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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비폭력은 폭력의 반대인가?

  • 작성일 2009-09-21
  • 조회수 914


 



폭력은 무조건 나쁜 것인가?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사진 왼쪽)는 20세기를 전쟁과 혁명, 그리고 그것들의 공통분모인 폭력의 세기라고 명명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 혹은 우리의 정치와 일상에서 ‘폭력’은 늘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상수(常數)였습니다. 아무도 ‘폭력’을 좋아하지 않지만, 누구도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고 할까요? 폭력,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대개 총칼로 사람을 잔인하게 도륙하는 액션 영화나 전쟁 영화의 한 장면, 아니 생사를 걸고 주먹다짐을 하는 역동적인 몸짓을 연상하곤 합니다. 폭력에선 항상 피 냄새가 나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였을까요? 어릴 적부터 우리는 ‘폭력’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배웠고, 또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라고 배웠습니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나쁜 일이고, 좋은 사람은 평화를 사랑한다는 논리 말입니다. 나쁜 폭력과 좋은 평화. 이것이 교육을 통해서 우리가 습득하게 된 ‘도덕’의 하나이지요. 그런데 정말 폭력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폭력의 반대말은 평화일까요?

  도심의 집회에 참여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도심에서 개최되는 시위에선 이른바 공권력의 위엄이 공적으로 허용된 폭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폭력을 처벌하겠다고 나선 공권력의 폭력이 처벌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폭력보다 훨씬 심각하고 위협적입니다. 그렇지만 공권력은 자신들의 폭력을 결코 폭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법집행이라고 말하지요. 그래서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대다수는 경찰들이 방송을 통해 법을 집행하겠다고 하면,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언젠가 촛불집회에 참석했을 때 목격한 것입니다. 연일 매스컴을 통해 폭력 시위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을 무렵이었는데요, 시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비폭력’이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물리력을 동원해서 경찰들과 충돌하지 말라는 뜻이었겠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물리력을 동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경찰이 폭력 진압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면 문제가 생깁니다 비폭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시위를 포기하고 자진해산을 하거나 공권력에 의해 허락된 범위 안에만 머물러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시위 자체가 성립되기 어렵지요. 영향력이 전혀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폭력진압을 고스란히 몸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저는 우리가 지켜야 할 비폭력이란 충돌을 두려워하는 전자가 아니라 어떤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겠다는 의연한 후자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 비폭력은 폭력 사용의 여부가 아니라 폭력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법의 원천이 폭력에 있다?

 

           *위사진은 지난 2008년 5월에 열렸던 촛불집회 경찰 진압장면(사진출처:뉴시스)*

 

 아렌트는 폭력과 권력을 구분했습니다.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폭력의 반대 개념은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아렌트는 폭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니까 그 자체로 임의성이라는 부가적인 요소를 내재하고 있는 반면, 권력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행동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그 자체가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권력이 폭력을 사용할 때, 그 권력은 이미 자신의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고, 권력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폭력을 통해서 권력을 만회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기울일 때라는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폭력이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는 이러한 주장은 결국 총구가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총구는 결코 권력을 가져올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폭력은 권력을 파괴하는, 승리할 때조차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그래서 결코 승리했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게임과 같은 것이지요. “테러는 경찰국가가 자신의 아이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할 때, 어제의 사형 집행인이 오늘의 희생양이 될 때 절정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때가 또한 권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다.

  한편 발터 벤야민이라는 철학자는 「폭력비판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폭력을 비판한다는 것은 폭력이 법과 정의와 맺는 관계를 다시 되짚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폭력의 목적이 정당하면 폭력의 수단 역시 정당성을 확보한다.(정의)와 “폭력의 정당한 수단을 통해서만 정당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의 원환적 고리/대립을 단절하는 것입니다. 물론, 벤야민의 궁극적인 질문은 법과 폭력을 대립적으로 보는 시각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법’이야말로 폭력 그 자체이고, 법 자체의 원천이 폭력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알다시피, 법치국가는 법을 통해서 개인이 폭력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이 말은 오직 국가만이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우리는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숱한 폭력을 목격합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폭력을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반면, 시위대의 행동은 ‘법’의 이름을 동원해서 폭력으로 간주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정권이 자주 주장하는 ‘법치’가 ‘폭력’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착각을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법이 곧 폭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심한 비약이겠지요.

 문제는 ‘폭력’의 성격을 구분하는 것일 텐데, 벤야민에 따르면 ‘폭력’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 두 종류는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입니다. 알다시피 ‘폭력’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성격을 띱니다. 이때 폭력의 사용이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것이라면 법 정립적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고,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행사되면 법 보존적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나 파업과 같은 행위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경찰과 검찰 같은 공권력에 의해 행사되는 폭력은 후자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법과 폭력은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관적인 개념인 것이지요.

  ‘폭력’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영문의 소설 「고문하는 고문당하는 자」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문’이라는 이 엄청난 말은 남의 나라 일만이 아니었지요. 고문을 한 사람은 모르겠으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고문을 당한 경험을 간직하고 힘겹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문’의 시제는 여전히 현재형입니다. 정영문의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고문’이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의 위치를 바꿔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꿔놓다니요, 그렇다면 고문하는 자가 더 고통스럽다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소설은 정확하게 이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흔히 ‘고문’이 고문하는 사람의 일방적인 승리로 진행된다고 믿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고문이란 물리력의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존재가 사회적인 약자에게 행하는 극단의 폭력이니까요. 그런데 이 소설에서 ‘고문’을 통해 흐트러지는 건 고문당하는 자가 아니라 고문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지난 며칠 사이 우리는 아무것도 함께 밝혀낸 게 없어, 네가 힘든 것 이상으로 나 또한 힘들어지고 있어, 갈수록 이건 너를 위한, 네게 유리한, 네가 주재하는 고문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그가 말한다.”라는 구절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폭력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을 인정하는 ... ...”

 

  이제, ‘폭력’에 관한 두 편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먼저 살펴볼 소설은 정찬(사진 왼쪽)의 「희생」(《창작과비평》 2007년 봄호)입니다. 이 소설은 중년의 한 남자가 20년 만에 옛 애인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열정과 수난의 시대를 살아온 두 남녀가 국가권력의 폭력 때문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그렇지만 편지의 발신자인 여자는 이미 고인이 된 상태이기에 ‘만남’이라는 표현을 쓰기가 적절하지 않은, 그런 사건을 담고 있는 소설입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은 ‘그리움’으로도 쉽게 견디기 어려운 꽤 긴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편지라는 형식으로나마 만나게 되는 것은 이별이 그들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날 한 통의 편지를 통해 옛 애인이 남자를 정릉의 옛집으로 초대를 합니다. 그들에게 그곳은 쉽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공간입니다. 그러나 남자가 옛집에서 만나게 되는 건 편지의 발신자가 아니라 그녀의 딸 강영서입니다. 노동운동의 현장에 투신하고 있었던 젊은 날의 남자로 인해서 여자는 경찰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여자는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성폭행을 당해 딸을 낳았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의사가 되었는데, 그녀는 남자가 자신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엄마의 배려로 우연히 읽게 됩니다. 그리곤 죽음을 목전에 둔 어느 날 옛사랑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기게 되는데, 그 편지가 바로 남자가 20년 만에 받게 되는 편지였던 것이지요.  

 

 

  폭력의 모든 희생자는 여성적 존재예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는 아이처럼, 근원적 폭력을 통과함으로써 여성적 존재라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거예요. 저는 여성의 본질을 슬픔이라고 생각해요. 희생자의 본질은 슬픔이에요. 슬픔은 고통과, 고통이 불러일으키는 원한을 정화해요.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폭력에 대한 분노를 지운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분노와 원한은 달라요. 폭력에는 분노해야 해요. 폭력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을 인정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에요. 그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 슬픔이에요. 분노가 또 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지요.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를 보세요. 예수가 가시면류관을 쓴 순간 그는 여성적 존재로 변화했어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적 존재로 변화했어요. 그 여성적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의 눈물이 세상을 적셨어요. 그러니 세상이 아름다울 수밖에요.

 

 

  편지 속의 여자는 ‘여성’을 운명적인 희생자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이때의 ‘여성’이란 생물학적인 성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희생자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녀는 모든 여성, 그러니까 모든 희생자에게는 슬픔의 정념이 깃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사진작가가 된 남자에게서도 슬픔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슬픔이 고통과 원한을 정화한다고 믿지요. 여자가 원하지 않은 임신을 통해 갖게 된 아이를 낳은 것은 슬픔 때문은 아니었지만, 슬픔이 분노나 원한이 또 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한다고 믿는 한 그녀는 슬픔의 힘을 믿는 평화주의자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폭력에 대해 용서나 화해, 비폭력만을 강조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시위 현장에서 종종 목격하듯이, 우리는 폭력을 나쁜 것으로 몰아세우면서 비폭력을 대안으로 내세웁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오해와 달리, 비폭력이란 충돌을 회피하고 폭력을 용서하는 태도가 아니라 어떤 폭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공격적인 의지를 표명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 대항해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폭력에 대한 검열이 아니라 비폭력을 통해서 폭력을 무너뜨리는 싸움이 필요합니다.

  여자는 폭력으로 인해 생겨난 분노와 원한이 또 다른 분노와 원한, 그리고 폭력으로 되갚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가 뱃속의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은 것도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테지요.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청춘이 통과했던 1980년대의 한국 사회도 그랬어요. 수많은 청춘들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어요.”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요. 수배에서 해제된 남자가 결핵을 앓으며 깨달은 것 역시 여자와 비슷합니다. “깊은 상처가 몸속에서 생명체처럼 숨 쉬고 있었다.”라는 건 상처가 생명체의 진원지이기도 하다는, 좀 더 비약한다면 모든 생명은 상처와 더불어 태어나고, 상처를 껴안고 살아간다는 주장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슬픔의 아름다움을 믿습니까? 미학적인 인간들은 이 테제를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방어적인 폭력도 있고, 나아가 법 정립적 폭력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폭력이 배태한 슬픔에서 아름다움만을 읽으려는 것은 지나치게 미학적인 태도입니다. 설령 그것이 문학의 운명 가운데 하나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몇몇 예외적인 인간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폭력의 희생자인 ‘여성’이 되고 말 것입니다. 폭력은 반성이나 성찰을 모르니까요. 그때도 여전히 우리는 세상이 슬픔으로 인해서 반짝인다고 말해야 할까요?

 

‘복수’를 정조준하며 살아온 노인의 이야기

 

  손홍규(사진 오른쪽)「최후의 테러리스트」(《작가세계》 2007년 봄호) 80년 광주에서 아들을 잃은 한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정찬의 「희생」처럼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의 상흔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가는가를 보여주지만, 이 소설은 폭력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정찬 소설의 주인공과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아들이 죽은 후 노인은 아들의 복수를 다짐하며 학살자를 암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암살’이라는 말이 좀 살벌한 느낌을 주지만, 실상 노인의 암살계획이란 웃음의 연속입니다. 그는 매일같이 80년 광주항쟁 당시 학살을 지시한 권력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살해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지요. 그는 먼저 청계천에서 대검을 구입한 후, 아들의 복수를 다짐하며 그것을 머리맡에 놓아두고 잠을 잤는데, 하루는 연탄가스에 온 가족이 질식되어 그만 아내를 잃고 맙니다. 다음으로 그는 저격을 위해 총을 구입합니다. 그렇지만 총을 메고 전직 대통령이 기거하고 있는 백담사에 침입하기 위해 산을 헤매다가 조난을 당하고 그 과정에서 총마저 잃어버리고 맙니다. 백담사 습격에 실패한 후 노인은 태권도장에 다니며 무술을 익힙니다. 액션 영화의 킬러들처럼 화려한 무술로 적을 살해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이를 잊고 무리를 한 노인은 그만 허리에 심각한 부상만 입게 됩니다. 이른바 노인의 암살계획이란 늘 이런 식으로 끝나고 맙니다. “박이 날마다 윤을 내고 날을 세운 것들이다. 한 사람이 반평생 가까이 끌어안고 살기에는 조금 벅찬 것들이었으나 박은 용케도 견뎌왔다.”라는 진술은 아들을 죽인 자들을 살해해야 한다는, 복수에 대한 신념으로 평생을 살아온 노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전직 대통령이 백담사에서 내려와 연희동에 머물자 노인의 관심 역시 그곳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 무렵 노인은 태권도장에 다니면서 불심검문을 당하더라도 흉기로 간주되지 않을 무기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고, 그러다가 ‘젓가락 던지기’라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에 이릅니다. 보잘 것 없는 젓가락도 내공의 소유자가 휘두르게 되면 치명적인 살상용 무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젓가락 던지기 연습에 몰두하고, 마침내 젓가락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어떻게 불심검문을 피해 연희동에 들어갈지, 아니 전직 대통령에게 젓가락을 던져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거리까지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만이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세월은 노인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환갑을 넘긴 노인은 젓가락을 서너 번 던지면 손이 떨려서 젓가락을 제대로 쥘 수도 없을 만큼 늙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젓가락을 던질 힘이나마 남아 있을 때 복수를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연희동 근처의 대학을 통과해서 전직 대통령의 집에 접근하는 것을 결행합니다. 과연 그의 거사는 성공할까요? 아닙니다. 그는 때마침 김일성 조문파동 때문에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교내를 수색하던 전경들에게 체포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무기인 젓가락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형사가 사준 짬뽕을 먹다가 쓰러진 그는 자신이 위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어제 처음으로 그걸 가방에서 꺼냈으나 누구를 죽여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죽음이 임박하자 죽여야 할 사람이 너무 많이 떠올랐다. 아니, 단 한 사람도 죽일 수가 없었다. 정조준만 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목표물을 맞히기 위해서는 침착하게 오조준을 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권총은 녹슬어 있었다. 탄환들은 뇌관이 떨어져나가도 그 안의 장약은 흔적도 없었다. 쓸모없는 권총을 품고 생의 마지막 하루일지도 모르는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쓸쓸해졌다.

 

 

  자식의 죽음 이후 평생을 ‘복수’를 정조준하며 살아온 한 노인이 죽음을 예감하는 순간 ‘복수’의 대상을 잃어버리는 장면입니다. 사격에서 오조준은 일종의 편법입니다. 궁사들이 과녁을 맞히기 위해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계산하며 정조준과 오조준을 왕복하듯이, 명사수가 되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오조준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정조준을 할 때 우리는 대상에 집중하지만, 사수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비단 표적이 아니라 그것이 놓여 있는 주변의 움직임입니다. 오차 범위를 계산한 오조준만이 과녁에 정확하게 꽂히기 마련입니다. 아들의 죽음에 눈이 멀어버렸던 노인은 이 오조준의 미학을 몰랐기에 평생 자신의 삶을 탕진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 소설이 말하려는 게 평생 정조준만으로 살아온 노인의 어리석음은 아닙니다. 정조준으로 살아야 했던 세대가 있는가 하면, 오조준을 통해서 과녁에 접근하는 세대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조준이 부정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평가하고 지나가기엔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아들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이 한 가족의 내면에 깊게 각인시켜 놓은 폭력의 흔적이 너무 깊고 예리합니다. 이 노인에게 슬픔이 있기에 세상이 아름답다는 감성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진정한 비폭력

 

  아렌트의 말처럼 폭력 행동은 수단-목적 범주에 의해 지배됩니다. 그렇지만 최근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폭력’의 기원은 개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들이지요. 말하자면 그것들은 법과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진 행위들입니다. 우리의 불행한 역사는 그 폭력이 개인들의 삶에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떤 면에서 문학은 이 폭력의 상흔을 증언하는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록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으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마저도 쉽게 잊히기 마련이니까요. 그렇지만 폭력의 반대가 비폭력이라는 상식적인 믿음에는 다시 한 번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진정한 비폭력이란 폭력을 두려워하여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상식적인 눈으로 보면 가장 폭력적인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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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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