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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세계 (6)

  • 작성일 2007-10-12
  • 조회수 848




권경희

 

추리 소설은 인류가 발명한 스토리 작법 중 가장 재미있는 방법이라고 한다. 흔히 추리 기법으로 씌어졌다고 하는 말을 하는데 실제로 엄격히 추리 기법을 알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교묘한 방법으로 일어난 살인 사건 정도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추리 소설을 쓰기 위한 공식이란 실제로 많이 존재한다. 주로 본격파(고전파 혹은 클식) 추리 소설을 위해서 연구된 이 추리 작법을 알면 작품을 감상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고 재미가 더해진다. 우리가 야구의 복잡한 규칙이나 아메리칸 풋볼의 규칙을 모르고 보면 재미가 없는 경우와 같다고나 할까.

그러면 여기서 세계적 추리 작가 또는 평론가들이 만들어 놓은 공식을 살펴보자.

(1) 런던 탐정 클럽의 선서

 

1828년에 창설되어 체스터톤이 회장으로 있던 런던 탐정 클럽에서는 추리 작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이 클럽에 가입하고자 할 때는 다음과 같은 선서를 받았다.

 

-귀하는 자신이 쓰는 추리 소설의 탐정이 의뢰받은 사건에 대하여 기술적이고 성 실한 자세로 추적할 것이며, 하늘의 계시, 여성의 직감, 맘보잠보의 신, 야바위, 우 연의 일치 등에 절대 의존하지 않을 것을 맹세 합니까?

 

-귀하는 갱, 음모, 살인광선, 유령, 최면술, 초능력, 중국인, 광인 등에 의존하지 않으며, 영원히, 절대로 비과학적이거나 미지의 독약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맹세 합니까?

또한 킹스 잉글리쉬를 사용하며, 매상을 올리고 싶다는 이유로 이 맹세를 저버리 는 일이 절대로 없다는 것을 서약합니까?

 

대체로 이러한 내용의 맹세를 하게 하고 이 맹세를 신성시했다. 여기서 맘보잠보의 신이란 스톤족의 미신적 신앙을 말하며 킹스 잉글리쉬란 순수한 표준 영어를 말한다.

 

(2) 녹스의 10계

 

1888년에 태어나 영국 성공회의 대주교가 된 로널드 녹스는 유명한 추리 작가이기도 하다. 1925년에 발표한 <육교 살인사건>(The Viaduxt Muder) 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그보다 이 성직자를 더 유명하게 한 것은 <추리소설 작법 10계>(1928년 영국 추리소설 걸작집에 발표)이다.

물론 고전파 추리 소설을 위한 작법이지만 뒤에 하드보일드에서도 많이 적용했다. 녹스가 말하는 10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범인은 이야기의 초기 단계에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움직임을 독자가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

2. 말할 필요도 없이 추리 소설에서는 초자연적인 마력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3. 비밀의 방이나 통로는 하나면 족하다.

4. 아직 발견되 않은 독극물이나, 긴 설명을 필요로 하는 과학적인 장치 등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5. 중국인을 중요한 인물로 등장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6. 탐정이 우연히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든가, 근거 없는 직감이 적중했다는 등의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7. 탐정 자신이 범인이서는 안 된다.

8. 탐정이 단서를 발견했을 때는 이를 곧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

9. 탐정의 우둔한 친구, 즉 왓슨(코난 도일의 명탐정 셜록 홈스 친구이며 조언자인 의사)과 같은 인물은 그가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숨김없이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 그리고 그의 지능은 독자보다 낮아야 한다.

10. 쌍둥이 또는 쌍둥이라고 할 만큼 닮은 사람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

 

이상의 ‘녹스의 10계’는 런던 탐정 클럽의 내용과 많이 닮아 있다. 여기서 중국인은 중국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동양인을 대체로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유는 명확히 알 없지만 동양인은 마술을 쓰거나 신의가 약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쌍둥이를 등장시키지 말라는 것은 알리바이를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

대체로 로널드 녹스가 강조한 것은 작가는 독자와 페어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3) 헐의 10계

 

헐의 본명은 리처드 헨리 샘프슨(Richard Henry Sampson)인데 어머니의 성인 헐을 필명으로 사용했다. <큰어머니 살인사건>(The Murder of My Aunt,1935)으로 유명한 그는 1935년에 출간한 <캐슬 문학 백과사전>의 탐정 소설 항목에 다음과 같은 ‘추리 소설 10계’를 발표했다.

 

1. 추리 작가는 하나의 사실에 대해 모순되는 두 가지의 기술을 해서는 안 된다.

2. 단서 또는 증거가 될 만한 사실을 최후까지 감춰서는 안 된다.

3. 고의로 허위의 진술 또는 오해를 초래할 만한 진술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전문가가 보더라도 틀린 이 없도록 해야 한다. 단, 믿을 수 없다는 것분명한 등장인물을 통해서 하는 말은 용납된다. 일부러 틀린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예외이다.

4. 의학 또는 법률에 관한 것이 스토리의 구성분이 되었을 때는 어떤 전문가가 보더라도 틀린 곳이 없어야 한다.

5. 독자에게 실마리가 될 만한 단서를 제공해야 한다.

6. 틀린 실마리라도 최종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제시해 주어도 좋다. 그러나 산만한 결말은 맹렬한 비난의 대상이 될 뿐이다.

7. 추리 소설 작가의 정신상태는 온전해야 하며, 그에 의한 인물 묘사도 확실해 한다. 단, 범인의 인물 묘사에는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을 수 있다. 처음에는 동정받을 만한 인물로 등장했다가 차츰 사악한 본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상대를 속이려면 반대쪽을 노려야 하기 때문이다.

8. 좋은 문장 어느 정도의 유머 감각은 반드시 필요하다. 연애의 재미를 첨가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반드시 첨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9. 결말에서는 예측하지 못했던 외의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한다.

10.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최종적으로 범인의 체포, 또는 자백으로 막을 내려야 한다.

 

이상 헐의 10계는 로널드 녹스나 탐정 클럽의 내용보다는 훨씬 구체적이다. 연애 사건은 필수적으로 권장하지는 않지만 있어도 무방하다는 제안을 하고 있다. 그 전까지는 탐정이 범인을 교소로 보내려는 것이지 결혼식장으로 보내려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을 해왔다. 실제로 고전 중의 고전인 셜록 홈에는 연애 사건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헐 이후 추리 소설에 섹스나 연애 사건이 등장하는 것은 거의 필수적이고 그 자체를 주제로 삼는 경우도 대단히 많다.

또한 결말은 탐정에 의한 범인의 자백이나 체포 끝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추리 소설에서는 범인 체포 이후의 이야기, 즉 법정 추리 소설이 주류의 하나가 되어 있다.

어쨌든 헐의 10계 사문화(死文化)된 계명이 아니라, 아직도 추리 소설 작가에게는 굉장한 명심보감이 되고 있음분명하다.

 

(4) 반다인의 20규

 

반다인이 1928년 <아메리칸 매거진>에 발표했다가 1939년의 <살인사건 옴니버스>에 재록 ‘반다인의 20규칙’은 선풍을 일으킨 추리 소설의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추리 소설은 극명한 지적 게임이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데 작중의 탐정과 독자가 동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 모든 단서는 명확하게 기재되어야 한다.

2. 작중의 범인이 탐정에 대해서 적당히 행하는 속임수나 술책이 아닌, 독자를 속이는 기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3. 이야기 중에 로맨스적 흥미를 곁들여서는 안 된다. 요컨대
, 탐정은 범인을 재판정에 보내려는 것이지 사랑에 고민하는 남녀를 예식장에 보내려는 것이 아니다.

 

4. 탐정 또는 수사 당국의 직원 중의 한 사람이 범인이라는 결말을 지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리로 만든 돈을 반짝반짝 빛나게 닦아 금화라고 속이는 것과 같다. 명백한 사기행위이다.

 

5. 범인은 이론적 추리를 통해서 판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연, 암호, 무동기의 자백 등에 의한 해결은 안 된다.

 

6. 반드시 탐정이 등장해야 한다.

 

7. 추리 소설에는 반드시 시체가 있어야 한다. 살인이 아닌 범죄를 다루는 것은 재미없다. 가벼운 범죄로 독자에게 수백 페이지를 읽게 할 수는 없다.

 

8. 범죄의 수수께끼는 엄격한 자연 법칙에 따라 풀어야 한다.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점을 친다가, 심령술, 최면술 등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9. 탐정은 한 사람이어야 한다.

 

10. 범인 소설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독자가 관심을 두지 않던 인물이 갑자기 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11. 작가는 심부름이나 하는 하인을 범인으로 해서는 안 된다.

 

12. 범죄가 몇 번 있든 범인은 한 사람이어야 한다. 공범은 있어도 되나 주범은 있어야 한다.

 

13. 비밀결사, 카모라당(1820년 무렵,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생긴 정치적 범죄 비밀 결사-편집자주), 마피아 등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 교묘한 사건의 배후가 조직이라면 재미가 줄어들 것이다.

 

14. 살인 방법과 수사 방법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 환상적인 세계에서의 살인은 용납되지 않는다.

 

15. 통찰력 있는 독자가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라야 된다. 사건의 종결을 읽고 나서 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 모든 사실이 정확히 부합되어야 한다.

 

16. 정확한 서술적 묘사, 지엽인 일에 대해서도 전문적인 설명, 정교한 성격 분석을 해야 하며 분위기에 도취되어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된다.

 

17. 직업적 범죄자가 범인인 것은 좋지 않다. 근엄한 성직자라가, 자선가로 소문난 귀부인의 범죄 같은 것이 훨씬 흥미롭다.

 

18. 사고 또는 자살이었다고 결말지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독자를 놀리는 일이다.

 

19. 살인의 동기는 모두 개인적인 것이라야 한다.

 

20. 끝으로 나의 신조를 20항으로 끝내기 위하여 자존심이 없는 작가라면 써먹을지도 모르는 수법을 열거하려 한다. 이 수법을 쓰면 작가의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다.

 

최면술, 지문위조, 대용품 알리바이, 개가 안 짖었다고 지인이라는 것, 피하주사와 맹독, 최종적으로 탐정에 의해서만 해독되는 암호.

 

반다인의 20규칙추리 소설을 위한 상당히 구체적이고 재미있는 공식이라고 할 수 있다. 라서 추리 소설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으로 꼭 알아두어야 할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의 비밀을 다 알려주는 것 같아 추리 작가이기도 한 필자로서는 쓴 웃음이 날 뿐이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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