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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문학의 세계 (7)

  • 작성일 2007-11-21
  • 조회수 610





(1) 작가의 고민               


추리소설은 왜 재미있는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트릭의 재미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트릭(trick)이란 책략, 함정, 속임수 등을 뜻하는 영어다. 추리소설에서 사용되는 트릭은 우리말로는 적당한 표현을 기가 힘들다. 굳이 말한다면 반전의 기술이라고나 할까.

이 트릭은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리 작가를 만나면 어떻게 그렇게 머리가 좋으냐 농을 건다. 작가가 경찰관이 되었더라면 못 잡는 범인이 없을 것이란 말도 한다. 이 트릭을 두고 일반 문학 작가들은 작품이 아니라 퀴즈 게임이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사실 추리 작가들이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것도 트릭임에 틀림없다. 독자에게 진정한 재미를 주자면 이 세상의 모든 추리소설에서 사용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트릭이 나와야 한다. 누군가가 한번 써먹은 트릭을 사용하면 표절이라는 비난은 차치하더라도 독자로부터 비웃음을 사게 된다.

추리소설의 기본 플롯은 범행을 은폐하고 도망치려는 범인과 범인을 잡아내려는 탐정이 벌이는 대결의 연속이다. 이 쫓고 쫓기는 트릭은 작가가 만들어 내야 한다. 세상에 이미 발표된 유명한 트릭은 모두 배제해야 하는 박식함도 보여야 한다. 그뿐 아니라 “그것 참 재미있다. 깜박 속았어!” 하고 독자의 감탄을 자아내는 트릭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의 유명 작가 중에는 영국의 콜 부부(George Douglas Cole과 부인)나 엘러리 퀸(프레드릭 대니와 맨프레드 리)처럼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작품을 쓴 경우도 많은데, 이런 경우는 트릭을 만들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세상에는 800가지 이상의 트릭이 여러 작품을 통해 이미 발표되었다고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격인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가 말한 일이 있다. 벌써 30여 년 전에 한 이야기니까 지금쯤은 1천 가지 이상의 트릭이 발표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독자를 속이면서 트릭을 만들어는 작업은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중인격자의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부담과 유사하다. 범인의 기막힌 속임수와 그 속임수를 폭로하는 탐정의 역할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꾸준히 독자의 눈을 의식해야 한다. 범인도 속이고 독자도 속여야 한다.


(2) 트릭의 종류


 도로시 세이어스는 “트릭이란 우표 뒷장에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 정도로 가볍다는 뜻이 아니라 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트릭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독자는 흥미를 잃게 되고 반전의 충격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계의 추리 소설에 등장한 트릭의 종류를 대 9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1> 인간을 이용하는 트릭


 변장을 해서 범인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위기에서 탈출하는 방식이다. 가장 보편적인 트릭으로 루팡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다. 변장에는 남자가 여자로, 여자가 남자로, 청년이 노인으로, 처녀가 할머니로, 범인이 경찰관으로 변장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다.

1인 2역도 인간 트릭 중의 하나다. 한 사람이 두 사람처럼 보이게 생활하며 범행을 자유자재로 하는 경우도 있다. 녹스의 10계 중 “쌍둥이를 등장시키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를 경계한 말이다. 변장은 괜찮지만 아예 쌍둥이를 등장시키는 것은 추리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란 뜻일 것이다.

범행 후에 하는 변장으로는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트릭이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기가 죽은 것으로 변장하여 보험금을 타낸 뒤 외국에서 부유하게 살다가 들통 난다는 소설은 여러 편 있다.


<2> 장소를 이용한 트릭


장소를 이용한 트릭은 고전파 추리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중에서도 밀실을 이용한 밀실트릭(locked room)은 모든 트릭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했다.

추리소설의 아버지 포우의 <모르그가의 살인>은 최초의 밀실 트릭이다. 밖에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4층 방에서 살인 사건이다. 그러나 창문의 빗장 하나가 부러진 채 발견되었기 때문에 완벽한 밀실 트릭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밀실 트릭의 엄격한 정의는 첫째,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 따라서 범행 시간에 그 안에 범인이 있어서는 안 된다. 둘째, 범행 당시 범인이 실내 있었더라도 빠져나간 흔적이 전혀 없어야 한다. 셋째, 범행 시 피살자가 실내에 없는 경우 등 세 가지 경우가 존재한다.

이 중에 첫 번째 경우가 가장 많이 쓰인다. 범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고 들어간 흔적이 전혀 없는데 사람이 피살된 것이다. 투명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한 독자가 이해할 수 없어야 한다. 마술이나 초과학적 도구를 사용해서는 물론 안 된다.

코넌 도일의 작품 중 어느 수행 도사가 밀실에서 침대에 누운 채 혼자 굶어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희한한 것은 그의 침대 곁에 과일이며 빵 같은 음식물이 잔뜩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자살하기 위해 굶은 것은 아니다. 이 귀신 곡할 노릇의 수수께끼는 셜록 홈스가 해결한다. 수행자가 묵은 밀실은 천장이 대단히 높은 고급 건물인데, 범인은 수행자가 잠든 뒤 천장에서 밧줄을 내려 침대 네 귀에 매고 공중으로 올려 매달아 두었던 것이다. 수행자는 평소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 겁이 나서 꼼짝 못 하고 며칠 동안 침대에 매달려 있다가 굶어 죽었다. 범인은 침대를 다시 원래 자리로 내려다 놓고 밧줄을 걷어들고 천장을 통해 사라졌던 것이다. 물론 약간의 무리는 있으나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1층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한 사람을 1층 방에 그대로 두고 잠들게 한 뒤 그를 5층으로 옮겨 똑같은 방처럼 보이게 꾸며 놓는다. 아침에 자고 일어난 그 사람은 1층인 줄 알고 문을 열고 나갔다가 5층에서 추락해 죽는다. 기막힌 밀실 트릭의 성공 사례다.

전화벨이 울리면 폭탄이 터지는 장치를 해 놓고 먼 곳에서 전화를 걸어 살인하는 방법은 알리바이가 완전히 성립되기 때문에 독자를 괴롭힌다.

장소와 시차를 동시에 이용하기도 한다.

이상우의 <여섯 번째 사고(史庫)>의 경우 범인은 먼저 사람을 죽이고 자동 도어의 꼭지를 눌러 자동으로 잠기게 한 뒤 창문에서 리모으로 플레이어의 소리 크기를 조절해 마치 안에 사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이렇게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트릭은 시대가 지날수록 발전한다. 컴퓨터를 이용한 트릭, 모바일을 이용한 트릭도 계속 개발되고 있다.

두 번째, 살인 당시에 범인이 실내에 있는 경우이다.

고전파 초기 작품들의 밀실에는 문고리의 장난이 많다. 지금은 그런 도어는 없지만 옛날에는 도어를 닫고 기역자 걸이로 거는 경우가 많았다. 범인은 살인을 한 뒤 문고리의 걸쇠 닿는 곳에 눈 뭉치를 끼우고 기역자 고리를 살짝 얹어 놓고 나온다. 눈이 다 녹으면 고리가 저절로 찰칵 잠겨 완전 밀실로 변한다. 요즘은 번호 키, 카드 키 등이 많아 이 트릭도 쉽게 사용할 수는 없다.

세 번째, 피살자가 실내에 있었던 경우다. 살인을 한 뒤 급히 건물을 하나 지은 뒤 시체를 그 곳으로 옮겨 놓는다면, 건물 지은 뒤 살인한 것으로 되니까 확실한 알리바이가 성립한다.

이 유형의 트릭은 기자 출신 작가 룰루따뷰(Rouletabille)의 <황색방의 비밀>(Le Mystere de la Chambre) 이후 크게 유행했다.


<3> 발자국을 이용한 트릭


이솝 우화에 사자가 여우를 보고 말한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내 동굴에 문안을 오는데 너는 왜 한 번도 오지 않느냐?”

그러자 여우가 대답한다.

“동물들이 사자님의 동굴로 들어가는 발자국은 있는데 나오는 발자국은 없더군요. 만약에 나오는 발자국도 있었다면 나도 문안을 갔지요.”

사자가 여우 탐정에게 한방 먹은 이야기다.

오랜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사에 이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발자국을 위장하기 위한 트릭은 많다.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와 방향을 착각하게 한다든지, 남자가 여자 신발을 신고 나온다든지, 기상 예보를 이용해 비 오기 직전 들어가 비온 뒤에 나와 발자국을 지워지게 한다든지 하는 트릭이다.


<4>지문을 이용한 트릭


지문만큼 수사에 많이 활용되는 방법도 없다. 사람마다 다르고 평생 변하지 않는 것이 지문이고, 지나간 곳에는 반드시 남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전 세계의 모든 수사에 활용되고 있는 지문의 분류법은 19세기 후반 영국의 유전학자 프란시스 골튼을 비롯한 몇 명의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범인이 장갑을 꼈다든지 말끔히 닦고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요즘은 쉽게 응용하기 어렵다. 범인들은 지문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범행 상식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트릭으로 사용하기란 힘들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지문을 교묘히 이용해 수사를 혼란시키는 트릭은 많이 등장한다.

요즘은 지문 대신 유전자 감식이 훨씬 정확한 방식이라 이 수사 방법이 보편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아마도 유전자 감식을 이용한 트릭도 앞으로 많이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트릭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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