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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통해서 본 ‘인간공학’의 의미

  • 작성일 2006-08-07
  • 조회수 1,607




20세기가 끝나고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하기 직전인 1999년 여름, 독일은 뜨거웠습니다. 알프스 산맥 북쪽에 위치한 독일 바이에른 주(州)의 가르미쉬에 있는 옛 성 엘마우(Schloss Elmau)는 더욱 그랬습니다. 이 아름다운 성에서는 그해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닷새 동안 「존재의 저편, 하이데거 이후의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지요. 이스라엘, 프랑스, 아르헨티나, 미국 그리고 독일 각 처에서 온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참가해 날마다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갑자기 머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콧수염을 기른 중세풍의 한 철학자가 나와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 하이데거의 휴머니즘에 관한 서한에 대한 답신」이라는 제목으로 ‘인간사육’에 관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비록 차가웠지만 그것이 유전공학이라는 시대적 논란에 불을 당길 휘발유라는 것이 드러난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지요. 막 50대에 들어선 예술가 타입의 이 철학자는 현재 독일 칼스루에 조형대학의 총장이자 교수로 있는 페터 슬로터다이크였습니다. 그는 1983년에 무려 954쪽에 달하는 『냉소적 이성 비판』(Kritik der zynischen Vernunft)이라는 책을 내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지요.

그는 “우리는 계몽되었고, 우리는 무감각해졌다.”라면서 계몽주의가 냉소주의(Zynismus)를 퍼트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테네 시장 사람들 앞에서 방귀를 뀌고 똥을 누고 오줌을 싸며, 대로에서 자위행위를 하고 명성을 경멸하고 건축물에 대해 입을 삐쭉대고 경의를 거절하고 신과 역사를 패러디하고 날고기와 생야채를 먹고, 태양 아래 누워 창녀들과 히히덕거리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아 달라.”고 하던 고대의 견유주의자(Kynismus. 인간이 인위적으로 정한 사회의 관습, 전통, 도덕, 법률, 제도 따위를 부정하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활할 것을 주장하는 태도나 사상을 말함=편집자주) 디오게네스를 선호하며 기꺼이 그 뒤를 따릅니다. 마치 그 옛날 플라톤을 비웃던 디오게네스처럼 냉소적인 웃음을 엘마우 성에 뿌리면서 이번에는 “인간 길들이기”로서의 휴머니즘문화의 종말을 고하고 나섰지요.   

슬로터다이크의 충격적인 주장에 의하면 인간문화, 곧 모든 휴머니즘문화는 동물로서의 인간을 “길들이기” 위한 “사육”이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일은 일찍이 동물로서의 적응에 실패한 인간이 집을 만들어 가축과 함께 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거지요. 즉, 동물들을 길들이는 동물의 “가축화”와 동물로서의 인간들을 길들이는 인간의 “인간화”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슬로터다이크는 자신의 또 다른 스승인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한 말을 상기시키며, 인류는 “늑대를 개로 만들고, 인간 자체를 인간에게 최선의 가축으로” 만들어 왔다고 주장하지요. 흥미로운 발상이지요?

그런데 문자가 널리 퍼져 보편화됨으로써 이러한 인간사육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가능해졌다고 슬로터다이크는 파악합니다. 곧 쓰기와 읽기의 문화가 발달됨으로써 인간들을 길들여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일이 광범위하게 행해질 수 있었다는 거지요. “올바른 독서는 길들인다.”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야만성을 독서를 통해 길들이려는 것이 서구 휴머니즘의 이상이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그것이 실패로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마치 로마에서 책이 원형경기장에 밀렸던 것처럼, 각종 새로운 미디어가 끊임없이 제공하는 “핏빛놀이로 가득 찬 오락산업”의 노예로 사로잡혀 있는 현대인들에게 문자가 더 이상 주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주변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그럼으로써 지금 인간의 “야만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슬로터다이크의 위기의식이 있는 겁니다. 그것은 “전쟁과 제국주의처럼 직접적인 야만일 수도 있고, 우리의 자제력을 잃게 만드는 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일상적 야수화일 수도 있다.”라고 그는 진단합니다. 대단히 비관적 전망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그 다음에 있습니다. 이러한 비관적 전망을 바탕으로 슬로터다이크는 인간이 다른 새로운 길들이기 수단을 선택하고 있고 또한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슬로터다이크 논쟁” 또는 “슬로터다이크-하버마스 스캔들”이라고 불리는 논란에 불을 지폈지요. 왜냐하면 슬로터다이크는 인간의 야만성을 잠재우고 길들이기 위해 인간을 유전학적으로 선별(Selektion)하고 사육(Zhmung)할 수 있도록 하는 유전공학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뉴앙스를 짙게 풍겼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우선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디 차이트>, <데어 쉬피겔> 같은 독일의 주요언론을 중심으로 날마다 열화와 같은 논쟁들이 터져나왔지요. 기사의 제목부터 매우 도전적이었습니다.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 초인의 사육을 옹호하는가?”, “인간농장의 사육자 :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반 휴머니즘적 이성의 서광”, “초인의 사육자”, 또는 “무명씨의 반란” 등으로 말입니다.


철학계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버마스의 제자로 알려진 아쓰호이어가 슬로터다이크의 논문을 “차라투스트라 프로젝트”라고 비난하고 나섰고, 뒤이어 하버마스도 “악령으로부터의 편지”라는 글을, 투겐트하트는 “도덕적 유전자는 없다.”를, 슈페만이 “길러질 뿐 만들어지지 않는다”를, 폴하르트는 “인간 사육은 불가능하다” 등의 글들을 각각 발표했지요. 물론 슬로터다이크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열띤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런 소식들을 들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 새로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있는가? 이런 문제는 이미 1932년에 출간된 헉슬리(A. Huxley)의 『멋진 신세계』에서 모두 예고되고 경고된 문제가 아니던가? 그런데 왜들 그렇게 호들갑인가?” 하는 것이지요. 혹시 몰랐나요? 그럼, 먼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보시지요.    

 
                                       유토피아를 만드는 학문 (1) - 우생학

셰익스피어의 희극 『템페스트』에서 그 제목을 따왔다고 하는 올더스 헉슬리(A. Huxley, 1894~1963)의 『멋진 신세계』에는 발달한 과학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말 그대로 멋진 세계가 등장합니다. 이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불행하지 않지요. 질병, 전쟁, 굶주림, 헐벗음 같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고독이나 불안, 절망 같은 정신적 고통까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소비하며 누구와도 섹스를 즐길 수 있기에 이곳에서는  모두가 행복하지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곳은 무한한 물질적 풍요와 끝없는 쾌락이 어떠한 수고나 노력의 대가 없이도 주어지는 이상향 “코케인(Cockaygne)”이나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에 의한 물질적 풍요를 기반으로 한 이상사회인 베이컨의 “신 아들란티스”를 모델로 한 유토피아이지요. 그런데 그런 세상이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만일 그런 곳이 있다면 누구든지 그곳에서 살고 싶어 할 것이라고요? 과연 그럴까요?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우선, 그런 세계가 어떻게 가능한지부터 알아보지요.

신세계에서 사람들은 - 슬로터다이크의 말처럼 -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유전학적으로 선별(Selektion)되여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사육(Zhmung)되지요. 선별과 사육, 이 두 가지가 기적적인 신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인데, 소설은 이러한 일이 실행되고 있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조건반사 센터」를 소개하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겨우 34층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회색 빌딩, 중앙현관 위에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조건반사 양육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고 방패모양의 현판에는 「공유, 균등, 안정」이라는 세계국가의 표어가 보인다.”


바로 이 “나지막한” 건물 1층에 있는 수정실(受精室)에서 아기들이 인공수정에 의해 마치 공산품처럼 다량으로 생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세계에는 당연히 임신이나 부모라는 개념이 없고, 형제자매, 남편, 아내, 애인, 일부일처제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누구하고도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기도 하지요. 


아기들은 체제의 통제 아래 태아 때부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등 다섯 가지 계급으로 나뉘어 위로는 최고지도자에서 아래로는 하수도 청소부까지 맞춤형으로 제작됩니다. 지도계층에 속하는 알파와 베타 계급은 난자 하나에서 태아 하나를 탄생시키지만, 그 외의 생산계층에 속하는 계급들은 ‘보카노프스키법’이라는 난자 분열법에 의해 한번에 96명의 쌍둥이를 생산하지요. 그럼으로써 신세계 사람들은 체격, 성격, 지능, 체질 등 모든 자연적 운명이 조작됨은 물론이거니와 직업, 취미, 적성과 같은 사회적 운명까지 인공적으로 미리 정해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장래에 열대지방에서 노동자로 일하게 될 태아에게는 티푸스와 수면병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주고, 광부나 철강공으로 결정된 태아들은 열기에 익숙하게 조작되는 식이지요. 지도계층에 속하게 될 태아들은 지적인 취미와 적성을 갖게 하고, 생산계급에 속하게 될 태아는 육체노동에 적합한 취미와 적성을 갖도록 말입니다.

유전공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던 헉슬리는 이러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당시 유행하던 우생학에서 얻었다고 합니다. 우생학(Eugenics)은 다윈의 진화론과 멘델의 유전법칙이라는 두 가지의 뿌리에서 태어난 학문인데, 그 개요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사회라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하는 동물이다. 때문에 인간 가운데는 사회에 잘 적응하는 ‘적자’(適者, the fit)와 잘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자’(不適者, the unfit)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은 유전적 형질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우생학의 목적은 ‘적자’를 키우고 ‘부적자’를 제한 및 제거함으로써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듣기에 따라 그럴듯한 이 주장에는 생물학적 결정론(biological determinism)이라는 특별한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생물학적 결정론이란 I.Q., 성격, 재능 같은 인간의 사회적 능력이 성별이나 호르몬 또는 유전형질과 같은 생물학적 요소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지요. 따라서 개인의 생물학적 요소들을 개선함으로써 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질병, 장애, 가난, 불평불만 등 각종 사회문제들을 출생이전에 유전형질을 조정하거나 출생이후에 특정한 수술을 감행함으로써 줄이거나 아예 없앨 수 있다는 거지요. 19세기에는 영국의 갈튼(F. Galton, 1822-1911)에 의해서 체계화된 우생학이, 20세기에는 하버드 대학의 윌슨(E. Wilson) 교수에 의해 제창된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 그리고 21세기에는 유전공학이 바로 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영국에서는 헉슬리가 태어나기 직전인 1890년부터 장애자나 정신병자, 또는 극빈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부적자’로 단정하고 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만드는 ‘단종법(sterilization Law)’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흑인과 아시아인들을 이등 시민으로 분류하는 ‘짐 크로우법’과, 이들이 이민 오는 것을 막는 ‘이민 쿼터법’이 제정되었지요. 사회적으로 부적합한 열성인자를 가진 유색인종이 미국에 새롭게 들어오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1907년 인디아나주를 시작으로 하여, 1915년에는 미국 12개 주가 실제로 단종법을 실시하였지요.

헉슬리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게다가 그의 할아버지는 진화론 옹호로 유명한 토마스 헨리 헉슬리(T. H. Huxley, 1825~1895)였고, 그의 형 줄리언 헉슬리(J. Huxley) 역시 우생학에 밝았던 저명한 생물학자였지요. 그래서 헉슬리는 전문가 수준의 생물학과 의학지식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사회적 본성을 출생 이전에 이미 생물학적으로 결정해서 태어나게 조정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행복한 개인들이 사는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당시 우생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당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토피아를 만드는 학문 (2) - 행동주의 심리학



헉슬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신세계에서는 출생 이전뿐 아니라 출생 이후의 물질적․심리적 행복문제까지도 정부가 관리해주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신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안정, 동일, 공유라는 표어 아래 누구나 동일한 시간에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수행하고, 물질은 필요에 따라 충분히 공급받습니다. 또 모두가 전자기구들에 의한 편리한 생활과 자유로운 성생활을 공유합니다.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이다.”라는 격언이 이 사회를 상징하지요. 따라서 육체적 고통이나 물질적 걱정, 근심, 불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심리적인 행복인데, 이것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특별한 방법들이 동원됩니다. 우선 「런던 중앙 인공부화․조건반사 양육소」의 5층에 있는 「육아보육실․신 파블로프식 조건반사 양육실」에서는 유아들에게 조건반사를 통한 교육을 시킵니다. 예를 들어 유아들에게 책과 장미를 보여준 다음, 전기충격을 가하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그들이 평생 독서나 꽃을 혐오하게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필요한 지식이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이 사회에서 독서나 꽃을 보러 소풍을 나가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4층에서는 아기들이 잠잘 때 사오십 번씩 “나는 베타계급이 된 것을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어요.”라는 식으로 계급의식을 주입시키는 내용의 방송을 들려주는 수면학습법도 실행하지요.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에게는 성인이 되어서도 행복한 감정을 유발시키는 인공합성 음악을 듣고, 밤마다 “오늘날은 모두가 행복하다.”라고 최면을 걸거나 “사회의 지주는 철학자가 아니라 정밀세공 기술자나 인지세금 징수자이다”라는 식으로 지성인보다는 전문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가치관 역시 수면학습법을 통해 주입됩니다. 그럼으로써 심리적 안정과 행복감을 갖게 하는 거지요. 그러고도 문제가 있을까 봐 행복한 감정을 유지시키는 ‘소마(soma)’라는 알약도 공급합니다.    

헉슬리가 “신 파블로프식 조건반사”라고 이름붙인 이론을 오늘날에는 행동주의 심리학이라고 부릅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구소련의 심리학자 이반 파블로프(Ivan Petrovich, 1849~1936)의 조건반사이론을 발달시킨 존 브로더스 왓슨(J. B. Watson)에 의해 1920년대 창시되었지요. 왓슨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주어진 조건반사 곧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보았던 사람입니다. 때문에 자극들을 적절하게 조절하기만 한다면 인간의 행동은 얼마든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어떤 일을 했을 때 그에 상당하는 보상(칭찬이나 선물)을 주는 소위 ‘긍정적 강화’를 한다든지, 어떤 일에 대해서는 벌(꾸중이나 체벌 심지어는 전기충격)을 주는 ‘부정적 강화’를 준다면 흔히 “천성적”이라고 부르는 행동들을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의 신조는 인간에게 타고난 본성은 없다. 따라서 인간은 고무찰흙처럼 주무르는 대로 만들어진다는 거지요.  


왓슨은 다음 같은 호언장담까지 했습니다. “나에게 열두 명의 건강한 아이를 주고 내가 직접 하나하나 꾸민 세계에서 그 아이들을 키우게 한다면, 장담하건대 나는 모든 아이들을 그의 재능, 취미, 성향, 능력, 소질, 조상들의 경력과 무관하게 내가 선택한 유형의 사람 즉, 의사, 변호사, 예술가, 상인, 심지어는 도둑으로도 길러낼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왓슨과 그의 후계자인 스키너에게는 그들이 갓난아이들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는 아기상자’를 고안하여 강화실험을 하였다는 스캔들까지 따라다니기도 하지요.

 
이처럼 인간의 본성은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빈 서판(tabu la rasa)’과 같아 오직 자라난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주장을 환경결정론(environmental determinism)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환경결정론자들은 출생 이후의 교육과 사회제도와 같은 환경개선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상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생물학적 결정론자과는 대립하는 주장인데 신세계에서는 이 이론도 그대로 받아들였지요.


결국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두 가지 대립하는 결정론 위에 건설된 유토피아인 겁니다. 생물학적 결정론을 근거로 한 우생학과 환경결정론을 바탕으로 한 행동심리학으로 설계된 사회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결정론적 사회라는 거지요. 슬로터다이크가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에서 사용한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우생학적 “선별”과 행동주의 심리학적 “사육”이 정부에 의해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이상사회입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문제될 것이 무엇일까요? 답부터 먼저 밝히자면, 문제는 결정론에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 이렇게 자신의 선택과 희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행복과 안정이 과연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런 유토피아에 살고 싶을까요?



                        『국가』,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멋진 신세계』



슬로터다이크의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은 “인간농장”이니 “동물원”, “사육”, “길들이기”와 같은 냉소적이면서도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세인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성공했지만 우리에게 상당한 심리적 거부감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심리적 부담을 조금 덜어내고 들여다보면, 그 내용은 사실인즉 그리 새롭거나 특별한 것은 아니지요. 그 표현에서 냉소와 자극을 걷어내고 들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동굴에서 나와 집을 짓고 정착해 살 때부터 이미 짝짓기 상대를 선택하는 일과 어린 것들을 길들이는 일을 나름대로 해왔습니다. 암암리에 스스로를 “선별”하고 “사육”을 해왔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일들을 슬로터다이크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인간화”라 표현했고, 이런 일들이 행해지는 장소를 “인간농장”이라고 이름 붙였지요. 그리고 “인간은,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 간에, 자신의 주위에 농장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스스로 양육하고 스스로 보호하는 존재”라고 규정했던 겁니다. 

인간이 사회를 만들어 살기 시작하고 그 이상적인 형태인 유토피아를 구상하는데 있어서도 이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졌지요. 고대로부터 정치는 우수한 국민을 생산하고 길러내는 선별과 사육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슬로터다이크는 “농장 또는 도시에서 인간관리는 이때부터 일종의 동물원 정치의 과제로 보입니다. 정치에 관한 현실로 제시되는 것은 사실 인간농장 경영을 위한 규칙들의 토대에 관한 반성입니다.”라고 표현했지요.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로 플라톤의 『정치가』와 『국가』에 나오는 “규칙”들을 들었습니다.


슬로터다이크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플라톤의 『국가』는 실제로 가장 오래된, 또한 완벽한 “인간농장에 관한 규칙”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 안에는 통치계급(통치자, 군인), 생산계급(시민, 노예)에 대한 구분과 그들이 지켜야 할 덕성들이 열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교육과정에 대한 상세한 언급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슬로터다이크가 말하는 쓰기와 읽기를 통해 길들이는 계급에 의한 주민들의 선별과 사육이 상세히 적혀 있는 셈이지요. 『정치가』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슬로터다이크가 주목하는 것은 문자문명에 의해 갈라진 통치계급과 생산계급의 차이, 즉 동물원 관리자와 동물원 주민의 구분입니다. “플라톤의 동물원과 그의 시설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세계에서 어느 것보다도 그(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주민과 관리자 사이에는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는지 아니면 특수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라면서, “거짓동물원관리자” 곧 사이비 정치가들은 그 차이를 무시하려고 하지만, “진정한 사육자” 곧 올바른 정치가들은 그 차이를 분명히 할 것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플라톤은 그 차이를 보존하기 위해 “동계교배”를 통해 생식하며, 잡종교배가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원형에 가까운 인간표본들을 체계적으로 새롭게 사육”하여 각각의 특성에 따라 날줄(통치계급)과 씨줄(생산계급)을 이용하여 직물을 짜듯이 국가를 산출하는 것이 플라톤이 설계한 “인간농장에 관한 규칙”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플라톤의 동물원 내지 인간농장은 “유일하고 완전한 휴머니스트”, “왕의 목자 기술을 가진 지배자”, 즉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왕”에 의해 구현되는데, 이제는 “신들뿐 아니라 현자들도 물러나” 그런 사육자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묻지요. “휴머니즘이 인간 길들이기의 학파로서 실패했다면 무엇이 인간을 길들이는가?”라고.

그리고 대답을 대신하여 “장기적 발전이 또한 종적 특성들의 유전학적 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미래의 인간공학(Anthropotechnologie)은 명백한 형질계획으로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 인류가 종 전체에 걸쳐서 탄생운명론에서 선택적 탄생 및 탄생 이전의 선택으로 방향전환을 실행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우리 앞에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한마디로 이제는 유전공학을 통한 인간의 선별과 사육이 대안이 되지 않겠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를 살펴보자는 겁니다. 헉슬리가 구상한 신세계야말로 슬로터다이크가 구상하는 “우리 앞에 나타나기 시작할” 새로운 인간농장에 관한 규칙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농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살펴본 것 같이, 신세계에서는 선별과 사육이 플라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완벽하게 그리고 슬로터다이크가 기대하고 암시한 바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우선, 선별문제에서는 우생학을 통해 인간을 생산하기 때문에 플라톤이 염려하는 각 계급 사이의 잡종교배가 일어날 수 없지요. 그리고 사육문제에서도 교육이나 독서와 같은 소극적 방법이 아니라 수면학습법이나 전기충격 그리고 약물요법 같은 적극적 방법으로 길들이기 때문에 슬로터다이크가 염려하는 “핏빛놀이로 가득 찬 오락산업”에 의한 “야만화”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플라톤이 염려하던 선별의 문제와 슬로터다이크가 걱정하는 사육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 거지요.

때문에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통해 엘마우 성에서 슬로터다이크가 제시한 문제, 곧 “휴머니즘이 인간 길들이기의 학파로서 실패했다면 무엇이 인간을 길들이는가?” 내지 “미래의 인간공학은 명백한 형질계획으로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헉슬리는 슬로터다이크의 질문들을 모두 예상하고 대답이나 하는 듯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소설의 여주인공인 레니나는 버나드 마르크스라는 청년에 의해 금지구역인 ‘인디언보호구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인디언보호구역’에서 레니나는 ‘야만인’ 존 새비지(John Savage)를 알게 됩니다. 존은 그의 어머니 린다가 20년 전 야만인 보호구역에 왔다가 머물러 살며 신세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임신․ 출산해 그곳에서 자란 청년이지요. 때문에 수면학습법이나 전기충격요법보다는 독서, 정확히는 셰익스피어를 읽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셀로』, 『리어왕』, 『템페스트』 같은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의 대사들을 인용하여 사고하고 또 말하지요. 레니나는 존과 그의 어머니 린다를 신세계에 데려옵니다.

그러나 존과 신세계 주민들 사이에는 상호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존이 『로미오와 줄리엣』 가운데 한 대목을 읽어주자, 신세계 주민인 헬름홀츠는 눈물이 나도록 웃고 또 웃지요. “부모가 딸이 원하지도 않는 어떤 남자와 결혼을 강요하다니!(이건 정말 기괴한 음담패설이다) 또 자기가 더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백치 같은 딸!(이것은 모순투성이인 희극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신세계가 존의 눈에는 ‘멋진 세계’가 아니라 ‘미친 세계’로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반란을 일으키지요.      

  소설의 마지막에서, 존은 신세계의 지도자인 총통 무스타파 몬드에게 “나는 안락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문학도 원해요.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하지요. 나는 죄도 원합니다.”라고 외치지요. 총통은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군 그래.”라고 단정합니다. 존은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러자 다시 총통이 “그렇다면 늙고 추하고 생식불능이 되는 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성병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없거나 이들이 들끓을 권리, 내일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원한다는 말인가?”라고 묻지요. 이 때 존은 오랜 침묵 후에 대답합니다. “네. 난 그 모든 권리를 원해요.”라고!

이 장면을 통해 헉슬리가 하고 싶은 말은 분명합니다. 인간에게는 행복과 안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유라는 거지요. 설사 불행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할 권리를 인간은 원한다는 겁니다. 모든 전체주의 체제가 그렇듯 멋진 신세계에는 행복과 안정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실현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문제가 있다는 거지요.
그럼으로써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과학에 의한 욕망의 충족을 통해 이룩하려는 자유주의적 유토피아의 경우 설사 그 목적이 훌륭히 달성된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것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일찍부터 유전공학에 관심을 두었던 윤리학자 한스 요나스(H. Jonas, 1903~1993)는 1987년 출간된 그의 <기술, 의학, 윤리>에서 유전자를 선별하여 종의 개선을 시도하려는 "적극적 우생학(psitive Eugenik)"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지요.



“인간을 사육하려는 시도는 오만불손할 뿐 아니라, 우매하고 무책임한 짓이다. 따라서 그러한 시도는 기껏 웃음거리가 되거나, 잘못될 경우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 오만한 기술의 광기어린 지식 때문에 인격적인 사랑에 의한 선택을 포기해버리는, 행복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이 무모한 행위는 가장 어리석고 용납될 수 없는 범죄행위로서, 오늘과 내일의 세계는 반드시 그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요나스가 이렇듯 유전공학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자유를 생명체의 본질로 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는 유전공학에 의한 선별과 사육, 특히 인간복제에 대해 반대하며 인간이 가진 “무지에 대한 권리(Recht auf Unwissen)”를 주장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모를 권리를 자신의 자유로서 가져야 한다는 거지요. 요나스는 이 권리는 전통 윤리학에서 한번도 다루어진 적이 없는 “새로운 윤리 이론”임을 강조하며 다음같이 말합니다.

“현대 권력지평에서 본 도덕적 계명은, … 무지에의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 고유의 길을 찾아가며, 자기 자신에게 놀라워할 수 있는 인간적 삶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것이다.”


요나스가 말하는 바로 이 권리에 대해 『멋진 신세계』에서 총통은 마지막으로 존 새비지에게 장황하게 물은 것이고, 존은 오랫동안 생각한 다음 “네. 난 그 모든 권리를 원해요.”라고 대답한 거지요.

아마 존은 슬로터다이크의 물음, 곧 휴머니즘이 인간 길들이기의 학파로서 실패했다면 무엇이 인간을 길들이는가, 미래의 인간공학을 명백한 형질계획으로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휴머니즘은 인간의 야만성을 길들이는데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각종 미디어들이 제공하는 “핏빛놀이로 가득 찬 오락산업”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는 계속 읽힐 것이라고, 그리고 그 어떤 미래에도 인간공학은 유전자 선별과 사육에 의한 형질계획으로 밀고나가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인간에게서 자기 자신의 길을 찾아가며, 스스로에게 놀라워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빼앗는 거라고!


이제 우리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해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희망한 미래가 없는 곳, 자기 고유의 길을 찾아가며, 자기 자신에게 놀라워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없는 그곳에 살고 싶을까? 자,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보시지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존 새비지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자발적으로 신세계를 떠났습니다.



                    “인간에게서 미래를 박탈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범죄행위로서 
                        단 한번이라도 저질러져서는 안 된다.”   
                                   - 한스 요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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