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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문학의 세계(8)-추리소설의 트릭

  • 작성일 2008-01-30
  • 조회수 1,390


(제8회-마지막)

 

 

(5) 시간을 이용한 트릭

 

알리바이 조작에는 일시(日時) 트릭이 가장 많이 활용된다. 시계 자체로 하는 트릭은 너무나 많이 알려져 별로 신선미가 없다. 가령 피살된 사람이 차고 있던 시계가 파손되어 정지되어 있는데 그 정지된 시간이 3시 10분이었다. 따라서 ‘피살된 시간은 3시 10분이다’ 하는 따위의 추리는 너무 낡은 수법임이 틀림없다.

클리스토퍼 부쉬(Clistop Bush)의 장편에서는 집안에 있는 모든 시계를 몇 시간 뒤로 돌려놓아 집안의 여러 사람이 외출 시간을 오인하게 하는 트릭을 쓴다. 범행을 한 뒤에는 시계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아 시간의 완전한 공백을 만든다. 그 때 집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착각한 시간을 수사관에게 증언하게 된다.

시간 트릭은 꼭 시계를 이용해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알리바이 시간을 만들어 놓고 쾌속정 배라든가, 총알택시 같은 것을 이용해 범행을 저지르고 다시 돌아가 시차를 착각하게 하기도 한다. 비 온 이틀 뒤에 범행을 하면서 우산을 현관에 세워 두어 마치 비오는 날 범행한 것처럼 한다든지, 탁상일기의 날짜를 뒤로 돌려놓는 수법도 그럴 듯하다.

녹음기나 캠코더를 이용해 피살자의 목소리를 범행 뒤 재생시키는 트릭도 있다. 일본 작가들이 흔히 쓰는 트릭 중에는 부패가 빨리되는 장소에 시체를 가져갔다가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두어 검시의로 하여금 실제보다 훨씬 오래 전에 죽은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6) 흉기를 이용하는 트릭

 

가장 많은 추리소설이 이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흉기라고 하면 보통 총, 칼 등 살상용 무기류, 낫, 괭이, 도끼 같은 농기구류, 못 박는 전기기구, 전기톱 같은 목수의 연장 등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것 외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도구는 살인 흉기로 사용될 수 있다.

물, 얼음 같은 우리 주변의 물질, 전기와 같이 보이지 않는 것, 물속에 넣어 놓으면 잘 보이지 않는 유리 파편, 바람과 태양 등도 살인의 흉기로 변화시킬 수 있다.

얼음을 뾰족하게 만들어 사람을 찔러 살해한 뒤 녹여 없애는 방법은 여러 소설에 등장한다. 얼음으로 화살이나 총알을 만들어 멀리서 쏘아 살해하더라도 그 증거가 녹아 없어지기 때문에 단서를 찾지 못하게 하는 트릭도 있다. 얼음덩어리 위에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목매 자살한 사건은 그 얼음이 녹아 없어져서 불가사의한 자살로 보이게 만든 트릭도 있다.

냉장고의 냉동실에서 꽁꽁 언 양고기 다리를 꺼내 사람의 뒤통수를 때려 살해한 뒤 그 양고기 다리는 끓여먹어 버린다면 아무도 증거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동물의 단단한 발톱으로 사람을 살해하여 마치 동물이 살인한 것처럼 오인하게도 한다(이상우의 <반달곰은 알고 있다>). 벽시계의 침을 떼어내 날카로운 침으로 살인을 한 뒤 제자리에 다시 꽂아 놓아 흉기를 찾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드라이아이스를 이용해 밀실에 갇혀 있는 사람이 얼어 죽게 한 뒤 시간이 흐르면 드라이아이스는 다 증발해 버려 흉기를 짐작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실내에서 세숫대야에 바닷물을 떠 와서 얼굴을 집어넣어 익사하게 하면 피살자의 폐에서 플랑크톤이 발견됨으로써 바다에서 익사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흉기를 이용하는 트릭은 무엇이 흉기였는지 모르게 하는 것이 기본이다. 흥미만을 위해 엽기적인 흉기만을 사용한다면 추리소설의 품위를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7) 독극물을 이용한 트릭

 

추리소설에는 독살이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아무도 모르게 사용하기가 대단히 쉽기 때문이다. 독극물의 치사량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그것을 쉽게 구하기만 한다면 아마 살인 흉기 중 가장 많이 사용된 케이스가 이 독살이었을 것이다.

이 독극물을 피살자에게 어떻게 먹게 만드느냐 하는 것과, 접촉하게 하느냐가 문제다. 비상 같은 것은 무미, 무취, 무색이기 때문에 가장 많이 음료수나 음식에 섞어 먹이는 독약이다. 그러나 구하기가 쉽지 않아 구입 경로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아주 기발한 방법으로는 맹독을 연필 끝에 묻혀 놓아 연필에 침을 잘 바르는 습관이 있는 사람을 살해한 트릭이 있다. 또한 책의 종이에 묻혀 놓아 책장 넘길 때 손가락에 침을 묻히는 사람이 중독되어 죽게 하는 방법도 있다. 엘러리 퀸의 소설에 나오는 트릭이다.

두 사람이 한자리서 온더록스 술을 마셨는데 한사람만 죽은 경우는 그 사람의 잔속에 있는 얼음 속에만 비상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음료수에 몰래 독약을 타는 방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화에까지 나오는 방법이라 트릭 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없을 정도다. 환자의 음식에 독극물을 매일 조금씩 섞여서 먹여 오랜 세월에 걸쳐 환자를 중독되게 만들어 주변에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죽이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은 유명한 리처드 헐(<큰어머니 살인 사건>)이다. 정제 약병의 캡슐 한 알에 극약을 넣어 약병 속에 두는 방법도 있다. 보통 캡슐에 든 약은 1~20분 내에 약효가 나타나 들키기 쉽지만 캡슐 자체를 아주 두껍게 만들어 위 속에서 녹는 데 몇 시간이 걸리게 해서 알리바이를 만드는 기발한 방법도 동원 되었다(이상우의 <호박이 열리는 장미나무>).

비중이 무거운 독약을 약병에 넣어 그 독약이 가라앉게 만들면 그 약을 다 먹을 무렵에 독살되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쉽게 탄로나지 않는다.

독을 가진 뱀, 거미, 벌, 도마뱀 등은 그다지 많이 이용되지 않는 편이다. 코넌 도일이 <얼룩 끈(The Speckled Band)>에서 독사를 이용한 것이 유명하다.

특이한 트릭으로는 과학 탐정으로 평가받는 미국의 리브(Arthur Reeve)가 온도가 올라가면 독가스를 뿜는 액체를 벽에 발라 살인하는 트릭을 쓴 일도 있다.

 

(8) 사라지게 하는 트릭

 

포는 “가장 잘 감추는 방법은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방치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의 작품 <사라진 편지>에서는 비밀문서를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는 편지 수집함에 두어 범인들의 허를 찔렀다.

그러나 대부분의 추리소설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을 쓴다. 보석을 칠면조에 먹여 운반한다든지, 자신의 상처 속에 넣어 묶어 버리는 지독한 방법을 쓴다든지, 책 속을 다 파내고 권총을 감춘다든지, 금을 종이처럼 얇게 만들어 벽지처럼 도배한다든지 하는 방법이 동원된다. 제임스 본드는 황금으로 자동차를 만들어 보통 자동차처럼 세관을 통과는 일을 예사롭게 해치운다.

이외에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너무나 많다.

시체를 토막 내서 여러 개의 풍선에 매달아 날려 보내는 트릭이 있는가 하면, 피살자를 초산에 녹여 뼈만 남게 만든 뒤 그 뼈를 모형 뼈 수출하는 데 섞어 넣어 수출해 버리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있다(한대희의 <수출 살인>).

시체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이외에도 많다. 눈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든지, 미이라로 만들기도 하고, 동을 입혀 동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체스터톤은 토막 시체를 우편 소포로 부쳐 우편배달부로 하여금 이집 저집에 배달하게 한다.

현실의 세계에서 탐정이나 수사관들도 추리 작가 못지않게 감춰진 트릭을 찾아낸다. 국제 공항의 수사관이나 세관 직원들은 그 많은 출입국 손님 중에서도 귀신같이 수상한 사람을 잡아내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추리 소설의 세계에서는 육감이나 눈치로 범인을 잡아내는 장면은 있을 수 없다.

 

(9) 기타 기발한 발상

 

이상에서 살펴본 것 외에도 독자를 흥미롭게 하는 기발한 발상이 많다. 코난 도일은 런던의 다리 위에서 권총에 맞아 죽은 사람을 경찰의 타살 추정과는 달리 자살로 단정한다. 문제는 자살했다면 권총이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것이다. 셜록 홈스는 다리 밑 물속에서 권총을 찾아낸다.

“아니, 죽는 사람이 자기 머리에 권총을 쏜 뒤 물에 집어 던졌단 말이요? 말도 안 돼.”

런던 경시청 살인과 경감이 펄펄 뛰었다. 그러나 홈스가 지적한 증거를 보고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자살자는 권총에 줄을 매고 그 줄 끝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놓아 권총을 쏜 뒤 자살자의 손에서 땅에 떨어진 권총은 돌의 무게 때문에 강으로 끌려가 물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참으로 기발한 트릭이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살해할 사람을 서로 바꾸어 살해함으로써 동기를 찾지 못하게 하는 트릭도 있다.

 

트릭은 무한하다고 한다. 앞으로도 문명의 이기가 발명되는 만큼 트릭도 따라서 개발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미스터리 마니아들을 즐겁게 할 기발한 트릭의 샘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다

추리소설을 읽는 묘미는 트릭을 풀어가는 데 있다. 작가와 독자가 두뇌게임을 하는 것이다. 작가의 트릭을 독자가 풀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흥미진진하고, 풀어내면 풀어내는 대로 적중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래저래 추리소설은 재미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추리소설은 한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가 없고, 한 권 읽고 나면 다른 책을 또 찾게 되고 하는 것 같다. 또한 그래서 다른 장르와 달리 마니아가 형성되어 아낌없이 사랑을 받는다.


그동안 연재한 글을 읽어준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리며, 이 글이 멋진 추리의 세계로 이끄는 안내자 역할을 해냈기를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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