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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이전(娘伊傳)

  • 작성일 2006-07-25
  • 조회수 519


 

 한성부 좌포도청에 다모가 여럿이 있는데 그 중에 널리 이름을 떨쳐 도적들이 저승사자를 만난 듯이 두려워하는 다모가 낭이(娘伊)라고 한다. 나이는 방년 23세요, 본관은 안동 장씨(張氏)다. 15세에 혼례를 올렸으나 소사(召史:과부 또는 부녀자의 통칭)가 된 지 여러 해로 혼례를 올린 남자가 어디 사람인지, 성명이 무엇인지, 세세한 사정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다모로서 드물게 무예가 출중하고 살인범 검거를 잘하여 좌포도대장 이삼의 오른팔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여 장안에 소문이 파다했다. 일설에는 검계(劍契:조선시대 조직폭력)를 소탕했던 전 포도대장 장붕익의 서녀라는 말이 있으나 내력은 알 길이 없다.


 하루는 정조 연간에 한성부 남부(南部:조선시대 한성을 네 구역으로 나눈 행정 구역)에서 우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발견되었다. 남부 관령(管領:남부의 우두머리)은 실종 신고가 들어와 있던 김말손의 시체가 아닌가하여 의심했다. 며칠 전 김말손의 부인 이 소사가 김말손이 실종되었다고 남부에 신고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물이 깊어서 사람이 죽어 있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부 관령이 한성부에 신고를 하여 포도청에서 검시를 하기 위해 종사관 신광호가 포교 김영달, 의생(醫生:검시의), 오작사령(시체를 만지는 포도청 노비), 다모 낭이를 데리고 달려왔다.

“아직도 시체를 꺼내지 않았으니 어떻게 검험을 하는가?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는가?”

종사관 신광호가 우물을 둘러싸고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거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나리, 우물이 깊어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낭이가 우물을 내려다보아도 우물의 깊이가 열 길이 넘어서 사람의 시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분별할 수 없었다.

“속히 밧줄을 만들어 시체를 꺼내도록 하라.”

신광호가 지시를 내리자 마을 사람들이 밧줄을 만들어 우물에 내리고 들어갈 준비를 했다.

“나리, 우물에 빠진 사람은 쇤네의 남정네입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에게 섞여 우물에 와 있던 이 소사가 말했다. 이 소사는 20대 후반의 여인으로 오종종한 얼굴에 푸른 멍이 있었다. 낭이는 이 소사의 푸른 멍이 맞은 상처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시체의 신원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언제 행방불명이 되었는가?”

“사흘 전입니다.”

이 소사는 마을 사람들이 밧줄을 타고 내려가 김말손의 시체를 올려 보내자 통곡을 하고 울었다. 남부 관령과 포도청 종사관인 신광호가 오작사령의 도움을 받아 무원록에 의해 철저하게 검시를 하자 실인(實因:사망원인)이 두개골 파열이었다. 무엇인가 묵직한 흉기로 뒤통수를 때려서 살해한 뒤에 우물에 버린 것이다. 신광호가 직접 시장(屍帳:검시기록)을 마치고 시친(屍親:시체의 가족)과 간증(干證:증인)들을 불러 차례로 신문했다.

“종사관 나리, 범인은 이 소사입니다.”

다모 낭이가 신광호에게 낮게 말했다.

“어째서 범인이 이 소사라는 것인가?”

신광호가 고개를 들고 낭이를 쳐다보았다.

“첫째는 이 소사의 통곡에 진정이 들어 있지 않아 사람들을 힐끔거리면서 우는 시늉을 하고 있고, 마을 사람들은 우물이 너무 깊어서 우물에 있는 시체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다고 했는데, 이 소사 홀로 자신의 남편이라고 말하였으니 이 소사가 죽여서 우물에 버렸기 때문에 물 속의 시체가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버리지 않았다면 어찌 저 깊은 우물 속의 시체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신광호는 무릎을 치고 이 소사에게 형신(刑訊:정황이 뚜렷한 죄인에게 곤장을 때리면서 하는 신문)을 가하자 이 소사가 장(杖)) 5대를 맞더니 자신이 목침으로 때려 죽였노라고 실토했다. 김말손은 평소에 술을 마시면 주사가 심했는데 그날도 이 소사에게 마구 주먹질을 하고 젖먹이 어린애를 발로 차서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옆에 있던 목침을 들어 김말손을 때렸는데 죽었다는 것이었다.

“낭이는 과연 우리 좌포도청의 명포교다!”

좌포도대장 이삼이 크게 기뻐하면서 엽전 열 냥을 상으로 내렸다.


 하루는 다모 낭이가 변복을 하고 순찰을 도는데 동부 이화동 월천곡 주민 김오선이 소(牛)를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살해되었는데 김오선의 아들 김원춘이 관에 알리지 않고 장사를 지냈다는 소문이 저자거리에 낭자했다. 낭이가 김오선의 집에 가서 염탐을 하자 김오선이 죽은 것도 사실이고 이미 장례를 지내 매장까지 마친 상태였다.

“부친이 강도를 당해 죽었다고 하는데 어찌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까?”

낭이는 포교 김영달과 함께 다시 김오선의 집에 가서 아들 김원춘에게 물었다. 김원춘은 20대 초반으로 눈이 부리부리했다.

“아버님이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신고를 해야 하는 거요?”

김원길이 낭이를 아니꼬운 듯이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반문했다. 

“부친이 소를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강도를 만난 것이 아닙니까?”

“아버님은 오래전부터 가슴과 배에 병이 있었소. 소를 사가지고 오다가 갑자기 병이 발작하
여 구하지 못한 것이오.”

김원춘은 부친 김오선이 살해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낭이는 포교 김영달과 함께 마을의 여러 사람들에게 탐문을 했으나 한결같이 강도를 만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낭이야, 우리 소문만 듣고 공연히 헛다리짚은 거 아니야? 하루 종일 발품만 팔았지 않니?”

김영달이 지친 표정으로 개울둑에 주저앉아 투덜거렸다.

“아저씨, 소문이 공연히 날 리가 있어요? 뭔가 분명히 있어요.”

낭이도 김영달 옆에 주저앉아서 다리를 주물렀다. 음력 8월, 절기는 이미 초가을로 들어서 있었으나 한낮의 볕이 여전히 따가웠다. 낭이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소매 끝으로 닦았다.

“이제 그만 가지.”

“아저씨, 김오선이 죽은 곳이나 살펴보고 가요.”

“벌써 점심때가 한참 넘었어. 배는 채워야 할 거 아니냐? 가족이 강도 살인을 당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뭣하러 사서 고생을 하냐?”

“가는 길이잖아요? 일어나요.”

낭이는 김영달이 배가 고프다고 투덜거리자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도 김영달은 김원춘의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어디에 부친이 죽어 있던가?”

김영달이 밥을 먹고 있던 김원춘에게 물었다. 김영달은 포교이기는 했으나 수염이 염소수염이고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흐리멍덩하여 배알이 없는 인물로 유명했다.

“월천곡으로 올라오는 길가에 있는 숲입니다.”

김원춘이 사건 지점을 설명해 주었다. 김원춘의 진술을 듣고 낭이는 김영달과 함께 월천곡에 있는 숲을 샅샅이 뒤졌다.

“낭이야,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른데 그만 가자. 암만해도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것 같다.”

김영달은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도 범인을 잡으면 승진할 것이 아닙니까?”

김영달은 오작사령 출신에서 살인범을 잡는 바람에 면천이 되고 포교까지 된 인물이었다. 물론 살인범을 잡을 때 낭이가 결정적인 제보를 해 주었었다.

“내 팔자에 무슨 승진이냐? 포교 자리도 과분하지.”

“춘심이네 주막에 가서 술을 받아드릴 테니 계속 수색을 하세요.”

낭이는 김영달을 달래면서 숲을 뒤졌다. 그 결과 물푸레나무가 있는 골짜기에서 풀들이 짓밟히고 말라붙은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가 살인사건 현장인 모양이에요.”

낭이는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을 살피면서 말했다. 김오선이 살해되는 장면을 생각하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는 흉기나 특별한 유류품이 발견되지 않았다. 낭이는 포도청으로 돌아와 종사관 신광호에게 자세하게 보고했다.

“소문은 강도 살인이라는데 피해자는 병으로 죽었다고 하니 어찌된 영문인가?”

신광호가 낭이를 쳐다보고 물었다. 낭이는 신광호의 시선을 대하자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언제 보아도 단정하고 깊은 눈매를 갖고 있는 신광호였다. 낭이가 신광호를 넋을 잃고 쳐다보자 김영달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매장한 시체를 꺼내서 검시해야 합니다. 물푸레나무가 있는 곳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었습니다.”

낭이는 얼굴을 붉히면서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것이 반드시 사람의 핏자국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시체를 발견한 곳에 있었던 피입니다.”

“핏자국이라고 해도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니까 피를 토할 수도 있음이야.”

“그래서 더욱 검시를 해야 합니다.”

“피해자들 말대로 병으로 죽은 것이 확실하면 시체를 발굴해서 검험을 해도 직권을 남용한 것이 되어 너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나를 파직을 당하게 된다.”

신광호가 이미 묻은 시체를 꺼내서 검시를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

“하오면 현장에서 목격자를 찾는 것이 방책이옵니다.”

“살인사건 현장에 목격자가 있겠는가? 살인사건이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대부분 목격자가 없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신광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책상을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멀리 포도청 뒤에서 생선장수의 목쉰 외침이 들려왔다.

“고등어가 왔습니다. 물 좋은 생선입니다.”

포도청 뜰에는 고추잠자리가 한가하게 날고 있었다.

“닷새만 말미를 주시면 목격자를 찾아오겠습니다.”

낭이가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말했다. 멀리 포도청 입구에 이덕무와 백동수, 정약용이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형조참의 정약용이 근무하는 형조는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고 이덕무는 대궐 안의 규장각에서 검서관으로 있었다. 백동수는 무예의 달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관직이 없었다.

“그렇다면 수사를 하도록 하라.”

신광호가 허락을 했다.


 징소리 꽹가리소리가 귓전을 후벼 팔듯이 아귀아귀 들려왔다. 비몽사몽 중이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작두위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는 어미 약노(蒻奴)의 모습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언제나 그렇듯이 잠자리가 설면 가위 눌리듯이 꿈속에 나타나는 것은 10년째 옥에 갇혀 있는 어미 약노의 모습이었다.

어머니….

낭이는 옥에 갇혀 있는 어미를 생각하자 목이 메고 가슴이 먹먹했다.

나를 아는 체도 하지 마라. 나는 어차피 옥에서 죽을 목숨이다.

옥사장에게 돈을 주고 면회를 하자 어미는 낭이를 돌아보지 않으면서 처연하게 말했다.
어머니, 대체 이런 허망한 일이 어디 있어요? 주문을 외워서 사람이 죽인다는 것이 말이나 돼요?

내가 무업(巫業)을 하고 있는 탓이다.

무업을 한다고 주문을 외워서 죽여요?

다 팔자소관이다.

어미는 형조와 의금부에서 전후 25차례의 가혹한 형신을 당했다. 형신을 받을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낭자하게 흘러내렸다. 어미는 곤장을 맞을 때는 주문을 외워서 사람을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곤장을 때리지 않으면 진술을 번복했다. 어미의 옥사는 임금에게까지 보고되어 임금이 심리를 하기까지 했으나 아직도 사건이 매듭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반드시 어머니의 무죄를 밝혀내리라.

어미의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에는 언제나 같은 맹세를 반복했다. 낭이는 몇 번이나 악몽을 꾸다가 날이 부옇게 밝기 시작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간단하게 옷을 주워 걸치고 짚신을 신고 남산으로 달려 올라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되풀이하는 무예 수련, 새벽이슬을 맞으면서 남산에 올라 숲 속에서 온몸에 땀을 흥건하게 흘리면서 두 시진 정도 연마를 한 뒤에 장안을 내려다보고는 했다.

눈 아래 장대하게 펼쳐진 만호 한양 장안은 아침을 짓는 연기가 여기저기서 푸르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북악산 밑에는 임금이 계시는 경복궁이 있고, 경복궁 앞에는 6조 거리가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창덕궁과 창경궁이 있고, 명문세가의 고루거각이 즐비했다.

낭이는 시린 눈빛으로 한양 장안을 내려다보다가 신광호의 얼굴을 떠올리고 가슴이 싸하게 저려 왔다. 아아, 사랑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그 남자만 생각하면 가슴이 이리도 아픈 것인가.

낭이는 쓸쓸한 시선으로 장안을 내려다보다가 산에서 내려왔다.

‘오늘은 일단 송파나루에 가보자.’ 

어미에게 사식을 넣어주는 피맛골의 술국집에 가서 아침을 먹고 송파나루로 갔다. 송파나루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번다했다. 난전에는 수많은 장사치들이 몰려들어 호객행위를 하고 양반에서 상민, 천민들까지 필요한 물건을 사고팔고 흥정을 하느라고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낭이는 난전을 기웃거리면서 수상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난전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좋았다. 그러나 김오선을 살해한 강도를 찾는 일은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처럼 어려웠다.

‘이놈 저놈 모두 살인범만 같으니….’

낭이는 살인사건이 발생한 사실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수사를 하는 일이 난감했다. 그러나 김원춘을 만난 결과 김오선이 살해되어 죽은 것이라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얼마 전에 여기서 소를 사간 사람이 강도를 당해 죽었다고 하는데 사실이오?”

낭이는 우시장을 찾아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양가집 낭자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것은 왜 묻는 거요?”

우시장의 텁석부리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술집에 있는 주모는 아닐 터이고… 맨입으로 물어서 누가 대답을 하는가?”

우시장 상인들이 낭이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물었다. 낭이의 행색이 반양반상(半良半常:반은 양반 반은 상민)이라 수상쩍다는 눈빛이었다.

“내 실은 좌포도청 다모요.”

“그럼 시원한 막걸리라도 한 잔 사시지. 목이 마르고 뱃속이 출출해서 어디 말이 나오겠소.”

“좋소. 한 잔 합시다.”

낭이는 우시장 상인들 한 패를 이끌고 주막으로 갔다. 주막은 충청도 목계에서 올라오는 세선(稅船)과 서해의 강화도 앞바다를 통해 올라오는 각종 상선들로 인해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행색이 얌전하고 자색이 뛰어난데 어찌 험한 일을 하고 있소?”

난전의 술집에 둘러앉자 텁석부리 사내가 낭이에게 물었다.

“팔자 탓이겠지요.”

낭이는 선선하게 웃으면서 사내들에게 막걸리를 따라주고 자신도 막걸리를 마셨다. 포도청 다모를 하려면 남자 포교들과 미행을 나가기도 하고 잠복을 하기도 하면서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은 거의 잊고 살았다. 방을 하나밖에 얻지 못해 남자 포교들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잔 일도 있었다.

“포청 다모와 술을 마시는 것은 처음이오. 그래 다모라면 도둑도 많이 잡았소?”

“도둑이야 많이 잡았지요.”

“흉악한 살인범도 잡았소?”

“살인범도 잡았습니다.”

“그럼 무술은 잘하오?”

“호호호. 살인 도적 잡을 만치는 하지요.”

“무예를 누구에게 배웠소?”

“검선(劍仙)이라는 김영건 어른에게 배웠습니다.”

우시장 상인들은 낭이에게 오히려 궁금한 점이 많았다.

“그렇게 살인도적이나 잡으면 시집은 어찌 가려오?”

“시집이야 벌써 갔다가 왔지요. 그나저나 소를 사 간 사람이 살인 강도를 당했다는데 들어본 일이 있소?”

낭이는 우시장 상인들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면서 탐문을 했다.

“엥? 시집을 갔다가 왔다면 과부라는 말이오. 얼굴도 고운데 개가를 하시지….”

텁석부리 사내가 혀를 차면서 낭이의 아래위를 살폈다.

“그것은 내 일이고 여러분들이 나 좀 도와주시오. 내 반드시 사례는 하리다.”

“우리도 소문만 들었지 누가 살인범인지는 모르오. 월천곡에서 살인이 났다고 하더구먼.”  

우시장 상인들도 김오선이 강도 살인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도가 누구인지는 짐작도 못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낭이는 그것만으로도 소득이 있다고 생각했다.
낭이는 송파나루 주막에서 우시장 상인들과 헤어져 김오선이 죽은 월천곡에 이르렀다. 월천곡은 냇물이 시원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추석이 내일 모레라고는 하지만 한낮이라 볕이 따가웠고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냇물에 세수를 하고 허리에 감았던 전대에서 베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고 사방을 휘둘러보자 월천곡 산비탈에 있는 밭에서 허름한 아낙네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벌써 김장배추를 심었군요.”

낭이는 30대로 보이는 아낙네 옆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 음력 8월 초순이지만 밭에는 김장배추들이 파랗게 싹을 틔우고 있었다. 아낙네는 낭이를 힐끗 쳐다보고 여자라는 것을 알고는 내외를 하지 않았다.

“못 보던 사람인데 뉘댁에 가시는 길이우?”

아낙네가 투박한 말투로 물었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아낙네의 가슴이 뽀얗게 희었다.

“문안(問安:조선시대 4대문 안을 일컬음)에서 나왔습니다. 저 윗동네에 사는 김오선 어른 댁에 가는 길입니다.”

낭이는 슬쩍 유도신문을 하기 시작했다. 한낮이었으나 숲이 청정하고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았다. 초추의 양광은 호젓한 산골짜기에 고즈넉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 댁에는 어찌 가시우?”

“아버님이 그 댁에 돈을 빌려주었는데 추석이 가까우니 이자를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한 발 늦었어요. 그 김씨 어른은 강도를 만나서 돌아가셨어요.”

김원춘은 낭이가 예상했던 대로 포도청에 불려 다니는 것이 두려워서 김오선이 병으로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강도요? 그럼 시체를 봤나요?”

“그럼요.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다 봤을 거예요. 가슴을 칼로 찔려서 피가 낭자했어요.”

“에그 무서워라. 강도는 잡았나요?”

“잡기는 어떻게 잡아요? 죽은 사람 아들이 괜히 포도청에 불려 다니면서 조사를 받을까봐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내고 말았어요.”

“혹시 강도를 본 사람이 있나요?”

“우리야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범골 사람 조영택 어른의 두 아들이 강도를 직접 만났대요.”

“예.”

낭이는 뜻밖의 소득을 얻게 되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마침내 살인사건 목격자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조영택의 초가 마당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한 그루 우뚝 서 있었고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 셋이 왁자하게 뛰어놀고 있었다. 토담 위에는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고 초가지붕에는 박이 서너 덩이나 열려 있었다. 담장 밑으로 닭벼슬꽃과 깨꽃이 붉게 피고 들국화도 무더기무더기 피어 있었다. 조영택의 집은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낭이는 큰기침을 한 뒤에 올망졸망한 계집애들에게 오라버니나 어른들을 불러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집안에는 어른들이 하나도 없었고 15세의 조상인만 있었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 포도청까지 같이 가자.”

낭이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조상인의 얼굴에 불안해하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왜, 왜 그러시는데요?”

조상인이 더듬거리면서 낭이를 쳐다보았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까 가서 이야기 해.”

낭이는 조상인을 데리고 포도청으로 왔다. 낭이가 조상인을 포도청으로 데리고 온 것은 진술을 받으면서 정확하게 기록을 하기 위해서였다. 조상인은 처음에 강도를 목격한 일을 말하려고 하지 않다가 좌포도청의 엄위에 놀란 탓인지 두려워하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조상인이 형 조창인과 함께 지난 7월16일 소를 끌고 송파나루에 가서 미역을 사서 소에 실으려고 하는데 점사(店舍:가게)의 고공(雇工:점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소달구지에 목재를 가득 싣고 오다가 소를 풀어서 점사의 기둥에 매고 목재를 내렸다. 그는 조상인과 조창인 앞에 와서 미역을 들어보더니 소는 작고 미역은 무거운데 어떻게 싣고 가려느냐고 하면서 말을 건넸다. 이때 그와 같은 마을사람들인 듯한 무리의 사람들이 소를 몰고 지나가면서 ‘김 서방, 김 서방같이 가지 않으려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김 서방이라는 사람이 그 사람들에게 ‘나는 수레가 망가져 고쳐야 하니 내가 바퀴를 고친 뒤에 같이 가세.’ 라고 말했다. 조상인과 조창인은 김 서방이라는 사람에게 미역을 싣는데 좀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김 서방이라는 사람은 조창인과 조상인을 힐끗 쳐다보더니 ‘나는 수레바퀴를 고쳐야 하니 도와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조창인과 조상인이 간절하게 부탁을 하자 마지못한 듯이 미역을 같이 들어 소에 실어주었다.

그 후 열흘이 지난 7월26일, 조창인과 조상인이 송파나루에 갔다가 소를 몰고 돌아오는데 길가 숲 속에서 사람들이 다투는 듯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소 한 마리가 콩밭에 있었다. 콩밭에 있는 소가 조창인과 조상인의 소를 보고 달려와 싸우려고 했다.

‘저 소를 잡아라, 저 소가 우리 소에게 덤비려고 한다.’

조상인과 조창인은 깜짝 놀라서 사방을 둘러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 숲 속에서 검은 물체가 사람을 깔고 앉았다가 몸을 일으키면서 뛰쳐나왔다. 그의 손에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칼이 들려 있었다.

‘너희들이 소리를 지르면 나는 너희들을 찔러 죽일 것이다.’

그는 조상인과 조창인에게 칼을 들고 달려와 발을 잡아당기려다가 길가에 움퍽 패인 곳이 있어서 벌을 헛디뎌 꼬꾸라졌다. 조상인과 조창인은 그 틈에 소를 사납게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혼비백산한 조상인과 조창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여 장정들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갔다. 현장에는 살인자가 벌써 떠나고 없었고 김오선은 칼에 찔려 죽어 있었다.

“그 자의 얼굴을 뚜렷이 기억하는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자는 7월16일에 우리 송파나루 점사 앞에서 우리 미역을 실어준 김가라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의 용모를 자세하게 말하라.”

“살인자의 얼굴은 희고 광대뼈가 튀어 나왔습니다. 두 볼은 홀쭉하게 들어가고 코는 높고 턱이 뾰족했습니다. 눈두덩이 내려앉아 있고 눈썹이 시커멓고 상투는 크고 수염은 적었는데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나이는 스물다섯 살에서 서른이며 키는 보통이었습니다. 무명 소창옷을 입었고, 칼은 6, 7촌(寸) 쯤 되었습니다.”

조상인과 조창인의 진술을 받은 낭이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포도청에서는 즉각 김오선의 아들 김원춘을 불러다가 공초를 받았다. 김원춘은 부친이 살해되었는데도 관에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 10대를 맞았다.


비가 구죽죽하게 내리고 있었다. 앙상한 흙벽을 들이치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낭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했다. 어미는 이 빗속에서 어떻게 하고 있을까. 차디찬 형조의 구류간에서 어미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까. 비가 그치고 나면 금세 겨울이 닥칠 것이고 겨울이 닥치면 감옥에서는 더욱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봄이나 가을이라고 해서 감옥이 편할 날이 있을까만은 여름은 더워서 사람이 실성하기도 하고 겨울에는 얼어 죽기도 했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어미에게 솜옷이라도 입혀주어야 했다. 

‘어머니는 어찌하여 죄에 연루된 것일까?’

그것은 낭이의 뇌리에서 10년째 떠나지 않고 있는 화두였다. 어머니는 굿을 청하러 온 이웃집 여자에게 밥을 대접했는데, 그 밥을 먹은 여자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죄를 얻게 되었다. 초검(初檢:첫 번째 검시)을 한 검관이 사망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복검(覆檢:두 번째 검시)과 삼검(三檢)까지 했으나 독살의 흔적도 없고 타살의 외상도 없어서 시친(屍親:죽은 여자의 가족들)이 주문을 외워서 죽였다고 진술했다. 이에 초검관이 어미에게 형장을 때리게 되었다. 어미는 가혹한 형장을 견디다 못해 주문을 걸어서 죽였다고 자백했다.

한 번의 자백이 공초(供招:진술)에 기록되면서 어미는 길고 지난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차라리 임금 앞에서 징을 쳐서 호소를 할까?’

낭이는 때때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사건만 잘 해결하면 임금께서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실지 모르잖아?’

낭이는 임금이 소원을 물을 때 어미를 석방해 달라고 호소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임금이 지나갈 때 징을 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런데 김오선을 살해한 범인을 어디 가서 잡지?’

낭이는 새벽에 눈을 뜨자 전전긍긍했다. 낭이가 알고 있는 범인에 대한 것이라고는 김가라는 성과 조상인 형제가 진술한 용모뿐이었다. 조선 천지에서 김가가 하나 둘은 아닐 것이고 용모 비슷한 자도 숱하게 많을 것이었다. 좌포도청 포졸들이 장안을 누비면서 살인범을 찾아다녔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범인은 송파나루를 자주 오가는 자고 달구지에 목재를 실었다고 했어.’
낭이는 엎드려서도 생각하고, 앉아서도 생각하고, 누워서도 범인을 잡을 궁리만 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목재가 쓰이는 곳이 집을 짓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낭이는 날이 밝자마자 송파나루로 달려갔다. 물자가 수없이 거래되는 큰 시장이라 그런지 송파나루는 비가 오는데도 아침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주모, 여기 목재를 거래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낭이는 난전에서 순대국 한 그릇을 말아 먹으면서 주모에게 물었다.

“목계나루에서 나무를 실어 와서 파는 사람이 있지요. 아주 큰 목재상이랍니다.”

“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점사는 이곳에 있지만 살기는 성안 남산골에 살고 있어요.”

낭이는 순대국을 먹자마자 주모가 일러주는 목재를 파는 점사로 달려갔다. 목재 점사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목재를 운반하고 있었다. 낭이는 바쁘게 목재를 운반하는 사람들 틈에서 행수로 보이는 사람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것 봐, 여기가 어디라고 아침부터 여자가 기웃거려? 귀찮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저쪽으로 비켜!”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낭이를 밀쳐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낭이가 남장을 하고 있어서 남자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내가 못 올 데를 왔소? 여기 행수 어른 있소?”

낭이는 하마터면 나동그라질 뻔하여 속에서 불이 일어났다. 낭이의 말투도 곱지 않았다.

“행수는 왜 찾는 거야?”

“이 양반들이 싸라기밥만 먹었나? 왜 아무한테나 반말이야?”

“이제 봤더니 여자 아니야? 보아하니 색주가에서 온 모양인데 아침부터 장사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술값을 받으려면 저녁에나 오라구!”

“이 사람들이 다짜고짜 시비를 거니 매운 맛을 보아야 하겠군.”

낭이는 순식간에 목재상의 고공들을 돌려차기로 쓰러트렸다.

“뭐야?”

“아니, 이 계집이 어디서 행패야?”

목재상에서 고공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면서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낭이는 재빨리 등에 차고 있던 전대에서 육모방망이를 꺼내고 보세(步勢)를 취했다. 고공들이 헛바람 소리를 내면서 일제히 몽둥이를 휘둘러왔다. 조선 제일의 무인이면서 검선으로 칭송을 받았던 김영건의 무예를 전수받은 낭이였다. 순식간에 무예도보통지에 있는 월도의 초식을 현란하게 펼쳤다. 뱀이 물 속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장교출해세(長蛟出海勢), 용이 몸을 뒤집어 반격을 가하는 용와반격세(龍臥反擊勢), 정수리를 쪼갤 듯이 맹렬한 기세로 내리꽂히는 상골분익세(霜鶻奮翼勢)가 잇달아 펼쳐졌다. 김영건은 어전에서 임금에게 무예를 선보일 때 재 위에서 현란한 검술을 펼쳐보였는데 잿가루가 날리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뛰어난 무인이었다. 낭이가 휘두르는 육모방망이는 검날보다 더욱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고공들의 허리를 후려쳤다.

“아악!”

“으악!”

고공들이 순식간에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나뒹굴었다. 낭이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고공들을 쏘아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비는 저녁에도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낭이는 어미가 갇혀 있는 형조의 구류간을 찾아가서 솜옷을 넣어주었다.

“아가,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

어미는 낭이를 보자 눈물부터 주르르 흘러내렸다. 낭이는 어미의 우는 모습이 싫어서 닷새에 한 번씩 오고는 했으나 만날 때마다 살점을 베어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하늘이 무심하지 않으면 어머니가 풀려나올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죽어야 네가 편안히 살 것을… 어미 노릇 한 번 못해서 널 볼 면목이 없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어머니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내 옥바라지를 하느라고 어린 네가 구걸하던 것을 평생 잊을 수 없구나.”

어미가 옷자락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낭이는 어미가 구류간에 갇힌 뒤로 몇 년 동안 동냥을 하여 옥바라지를 했었다.

“저는 한 번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때 죽었어야 했어.”

“어머니가 죽으면 저도 죽을 거예요.”

“못난 것… 10년째 옥살이를 하고 있는 내가 뭐가 좋다고….”

“사식 잘 먹고 그러세요. 규장각 검서관으로 있는 이덕무 어른이 기회가 오면 주상전하께 말씀 올린댔어요.”

“고맙구나.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니?”

어머니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여름을 지나면서 어미는 몸이 앙상하게 마른 것 같았다.

“또 왔느냐?”

그때 옥이 소란스러워지면서 형조참의 정약용이 당하관(堂下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나리 오셨습니까?”

낭이는 재빨리 정약용에게 허리를 숙였다. 정약용은 형조참의이기 때문에 당직을 할 때마다 옥을 순찰했다.

“10년을 이처럼 옥에 갇혀 있다니 하늘이 무심하구나.”

정약용이 탄식을 했다. 정약용도 어미 약노사건을 철저하게 심리했으나 형조 내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바람에 무죄로 석방할 수가 없었다. 정조는 무서운 임금이었다. 살인사건 심리를 철저하게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사건에 사사로운 정이 개입되는 의심이 있으면 매섭게 추궁했다.

“어미가 옥에서 죽는 일은 없도록 할 터이니 안심해라.”

“황송합니다.”

낭이는 정약용에게 절을 하고 물러나왔다. 형조에서 나오자 광화문 앞의 6조 거리가 어둠에 묻혀 있었다. 가을이라 밤이 일찍 온 것이다.

낭이는 6조 거리에서 피맛골로 느리게 걸음을 떼어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의 옥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김오선을 죽인 범인부터 잡아야 돼.’

목재상에서 7월16일 목재를 사간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한바탕 소동을 부린 뒤에야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 내일은 집을 지은 사람을 찾아가 목재를 운반한 사람들을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낭이는 집에 돌아오자 웅크리고 잠을 잤다. 살인범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이튿날은 날씨가 쾌청하게 맑았다. 낭이는 포도청에 들어가 상세하게 보고를 하고 포교 김영달과 함께 조상인, 조창인 형제들을 데리고 성 밖 제기현으로 나갔다. 제기현의 산 밑에 20여 호쯤 되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촌락 좌측으로 웅장한 목재 건물이 한창 건축 중에 있었다.

‘박인수 대감이 조정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내려는 곳인가?’

박인수 대감은 대사헌을 지낸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목수들이 일을 하는 것을 감독하고 있다가 낭이 일행을 맞아 옆에 있는 차일로 옮겨 목재에 걸터앉게 했다. 박인수 대감은 형조참의를 역임한 일도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범인을 추포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김영달이 공손히 인사를 하자 사건 발생에서부터 현재까지 상세하게 묻더니 수고가 많다면서 돈까지 10냥을 주었다.

‘조정에서 벼슬이 높았던 사람이라 다르구나.’

낭이는 수염이 허연 박인수 대감의 인품에 감탄했다.

“목재를 나른 사람들은 모두 이 곳 마을사람들이라네. 내가 집사에게 불러 오라고 하였으니 살펴보게.”

“포청의 일에 이렇게 협조를 해주시니 감격할 따름입니다.”

“포교들이 얼마나 수고가 많은가? 저쪽은 다모인가?”

박인수 대감이 낭이를 살피면서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낭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한 식경이 훨씬 지나서야 목재를 나른 장정들이 박인수 대감의 차일 앞으로 몰려왔다. 조상인과 조창인 형제가 목재를 나른 사람들을 자세하게 살핀 뒤에 살인범이 없다고 말했다.

“대감마님, 그날 목재를 나른 사람이 다 왔습니까?”

낭이가 박인수 대감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한 사람이 빠졌네. 그 자는 며칠 전부터 마을에서 보이지 않고 있어.”

박인수 대감의 말에 다모는 맥이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살인범이 이미 눈치를 채고 달아났다고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했다.


 살인 용의자는 떠올랐으나 그 자의 행방을 추적하는 일은 지난하기 짝이 없었다. 낭이는 좌포도청으로 돌아오자 포도대장 이삼에게 상세하게 보고했다.

“범인이 드러났으니 반드시 추적하여 잡아드리도록 하게.”

이삼이 포교부장 정덕주에게 영을 내렸다. 정덕주의 지휘를 받으며 포졸들이 일제히 살인범 검거에 나섰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살인범의 종적이 묘연하여 검거할 수 없었다. 낭이는 살인범의 연고지를 샅샅이 뒤지고 명절인 추석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까 하여 집 근처에서 잠복하여 기다렸으나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제기현과 월곡천을 매일같이 오가면서 밤에는 살인범의 집 근처에 숨어서 기다렸으나 그 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완전히 도망을 가버렸으니 어디 가서 잡지?’

낭이는 잠복수사를 포기하고 포도청과 제기현을 오가면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그것은 용의자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누구와 친하게 지냈는지, 친척이 어디에 사는지를 샅샅이 조사하는 것이었다.

‘기어이 찾았다.’

낭이는 열흘 동안이나 집요하게 연고지 수사를 한 뒤에 범인이 제기현에서 의정부 쪽으로 80리나 떨어진 수락산의 깊은 산골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낭이는 포교 김영달과 조상인, 조창인 형제를 데리고 산 속에 있는 살인범의 움막을 찾아갔다. 그러나 살인범은 움막에 없었다. 낭이는 조상인과 조창인을 숲 속에 숨어 있게 하고 김영달과 함께 살인범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살인범은 두 식경이 훨씬 지나서야 땔나무를 지고 돌아왔다.

‘광대뼈가 튀어나와서 눈두덩이 주저앉았으니 이놈이 살인범일 거야.’

낭이는 살인범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왔소?”

살인범이 낭이와 김영달을 수상쩍은 눈빛으로 살피면서 물었다.

“약초를 캐던 사람들인데 먹을 것이 있나 해서 들렸소.”

김영달이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공연한 걸음을 했소. 시골집에 무슨 먹을 것이 있겠소?”

용의자가 퉁명스럽게 내뱉고 움막을 들여다보았다. 낭이는 숲 속에 있는 두 소년을 손짓해 불렀다. 그러자 숲 속에서 소년들이 가까이 왔는데 벌써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서 빨리 묶으라는 눈짓을 했다. 낭이는 김영달에게 용의자를 감시하라고 이르고 조상인과 조창인에게 다가갔다.

“애매한 사람을 잡아들이면 큰일 난다. 저자가 살인한 놈이 확실한가?”

낭이가 소년들에게 물었다.

“내가 결박하라면 옳은 것이다. 저 자가 범인이 아니라면 내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조상인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지게의 땔감을 내리던 살인범이 경악하여 소년들을 쏘아보았다.

“저 자가 김오선을 죽일 때 우리까지 죽이려고 했다. 살인하는 것을 목격하자 나를 소에서 끌어내려 칼로 찌르려고 했다.”

조창인도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이 나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러느냐? 너희들 때문에 나는 억울하게 죽게 생겼다.”

용의자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 펄쩍 뛰었다. 그러나 김영달이 벌써 살인범의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있었다. 낭이는 재빨리 달려들어 포승줄을 꺼내 살인범을 묶었다.
 
살인범의 이름은 김대득이었다. 그는 좌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으면서 살인을 부인했다. 살인의 정황이 뚜렷한데도 자백을 하지 않으면 곤장을 때리면서 신문하게 되어 있다. 판관이 좌정한 가운데 포교부장이 양쪽에 늘어서고 그 아래 포졸들이 삼엄하게 도열한 가운데 김대득은 곤장을 맞으면서 조사를 받았다.

‘김대득이 살인범이 아니라는 말인가?’

낭이는 김대득이 완강하게 버티는 것을 보고 회의가 일어났다. 김대득이 살인을 했다는 것은 조상인과 조창인 형제의 진술뿐이었다.

‘혹시 이 자들이 거짓 증언을?’

낭이는 김원춘에게 달려가 김오선이 돈을 갖고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소를 사고 남은 돈이 20냥쯤 있었습니다.”

김원춘이 대답을 했다.

“너희들 오라버니가 돈을 쓴 일이 있니?”

낭이는 조상인 형제의 집에 달려가 아이들에게 엿가락을 나누어주면서 물었다.

“오라버니들이 돈 때문에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요. 큰 오라버니가 더 갖겠다고 하고 작은 오라버니가 적게 갖겠다고 했어요. 큰 오라버니 방에 칼도 있어요.”

조상인의 여동생들은 낭이가 살살 달래면서 이야기를 시키자 묻지 않는 말까지 했다. 낭이는 조상인의 집을 샅샅이 수색하여 죽은 김오선의 전대와 죽일 때 사용했던 칼을 찾아냈다. 낭이가 증거품을 가지고 포도청으로 돌아와 조상인 형제에게 들이대자 그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조상인 형제가 살인범이었어. 자기들이 김오선을 살해하고 김대득에게 덮어 씌운 거야.’
조상인과 조창인은 판관이 신문을 하자 비로소 강도 살인을 숨김없이 자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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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수광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고 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삼성문학상 소설부문 수상. 한국추리문학 대상을 수상했고 역사 소설 ‘나는 조선의 국모다’를 발표했다. 한국추리문학 사무국장, 계간 미스터리 주간을 역임하고 여러 신문에 연재소설을 발표한 바 있다. 작가의 경제경영서로는 <부자열전>. <선인들에게 배우는 상술>. <귀신이 되어서라도 팔아라> 등이 있고 역사서로는 <세상을 뒤바꾼 책사이야기>. <한국 역사의 미인> 등이 있어 다방면의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 후기>

"낭이전은 조선시대 여형사라고 할 수 있는 다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 정조 때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등장인물을 바꾸어 소설화한 팩션소설입니다. 다모는 조선시대 각 관청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들인데 장용영을 비롯하여 군대와 형조 등 여러 곳에 있었는데, 포도청에 있던 다모들은 남자들이 할 수 없는 여자들에 대한 수사, 수색, 부검 등을 담당했습니다. 조선시대 사건수사는 상당히 과학적이어서 다모를 통해서도 그 일면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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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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