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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울, 도시, 디스토피아 … …

  • 작성일 2009-03-19
  • 조회수 447



 

한국문학에서 엿보이는 ‘서울’의 표정                          

 

  “길./눈물에 저진 포석로(鋪石路) - 서울의 마음/바람도 업시 나붓기는 점두(店頭)의 기()·기()·기()/열병에 걸닌 사람처럼 달음질 하는 차()·차()·차()·차()·차()/매연 - 하얀 스카아트/자욱한 연애의 분말…(중략)…쇼윈도에 밤마다 푸른꿈을 맷는 샨데리아 Marubiru Baron 공작 - 카페의 홍수./오오 길에 허터진 시네마 광고지와 공산당대검거를/()하는 신문지……”

 

        *사진 위는 배우 김혜수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모던보이'속  1930년대 경성 거리 풍경  

김화산의 시 「사월도상소견(
四月途上所見)(《별건곤》1930 6)의 한 부분입니다. 유명한 아나키스트였던 그의 눈에도 자본주의적 근대성으로 물든 1930년대의 경성은 이미 단순한 도시 이상이었습니다. 깃발과 자동차, 쇼윈도와 카페의 홍수, 그리고 도처에 날아다니는 광고지와 신문은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여성의 다리와 함께 ‘도시’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는 한국문학에서 ‘서울’이라는 공간이 다양하게 형상화되어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1930년대 문학에서 경성은 몰락한 왕조의 수도로서의 위엄 대신 근대성의 상징공간으로 등장합니다. 김기림의 시에서 경성은 소비와 취향의 공간이었고, 오장환의 시에서 경성은 식민지 근대라는 음울하고 가난한 공간으로 묘사되고, 김광균의 시에서 경성은 도시적 우울의 공간으로 드러납니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은 경성의 다른 모습을 시에 담았던 셈입니다.

  이후 1960-70년대 소설에서 서울은 이촌향도의 물결로 인해 만원상태에 도달한 상태였거나, 자본주의의 속물성으로 인해서 전통적인 인간적 가치가 절멸된 비인간적인 세계로, 또는 부패와 부정의 온상으로 다루어져 왔습니다. 서울을 일상적 생활공간으로 그려낸 작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처럼 ‘서울’은 대개 그 자체로 모순덩어리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울’의 표정을 지금까지와 다르게 그려낼 수 있다면 의미심장한 작품이 될 수도 있겠지요.

  2000년대 소설에서 ‘공간’은 현실에 대한 작가들의 태도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알다시피 90년대 문학을 흔히 내면성의 문학이라고 지칭할 때, 내면성의 상징은 주로 ‘방’이라는 공간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여성주의 소설들은 ‘집’을 핵심적인 공간으로 설정했는데, 그것은 ‘집=가족’이 가부장적인 질서의 상징적인 공간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던 듯합니다. 그러니까 90년대 문학은 아버지의 공간인 ‘집’과 내면성의 공간인 ‘방’ 사이에서 갈등했다고 볼 수 있죠. ‘방’이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또는 자신이 현실로부터 침잠하여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아의 공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2000년대 소설에서 90년대 식의 ‘집’이나 ‘방’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IMF라는 현실의 위세를 실감하면서 성장한 세대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방향을 상실한 시대, 출구 없는 삶의 막막함

 

  여기, ‘서울’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두 편의 소설이 있습니다. 김미월의 「서울 동굴가이드」(『서울 동굴 가이드』, 문학과지성사, 2007, 사진왼쪽)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달려라, 아비』, 창비, 2005,사진 오른쪽)가 그것입니다. 두 편의 소설은 모두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삶을 다루지만, 결코 ‘서울’에 관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들 소설에서 서울은 그다지 화려한 공간으로도, 그렇다고 사회적인 모순이 집약된 공간으로도 설정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적 일상이라는 무심한 표현에 담겨 있는 도시적 우울과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본의 가치법칙을,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 현실 속에서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의 출구 없는 삶이 두 편의 소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의 소설에 사회적인 모순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모순을 고발·폭로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 같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 김미월 단편소설 「서울 동굴 가이드」 중 한장면을 일러스트로 표현했다 
김미월의 「서울 동굴 가이드」에는 서울에 대한 두 개의 표상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서울 고시원’과 그녀의 직장인 ‘서울 동굴 탐험관’이 그것들입니다. 서울 고시원 203호가 그녀의 현주소입니다. 소설은 두 개의 서울, 그러니까 고시원과 동굴에서 벌어지는 그녀의 일상을 통해서 출구 없는 삶의 막막함을 표현합니다. 그녀의 현주소인 ‘고시원’은 2000년대의 소설이 가장 애용하는, 그리고 위기에 직면한 현대인들의 마지막 거처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방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방’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곳이지요. “방음은커녕 날이 갈수록 뛰어난 통음(通音) 효과를 자랑하는 이곳의 널빤지벽 시스템은 오직 서라운드 입체음향에 익숙한 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뛰어난 통음시스템을 자랑하는 고시원은, 그러나 204호 여자의 비디오 소리를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소통이 불가능한 곳입니다. 불필요한 소음들은 통음되고, 정작 필요한 것들은 불통되는 곳이 바로 고시원이지요. 고시원에서 자아의 거처 운운하는 것은 말 그대로 사치일 뿐입니다. 하여, 고시원의 총무는 고시원을 ‘도떼기시장’이라고 표현하고, 그녀는 “인적 없는 미개방의 동굴”에 비유합니다. 또 그녀는 자신의 직장인 서울 동굴 탐험관을 “먹이를 삼키려 한껏 벌린 괴물의 아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동굴로서의 고시원과 아가리로서의 동굴은 묘하게 일치되고, 그것은 결국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 대한 주인공의 인식태도를 암시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비만 오면 물이 새는 동굴의 위층에 화려하게 장식된 레스토랑이 있다는 소설의 설정은 동굴이 후기 자본주의의 음습한 이면임을 환기합니다.

  총무가 도떼기시장이라고 말한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상처’를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저 새끼 말예요……똑같이 생겼어, 씨팔.”이라는 204호 여자의 말 속에도, 낯선 아이의 수영복에 손을 넣고 익사한 여자 시체에 관한 주인공의 이야기에도 커다란 상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렴풋하게 추측해서 이해하는 건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지요. 다만 그들의 주거지가 그렇듯이, 아니 “이 동굴은 입구와 출구가 같다.”라는 말처럼 ‘서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새로운 길(가능성)이 부재하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적인 전언일 것입니다. “딴 세상. 한때는 나도 그랬었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어딘가 반드시 존재할 거라고 믿었었다.” 지금-이곳이 아닌 딴 세상이 없다는 것, 그리하여 동굴을 벗어나도 여전히 동굴에서 살아가야 하고, 고시원을 벗어나도 그 이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절망감, 이 어두운 그림자가 소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길 없음’의 막막함과 절망감을 표현하는 소설적 장치는 두 개입니다. 그 하나는 입구와 출구가 같은 동굴, 그리하여 딴 세상에 대한 기대가 불가능한 원형 동굴입니다. 주인공은 컴컴한 동굴 안에서 관람객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로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의 삶, 혹은 서울이라는 동굴 속에서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녀는 낯선 미지의 출구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고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다는 사실”에 안도합니다. 또 하나는 신호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첫 부분에서 주인공은 신호등 없는 보도를 바라보며 “횡단보도 앞에 섰는데 신호등의 적색등 녹색등이 모두 켜져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테오 앙겔로폴로스 감독의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에 등장하는 검지가 잘린 석상의 손을 연상했습니다. ‘검지’란 방향을 가리킬 때 쓰는 손가락입니다. 검지가 잘린 손은 그러니까 곧 방향을 상실한 시대를 가리키는 셈이지요. 마찬가지로 신호등이 없는 보도, 또는 적색등과 녹색등이 모두 켜져 있는 보도는 사실상 방향을 잃어버린 어떤 상태를 의미합니다. 신호등이란 하나의 불만 들어왔을 때 제 기능을 하는 법, 그러니 아무런 불도 들어오지 않았거나, 두 개 이상의 불이 한꺼번에 들어온 신호등은 이미 방향과 질서를 의미하는 신호등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 경우, 주인공 앞에 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개밖에 없습니다. 길을 건너거나, 길을 건너지 않거나. 주인공의 이 의문은 소설의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거기에서는 “신호등의 빨간불 파란불이 모두 꺼져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형태로 조금 바뀌어 있습니다. 물론, 꺼져 있는 신호등이나 두 개의 불이 동시에 켜져 있는 신호등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비정상인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그렇군요, 따지고 보니 204호에 살던 약사 보조도 색맹이어서 신호등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네요.  

 

현대인의 일상, 편의점에 관한 일상보고서

 

  문학집배원 성석제의 문장배달을 통해 소개된 <나는 편의점에 간다> 플래시 화면 속 한 장면
                              *성석제의 문장배달을 통해 소개된 김애란 소설 속 한 장면*
김미월의 「서울 동굴 가이드」에서 주인공이 ‘동굴’과 ‘고시원’ 사이를 왕복하면서 하루를 살듯이,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 주인공 ‘나’는 ‘편의점’과 ‘자취방’ 사이를 왕복하면서 일상을 보냅니다. 편의점은 현대인의 일상에 가장 가깝게 위치하고 있고, 포스트 모던한 소비문화의 공간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소 전통적인 방식으로 물건을 파는 가게(슈퍼)는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인격적인 접촉이 필수적이고, 그런 만큼 종종 소문의 온상이 되기도 합니다. 한 동네 사람들의 동태를 파악하기에 가게만큼 좋은 곳은 없지요. 반면 편의점은 바코드의 기계장치 덕분에 인격적인 접촉 없이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동네 사람들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편의점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또 한 가지, 인격적인 접촉이 불필요하기에 편의점에서는 또한 외상이 되질 않습니다. “저 … 지갑을 두고 온 것 같아요.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자, 그 남자는 정말 상냥하게 삼각 김밥을 슬며시 자기 앞으로 끌어놓은 뒤 내게 말했다. 다녀오세요.

  주인공 ‘나’는 어느 날 불현듯 등장한 ‘편의점’이라는 소비 시스템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약속과 우연과 재난이 이삿짐처럼 사라진 2003년 서울. 빈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편의점은 기원을 알 수 없는 전설처럼 그렇게 왔다.” 편의점은 소비를 통해서 자존감을 확인하려는 현대인들에게는 이제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았고, 때문에 주인공은 딱히 필요한 물건이 없어도 습관처럼 편의점을 드나듭니다. 편의점은 소비의 공간이기보다는 소비의 욕망을 일깨워주는 공간입니다. 이 소설은 세 개의 편의점에 관한 주인공 ‘나’의 일상보고서라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적인 소비의 패턴과 익명성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의 심리세계에 대한 다소 음울한 전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사는 동네에는 세 개의 편의점이 있습니다. 각 편의점은 점원/주인의 태도와 취향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세븐일레븐. 이곳의 남자 사장은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표시합니다. 나름 고객관리의 전략이었겠지만, 그는 현대인들의 대부분은 상품을 통해서 자신의 정보가 새나가는 것을 싫어하고, 특히 타인과의 심리적 거리가 좁혀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엘지25시와 주택단지 사이에 위치한 이동식 포장마차의 주인 역시 그녀에게 지나친 관심을 표시합니다. 때문에 주인공은 세븐일레븐과 포장마차엘 가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패밀리마트. 패밀리마트는 사십대 후반의 여자가 계산대를 지키고 있습니다. 패밀리마트는 세 편의점 가운데 주인이 가장 불친절한 곳이기도 합니다. 세븐일레븐의 과잉친절에 불편함을 느낀 ‘나’는 패밀리마트로 거래처를 바꾸지만 어느 날 ‘나’가 콘돔을 사려할 때 주민등록증을 요구함으로써 손님의 민망함을 짓밟아버립니다. 그것이 주인공이 패밀리마트에서 큐마트로 옮기는 이유가 됩니다.

  새로운 소비 형태인 큐마트는 엘지25시 자리에 새로 생긴 크고 화려한 마트의 이름입니다. 편의점과 달리, 큐마트는 소비자가 근처에 다가오면 구원처럼 자동문을 열어젖힙니다. 매장 내부에는 항상 고급한 음악이 흘러나와서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문화적·심리적인 만족감을 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가 큐마트를 선호하는 까닭은 아르바이트 청년이 필요 이상의 말을 늘어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거대한 관대”. 큐마트의 아르바이트 청년은 오직 ‘물건’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는 신경을 쏟지 않습니다. 물론, ‘나’는 점원과 사적인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고 해서 사생활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완전히 착각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지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편의점은 바코드를 통해서 ‘나’의 소비 취향에서 은밀한 라이프스타일 전체까지 기록합니다. “그는 나의 식생활에서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고’ 있다. 왜냐하면 편의점이란 모든 걸 파는 곳이기 때문이다. 큐마트는 나의 가장 오랜 단골이 된 덕에, 청년은 내게 한 마디의 사적인 대화를 걸지 않고도, 나에 대해 그 어떤 편의점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도 모르는 나의 습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로 큐마트(점원)와 ‘나’의 관계는 역전됩니다. ‘나’는 주인들의 과도한 관심이 불편해 세븐일레븐과 포장마차에 발길을 끊었지만, 그럼에도 정작 큐마트의 청년이 “이 동네에서 나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지만 그 생각은 부득이 동네의 가게 가운데 한 군데에 집 열쇠를 맡겨야 하는 상황에서 무참하게 깨어집니다. 큐마트를 찾은 ‘나’는 자신이 이 가게의 단골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이 그동안 구매했던 물품들과 자신의 취향을 남김없이 털어놓습니다. “저, 이 근처 사는……항상 제주 삼다수랑, 디스플러스랑 사갔었는데……”, “깨끗한나라 화장지랑, 쓰레기봉투는 꼭 10리터짜리만 사가고, 햇반은 흑미밥만 샀는데……모르시겠어요?”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나’는 어느새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폭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애처로운 폭로에 대한 청년의 대답은 편의점이라는 공간의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손님, 죄송하지만 삼다수나 디스는 어느 분이나 사가시는데요.” 그렇습니다. ‘나’의 고유한 취향이라고 믿었던 그 물품들이 사실은 익명의 대중들에게 팔려나가는 물건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었고, ‘나’ 또한 무수한 대중들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편의점과 소비를 벗어날수 없다

 

  자본주의의 가치법칙이 그런 것처럼 ‘편의점’은 ‘인간’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큐마트,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는 모른다. 편의점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물이다, 휴지다, 면도날이다. 그리하여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 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편의점은 오직 인간이 ‘소비자’라는 고상한 가면을 쓸 때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죠. 편의점은 소비자 이외의 인간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마치 자본주의가 그렇듯이. 하여, 편의점은 ‘나’가 편의점을 드나드는 사이에 이별을 했다는 것을, 이별의 대상을 찾아갔고, 그를 죽일 수도 있다는 등의 인간적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또 편의점은 모릅니다. 한 여자가 편의점에서 물을 살 때, 그것이 죽기 위한 약을 마실 물이라는 사실을. 한 남자가 면도날을 살 때 그것이 그 남자의 손목을 그을 자살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이 문장들에서 ‘모른다’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극적인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나’가 오늘 편의점엘 간다는 사실입니다. 편의점의 “거대한 관대”가 불행한 것임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일상이 편의점을 벗어나서 영위될 수도 없다는 사실, 이 삶에 대한 비극성이 작가의 시선일 것입니다. ‘나’의 이동이 결국 세 개의 편의점을 순례한 것에 불과하듯이, 편의점 바깥에는 또 다른 편의점이 있을 뿐입니다. 혹시 누군가는 ‘서울’을 벗어나면 된다고 조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을 벗어난다고 편의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편의점이 있는 그곳을 서울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골’이라고 부르는 당신의 발상이 더 순진한 것이지요. ‘소비’는 얼굴이 없고, 자본은 인간의 ‘표정’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특징들이 존재하는 곳, 그곳은 ‘서울’의 바깥이어도 또 다른 ‘서울’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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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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