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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또 게임

  • 작성일 2006-10-16
  • 조회수 1,294


 

*


 나, 은솔이. 고등학교 1학년. 얼굴이 내놓을 만큼 예쁜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마음에 들 때도 있다. 다행히 성적이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어 콧대 높은 내 자존심을 살려준다. 스스로 단언하건대 친구들과의 관계도 무난한 편이라서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느낄 일은 없다.

  중학교 때는 3년 동안 내리 실장을 맡았다. 아마도 상위권의 성적과 무난한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다지 잘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욕심 많고 똑 부러지는 성격을 가진 데다 매사에 인정받고 싶은 공명심이 큰 탓에 다른 반 실장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리더십까지 갖췄다고 자신할 수 있지만, 실장은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결코 보충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3학년 때는 실장 역할이 참 버겁고 고달팠다. 왜 실장은 리더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는지, 왜 부모가 반몫은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실장 엄마라면 다른 실장의 엄마들처럼 수시로 학교를 들락거리면서 학교와 선생님과 아이와의 관계가 원활해질 수 있도록 눈치껏 뒷받침해야 하는 일인데도, 도대체 엄마는 실장 엄마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학부모회의가 있는 날에도 엄마는 방 한 칸이 딸린 동네 미용실에서 독한 파마액을 손에 묻힌 채 파마롤을 말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나는 괜히 담임의 눈치를 보게 되고, 회의가 끝난 이후에는 예쁘게 차려입은 친구의 엄마들로 번잡해진 복도를 헤치고 화장실로 내달리곤 했다. 화장실 창문으로 자가용이 즐비한 주차장을 내다보며 나는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하긴 아버지 없이 셋이나 되는 자식들을 뒷바라지하기에는 동네 미용실의 벌이로는 벅차기도 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맏이인 내가 임원을 맡아오기 일쑤였으니, 오히려 내가 엄마를 더 힘들게 만들어버린 꼴이지만.

  교실로 돌아온 나는 언제나 용감씩씩했다. 좀처럼 엄마들의 치맛자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선생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어려웠지만, 치맛바람을 혐오하는 의협심 강한 친구들 덕분에 나는 학급에서 실장의 위상을 유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러느라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진해야 했기 때문에 고등학교에 와서는 절대로 임원 같은 건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엄마가 학교에 찾아와야 할 일을 결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고등학교는 대학을 가기 위한 관문일 뿐이고, 공부는 내가 하는 것이지 엄마가 해주는 일은 아니잖은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공부만 하기로 했다.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면 엄마처럼 살지 않아도 될 테니까.


*

나, 김은솔. 2등으로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1등은 실장 승주. 학년 초 담임은 성적표를 들고 다섯 명을 교탁 앞으로 불러냈다. 1등부터 5등까지. 너희들이 실장 후보들이다. 우리 학교는 반에서 5등까지 자격 요건이거든. 임원 선거를 할 테니까 소견발표를 하도록! 선생님, 저는 실장 하기 싫은데요. 왜? 한동안 머뭇머뭇. 그러지 말고 한 번 나가보지 그래. 중학교 때 많이 해서 이제는 싫어요. 그래? 그럼, 넌 들어가! 담임의 싫은 내색. 저렇게 비협조적인 녀석이 있나 싶은 얼굴. 나는 내 자리에 돌아와 실장 후보들의 소견발표를 들었다.

  승주의 소견발표는 정말이지 휘황찬란했다. 아니 한 편의 예술이었다. 다른 후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또박또박 안정된 말투에, 좌중을 압도하는 설득력까지 구사하고 있는 승주의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지나가는 사람이 돌아볼 만큼 예쁜 얼굴에,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던 성적에, 읽은 책이 적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뛰어난 논리력과 사고력! 오, 하느님, 왜 이리도 불공평하시나요! 나는 금세 주눅이 들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나, 은솔이. 그만한 정도에 기죽을 사람이 아니지. 두고 봐. 너를 분질러 놓고 말 테니까. 너와는 다른 학교였지만 나도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이라구!

  승주는 실장 역할이 유독 바쁜 학년 초임에도 불구하고, 숙제뿐만 아니라 수업 시간에 필요한 예습 복습마저도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승주의 적극적인 수업 태도에 입을 모아 칭찬했다. 백과사전적 지식에 철학적 깊이까지 겸비한 저 박식함, 혀를 내두를 만큼의 성실성, 그리고 상대의 눈빛을 깊이 응시하는 특유의 진지함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점점 승주를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바늘 끝만큼의 빈틈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승주는 잠도 안 자는 인간이란 말인가.

  아, 또 뭔가 잘못된 게 있다. 실장. 그런 거 안 하고 공부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교과 실기시험에서 실장 특유의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사실이야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교내외 모범상이나 장학생 추천에 1순위를 차지하는 것도 언제나 실장이었다. 그것이 임원 경력과 함께 대학입시의 특별전형의 자료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발등이라도 찧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게다가 나는 학년 초에 이미 담임에게 찍혀버린 사람이 아닌가. 그때 나는 실장뿐만 아니라 과목 부장이나 학급 내 일체의 자잘한 역할도 맡지 않았다. 실장 후보에도 나서지 않은 내가, 나머지 자잘한 일들을 한답시고 공부에 몰두해야 할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건 내 자존심이 절대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그런 내가 담임의 눈에 얼마나 골수 안티로 보였겠는가. 아니,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실장으로서 승주가 하는 말마다 반대상황을 가정해 토를 달곤 했던 내가, 학급 내 야당 세력을 규합하려는 거대한 실세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차츰 승주에 대해 안티 성향을 가지게 된 아이들이 내게 접근해온 것을 보면 말이다.

    

*

  

  “너희들이 고등학교에 들어온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힘든 1학기를 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2학기를 시작을 해야 하는 이 시기에 익명게시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익명게시판에서 남을 비방하는 일 따위야 어디서든 흔히 일어날 수는 있는 문제이지만, 그동안 너희들이 보여준 우리 반 특유의 따뜻한 인간성과 단결력은 다른 여타의 반에 귀감이 되어온 바 크므로 솔직히 당황스럽다.

  임원을 하다 보면 다수의 이익을 위한 쪽으로 결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이에 따라 소수가 희생하는 경우도 생긴다. 또 어떤 때는 학급의 발전을 위해서 대다수의 의견을 거슬러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문제는 거기서 생긴 갈등을 어떻게 슬기롭게 풀어 가느냐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떤 고비가 있을 때마다 슬기롭게 잘 대처해왔다. 이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너희들이 자체적으로 어떤 결정을 하든 두말없이 따를 생각이다. 단, 학급 구성원인 너희들은 결국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희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믿는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도록!”

  담임이 교탁에서 물러났다. 흥! 말은 청산유수야. 아이들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담임은 교실 뒤편으로 걸어갔다. 듬성듬성 두피가 내다보이는 담임의 머리는 40대 후반의 나이답게 대머리를 향해 빠르게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살집이 한창 올라 윤곽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턱 선과 볼이 탐욕스럽게 느껴졌고, 걸핏하면 붉은 실핏줄이 내다보이는 눈동자는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느라 번뜩이는 늙은 고양이의 눈을 닮았다. 그러면서도 도덕 과목을 맡은 교사답게 매사에 민주적인 선생임을 자처했는데, 의사 결정권을 주는 척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이 처리해야 할 소소한 일까지도 아이들에게 모두 떠넘겨버리곤 했다.

  나는 무심코 뒷자리에 앉은 승주를 돌아보았다. 승주는 부릅뜬 눈으로 똑바로 앞만 주시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굳게 다문 입술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학급회의 시간의 의장은 승주이지만, 피해당사자인 승주가 회의를 주도할 수는 없어 부실장인 서희가 교탁 앞에 섰다.

  “그러면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의 주 안건은 익명게시판의 폐해,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입니다. 좋은 의견이 있으신 분은 손을 들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예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자 서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회의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서야 아이들은 못이긴 듯 책상 위에 놓인 책이나 노트, 전자사전 등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학년 초에 학급 카페를 개설하면서 자유로운 의견 개진의 필요성에 따라 익명게시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얼굴을 맞대고는 나눌 수 없는 자잘한 몇 가지 일들을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적에 대한 하소연이나,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부적응, 친구들 간의 문제 등, 그동안 우리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까?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근거를 알 수 없는 각종 인신공격성 비판이 난무하고 있어 심각한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학급 내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아 시급히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서희는 좌중을 둘러보며 잠시 말을 끊었다. 아이들은 서희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여러분의 의견 개진을 위해 자세한 경과를 요약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실장의 권위적인 언어표현에 대해 문제 삼았고요, 두 번째는 실장이 자습 시간에 떠드는 사람의 명단을 작성하는 문제입니다. 세 번째는 교실 급식 과정에서 새치기를 하는 아이들에 대한 실장의 경고문이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외 몇 가지 소소한 문제가 더 있지만, 여러분들이 익히 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러자 뒤쪽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는 익명게시판을 폐쇄할 것을 건의합니다. 근거 없는 욕설과 비방으로 가득 찬 익명게시판은 친구들 간의 인화와 단결을 해칠 뿐입니다.”

  “아닙니다. 애초에 익명게시판을 만들 때에는 긍정적인 기능이 있다고 생각해서 만든 것 아닙니까? 다소의 부작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금방 없애버리는 것만이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의견을 다 들어보고 난 후에 결정을 해야 할 사안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의를 지킵시다, 없애려고만 하지 말고!”

  몇 아이가 우후죽순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지만, 근본적인 갈등에는 접근을 하지 못한 채 겨우 익명게시판의 존속여부에 대한 의견만 교환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다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담임은 팔짱을 낀 채 교실 뒷자리에 앉아 졸고 있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침묵은 점점 무거워졌다.

 나는 침묵이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담임은 학급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뒷전으로 물러서서 방관만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아이들의 의사 결정에 슬그머니 무임승차해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리라.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졸음에 빠져 있는 담임의 민둥한 정수리를 힘껏 노려보았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담임의 머리카락은 내 사나운 눈빛을 견디지 못한 채 내일 아침이면 기어이 뿌리 뽑히고야 말리라.

  내가 담임을 미워하는 이유를 백 개쯤 찾으라면 얼마든지 자신 있다. 아니 백 한 개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학년 초에 의례적으로 행해지던 생활상담뿐만 아니라, 진로 상담 등 어떤 대화도 해보지 못한 채 2학기를 맞았다. 입학 직후에 써낸 실태조사서에는 얼마든지 상담꺼리가 될 만한 소소한 개인 정보들이 들어 있을 터였다. 명색이 고등학교가 대학입시의 중요한 관문이라면, 학생의 지망 대학이나 학과, 성적, 가정환경 등 온갖 정보들이 들어 있는 종이 한 장을 앞에 두고, 자신이 가진 실력을 바탕으로 원하는 대학에 어떤 식으로 준비할 것인가 방법을 찾아보고 각오를 다지게 해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담임의 입장에서도 중요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학년 초 개인상담은 학급 아이들에 대한 기초 정보를 바탕으로 1년 동안 어떻게 학급 운영을 할 것인가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짜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간단히 무시해버리다니. 그러면서 입만 벌리면 개인의 자율성 운운하는 꼴이란, 도대체 직무유기가 아니고 뭔가.

  하긴 반면교사(反面敎師)도 교사니까. 어차피 인생은 고독한 것이고, 공부 또한 혼자 하는 것임을 몸소 깨우쳐주는 것도 가르침이라면 가르침이겠다. 그런 상황인데도 아이들의 자율성 함양은 자신의 민주적인 학급 운영방식이 일구어낸 성과라고 입이 마르도록 떠벌리고 다니다니, 자다가도 웃을 일이다.

  아이들이 끝내 아무런 말이 없자, 서희가 입이 마르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가 힘든 고등학교의 첫 학기를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서 얻어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봄, 한 친구의 어려움에 모두 동참하여 좋은 결과를 이끌어낸 따뜻한 기억도 있지 않습니까?”

  지난봄의 일이라면, 그건 해수의 일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에게는 해수의 갈등에 모두 참여해 교실을 눈물바다로 만든 기억이 있다.

  해수는 입학한 지 두어 달쯤 지나 실업계로 전학을 가겠다며 부모와 담임을 조르기 시작했다. 의견 관철이 되지 않자 10여 일이 넘게 무단결석을 감행했다. 가출을 할 만큼 배포가 큰 것은 아니어서 집안에 처박힌 채 학교에 나오지 않았을 뿐이지만,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갈등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미친 여파는 컸다.

  이른 아침의 등교, 밤늦은 시간까지의 야간자습, 밤을 꼴딱 새워야만 마칠 수 있는 과중한 숙제, 늘어난 학원과 과외 시간, 수업시간 내내 견딜 수 없이 찾아오는 졸음 등. 중학교 생활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꽉 짜인 고등학교 생활은 피로의 연속이었다. 여기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해수의 일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수에게 담임과 부모의 회유와 협박이 이어졌을 것이다. 어찌어찌해서 해수는 학교를 나오기는 했으나 수업 시간 내내 졸거나 딴전을 피우기 일쑤였고,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야간 자습은 견뎌내지 못하고 하교를 해버렸다.

  나는 해수의 갈등과 방황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수와 나는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같은 중학교 출신인데다가 3학년 때 같은 반이어서 해수의 고민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성적 때문이었다. 해수는 중학교 때는 중위권 정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하위권 아이들이 대부분 실업계로 빠져나간 탓에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최하위권으로 떨어져버렸던 것이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대학을 갈 수 있겠나 싶은 불안감이 엄습해왔을 것이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실업계로 가서 지금 하던 식으로 공부하면 내신 성적이 훨씬 낫지 않겠느냐고 판단했을 테고.

  그때 담임의 태도는 어땠던가. 사생활 침해에 대한 배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해수의 문제를 학급회의에 붙여버렸다. 그리고는 오늘처럼 팔짱을 낀 채 맨 뒷자리에 앉아 졸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담임이 어떤 태도를 취했든 별로 도움이 안 되었을 테지만. 해수의 갈등과 방황을 자신의 일처럼 여긴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고민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도 그랬어요. 성적표가 나오면 이걸 어떻게 부모님께 보여드려야 하나, 가슴이 먹먹하고 마냥 죽고만 싶었어요. 소화도 안 되고요, 밤마다 문 잠가 놓고 울었어요.’

  ‘3년 동안 죽은 셈치고 공부만 하라는 아빠, 내가 로봇인 줄 알아요. 내 맘을 조금도 알려 하지 않고, 다 너를 위해서야, 라고만 말하죠. 부모님이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반대요, 시험 볼 때마다 이번엔 잘해보겠다고, 열심히 해보겠다고 유난떨면서 하는데, 나를 믿고 계시는 엄마한테 정말 죄송해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고 다니는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져서…… 차라리 죽고 싶어져요.’

  ‘그래서 저도 차라리 실업계로 가고 싶어요. 이 정도로 공부한다면 여기보다는 훨씬 나아질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해수도 본인이 원한다면 전학시키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이렇게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건 죽은 삶이에요. 인간답게 살고 싶어요.’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울먹이는 아이를 따라 교실 전체가 금세 눈물바다가 되어버렸다. 그러자 회의를 주도하고 있던 승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실업계로 전학을 간다는 건, 한낱 몽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엔 아직도 실업계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이 남아 있습니다. 임금의 차별뿐만 아니라, 승진에서도 여러 가지로 불이익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차별을 견디지 못한 실업계 졸업생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결국 다시 대학을 갑니다. 대학은 우리 사회에서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외나무다리 같은 곳입니다.’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러자 부실장 서희가 일어났다.

  ‘맞아요, 실업계로 전학을 간다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래서 도망간다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이겨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실업계 출신으로서 겪어야 하는 사회적 차별을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여기저기서 의견이 쏟아졌다.

  ‘그렇습니다. 실업계로 가서 이곳에서 공부한 것만큼 노력하면 될 거라고 다들 믿는데, 그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학습 분위기가 다른데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전학 가게 되면 그곳의 분위기에 휩쓸리게 될 것은 안 봐도 뻔하거든요.’

  ‘맞아요. 저도 해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지만, 지금 현실에선 실업계 학생들이 져야 할 심리적 부담이 너무나 큽니다.’

  ‘그래요, 우리가 지금 이처럼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자기 관리인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내 안에 들어 있습니다. 자꾸 안 좋은 쪽으로 유혹하는 그 적을 이기지 못했을 때, 우리는 사회의 어떤 적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나는 어쨌던가. 그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질 않았던가. 달변과 논리! 아이들의 내부에 이런 강인함이 들어 있었다니. 이어 좌중을 둘러보던 승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해수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해수가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돌아본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어려움들을 나만 겪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외로웠는데 모두가 똑같은 입장이라니, 그런데도 말없이 견디고 있었다니, 쉽게 포기하고 도망가려고 했던 내가 부끄럽네요.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볼게요.’

  우리들은 그날 해수에게 열렬한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그러느라 회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날 이후 해수뿐만 아니라 똑같은 문제로 고민했던 많은 친구들 역시 모두 견뎌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우리는 그렇게 힘겨운 고등학교의 첫 학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

 

  그런데 이 침묵은 뭐란 말인가. 각자 생각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로 앉아 있다니. 불현듯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어쩌면 오늘의 피해자는 승주가 아닌지도 모른다. 바로 나다. 왜 가만히 있는 나를 걸고 넘어지냔 말이다. 익명게시판에서는 내 얼굴의 가면을 쓴 채 칼날을 휘두르더니, 왜 정작 자신의 얼굴을 내밀고는 한 마디도 못하는가. 게시판에 올라온 내용은 바로 이랬다.

  「실장은 강한 자한테 약하고, 약한 자한테는 강하다. 만만한 얘들은 무시하기 일쑤고, 뭐해라 이거해라 하인처럼 잘도 시킨다. 잘나가는 얘들에게는 꼼짝도 못 하면서 말이다.(물론 나는 아니지만) 어쨌든 학교에 가면 기분 재리기 일쑤다. 글고 좋은 말로 해도 들을까 말까인데 걸핏하면 00번, 너, 너, 너! 라고 부른다. 아이들이 네 노예냐? 죄수냐? 번호로 부르게? 아이들도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고!」

  「2학기 때부터 실장은 너무 권위적이 돼버렸다. 점점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다. 왜 무조건 걔 말을 들어줘야 하냐? 아이들도 생각을 가진 인격체라고! 원하는 대로 안 도와준다고 그렇게 권위적으로 바뀌는 건 뭐냔 말야! 어휴, 짱나!!! 어쨌든 실장은 디게 기분 나쁜 년이다!」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익명게시판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곧바로 올라온 익명의 댓글이 내 머리꼭지를 핑, 돌게 하지 뭔가.

  아니, 은솔이가!!! 내 이럴 줄 알았어. 은솔아, 제발 화내지 마~ 넌 우리의 짱이야!!! 보스가 함부로 덤비는 거 봤니?

  그래, 은솔아, 네가 참어~~ 상대하면 너도 똑같이 나쁜 년 되자나~^^

  내가 썼다고? 아니다. 결단코 나는 아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건, 나는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없다. 정말 미치고 환장하고 펄쩍 뛰겠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 나는 곧바로 댓글을 달았다.

  「나도 너희들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는 하지만…… 얘들아, 오해하지 마. 이 글은 내가 쓴 게 아냐. 난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구!」

  너무 걱정 마. 은솔아, 우리는 항상 네 편이란다. 그러니 힘내! 웅? 홓홓홓~~ 

  「자습시간에 떠든 사람 적는 일도 웃기다. 우리가 뭐 초등학생이냐? 유치원생이냐? 그렇게 명단 작성해서 곧바로 선생님한테 갖다 바치겠지? 실장이 고작 한다는 게 고자질뿐이냐? 그게 학습 분위기를 높이는 방법이냐고! 영리한 머리에서 나온다는 게, 고작 그거였어? 에효, 이 멍청한 년!」

  은솔아. 너 학교에서 공부 안 하는 척하고 집에 가서 열심히 한다는 거 다 알고 있단다. 헐헐헐....---;;;;

  그러게, 나는 지우개 빌려달라고 말했는데, 그 순간에 적혀버렸넹~~ 에잇, 나쁜 년!

  그려, 디따 억울하겠당~ ^^*

  「글고 실장은 수업 시간이 무슨 개인 과왼 줄 아나 보다. 완죤 독무대라니까. 선생님은 걔 눈만 쳐다보고 수업하고. 그럼, 우린 뭐야? 들러리밖에 더 되냐고---;;;;」 

  그려, 은솔아, 고맙다. 우리의 아픈 맘을 알아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자나.…… ^^ 완죤 공감이다.!!!

  역쉬! 우리의 은솔이!

  속이 씨원허다^^. 은솔이, 화이링!!!!!

  나는 너무도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물론 자습시간에 떠든 사람을 적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반대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등학생으로서 대우받아야 할 인격체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나름의 계획과 생각을 가진 자율적인 청소년인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좀 야비하지 않나요? 난 분명 익명게시판에 어떤 글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모두 제가 쓴 것처럼 매도당해야 하나요? 아무리 익명게시판이라고 하지만 이래도 됩니까? 분명 쓴 사람이 있을 텐데, 왜 얼굴을 드러내놓고는 말을 못 하나요? 댓글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쓴 것도 아닌데, 자꾸 ‘네가 했지?’ ‘네가 했지?’ 라고 추측성 발언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침묵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누군가 내 의견에 적극 동조해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나서는 아이가 없었다. 나는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온몸에 한기가 피어올랐다. 두 팔을 감싸 안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햇살이 운동장 가장자리에 핀 백일홍 꽃잎 위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은 한낮의 땡볕이 채 가시지 않 9월 중순인 것이다. 앞으로 견뎌야 할 시간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에 앉은 승주를 돌아보았다. 승주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똑바로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더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게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이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자 서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실장이 급식에 관한 경고문을 올렸던 건, 차례를 지키지도 않고 자꾸 새치기해서 먹는 아이들 때문입니다. 뒷사람 생각도 해줘야 합니다. 자꾸 새치기하는 사람이 생기니까 뒷사람은 반찬이나 밥이 부족해서 제대로 먹을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실장 입장을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희는 얼굴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어쩌면 자신이 실장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사실 실장이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맨 앞자리에서 칼 맞아야 하는 사람 아닌가. 그때 누군가가 손을 들고 일어섰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물론 제 경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새치기한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급식담당자가 먼저 일어나서 식사준비를 해줘야 하는데, 하도 느릿느릿하니까 배도 고프고 답답해서 먼저 가져와 먹었던 게 아닐까요? 알고 보면 다 사정이 있게 마련인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강도 높게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새치기한 사람의 마음을 마치 다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럼에도 자신은 해당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다 뭔가. 그러자 서희가 냉큼 말을 받아 챘다. 

  “뒤로 가라고 하니까 ‘우리가 네 말을 들을 것 같냐?’고 했다던데요.”

  “그건 아마 장난으로 했을 겁니다.”

  “장난으로 할 말이 따로 있죠.”

  “그건 그렇지요, 옛날 속담에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법이다’고 했습니다. 먹는 일 가지고 우리 너무 그러지들 맙시다.”

  아이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이렇게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흩어지는가. 이야기가 화제의 중심에서 너무나 멀어져 버렸다. 나는 아이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승주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점점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지경이 되었다. 서희는 승주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는 밥 먹을 때는 건들지 말자, 같은 우스개 소리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실장에 대한 반감을 어떻게 개선해볼까 하는 것인데요, 좀처럼 해결책이 나오질 않는군요. 그러면 이번에는 실장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승주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물론, 제게도, 단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도, 저 나름대로, 학급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난을 받을 줄, 몰랐습니다. 모든, 책임을 지고, 이만 실장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꾹꾹 눌러 말을 하고 있었지만, 마디 사이가 가늘게 떨리고 있음이 역력했다. 간신히 말을 마친 승주는 앉자마자 곧 책상 위에 엎드려 버렸다.

  정말 승주는 서희의 말대로 아이들이 자신의 진정을 몰라주니 무력감을 느꼈던 것일까. 그 무력감이 승주로 하여금 더욱 강한 모습으로 자신을 무장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래서 승주의 갑옷은 더 튼튼해진 것일까.

  최근 들어 승주는 아이들이 의견을 낼 때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라고 단칼로 잘라버리거나, 의견을 내는 아이가 없으면 주로 딴짓하고 회의에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일으켜 세웠다. 밀린 숙제를 하다가 불시에 지목이 된 아이들은 당황해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일어섰고, 내내 얼버무리다가 제대로 된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 주저앉기 일쑤였다. 왜 그랬을까. 승주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승주의 변화를 부인할 수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야기가 더 이상은 진척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서희가 한 가지 제안을 냈다.

  “마음을 터놓고 갈등을 해결하자고 회의를 시작한 건데, 상처만 더 나열되는 기분이네요. 속엣말을 드러낸다는 것이 상처를 낫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깊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차원에서 <마니또 게임>을 하면 어떨까요? 여러분, 어떠세요?”

  오우!!! 한쪽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맞아, 맞아,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요즘 분위기, 정말 꽝이야! 아이들은 서로서로를 돌아보며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 무엇보다 사슬처럼 옥죄던 침묵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여태껏 한 마디도 없이 침묵을 지키던 교실의 상황이 한순간에 반전되었다. 

  “그러면 앞으로 친구의 마니또가 되어 따뜻한 마음을 표현해 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 반 분위기는 훨씬 나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니또 공개는 다음 주 이 시간이 어떨까요?”

  “네, 네, 네, 좋습니다!”

  아이들이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머리가 아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이럴 때는 뭐라고 하지? 당황이라고 하나, 황당이라고 하나?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담은 편지가 오갈 수 있다고 믿다니. 갈등은 그대로 덮어둔 채 겉만 봉합하는 편의적인 발상이 아닌가 말이다.

  어쨌든 갈등 치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채 회의는 끝났다. 문제는 마니또 게임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느냐, 일 것이다. 앞쪽 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자신의 노트를 찢어 쪽지에 번호를 적어 넣었다. 그런 다음 번호가 보이지 않도록 여러 번 접었고, 또 무작위로 섞어 아이들에게 하나씩 고르라고 했다.

  이윽고 각자의 마니또가 정해졌다. 나는 익명게시판을 그대로 남겨두자고 강력히 주장했던 친구의 마니또가 되었다. 내 마니또는 누구일까.

  

*


  그 뒤 일주일이 다 가도록 나는 선물은커녕 편지 한 장도 쓰지 못했다. 아이들은 시시때때로 편지와 간식거리, 선물 같은 것들을 친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물함에 넣거나 책상 속에 넣어 전달하는 모양이었다. 마니또가 누구인지 공개되는 날을 기다리며 아이들은 편지를 쓰고 선물을 사느라 유난을 떨었다. 익명게시판에는 또다시 마니또에 관한 글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누가 내 마니또냐, 나에게도 편지와 선물을 달라!!!’

  ‘절세가인, 내가 너의 마니또란다. 열쉬미 할게.’

  ‘슈파고랑, 내가 너의 천사님이 되어주마’

  ‘삼성가의 며느리 님, 이게 뭐냐? 아무 것도 못 해주고…… 내 심정을 이해해다고.. 흑흑’

  교실은 점점 잔칫집 같은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실장인 승주도 수시로 편지와 선물 공세를 받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승주의 얼굴은 도통 펴지질 않았다. 내게는 선물은커녕 쪽지 한 장도 배달되지 않았다. 내가 마니또에게 편지 한 장도 쓰지 못한 것에 복수라도 하듯 말이다.

  나는 점점 알 수 없는 상실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아이들과 나누었다고 믿었던 친화감이 어쩌면 가짜였는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밀려들었다. 어떤 호의도 베풀지 않으면서 누군가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뭔가를 주고받느라 바쁜 아이들 속에서, 주지도 받지도 못한 나는 고독한 섬처럼 떠있을 뿐이었다. 막막함에 시달리던 나는 끝내 그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마땅히 생각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익명게시판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 은솔이. 이곳에 처음으로 글을 올린다.

  얘들아, 마니또 게임이 도대체 뭐니? 나는 강요된 상황에서, 우연적으로 정해진 상대에게, 마음에 없이, 편지를 쓰고 선물을 주고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지금 학급 분위기는 마니또 게임으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뒤숭숭하지 않니? 이유야 어찌됐든 내 마니또에게 아무것도 전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해. 곧 있으면 무성의한 내 실체가 드러날 테니까. 나는 겁쟁이거든. 그러니 얘들아, 제발 이 우스꽝스런 게임 좀 그만둘 수 없겠니?』

  그러자 댓글들이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왜 네 마니또가 잘 안 챙겨주디? 우리들은 마니또 놀이하느라 즐겁기만 한데. 그러니 우리들의 이름으로 부탁한다. 제발!!! 네 개인적인 불만을 여기에 토해내지 마. 모처럼의 분위기 망친다고!

  흐미~ 넌 받으려면 먼저 주랬다는 말도 모르냐? 이런 깍쟁이 계집애야!

  ‘되로 주고 말로 받으리라~~~’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니깐!

  새겨들으시게. 홓홓홓……^^.

  나는 비아냥으로 가득 찬 댓글을 읽으며 곧바로 후회했다. 애초에 글을 올리지 걸 그랬다. 솔직하게 대화를 시도해보려다 등 뒤에서 칼 맞은 기분이다. 이런 아이들과 감히 소통을 꿈꾸다니. 확, 지워버려? 그러다가 한편으로 생각하니 오기가 치솟는다. 그럴 순 없어. 아이들의 말을 듣고 지운다는 건, 곧 진다는 의미니까. 갈 때까지 가보는 거야! 나는 입술을 앙다문 채 자판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나, 은솔이. 두 번째 쓴다. 칼자루 쥐어주면 무 토막 하나 못 썰 존재들이 익명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비열한 짓을 해대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이제 신물이 난다. 지금 너희들은 마치 승주가 모든 악의 근원인 양 저주를 퍼붓고 있지만, 사실은 시기심에 눈이 어두운 졸렬한 행위에 불과하다는 거, 알았으면 해. 분노의 표적을 만들어 자기 위안을 삼는 짓이야말로 소시민들의 표상이거든. 중요한 것은, 그 표적이 바로 너희들 자신이라는 거야. 결국 너희들은 스스로에게 비수를 꽂고 있는 거지.

  솔직히 말해 봐. 너희들, 승주처럼 되고 싶지? 승주처럼 되지 못해 화가 났지? 그러다보니 승주가 미워졌지? 그래서 승주를 괴롭히고 싶어졌니? 내가 왜 이렇게 속단하냐고? 내가 한때 그랬거든. 너희들과 똑같은 마음이었다는 거, 이렇게 고백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너희들! 익명이지만 하고 싶은 말 쏟아내고 나니 속이 시원하디? 그렇지만 이건 알아둬. 자신을 감추고 일방적으로 비수를 던져댄 너희들의 행동은 끝내 스스로의 가슴에 ‘나는 비겁했다.’는 사실로 남게 될 거야. 그동안 외로운 표적이 되었던 승주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 전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따라붙는 익명의 벌떼들.

  그래, 니 잘났어. 혼자 콩치고 팥치고 다해 먹으삼!

  디게 똑똑한 척하네, 증말!!!

  아, 졸라 재수 없어....!!

  아공~~, 열 받네, 열 받어!!!

  그러게, 짱 나네염!

  @#$%^&*(), *&^%$#@!!!!  

  나는 아이들의 댓글들을 읽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이들이 내지르는 온갖 욕설들은 익명의 허울에 기대어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연약한 비명 소리에 불과했다. 문득 아이들이 가엾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서랍 속에 편지가 들어 있었다. 제법 두툼했다.

  『은솔아! 나, 승주. 네가 올린 글 잘 읽었어. 사실 내가 네 마니또거든. 마니또 게임이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을 밝히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을 알고 있음에도 그럴 수가 없었어. 나도 따뜻한 말이 적힌 친구들의 편지나 선물을 믿지 않거든. 아이들은 어차피 곧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 그러니 손가락 사이에 면도날을 감추고 쓴 편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지. 이럴 순 없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얼굴을 감춘 채 칼날처럼 휘두르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는 이토록 호의를 표현하다니 말이야. 그건 위선일 뿐이야.

  나는 내 마니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어. 이번에 마니또 게임을 제안한 친구거든. 이 친구는 끝내 자신의 감정을 감추더라. 평소 아주 사소한 일에도 나를 감시하던 게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익명게시판에 나를 비난하는 글을 올렸던 아이더라. 누가 알려줬어. 익명게시판이어도 다 아는 수가 있대. 아마 본인은 모르고 있을 거야.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뭐든지 잘해보고 싶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싶었고, 실장으로서 학습 분위기도 살려놓고 싶었어. 내게는 콤플렉스가 많거든. 내게 형제라고는 오빠 하나인데, 오빠는 올해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유학을 떠났어. 오빠밖에 모르는 아빠 엄마. 내 존재는 그 밑에서 너무도 희미해. 오빠는 부모님의 자존심 그 자체거든. 지금껏 나는 아빠 엄마에게 한 번도 칭찬받은 기억이 없어. 그러니 나는 혼자 서야 해. 각오하고 있어. 

  생각해보면 이런 강박관념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이런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겠고. 어떤 때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싶어지기도 해. 하지만 그건 어쩐지 불안해. 이것 또한 공명심이겠지. 내가 잠도 안 자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의미가 뭔데.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버텨왔는데,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는 없잖아.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부질없고 허무해질까 봐 두려워. 내가 삶의 스타일을 바꾸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겠지? 은솔아,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네가 가르쳐줘. 무섭다. 아이들이, 세상이…….』

  한동안 멍하니 편지를 응시하고 있던 나는, 곧 아침 자습도 잊은 채 승주에게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나 은솔이. 마니또로서 보내준 네 편지 고맙다.

  그런데 넌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무섭다고? 엄살 부리지 마. 가면을 쓴 사람은 바로 너야. 익명에 기대어 자기를 지키고 싶어 했던 아이들의 실체를 너는 다 알면서도 시치미를 뗐어. 끝까지 모른 척 지켜봤잖아? 난 그런 네가 무섭다. 가면을 쓴 네가…….』

  여기까지 쓴 나는 더 잇지 못한 채 펜을 놓았다. 온몸이 움츠러들었기 때문이었다. 점점 두려워졌다. 아이들이, 세상이…….




<작가 후기>


 
 "저는 고등학교 선생으로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학생들과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청소년기는 성장 과정에서 오는 방황과 갈등만으로도 버티기가 쉽지 않은 때인데도,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혹독한 입시의 중압감까지 떠안고 있는 현실이지요. 그런 학생들과 희애락을 함께 나누다보면, 치열한 생존 경쟁의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학생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 절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은 곧 어른들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사회의 축소판이 되지요.


  더구나 소통을 꿈꾸게 했던 인터넷이라는 매체마저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상대방을 무차별하게 공격하는 무기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을 감추고 상대를 공격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교묘한 이중성과, 그럼에도 익명의 그늘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를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힘든 시절을 어렵게 통과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주지 못한 채, 음울한 이야기로 끝맺게 되어 무척 죄송스럽습니다."


<필자 소개>

장정희 (소설가, 교사)


전남 영광 출생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5년 무등일보 신춘문예를 거쳐 2004년 <문학과 경계>로 등단

현재 광주대광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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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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