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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이야기 (3) 국내 로맨스 돌아보기

  • 작성일 2008-07-15
  • 조회수 920





 지난 시간 우리는 장르 로맨스가 우리에게 어떻게 소개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번역 로맨스가 우리에게 소개된 이후 국내 로맨스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뿌리내렸나를 살펴보겠습니다.



국내 로맨스의 태동


1996년 이후 로맨스 출판은 두 개의 큰 전기를 맞게 됩니다.

 우선 국내 최초의 로맨스소설 현상공모전이 시작된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1996년 할리퀸 로맨스 전문 출판사였던 신영미디어는 국내 로맨스소설 현상공모전을 시작합니다. 그 결과 1회 수상작으로 박윤후의 <노처녀 길들이기> (사진 왼쪽)가 세상에 선을 보입니다. (박윤후는 1997년 나라원 출판사를 통해 로맨스소설 <가을날의 동화>와 <백 번째 남자>를 출간합니다.) 그 후 1997년 제2회 신영미디어 공모전을 통해 <내 사랑 컴맨>을 쓴 고영희가 데뷔하며, 제3회에는 <사랑할 때와 이별할 때>로 이진현이, 제4회 공모전에서는 <아란야의 요정>을 쓴 이선미가 데뷔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커피프린스 1호점>과 <경성 스캔들>의 원작인 <경성애사>의 원작자인 그 이선미가 맞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 작가가 로맨스를 쓴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습니다. 왜냐 하면 독자들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국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로맨스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먼 나라, 가령 아랍이나 뉴욕에서 일어나는 주인공들의 사랑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판타지였고, 그렇기에 주인공들의 사랑에 대해 동경을고 꿈을 꿀 수 있었지만 국내가 배경인 소설들은 독자에게 전혀 환상을 심어주지 못했니다. 그건 일테면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꾸던 사람에게 코털 삐죽 나온 옆집 아저씨를 보여주는 일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사실 공모전은 단발성 이벤트에 가까 출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영미디어 공모전은 독자들의 호응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할리퀸과 수많은 장편 번역 로맨스를 읽고 자란 로맨스소설 독자들에게 주드 데브르나 주디스 맥노트 같은 로맨스 작가가 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으며, 김지혜, 가선, 윤혜원 같 초창기 한국 로맨스소설의 첫 시대를 열어간 작가들 산실이기도 했으니까요.


 신영미디어 공모전과 함께 국내 로맨스소설 정착시키는 데 역할을 것이 바로 PC통신과 인터넷입니다. 무협과 판타지라는 장르가 하이텔, 천리안과 같은 PC통신의 발달과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었듯이 로맨스소설 역시 PC통신과 인터넷으로 인해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1998년 8월 천리안에 "천일야화"라는 로맨스 동호회 사이트가 생깁니다. 할리퀸 시리즈와 주디스 맥노트, 주드 데브르 등의 로맨스 작가들의 세례를 받은 독자들이 자생적으로 만든 이 로맨스 동호회는 박윤후 이후 자생적인 로맨스 작가들을 탄생시킵니다. 초창기 신영공모전에 당선된 작가들의 대부분이 이 출신이라는 사실이 이 동호회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천일야화"는 작가들의 탄생보다 더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건 이 동호회를 통해 작품에 대한 감상이 올라왔다는 사실입니다. 서로의 창작물에 대한 감상을 통해 예비 작가들은 스스로의 글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로맨스 작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후 동호회 회원들은 작가로, 리뷰어로, 그리고 순수한 독자로 활동하며 네버엔딩 스토리, 로맨스 월드, 럽펜 (아래 사진 참조), 로망띠끄, 정크파라다이스 같은 로맨스 사이트로 분화해나갑니다.

 럽펜 초창기 공모전 작가들이 모여 만든 사이트로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로망띠끄의 경우 2008년 현재 회원 10만여 명, 작가 2,200명이 가입해 있는 국내 최대 로맨스소설 관련 사이트로 발전합니다.


국내 로맨스의 발전

 
2000년 영언문화사는 신영 로맨스 공모전 3회 수상자인 이진현의 <해적의 여자> (사진 오른쪽)를 출간합니다. 신영미디어 공모전이 1회
적인 단발성 이벤트 성격이 강했다면 영언문화사의 국내 로맨스소설선은 작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합니다. 영언문화사를 통해 로맨스 작가들은 자신들이 공들여 쓴 작품들을 책으로 내놓을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이후 신영미디어도 공모전 수상자들을 중심으로 국내 로맨스소설을 출간하며, 현대문화센터 역시 점차 번역 로맨스보다 국내 로맨스소설 쪽으로 출간 비중을 높입니다. 2003년까지 이 3사는 지금도 독자들에게 회자되는 국내 로맨스소설들을 출간합니다. 당시 출간된 국내 로맨스소설들은 편집진의 리뷰와 공모전이라는 선별 작업을 통해 출간됨으로 질적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작품으로 김지혜의 <공녀>, 이지환의 <그대가 손을 내밀 때>, 구자영의 <천사와 사랑을>, 한수영의 <연록흔>, 이선미의 <10일간의 계약> 등이 있습니다.


국내 로맨스의 현재


 하지만 2004년 후반기 무협과 판타지를 출판하는 장르 출판사들이 로맨스소설 출판에 손을 대면서부터 시작된 로맨스소설의 대여점 정착이라는 시스템은 로맨스소설 시장에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대여점 시스템은 시장의 확장과 로맨스소설의 외연 확대라는 큰 선물을 안겨주지만 판매부수의 고착화라는 불행도 함께 안겨줍니다.

 현재 로맨스소설의 초판 부수가 3000부라고 치면-이것도 많이 잡은 수치입니다-대여점 체제가 정착된 이후 출간되는 로맨스소설 초판 부수의 대부분이 대여점에 팔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대여점에 팔리는 부수보다 일반 서점을 통해 팔리는 부수가 더 많은 로맨스소설들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 로맨스소설의 종수는 극히 적으며, 2007년에 출간된 600여 종의 작품 중 그런 경우는 최대 5%를 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슬프게도 출간되는 로맨스소설의 95%는 대여점에 들어가는 부수 플러스 소수의 알파라는 태생적인 한계 부수를 가지고 출간됩니다. 물론 손실 규모를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대여점이라는 안전판이 있음으로 해서 로맨스소설을하는 출판사들은 다음 로맨스소설을 출간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됩니다.

 그렇지만 다음 출판작 역시 대여점 숫자만큼만 팔리게 됩니다. 물론 대여점 숫자만큼 팔리는 것도 다른 일반 소설에 비해 대단한 판매 부수입니다. 하지만 더 치고 나갈 가능성이 없는 책이란 소수의 마니아만 양산할 뿐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현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이 대여점에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책임의 50% 이상은 분명 대여점보다 무분별한 출판을 하는 출판사에게 있습니다.

 대여점 체제라는 안정적인 시장이 있음에도 몇몇 출판사들은 일정 부분 판매 부수가 보장되어 있는 로맨스 시장에 대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안정적인 공급처가 있으면 좀 더 다양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그래서 좀 더 많은 독자들을 로맨스소설로 끌어와야 함에도 불구하고-출판사들은 그런 책들은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출판하기를 꺼립니다. 그리고 비슷비슷한 좀 더 많은 책들을 대여점에 공급합니다.

 그 결과 2000년도 연간 30종에 불과하던 국내 로맨스소설 시장은 2008년 현재 연간 600종, 800여 권이라는 시장의 확장을 가져옵니다. 출간 종수의 증가와 시장의 확대는 겉으로는 로맨스소설 출판 시장의 성장으로 보일지 몰라도 로맨스소설 출판 시장을 속으로 곯게 합니다. 왜냐 하면 이런 출판 종수의 증가는 하나의 파이를 열 명이 나누어 먹다가 이제는 백 명, 천 명이 나누어 먹는 상황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다수 출판사들은 1권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줄어들자 원래 가지고 있던 파이를 뺏기지 않기 위해서 기본적인 맞춤법을 지키지 않는 글과 오문과 비문으로 이루어진 문장, 개연성이 없는 스토리를 가진 이야기들을 무분별하게 로맨스소설 포장하여 무더기로 내놓습니다. 결국 대여점 유통을 위해 만들어진 로맨스소설은 질적 하락을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런 시장에 점점 길들어져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독자들은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와 어이없는 오탈자로 가득한 로맨스소설을 보고도 무감각해집니다.

 독자들 스스로가 ‘로맨스가 다 그렇지 뭐’라는 자조어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한 권 두 권 책을 사던 독자들은 소장할 가치가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결국 파이는 점점 줄어들고 줄어드는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로맨스소설 출판사들은 또 다시 더 형편없는 글들을 더 많이 출간합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국내 로맨스소설이 처한 현재의 이런 상황은 독자들이 장편 번역 로맨스를 떠나 국내 로맨스소설로 눈을 돌릴 때와 흡사합니다. 대여점으로 인해 그 수명이 몇 년 더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할리퀸 시리즈가 독자들의 외면을 받고 번역 장편 로맨스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처럼 국내 로맨스소설들 역시 그 길을 걸을지도 모릅니다.


                           <사진 위는 로맨스 소설 창작게시판이 있는 러브펜 홈페이지> 

국내 로맨스소설의 어두운 부분만 너무 부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는 법.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시장논리에 굴하지 않고 자기 소신을 가지고 글을 쓰는 작가들, 편견을 가지고 로맨스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의 원작으로 조금씩 자기 자리를 넓혀가는 로맨스소설의 새로운 길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그런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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