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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진솔한 삶의 이야기로 우리를 위로하는 사람

  • 작성일 2007-02-12
  • 조회수 1,019




요즘 대학로에서 인기공연중인 1인극 <염쟁이 유씨>(사진 왼쪽은 연극포스터)에서 주인공으로 열연한 배우 유순웅 선생님을 대학로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공연을 앞둔 시점에서 요청한 인터뷰라 혹시라도 오후에 있을 공연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깊게 눌러쓴 모자 밖으로 삐죽 흘러나온 그의 흰 머리칼은 나이를 떠나서 그동안 그가 힘들게 걸어온 연극인으로서의 경력을 보여주는 듯싶었다. 충청도 어조로 느릿느릿 말씀해 주셔서 나는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연극에서 만났던 선생님은 1인극 <염쟁이 유씨>를 통해 여러 인물 군상의 이야기를 ‘다중적으로, 그리고 전천후로’ 소화하고 있었는데 말씀도 그리 하실까? 그의 이번 작품 이야기와 연기철학, 그 밖에 연기자로 살아가는 그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첫 질문을 던진 다음 나는 배우들의 목소리는 보통 사람들과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의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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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많이 바쁘시죠? 인터뷰다 뭐다 해서 꽤 바쁘실 것 같은데요?

 

=제가 하는 일이 ‘연극’ 하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바쁘지 않아요. 전 한가합니다. 연극하는 사람이 연극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죠. 내일도 오늘처럼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이런 인터뷰가 있는 날은 조금 바쁘기도 하지만 일 년에 한 번 하는 거니까 (씨익 웃으면서) 그렇죠 뭐. (유순웅이라는 배우는 최근 자신에게 쏟아지는 여러 매체들의 ‘찬사’에 무덤덤해 했다. 앞으로도 배우로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최근의 그의 연기에 쏟아진 찬사에 대해 일희일비할 감정 상태가 아닌 듯 보였다.)


지난해 ‘서울 연극제’에서 인기상을 수상한 이후, 관객들이 더 몰려드는 상황인데, 배우로서는 힘든 일이 아닌지요? (그의 연극은 전회 매진에 객석 점유율 110% 상황이라고 전해 들었다. 나도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 일주일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처럼 계속 연극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정말 다행이지만 한편으론 상당히 피곤하고 힘든 일인 것 같아요. 매일 매일 무대에 선다는 것은 긴장의 연속이죠. 몸이 아픈 것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 일이지만, 만약 목소리가 안 나오거나 할 때는 정말 치명적이죠. 그래서 몸 상태에도 신경을 많이 쓰죠. 그런 의미로 보자면 장기 공연은 어려운 작업이에요. 또 제 경우는 오랫동안 같은 내용을 반복하기 때문에 이제는 뭔가 좀 더 새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또 새로운 준비가 필요하죠. 한 마디로 피곤하죠. 그래서 몸 관리 잘 하려고 계속 신경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잠을 푹 자는 일이고요.


현재 소극장 ‘두레홀’에선 앙코르 공연에 들어간 상황이던데요. 이후의 스케줄은 어떻게 되는지요? 소극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수백 명씩 들어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잖습니까? 선생님이 열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참 많은 걸로 아는데요.

 

=지금까지 대략 300회 정도 한 것 같아요. 지난해에 받은 사랑만큼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이 연극을 사랑해 주실 것 같아요. 예상 외로 많이 분들이 이 연극을 찾아 주시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대략 3만 명 정도가 이 연극을 본 것 같아요.


‘염쟁이 유씨’는 어떤 연극인가요?


=염이라는 것은 ‘죽음’이라는 ‘부분’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절차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보내는 사람, 즉 염쟁이의 이야기예요. 평생 동안 수많은 사람을 저 세상으로 보내면서 느꼈던 감회나 소회 같은 것들을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진지하게 관객들과 이야기하는 연극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진 위는 연극 '염쟁이 유씨' 속 한 장면>

 

‘염쟁이 유씨’에 남녀노소 없이 다양한 관객이 관심을 갖는 이유를 뭐라고 보시나요?


=글쎄요, 재미있으니까 오시겠죠. 단순히 가벼움만 추구하는 세태 속에서 이 연극은 가벼우면서도 진지한 삶의 이야기를 꺼내요. 가볍지만 한편에선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 점이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최근 연극 소재들의 경향과 비교해 볼 때, 선생님의 이 번 연극은 어떤 차별화된 점들이 있나요?


=연극을 보신 분들은 이번 연극에 대해 ‘보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편안한 이웃집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연극이 원래 이런 건가!’라고 생경하면서도 즐겁다고 해요. 이 연극에는 관객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고 있어요. (때로는 객석에서 앉은 분들이 참여한다.) 그들은 자신이 연극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하고 있구나’ 라는 느낌이 든다는 얘기를 해요.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고 오픈되어 있는 점들이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점들이죠. 새로운 장르라든가 새로운 형식이 대학로에는 거의 없었는데 이번 연극의 이런 시도들이 관객들에겐 재미있었나 봅니다.



팸플릿에 보면 이 작품의 원작자인 김인경 선생님께서는 이 연극을 ‘광대 유순웅을 위한 1인극’이라 말씀하셨다고 적혀 있네요. 무대에 올리기 전에 두 분께서는 혹시 이와 같은 ‘소재(죽음)’의 작품 구상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셨는지요. ‘죽음’이라는 소재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특히 ‘죽음’이라는 문제는 이전까지 ‘기피했던’ 소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만.


= 충분히 이야기를 했죠. 우리(배우와 작가)는 애초부터 1인극을 한 번 멋지게 해보자는 뜻을 세웠죠. 그 과정이 일 년 정도 걸렸고요.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배우 유순웅에게도 편안하고 관객들과도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소재가 무엇이어야 할까, 고심했죠.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내가 살아온 이야기, 더불어서 우리 집안 이야길 작가에게 털어놓았죠. 어느 날 김인경 작가가 이런 소재(죽음)로 하면 어떨까 하고 ‘염쟁이 유씨’를 제안했죠. 이번 이야기라면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담을 수 있겠다 싶어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죠. 지금 생각해도 작가의 기획의도가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죽음이 갖고 있는 어떤 두려움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 삶의 희망을 엿볼 수 있고 또 여러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싶었죠.



‘모노드라마’의 힘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배우 입장에서는 모든 걸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라 일면 부담스런 일이었을 텐데요.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혼자서 끌고 가야 하잖아요.


=아, 그런 거 전 잘 몰라요.(씨익)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모노드라마니까 이번에는 더 열심히 하자, 라고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어요. 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이와 같은 모노드라마는 없을 것 같아요. 배우가 평생에 한 번 할까 싶은 1인극을, 이번에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행복한 일이었는데, 다행히 좋은 작가 만나서 더 큰 행운을 누리고 있네요.


 어쨌든 이번 연극은 모노드라마기 때문에 배우의 기량을 충분히 보여줘야 하는 장르였죠. 저는 다만 이 번 연극을 통해서 관객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으로 편안히 했어요. 물론 혼자 이끌어 가야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왜 없었겠어요? 아무튼 엄청나게 고민 많이 했어요. 1인극은 일단 무대에 서면 다른 배우와 ‘그 무엇’의 어려움을 나누는 형편이 못 되잖아요. 이를테면 두 사람의 배역이 나오면 둘이서 반반씩 책임을 지고, 셋이 나오면 한 사람이 3분의 1씩 책임질 데, 1인극은 무대에 서는 한 사람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잖아요. 제 경우도 맨 처음에는 스트레스가 상당히 컸고, 사실 지금에 와서 얘기지만 이렇게 많은 관객들이 제 연기를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지금까지 저는 단기적으로든 혹은 장기적으로든 제 인생의 목표를 정해 놓고 살아오지 않았는데, 이 번 작품을 하면서 삶의 태도가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변화를 겪고 있어요. 더군다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공연을, 원래는 길어야 석 달하고 말겠지 했는데 일 년 이상 하게 되었어요. 또 앞으로도 이 공연을 계속 해야 하니까 어찌 보면 행복한 배우죠. 아무튼 이번 일을 계기로 다른 일을 계획하게 되었고 또 많은 관객들에게 사랑까지 받으니 배우로서도 너무 행복하죠.



이번 연극에서는 관객의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는데, 이런 극의 구성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또한 관객의 참여로 인해 예기치 않게 생긴 에피소드들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을 소개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저는 연극을 하면서 객석과 무대가 분리된 연극을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에요. 이전에도 관객이 참여하는 연극을 만들려고 했었고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이번 연극으로 이어진 거죠. 장르마다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는데, 물론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연극이라고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겠지만 제가 하는 연극은 우리 삶의 이야기예요. 특히 저는 서민들의 삶과 밀착해서 우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반성하게 하는 연극들을 좋아해요. 그래서 이전에도 이 같은 연극 해왔고 이번 연극도 그 연장선에서 만들어지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 관객들도 자연스럽게 함께 하게 되었고요.

 
이번 연극에는 객석에서 출연하는
사람이 한 회당 5명 정도 고정되어 있습니다. 극중에 무대 위로 끌려 나와서 출연하는 고정 출연자의 수가 5명인데 지금까지 300회 쯤 했으니 대략 1500명의 객석 출연자가 나온 셈이죠. 이 분들은 아주 색다른 경험을 했겠죠. 처음에는 쑥스럽기도 했겠지만 아주 오랫동안 잊지 못할 작품이 되지 않겠어요? 또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에서는 관객들이 배우로부터 술을 한 잔 받는 상황이 있는데 이 경우도 한 회당 평균 5명 정도예요. 이 역시 1500명의 관객이 연극을 관람하다가 술 한 잔씩 얻어먹는 경험을 하게 되죠. 그들에게는 아주 색다른 경험이 될 거예요. 그런 분들이 ‘나 이 연극에 출연했어, 술 한 잔 얻어 먹었어’ 이렇게 얘기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주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이 연극의 장점이 아닐까 싶네요.


 특별히 재미난 일보다도 엉뚱한 일이 가끔 일어나죠. 예를 들어 배역을 맡겼는데 ‘나 못하겠다고’ 버티는가 하면, 젊은 층부터 나이 드신 분까지 골고루 있다 보니 객석에서 한 분이 갑자기 멸치를 꺼내준 경우도 있어 놀란 경우가 있고요. 그 순간만큼은 저도 그 분들이 연극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구나, 라
생각했어요. 또 느닷없이 한 관객이 ‘저 질문 있어요!’ 라고 물어오기도 해요. 이런 점들이 다른 연극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반응들이죠.



이번 연극을 통해서 선생님, 또는 ‘염쟁이 유씨’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나요?


=이 연극은 ‘잘 살아야 하지 않겠냐, 잘 사는 게 무엇이냐,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좋은 거냐, 돈 많이 버는 게 잘 사는 거냐’, 말하자면 이런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연극이에요. 잘 사는 것은 결국 더불어서 함께 사는 삶, 나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이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죠. 



연극을 본 대다수 관객들은 ‘죽음’이라는 소재의 연극에서 어떤 느낌을 받고 있나요?


=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들을 보니까 - 이것도 일종의 모니터라고 할 수 있겠죠 - 주로 재미있다, 감동적이다, 라는 이야기들이 올라와 있더라고요. 글쎄 기억에 남는 관객은, 어느 노부부가 제 연극을 보고 남편이 아내에게 시를 써서 주었대요. 그 모습을 보고 그 노부부의 며느리가 감동을 받아 시를 인터넷에 올리고, 또 영문학을 공부하는 아들이 영어로 그 시를 번역해서 올렸더라고요.


선생님은 어떤 계기로 연극배우가 되셨는지요?


=어렸을 때부터 연극하는 걸 좋아했어요.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에 연극에 참여했을 때 그냥 좋더라고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계속 연극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고 ‘연극’이 벌어진다 하면, 적극적으로 동참했죠. 그러다 고등학교 때 전공으로 연극을 선택하려다 못 하고 대학에 와서야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더 열심히 하게 되었죠.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나와서도 결국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이거다 싶어서 이 길로 들어섰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청소년 시절의 삶은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봐요. 자기 삶의 가치관이 성립되는 시기이고요. 저 역시 그랬던 것 같아요. 요즘에는 대학입학이라는 현실 때문에 공부에만 집중하니 많이 안타깝죠.


 제 경우는 워낙 어려서부터 연극을 좋아했기 때문에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학교 졸업 후, 갑자기 몸에 병이 생겼을 때 요양 차 고향인 청주에 내려가 있던 시절, 거기에서 아는 선배의 제안으로 시작했죠. 집에 있는 동안 연극이나 같이 해 보자 해서 시작한 것이 사회에 나와서 하게 된 첫 번째 연극이에요. 우연히 시작했다가 지금까지 하게 되었죠. 만약에 그 때 건강이 나빠지지 않아서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글쎄요, 전 지금쯤 아마도 다른 일을 하고 있을까요? (그래도 배우 유순웅은 ‘연극’을 했었을 것이라는 투로, 화법을 돌려서 나에게 반문했다. 나는 그의 화법에 당황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거예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연극’ 이란 무엇인지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데. 글쎄요, 내가 아는 연극은 우리들 삶의 이야기 속에서 위로도 받고, 새로운 방법도 모색해 보는 것이죠. 다른 연극은 잘 모르겠지만 내 연극은 그 속에서 찾으려고 해요.



‘좋은 배우’란 어떤 배우인지요?


=좋은 배우란 자기 철학이 분명히 있는 배우죠.(단호하게 말했다.) 요즘에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내가 왜 이 연극을 하는가, 관객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배우의 몫인데 단순히 배역이 있기 때문에, 연출자가 이 배역을 맡겼기 때문에 하는 것 같아요. 가치관이 분명하게 서 있는 배우들은 흔치 않은 것 같아요. 건방진 얘기 같지만 자기 가치관, 자존심이 있는 배우들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배우라고 하면 탤런트나 영화배우를 생각하고 화려함이나 돈을 좆는 배우 지망생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그렇게 해서 들어오면 거의 다 실패한다고 봐요. 그래서 제일 먼저 배우가 해야 되는 것은 자기 가치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선생님처럼 연극배우가 되고 싶다면 지금의 청소년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저는 배우가 되고 싶다면 연기를 공부할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인문학, 예를 들어 사회학, 철학 등의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한편으로는 세상 경험을 많이 해보라고 권하고 싶네요. 그것이 깊이 있는 배우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라고 봐요. 어려서부터 연기 공부를 하면 연기 자체는 잘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깊이 있는 배우는 절대 되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연극영화과에 진학해서 공부하는 것을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연극영화과도 결국은 기교를 배우는 곳이죠. 10대, 20대 때 역사나 문화 등 다양한 것들을 공부하고 경험하고 나서 그 다음에 연기해도 늦지 않아요.



선생님의 경우, 배우로서의 영감과 자극을 어디서 받고 계신지요? 한편 배우로서의 자질은 타고 난다고 보시는지요.


= 저는 굉장히 단순한 사람이라 그런 것 없어요. 연습하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아요. 가끔 배우로서의 자질을 갖고 태어난 이들이 있기는 해요. 하지만 대부분은 훈련을 통해 가꾼 것이죠. 가꾸어질 땐 기술만 습득한 사람과 삶 속에서 체득되어진 경우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죠. 연기의 감흥에서 달라요. 예를 들어 평생 농부로 살아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보는 것과, 배우가 농사꾼의 이야기를 연기할 때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요. 전자에 훨씬 더 많은 감흥이 있죠. 얼굴만 봐도 달라요. 진짜 농부의 얼굴엔 농부로 살아온 그의 이력이 표정에 있잖아요.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을 하셨는데 이번 경우처럼 사랑을 많이 받거나 혹은 애착이 많이 갔던 배역은 무엇이었는지요?


= 전 기억력이 없어서....... 한 십 년 전에 ‘월급도둑’이라고 제가 직접 쓰고 출연한 작품인데 감옥에 간 노동자 이야기예요. 그 작품과 배역이 기억에 남네요. 노동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노동자의 이야기라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연극에는 온갖 잡범들이 등장하죠. 저는 강간범 역할을 했었는데 재밌었어요. 어떻게 보면 개성 있는 역할이라 연기하기도 편하고 제 스스로도 재밌었던 같네요.


 

지금은 주목받는 배우로서 행복해 보입니다만, 연극배우로 살아가자면 여러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연극배우’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얻는 즐거움과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나요?


= 배우로서 제일 어려운 점은 경제적인 어려움일 거예요. 일부 톱스타들은 상당히 많은 돈을 벌고 있기도 하죠. 하지만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밑에 훨씬 더 많은 수백 배, 수천 배의 배우들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 반열에 오르는 것은 실력만 갖고 되는 것은 아니에요. 돈을 많이 버는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실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죠. 실력은 무명배우들이 훨씬 더 좋을 수 있어요. 대부분의 배우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경제적인 면이고, 이 부분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아요. 물론 버는 만큼만 쓰면서 생활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부분이죠.

 

또 배우라는 일도 결국은 창작하는 일이에요. 자기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든 작업이에요. 이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죠. 이런 노력들을 거치지 않으면 배우는 연기의 그 ‘깊이’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죠.


 이런 인내의 시간을 극복해야죠. 그리고서 비로소 내가 무대에 올라갔을 때 관객들이 좋아하고, 기뻐하고, 나름대로 내 연극을 보면서 한번 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다면 배우로서의 보람을 느끼죠.

 

 

 

 극중에선 선생님께서 염을 하는 모습을 실제 재현하시던데, 이와 같은 일을 어디서 배웠나요?
 관객의 입장에서도 ‘염하는 모습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


=염쟁이의 삶을 표현 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염하는 과정을 몰라서는 안 되었기에 열심히 배웠죠. 염하시는 분으로부터 아주 자세하게 배웠어요. 연극 망하면 염해서 먹고 살아도 되겠구나, 이럴 정도로 배웠어요. 그런데 이게 사실 다 보여주는 것은 아니거든요. 지금은 오래 지나서 다 잊어버렸어요. 연극에서는 일부분만 나오죠.



매일 매일 새로운 관객을 만나는데,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아직도 ‘염쟁이 유씨’ 라는 제목이 갖고 있는 무거움 때문에 많은 분들이 지루하지 않을까, 혹시 어두운 얘기가 아닐까 우려하고 계신데 절대 그런 연극 아닙니다. 그냥 편안하게 오셔서 한 가지 정도만 ‘남겨’ 가셔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되는 연극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처럼 인기 작품으로 관객의 시선이 쏠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신지요? 대형 뮤지컬이다 해서 세계 각지에서 들어오는 작품이 점점 많아지는 요즘이잖아요. 지금보다 더 많이 우리 연극이 사랑받을 수 있는 방안은 뭐라고 보시는지요?


= 잘못된 거죠. 그 사회의 문화가 발전하고 그 사회에 문화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존중받아야 하거든요. 연극뿐만 아니라 문학을 비롯한 다른 장르 예술도 그렇고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쏠림현상이 지나치게 많아요. 우리나라가 유럽의 큰 나라에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더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연극도 다양한 장르들이 있어요. 일례로 조금 이해하기 힘든 부조리극 같은 경우는 나름대로 가치가 있음에도 외면을 당하죠. 이런 문화의 다양성이 존중받을 때 문화가 꽃필 수 있겠죠. 쏠림현상도 일부 인정할 필요는 있겠죠. 하지만 그 쏠림현상 때문에 아예 하나의 장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예요. 대학로 연극도 지나치게 가벼운 연극에만 집중되어 있는 점이 우려스러워요. 문화를 즐기지 못한다고나 할까요? 어떻게 보면 문화정보를 소통시키는 미디어들도 한 곳에만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선생님의 이번 연극도 처음에는 지방에서 먼저 공연하신 걸로 아는데 지방 연극과 서울 수도권 연극의 차별은 없는지요?

 

= 일단 서울은 ‘창작’이 존재하고 지역은 거의 없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 점이 지역문화가 죽어가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연극 예술은 연출이 창조하는 것인지, 또는 극작이 창조하는지 애매한 부분들이 있거든요. 연극인들은 연출이 창조한다고 하지만 극작이 차지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서울의 경우는 창작극을 많이 올려서 아주 유명한 작품이 되기도 하는데, 지역은 대부분이 서울에서 했던 공연을 사다가 다시 공연하는 형태가 된단 말이죠. 아무리 좋은 작품이 나와도 서울에서 했던 작품,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이미지가 있어요. 그래서 훨씬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도 인정받기가 힘들다는 거죠. 특히 언론의 관심이 중앙에 집중되다보니 더더욱 힘들죠. 물론 서울의 연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기도 하지만 창작극보다는 번역극이 오히려 더 득세를 하는 것 같네요. 일례로 수입해서 무대에 올린 대형 뮤지컬의 경우에도 오리지널이 오면 갑자기 서울의 뮤지컬도 설 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욱 창작이 중요하죠.


이렇게 ‘장타’를 날리면 수익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연극배우’는 배고프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있잖아요. 지금도 이런 실정이 맞는지요?


=흡족하지는 않아요. 연극배우로서는 꽤 고수입이지만, 보통 배우들은 대학로에서 연극배우를 하면서 먹고 사는 게 거의 힘들어요. 그래서 틈틈이 영화, TV에 출연하면서 생활하죠. 저의 경우도 고수입이라고는 하지만 연극계에서의 얘기지 다른 분야와 비교하면 너무나 적지요. 노력한 것에 비해서는 너무 적지만 어쨌든 연극만 해서도 먹고 살 수는 있어요.

 구조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상위 몇 프로가 존재하고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하위구조가 있는 거죠. 근본적으로는 배우들이 먹고 살기는 힘들지만, 한편에서는 배우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면 그만큼 연극적인 면에서도 질이 좋아질까라는 회의가 들기도 해요. 물론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하는 게 사실이긴 해요. 하지만 배우가 돈 맛을 알면서 배우로서의 자세를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기 때문에 과연 어느 것이 좋은지 잘 모르겠어요. 예술가를 최고로 쳐 주는 사회주의 국가와는 달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가 배고픈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죠. 참 어려운 부분이네요.



목을 너무 쓰신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여러 질문에 대한 답변 감사하고 죄송하네요.


= 크음 큼.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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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후기*

“공연이 끝나고 등을 구십도 가까이로 꺾어서 무대 인사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그의 젖은 등을 보았다. 그것은 배우가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노동의 흔적이기도 했다.”

 

<광대 유순웅 선생님 소개>

 

출연작 / 마당극

<막걸리 총각>, <작업장 타령>,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 <청남대 공화국>, <대돈무문>, <제3의 미수>, <장사의 꿈>, <기동타격대>, <막걸리 총각>, <농자천하지대봉>, <집> 외 다수 출연.


연출작 / 춤극, 마당극

<아해별곡>, <여자 女子 여자>, <공해강산 좋을씨고>, <귀향>, <진달래의 노래>, <집>, <봉>, <농자천하지대봉>, <강> 외 다수 연출.


극단 놀이패 열림터 대표 역임.

전문예술단체 <예술공장 두레> 대표 역임.

충북문화운동연합 사무국장 역임.

충북민예총 조직국장, 예술사업위원장 역임.


현 예술공장 두레 상임연출.

전국민족극운동협회 이사

충북민예총 감사


1999 민족광대상 수상

2002 충북연극제 연기상 수상

2004 올해의 예술가상 수상

2005 전통연희개발 대본공모 최우수작 선정<강>

2006 서울연극제 인기상 수상<염쟁이 유씨>


세계야외공연축제 초청공연

공주 1인극제 초청공연

고나마루 연극제 초청공연

2006 제3회 시선집중 ‘배우전’ 개막초청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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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염쟁이 유씨' 미니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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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대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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