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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문학의 세계 <2>

  • 작성일 2007-04-03
  • 조회수 486






 


“인류가 발명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 창작법-추리소설”


“추리소설이 별거야? 사람 하나 죽여 놓고 형사 몇 명이 왔다 갔다 하다가 어리숙하고 욕심 많은 범인 하나 잡아내면 되는 거지.”

추리소설을 얕잡아보는 일반 소설가들이 가끔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틀려도 한참 틀린 이야기다.

추리소설은 우선 엄격한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 문예 소설은 어느 정도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일 때 더 매력적인 경우가 있다. 그러나 철저하게 재미를 추구하는 추리 소설은 한 치도 현실에서 어긋나는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영미의 추리소설 비평가들은 ‘인류가 발명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 창작법이 추리소설이다’라는 말을 흔히 한다.

실제로 추리소설가가 수사에 도움을 준 케이스도 있다. 의사 출신인 셜록 홈즈의 작가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과 역시 의사 출신 작가 프리맨(Austin Freeman, 1862~1943)의 작중 기법이 실제 수사에 원용되어 범인을 잡아낸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독자를 안달나게 만드는 추리 작법


그렇다고 해서 추리소설을 범인을 잡는 수사 실화와 같은 수법으로만 써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수사소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사소설은 추리소설 독자들이 요구하는 스릴과 잠을 못 이루게 할 만큼 한 궁금증을 펼쳐내지 못다.

추리작가들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공식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 추리 작법을 알고 있다는 차이뿐, 작가들의 두뇌가 독자보다 훨씬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추리작가들의 장사 밑천인 ‘추리소설의 공식’은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그렇다면 추리소설이 수사 스토리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수사 스토리도 수사소설이라는 추리 속의 장르로 존재한다. 그 외에도 추리소설은 그 발달 과정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눌 수가 있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셜록 홈즈 시리즈라든가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0~1976)의 소설은 어떤 종류에 속할까? 추리소설의 종류를 살펴보면서 추리소설에 대한 이해를 더욱 높여 보자.


(1) 고전파 추리소설: 수수께끼 풀이


이 형식은 정통파(正統派), 또는 본격(本格) 추리라고도 하며 추리소설 태동기에 등장하여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아주 중요한 형식이다. 160여 년 전인 1841년, 미국의 작가 드거 앨런 포우(Edgar Allan Poe, 1809~1849)의 소설 <모르그가의 살인(Murder in the Morgue)>이 이 형식의 시조로 꼽힌다. 어떤 평론가는 이러한 종류의 추리소설을 수수께끼 풀이, 혹은 퍼즐형 추리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장르의 추리소설은 이 형태에 근거를 두고 있다. 비록 주요 특징이 다른 종류의 추리소설에 속한다 할지라도 추리라는 이름이 붙으면 이 정통파의 요소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모르가의 살인>은 파리를 무대로 쓰인 작품이다. ‘뒤팽’이라는 탐정이 작품 속에 등장한다. 이 탐정이 추리소설 역사상 최초의 사립 탐정이다. 미국 사람인 포우가 왜 살인 사건의 무대를 파리로 삼았으며, 탐정 이름을 프랑스 이름인 ‘뒤팽’이라고 했는지는 정말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포우 연구가들은 늘 프랑스식 복장을 하고 다니던 포우 자신의 모습을 ‘장자끄 뒤팽’으로 표현했다고도 한다.

참고로 프랑스에서 ‘뒤팽’이라는 라스트 네임을 쓴 유명 인사는 백과사전에 오른 이름만 12명이나 된다고 한다.

어쨌든 포우로부터 시작된 이 고전파, 또는 본격 추리 소설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다.

 첫째, 살인 사건이 서두에 일어나고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둘째, 탐정이 등장하여 사건을 추적한다.

 셋째, 범인에 대한 추리가 계속되며 여러 명의 용의자가 계속 드러난다.

 넷째, 독자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보기 전에는 절대로 범인을 알지 못한다.

 다섯째, 작가는 기상천외 방법으로 저질러진 범인의 범죄 수법을 통쾌하게 밝혀내    독자의 감탄을 자아낸다.

대체로 이러한 요소를 갖춘 플롯을 통파로 분류한다.

여기서 독자를 흠뻑 빨려 들게 하는 것은 연속되는 미스터리의 발생이며, 말미에서 드러나는 반전의 놀라움이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아로 탐정 시리즈, 엘러리 퀸, 일본의 마 세이(松本淸張), 한국의 노원 등이 이에 속한다.


(2) 하드보일드(hard boild)형: 비정파, 냉혈파 추리소설


이는 비정파, 냉혈파 추리소설이라고도 한다. 미국의 포우가 추리소설의 아버지라면 이 장르는 영국으로 건너가 유럽서 꽃을 피운 뒤 다시 하드보일드라는 스타일로 미국으로 돌아온다.

반 다인이 기초를 닦고 하메트가 시작했으며, 레이먼드 챈들러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하는 장르이다. 한국에서는 김성종(1915~1945)이 이에 분류된다. 하드보일드란 계란을 익히는 방법 중 딱딱하게 완숙시키는 방법에서 따온 말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립 탐정이나 수사관들은 더 이상 머리만 짜내는 사색형 탐정이 아니라, 권총을 들고 거리로, 우범지대로 부지런히 넘나들면서 총을 쏘고, 육탄전으로 치고받으며 범인을 잡는 맹활약을 한다.


(3)도서형(倒叙型): 범인이 먼저 등장


정통파 추리소설을 거꾸로 나열한 형식이다. 범인이 살인하는 장면이나 트릭을 처음에 자세하게 보여준다. 독자는 물론 누가 범인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 탐정이 어떻게 범인을 꼼짝 못하게 증거를 들이대서 체포하느냐 하는 것을 그린다. 한국에서도 20여 년 전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관심을 끌었던 <형사 콜롬보>(1968)가 이 장르에 속하는 추리 드라마다.

추리소설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형사 콜롬보>에서 이런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범인이 누구라는 것을 형사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을 함부로 다루거나 구속하거나 위협하는 일이 없다. 인권을 최대 존중해주면서 조심스럽게 수사한다. 함부로 연행해서 고문하거나, 자백을 강요하다가 ‘아니면 말고’식으로 풀어주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과거 공산 국가 같은 독재국가에는 추리소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소련에도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전에는 추리소설이 없었다. 그러나 민주화된 러시아에는 지금 추리소설이 문학의 꽃을 피우고 있다.

북한에도 추리소설이 없다. 그들 사회에는 식적으로는 범죄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사 범죄가 있다손 치더라도 고문 같은 수법으로 자백을 받아내면 되는데 어렵게 <형사 콜롬보>가 나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4) 스파이 소설: 007 시리즈가 대표적


추적형 추리소설이라고도 한다. 스파이, 비밀기관의 비밀공작 활동 등을 소재로 한 장르이다. 우리가 잘 아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스토리 등이 이에 속한다. 톰 크린즈의 <붉은 10월호>(1990)도 이에 속한다. 그러나 동서 냉전이 사라진 후 이 장르가 이미 쇠퇴했다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다.

동서 냉전을 주제로 한 스파이 소설이 사라져가는 대신에 다국적 기업 같은 경제 문제를 다루는 산업 스파이 소설이 등장하여 이 테마를 대신하고 있다.


(5) 범인 검거형: 형사의 활약상을 강조


추리보다는 형사의 행동을 따라간다. TV극에 자주 나오는 형사 스토리, 수사 소설 등이 이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흑백 텔레비전 시절에 오동안 인기를 끌어 왔던 최불암 주연의 <수사반장>(1971~1989)이 이런 종류에 속한다. 스토리의 전개 방법이나 범인 설정이 평이하기 때문에 정통 추리만큼 재미는 없지만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장르이다.


(6) 사회파 추리: 사회 모순과 갈등을 심도 있게 다뤄


사회의 모순과 갈등으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 현상을 심도 있게 파헤쳐 주제가 비교적 무거운 추리소설이다. 대체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쓰이는 경우가 많으며, 문예 소설보다 훨씬 강렬한 주제를 들고 나온다. 일본의 모리무라 세이(森村誠一, 1933~) 등이 이에 속하는 작가다. 특히 모리무라 세이치의 <인간의 증명>(1977)은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혼란상을 잘 묘사하여 순수문학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평도 받고 있다.

김성종도 <어느 창녀의 죽음>에서 6.25 전쟁에서 비롯된 비극의 한 토막을 중편소설로 다루었으며, 이상우도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여자>에서 80년대 민주화 투쟁과 노동운동의 치열한 면모를 소재로 장편을 썼다.


(7) 순수 문학형: 예술적 소재를 부각하면서도 추리 기법 골격 유지


불가사의한 사건을 다루되 예술적 소재를 더 부각시킨 소설이다. 범죄 동기의 휴머니즘적 분석, 주인공들의 심리 변화 등을 주로 다룬다. 그러나 추리의 기법은 골격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일즈(Francis Ils, 1893~1971), 프랑스의 조르쥬 심농(Georges Simenon, 1903~1989) 등이 여기에 속하는 작가이다.

일생동안 2천 편에 가까운 경이적 다작을 남긴 프랑스의 조르쥬 심농 같은 작가는 살인이 없는 추리소설도 써서 이 장르의 새로운 모습을 개척하기도 했다. 심농의 문학성에 대해서는 앙드레 지드도 감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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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권경희


1959년 경기도 이천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중퇴, 방송대 영어과 졸업
제1회 김래성추리문학상 수상 수상 [저린 손끝]
작품으로 <저린 손끝>,<거울없는 방>,<물비늘>,<트라이앵글> 등이 있음
현재 현대불교상담개발원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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