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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와 사랑할 때

  • 작성일 2007-11-01
  • 조회수 1,537




 

 



  

오후 4시.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가 시그널 뮤직으로 흘러나온다. 이 라디오 프로그램의 이름은 노래 제목과 똑같은 노래의 날개 위에이다. 진행자 정세진은 아홉시 뉴스를 진행하는 정세진. 그런데 바로 그 정세진이 맞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사람이 어떻게 이 일 할 때와 저 일 할 때 같은 사람일 수가 있겠는가. 이 사람을 사랑할 때와 저 사람을 사랑할 때, 두 순간을 똑같은 모습으로 사는 이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 혹은, 부처님. 누구에겐가는 노래, 누구에겐가는 폐수, 누구에겐가는 은행나무, 누구에겐가는 헤로인, 누구에겐가는 치명적인…….

나는 텔레비전을 본 지 너무 오래됐다. 그래서 목소리의 주인이 정세진인지 아닌지 장담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프로그램 소개란에는 정세진의 사진이 붙어 있다. 그렇지만, 지금 접속해서 듣고 있는 이 방송국은 패러디 사이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케이비에스의 정세진이 아니라 엠비시 아홉시 뉴스의 김주하라면, 언제라도 그 김주하가 그 김주한지, 아니면 목소리만 똑같은 김주한지 구별해낼 자신이 있다. 그동안 얼마나, 김주하의, 다정하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를 많이 상상해 보았던가. 보이시(Boyish)한 김주하 - 목소리. 정세진의 목소리도 다정으로 따지면야 두 번째로 꼽힐 수 없긴 하다. 다시, 어쨌든. 오프닝 멘트가 지나가고 노래가 한 곡 흘러갔으니 오후 4시에서 몇 분은 흘러갔을 것이다. 이렇게 정세진의 진행 멘트가 나온다.

 

-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무얼 할까 고민하던 사내가 있었답니다. 좋은 직장, 좋은 동료, 좋은 이웃, 이렇게 다 좋다는 평가를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좋은 것들이 싫어서였을까요. 그는 문득 회사에 나가기가 싫어졌고, 월요일, 출근을 준비하다가 그냥 침대로 돌아갔습니다. 전화기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소리들을 무음으로 전환시켜 놓았고요. 지난 1주일 동안, 가끔 찾는 사람이 있었으나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는 출근을 과감하게 생략한 그 날 오전과, 그 이튿날 오전뿐이었습니다. 이런 나날을 보내다가 그는 문득 책을 보게 되었지요. 문득? 삶은 그냥 문득 일어나는 거라는 생각도 했더랍니다. 책장에는 한국 소설, 일본 소설, 미국 소설, 러시아 소설, 프랑스 소설, 독일 소설, 대학 다닐 때 사서 모았던 책이 꽤 있습니다. 책장과 떨어져 있는 책상 위에는 이런, 다른 종류의 책이 꽂혀 있었습니다. 피터 드러커, 아빠가 강해야 나라가 산다, 기업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긍정의 힘, 선물……. 입사 후에 산 것들이지요. 책의 종류가 달라진 것처럼 3년 사이에 참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그는 결혼 적령기의 사내이기도 합니다. 아직 애인은 없고요. 그는 책상을 등지고, 책장 앞을 서성거리다가 한 책을 뽑았습니다. 광화사라는 단편소설집입니다.

먼지를 털면서 그는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광화사…… 이걸 읽을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대학 입학 전에는 입학시험을 준비하느라 읽었던 책입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교양필수과목을 이수하느라, 힘들게 읽은 책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무슨 내용이었었는지. 미친 예술가의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왜 미쳤더라……. 그 세부가 기억나지 않았던 거죠. 열아홉 스무 살 적에 이 소설을 읽을 때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소설은 여(余)가―우리말로 나를 뜻하죠― 인왕산에 올라 풍광을 보다가, 어떤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서두를 펼치면서, 그는 문득 놀랍니다. 어? 나지막한 탄성이 나왔죠. 이게 이런 거였어? 혼잣말을 한 다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소설가의 분신 같은 사람이 산에 올라가서 음침한 동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나 지어볼까 하고 시작하는 이야기, 이런 시작이었던가?

열아홉 스무 살 적에는 몰랐던 사실입니다. 그럴 적에는, 어릴 때라고는 할 수 없는, 스스로는 어른인 줄 알지만 남이 보기에는 아직 어른은 아닌, 그 광풍의 시대 말이죠, 그럴 적에는 이야기의 내용만이 중요했고, 그랬기 때문에 어떻게 이야기가 시작되는지는 조금 사소하다고 여기던 그였습니다. 사실 그 광풍의 시대에는 누구나 다 그렇잖아요. 중요한 건 본론이다……. 그러니까, 소설로 따지면 발단을 지나 전개를 거쳐 위기나 절정 같은 순간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죠. 가식(假飾)의 가치를 완벽하게 무시하면서 자유롭게 살던 그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죠. 어른이 된다는 건 가식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고, 거짓말의 소중함을 타인에게 강조하기도 하고, 그러는 거잖아요.

어쩌면 회사를 그만두고 평일 낮에 산책을 나갔다가 무언가를 일부러 생각해야겠기에 생각의 꼬투리를 잡으려고 돌아가 책을 보기로 한, 지금의 자기 기분과 너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나 봐요. 음침한 동굴, 그 안에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 채워보자……. 그는 광화사를 내처 다 읽기로 합니다. 읽어가면서 그는 눈을 휘둥거리면서 놀랍니다. 아니, 이게 이런 내용이었단 말이야? 노래의 날개 위에 듣고 계십니다. 첫 곡은 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중에서 이중창 파-파-파-파-파-파파게나였습니다. 라스무스 소년 합창단이 부르는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을 두 번째 곡으로 들려드립니다.

 

캐논이 흐르는 동안 나는 상상을 한다. 오후 4시이기 때문에 이런 상상이 생긴다. K가 숨어 있는 Y의 방을 찾아가, K의 얼굴에 돋은 여드름을 짜주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면 좋을까. 누가 먼저 들어올지를 생각할까? Y? 연이? Y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고, 아내 연이는 만삭의 몸으로 문설주에 기대어 울고, 연이 뱃속의 셋째 아이는 발을 쭉 뻗어 내 몸, 내 두통의 어느 부분을 신경질적으로 차는 상상. 가로등 밑에서는 처제가 걸어가고 있다. 안 생길 것 같은 남자가 생겼다고 하던 처제가 말이다. K가 Y의 방으로 숨어들어간 뒤의 일이다. 그런데 왠지, 처제에게 새로 생긴 남자는 K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오후 4시가 되면……. 왜 오후 4시인가. 이유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 모르겠는 일은 모르는 채로 두어야 한다. 따지는 건 심각한 병이다. K는 정말로 Y의 방에 있을까. 거기도 동굴일 수 있을까.

소년 합창단의 음성을 따라올 수 있는 악기가 있다면 난 그 악기와 결혼을 할 것이다. 악기와의 결혼은 아내에게도 허락받기 쉬울 것이다. 처제에게 K를 소개시켜주자는 제안보다 훨씬 더 반가운 말로, 아내에게는 들릴 것이다. 캐논을 여러 종류 듣다보면 소년 합창단의 음성이 얼마나 좋은지 드러난다. 성이 분화되지 않은 소년들의 목소리. 캐논처럼 유명한 곡이라면 너무나 쉽게 비교, 대조되기 때문에 길고 짧은 걸 재볼 필요가 없다. 1 더하기 1이 왜 2인지를 증명하는 방식이 수학적 삶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고, 내가 만약 수학을 전공했으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1+1=2를 내가 증명할 수는 없지만 1+1=1인 건 몇 개 안다. 물방울, 기름방울, 공기방울, 이럴 때는 왜 방울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방울들은 섞으면 하나가 된다. 합창은 아무리 많은 아이들이 모여 불러도 결국은 1이다. 나는 너다…….

K는 알이에프(R. e. f)의 상심이라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나는 소년합창단원 같은 그 목소리로 그런,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쉬운 유행가를 부를 게 아니라 괜찮은 영어노래 하나 불러보라고 했었다. ‘사랑했던 나의 마음속에 작은 꿈 하나만을 남겨두고 너무 쉽게 나를 떠나버린 너를 이제는 이해하려 해 두 번 다시 난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야 익숙해져가는 슬픔 속에 갇혀버린 내 모습’ 이렇게 징징거릴 게 아니라 나나무스끄리가 로망스에 가사 붙인 노래를 부른 것처럼, 아주 그럴싸한 걸 해보라고. 얼마나 멋지냐. 영화 금지된 장난의 삽입곡인 스페인 민요 로망스에 가사를 붙인 노래. 그 얼마나 거창하고 폼나 말이다. 금지된 장난처럼 제목의 의미만으로 기억되는 영화도 있고 노래도 있다. 우리는 금지당할 것인가.

 

노래의 날개 위에 듣고 계십니다. 지금 시각은 오후 4시 15분을 막 넘어섰습니다. 회사에서 방송 듣고 계신 분들 많을 테죠. 잠깐 티타임을 이용해 청취하고 계신 분들도 계실 테고요. 오늘은 회사를 그만두고 책을 읽는 어떤 사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회사가 싫어져서 월요일에 출근 준비를 하다가 침대로 돌아간 사내. 그 사내가 어떤 소설을 읽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열아홉 스무 살에는 몰랐던 내용을 보면서 놀란다고 말씀드렸죠. 그…… 소설은 1920년대에 발표된 김동인의 광화사라는 단편소설입니다. 다시 그 사내는 소설을 읽으면서 놀랍니다. 아니, 이게 이런 내용이었단 말야? 주인공 솔거는 두꺼비처럼 못생긴 얼굴 때문에 결혼을 두 번 실패하거든요.

솔거는 낙담하여 산으로 들어가 슬픔을 달랩니다. 그러다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머니를 그리다가, 미인도를 그리기로 합니다. 그런데 쉽지가 않습니다. 어머니 얼굴도 생각나지 않고, 여자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 겁니다. 세상에 어쩜 이럴 수도 있나요? 상상의 힘을 빌어보지만 상상에서도 미인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때 마침 궁녀들이 인왕산 뽕밭에 누에를 치러 옵니다. 솔거는 그 궁녀들을 훔쳐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의 주인공인 사내는 다시 놀랍니다. 아니, 이런 내용도 있었어? 뽕밭의 궁녀라……. 그는 김동인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나도향의, 뽕이라는 소설과, 로영화 뽕을 떠올렸습니다. 중학교 시절, 몰래 본 영화입니다. 그는 금 따는 뽕밭도 떠올려 봅니다. 성인용 비디오라고 하네요. 네, 아시는 분들 많으시죠, 김유정의 소설 금 따는 콩밭을 패러디한 제목이죠. 그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읽습니다.

어쨌거나, 솔거는 드디어 미인도의 완성을 보게 됩니다. 모델이 될, 너무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거든요. 노래의 날개 위에 함께하고 계시는 지금 시각은 오후 4시 17분 11초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아, 이렇게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무언가를 이루게 되나 봅니다. 노래 한 곡 더 듣고 이야기 이어서 전해드리겠습니다. 백만 송이 장미. 러시아 민요. 러시아의 국민가수 알라 푸가체바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반복되는 후렴이나 따라 흥얼거려볼까. 상당히 난해하다. 오블리비옹 오블리비옹 오블리비옹, 아 어려워, 이자끄나 이자끄나 이자끄나 비지……. 정말 어렵다.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잊었구나 잊었구나 잊었구나, 아, 정말…… 어렵다. 가사 생략하고 콧소리로 리듬을 따라간다면, 데스크 자리에 앉아 있는 과장이 내 이어폰 속에서 어떤 노래가 흐르고 있는지 눈치챌 수도 있을 거다. 그는 심수봉을 떠올릴 것이다. 백만 송이 장미. 심수봉이 부른 번역 가사는 이거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어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그러나 지금은 도저히 모를 것이다. 내가 무슨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지. 라디오 속의 사내는 어떤 직장에 다니고 있었을까. 이만하면 우리 사무실, 근무 조건은 괜찮은 셈이다.

K는 정세진을 좋아했다. 아나운서의 패션과 기타(etc)를 바탕으로 작성한 어떤 석사학위논문에 의하면 “‘KBS 뉴스9’ 정세진 아나운서는 액세서리를 하지 않고 턱 선이 넘지 않는 단정한 헤어스타일로 여성 앵커로서의 전형적 모습을 갖추고 있어 공영방송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KBS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반면 ‘SBS 8시 뉴스’ 의 김소원 아나운서의 경우 직선적 이목구비에 파스텔 색상의 의상을 주로 입어 역동적이고 젊은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이는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개성을 강조하는 민영방송으로서의 SBS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MBC 뉴스데스크’ 김주하 아나운서의 경우 원색 계통의 화사한 복장을 선호하지만 정적이고 간결한 느낌을 잃지 않으며 메이크업도 전형적 방식에서 탈피, 유행에 따라 변화를 주고 있다. 이는 화려하진 않지만 세련되고 자유로운 여성 앵커의 복합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공영성과 상업성을 함께 갖춘 MBC의 중간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라고 한다. 꼭 이렇게, 따옴표를 쳐서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남의 의견임을 밝히고,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16&article_id=0000146914§ion_id=106&menu_id=106, 이렇게 출처를 밝히는 건 양심 때문이 아니라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표절 시비에 대비하는 건 우리 시대의 유행이니까.

맞는 말인가? 김주하만 놓고 본다면, 음, 그녀는 사람을 묘하게 노려보는 느낌이 있고, 정세진은 음, 자주 안 봐서 그렇겠지만, 좀 뭐랄까, 그러니까 어쩌라는 거냐 하는 아주 매력적인 냉소가 있다. 체념도 있고, 발랄함도 있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김주한가. 그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K가 정세진을 좋아해서? 흠. 그럴 수도 있다.

에스비에스에는 좀 미안한 일이다. 그 방송국 여덟시 뉴스 앵커우먼을 나는 모른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한 시간 빠른 뉴스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시각에 난 회사에 있거나 쿠바에 있거나, 둘 중 하나다. 9시를 넘겨서 들어가는 내게는 언제나 김주하가 주연이다. 김주하 때문에 아내와 나는 생사를 오락가락 한 적도 있다.

“야, 제발 티비 좀 끄란 말야.”

“넌 뉴스도 안 보니?”

“그러면 에스비에스를 보면 될 거 아냐. 일찍 들어와서.”

“회사 일이 그렇게 안 끝나는 걸 어떡해.”

“소시지 그거 안 먹고 들어오면 되잖아. 집에서 먹으면 안 되는 거야? 당신이 소시지 먹으면 애들은 저절로 커?”

“제발 소시지 가지고 시비 걸지는 말자고 했었잖아……. 당신도 동의했잖아.”

생각해 봐도 시답지 않은 싸움이었다. 아내는 정말로 내가 혼자서 쿠바에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마담이나 바텐과 끈적끈적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쿠바로 나온 적 있었다. 내가 혼자라는 건 아내도 잘 안다. 혼자 소시지를 먹고 있는 남편……. 넘을 수 없는 고독 저편에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소시지 얘기를 하던 그 날, 아내는, 김주하 얼굴이 전면에 나오자 트랜지스터를 뽑아버렸다. 우리 티비는 규격 전원이 110볼트인 소니 29인치였다. 아내가 결혼 전부터 사용하던 것이었다. 220볼트로 통일된 건물 안에서 110볼트 소니를 쓰려니 당연히 트랜지스터가 필요했다. 나에게, 티비를 끄는 게 아니라 트랜지스터를 확 꺼버리는 아내는 분명 리모컨을 던지게 할 정도로 나빠 보였다. 아내가 만약 정세진이 있는 케이비에스로 채널을 돌렸으면 적당히 화해하는 쪽으로, 나도 화를 누그러뜨렸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 죽을래?”

“그래. 죽을래.”

“정말이지?”

“그래. 정말이다!”

“그래, 죽어라!”

그리고 핸드폰과 리모컨을 차례로 던졌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두 물건이 벽에 부딪치면서 튕겨지더니 하나는 아내의 정수리로, 정확하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늘로 거기를 찌르면 정말로 눈 깜짝할 새에 숨이 넘어간다는 목 뒤의 그 어느 부위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말이다. 사람 살고 죽는 건 장난과 비슷했다. 아내는 연속으로 두 방을 맞고 뒤로 확 넘어가버렸다. 야, 잘못했다, 제발 눈 떠…… 내가 부둥켜안고 있을 때 아내가 눈을 번쩍 떴다. 서로에게 아주 민망한 순간이었다. 이 일이 있고난 뒤 우리는 텔레비전을 버렸다. 김주하와, 이젠 정말 굿바이였다.

 

러시아 민요 백 만 송이 장미, 알라 푸가체바의 음성으로 들으셨습니다. 사실 이 노래는 청취자 사연에 올라온 노래입니다. 장미진 님 잘 들으셨나요. 장미진 님께서 보내주신 사연에는, 아마도, 어떤 연인이 끼어들어 있겠죠? 꼭 옛일의 대부분은 연인과 관계된 것일 것만 같은 게 요즈음 날씨입니다. 아니었으면 죄송하고요. 청취자 여러분들께도 사연을 들려드려야겠네요. 며칠 전에 장미진 님께서 보내주신 사연은 이런 거였습니다. 제목을 알 수 없는데 자꾸만 그 노래가 생각나니 들을 수 있는 길이 없냐는 거였어요. 헌혈하고서 받은 시디가 있었는데, 그 시디를 잃어버렸다고 해요. 이사를 했거나, 방 정리를 새로 했거나, 아니면 어디 소중하게 뒀는데 너무 소중하게 두다보니 둔 곳을 잊어버려서 못 찾는 것일지도 모르죠. 이렇게만 사연이 올라와서, 스태프들이 그 노래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으니까 어쩌질 못하고 있었어요. 틀어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어떡할까 하고 있었는데 장미진 님이 다시 메일을 보내왔죠. 첨부파일을 붙여서요. 그건 러시아민요 백 만 송이 장미였습니다. 첨부된 미디 파일에는 물론 장미진 님이 직접 녹음한 허밍이 들어 있었구요. 그 허밍이 정말 멋진 것이었다는 걸 전해드립니다. 다시 노래 한 곡 들려드립니다.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가 부릅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잃어버린 내 마음. 연주시간은 3분 05초입니다.

 

바보. 심수봉이 번역해서 불렀다고 그랬으면 단박에 알아차렸을 걸. 허밍으로 부르는 백만 송이 장미도 듣기 좋을 것 같긴 하다. 심수봉의 그 노래를 몰랐을 수도 있겠지. 몰랐으니까 그랬겠지. 심수봉이 번역해서 부른 노래가, 그리고, 그 노래 한 곡만은 아니니까. 허밍이 차라리 확실하지. 백만 송이 장미. 아내가 생각난다. 쿠바에 들러 소시지를 먹고, K가 나오지 않으면, 오늘은, 장미를 사 가야지. 아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생각난다. 오지혜가 부르는 사랑밖엔 난 몰라.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K는 뭘 하고 있을까. 같은 대학을 졸업한 M형과 S형은 그게 선진국형 외톨이 증세라고 진단한 적 있다. 아무 이유 없이 바깥 생활을 끊어버리고 싶어지는, 갑작스럽게, 그런 질환에 걸려든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바깥으로 나오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란다. 그래도 누군가는 불러주어야 한다. 전화나 한번 걸어보자. 컬러링이 울리는 기간은 정확히 45초. 전화기에 통화 시간이 초당으로 기록되니까 알 수 있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 아니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어요, 지나간 세월 모두,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원래 가사는 지나간 세월 모두 다음에는 “잊어 버리게”로 이어진다. 그런데 45초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처음부터 컬러링이 다시 시작되어 ‘지나간 세월 모두우……’에서 끊어지고 뒷가사 생각할 여유 없이 처음의 ‘그대 내 곁에 선 순간’으로 돌아간다. 지나간 세월 모두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봄날 캠퍼스에서 병아리색 라운드 티를 입고 폴짝폴짝 뛰던 지나간 세월 모두,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지나간 세월 모두,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슬프게 행복했지. 오지혜. 오디션에서 박미현이를 밀어내고, 방은진이도 밀어내고, 캐스팅된 괜찮은 배우. 오지혜는 트럭으로 야채 행상을 다니던 중 우연히 만난, 10대 시절 함께 했었던 밴드의 리드 기타를 만나 보컬로 돌아가지. 남편과는 사별했다지. 리드 기타는 오지혜를 사랑하지. 그리고 둘은 내가 K에게 “고향이 이런 곳이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한 적 있는 항구, 그곳의 밤무대에서 해피엔딩의 노래를 부르지. K의 컬러링에 들어 있는, 사랑밖엔 난 몰라……, 를 부르지. 우리 미래가 저런 것일지도 몰라, 우린 그런 말을 나눴었지.

 

노래의 날개 위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몇 초 후에 4시 25분이네요. 와아, 오늘은 날씨가 정말로 좋네요. 자목련이 벌써 피었다죠. 자목련은 백목련이 다 핀 다음에, 늦게야 피는데. 조금 뭐랄까 도도해 보이고 자존심 강해 보이죠. 자색이 잎잎이 들어가 있는 자목련 말예요. 오늘 함께 하고 있는 이야기는 어느 회사원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문득 회사 출근을 안 했다가 김동인의 광화사라는 단편소설을 읽는 사내 이야기죠. 그는 소설가의 분신이 나와서 이야기를 만든다는 내용에 놀라고 또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러니까 소설가의 분신이 나와서 만든 이야기의 주인공인 솔거가, 두꺼비 상을 가져서 결혼에 두 번이나 실패한 솔거가, 산에서 혼자 지내다가 미인도를 그린다는 얘기를 들려드렸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림을 완성하게 될 모델을 만난다는 대목까지요.

자목련 같은 여인이었을까요. 솔거에게 찾아온 그 아름다운 여자는? 그 아름다운 여자는…… 뭐랄까요. 뭔가가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있죠. 정말로 알 수 없는데 뭔가가 느껴지는 거. 냇가 바위에 앉아 있는 처녀는, 정말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처녀는, 소경이었습니다. 소경 처녀가 어떻게 산속의 냇가 바위에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는 거지? 사실적이지 못하잖아……. 이런 걸 묻는 독자들, 청취자분들께는 리얼리스트의 기질이 다분하신 거라고, 우리 작가님이 귀엽게 메모를 해두셨네요. 우리 프로그램 임민영 작가님, 언제 봐도 센스 있으신 분이죠. 리얼리스트는 현재를 생각하고, 모더니스트는 미래를 생각하고, 로맨티스트는 과거를 생각하고, 그런다던데…….

솔거는 소경 처녀를 움막으로 데려가 얼굴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림은 매우 빠른 속도로 완성을 향해 나가게 됩니다. 이제 눈동자만 그려 넣으면 완성! 되는 순간, 솔거는 이 작업을 다음날로 미룹니다. 그리고 밤을 보냅니다. 여인과 함께.

영화나 소설에서 이런 장면 많이 나오죠. 조각가와 모델, 화가와 모델이 사랑에 빠지는 얘기. 이런 상상해 보시면 좋겠네요. 하루하루의 외로움을 버텨내는 데 좋은 약이 되는 상상인데요, 모델이 돼본다거나, 화가나 조각가가 돼보는 거요. 모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사랑을 기다리시는 거고, 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음…… 사랑을 몇 번 해본 사람이라고, 대체로 그런 경향이 있다고 그러네요. 아, 아닌가요? 모델은 뭐랄까 좀 기다림에 익숙하고, 화가는 좀 이리저리 재는 것에 익숙하고…….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네요. 지루하신가요? 노래 들려드릴 시간인데, 조금 더 소설 속의 사내, 솔거의 이야기를 하기로 합니다.

흔히 화룡점정이라고 하죠. 결국은 그림을 완성하게 된답니다. 여기엔 죽음이 끼어 있습니다. 참 난처한 일입니다. 소경 처녀를 움막에 데려가서 그녀를 그려놓고, 눈만 완성하면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 하룻밤 자고 난 이 여인의 눈에서 애욕을 본 화가는 그만, 여인을 죽이고 말거든요. 애욕……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죠. 솔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멱살을 쥐고 흔들어서, 여인이 죽은 줄도 모르고 한참을 더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의 완성은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죠. 여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솔거가 깨닫는 바로 그 순간. 멱살을 놓았더니 여인이 쓰러지면서 벼루에 있던 붓을 치게 됩니다. 이때 튄 먹물이 그림 속의 여자의 눈으로 들어가서 눈동자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화룡점정의 용처럼, 그림 속의 여인이 어딘가로 날아갔을까요?

여기까지 읽던 사내는 잠깐 생각해보았답니다. 에이 이게 뭐야. 이것 때문에 내가 시시하다고 생각한 거였나 봐. 스무 살 열아홉 살 적에 말예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어. 사내는 조금 황당하다고 여기면서 책을 덮었습니다. 노래 한 곡 더 듣습니다. 카치니의 아베마리아입니다.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 삽입되면서 다시 널리 알려지게 된 곡이죠. 라트비아 출신의 소프라노 이네사 갈란테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소시지가 생각난다. 영점 오 센티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칼집이 가지런하게 나 있는 소시지……. 소스-에이지(Sauce-Age). 칼집 낸 자리가 약간 벌어지면서 아물고 있는……. 기름에 튀긴 것과 물에 데친 것, 갈색의 평범한 후랑크 소시지, 연한 살색의 케이크 소시지, 이것들 위에 물결무늬로 뿌려져 있는 머스타드 소스의 노란 빛…….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거기에 차가운 맥주 한 컵. 카아. 도대체 이 소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입으로 나오는 건지 신기할 정도다. 포크로 찍어 통째로 집어 들고서 우걱 베어 먹을 때, 살짝 입가에 묻는 기름기. 이걸 혀끝으로 마무리했을 때 느껴지는 통쾌함. 후라이드 치킨이나 돈가스, 생선가스 같은 것들의 튀김옷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톡 톡 터지는 소리의 통쾌함이라니……. 톡 튀는 느낌이 아니면 소시지를 안주로 먹을 이유가 없지. 칼집을 내지 않으면 이 느낌이 100배는 더 좋아진다. 쿠바에서 내가 먹는 맥주는 사포로 실버 컵이다.

K는 소시지를 좋아했다. 전화나 한 번 더 해 보자. 컬러링이 시작된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참 절묘하다. 이건 소시지 위에 머스타드 소스가 앉아 있는 것보다 절묘하다. 뭔가 문법에 안 맞는 것 같으면서도 감동적인 가사다. 어제-울다, 오늘-당신, 내일-행복…….

 

노래의 날개 위에 함께 하고 계신 지금 시각은 4시 37분 30초를 막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느 날 문득 회사를 그만둔 한 사내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나왔는지 모른다, 어느 순간에 결정 내렸는지 알 수 없다, 주위 사람들도 그렇고, 자기도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언제 결정이 내려졌는지. 언제 하고 있는 일이 이렇게 싫어졌던 건지. 그런데, 참, 관성이랄까요, 생각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회사일이 먼저 떠오르는 거 있죠. 책을 읽고 나서도요.

미리 말씀드려 놓을게요. 그는 이 이야기의 끝에서 자기가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던 어떤 계기를 발견해내고 만답니다.

화룡점정. 용 그림의 마지막에 눈동자를 찍었더니 용이 날아간다. 판타스틱한 이야기죠.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릴 적에 그는, 선생님께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고 해요. 선생님, 그럼 쇠사슬로 묶어놓고 눈을 그리지……. 그럼 용을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선생님이 뭐라고 했을까요? 우와, 너, 정말, 진취적이고, 용맹하구나. 칭찬을 해줬다죠. 아동 심리 분석 일러스트에 이런 거 있죠. 벽이 있고,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이 안에는 과자가 들어 있다. 선생님이 묻습니다. 누구 어린이, 어떻게 저 안에 있는 과자를 꺼낼 거죠? 반응은 이렇게 나옵니다. 벽을 부수고 가요, 벽을 넘고 가요, 아니에요, 아빠 옷걸이를 가져와서 꺼내요, 엄마한테 꺼내달라고 해요……. 어른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마음으로 먹어요……. 자, 여기까지 왔네요. 눈동자를 완성했다는 얘기까지. 노래의 날개 위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음, 눈동자가 완성되었다는 얘기까지 했죠. 사내는 저작권을 떠올렸다고 해요. 직업이 그런 것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저작권 분쟁에 개입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내였을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어디에 어떻게 저작권 문제가 개입하는 걸까요. 솔거가 소경 처녀를 만나 그림을 그린 다음, 애욕의 눈빛을 보고 죽이는 순간 처녀가 쓰러지면서 친 붓끝의 먹물이 우연하게도 눈으로 들어가 눈동자를 완성하게 되는데요.

사내에게는 이 문제 하나만 계속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소경 처녀를 죽이는 순간 벼루에 있던 먹물이 튀어서 완성되는 눈동자, 이 그림의 주인은 누구냐? 화가냐 처녀냐? 당연히 처녀가 죽었으니 주인은 화가다, 아니다, 우연이라고 하지만 이 우연의 결정적 계기는 처녀니까 그림의 명의는 처녀의 것이다, 아니다, 비율을 따져 계산해야 한다, 이런 식의 싸움이 머릿속에서 전개되고 있었지요. 노래의 날개 위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앞서는 라트비아 출신의 소프라노 이네사 갈란테의 음성으로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들으셨고요, 이번에 들으실 곡은 베르디의 오페라 루이자 밀러 중 별 밝은 밤에입니다.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음성입니다. 연주 시간 3분 41초입니다.

 

이럴 때는 수첩에 적어가면서 정리를 해보는 게 이롭다. 무인도에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K한테 연락할 수 있는 방법 1. 전화를 하루 종일 해댄다. 이건 해봤기 때문에 효과가 없다. 2.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이건 Y의 집에 있다는 걸 아니까 그럴 필요 없다. 3. 시골집에 전화를 걸어서 어디에 있는지 물어본다. 이것 역시 의미 없다. Y의 집에 있을 테니까. 4. K의 누나한테 전화를 걸어본다. 이건 근황을 들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누나네 전화번호는 바뀌었고, 114에 전화번호 변경 사항이 등록되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5. 서울 시내에 있는 소시지 노점상을 뒤져본다. 그는 소시지 벤더를 차린다고 말하곤 했다. 자기의 리어카 노점상은 꼭 영어식으로 벤더vendor라 불러달라고 했다. 이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길거리의 리어카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뒤진단 말인가. 6. 왜 갑자기 회사를 그만뒀는지 원인을 찾아본다. 이걸 위해서는 다시 정리를 해야 한다. 6―1.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한 정확한 날짜는? 이건 모른다. 휴직계도 안 냈으니까. 그만두기로 결정한 ‘정확한’ 날짜는 언제인지 모른다. 6―2.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있었던 충격적인 일은? 이건 모른다. 뭐가 충격이었는지 그 마음을 모르니까. 6―3. 그럼 나한테 맞은 게 분해서? 이건 가능성이 있다. 회사 생각을 하면 나한테 뺨 맞은 생각부터 날 테니까. 6―4. 그럼 왜 내가 뺨을 때렸던 거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왜 때렸을까. 물렁물렁하게 살지 말라고 그랬던 거지. 잘 살아보라고. 이건 회사 일하고 전혀 상관없다. 그는 둘이 사직서 내고 나가서 벤더를 차리자고 했고, 나는 아이들을 키워야 하니 정기적으로 나오는 월급이 필요하다며, 그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정직하게 얘기했다. 그러자 그는 “진심이야?” 하면서 이죽거렸다. 마치 침을 뱉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뺨을 한 대 때렸다. 그는 자꾸만 얼굴을 들이밀면서 뺨을 더 때려보라고 했다. 나는 벽을 향해 배구공을 치듯이, 다시 내 쪽으로 튀어나올 그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뺨을 더 세차게 쳤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튀어나오지 않은 채, 너무 먼 벽 속으로 가버린 것이다. 사직서도, 휴직계도 내지 않고 곧장 Y에게 가버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연애를 축하해 줄 수 없어!” 음성녹음을 권하는 통신사의 안내에 따라, 그의 전화기에 말을 녹음하면서 나도 울었다. 벤더를 차리자는 제안에 응할 테니 다시 내 앞에 나타나달라는 말은 그런데 나오지 않았다. 그 다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정세진이가 나온다. 무슨 노래가 나오고 있었더라. 이건 무슨 말인가.

 

함께 당황스러워하거나, 저 사람 지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그래, 네가 어떻게 하나 보자, 무슨 말을 하면서 넘기는지. 모르는 척하고 넘기는지, 아니면 시디가 튀었다는 말을 어느 순간에 하는지 보자, 그러시는 청취자분들도 계시겠죠? 하, 지금은 그 순간입니다. 시디가 튀었네요. 음, 이럴 때 스튜디오가 얼마나 바삐 돌아가는지 상상하시겠어요? 밖에서 음악이 준비됐다는 사인이 옵니다.

 



6―5. 병원에 가봐야 될 것 같다는 말, 그 집착은 뭐였지? 이건 진짜로 모른다. 애매하고 모호한 게 아니다. 병원에 가야겠다는 말은 정말로 모른다. 다시 K를 만날 수 있는 방법으로 돌아가자. 7. Y를 만난다. 이건 너무 식상하다. Y는 언제나 K가 잘 있다고만 대답하니까. K의 안부를 물으면 Y는 이 말도 꼭 덧붙이지 않는가. “주임님 보면 안부 전하라고 했어요.” 역시 Y가 출근하고 없을 낮 시간에 Y네 집엘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Y네 집으로 한 번 가 봐? Y는 지금 저만치서 웃고 있다. 파티션 벽 너머에서, 왠지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는 눈빛이다. 정세진이 나온다. 노래가 뭐였더라. 아, 시디가 튀었다고 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알 수 없죠. 시디 튀는 거. 그런데 그 사내는 왜 회사를 그만뒀을까요? 방금 들으신 곡 소개를 안 했군요. 카바티나였습니다. 디어 헌터의 테마곡. 히 워즈 뷰리플, 그는 아름다웠네, 그런가요? 히 워즈 뷰리플.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랜데, 여러분들도 들으시면서 편안했으면 합니다. 이쯤 되면 우정이라기보다는 제3의 영역에 있는 사랑이라고 해야겠네요. 히 워즈 뷰리플, 뷰리플, 투 마이 아이즈. 그는 아름다웠네, 아름다웠네, 내 두 눈에. 서정적인 전쟁영화로 기억되네요. 무언가에 중독되어 전쟁지에 남아 러시안 룰렛게임 플레이어가 되어 있는 친구……. 그 친구를 중독시켰던 그 무언가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말씀드리고 있는 사내와는 다른 방식으로 산 사람이었죠.

다만 피곤했을 뿐이다. 다만 피곤했을 뿐이다……. 여기를 좀 강조해야겠네요. 그가 문득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던 이유는, 문득 찾아온 상상에 의하면 ‘피곤’이 이유였답니다. 그는 혼자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다만 피곤할 뿐’이라는 것도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피곤’이 사직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100퍼센트 긍정할 수 있는 나이는 몇 살 정도가 될까요? 많은 사람들은 피곤함만을 이유로 내세워서 사직을 하는 것에 대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네요. 노래의 날개 위에, 오늘은 회사를 그만 둔 사내, 그러니까, 문득 자기가 피곤하다고 느껴서 회사 출근을 생략하기로 했던 한 사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피곤만이 정답입니다.

지금 시각 4시 47분입니다. 지금쯤 외근을 마치고 막 차에 올랐을 청취자분도 계시겠네요. 퇴근길을 생각하시면서요. 방송국으로 오다보니 윤중로에 꽃이 한창이더군요. 차가 좀 막혔지만, 그래도, 차 막히는 게 오히려 좋았습니다. 꽃 아래에 있으니까요. 꽃 아래에서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이 사내가 들어 있는 대본을 검토하면서, 생각을 좀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참 이상해요. 이 사내 말예요. 일이 싫어서 그만둔 것만 같은데, 무척 피곤했던 것 같은데, 업무와 관련된 생각이 난 거지 뭡니까. 과연 이 그림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이 사내의 직업은 변리사였다고 해요. 특허의 권리를 법으로 보호하는 직업이죠.

어쩌면 그림의 주인 누구일까요, 라고 묻는 물음 자체에 함정이 있었다고 봐야겠네요. 꼭 사람만이 주인이라고 못박고 있는 것 같잖아요, 물음이……. 사람 아닐 수도 있는데……. 사내는 이제 침실로 가서 몸을 누이고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사내는 여기에 대한 자기의 답이 내려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도저히 침대에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고 그래요. 문득 내린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주인은 누구가 아니다. 누구라는 사람이 아니다. 화가도 아니고 모델도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이 살아야 했던 화가나 소경 처녀의 운명, 그 공동의 운명이 바로 주인이다. 사내는 집에서 입고 있던 간편한 차림 그대로 회사엘 나갔다고 합니다. 뭔가 결단을 내려야 되겠다는 거죠. 노래 들려드릴 시간이네요. 이번에는 오페라 아리아를 두 곡 연속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와 케이-스티븐의 오페라, 현대 오페라죠, 운명은 죽은 여신처럼의 아리아 아, 아버지 그게 아니에요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목소리죠, 소프라노 바바라 핸드릭스, 높은 십자가 교회 소년합창단원이죠, 12세의 소년, 보이 소프라노, 이조카테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그 사내는 어떻게 됐을까. 집에서 입고 있던 간편한 옷차림으로 회사를 찾아가 결단을 내려고 한 건 뭐였을까. 나라면 퇴직금 정산을 신청하겠다. 퇴직금을 상상하면서, 소시지와 사포로 실버 컵을 상상하면서 침을 삼키다보니 정세진이 나온다. 사내가 회사에 가서 뭘 했는지를 말하면서, 활기찬 일상 마무리 잘 하시고, 내일 또 뵙자고 하겠지. 그리고 부랴부랴 9시 뉴스를 준비하기 위해서 어디로든 발에 땀나도록 뛰어가겠지.

 

― 노래의 날개 위에, 오늘은 한 사내 이야기로 쭉 끌어왔네요. 어쩌면 이 사내는 우리 개개인이라기보다는 우리 개개인들을 뭉뚱그려서 만들어놓은, 어떤 전체의 현대인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함께 해온 한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목련이나, 개나리 같은 봄꽃은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죠? 꽃 핀 자리에서 살그머니 고개 드는 잎을 보면 꼭 잎이 꽃을 밀어내는 것처럼도 보이죠. 진달래와 철쭉을 구별하는 게 그거라고 합니다. 꽃이 먼저 피면 진달래, 잎이 먼저 솟으면 철쭉. 생긴 게 워낙 비슷해서 그런 구별법이 나왔을 겁니다.

화공이 완성하려던 미인도의 모델은 소경이었죠. 그리고 빼놓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화공은 소경 처녀에게 용궁 얘기를 들려줬죠. 용궁에는 여의주가 있는데, 그 여의주를 눈에 대면 세상을 환하게 볼 수 있을 거라고 말이죠. 그래서 소경 처녀는 자꾸만 여의주를 달라고 했던 거랍니다. 그때 새롭게 생겨났던 열망의 눈초리, 지난 밤 한 이불에 든 이후로 점점 자리를 넓혀갔던 애욕의 눈초리, 화공은 순수가 사라진 그 현장을 목격했다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그만 처녀를 죽이고, 말았던! 것이죠.

그런데 처녀가 쓰러지면서 친 붓 끝에서 떨어진 먹물이 마지막 화룡점정이 된 그 그림의 주인을 화공도 아니고 처녀도 아닌,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운명 그것이라고 결론지은 이 사내는 간편한 옷차림으로 회사에 가서 뭘 했을까요. 아,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입은 옷처럼 아주 편한 마음으로요. 그리고 허심탄회하게, 이렇게 말했다죠. 휴가를 1주일만 주십시오. 노래의 날개 위에, 마지막 곡은요, 안톤 루빈스타인의 멜로디입니다. 볼쇼이합창단의 노래로 듣습니다.

 

이것도 그럴싸해. 휴가를 1주일만 주십시오. 그래서, 어떻게 한다는 거지? 왜 휴가를 달라고 하지? 회사를 때려치워놓고 찾아가서 휴가를 달라? 좀 논리적이지 못하다. 엔딩 멘트를 어떻게 계몽적으로 하려고 이러는 걸까. 이제 라디오들도 계몽을 집어치우기로 한 건가? 어쨌거나 내게는 이제 퇴근시각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쿠바에 들러 소시지를 먹고 집으로 가면 나의, 오늘 일과는 끝이 난다. 피곤은 사직의 이유도 될 수 있고 자살의 이유도 될 수 있겠지. 엔딩 멘트가 궁금해진다.

“이봐, 김 주임, 피임교육 타임테이블 안 내?”

과장은 마치, 노래의 날개 위에가 끝나가는 시각임을 알고 있는 사람 같다. 여태 나를 기다려 준 것처럼 말을 하지 않는가. 술에 취하면 여자 뒤꽁무닐 쫓아다니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만 좀 누그러뜨리면 참 괜찮을 상사다. 내 입에서는 즉각적으로 이런 말이 나왔다.

“네. 진행 중입니다. 내일 오전까지 제출하겠습니다.”

내일이 없으면 회사를 어떻게 다닐까. 많은 건 내일에 있지. 인생 뭐 별거 있나. 까라면 까는 거고 죽이고 싶으면 죽이는 거지. K가 냈던 청소년 금연캠프 기획은 1년 반 동안이나 관내 학교를 순회하면서 성황리에 끝났다. 이번에 치를 행사는 그가 보류안으로 남겨뒀던 피임교육이다. 동성끼리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는 필요 없는 폭력인, 교육이다. 노래에 섞여 엔딩 멘트가 나온다.

 

노래의 날개 위에. 오늘은 한 사내의 이야기로 진행해 보았습니다. 평상복을 입고 회사로 가 사장실 문을 두드린 사내. 1주일만 휴가를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사원에게 사장님은 뭐라고 했을까요. 사장님이 뭐라 말을 하기 전에 사내가 말했다고 해요. 이렇게 군대식으로요. 몸 바쳐 충성! 하겠습니다. 그날은 문득 출근 준비를 하다가 침대로 돌아갔던 그 월요일에서 한 주가 지난 월요일이었던 거죠. 아, 누가 이 휴가를 못 내주겠다고 할 수 있겠나요. 사내의 손을 잡아준 사장님의 미소, 눈앞에 그려지지 않나요? 어쩌면 인생의 주인은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내가 깨달은 건, 그건, 화공의 삶이 인왕산에서 여(余)가 만든 하나의 이야기였다는 것, 그리고 미인도를 가슴에 품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던 화공은 결국 미쳐 방랑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삶 자체가 비애가 돼버린다는 거, 그런 거였답니다. 끝까지 읽었으니까 가능했던 깨달음이었을 것입니다. 열아홉 스무 살 적에는 미처 끝까지 읽지 못했었다는 기억이 저절로 따라왔다고 해요.

인생의 주인은 반은 운명이지만 반은 자기라는 것, 그런 것 아니었을까요. 피곤했기 때문에 회사에 가기 싫었다는 말을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고, 자기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만 같아 그 말을 가슴에 품고 다니며 걸어다녔던 요 며칠간의 시간들이 머릿속에서 휙 스쳐지나갔던 거죠. 이러다가 나 미치면 어떡해…….

더 멋지고 새로운 일을 찾지 않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사내……. 결국은 우리 현대의 어른들이 다 이러는 거 아닌가 싶네요. 그래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회사가 있었으니 이 사내는 행복한 편이라 해야겠습니다. 주말 되면 정말로 죽은 듯이 푹 쉴 계획, 세워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나 피곤해! 선언하신 다음에요. 노래의 날개 위에, 정세진이었습니다. 편안한 오후 보내시고요, 저는 내일 네 시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어쨌거나 라디오는 계몽적이다. 정세진의 인사를 받고 나는, 라디오가 계몽시킨 바를 따르는 의미에서, 내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같은 포즈로 계속 K를 기다리는 것이 현대를 사는 상식적인 일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사직서를 타이핑해서 출력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직의 이유가 ‘피곤’이라는 짧은 단어였기 때문이다. 출장 중인 소장의 책상 위에 두고 올까 하다가 다정한 척 잘하는 과장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피곤? 과장은 좀 황당하다는 것처럼 나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으로 그런 것인지, 더 상세한 이유를 묻지 않았다. M형도 S형도 마찬가지였다. 나만 피곤했던 건 아닐 것이다. 봄이 한창일 때였으므로 나더러 미쳤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쿠바로 가서 소시지를 먹었다.

 

봄을 그렇게 보내고, 여름 장마가 끝날 무렵 화실을 열었다.

화실에서 나는 주로 청소를 한다. 화구들을 정리하고 있으면 뭔가 새롭게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생기는 걸 느낀다. K를 그리기도 한다. 쿠바의 소시지와 사포로 실버 컵이 생각나는 횟수만큼 그리는 것 같다. 어떤 날은 캐리커처로 50장을 그린 적도 있는데 여러 차례 시도한 적 있는 정밀화는 완성이 되지 않았다. 그를 본 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광화사의 솔거처럼, 미인도를 그리고 싶지만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뽕밭에 누에를 치러 나온 궁녀들을 훔쳐보았던 솔거처럼, K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을 훔쳐보기 위해 회사 앞으로 가본 적도 있다. 화실에 오는 사람 치고 그를 닮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도 없다. 정말로, 그는 2년 전 노래의 날개 위에를 들을 때와 똑 같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컬러링도 그대로이고 전화를 안 받는 것도 그대로이다.

2년이 흐르는 동안 정세진은 노래의 날개 위에와 아홉시 뉴스 모두를 그만두었다. 김주하는 출산휴가로 잠깐 아홉시 뉴스 진행을 그만두었다가 복귀해서 지금은 주말 뉴스를 단독으로 진행한다. 가끔 상점 같은 데를 지나치다 우연히, 우리 집에는 없는 티비 속의 김주하를 보게 되면 피곤이 얼굴에서 느껴진다. 전처럼 좋아지지가 않는다. 외로워 보이는 것이다.

김주하가 외로워 보이는 날이면, 이제 무얼 할까……,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웹서핑을 하다가, 그 날의 방송을 다시듣기로 청취하면서 정세진의 목소리를 한 단락씩 받아쓰기 하곤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이 되면 기간이 만료되어 다시듣기로도 그 날의 방송을 들을 수 없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 여겨 나는 간간이 정세진의 목소리를 받아 적어놓기로 했던 것이다. 화실을 차리기 전의 일이었다. 정세진이 작가로부터 전해 받았을 것 같은, 타이핑 된 대본을 내 목소리로 읽으면서 나는 2년 전 그 날의 과잉되었던 나의 행동이 몇 퍼센트 정도 K와 연관되어 있었을까, 숫자놀이를 하곤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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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박금산 (소설가)

1972년 여수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 국문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1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하였고 소설집으로
<생일선물>,<바디페인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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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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