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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통해서 본 ‘질투’의 의미

  • 작성일 2006-09-05
  • 조회수 2,458






“질투 없는 사랑이 있을까, 사랑 없는 질투가 있을까?” 이런 질문은 질투가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취급되는 오늘날에도 젊은이들 사이에 여전히 떠다닙니다. 질투의 근원이 사랑이라는 의미지요. 사실상 질투와 사랑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닮았습니다. 너무나 강력하여 한번 시작하면 두 눈이 멀고 이성을 잃는다는 특징까지도 그렇지요. 그래서 질투와 사랑이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다는 말이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진화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서도 같은 주장을 한다는 거지요. 인간의 심리를 장구한 진화의 과정에서 이해하는 진화심리학자들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질투도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의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진화의 산물로 파악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퍼트리려는 욕망이 사랑과 질투의 본질이라는 거지요. 때문에 질투는 비단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없는데, 그 흥미로운 예를 흔히 ‘정자경쟁(精子競爭)’이라 부르는 수컷들의 행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검정물잠자리의 수컷은 교미하기 전 암컷의 저정낭(貯精囊) 속에서 먼저 다른 수컷으로부터 받아 놓은 정자를 모두 훑어낸 후 자신의 정자를 흘려 넣는다고 합니다. 또한 수상어의 음경에는 두 개의 관이 달려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자신의 정자를 암컷에게 옮겨 주는 데 사용되지만, 다른 하나는 바닷물을 끌어올려 다른 수컷의 정자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암컷의 생식기를 씻어내는 데 쓰인답니다. 새의 일종인 바위종다리 수컷은 교미 전 암컷의 외부생식기를 부리로 여러 차례 쪼아 암컷이 먼저 수컷으로부터 받은 정액을 모두 배설하게 만든다고도 하지요.

물론 사람도 예외가 아니랍니다. 최근 발표된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정자에는 힘차게 헤엄쳐나갈 수 있는 기다란 꼬리를 가진 것과 헤엄을 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돌돌 말린 꼬리를 가진 것, 두 가지가 있다고 하지요. 전자는 난자에 이르러 수정을 하는 정자이고, 후자는 여성의 자궁 안에 들어 있는 다른 남성의 정자를 감싸 안고 함께 죽는 정자랍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유전자를 정자경쟁에서 승리하게 한다는 거지요.

진화심리학자들은 이 같은 진화의 메커니즘이 심리작용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겁니다. 비유하자면, 사랑이 난자에 이르러 수정을 담당하는 정자의 역할을 하는 공격적인 심리적 메커니즘이라면, 질투는 다른 남성의 정자를 감싸 안고 죽는 정자의 역할을 하는 방어적인 심리적 메커니즘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데이비드 버스(David Buss)라는 진화심리학자는 그의 저서 『질투』에서 방어 메커니즘으로서의 질투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간혹 살인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흔히 ‘오셀로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병적 질투는 정신과 치료의 대상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환자는 근거 없이 자신의 아내가 성적 배신을 저질렀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남편들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괴로워하며, 아내에게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거나,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알리게 하고, 모욕적인 욕설이나 폭력을 퍼붓고 심지어는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버스에 의하면, 이러한 환자들을 담당하는 의사들은 극단적인 ‘오셀로 증후군’은 치료할 수 없는 정신질환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환자들에게 별거나 이혼을 권유한다지요. 그런데 이런 처방을 내린 후에 조사해 보니, 오셀로 증후군 환자들의 아내 가운데 상당수가 남편이 질투심을 느낀 바로 그 상대와 실제로 성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는 겁니다. 즉, 많은 경우 남편들은 정신질환이라기보다는 진화 과정에서 발달한 질투라는 방어적 메커니즘을 통해 실제적인 부정행위의 신호를 직감적으로 탐지해낸 것이라는 거지요.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간혹 있어서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가 탄생한 겁니다. 이 작품에서 오셀로는 아내를 살해하게 한 자신의 질투가 아내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오셀로의 말대로, 또 진화생물학자들의 말대로 질투는 과연 사랑의 다른 얼굴일까요?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혹시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래서 간혹 질투도 느끼고 있다면 더욱 그렇지요. 먼저 『오셀로』를 보시죠. 
 

초록 눈의 괴물 - 질투



영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는 역시 영국의 자랑스러운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 1561~1626)과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플로렌스, 로마, 베니스로부터 시작한 르네상스의 물결이 마드리드, 파리, 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으로 번져나가던 시대에 태어나 활동하며 영국의 르네상스를 이끌었지요. “운문에는 셰익스피어, 산문에는 베이컨”이라는 말이 영국의 문예부흥에 남긴 두 사람의 업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럼에도 셰익스피어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요. 베이컨에 비해서뿐만 아니라, 당시를 살며 맨 먼저 『파우스트』를 희곡으로 고쳐 썼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C. Marlowe, 1564~1593)에 비해서도 그렇답니다. 시골마을 스트렛퍼어드어폰에이번에서 장갑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18세에 8년이나 연상인 앤 헤더웨이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다는 정도가 셰익스피어의 생애에 대한 공식적인 내용의 전부라니까요.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낸 의심스러운 상상과 신화들이 그의 생애 가운데 빈 공간들을 메우고 있답니다.

무엇보다도 논란이 되는 것은 시골에서 태어나 변변한 교육조차 받지 못한 그가 어떻게 그런 작품들을 쓸 수 있었느냐 하는 거지요. 작품들을 통해 보면, 셰익스피어는 당시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문화와 학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박학다식했던 천재 베이컨이나, 유럽 풍물에 밝았던 옥스퍼드 백작, 아니면 뛰어난 극작가 말로가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으로 작품들을 쓰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지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런 풍문들은 그의 작품들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또 다른 방법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오셀로』도 분명 그 가운데 하나이지요.

대개 1603, 4년경에 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오셀로』는 그의 부하이자 타고난 악한인 이아고가 한밤에 베니스의 원로원 의원인 부러밴쇼의 저택으로 가 그를 깨우면서 시작합니다. 평소 오셀로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 이아고가 부러밴쇼의 딸 데스데모나와 오셀로가 몰래 결혼한 것을 알리려는 겁니다.

“아니, 도둑이 든 것도 모르십니까? 어서 옷을 입으세요. 큰일 나셨습니다. …… 지금, 바로 지금, 늙은 까만 양이 댁의 흰 양을 손아귀에 넣고 있습니다. …… 어서 일어나시라니까요.”

오셀로는 무어 출신의 장군이지요. 수많은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어 높은 훈장도 받았지만 흑인인데다 천민 출신이고 데스데모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이아고가 오셀로를 “늙은 까만 양”이라고 부른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질투』의 저자 버스가 ‘오셀로 증후군’이라 불리는 병적 질투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배우자 간의 “매력도 차이”를 들었다는 겁니다. 성적 매력도는 외모, 나이, 능력, 건강 등에 따라 정해지는데, 상대에 비해 성적 매력도가 떨어지는 사람일수록 배우자에게 심한 질투를 느낀다는 거지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설사 이아고의 음모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에게 질투심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데스데모나는 백인에다가 젊고 아름다운 명문가의 딸이기 때문이지요.       

딸의 도둑결혼을 알고 분노한 부러밴쇼는 베니스 공작에게 이 일을 알리고 판결을 요청하지요. 여기에서 부러밴쇼는 다음같이 오셀로를 고발합니다.

“규중처녀란 수줍은 법입니다. 평소에 그렇게 단정하고 조용하고 행여 마음의 동요가 있을까 얼굴을 붉히던 내 딸이, 아니, 그런 내 딸이, 천성으로 보든지, 면목으로 보든지, 나이로 보든지, 나라로 보든지, 만사를 배반하고,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인간을 사랑할 리가 없습니다. 티끌만한 결점도 없는 여자가, 그런 자연의 법칙에 어그러진 짓을 하리라는 것은 그릇된 판단이올시다. 악마의 농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해괴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지만 오셀로는 그가 데스모네나를 알게 된 경위와 그녀에게 호감을 사게 된 까닭을 설명한 후, “여자는 제가 고생한 것을 동정하고 저를 사랑해주었습니다. 저도 역시 그 여자의 착한 마음을 사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사용한 요술입니다.”라고 맞서지요. 이때 데스데모나가 나서서, 자신이 오셀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럼으로써 두 사람의 결혼은 모두에게 인정받고, 오셀로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이아고의 음모는 깨어지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그만둘 이아고가 아닙니다. 그는 보다 치밀하고도 새로운 음모를 계획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경쟁자인 캐시오와 데스데모나의 불륜을 조작함으로써 오셀로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통해 모두를 파멸로 이끌어가려는 계략이지요.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음탕한 무어 녀석(오셀로), 아무래도 내 마누라에게 손을 댄 모양이야. 이런 망측한 일이 있담. 독약으로 내장을 쥐어뜯는 것 같은데. 계집을 서로 바꾸는 일로 피장파장하자니, 그것도 시원치 않고. 그것보다는 어떻게든지 무어 녀석에게 고칠 수 없는 의처증을 품게 만들어야지. 그리고 저 베니스의 거지발싸개 같은 녀석(캐시오), 그 녀석이 몸이 달아 돌아다니는 것을 잘 조종만 한다면 문제없겠어. 귀가 가렵도록 무어 녀석에게 캐시오의 험담을 해야지.”

이로써 셰익스피어의 불후의 명작 『오셀로』의 플롯이 사실상 모두 드러난 셈입니다. 이후 이야기는 커다란 반전 없이 이아고의 흉계대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이아고는 우선 캐시오에게 술을 먹여 실수를 하게 한 다음, 그 일로 부관에서 해고된 캐시오에게 데스데모나에게 부탁하면 복직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오셀로에게는 데스데모나가 캐시오의 복직을 부탁하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오셀로의 질투심에 불을 붙이지요. 그러자 오셀로는 이렇게 한탄합니다.

“혹시 내 얼굴이 검고, 기생오라비같이 교제술에 능란하지 않다고 해서, 아니면 내 나이가 한고비 넘었다고 해서 - 아니 아직 그렇게는 안 되었지 - 그래서 나를 싫어했던가? 내가 모욕당한 이 마당에 아내를 미워할 수밖에 없지. 아, 이까짓 게 무슨 원앙의 쌍이람! 이 어여쁜 물건을 내 것인 양 불러 봤댔자, 결국 내 게 아니란 말인가.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인간의 손아귀에 넣어 놓고 한 귀퉁이만 붙잡고 있다면, 차라리 두꺼비가 돼서 흙구덩이 속의 썩은 공기나 마시고 사는 것이 낫지.”     

오셀로는 확실히 질투에 빠진 겁니다. 이아고의 말대로 “독약으로 내장을 쥐어뜯는 것 같은” 괴로움에 빠진 거지요. 이아고는 먼저 오셀로에게 “오 장군님, 질투를 주의하소서.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농락하는 초록 눈(green eyes)의 괴물입니다."라고 알려준 다음, 계략으로 오셀로의 마음에 그 괴물을 넣어주는 데 성공한 겁니다. 이 일이 있은 이후 오늘날에도 영어권에서는 ‘green eyes’라고 하면 ‘질투하는 마음’을 가리키게 되었지요.    

이제 이아고에게 남은 할 일은 오셀로의 마음속에서 자라는 초록 눈의 괴물을 되도록 빨리 성장시켜 그의 내장을 쥐어뜯고 결국에는 그의 가죽까지 뚫고 나와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뿐입니다. 이 무참한 일을 위해서 그가 사용하는 소도구가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이지요. 딸기 무늬 수를 놓은 그 손수건은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인데, 이아고는 아내 에밀리아를 통해 그것을 손에 넣은 뒤 데스데모나의 부정을 알리는 물증으로 사용합니다. “부인의 손수건에 틀림이 없습니다만, 그걸 가지고 오늘 캐시오가 수염을 닦고 있던데요.”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마침내 질투로 이성을 잃은 오셀로는 이아고에게 캐시오를 죽일 것을 명령한 후, 자신은 데스데모나의 침실로 갑니다. 그리고 “날 내쫓으시고 죽이지는 마세요. …… 내일까지 기다려 주세요. 오늘밤만이라도 살려주세요. …… 반시간만이라도…… ”라고 애원하는 아내의 목을 졸라 죽입니다. 그 다음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데스데모나가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지만 모든 것이 이미 끝나, 막이 내려집니다.       

 


질투에 대한 자연주의적 해석



질투를 뜻하는 영어 ‘jealousy’는 ‘열정’ 또는 ‘강한 욕망’을 의미하는 라틴어 ‘zelosus’에서, 더 멀리는 그리스어 ‘zelos’에서 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의 심리학자 고든 클랜턴(Gordon Clanton)은 질투를 ‘짝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또는 짝이 제3자와 관계를 맺었거나 맺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나타나는 불편한 감정’이라고 정의했지요. 또 맥마스터 대학교의 진화심리학자인 마틴 데일리(Martin Daly)와 마고 윌슨(Margo Wilson)은 ‘가치를 부여하는 관계나 지위에 대한 위협이 감지되었을 때 발생하며, 그 위협에 대한 대처 행위를 유도하는 상태’라고 규정했답니다. 이때 가치를 부여하는 관계가 성적 관계이면 성적 질투가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질투는 ‘악의를 가지고 바라본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invidere’에서 온 시기(envy)와는 전혀 다른 감정입니다. 시기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인데 반해, 질투는 자신이 이미 소유한 것을 경쟁자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오는 불편한 감정이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투심과 시기심은 상당수의 경우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붙어 다닌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욕심내는 마음이나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음이 모두 탐욕이라는 같은 샘에서 솟아나오기 때문이겠지요. 

『오셀로』에 등장하는 인물 중 이아고가 바로 그런 성격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지략에 뛰어나고 의지가 강하며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고 침착한 인물이지요. 하지만 그 자신이 우선 심각한 의처증 환자입니다. 근거 없이 질투심에 불타 오셀로뿐 아니라 캐시오까지도 자기 아내 에밀리아에게 더러운 손을 댔다고 생각하지요. 뿐만 아니라 동료에 대한 시기심도 역시 강렬합니다. 작품 서두에서부터 그는 캐시오가 부관으로 임명된 것을 두고 “쥐뿔도 모르는 그런 녀석은 척척 올라가고 …… 아이고 원통해!”라면서 시기심을 불태우지요. 한마디로 이아고의 마음은 질투와 시기가 함께 불타는 용광로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셀로』가 19세기 자연주의자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으며 그들에 의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때 그들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조명한 것이 이아고의 이러한 독특한 성격이었습니다. 이유는 그의 성격이 자연주의가 내세우는 입장을 설명하는 데에 매우 적합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중반, 낭만주의가 쇠퇴해갈 즈음 등장한 자연주의(naturalism)는 흔히 리얼리즘과 거의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종종 혼동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요. 리얼리즘(realism)이란 본래 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를 ‘정말로 존재하는 것[實在]’이라고 인정하는 이상주의에 대립하여, 현실적 실재를 ‘정말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을 가리켜 칸트가 사용한 말이지요. 따라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쓴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 같은 학자는 문학에서 낭만주의가 가진 이상주의적 경향이나 환상세계로의 지향에 대립하는 성향을 말할 때는 철학적 용어인 리얼리즘보다는 자연주의가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인즉 자연주의에는 낭만주의적 성향들을 배격하고, 자연이 제공한 사물들을 충실하게 묘사한다는 리얼리즘의 경향이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 아니라 계몽주의의 산물인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어 있지요. 『목로주점』을 쓴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는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가이자 이론가였습니다. 그의 이론서인 『실험소설론』에 나타난 졸라의 문학방법은 유전과 환경에 대한 과학적 성과, 즉 당시 새로운 학문으로 등장했던 우생학과 사회학에 의해 인간의 삶을 설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새로운 과학이론으로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19세기 중반 유행하던 학문적 경향이었지요.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모든 삶은 과학에 의존하게 되었고, 모든 문제는 과학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주장들을 “과학주의”라고 부르지요. 과학주의자들은 인문사회과학을 포함하여 가능한 한 모든 지식에 자연과학 분야의 원칙들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삶을 한편으로는 사회과학적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예를 들어, 콩트(Auguste Conte, 1798~1857)는 새로운 물리학을 사회에 적용시킨 사회과학인 “사회물리학”을 창안했고, 한때 신학생이었던 르낭(Ernst Renan, 1823~1892)은 과학으로 종교를 설명한 “과학종교”를 세우려고 시도했으며, 사회학자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는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학에 그대로 적용시켜 “사회다윈주의”를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적 경향의 두드러진 특성이 결정론이라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이 시대의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19세기는 결정론이 유행하던 시기였지요. 이때 사람들은 우생학이든, 사회학이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탐구되는 연구의 성과들을 결정적인 법칙으로 인정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과 멘델의 유전법칙에서 나온 우생학(Eugenics)은 오늘날 유전공학처럼 인간의 행동이 유전적 형질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지요. 또한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를 비롯한 소위 헤겔좌파를 시작으로 마르크스, 엥겔스에 이르는 사회과학이론들은 인간의 행동이 전적으로 사회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환경결정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결정론적 경향 속에서 자연주의라는 문학사조가 나온 겁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졸라의 대표작 『목로주점』을 볼 때에도, 주인공인 제르베즈의 비극적 가난을 사회의 탓으로 보는 해석도 가능하거니와, 동시에 알콜중독 같은 유전적 결함으로 보는 해석도 가능한 거지요. 이는 우리문학에서 자연주의적 경향의 작품으로 분류되는 김동인의 『감자』에 나타난 복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 자연주의적 작품들의 특징은 작품 안에 개인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어떤 결정적인 법칙이 - 그것이 사회적이든 또는 생물학적이든 - 운명처럼 존재한다는 거지요.

여기에서 『오셀로』가 왜 19세기 자연주의 작가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는가가 드러납니다.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오셀로』는 그 이야기가 근대적, 가정적, 일상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질투나 시기심 같은 악을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 법칙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다른 어떤 작품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걸작이었던 거지요.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코올리지(S. T. Coleridge,  1772~1834)의 이아고의 성격에 대한 자연주의적 분석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는 아이고를 “무동기적 악한(motiveless villain)"으로 규정합니다. 이아고는 어떠한 동기가 있어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의 성격에는 질투와 시기심 같은 악이 - 타고났든 길러졌든 - 그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 법칙으로 내재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동이 자유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전이나 환경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점에서 작품에 대한 자연주의적 분석은 진화심리학적 분석과도 일치합니다.   

실제로 극중에서 이아고가 나열하는 오셀로, 캐시오 그리고 기타 인물들에 대한 악행의 동기는 앞뒤가 서로 맞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앞에 언급한 동기를 잊은 것 같기도 하기 때문에, 그가 그때마다 자신이 행하는 악의 동기를 억지로 찾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는 마치 햄릿이 복수를 연기하기 위한 이유를 나열하는 것과도 흡사하지요. 이아고는 어떤 힘에 강력하게 붙잡혀 끌려가지만 자신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코올리지의 자연주의적 해석인 겁니다. 오셀로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오직 이아고라는 악한을 주위에 둔 환경에 의해서만 끌려간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에로스와 아가페 사이

 

“분별은 없었으나, 진정으로 그 아내를 사랑한 사내이며, 결코 사람을 의심치 않되, 속임수에 넘어가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던 사내, 무지한 인도 사람같이, 온 겨레를 주고도 바꿀 수 없었던 진주를, 제 손으로 버린 사내, 울어야 될 때에도 좀처럼 울지 않던 눈에서 아라비아 고무의 진액 같은 눈물을 떨어뜨린 사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것은 오셀로가 자살을 하기 직전 자기 자신에 대해 한 설명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시죠. 그가 과연 데스데모나를 사랑했을까요? 오셀로 자신은 그렇게 느꼈겠지만, 그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을 겁니다. 만일 우리가 예컨대 진화심리학적으로 사랑이나 질투를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퍼트리려는 공격적 또는 방어적 메커니즘이라고 정의한다면, 오셀로는 분명 데스데모나를 열렬히 사랑한 거지요. 하지만 만일 우리가 사랑을 예컨대 사도 바울처럼 정의한다면, 그것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사랑을 다음같이 정의했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질투와 시기를 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행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 전서 13 : 4~7)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사랑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셀로가 말하는 사랑과 바울이 가르치는 사랑 두 가지 말입니다. ‘질투하는 사랑’과 ‘질투하지 않는 사랑’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철학자들은 예부터 이것을 각각 에로스(eros)와 아가페(agape)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구분하여왔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에로스는 육적 사랑으로, 그리고 아가페는 영적 사랑으로도 사용되지요. 같은 말을 프롬은 ‘소유양식’으로서의 사랑과 ‘존재양식’으로서의 사랑으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다면 말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가요? 안녕한가요?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냐고요? 이유인즉, 우리의 사랑도 혹시 사랑하며 질투하고 질투하며 파괴하는 오셀로의 그것이 아닐까, 그 안에도 “초록 눈의 괴물”이 살고 있지 않을까, 아니 우리가 바로 또 다른 오셀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다행입니다만, 그래도 왠지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저뿐만이 아닌가봅니다.

예전에 살펴보았던 권지혜의 단편 「꽃게 무덤」을 보아도 그런 생각이 더욱 굳어지지요. 「꽃게 무덤」에서도 주인공인 ‘그’는 -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의 목을 조르듯 - 사랑하기 때문에, 아니 질투하기 때문에 성교 도중에 ‘그녀’의 목을 조르지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그녀를 완전하게 소유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녀의 죽은 애인에게마저 질투가 생긴 거지요.

진화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성적 욕구는 비례하고, 성적 소유는 더 내면적인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를 갖게 한다고 합니다. 먼저 육체를 소유한 다음에는 마음과 영혼까지 빼앗으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집요한 소유욕의 바탕에는 상대가 자기를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소유하는 것만이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는 논리가 깔려있다는 거지요.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의 목을 조를 때에도, 그리고 「꽃게 무덤」에서 그가 그녀의 목을 조를 때에도 바로 이런 불안, 이런 집착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오셀로는 “그것 때문이야, 진정 그것 때문이야. 순결한 별들아,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게 해 다오. …… 그러나 살려둘 수는 없어. 살려둔다면 다른 남자들을 농락할 테지.”라고 외친 것이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꽃게 무덤」의 그도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겁니다. “그는 그녀의 가는 목으로 손을 뻗쳐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육체, 그녀의 영혼, 그녀의 생명까지 다 뺏어버리고 싶은 충동으로 몸이 떨려왔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항상 이게 문제지요. 알고 보면, 진정한 사랑이란 - 에리히 프롬이 말한 대로 - ‘하는 것’이지 ‘갖는 것’이 아니며, 그 대상은 ‘행위의 대상’이지 ‘소유의 대상’이 아닌 겁니다. 즉, 사랑은 - 바울이 가르친 대로 - 오래 참고, 온유하며 질투와 시기를 하지 않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는 거지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질투는 분명 일종의 신경증 증상입니다. 일종의 심리적 질환이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사랑의 다른 얼굴이 아니라 탐욕의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 글의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 곧 “질투 없는 사랑이 있을까, 사랑 없는 질투가 있을까?”에 대해 답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질투 없는 사랑이 진정 사랑이라고! 그리고 질투에는 아예 사랑이 없는 거라고!  

그런데 말이죠, 문제는 - 「꽃게 무덤」에서도 말했듯이 - 에로스, 곧 소유양식으로서의 사랑이 본능적이고 물질적인 반면, 아가페, 곧 존재양식으로서의 사랑이 이성적이고 정신적이라는 데에 있지요. 전자가 너무나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데에 반해 후자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부자연스럽다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그 둘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진동하며 갈 곳 몰라 헤매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을 하면서도, 그 사람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소유하려는 욕망을 크건 작건 버리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석양 물에 발목을 담그고 수평선 쪽으로도, 지평선 쪽으로도 갈 곳을 몰라 무연히 서 있는 저어새를 사랑이라 노래한 시를 하나 적어놓고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시를 읽고 혹시라도 저어새가, 아니 우리의 사랑이 가야 할 곳을 알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대 기척 어느덧 지표(地表)에서 휘발하고
               저녁 하늘
               바다 가까이 바다 냄새 맡을 때쯤
               바다 홀연히 사라진 강물처럼
               황당하게 나는 흐른다.
               하구(河口)였나 싶은 곳에 뻘이 드러나고
               바람도 없는데 도요새 몇 마리
               비칠대며 걸어다닌다.
               저어새 하나 엷은 석양 물에 두 발목 담그고
               무연히 서 있다.
               흘러온 반대편이 그래도 가야 할 곳,
               수평선 있는 쪽이 바다였던가?
               혹 수평선도 지평선도 여느 금도 없는 곳?

                (황동규 시인의 「더 쨍한 사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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