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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가족 이야기-첫번째: "아버지, 권력의 상징이자 생물학적 기원"

  • 작성일 2009-06-17
  • 조회수 846


<가족, 그 첫 번째 이야기>

 

 

 

 

문학이 가족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까닭은?

 

5월의 햇살이 검은 만장(輓章) 색깔만큼이나 우울하고 따갑게 느껴지는 이즈음입니다. 우연히 꺼내 든 시집의 페이지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밖에선/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집에만 가져가면/꽃들이/화분이//다 죽었다” 진은영 시인의 「가족」이라는 시입니다. 집 밖에선 빛나던 것들이 집 안에만 들어가면 죽는다는 진술은 무서울 만큼 냉정하고 날카롭습니다. ‘가족’은 인류 전체가 몸으로 부딪치게 되는 공통의 문제이지만, 특히 문학이 ‘가족’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까닭은 그것이 사회적 모순과 온갖 이데올로기가 응축되어 있는, 동시에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문학, 특히 젊은 작가들의 단편을 키운 건 팔 할이 ‘가족’이었다고 말하면 과장일까요. 마치 ‘가족’을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서 작가의 방향성이 가늠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정의 달 5월에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게 가슴 아프지만, ‘가족’이라는 제도는 오래된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이 충돌하는 곳입니다.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하게 누일 수 있는 따뜻한 곳을 이렇게 말하는 걸 용서하십시오. 5월은 가정의 달이지만, 또한 5월은 우리들이 가장 힘들고 분주하다고 느끼는 달이기도 합니다. 조그만 의식(儀式)이라도 치르지 않으면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가족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때, 그래서 유독 고기집, 놀이공원, 백화점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때, 그게 바로 우리의 5월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가족’ 이야기들이 반복됩니다. 가난과 질병을 힘겹게 이겨내고 있는 한 가족의 이야기나 가족과의 이별로 인해서 불행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것들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은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고, 가족과 헤어져 살아가는 것이 심각한 불행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다양한 삶의 조건과 양태들에게 쏟아지는 선입견들입니다. 문학에서 ‘가족’ 이야기는 대개 엄마나 아빠 가운데 한 사람과의 관계가 문제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버지’라는 가부장적 상징 권력이 한 가족 내에서 저지르는 폭력을 다룬 작품이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상징적인 권좌에서 비루한 일상으로 끌려 내려온 아버지와의 관계를 모색하려는 작품도 있습니다. 모성의 가치와 의미를 부각시키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가족 안에서 남성-권력이 어떻게 여성들을 억압하고 있는가를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문학에서 ‘가족’ 이야기가 중요하게 거론되는 이유는 이른바 ‘아비’라는 호칭을 지닌 전통-권력과 아들 세대의 관계가 소설 속에 깊이 각인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각인의 양상은 작가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기에 한 시대, 한 세대의 문학적인 무의식을 살피는 데 있어서도 꽤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제 기억을 더듬어보면, IMF 외환위기 전후 꽤 많은 가족 이야기들이 창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90년대의 여성문학도 가족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지만, IMF 외환위기 당시의 소설들은 경제위기로 인해 흔들리는 근대적 가족제도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가족 이야기였습니다.

2000년대의 가족 이야기에서 김애란, 박민규, 김숨의 소설이 갖는 위치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그들의 소설에는 뙤약볕 아래를 달리는 아버지에게 선글라스를 씌워주는 딸이, 경제위기 속에서 가장으로서의 위치를 잃어버린 아버지를 연민하는 아들이, 무력한 남성들을 지켜보는 가족이 등장합니다. 이들 소설의 상상력은 한편으로는 사회,경제적인 조건의 변화가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드러내고, 또 한편으로는 가족 안에서 변화된 가장의 위상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족’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감성의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저는 여기에 김태용의 「오른쪽에서 세 번째 집」(세계의 문학》 2005년 봄호)윤성희의 「감기」(《문예중앙》2005년 봄호)를 추가하려 합니다.

 

고양이보다도 못한, 덜떨어진 아빠의 부활

 

김태용 (사진 왼쪽)소설에 등장하는 ‘오른쪽에서 세 번째 집’에는 아이, 아이의 엄마, 엄마의 정부, 정부의 여동생, 정부의 여동생이 애지중지하는 고양이, 그리고 아이의 아빠가 살고 있습니다. 아빠가 가장 나중에 호명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엄마의 정부의 여동생이 아끼는 고양이에게 ‘돼지’라는 이름을 부여할 정도로 “권력자이자 폭군”이지만, 중요도에 있어서는 고양이 다음입니다. 이런 가족이 실재할 수 있느냐는 물음은 소설이 현실이냐는 물음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가족’이라는 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아빠가 닭칼국수를 먹다가 목에 닭뼈가 걸려 죽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이는 아빠의 죽음에 대해 “죽을 놈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빠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슬픔 없는 죽음은 비단 오른쪽에서 세 번째 집에 살고 있던 아빠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응급구조대가 정부 여동생의 가슴을 훑어보는 장면이나, 아빠의 양복 주머니에 “정부의 여동생이 입던 팬티”가 들어 있었다는 진술은 ‘대문자 아빠’의 외설성을 암시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이 소설은 특정한 아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빠’라는 존재 자체에 관한 이야기인 셈입니다. 아빠라는 권력에게서 외설성을 읽어내는 부분은 카프가의 『소송』에 등장하는 한 장면, 그러니까 법정에 놓인 법전 안에 법조문 대신 음란한 사진들이 들어 있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초자아의 음란성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김태용과 카프카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빠가 죽고 난 뒤 엄마의 정부는 새로운 ‘아빠’가 되기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무책임한 정부의 자리”를 고집합니다.

김태용 작가의 첫 소설집 젊은 작가들의 가족 이야기에서 ‘아빠’는 자주 불화의 원인이 됩니다. 그에게는 가부장적인 폭군의 이미지가 덧씌워지고, 때로는 아들이나 가족 모두와 대립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김태용의 소설에서 폭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은 별달리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폭군 아빠가 죽음을 통해서 사라지지 않고 반복해서 가족의 삶 속으로 귀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권력자로서의 아빠가 쉽게 제거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아빠가 죽은 이후 아이는 귓속 가려움증이 생겨 병원을 찾습니다. 의사는 아이의 귓속에 엄청나게 큰 무엇이 들어 있음을 알리고 곧 수술을 시작합니다. 아이의 귓속에서 나온 것은 1.8리터짜리 콜라 병과 흡사한 ‘녹색 병’이었습니다. “여보, 나야.” 아이의 엄마가 병을 열었을 때, 그 속에선 죽은 남편의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통상적으로 영혼이라 부르는 것이지만 영혼과 육체의 중간단계에 속하는 물체로서, 사람 구실은 못 하지만 그렇다고 부재하는 것은 아닌,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고 의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녹색 페트병 안에 목소리로만 남은 아빠는 영혼과 육체의 중간이고, 사람의 구실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부재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어정쩡한 존재로 가족에게 되돌아왔습니다. 아빠의 귀환은 ‘부활’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분명 그것은 ‘덜떨어진 부활’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빠의 귀환으로 인해 이 이상한 가족은 미처 알지 못했던 ‘보험금’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그 돈으로 지구 반대편으로 해외여행을 떠납니다. 물론, 아빠, 아니 녹색 병도 함께 말이지요. 그리고 엄마와 엄마의 정부는 그 낯선 땅의 절벽 위에서 녹색 병을 바다에 던집니다. 죄를 짓는 기분이었지만, 그것으로서 녹색 병(아빠)에 대한 애도를 끝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뒤 엄마의 정부는 점차 ‘가장(아빠)’의 위치에 근접하고, 그와 동시에 아이의 엄마의 배도 점점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택배박스 하나가 집으로 배달됩니다. 그 박스 안에는, 아이의 엄마와 그녀의 정부가 절벽 위에서 던졌던 녹색 병이 들어 있습니다. 아빠의 두 번째 귀환은 이렇게 해서 마무리됩니다. 그렇지만 아빠의 귀환은 정확하게 여기까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이후로 녹색 병에 대해서 시선을 주는 것은 물론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내다버려지는 방식의 부재는 피할 수 있었지만, 망각과 무관심이라는 방식의 부재만은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재는,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녹색 병으로 변해버린 아빠는 그 부재의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부재는 없는 게 아니라 없는 방식으로 있는 것인 셈이지요. 이 아빠의 부재에 대해서 작가는 한 마디의 충고를 잊지 않습니다. “그렇다. 어느 집안에나 쓸모없는 물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아빠-권력은 이제 더 이상 싸움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처럼 쿨하게 말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존재의 기원인 아버지, 그런데 두명이라니?

 

윤성희(사진 왼쪽)의 소설 역시 가족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부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작가가 아버지를 순전히 ‘긍정’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김태용 소설의 ‘아빠’가 권력의 상징이라면, 윤성희 소설의 ‘아버지’는 존재의 기원에 해당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권력이기 이전에 우리들의 생물학적인 기원이기도 하지요. 이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그 하나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가 남자와 두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마을버스 운전기사인 주인공 남자는 몽유병을 앓고 있습니다. 몽유병이란 존재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병리학적 징후입니다. 그래서인지 남자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두 번째 아버지가 등장하기 이전에 남자는 하나의 존재였고, 두 번째 아버지가 등장한 이후부터 남자는 두 개의 분리된 존재가 됩니다. 그러니까 몽유병의 원인은 두 번째 아버지의 등장이라는 사건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넌, 이미 멀리 갔다 왔단다. 니 엄마가 널 뱃속에 넣고 아주 멀리멀리 갔었거든.”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두 명의 아버지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기억하는 남자의 생일이 다르다는 사실만이 중요합니다. 또 한 가지, 남자의 아버지가 무엇이든 다 고칠 수 있는 만물수리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그 만물수리상 아버지가 오직 아들의 몽유병만은 고칠 수 없다는 것도 더불어서 말입니다. 남자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남자를 바닥에 누이더니, 남자의 몸에 박힌 나사들을 풀기 시작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봐라, 나사들이 다 녹슬었구나. 아버지는 남자의 몸에서 오십 개가 넘는 나사를 빼냈다. 나사 빨리 풀기 대회라는 게 있다면 틀림없이 아버지는 그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했을 것이라고, 꿈속에서 남자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사가 빠지면서 생긴 구멍 사이로 빛이 새어나왔다. 바람이 구멍들을 넘나들었다. 바람이 구멍을 넘나들었다.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을 보려고 기차를 타고 세 시간이나 갔어요. 앞으로 연애를 하려면 꽤 피곤하겠어요. 그건 그렇고, 아버지 얼른 이 구멍들을 막아 주세요. 추워요.

 

남자는 바람이 넘나드는 구멍 때문에 추위를 느낍니다. 이 추위가 소설의 제목인 ‘감기’를 연상시키지만, 또한 구멍은 몽유병처럼 남자의 내면에 뚫린, 결코 치유되지 않는 상처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느 날 여러분 앞에 낯선 남자가 나타나 ‘내가 너의 아버지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리고 그 주장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면, 때문에 졸지에 아버지가 두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아마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두 명의 아버지 가운데에서 진짜 아버지를 찾으려고 시도할 겁니다. 우리들 모두는 자신의 기원이 둘일 수 있음을 인정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이 구멍들을 막아 주세요. 추워요.”라는 남자의 호소 역시 우리의 반응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남자의 기원, 즉 생일을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키는 건 정작 두 명의 아버지입니다. “그만들 싸우세요. 이제부터 제 생일은 일 년은 두 번이에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천진함이란 소년에게나 어울리는 것일 테지만, 실제로 소년-남자는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자신의 기원에 접근합니다.

이제 이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첫 번째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감기로 이틀을 앓고 난 후 남자는 마을버스를 운전해 여자가 근무하는 톨게이트로 향합니다. 톨게이트란 무엇일까요? 물론, 여자의 일터라고 단정해버리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톨게이트를 문학적인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사가 풀린 사내의 몸에 생겼던 구멍이 그러했듯이, 톨게이트는 두 개의 다른 세상을 이어주는 통로입니다. 출구인 동시에 입구인 셈이지요. 마을버스의 핸들을 쥔 남자는 이제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 낯선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열여덟 개의 정거장을 하루에 여덟 번씩 반복해서 돌던 마을버스는 1997년 가을 공장에서 출고된 이후 처음으로 낯선 길을 달렸다.” 이것은 일탈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내는 이것을 ‘소풍’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소풍가는 길이에요. 당신도 같이 가지 않을래요?” 마을버스는 낯선 사람들을 태우고, 낯선 음악을 울리며, 출고 이후 한 번도 벗어난 본 적이 없는 궤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소풍’을 갑니다. 마을버스가 도착한 곳은 운동회가 진행되고 있는 어느 학교의 운동장입니다. 운동장에선 한 무리의 여자들이 국수를 삶고 있습니다.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노란 모자 팀과 빨간 모자 팀으로 흩어져 운동과 응원에 참여합니다. 낯선 것들이 모여 낯선 곳으로 향하는 소풍. 나는 이 장면에서 가슴에 뚫린 구멍 때문에 감기를 앓아야 했던 남자에게 주는 작가의 처방을 목격합니다. 남자의 ‘소풍’은 결코 혼자서 떠나는 드라이브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실존적인 상처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치유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때문에 작가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낯선 존재들이 집합적으로 모여 있는 상황을 연출합니다. 글쎄요, 이 장면에서 연대나 유대감, 혹은 삶에 대한 위로의 흔적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없진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두 개의 기원을 동시에 긍정하는 소년-남자의 모습, 그리고 타인들과의 소풍을 통해서 상처를 극복하려는 남자의 행위가 손쉬운 ‘봉합’의 태도라고 비판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설령, 이 소풍이 감기를 오랫동안 앓고 난 다음에 찾아온 백일몽과 같은 것일지언정 말입니다.

 

이질성과 동질성이 공존하는 문학작품 속 가족

 

김태용윤성희의 소설은 ‘가족’ 이야기이지만, 이들이 드러내는 ‘가족’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앞에서 나는 제도로서의 ‘가족’을 어떻게 표상하느냐라는 문제가 한 시대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지만, 김태용윤성희처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표상은 서로 다르기 마련입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삶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바로미터로서의 ‘가족’에 주목할 때, 종종 우리는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질성을 외면합니다. 그렇지만 문학이란 그 두 개의 모순된 성질이 충돌 없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까. 최근 신경숙의 소설이 대중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신경숙뿐만이 아닙니다. 하성란이나 조경란처럼 90년대 여성주의 문학을 이끌었던 작가들이 계속해서 ‘가족’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들의 ‘가족’ 이야기는 김태용이나 윤성희로 대표되는 2000년대 작가들과 또 다른 경향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한때 젊은 작가들에 의해 부정의 대상으로 취급되었던 ‘가족’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렇지만 김태용 소설에서 녹색 병으로 되돌아온 아버지가 그렇듯이, 모든 귀환은 차이화로서의 반복이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닙니다. 때문에 다음 글은 어쩔 수 없이 90년대 작가들의 ‘가족’ 이야기가 보여주는 동일성과 차이를 해명하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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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1.김태용


소설가
1974년 서울 출생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5년 「세계의 문학」봄호에 <오른쪽에서 세번째 집>을 발표하며 등단
작품집으로 <풀밭위의 돼지>(2007. 문학과지성사)가 있음

2. 윤성희

소설가
1973년 경기도 수원 출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레고로 만든 집」이 당선돼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으로 『레고로 만든 집』『거기, 당신?』이 있음
2005년 제50회 현대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2007년 제14회 이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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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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