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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알아차림'을 찍는 사람

  • 작성일 2007-09-03
  • 조회수 896



 

 
 고요한 방의 거실 한쪽에는 기인(奇人) 중광이 그렸다는 일필휘지의 ‘달마도’가 걸려 있었다. “중광이 그렸는데, 아마 그의 달마 가운데 최고일걸.” 달마도 하면 으레 세로로 그려진 것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데, 방금 전에 본 달마도의 얼굴과 어깨는 가로로 길쭉하게 펼쳐져 있어서 참으로 이상타 생각하고 있었다. “보이는 대로……파격이지.”

 

 다른 벽에는 탄생 연도가 ‘1932~2020’으로 기록된 은하수 모양의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내가 1932년생이거든. 2020년이면 내 나이 88세. 그러니까 난 이제 14년 남았어. 내 삶의 은행에 남은 ‘생명’ 잔고가 14년이야.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하잖아. 나는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 시선을 돌려 다른 벽에 붙은 선화(禪畵) 한 점을 보는데, 선생님은 슬쩍 내 쪽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잘 봐봐. 이건 화장(火葬)인데, 한 구는 반쯤 탔을 때고 다른 한 구는 다 탔을 때야. (선생님이 직접 찍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육신이 다 타고 난 가벼운 주검을 ‘자세히 좀 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사진 속 주검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찻잔이 놓인 자리까지 와 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선생님은 늘 죽음을 의식하며 산다고 했다. 그리고 이 같은 삶의 자세는 지금까지 해온 당신의 사진 작업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으, 이거 육명심 선생님도 중광처럼 파격이 아닌가?’ 하고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티베트에서 가져왔는데 한번 봐봐. 해골이야. 어여 한번 만져보시고.” 해골이 있는 방이라. ‘아, 이거 점점 서늘해지는군.’

 

 하루 종일 혼자 계신다는 선생님의 공부방엔 큼지막한 방석이 하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참선을 하고 계셨다고 했다. “막 참선을 끝냈을 때 자네가 온 거야. 더웠지? 어서 차 한 잔 드시오.” 차로 더운 목구멍을 적신 다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선생님, 요즘은 어떠세요?” 선생님은 오랫동안 서울예술대학에서 사진 강의를 하셨고 지금은 정년퇴임하셨다. “내게는 지금이 황금기지. 사람들은 퇴임한 나보고 밀려났다고 하는데, 아니야. 정반대야. 드디어 속박에서 풀려났다는 기분이야. 말하자면 골든타임이지.”

 

 오랜만에 혼자 노시는 방에 손님을 들인 쪽은 내 쪽이 먼저 찻잔을 들 것을 권유하시곤 조용히 침묵하셨다. “그런데 내게 궁금한 뭐야?” 마른 침을 넘기신 선생님은 ‘내 쪽’ 눈동자를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들여다보셨다. “어여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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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최근 근황은 어떠신지요?


= 올해가 서울예술대학을 정년퇴임한 지 횟수로 9년째인데, 재밌게 잘 놀고 있지요. 이게 근황이에요. 곧이들을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하루일과는 정확히 오전 2시 50분에 시작돼요. 일어나 세수하고 3시부터 한 시간 동안 좌선(坐禪)을 해요.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4시부터 30분간 양재천 주변을 포행해요. 그 후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은 다음 7시 정도에 밥을 먹고 8시 가까이 돼서 이곳(역삼동에 있는 선생님 작업실)에 오죠. 그 시간부터 오후 5시까지, 9시간 동안 여기에서 놀아요. 이곳을 저는 사무실이라고 안 하고 ‘노는 공부방’이라고 하는데, 하루를 여기서 보내요. 오전엔 좌선하고, 또 좌선이 싫어지면 책을 보고, 오후에도 좌선하다가 그것이 또 싫어지면 책 보고 하죠. 그게 제 일과예요. 저녁 7시쯤 집에 가서 밥 먹고 식구들과 한 시간 정도 대화해요. 그러다 9시쯤 내 방에 들어가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좌선을 하고 10시쯤 잠자리에 들죠. 수면시간은 다섯 시간 정도. 이 일과는 평일이나 일요일이나 변함없어요.



 그럼 사진 촬영은 언제 하시나요?


= 요즘엔 사진 촬영을 별로 못 했어요. 특히 작년에는 전시회 때문에 그랬고, 올해는 책 출간 때문에 거의 못 했죠. 그렇다고 전혀 안 한 건 아니고요.



얼마 전에 출간하신 <문인의 초상>(열음사, 2007.사진 아래 왼쪽)이란 책을 보았습니다. 여기저기서 호평한 글들도 함께 읽었어요. 사진집이 이렇게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니 놀랐습니다. 혹시 이런 좋은 반응을 예상하셨는지요.


= 반응이 이렇게 좋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요. 물론 출판사 사람들은 좋은 반응이 있을 거라 예상했겠지만요. 이번에 책으로 묶어져 나온 사진은 제가 1960년대 말부터, 정확히는 1967년부터 1970년 말까지 한 10년 정도 찍었던 사진들이에요. 그동안 어떤 의미에서 사장시켜 놓았던 작품들이죠.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문학전문 출판사에서 보게 되었어요. 이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더군요. 그래서 서둘러 책으로 낸 거예요. 사실 이번 사진집에 실린 사진은 문인들뿐인데 제가 갖고 있는 사진은 이게 다가 아니에요. 문인만 찍은 게 아니거든요. 대한민국의 예술가 모두를 찍었어요. 화가, 조각가, 음악가, 인간문화재 등 여러 인물들을 찍었지요. 이번에 책으로 묶어져 나온 건 그 중 절반 정도라 할 수 있죠. 처음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이 ‘대박’날 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네요.

 

 

 


 


선생님께서는 영문학도이셨는데, 미학미술사학도 공부하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다시 사진작가가 되셨는지요?


= 사실 맨 처음에는 영문학과(연세대학교)에 가려고 하지 않았어요. 철학과에 가려고 했지요. 제가 대학을 다닌 시절이 50년대였는데, 그때 연세대학교는 입학생을 계열별로 모집했어요. 학과 인원은 정원대로 뽑았지만 처음부터 배속은 시키지 않았죠. 2학년 때 학과를 선택하게 했어요. 전 철학과를 지망했죠. 당시 저는 동양철학(노자, 장자)을 공부하려고 했죠.

 그랬는데 1학년 때 국어 교양시간에 박두진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 운명이 바뀌었어요. 어느 땐가 박두진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글을 써 내라고 하셨어요. 강의만 하시는 게 재미가 없으셨는지, 시도 좋고 수필도 좋으니 뭐든 써서 내라고 하셨어요. 그때 전 시를 써서 냈죠. 그런데 일주일 후 선생님께서 ‘육명심이 누구냐?’ 하시는 거예요. 그리는 ‘글 쓴 게 또 있느냐?’고 물으셨어요. 없다고 하니까 그럼 다시 하나 써오라고 하더라고요. 청록파 시인으로 인기가 꽤 많으셨던 선생님께서 제 시가 좋다고 칭찬해주시니, 저는 정말 신이 났죠. 그때 시라는 것을 처음 썼는데, 두어 편 더 썼지요. 누군가가 날 인정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2학년 올라갈 때 선생님과 상의를 했죠. 선생님은 저에게 국문과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싫다고 했어요.

 당시 연세대 국문과는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 등 국어학자들의 총집합소였지요. 그 양반들이 얼마나 깐깐했는데요. 게다가 얼마나 투사적인지. 국문과에 가면 숨이 꽉 막힐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교수님께 전 ‘국문과 대신 차라리 영문과 가서 시를 공부하겠습니다.’ 했죠. 그래서 영문과를 가게 된 거예요. 이후 홍익대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에 가서 공부했지만, 그건 솔직히 말하면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석사학위 때문이었어요. 말하자면 요식행위였죠. 제가 1971년도부터 서라벌예대에 사진과 전임으로 강의를 시작했는데, 그때 석사학위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죠. 때마침 홍대에서 미학미술사학과가 생긴다고 해서 들어가게 된 거고요. 그래서 홍익대 대학원은 서라벌예대 선생하면서 다닌 거예요. 그 덕분에 미학이나 미술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할 수 있었죠. (선생님의 중고등학교 동창들은 선생님이 사진을 한다니까 놀랐다고 한다. 친구들은 육명심은 정 안 되면 점집이나 하고 있을 위인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을 하게 된 동기는 결혼할 때 아내가 가져온 사진기 때문지요. 그 무렵의 집사람은 사진을 정말 잘했어요. 여중 때부터 사진을 했으니까요. 신혼여행 때 삼각대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지요. 그러니까 사진은 마누라한테 배운 거나 다름없어요. 그렇게 신혼여행 가서 사진을는데 아주 재밌더라고요. 글 쓰는 것도 재밌지만 사진이 더 재밌었어요.

 당시는 아마추어니까 사진을 찍어서 DP점(필름의 현상, 인화, 확대를 하거나, 그런 일을 중개하는 가게)에 맡겼을 때였죠. 내 고향은 대전인데 그때 제일 큰 DP점을 출입할 때였어요. 당시 사진을 좀 한다는 분들이 그곳에 모였지요. 말하자면 사진하는 사람들의 집합소였죠. 그런데 그들이 모두 나한테 와서는 사진을 하라는 거였어요. 사진 재주가 있다고 자꾸 부추지요. 그래서 그네들 말대로 응모를 했는데 상을 탔어요. 그거보라고 하더요.

 그래서 그 다음해에 한국에서 최초로 열린 ‘동아국제사진살롱전’에 응모했어요. 그리고 은상 입상지요. 나 혼자만 입상했어요. 2,30년 동안 사진에 열중한 선배들은 다 떨어지고 저만 된 거예요. 당시에는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사진을 하게 된 거지요. 하지만 전 문학과 사진에만 관심이 있던 게 아니었어요. 연극도 했었지요. 연세 대학교엔 ‘연희예술극연구회’가 있었어요. 고학교 극회와 함께 당시로선 꽤 유명했죠. 오현경 씨도 저와 함께 연극을 했었죠. 표재순이라는 분은 당신 연출을 맡았고요. 전 무대에 네 번 선 배우예요. 아동극 연출도 한 번 했고요.

 당시는 미술, 연극, 영화 등등 예술 전반에 걸쳐 두루두루 관심을 가졌었죠. 거기다 당시에는 노자와 장자 등 동양 철학에 푹 빠져 있었어요. 한마디로 예술 이론의 기초와 인문학적 소양이 나름으로 갖춰져 있었던 것이죠. 그런 밑바탕이 그대로 그 무렵 나에게 찾아온 사진으로 옮겨간 거죠. 심지어 나는 국악, 탈춤, 판소리에도 관심이 많았지요. 그 무렵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 때요. 그때 판소리 하시는 분들을 다 만났어요. 노인들만 모이는 자리에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타나니까 눈에 확 뜨였지요. 그때 박동진 선생님, 정권일 등 인간문화재 분들을 만났지요. 심지어 저는 심우성이라는 민속학자 남사당패에서 깃발 들고 나오는 그런 모습까지 본 사람이에요. 또 무세중 씨가 처음 출발한 걸 관객으로 지켜본 사람이죠. 중학교 3학년일 때 거예요. 아무튼 중학교 때부터 이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죠.

 지금 생각하니 인문학에 대한 밑바탕이 있었기에 보다 쉽게 사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그때는 사진하는 것이 글 쓰는 것 보다 편했었죠. 방에 박혀 있는 거보다 카메라 들고 밖으로 ‘훨훨’ 나다니는 게 좋았죠. 그것이 자유롭고 편했어요. 그리고 여기저기 응모해서 상도 받고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사진에 깊이 빠진 것이죠. 아무튼 전 아내가 결혼할 때 가져온 사진기로 사진을 했다고 볼 수 있죠. (웃음)

 

 

 

 

 선생님의 작품 세계는 그동안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요. 


= 처음에는 남들 하는 대로 찍었죠. 그러다 중요한 계기가 찾아왔어요. 하루는 박두진 선생님이 절 불렀어요. <하얀 날개>라는 시집을 출간하는데 자네 육명심이 사진을 좀 찍어줘야겠어, 하셨지요. 당시 책 장정은 변종하 선생이 맡으셨고요. 저야 영광이었죠. 변종하 선생은 그때 한국미술계에서 이름난 화가였죠. 그때 박두진 선생님은 제가 찍은 사진의 반응이 좋다고 하셨어요.

 그 다음은 1968년도에 현암사에서 두 권의 시집이 출간할 때였어요. <청록파 기타>와 <청록집 이후>였어요. 한 권은 청록집 그대로였고(시집의 말미에 평론가의 글이 실렸지요), 다른 한 권은 청록파 세 시인이 청록집 출간 이후에 쓴 시들을 뽑아서 묶어낸 시집이었어요. 그때도 박두진 선생님이 제가 찍은 사진을 넣었으면 하고 바라셨어요. 그때는 한 장이 아닌 2,3장의 사진을 넣었어요. 그런데 이 책 반응 역시 좋았어요. 책을 보신 분들이 박두진 선생님께 ‘이 사진 누가 찍었냐고?’ 물었나 봐요. 여기저기서 나도 해달라고 난리였죠.

 당시는 관훈동이 문인들의 집합소였는데 하루는 전봉걸 씨가 나를 만나더니 그래요. ‘이 봐, 육명심 당신, 지금 관훈동에 이름이 떴어.’ 그러더라고요. 사람들이 제 사진이 좋다고 인정해주니까 좋더라고요. 또 관훈동에서 만난 박재삼, 이형기 패거리 등의 시인들이 친구하자고 절 맞아주니까 좋더라고요. 문인의 초상은 이렇게 해서 찍은 사진들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기자들과 달리 문인 친구들이 오픈해준 상태에서 찍을 수 있었던 거예요. 문인들은 기자들 앞에서 절대 그런 모습 안 보이죠. 박목월 선생님도 서정주 선생님도 그런 모습은 안 보이죠. 나야 문 열어놓고 받아들인 사람이니까 당신들의 모습을 보인 거죠.

 그런 재미로 예술가들의 초상에 깊이 빠져들었죠. 그래서 화가도 찍고 연극하는 사람도 찍고 그랬죠. 제 경우는 사진 작업이 이들 예술가들과 사귀는 일이었죠. 한 10년 동안 이 일을 했어요. 사람 만나는 재미로요. 자신도 모르게 빠진 경우죠. 그러니까 그 무렵의 제 사진 작업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었죠. 그런데 술집에서 문인만 만나나요? 화가도 있고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도 있잖아요. 그래서 예술가 모두의 얼굴을 찍은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내 생애에선 큰 분수령이었어요. 예술가들과의 만남이 그랬죠. 나는 시골 출신이라 이전까지 이런저런 콤플렉스가 많았어요. 그런데 지성과 부를 겸비한 이들과 만나 사귀면서 나도 모르게 콤플렉스를 벗어버린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눈에 보이는 게 없을 정도로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내 인생의 3, 40대는 중요한 분수령이었어요. 다시 태어나는 시기였죠. 그리고 사진 작업을 본격적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기층서민’에 대한 관심으로 가게 된 계기였어요. 예술가를 자주 만나면서 내린 결론은 당신들도 사람이라는 것, 예술가도 똑같이 밥 먹고 똥 싸고 하는 사람이라는 것,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존재라는 결론을 낸 거예요. 이런 사진도 몇 년 하다 보니 ‘그게(대상)’ 보여서 사람 냄새나게 찍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우리 토박이들, 된장맛 나는 그런 토박이만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죠. 문인들은 아무래도 버터 같은 서양 냄새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그랬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 토박이들의 모습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전주에 가면 욕쟁이 할머니가 있었어요. 욕하는 모습이 아주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게 매력이었죠. 오히려 문인보다도 더한 매력이 있더라고. 그때부터 토박이들을 찍으러 다녔던 거예요. 그들에겐 아주 소박하고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지요. 전 그게 참 편하고 좋았어요. 산업주의에 물들지 않은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죠. 그것이 좋아서 한참 토박이를 찍다보니 사진가로서의 의무감이 생기더라고요. 점점 사라져가는 그 얼굴들을 내가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의무감이요. 그래서 5년 동안 착실히 찍었죠.

 그런데 그 작업도 어느 순간 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얼굴들이 없어지는 거예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 ‘장승’을 찍게 된 거죠. 결국 장승이 그 사람들의 얼굴이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장승만 8년을 찍었어요. 그런데 장승이라는 게 사람이 많은 곳에는 별루 없어요. 오지에 처박혀 있죠. 그 장승을 쫓아다니다보니 ‘백민(白民) 시리즈’를 찍을 때처럼 정말 사람 맛이 나더군요.

 

 장승 사진을 찍는 데 8년이란 시간이 걸렸어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 하면, 이유는 간단해요. 남원에 있는 실상사 장승의 경우는 처음 촬영 때도 좋았는데, 우연히 비올 때 가서 보니 또 달라져 보이는 거예요. 눈이 오면 또 달라지고. 계절바뀌면서 달리 보이는 그 재미가 남다르더라고요. 그래서 8년이 걸렸어요. 게다가 처음엔 장승만 보였는데 어느 순간 그 장승을 만든 ‘풍토감(風土感)’이 보이더라고요. 장승 주변으로 풍경이 보이면서 그 재미가 좋더라고요. 그러면서 장승보다 더 소중한 걸 얻었지요. 제 경우는 어려서부터 우리나라가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질 못했어요. 외국 풍경이 담긴 그림엽서 속의 다른 나라가 더 좋게 보였던 거죠. 어른이 돼서도 무슨 금수강산이냐 했는데, 장승 8년 찍고 났더니 우리나라가 바로 금수강산인 거예요. 어떤 금수강산이냐 하면, 흥부전에 나오는 대로 흥부가 가난 때문에 제 자식들을 부잣집에 하나씩 떠나보내려 할 때, 가난해도 우리 집이 좋다며 어머니 치맛자락 붙잡고 안 가려고 하는 바로 ‘금수강산’인 것이죠. 이 땅이 이쁘고 훌륭해서 금수강산이 아니라 어머니 같은 땅, 그 풍경이 바로 금수강산이더라고요.

 제 경우는 버스타고 갈 때, (서울만 벗어나도) 나타나는 풍경들이 고향 마을 같은 그런 느낌을 주죠. 그래서 국사를 가르치는 교수들을 만나면 꼭 말해요. 우리 역사책에 국토 순례를 꼭 넣어라, 그것도 차를 타고 다니면서 하는 게 아니라 걸어서 이 땅, 어머니 같은 이 국토를 가슴으로 느끼고 알 수 있게 해달고 주문해요. 이것은 순전히 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에요. 결국 저는 장승을 찍으면서 아주 소중한 것을 알게 된 거죠. 장승을 찍으면서 비로소 한국 사람이 된 거예요.

 

 그 후에 7년간 티베트를 다녔죠. 본토만 다섯 번인데, 전 ‘카이라스 산’이라고 불리는 산을 두 번이나 갔죠. 우리나라의 백두산 같은 곳인데 고도 6500미터 정도 되는 높은 산이죠. 이 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이에요. 불교를 비롯한 네 종교에서 순례하는 산이죠. 그 다음에는 인도의 라다크를 갔어요. 그리고 그 다음은 시티니, 부타니, 내몽고, 외몽고 등등 티베트 불교 문화권은 다 돌았어요. 사진 촬영보다도 일종의 순례였죠. 이제는 내 땅에서 벗어나 멀리 돌아다니고 싶었어요. 티베트야말로 마지막 남아 있는 자연의 성소예요. 이와 같은 환경은 아프리카도 있고 남미도 있는데 제 생각에 그곳엔 자연만 있어요.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 티베트와는 비교가 안 돼요. 티베트야말로 순수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동시에 영혼의 유산이 남아 있는 곳이죠.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그곳이 영산(靈山)이라는 거죠. 저는 그곳을 우리 땅을 직접 발로 디디고 다니듯이 걸었어요. 처음에는 한번 다녀오자 했는데 결국 계속 가게 되더라고요. 거기에서 제가 얻은 것은 자연과의 합일이에요. 티베트 사람들은 원초적인 삶을 살며 영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가진 것이 더 많은 우리보다 더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요. 한가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요.

 그런데 이제는 안 가요. 중국 사람들이 철도를 깔아버리는 바람에 마치 처녀를 강간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요. 그곳에 철도를 깔면 안 는 일이었어요. 제가 티베트를 처음 다녀와서 주변 사람에게 제일 먼저 한 말은, 그곳을 빨리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로 등록시켜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것도 티베트 전체를요.

 예수가 얘기했죠. 사람은 떡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요. 그들 티베트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사는 줄도 모르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부처님 말대로 살아가요. 그곳의 스님들 얼굴은 농부처럼 생겼어요. 스님인지 농부인지 분간이 안 가요. 흙냄새가 푹푹 나죠. 그곳에는 절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하늘부터 땅까지가 모두가 절간이에요.


 선생님의 대표작으로 평가 되는 ‘백민 시리즈’에서의 ‘백민’은 무슨 뜻인가요?



= ‘백민(白民)’이라고 붙인 이유는 간단해요. 처음에는 그냥 ‘사람’이라 할까 했지요. 아님 ‘토박이’라고 할까. 그랬는데 우연히 사전을 찾아봤는데, ‘백민’이 흰옷을 입은 백성이라는 뜻이 다가 아니더라고요. ‘백민’은 벼슬이 없는 ‘일반 백성’, 그것이 ‘백민’이더라고요. 흰 백(白) 자를 써서 ‘백정(白丁)’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계급이 없는 사람, 감투를 안 쓴 사람이에요. 아, 이거 재밌다 생각했지요. 흰 백 자는 언뜻 흰옷을 입은 백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계급이 없는 백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좋았지요. 또 하나는 당시에는 여기저기서 ‘민중, 민중’ 하던 시대였는데, 저까지도 그렇게 쓰고 싶지 않았어요. 기층민의 정서, 그 뿌리를 찍고 싶었고, 내 작업을 그들과 차별해서 내 방식으로 부르고 싶었지요. 

 

 



 누구보다 문학하는 이들과 가까이 하신 선생님께서는 ‘문학’과 ‘사진’의 공통분모를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셨을 것 같은데,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한마디로 이 두 장르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죠. ‘문학’은 문자언어(written language)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고, ‘사진’은 영상(시각)언어(visual language)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죠.

 1930년대 미국에서 <라이프(Life)>나 <루크(Look)> 같은 잡지가 나왔는데 이런 잡지는 저절로 나온 게 아니에요. 이전 세대까지만 해도 커뮤니케이션은 문자언어에 의존했죠. 당시의 <라이프>나 <루크>를 발행한 이들은 이전까지 일반 잡지를 발행하던 이들이에요. <타임(Time)>도 이곳에서 나왔죠. 그런데 1930년대 후반 무렵부터 사진으로 소식을 전하는, 즉 사진으로 ‘커뮤니케이션’하고자 하는 잡지를 만들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큰 반향을 일으킨 거지요. 도판으로 들어갔던 사진이 이제 주(主)가 된 것이지요. 그리고 문자는 사진의 캡션으로 들어가게 된 상황이고요.

 인류는 원래 문자언어로 시작했지만 과학이 발전하면서 시각적인 언어, 영상언어로 바뀐 것이죠.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이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이처럼 사진과 문학의 공통분모는 커뮤니케이션인데, 유의할 점은 문자언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은 ‘사고(思考)한다’라는 중요한 특성을 갖고 있어요. 대신 영상언어는 시각적으로 ‘직접 본다’라는 특성이 있죠. 문자가 없으면 사고활동이 없어요. 문자가 곧 ‘사고’라고 볼 수 있어요. 문자는 정신적인 문화유산이자 글 쓰는 이에겐 일종의 사제(司祭:priest)와 같죠.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으로 이해해보면 이들은 각각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지요. 시각, 청각 등 부분적으로 발달된 모양새지만 앞으로는 합일된 커뮤니케이션으로 나아갈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오디오와 비디오라고 볼 수 있죠. 이들 과학의 산물은 청각적인 요소와 시각적인 요소가 잘 결합되었잖아요. 영화도 그렇고요. 과학의 산물은 인간이 가진 본래의 기능을 닮아가고 있어요.



‘문인의 초상’에 나온 이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분들의 이야기가 있으면 좀 들려주시지요


*참고로 ‘문인의 초상’에 나오는 분들은 다음과 같다.

(강우식 / 강은교 / 강인한 / 고 은 / 구 상 / 김광림 / 김광섭 / 김구용 / 김규동 / 김남조 / 김동리 / 김상옥 / 김영태 / 김요섭 / 김윤성 / 김종삼 / 김춘수 / 김후란 / 모윤숙 / 민 영 / 박두진 / 박목월 / 박봉우 / 박용래 / 박재삼 / 박제천 / 박종화 / 박진환 / 박태진 / 박희진 / 방영응 / 서정주 / 서항석 / 선우휘 / 성천경 / 송기숙 / 송 욱 / 신경림 / 신대철 / 신동집 / 양주동 / 양채영 / 오규원 / 오태석 / 윤석중 / 이경순 / 이근배 / 이동주 / 이범선 / 이성교 / 이성부 / 이수익 / 이승훈 / 이원섭 / 이유경 / 이인수 / 이호철 / 이희승 / 전봉건 / 정진규 / 정한모 / 조병화 / 조태일 / 차범석 / 천상병 / 천승세 / 피천득 / 한성기 / 홍신선 / 홍윤숙 / 황금찬)



이야기야 물론 많지요. 하지만 제가 이번 기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재밌는 에피소드라기보다는 이 기회에 꼭 하고 싶은 얘긴데요. 피천득 선생님과 관련한 얘깁니다. 이번 '문인의 초상'에 꼭 써야 했는데 못 써서 아쉬웠어요.

 피천득 선생님을 처음 만나고 느낌 감정은 ‘아, 이 시대에도 이렇게 양심적인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거였습니다. 사실 피천득 선생님을 만나 뵙고 많이 놀랐죠. 그리고 세상은 피천득의 일면만 알고 있구나, 생각했죠. 저라도 분명히 얘기하고 싶었어요. 피천득이란 분은 그저 단순히 유미적이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요. 보통 사람들은 피천득 선생님에 대해 순진무구한 어린이 같고 깨끗하다고만 얘기하죠. 하지만 그 이전에 이 은 이 시대 ‘양심의 거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제 이야기는 그 인식의 하나예요. 저는 피천득 선생님을 1970년대에 처음 만나서 그걸 알았어요.

 그 분은 저보다 스무 살이 많은 사람이에요. 아버지뻘이죠. 처음 만난 그날은 한 시간 동안 선생님을 찍었는데, 갑자기 자기 방으로 절 부르는 거예요. 그 양반이 직접 커피를 끓였는데, 정말 잘 끓이더라고요. 커피를 한 잔 내밀면서 하시는 말씀이 진지하게, 어찌 하오리까, 하는 거예요. 저에게 인생 상담을 하시더라고요.

 이런 상황은 사실 제가 그동안 문인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깊이 찍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한 일례이기도 하죠. 생각해보세요. 피천득 선생님은 그날 처음 만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한참 어린 나 같은 사람한테 인생문답을 청했으니 말입니다. 그만큼 그분과 나 사이에는 어느덧 ‘라포(rapport, 함께 일을 할 수 있도록 개인 간에 형성된 친밀한 관계-편집자주)’가 형성됐던 것이죠. 아니,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죠. 그 양반을 뵙던 그 순간에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생각났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아, 윤동주 시인이 바로 피천득 얘기를 쓴 거로구나. ‘어찌 하오리까’ 문답이 그으니까요. 피천득 선생님은 당신 생일날하고 정월 초하룻날은 반드시 자신을 반성한다고 했어요. 어떻게 살았나,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걸리는 게 있대요. 마치 뜨물을 뒤집어쓴 것처럼요. 당신은 일제시대를 순응해 살았고 또 자유당정권 시대를 그렇게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당신은 일제시대엔 만주에서 대학을 나와 경성제대 도서관 사서로 계셨고, 해방 후엔 서울사대 교수가 되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군사정권을 지나 정년퇴임을 하시고 나온 거죠. 한 번도 당신은 이육사나 윤동주처럼 ‘아니오’를 못 했다는 겁니다. 그저 따라했을 뿐이라는 것이죠. 그게 당신으로선 후회해도 참회해도, 또 닦아도 닦아도 그 때가 안 벗어진다는 겁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어찌 해야 하오리까’ 하고 말했었죠. 그 순간 제가 숙연해지더라고요. 저도 그런 분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랬죠. ‘전 아직 어려서 잘 모릅니다. 대신 일주일 후에 사진 뽑아서 올 때, 그때 생각나는 것 있으면 말씀드릴게요.’ 하고 얼른 물러나왔지요. 일주일 후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갖다 드리면서 말했죠. ‘선생님, 맨 마지막 장을 한번 보시면 어떨까요? 함석헌 선생님은 말씀하셨죠. 한국의 역사는 강대국 사이에서, 마치 맷돌 속에서 콩이니 곡식이 갈려지는 그런 역사다. 이 속에선 그 어떤 것도 가루로 안 갈리는 게 없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창녀의 진실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선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나는 것, 이 길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새로 시작하는 길밖에 없다.’ 뭐 이런 이야기였죠. 피천득 선생님께선 이 부분을 읽으시고 어떤 해답을 얻으셨는지 모르겠네요. 그 책을 드리곤 얼른 물러나왔죠. 이런 사실을 꼭 증언하고 싶네요.


 그리고 다음은 구상 선생님하고 박 대통령과의 이야기인데요. 5.16 지나고 몇 달 후에 하루는 구상 선생님이 박 대통령이 만나자고 해서 만났다고 해요. 서울에서 제일 큰 신문사를 하나 맡으라고 하셨다는군요. 헌데 구상 선생님께선 좀 그렇다 판단하셔서 조건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첫째, 일체 편집에 간섭하지 말 것. 둘째, 신문사 재정에 일체 간섭하지 말 것. 그리고 세 번째는 뭐가 하나 있는데, 잊어버렸네요. 구상 선생님의 요구사항을 듣던 박대통령이 씨익 웃으면서 그러더래요. 결국은 안 하겠다는 이야기로구먼.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래요. 다른 통치자 같았으면 어땠을까요? 섭섭하다고 했을 거예요. 아니면 못마땅했을 겁니다. 그런데 박대통령은 ‘알았어.’ 그랬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았나 싶네요. 국회의원 시킨다니깐 도망간 이야기는 ‘문인의 초상’에 나오지요. 그리고 수술하고 왔다고 하니까 씨익 웃으면서 ‘다 나았어?’ 그랬다고 했었죠. 이런 얘기는 제가 안 하면 영영 묻히고 말 것 같아서 꺼냅니다. 



사진작가인 선생님께 영향을 준 인물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좋아하신 작가는 누구인지요?


= 에드워드 웨스톤(Edward Weston 1886~1958)이라는 사진작가가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줬어요. 다른 사람들은 내 사진을 보면서 제가 에드워드 웨스톤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스타일이 다르니까요. 하지만 그 분이 저에게 제일 많은 영향을 줬어요. 직접 그 분이 사는 데까지 가봤지요. 그리고 더 많은 감동을 받았지요. 그 분은 원래 보스턴에 살았어요. 그곳은 미국에서 문화가 제일 먼저 발달한 곳이지요. 그런데 그분 누나가 샌프란시스코 쪽으로 시집을 가는 바람에 그의 삶의 근거지도 바뀌게 되지요. 아마 방학에 누나를 보려고 미 대륙을 횡단해서 태평양 연안으로 가본 것 같아요. 그런데 그곳에 홀딱 반했다고 해요. 대자연에 반한 것이죠. 그 후 학교를 졸업하고 아예 그쪽으로 이사를 했다고 해요. 이 양반은 그러다 점점 대자연 속으로 들어갔죠.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더 들어가요.

 제가 갔던 곳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자동차로 몇 시간 더 들어가요. 그곳에 도착해서 사람들한테 혹시 에드워드 웨스톤이 라는 사람을 아냐고 물으니까, 아무도 모르더군요. 심지어 파출소에서도 그의 존재를 모르더라고요. 바닷가에 있는 작업장은 이미 가봤고 이젠 그의 집을 찾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포기하지 않고 한 시간 정도를 더 찾아 헤맸지요. 그런데 한 노인이 그를 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또 거기서 차로 한 30분을 더 들어갔죠. 집이 몇 채 있었는데 그의 집은 거기서 더 들어갔죠. 제가 그곳을 찾은 해가 1991년도였어요. 에드워드 웨스톤이 거기서 정착한 게 1930년대이고요. 대략 60년 전에 에드워드 웨스톤은 그 곳 대자연의 원시림으로 온 것이었죠. 그는 완전히 도시를 등지고 대자연에 묻혀 있었던 거예요. 그분은 자연에 은거하며 산 것이지요. 수도사가 세상을 등지고 들어가듯이. 그분은 자연 속에서 작업을 한 것이지요. 그 은거지에서 나무뿌리, 돌멩이 같은 자연을 찍었지요. 그분이 찍은 피망을 보면 로뎅의 조각을 보는 같아요. 정말 놀라워요. 조개껍질 하나가 오브제죠. 신비적이고 근원적이지요. 아, 절대고독이란 게 이런 거구나 했지요. 그 분이 나에게 영향을 준 건 바로 이런 거예요. 근원적인 것, 절대고독인 것.



 선생님은 대학에서 오랜 시간 강의를 하셨는데요. 그 강의 내용 중에서 무엇을 특히 강조하셨는지요?


= 저는 가끔 사진가로서보다 선생으로서 보다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다른 분들도 이런 얘기를 종종 했고요. 저는 사진 강의를 하면서 뭘 찍어 와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각자가 찍고 싶은 거 있으면 그걸 찍어 와라 했죠. 그게 제 과제였어요. 학생들은 처음엔 좋아라하죠. 그런데 그것도 잠깐. 몇 명이 다른 걸 찍어오면 안 될까요, 하면서 자꾸 자기 과제를 바꾸는 학생이 있었죠. 그때 저는 딱 세 번까지는 봐주죠. 그런데 그 이상은 봐주지 않았어요. 저의 이런 교수법을 한 4분의 1정도만 좋아한 것 같아요. 뭘 찍어야 할지 모르는 학생들에겐 말했죠. 가장 가까이 있는 걸 찍어봐라. 그리고 그 과제물을 가져오면 좋다 나쁘다 소리를 일절 안 했죠. 제가 묻는 건 재미있었느냐, 편안하게 찍었느냐, 이걸 또 하고 싶으냐만 물었죠. 학생의 단점은 얘기 안 했죠.

 학생들 일부는 제가 무책임하게 가르치는 줄 알았을 거예요. 사실 선생으로서 가장 힘든 게 뭔지 아세요? 유혹받는 거예요. 사진 가져오면 요렇게 하면 좋고 저렇게 하면 나쁘고……. 사진을 좀 건들고 싶어 좀이 쑤시지요. 하지만 참는 게 힘든 것이지요. 제가 학생의 작품에 손을 대지 않는 이유가 있었어요. 스스로가 알아서 뿌리를 내리뜻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자라는 걸 보는 것이. 농부가 모를 심어 놓고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요? 김 매주고 비료 주고 벌레 잡아주는 것밖에 없어요. 제 힘으로 크는 거예요. ‘선생’도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너 하고 싶은 것 해라, 해 놓고 단점을 얘기하면 안 되죠. 반대로 학생의 장점을 얘기하면 그게 잘 살아서 그 사람의 개성이 돼요. 단점을 얘기하면 결국 선생 닮으라는 얘기예요. 이건 굉장히 위험한 거예요. 요만큼 고쳐주면 이만큼 달라져요. 그래서 제가 가르친 놈들은 백인백색이에요. (뿌듯한 표정)


 한번은 어떤 놈이 제게 과제를 가져왔어요. 공처럼 똘똘 뭉쳐서 가져왔지요. 학생이 나한테 그 과제물을 내놓으며 그러더라고요. 교수님이 한번 펴보세요. 살펴봤더니 내 얼굴을 클로즈업한 거예요. 네 이 놈, 네가 이렇게 밉더냐? 네. 내가 그렇게 티꺼워? 네. 너 이거 하면서 내 욕 몇 번 해봤냐? 많이 했죠. 너 이거 땅바닥에 집어던져봤냐? 아니오. 한번 내던져보지? 얘들이 낄낄 다 웃었지요. 전 모든 학생들이 들을 수 있게 말했죠. 오늘 이 사진이 제일 잘 찍은 거다. 너희들 제발 잘 찍으려고 하지 마라. 정직하게 찍어라. 너희들이 느꼈던 그걸 찍어라. 이 학생이 나한테 느꼈던 것처럼. 내가 밉다 생각하니까 이렇게 찍었듯이 말이다.

 사진 과제물을 제출할 때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적어오라고 했죠. 덧붙여 관념적인 말은 빼라고 주문했죠. 그리고 사진을 보여주기 전에 먼저 자신이 써온 글을 읽어보라고 하죠. 그러고 나서 찍어온 사진을 펼쳐놓고 다 함께 감상하죠. 자, 여러분 이 친구가 읽은 하고 이 사진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잘 보세요. 그게 평가죠. 이 학생이 써온 글과 가장 가까운 사진이 어떤 것 같냐? 그러면 학생들이 다 지적해주죠.


 우수한 학생들은 이 수업이 효과가 있었어요. 그런데 보통의 학생들은 이런 방식의 수업이 재미가 없었을 거예요. 사진과 선생님으로 사진 트리밍도 해주고 해야 가를 배운 것 같은데 그런 게 일절 없었거든요. 이게 제 수업방식이었어요. 또 이론수업 때는 단 한 번도 페이퍼 시험을 본 적이 없어요. 제 방식으로 했어요. 텍스트 두 권 정해주고 그걸 읽고 나한테 물어라 했죠. 책을 읽고 와서 나와 개별 면담을 하는 것이 시험이었지요. 이것 역시 처음에는 학생들이 좋아라했지요. 저는 학생들에게 더 큰 것을 모른다는 것을 자각시키기 위해서 이런 시험을 치른다고 했죠. 선생이 가르친다는 것은 뭐냐? 더 큰 것을 모른다는 것을 알게끔 하는 것이 가르치는 거라고 얘기했죠. 그러니 시험 본다고 생각하지 말고 착실히 세 번만 읽어보라고 했죠. 그러다 보면 자연히 질문의 점수가 나오지요. 내 경우는 학생들의 물음을 보면 알지요. 그 책을 얼마나 착실히 읽었는지요. 이 수업을 홍대 대학원 수업에 적해 봤더니, 반응이 정말 좋더라고요. 질문을 하는 학생들은 이미 다 알죠. 자기가 지금 몇 점짜리 질문을 하는지요. 이러다보니 점점 밀도 있는 질문이 쏟아지게 되는 거죠. 한번은 소설 쓰는 최윤 선생이 이 이야길 듣고는 자신도 이런 교수법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특허 낸 게 아니니까 어여 갖다 쓰라고 했죠.

 한번은 서정주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그러더라고요. 이봐, 내 아들이 경기고등학교를 가야 하는데 큰일 났어.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선생님, 난초를 기르시는 데 선생님께서 하시는 일이 뭐예요? 물밖에 주는 게 없지. 그러더라고요. 그렇죠, 선생님. 자식도 마찬가지예요. 이 말이 서정주 선생님 마음에 딱 들었던 것 같아요. 그 자리가 서정주 선생님을 처음 뵙는 자리였지요.

 나는 교육자로 나서면서부터 처음부터 교육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소크라테스가 ‘모른다’고 한 것은 그저 단순히 ‘모른다’는 것이 아니지요. 더 큰 걸 봤기 때문에 ‘모른다’는 소릴 한 것이지요.      



 사진작가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요?


= 그 시절에는 우선 내가 무얼 잘하는지를 발견해야 해요.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어요. 누가 뭐 한다니까 무턱대고 따라하지 말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찾아내고 그걸 해야 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죠. 말로는 간단해 보이죠. 하고 싶은 것 해서 잘 되는 것, 그거 하면 돼요. 그런데 보통은 부모들이 하라고 하니까 혹은 사회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출세하는 거라고 하니까, 그쪽으로 우르르 따라가는 거죠.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 그걸 찾아서 빨리 하라고 얘기하고 싶네요.



 사진작가가 되고 싶은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 이태준의 <문장강화>라는 책이 있어요. 1950년대에는 굉장히 중요한 인문서로서 인기가 있었지요. 거기에 보면 세 가지가 나와요. 많이 읽을 것, 많이 쓸 것, 많이 생각할 것. 인문계통의 문사철(文史哲), 즉 문학, 역사, 철학 책들을 방대하게 읽어야 해요, 피라미드 밑변 넓이가 넓으면 넓어지는 만큼 높이 올라가는 걸 생각해야 해요. 기층단의 터를 넓혀야 해요. 이것은 내가 경험을 통해서 느낀 거예요. 그러면 사진은 저절로 돼요. 지엽적인 것들은 이 자리에서 꺼낼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네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사진’은 무엇인가요?


= 캐나다의 미래학자인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 1911~1980)은 사진은 ‘눈의 연장’이라고 얘기했어요. 기차나 자동차는 ‘발의 연장’, 수신기는 ‘귀의 연장’. 평범한 얘기 같지만 이는 아주 정확하고 심오한 얘기예요. 굴착기 같은 경우는 ‘손의 연장’이죠. 여기서 ‘눈의 연장’이라는 것은 시각적인 한계를 넘어선 것이죠. 내가 지금 이 방에서 바다 밑 해저 사진을 보고 있으면 바로 이것이 ‘눈의 연장’이고 눈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죠. 내 눈이 현재 바다로 향해 있잖아요. 또 우주 달나라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있을 때, 그것을 보는 내 눈은 우주에 가 있는 거예요. 이것 또한 눈의 연장이죠. 그럼 ‘눈이 뭐냐’ 하는 것부터가 중요해지는데요. 눈은 우리 몸의 인지 작용 중에서 3분의 1을 좌우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사고하게 하고 통제하잖아요. 눈은 우리 사고 작용의 중심이고 근간이며, 사고의 뿌리라고 볼 수 있지요. 이게 바로 사진이죠.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 할 수 있을까요?


=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사진. 가려울 때 마침 그 지점을 긁을 때처럼 ‘그래 바로 그거야’ 하는 사진. 그게 가장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그 맛을 본 사람의 사고는 점점 깊어지게 되어 있어요. 간단명료하죠. 그런데 사람들은 사진을 자꾸 틀에 넣어서 가두려고 해요. 



 요즘의 젊은 사진작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 아무것도 없어요. 요새 젊은이들이 나보다 더 잘 찍어요. 제가 학생 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사진은 50대보다 40대가 더 잘 찍고 40대보다 30대가 더 잘 찍고 30대보다 20대가 더 잘 찍는다고요. 사람들은 이 말을 이상하게 여겼죠. 또 대학에 있을 때 후배교수들에게도 그랬어요. 학생들이 사진 잘 찍으면 그건 내가 잘 가르쳐서 그렇다고 자만하지 마시라.

 왜 그런지 이유를 하나 들죠. 제가 연세대학 다닐 때였어요. 점심 때 밥 먹으러 자취방에 갈 때였어요. 그때 선교사가 사는 집을 지나쳐야 했지요. 그런데 그 집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덟 살짜리가 아이가 살았어요. 저는 과 친구들과 함께 그곳을 지나치면서 그 아이한테 종종 말을 걸었죠. ‘헤이, 헬로’ 하는 식으로요. 그러면 그 얘도 우리를 향해 ‘헬로’ 하고 뭐라고 말했지요. 영문과 학생 중 하나가 평소에도 우스갯소리를 잘 했는데, 그 친구가 그랬어요. 야, 저 꼬마가 우리보다 영어를 잘하네. 우리는 깔깔대고 웃었지요. 그 꼬마아이가 영어를 더 잘할 수밖에 없죠. 그 꼬마는 자신도 모르게 영어를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훈련한 거예요. 영문과에 다니는 학생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영어와 함께 보낸 것이지요.

 지금의 50대보다 40대가 더 사진을 잘 찍는 이유가 이거예요. 40대에게 비주얼커뮤니케이션이 더 많은 거지요. 그러니까 이후 세대들이 더 자연히 사진을 잘 찍게 되는 거구요. 그러니 ‘어떻게’ 라는 것은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문제는 사진이 수단이란 거예요. 미디어예요. 하드웨어죠. 정보화 시대에 와서는 하드웨어만 발한 거지요. 문제는 소프트웨어를 채우는 일이죠. 사진은 잘 찍는 데 중요한 문제는 소프트웨어인 것이죠. 그리고 마음의 소프트웨어를 채워야 한다는 것이죠.



 요즘은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갖고 계신지요.


= 요즘 제 사진작업은 자꾸 헛바퀴가 돌아요. 사진촬영을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돼요. 이유는 있죠. 이전까지는 눈에 보이는 것을 찍었죠. 이제까지의 제 정신적인 편력이 노자와 장자였어요. 그리고 이제는 선불교 쪽으로 왔어요. 참선도 하고 분위기도 선화(禪畵) 분위기로 가려고 노력하는데, 그래서 그 선(禪)을 표현하려고 하는데 안 돼요. 지금 5년째 헛바퀴예요. 의식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공’이나 ‘무’를 찍으려고 하니까 안 돼요. 선화도 선시도 있듯이 ‘선 사진’을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요. 이것이 요즘의 내 대상이지요. 



 사진을 처음 만나는 이들은 그 사진에서 ‘무얼’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가요? 혹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요?


= 우선 카메라를 든 사람의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카메라를 든 사람은 무얼 찍으려 해선 안 돼요. 먼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알아차림’이 중요해요. 스스로에 대해, 내가 무얼 느끼는지 감각적으로 또 의식으로 ‘내가 지금 쓸쓸하구나, 지금 후덥지근하구나, 덤덤하구나, 목이 마르구나’ 하는 것들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훈련부터 해야 해요. 가령 무얼 찍으려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겁니다. 들에서 꽃을 보면, 다들 쁘게 찍으려고 하잖아요.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한 송이 꽃을 봤잖아요. 그럼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구나 하는 그걸, 촬영하기 전에 알아차려야 해요. 그 ‘알아차림’에 카메라 포커스를 맞춰야 해요. 그런데 이건 쁘니까 찍어야겠구나 하면 안 돼요. 스스로에게 확인해야 해요.

 요즘 저는 이곳으로 왔다갔다 하며 장미꽃을 많이 보는데 왜 릴케가 장미꽃을 보며 ‘순수’라는 말을 자주 썼는지, 그가 왜 ‘순수’라는 말을 많이 썼는지 알겠어요. 장미의 모습을 보면 피보다 더 순수한 그것, 그게 오거든요. 관념적으로 찍으니까 안 돼는 거예요.

 한 20년 전에 송광사에서 법정스님을 뵌 적이 있었지요. 당시 스님은 사진 찍는 재미에 푹 빠져 계셨어요. 스님께서 5*7 사이즈로 뽑은 사진을 한 30장 보여주더라고요. 야채밭에 있는 꽃도 찍고 나무도 찍고 하늘도 찍은 사진들이더라고요. 제가 그 사진을 죽 보고 그랬지요. 스님, 이 사진들은 눈으로 찍고 머리로 찍고 했네요. 스님이 사진은 눈으로 찍고 머리로 찍지 그럼 무엇으로 찍나?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사진은 가슴으로 찍어야지요, 라고 했지요. 그러자 감히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고 무슨 소리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시 설명을 했죠. 스님, 야채밭에 있는 이 꽃은 뻐서 찍었죠? 그렇지. 그런데 이건 산이고 이건 야채 꽃이죠. 그렇지. 여긴 안 나왔어요. 여기에 ‘쁘다’가 나와야죠. 여기에는 ‘쁘다’가 없어요. 어떻게 하면 그 ‘쁘다’가 나올까요? 거기서부터 사진이 시작합니다. 그런가? 이런 물음에서 사진이 시작야 해요, 라고 했죠.

 먼저 자기발견부터 해야 합니다. 전 사진을 찍기 전에 그냥 하루 종일 돌아다니라고 해요. 그러면 ‘아, 바람이 부는구나. 아, 가을바람이 시원하구나.’ 하는 마음이 오죠. 그러면 바람 때문에 여자 귀밑머리가 얼굴에 걸쳐져 있는 게 보여요. 그럼 그것만 찍는 거예요. 오직 그것만 느끼는 거죠. 시인도 그렇고 사진가도 그렇죠. 무얼 쓰려고 하지 말고 무얼 표현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무얼 느끼고 있나를 알아차려야 해요. 사람들은 시적인 소재가 따로 있는 줄 알지만 안 그래요. 그 ‘알아차림’만 알면 돼요. 심심하면 심심한 대로, 이상이 ‘권태’를 쓰듯이 나오는 거예요.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죠. 내가 무얼 느끼고 있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알아차려라. 그 훈련이 예술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해요. 그러면 감각이 늘고 예민해져요. 그 자체 행복해지고요. ‘경치가 좋구나!’가 아니라, ‘아, 내가 경치가 좋다고 느끼고 있구나!’, 이걸 가르쳐줘야 해요. 소재를 찾지 말고 그냥 돌아다니면서 내가 무얼 느끼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하나 짚어 가면 사진이 되고 시가 돼요.


 사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요?


= 사진의 미래는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건 ‘문자문화’처럼 무궁해요. ‘사진문화’라기보다 전 ‘영상문화’라고 얘기하고 싶은데요. 영상문화와 사진문화를 달리 보는 시각도 있는데 사진도 영상에 포함해야 해요. 사진이라고 하면 정적인 것만 얘기하는데, 정적이든 동적이든 시각적인 것 아닙니까. 원래 문화적으로 보자면 문자 발명 이전에 사진 발명이 먼저 왔어야 해요.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에요. 오히려 과학 발달이 안 되었기 때문에 우회해서 나온 게 문자 발명인 듯싶어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시각적인 반응에 더 민감해요. 문자에 의한 건 간접적인 거예요. 사진은 산업사회와 과학의 발전에 의해서 마침내 성취된 거지요. 문자라는 것은 과학 발전 이전에 관념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사실은 시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보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것이죠.

 이제는 영상과 문자가 함께 갑니다. 앞으로는 모든 예술 분야에서 다양한 실험 요소들이 나타나고 또 그것이 통합적으로 변모해,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것이 될 거예요. 저는 이런 상황을 ‘오감이 통합되는’ 전조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왜 장르를 서로 넘나드는가? 아주 오래 전에 학생들에게 물었죠. 그리고는 우리 몸을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죠. 결국 모든 게 몸의 연장입니다. 몸의 인식 작용이 어떻습니까? 청각적인 , 시각적인 , 촉각적인 것이 따로따로 노는 게 아닙니다. 통합적인 것이지요. 영화라는 것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 합쳐져서 CD 한 장에 문자적인 요소까지 다 합쳐지지요. 앞으로는 우리 몸의 감각기관과 똑같아질 거예요. 모든 인식 작용과 상호작용이 전일적인 통합으로 나갈 거구요. 백남준의 작업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거죠.

 앞으로는 이와 같은 게 더 많이 나올 거예요. 어떤 것이 없어지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점점 통합적이고 복합적으로, 전일적이고 총체적인 합일로 나아갈 겁니다. 문자라는 건 사람으로 치면 ‘헬렌 켈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봉사’가 눈 뜬 게 사진인 거지요. 일찍이 이처럼 다양하게 실험적인 것들이 나타난 시대가 없었어요. 과학의 발달에 의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거죠. 아놀드 하우저가 사회학적 측면에서 엄청나게 많은 얘기 했지만 지금 제가 했던 얘기는 없지요.

 몸을 보자는 거예요. 몸의 작용, 몸의 구조를 보라고요. 앞으로는 우리 몸 맞춰져 가리라고 생각해요. 기관 그대로 총합적인 합체로 간다는 거죠. 텔레비전 나온다고 했을 때 신문이 망한다고 했지요. 하지만 망하지 않았죠. 그건 당연해요. 인간의 몸에는 시각적인 요소 외에고자 하는 요소가 있거든요. 카메라가 나올 때 사람들은 미술이 망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망하지 않고 더 복합적으로 변모했잖아요.



 선생님이 좋아하는 사진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듀안 마이클 (Duane Michals, 미국, 1932∼ )이란 작가가 있어요. 이 사람은 문자언어와 영상언어를 함께 실험하는 사람이지요. 이 사람은 사진이 한 컷이 아니라 만화영화처럼 여러 컷이지요. 여러 행동이 흘러가지요. 그리고 그 밑에는 글이 있어요. 이 사람의 가능성이 무척 커 보여요. 그의 작품으로 어린이용 동화책도 냈지요. 듀안 마이클이 실험하고 있는 사진은 지금 시사하는 바가 많아요.



 가장 아끼시는 카메라는 무엇인가요? 


= 전 일편단심 라이카(Leica)만 써요. 처음에 한 2년 정도는 캐논(Canon)을 쓰긴 했는데 이후로는 라이카만 써요. 라이카 M6만 써요. 라이카의 해상력은 기막혀요. 지금도 명기로 만들어지고 있는 카메라죠. 라이카만 모두 4대가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 사진집 정리를 할 거예요. ‘예술가 시리즈’도 반밖에 못했어요. ‘장승 시리즈’를 비롯해서 이전에 찍어놓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정리할 거예요.



 카메라를 가져왔는데 선생님 사진을 좀 찍어도 될까요?


= 글쎄. 옛날 내 사진을 하나 빌려줄게요. 귀중한 사진이에요. 반드시 돌려줘야 해요. 이때는 젊었죠. 사람들이 이 사진을 보고 거만해 보인다고 했었죠.



문/ 오늘은 객이 와서 선생님 혼자 노는 걸 방해하지는 않았는지요.


= 괜찮네요. 저 바깥 좀 보세요. 경치가 참 좋죠.




인터뷰 후기



 허영자 선생님 같은 분들은 육명심 선생님을 만나면 “오늘은 잠을 못 잘 것 같. 분명 뭔가가 시로 촉발될 것 같.라고 하셨다 다. 내게도 허영자 선생님의 그 말씀을 이해할 것 같은 밤이 밤늦도록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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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명심 선생님 약력


1937년 생.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홍익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졸업.

1968년 동아국제사진살롱전 은상 입상.
1974년 동아사진콘테스트에서 특선.
서라벌예대(1972~1975), 신구전문대(1975~1981) 교수를 거쳐 정년퇴임까지 서울예전 사진학과에 재직.

영문학과 출신의 사진작가로 작품 활동과 교육 활동을 겸하고 있는 그는 국내 사진사 정리와 해외 사진이론 소개 등, 사진 외적 분야에도 일정 역할을 했다. 이 작업의 성과는 <한국현대미술사-사진편>(국립현대미술관, 1978), <세계사진가론>(열화당, 1987) 등으로 각각 정리되었다.

육명심의 사진은 1970년대 후반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무당, 기층 서민, 장승 등으로 변화해왔다. 그중에서도 그가 ‘백민 시리즈’로 부르는 기층 서민을 소재로 한 사진들은 그의 대표작이라 평가된다.


<주요경력>


1971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 전임강사 대우

1973 신구대학 사진과(창설) 교수

1981 서울예술대학 사진과(창설) 교수

1999 서울예술대학 정년퇴임

* 그 외 중앙대학교대학원, 상명대학교대학원, 홍대산미대학원, 숙명대학교대학원 강사 역임


*개인전*


1994 〈육명심사진전〉, 인데코화랑, 서울

1999 〈하늘아래첫땅-Tibet〉, 덕원화랑, 서울

2003 〈한국의 예술가들〉, Photo Class 사진화랑, 서울

2004 〈육명심 초기사진전〉, Photo Class 사진화랑, 서울

2005 〈한국의 장승전〉, Photo Class 사진화랑, 서울


*사진집* 


<육명심 사진집>(사진예술사, 1994)

<검은 모살뜸>(장산출판사, 1997)

<하늘아래첫땅-Tibet>(1019출판사, 1999)

<미명의 새벽-7인합동사진집>(눈빛출판사, 2001)


저서


<현대한국미술사(사진편)>(공동집필, 국립현대미술관, 1978)

<세계사진가론>(열화당, 1987)

<사진으로부터의 자유>(눈빛출판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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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문에 나오는 문인 사진은 육명심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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