섰다.

그는 명훈이였다.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라 있고,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지만,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었다. 그가 내 품에서 세탁물을 하나씩 꺼낼 때 나는 이미 그를 알아보았다. 나는 깜짝 놀랐고, 바짝 긴장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있었다. 이 감정은 쉽게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인데, 어쩌면 나는 그의 초라한 행색에 실망했던 것 같다. 명훈이를 보고 무척 놀랐을 그 순간의 나를 위해 변명이 허락된다면, 나는 그가 그렇게 뜻밖의 상황에서 어린 시절 단짝 친구인 나를 만나서 자존심이 상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배려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마음에 머물면서 내가 외롭고 힘들 때마다 맑은 웃음으로 위로해 준 그를 분명 피하고 싶어 했다.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 마음이 내 마음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나는 내 속에 있는 그런 마음에 분노했다. 나는 그 분노로 며칠간 밤잠을 잘 자지 못했으며, 그도 나를 알아보았으나 내가 아는 체하지 않아서 상처를 받은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며칠 뒤였다. 명훈이가 세탁물을 가져 왔을 때 나는 돈을 치르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미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음에도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피곤한 눈길로 잠자코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내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리다가 내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역시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다시 말했다.

「기억 안 나?」

「글쎄…….」

「우리 어릴 때 같은 마을에서 살았는데.」

「그래?」

「공단 때문에 없어진 마을.」

먼 곳을 생각하는 듯 그의 눈빛이 잠시 아득해졌다.

내가 말했다.

「학교 뒤에 길다란 소나무 밭이 있었고.」

그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시 말했다.

「너네 집은 초등학교 3학년 봄에 이사 갔잖아.」

우리 집도 한 달 뒤에 이사를 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아아, 알겠다.」

「알겠어?」

나는 조급하게 물었다.

그가 말했다.

「이운상. 그래, 알겠어.」

「정말이야? 기억나?」

「응.」

우리는 비로소 악수를 했다. 그러나 그가 별로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 속에서 터져 나오려고 대기하고 있던 감정을 급하게 주저앉혀야 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맥이 빠졌다.

내가 말했다.

「그래, 어떻게 지냈어?」

「뭐, 그럭저럭 살았지. 이 일 저 일 하면서.」

「난 얼마 전에 여기로 이사 왔어.」

그는 미소 띤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당혹스럽고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고 있었다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나는 내심 명훈이가 펄쩍펄쩍 뛸 정도로 반갑게 나를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가 말했다.

「들어와서 차 한 잔 할래?」

「아니야, 지금 바쁜 시간이야.」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려.」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 책에 사인을 해서 들고 나가 그에게 주었다. 명훈이는 낯선 물건을 마주친 사람처럼 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뒤 입꼬리가 약간 끌려 올라가게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지에 적혀 있는 내 이름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고마워.」

「고맙긴.」

「잘 읽을게.」

「다음에 시간 있을 때 한 번 찾아와.」

「그래, 그러지.」

「옛날 얘기 좀 하자.」

「음. 그래.」

명훈이는 돌아서서 다시 「세에타악~!」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의 외침 소리는 아래로 한 층씩 내려갈 때마다 점점 약해져가더니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나는 현관을 열고 나가 난간에 배를 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양팔에 세탁물을 두르고 어린이 놀이터 옆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담배를 피우며 한참 서 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아침마다 그의 외침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고, 변함없이 슬픔이 묻어 있는 듯한 나른한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가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오늘은 우리 집 벨을 누르지 않을까 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매번 나의 기대를 배반했는데,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멀리서 「세에타악~!」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와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가 우리 집 벨을 누른 것은 이 주일도 더 지났을 때였던 것 같다. 문을 열고 보니 그가 세탁물을 팔에 두른 채 웃고 있었다. 그는 이전보다 훨씬 생기가 있어 보였다. 어린 시절의 명훈이와 더욱 가까워진 환한 미소 때문인지, 투명한 먼지처럼 얼굴에 잔뜩 묻어 있던 피곤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책 잘 읽었어. 재미있더라.」

「그래?」

「응. 웃기기도 하고.」

「재미있게 읽었다니 고맙네.」

그는 씩 웃었다.

「내 기억으로 넌…….」

명훈이는 말을 고르려는 듯 머뭇거렸다. 나는 긴장한 채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확실한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그가 다시 말했다.

「넌, 별로 웃기는 애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뜻인가?

「내가 그랬나?」

내가 말하자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다만…….」

실망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내가 말했다.

「들어올래? 오늘은 시간 좀 있어?」

「아니야. 이 시간엔 항상 바빠. 책 잘 읽었다고 얘기하려고.」

「응. 그래.」

「그럼 갈게.」

「그래.」

그가 돌아섰다. 그 순간 나는 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그가 돌아보았다.

「왜?」

「너, 혹시 구슬 생각나?」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말했다.

「무슨 구슬?」

나는 쓸쓸한 마음을 감추려고 웃어 보였다.

「아니야. 됐어. 바쁠 텐데 어서 가봐.」

「그래. 고마워.」

잔잔한 슬픔이 안개처럼 내 속에서 피어올랐다. 나는 집으로 들어와 커피를 마시며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들었다. 감미로우면서도 울적한 첼로 선율이 내 속의 슬픔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 선율을 타고 이런저런 상념을 쫓다 보니, 요정에 대해 물으면 명훈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다음에 또 얘기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걸 물어볼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나는 명훈이에게 요정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나는 그걸 물어볼 수 없었다. 또 다시 작별이 찾아왔던 것이다. 얼마 뒤 나는 완성한 장편소설의 인쇄본을 들고 최종 검토를 하러 지방에 내려가 있었는데, 한 달을 보내고 올라오니 명훈이는 이미 우리 동네를 떠나고 없었다.

어쩌면 떠나기 전에 명훈이가 우리 집 벨을 눌렀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다. 그가 우편함 속에 떠난다는 편지를 남긴 걸 보면 그가 나를 찾았을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그렇게 편지만 남기고 떠나기로 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운상아,’ 라고 그가 말했다.

‘까마득하게 긴 세월이었는데, 만나자마자 또 이별이네. 네가 이사 오기 전부터 다른 곳으로 떠나려고 준비 중이었다. 마침 인수할 사람이 나와서 급하게 정리했다. 나는 서울을 떠난다.
고맙다. 까마득한 옛날의 일인데, 나를 알아봐 줘서 고마웠어. 따뜻하게 대해 준 것도 고맙고. 네가 나를 어떤 아이로 기억하고 있는지 듣고 싶었지만 그냥 그대로 두는 게 옳다 싶어서 묻지 않았다.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꿈같다. 아득하고 캄캄하고 너무 멀어서, 그 세월을 내가 살아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때도 있더라. 그게 인생이겠지. 그렇지?
잘 지내라. 언젠가 또 만나자. 명훈이가.

P.S. 나뭇잎은 책갈피에 넣어 둬 봐. 가을쯤 되면 아주 멋있게 되어 있을 거야. 낙엽보다 더 낙엽처럼 보일 거야.’

그게 무슨 나무의 잎인지 모르겠다. 아이 손바닥만한 크기에 아주 얇고 잎맥이 무척 많은 것인데, 나는 지금도 모른다. 굳이 그 방면의 전문가가 아니라 해도 나무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그것을 주었고 내가 그것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면 그 나뭇잎 세 개가 그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여전히 명훈이를 생각하고 있다. 슬플 때, 외로울 때, 쓸쓸할 때, 나는 언제나 그를 떠올린다. 달라진 게 있다면 방글방글 웃고 있는 어린 얼굴과 더불어, 안경을 끼고 더부룩하게 수염을 기른 나이든 얼굴도 생각한다는 것이다. 낙엽보다 더 낙엽 같은 세 개의 나뭇잎을 보기도 하면서. 때로 그가 바로 요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몹시 센티멘탈해졌을 때 떠오르는 생각일 뿐이다.(*)


==========================================================================
<필자소개>



이상운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장편소설 '픽션클럽'으로 대산창작기금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탱고','누가 그녀를 보았는가', '내 마음의 태풍', 엽편소설집 '달마의 앞치마' 등을 출간했다. 장편소설 '내 머릿속의 개들'로 제11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했다.  



<작가후기> 


"친구는 또 하나의 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울처럼 나를 볼 수 있게 해주고, 나의 빈 부분들을 채워주고, 내가 나눠주고 싶어하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주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눈에 보이는 친구만이 친구는 아닙니다. 기억에만 있는 어린 시절의 아이들도 친구일 수 있고,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 속의 인물도 친구일 수 있고, 내가 되고 싶은 미래의 내 모습도 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기를 권합니다. 하지만 새 친구를 사귀더라도 옛 친구를 버리지는 마세요. 전자가 은이라면, 후자는 금입니다."


추천 콘텐츠

나는 광대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